열국지 [列國誌] 799
■ 3부 일통 천하 (122)
제12권 사라지는 영웅들
제 14장 의협(義俠)의 길 (4)
진소양왕(秦昭襄王)은 이제 거칠 것이 없었다.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아니, 그것은 엉뚱한 생각이 아니라 애초부터 자신의 꿈이었다.
'오늘날 모든 나라가 다 왕(王)이라 자칭하고 있다. 내가 과연 이들과 동격으로 왕호(王號)를
사용하는 것이 합당한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진소양왕의 결론이다.
'천하를 호령하고 있는 내가 어찌 다른 나라들과 똑같이 왕(王)이라 할 수 있겠는가.
왕을 다스리는 왕. 나는 제왕(帝王)이라야 맞지 않겠는가.'
이리하여 마침내 진소양왕(秦昭襄王)은 자신에 대해 제왕이라는 칭호를 쓰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었다.바로 제(齊)나라였다.
'지금 천하를 양분하고 있는 것은 우리 진(秦)나라와 동방의 제(齊)나라다. 만일 내가 제왕(帝王)을
자칭하면 제나라는 반드시 다른 나라와 연합하여 우리나라를 칠 것이다.'
그래서 먼저 제(齊)나라의 양해를 구할 필요가 있었다.'어떻게 하면 제나라를 설득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진소양왕(秦昭襄王)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함께 제왕이라고 칭하면 되지 않겠는가.
즉시 제(齊)나라로 사자를 보냈다.오늘날 모든 나라가 서로 왕(王)을 자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천하를 호령하는 것은 진(秦)나라와 제(齊)나라뿐입니다.
그러므로 과인은 지금부터 서제(西帝)라 칭하고 서방의 주인이 될 작정입니다.
제왕께서도 동제(東帝)라 칭하고 동방의 주인이 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리하여 진과 제나라가 천하를 똑같이 나누어 다스립시다.
제민왕(齊湣王)으로서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뜻밖의 제안이었다.
구미가 당기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운 마음이 일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공연히 제왕(帝王)이라 칭했다 모든 나라로부터 지탄을 받지나 않을까?'
제민왕이 뭐라 답변을 해줄지 판단하지 못하고 있을 때 마침 연(燕)나라에서 소대(蘇代)가 왔다.
제민왕은 소대(蘇代)를 보자 반가이 맞아들인 후 물었다.
"진왕(秦王)이 사자를 보내 함께 제왕의 칭호를 쓰자고 제안해왔는데, 선생은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오?"
소대(蘇代)는 깜짝 놀라더니 대답했다."전혀 예상치 못한 것을 하문하시니 당혹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모름지기 화(禍)라는 것은 언제나 서서히 닥쳐오게 마련입니다. 이번 일이 바로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왕께서는 일단 진왕(秦王)의 청을 수락하십시오. 그러나 즉각 제왕(帝王)의 칭호를
사용하지는 마십시오.""그게 무슨 소리요?""일단은 수락하여 진왕(秦王)으로 하여금 제왕의 칭호를
사용하게 하되, 그 결과를 지켜보시라는 뜻입니다. 만일 진왕이 제왕을 자칭하여 천하가 비웃고
증오하면 왕께서는 제왕의 칭호를 쓰지 않으면 되는 것이고, 천하가 조용하면 그때 가서 사용해도
늦지 않습니다.""묘책이오. 선생 말씀을 들으니 모든 시름이 일시에 씻겨져 나가는 것 같구려."
제민왕(齊湣王)은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그러나 아직 소대(蘇代)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끝나지 않았다.그는 제민왕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런데 한 가지 왕께 여쭈어볼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이오?""왕께서는 정말로 제왕의 칭호를 사용하고 싶은 마음이 있으십니까?"
"솔직히 말하면 나도 제왕이라 칭하고 싶소.""그렇다면 또 한 가지 묻겠습니다. 만일 천하에 동제,
서제 두 제왕이 있다고 한다면 왕께서는 천하 사람들이 진(秦)나라를 더 극진히 받들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제(齊)나라를 더 극진히 받들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제민왕(齊湣王)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아무래도 진(秦)나라가 강성하니
그쪽을 더 받들겠지요.""다시 묻겠습니다. 제나라가 제왕의 칭호를 포기하면
천하 사람들은 진나라를 사랑하겠습니까, 아니면 제나라를 더 사랑하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아마도 모든 나라가 우리 제(齊)나라를 존경하고 진(秦)나라에 대해서는 증오할 것이오."
"바로 그것입니다. 함께 제호(帝號)를 쓰면 천하는 진나라에 귀속되고 끝내 제나라는 없어질 것이요,
제호를 쓰지 않으면 천하는 제나라를 중심으로 규합하여 진나라에 대해 저항할 것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왕의 판단 뿐입니다."그제야 소대의 말뜻을 알아들은 제민왕(齊湣王)은
고개를 깊이 숙였다."선생의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다음날, 제민왕(齊湣王)은 진나라 사자를 불러 제왕 칭호를 쓰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사자가 돌아가자 그는 곧 그 제호에 대한 일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한편 진소양왕(秦昭襄王)은 제민왕이 제왕의 칭호를 쓰기로 동의했다는 말을 듣고
즉시 자신을 제왕이라 칭했다.- 나는 서제(西帝)다.
그러나 얼마 후 제민왕(齊湣王)이 여전히 왕으로 자처하는 것을 보고는 사세가 자신에게
불리해 질 것이라 여기고 황급히 서제(西帝)의 칭호를 취소했다.
BC 288년(진소양왕 19년, 제민왕 36년)에 일어난 해프닝이었다.
이 무렵의 천하 판도는 확실히 제ㆍ진 2강(强) 구도였다.
특히 제왕 칭호 사건이 있은 뒤로 제(齊)나라와 진(秦)나라 사이에는 더욱 경쟁심이 생겨났다.
제왕의 칭호만 쓰지 않았을 뿐 모든 것을 제왕처럼 행동했다.이러한 현상은 제민왕(齊湣王) 쪽이 더 심했다.
- 세상을 어지럽히는 나라는 치겠다.존속하느냐, 망하느냐의 싸움을 벌이던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시대였다.
굳이 이런 대의명분을 내걸 필요도 없었건만, 제왕(帝王)인 양 행세해야 하는 제민왕으로서는
일부러라도 이 같은 핑계거리를 만들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800편에 계속
열국지 [列國誌] 800
■ 3부 일통 천하 (123)
제12권 사라지는 영웅들
제 14장 의협(義俠)의 길 (5)
BC 286년(제민왕 38년), 제(齊)나라는 송(宋)나라를 쳤다.그냥 공격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아예 멸망시켜 버렸다.이것이 전국시대 들어 제법 이름난 제후국의 최초 멸망이었다.
송(宋)나라 하면 생각나는 것이 하나 있다.바로 '송양지인(宋襄之仁)' 이다.
어줍지 않은 어짊을 베풀다가 오히려 크게 패배한 경우에 쓰는 말이다.
이것은 송나라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한마디로 대변해주는 말이기도 하다.
송(宋)나라는 은왕조(殷王朝) 후예의 나라다.은나라가 망하자 주나라는 주왕(紂王)의 서형인
미자(微子)에게 황하 근처에 땅 하나를 내주었다.이것이 송나라의 기원이다.
대체로 송나라와 관계되는 일화는 멍청한 이미지를 갖는다.'송양지인(宋襄之仁)' 이 그 대표다.
아마도 이것이 패망국 유민들의 특성일지도 몰랐다.이런 이미지는 '수주(守株)' 라는 일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송나라 사람 하나가 밭을 갈고 있었다.
밭 한 가운데 그루터기 나무(株)가 있어 토끼가 달려가다가 그루터기에 부딪쳐 목이 부러져 죽었다.
그 날 이후로 송(宋)나라 사람은 밭 갈던 쟁기를 버리고 그루터기 옆에 앉아 또 토끼가 달려와
그 나무 밑둥에 부딪치기를 기다렸다.이것을 본 세상 사람들은 송나라 사람을 비웃었다.
<한비자>에 나오는 일화다.한비자(韓非子)는 상앙(商鞅)의 뒤를 잇는 전국시대 사상가 중 한 사람이다.
법가의 대가답게 그는 이 일화를 통해 법 적용에 대한 자신의 사상을 펼쳤다.
만일 옛날 정치 방법으로 지금 세상의 백성을 다스리려 한다면, 이는 모두 토끼를 잡기 위해
그루터기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송(宋)나라 사람의 멍청함과 같다.
이리하여 나온 말이 '수주(守株)' 혹은 '수주대토(守株待兎)' 다.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어 구습과 전례만 고집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로 쓰이고 있다.
송나라의 멸망도 이런 멍청함과 무관하지 않다.당시 송나라의 임금은 송강왕(宋康王)이었다
그는 키가 9척이 넘고 얼굴의 넓이도 1척 3촌에 달했다.힘도 세어 쇠로 만든 갈고리를 손으로
오므리고 펼 정도였다.외양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성격 또한 몹시 거칠었다.
그는 세자인 형을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그는 가까운 제나라 대신 먼 진(秦)나라를 섬기며 온갖 포악한 짓을 서슴치 않았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송강왕(宋康王)은 가죽 주머니에 소의 피를 잔뜩 넣어 높은 장대 위에
매달게 했다.그러고는 그 가죽 주머니를 향해 활을 쏘았다.
화살을 맞은 가죽 주머니에서는 붉은 소 피가 소낙비처럼 쏟아졌다.
송강왕(宋康王)이 좌우 신하들에게 외쳤다.- 과인이 하늘을 쏘아 이겼도다!
그는 또 술을 몹시 좋아해 늘 술에 취해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신하 중 한 사람이 술에 취해 길거리에서 자다가 가죽옷을 잃어버렸다.
송강왕(宋康王)이 그 말을 듣고 신하를 불러 타박했다."아무리 술에 취했다고 자기가 입고 있던 옷을
잃어버릴 수가 있는가? 그대는 참으로 멍청하다."그러자 그 신하가 대답했다.
"옛날 하나라 걸왕(桀王)은 술에 취해 천하를 잃어버렸는데, 그까짓 가죽옷 한 벌 잃어버린 것이
뭐 대단한 일입니까?""옛 책에 '이주(彛酒)' 라는 말이 있습니다. 술을 좋아하면 늘 마시게 되고,
늘 마시면 언제나 취해 있게 마련입니다. 늘 술에 취해 있으면 임금은 나라를 잃게 되고,
필부는 몸을 잃게 됩니다. 그런 사람을 일러 '무이주(毋彛酒)' 라고 합니다."
- 무이주(毋彛酒).
늘 술에 취해 있으면 남는 것이 아무 것도 없게 된다는 뜻이다.일종의 간언(諫言)이었다.
그러나 송강왕은 그때도 취해 있었기 때문에 그 말뜻을 알아듣지 못했다.송강왕(宋康王)은 여색 또한
몹시 밝혔다.어느 날 성밖 상전(桑田)에 나갔다가 뽕 잎을 따는 한 부인을 보았다.
부인의 용모는 절색이라고 할 정도로 아름다웠다.송강왕은 그 날로 뽕나무 밭 옆에 청룡대(靑龍臺)라는
누각을 쌓고 날마다 위로 올라가 여인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어찌 만족하랴.
그녀에 대해 알아보니 한풍(韓馮) 이라는 일반 백성의 아내인 식씨(息氏)였다.
송강왕(宋康王)은 즉시 명령을 내렸다.- 한풍이라는 자에게 가서 아내를 바치라고 하라.
한풍(韓馮)은 어처구니가 없는 가운데서도 아내 식씨에게 물었다.
"왕이 당신을 바치라고 하는데, 당신은 궁으로 들어갈 생각인가?"
식씨(息氏)는 대답 대신 시 한 수를 지어 궁에서 나온 사람에게 주었다.
남산에 새가 있는데
북쪽에 그물을 쳐 잡으려 하는구나.
그러나 무슨 소용이 있는가.
새는 그물 위로 날아가네.
거절의 시였다.
화가 난 송강왕(宋康王)은 식씨 부인을 강제로 잡아 궁으로 끌고 들어갔다.
한풍(韓馮)은 분을 참지 못하고 칼로 자기 목을 찌르고 자결했다.
송강왕(宋康王)은 식씨 부인을 청룡대로 데리고 가 말했다.
"너의 남편은 이미 죽었다. 너는 돌아갈 곳이 없다. 만일 나를 섬긴다면 왕후로 삼으리라."
식씨 부인은 또 시 한 수를 지어 송강왕에게 보였다.
새들도 제각기 짝이 있어
함부로 봉황(鳳凰)을 따르지 않는도다.
내 비록 일반 백성이지만
어찌 왕과 즐거움을 함께 할 수있으리오.
시를 읽고 난 송강왕(宋康王)은 험악한 표정으로 위협했다.
"나를 따르지 않으면 너를 죽이겠다."식씨 부인이 조용히 대답했다.
"왕께서 정히 생각이 그러하시다면 먼저 첩에게 죽은 남편의 영혼을 위로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래야 마음 편히 왕을 모실 수 있겠습니다.""좋다."
송강왕(宋康王)은 기뻐하며 그녀가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허락했다.
식씨(息氏)는 욕실에 가서 목욕재계한 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하늘을 향해 두 번 큰절을 올리는가 싶더니 별안간 난간으로 달려가 청룡대 밑으로 몸을 던졌다.
송강왕(宋康王)이 놀라 아래로 내려갔으나 식씨부인은 이미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었다.
식씨(息氏)의 치마끈에는 깨알같은 글씨가 적힌 작은 천조각 하나가 매어져 있었다.
첩의 마지막 소원입니다.이 몸을 남편 곁에 묻어주십시오.송강왕(宋康王)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소리쳤다."이 계집을 남편 곁에 묻지 말고 동쪽과 서쪽에 따로 묻어라."
식씨(息氏)를 땅에 묻고 난 다음날이었다.
하룻밤 사이에 한풍과 식씨의 무덤 곁에 커다란 가래나무가 한 그루씩 생겨났다.
그런데 그 가지들이 서로를 향해 길게 뻗어 마치 남녀가 끌어안은 듯 뒤엉켰다. 뿐만 아니다.
그 가지 위에는 원앙새 한 쌍이 날아와 앉아 서로 목을 비비며 슬피 울어대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보고 탄식했다."저 새들은 한풍(韓馮) 부부의 원혼이 틀림없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그 두 나무를 '상사수(相思樹)' 라고 했으며, 송강왕에 대해서는 '걸송(桀宋)'
이라고 불렀다.옛날 하나라 폭군 걸왕(桀王)과 같이 무도하다 하여 그런 별칭을 붙였다.
801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