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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켈러 창세기 9장 1~17절 설교 2000년 - 팀 켈러 창세기 9장 1~17절 설교 2000년
오늘은 우리가 창세기 초반부를 살펴 보는 시리즈 중 마지막 날인데요, 지난 주에 이어 노아와 홍수 관련해서 살펴 보겠습니다. 마침 크리스마스 시즌도 다가오고 있습니다. 몇몇 분들은 노아와 홍수 이야기가 크리스마스와는 맞지 않는다고 하시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진행하면서 크리스마스와 잘 맞는 주제라는걸 보여 드리겠습니다.
홍수는 무엇에 관한 것이죠? 제가 창세기 시리즈 중 자주 PBS(방송국) 빌 모이어스의 창세기 특집 방송을 언급 했었는데요. 여러 주요 스토리들의 전문가 그룹들을 모아 놓고 토론하는 중에 홍수와 관련해서 논의한 전문가는 유명한 흑인 설교가이자 교수인 새뮤얼 프록터였습니다. 그들이 프록터에게 이 스토리는 무엇에 관한 것이냐고 물었을 때, 그는 노아와 홍수 이야기는 세컨드 찬스와 새로운 시작에 관한 것이라고 답합니다. 정확한 답입니다. 홍수는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헌신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시작을 주실 준비에 관한 것입니다. 세컨드 찬스를 주실 준비에 관한 것이죠. 1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프록터가 말한 세컨드 찬스에 대한 주제가 1절에 잘 나타나 있죠.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어딘가와 비슷하지 않나요?
비슷합니다. 우리가 살펴 봤던 창세기 앞부분에서 하나님께서 아담이브에게 하신 말씀과 아주 비슷합니다. 이건 마치 하나님께서 연출가가 되셔서 오케이! 처음부터 다시 한번 시작 해봅시다 라는 거나 다름 없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어떤 면에서 이 구절이 우리가 어떤 삶으로 불러 들여졌는지 더 디테일하다는 것입니다. 아담이브가 그랬듯이 노아와 가족들은 모든 인류의 자리에 서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와 가족들에게 하시는 말씀은 곧 모든 인류에게 하시는 말씀인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굉장한 3가지 관계의 삶 속으로 부르십니다. 포괄적인 내용인데 어떤 의미에서는 이 3가지 관계유지가 없다면 완전한 인간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과도 같습니다.
그 3가지 관계는 땅과의 관계, 땅의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 그리고 온 땅의 주이신 분과의 관계입니다. 땅과의 관계는 생태의 이슈를, 땅의 사람들과의 관계는 정의의 이슈를, 하나님 자신이신 온 땅의 주이신 분과의 관계는 은혜의 이슈를 가져옵니다.
생태, 정의, 은혜! 아주 포괄적입니다.
이러한 관계들이 서로 어떻게 작용하며,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래 우리가 살도록 창조하신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자, 이제 봅시다.
우선 첫 번째, 하나님은 우리를 땅과의 관계로 부르십니다. 2,3절을 따로 떼서 이 둘만을 본다면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물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것들은 너희의 손에 붙였음이니라."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이 부분만 따로 본다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모든 권한을 주시며 자연을 너희 마음대로 해도 좋다 라고 하신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물론 실제로 인간은 자연에 대해서, 자연 안에서 엄청난 량의 권한이 있음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균형이 있으며, 완벽한 균형입니다.
10절에 보시면,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희와 "너희와 함께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한 모든 새와 가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 곧 땅의 모두 짐승에게니라.", 또 12절에 보시면 "내가 나와 너희와 밑 너희와 함께 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또 16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모든 육체를 가진 땅의 모든 생물 사이에"와 같이 되풀이됩니다.
뿐만 아니라 13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한걸음 더 나가십니다.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와 세상(earth: 땅) 사이의 언약의 증거니라."
참으로 요상한 점이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관계 일 때가 아니고서는 절대 누군가를 언약관계로 부르시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언약관계로 부르실 때는 언제나 구원관계를 맺으실 때 뿐입니다. 너는 곤란 중에 있다. 너는 지금 악과 죄로 인해 곤란한 상태다. 그러므로 내가 너와 언약관계를 맺음으로써 너를 죄로부터 구원하겠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근데 지금 하나님께서는 그 언약관계를 동물들과 땅위의 모든 생물들과 맺고 계실 뿐 아니라, 땅 그 자체하고도 맺고 계십니다. 물리적인 환경 그 자체하고 말이죠.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대체 무슨 죄로부터 세상(땅,자연)을 구원하고 계신걸까요?
나무, 바다, 동물들의 죄는 당연히 아닙니다. 이 부분은 노아가 방주를 나오는 장면인 창8장20~22절에서 설명됩니다. 21절 중"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달리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땅과 모든 땅 위의 생물을 구원관계로 부르실 때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께서는 땅과 생물들을 우리의 죄, 인간의 죄로부터 구원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로마서8장에서 바울이 다음과 같이 집어내고 있습니다 19절 "피조물(자연, 땅)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21절"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리에 이르는 것이니라." 22절"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우리는 여기서 모든 피조물이 현재까지 우리의 구원을 위해 탄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전반적으로는 우리의 죄로 인해 자연이 잘 돌아갈 수 없다는 뜻 입니다. 또한 인간이 자연을 착취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무슨 얘긴가요? 이건 자연에 대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현실적인 접근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2,3절을 보시면 자연을 전혀 낭만주의 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1990년대의 생태학은 밤비엄마 이론을 없애 버렸습니다. 밤비엄마 이론이 뭔지 아십니까? 밤비를 기억하시나요? 영화 밤비요. (디즈니의 꽃사슴밤비) 사냥꾼들이 나타나서 밤비엄마를 쏩니다. 당시 7살 가량이던 우리는 영화를 본 후 사람은 나쁜편 자연은 좋은편이라 생각하게 됩니다. 사냥은 나쁘고 사슴은 좋다. 그러므로 당연히 사슴사냥을 멈추게 됩니다. 그 결과로 사슴들이 너무 많아져서 굶어죽기 시작합니다.
즉, 2,3절은 현실적입니다. 1990년대의 생태학 연구는 있는 그대로 자연은 안정적이며 한 개체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 전체적인 자연의 생태보존에 해가 된다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모든 자연의 균형은 어떤 면에서는 동식물에 적대적인 동시에 어떤 면에서는 동식물에 친화적인 겁니다. 완벽한 한가지 균형은 없습니다.
또한 인간이 없는 상태의 완벽한 균형도 없습니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니까요.
자연은 좋고 인간은 나쁘다는 건 루소의 낭만주의입니다. 성경적으로 상식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겁니다.
나는 자연이 본래 어때야 하는지 알고 있다. 나는 자연을 구원할 것이며, 부활 시킬 것이다. 나는 자연을 새롭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를 땅과의 개인적인 관계로 부르고 있는겁니다. 하나님이 그러셨듯이요.
3가지 방향으로 생각해보십시오. 창조,타락, 구원입니다. 창조로 인해 모든 것이 창조됩니다. 인간의 죄로부터 오는 타락으로 인해 모든 것이 타락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으로 인해 모든 것이 구원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만 부활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자연 모든 것을 부활시키십니다. 우리에게만 새 육신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자연 모든 것에도 새 지체를 주십니다.
단지 인간만 개조하시는게 아니라 모든 것을 개조하시는 겁니다.
이것은 크리스마스의 축소판입니다.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오셨습니다. 기독교 구원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땅에서 천국으로 부르시는 것이 아니고 천국을 우리가 있는 땅으로 가져오시는 것입니다. 천국이 옴으로서 땅의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것이죠, 다른 종교들에서의 구원과는 완전히 다른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에 전념하고 계신겁니다.
여러분이 창조, 타락, 구원의 교리를 믿는다면 여러분은 땅과 모든 생물들과 다음과 같은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첫째 창조, 시편19장입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누군가는 이건 그냥 수사학적 표현이고 시 일 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그래선 안됩니다!
폭포소리를, 음악을, 바다의 목소리 파도소리를 들어보십시오. 별을 보십시오. 성경은 그들에게 목소리가 있다고 가르칩니다. 여러분이 철학원론에서 무얼 배웠든간에 여러분은 그걸 보면서 하나님은 존재하는구나! 라고 할겁니다. 왜 그렇게 느낄까요? 뭔가 아름다운 것을 볼 때 여러분은 여긴 뭔가 의미가 있어 이건 단순한 우연은 아니야 라고 느낍니다. 성경은 그 이유가 창조물들이 여러분께 말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별들, 폭포, 동물들, 나무들 그들은 목소리가 있고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고 있습니다. 창조물의 관리자, 자연의 관리자로서 여러분의 임무는 그 목소리들이 멈추지 않게 하는겁니다. 그들이 그들 자체로 유지되게 하는겁니다.
둘째는 타락입니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 기독교의 죄의 교리는 우리에게 자연을 존중하고 영예롭게 생각할 원천을 제공합니다. 자연은 허상일 뿐이라는 동양사상과도, 우리 자신을 위해서 자연을 돌봐야한다는 서양의 실용주의와도 확연히 다릅니다.
이건 그것들보다 훨씬 깊습니다. 이건 나무,바다, 동물을 그 존재 자체로 영예롭다 하게 합니다. 그게 다가 아닙니다. 우리로 하여금 자연을 존종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과 달리 우리는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연을 우리의 죄로부터 구원하셔야 한단 말은 우리가 개나 고양이나 나무나 바다를 볼 때 '너희가 나보다 낫다. 너희는 주께 순종했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구나' 라고 해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존중과 명예가 있는겁니다.
C.S.,루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나무나 바다나 동물은 창조의 관점에서는 인간에게 형제와 같다. 언젠가 따라 잡아야 할 앞서 있는 형제. 언젠가 우리가 자연과 같이 순종할 수 있게 되면, 그 때가 영광이 나타날 때 일것이다.
이게 바로 로마서8장이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발 끝으로 서서 우리가 따라 잡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우리답게 되기를 기다리는 겁니다.
첫째 창조교리는 우리가 땅과 자연의 관리자로써 그들의 목소리가 멈추지않고 하나님께 영광돌리게 해야합니다. 둘째 죄의 교리는 우리가 자연을 내려다 보지 않고 올려다보며 존중하고 영예롭다 하게 합니다. 우리가 자연에 대해 엄청난 힘이 있음을 압니다. 고양이가 나에게 할 수 없는 일을 나는 고양이에게 할 수 있는 반면, 존중하고 영예롭다 해야 합니다.
근데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는 앞으로 올 구원을 기대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연의 상처를 할 수 있는데까지 치유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시편 96장에 있습니다. 11절부터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며 바다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외치고, 밭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즐거워 할지로다 그 때 숲의 모든 나무들이 여호와 앞에서 즐거이 노래 하리니, 그가 임하시되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 임이라". 지금 나무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것 같은가요? 지금 나무들이 노래하고 있는것 같은가요? 시편 19장이 그들이 이미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하지않나요? 지금 하나님께 찬양돌리고 있는 점이 그들의 아름다움 아닌가요?
그분이 돌아올 때의 그들을 볼 때까지 기다리십시오. 모든 것이 회복됐을 때의 그들을 볼 때까지 기다리십시오.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겁니다. 그 때 그 모든 것의 일부이고 싶지 않습니까? 그 때 그들과 함께 춤추고 노래하고 싶지 않나요?
그들의 상처를 치유하십시오. 우리에게 알려주는 하나님께서 자연과 언약관계를 맺으신다는 의미는 거긴 더 이상 부자도, 강자도, 균형도 없다는 겁니다. 이것이 기독교 복음에서의 생태적 관리자의 기초입니다. 실용주의, 비현실주의, 낭만주의 등 다른 어떤 종류의 철학도 찾지 마십시오. 어디에도 이런 가르침은 없습니다.
(**생태적 관리자는 원문의 ecological stewardship의 번역인데, steward란 manager같이 다스리고 군림하는 의미의 관리자보다는 비행기의 스튜어드, 스튜어디스와 같이 섬기면서 관리한다는 의미가 더 가깝습니다.)
자, 지금까지 본 것 같이 첫번째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건 땅과의 관계로 입니다.
두번째는 우리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로 부르십니다. 정의의 이슈입니다. 이것이 언급되는 곳은 5,6절입니다. 근데 아십니까? 여기서 많은 사람들은 요점을 놓칩니다. 간단히 얘기 하겠습니다만, 상당히 혼란해집니다. 자주 이 부분이 현대 정치적, 사회적 논란으로 혼란 스러워집니다.
"내가 반드시 너희의 피 곧 너희의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저는 이 구절들이 사형제도를 정당화하는 것에 쓰이는걸 봤습니다. 또한, 이 구절들이 사형제도 반대에 쓰이는 것도 봤습니다. 저는 이 구절들이 정당방위를 정당화하는 것에 쓰이는걸 봤으며, 사법소극주의의 정당화에도 쓰였습니다.
저는 이 구절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정부방침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므로 정부방침이나 사법제도에 적용되는 것은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 구절들은 하나님의 관점을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각각의 인간들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특별하게 지어 졌으므로, 각각의 인간이나 그들의 삶은 그들이 좋거나 나쁘거나 똑똑하거나 그리 똑똑하지 않거나 강하거나 약하거나 부자나 가난한자나 남자나 여자나 젊거나 늙었거나 어떤 냄새가 나거나 어떤 행동을 하거나 어떻게 보이는가와 상관 없이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명예와 영광과 존엄성을 각각 모든 인간에게 심었으므로 누군가 손을 들어 그들의 목숨을 해치려 한다면, 누군가라도 다른 누군가의 목숨을 해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공격을 하나님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여기시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명예, 영광에 대한 공격으로 여기시겠다는 뜻입니다.
5절에서 인간의 생명은 너무 소중하므로 어떻게 할지는 묻지도 말라 하십니다. 동물이 인간을 죽이면 그 동물에게서 생명의 피를 찾을건데 어떻게는 묻지 말라십니다. 어떻게 하실지가 궁금하기도 하지만 요점은 어떻게가 아닙니다. 요점은 인간 생명의 가치에 있습니다. 믿는 자든 아니든 도덕적이든 아니든 유대인이든 크리스챤이든 힌두든 이슬람이든 상관 없이 모든 인간 생명은 하나님께 너무도 소중하다십니다.
실제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진화는 내 뜻이 아니라고 하시는 겁니다. 당연히 자연에서는 강자가 약자를 잡아 먹지만, 내 뜻은 아니다. 내가 디자인한건 그게 아니다. 여기서 지난주에 살펴봤듯이 자연 외부에서의 기준이 나오는데 이는 우리가 자연에서 지극히 당연한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보게 도와줍니다.
니체가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무에서 와서 무로 돌아간다.' 만일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면, 이 세상과 자연이 존재하는 전부라면 너의 탄생은 우연이었고 너의 목적지는 무 라고 하는 것입니다. 탄생이 의미 없고 목적지도 의미 없다면 인생자체가 의미 없음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자연이 존재하는 전부지만 인간 생명은 가치있다고는 하지마십시오. 인간 생명은 가치 있다, 인간 생명에는 존엄성이 있다. 인간 생명은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먹는 것과는 다르다,인간 생명은 돌과는 다르다고 하지 마십시요. 라고 니체가 외칩니다.
근데 여기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게 있습니다. 인류 정의의 근원을 찾으려는 세속적인 노력에는 실제로 많은 문제점들이 있습니다만, 여길 보시면 모든 문제가 사라집니다. 두가지 적용 사레를 보여드리고 마지막 세번째 관계로 넘어가겠습니다.
지난 몇 년간 크리스챤들과 대화하면서 당신이 크리스챤이든 아니든 또는 중간 어딘가에 있든 상관 없이, 당신이 영적 관계의 어디에 있든 당신이 영적 순례의 어느 지점에 있든 상관 없이 모든 이들에게 이 구절(5절)이 당신에게 왜 중요하며 어뗳게 당신과 연관되어 있는지 보여주려고 노력해왔습니다.
우선 크리스챤들에게 말하고자 합니다. 1. 우리는 구제 헌금을 해야합니다. 첫째 이유는 이세상도 중요합니다. 물리적 세상도 중요합니다. 재정도, 물리적인것도, 물질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이유는 우리는 실질적인 도움을 줄 때 대상을 구분하지 말아야하기 때문입니다. 리디머교회와 주변에서 보면 우리는 크리스챤으로서 당연히 기쁜 마음으로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믿도록 초대합니다. 근데 실질적인 도움을 줄 때 절대로 믿는자와 아닌자를 구분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이 구절은 믿든 아니든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희생적인 섬김을 행해야 합니다. 즉, 그들이 우리와 같은 믿는자든 아니든 구분없이 도와야합니다. 어떤 우월성도 존재 할 수없습니다.
그게 우리가 구제하는 이유입니다. 사람들의 물질적인 필요에 따라 행하는겁니다. 우리 주변 community에서 찾을 수 있는 모든 도움이 필요한 대상에게요.
크리스챤들에게 말하는 2. 입니다. 조금전 약간 우쭐해하지 않았나요? 제가 우리 크리스챤들이 생태적 관리자의 기초이다 했을 때 우리가 인종간정의, 사회적정의, 국가별정의와 평화의 정의를 위해 일하는 기초라고 했을 때 우리가 인류를 위해서 끊임없이 봉사하고 노인을 공경하고 아픈이와 장애인을 돌보는 일의 기초라고 했을 때요. 여러분은 오! 예스! 라고 하며
평균적인 뉴욕커들은 세속적이며 우리와 같이 도덕적이고 정의감있지 않다라며 우쭐해하지 않았나요?
제가 비판적이 되보겠습니다. 평균적인 뉴요커들은 여기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마음으로 느낍니다. 인간 생명이 가치있다고요. 평균적인 뉴요커는 매우 너그롭고 정의에 대해 걱정하고 그들은 성경에 대한 지식이 없음에도 인간 생명의 가치를 느끼고 알고 있는 겁니다.
근데 여러분이 가진 근거를 보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 형상의 교리를 알고 있고, 하나님이 땅과 모든 생물과 맺은 언약도 알고, 이 모든 걸 다 알면서 사람들의 소중함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우릴 위해서 하시는 일도 알고, 우릴 위해서 해오신 일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여러분이 자신의 커리어에 집중하면서 자선행사 여기저기에 조금씩 돈을 던져넣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보다 모르는 사람들에 비해서 여러분에게 그 행동들에 대해서 훨씬 더 많이 책임을 물으실겁니다.
존 칼빈은 이 구절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을 행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예외 없이 모두에게요. 근데 주위의 우리 동료 인간들을 돌아보면, 그들 자신의 가치로 판단할 때 그럴 가치가 없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들은 이럴 때 최선의 방법을 가르쳐주는데 우리는 절대 사람들을 그들 자신의 가치로 판단해서는 안되며 그들에 비친 우리가 당연히 명예와 사랑을 드려야할 주님의 이미지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도움이 필요한 어떤 누구라도 거절할 이유가 없는겁니다.
당신이 그가 경멸스럽고 가치가 없고 냄새도 심합니다 라고 할 때도 그에 비친 하나님의 형상을 보고, 그에게는 마땅치 않으나 햐나님께서 받기에 마땅하신 것을 드려야하는 겁니다. 대단한거죠. 그렇게 살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두번째 관계는 사랑과 정의로 이루어진 땅 위의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 입니다.
자, 이제 마지막 세번째 관계입니다. 만일 제가 여기서 설교를 끝내면 어떨까요? 어떤분들은 좋은 아이디어라고 할지 모르겠네요.
여기서 설교를 끝내고 여기 누군가가 아! 신나는군요! 나는 생태학적 관리자로 살아가도록 부름받았고, 모든 사람들과 사랑과 정의로 이루어진 관계를 맺도록 부름받았단걸 이해했으니까 이제 나가서 덜 이기적으로 살고 더 참여하며 살겠어 라고 한다면 그는 얼마 못가서 무너져 내리고 말겁니다.
이 기준들은 너무 높으며, 당신은 다른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첫번째,두번째 관계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세번째 관계가 필요한 것입니다.
세번째 관계는 하나님과의 긴밀관계로 부름받은 것입니다. 일반관계가 아니라 긴밀관계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과 기본적인 일반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거나,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믿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일반관계는 성립됩니다. 그들도 여러 방면에서 무의식적으로나마 하나님이 계신 것처럼 살아갑니다. 여전히 일반관계는 맺어지는 거죠.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개인적이고 긴밀한 언약관계를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은혜로써 이 긴밀관계로 부름받습니다. 이 관계에 대해서 무엇을 알게됐나요? 우리는 무지개로부터 배운게 있습니다. 12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와 세우는 언약의 증거(sign)는 이것이니라" 그리고는 문자 그대로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라고 하십니다. Sign이라는 단어는 symbol을 의미합니다. 언약싸인(covenant sign)은 언제나 구원의 symbol입니다. 주님께서 고난받은실 때 우리가 받은 것도 언약싸인입니다. 예수님께서 실제로 말씀하시길 이 잔은 내가 너희를 위해서 하는 일의 싸인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주어진 잔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싸인이며 부서진 빵도 여수님의 죽음에 대한 싸인이고 빵을 먹는 것과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믿음의 싸인입니다.
그러므로 무지개는 네가 필요한 모든 것을 말해줄거다 네가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알려줄거다 무지개는 복음에 대한 모든 것을 알려줄거다 무지개가 곧 복음이다 라고 하시는겁니다. 무지개는 복음의 심볼인 겁니다.
은혜로서 맺어지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무지개가 말해주는 4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번째, 무지개는 하나님의 은혜의 배경을 보여줍니다.
맑은 날에는 무지개를 볼 수 없습니다. 절대 볼 수 없죠! 무지개는 언제나 어두운 폭풍우가 가까이 있을 때 보이죠. 마찬가지로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 우리에게 나쁜 일이 생길 때 하나님의 은혜를 보게됩니다. 더 나은 방식으로 말하자면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서 우리가 스스로의 약함, 부족함, 부정함, 죄, 필요를 볼 수 있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절대 하나님의 은혜를 찾을 수 없습니다.
첫번째로 무지개가 상징(symbol)하는 것은 너희는 결코 맑은 날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찾지 못할 것이다 입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나쁜 일이 생겼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함을 알게되지만, 꼭 나쁜 일이 아니라도 어떤 일이 우리 삶에 일어나야지만 합니다. 하나님의 은헤의 배경은 어떤 일이 일어나서 당신이 스스로의 약함, 부족함, 죄지음을 깨달아야만 하는겁니다.
이와 같이 첫번째 무지개가 보여주는건 하나님의 은혜의 배경입니다.
두번째, 무지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전면적인 약속을 보여줍니다. 이건 참 놀랍습니다! 무지개란 무엇이죠? 중학교에서 배우는 내용인데 기억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네요. 무지개라는 현상은 빛이 비에 반사되어 발생합니다. 햇빛이 비에 반사되는건데 언제나 원형태의 비입니다. 아시죠? 실제 전체 원(circle)을 보려면 하늘에서부터 봐야합니다. 땅에서 보는건 활(bow)형태죠. 우리는 역사속에서 쭉 이것을 레인써클 대신 레인보우라고 불러왔습니다. 보이는 모습이 활의 형태니까요. 근데 여기에 키포인트가 있습니다! 비록 NIV에서는 무지개로 표기했고 구름속에 둔다는 표현대로 무지개를 의미하는건 틀리지 않습니다만 실제 여기 쓰인 히브리원어는 활, 무기인 전쟁활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아시겠습니까? 나는 활을 내려놓았다. 더는 진멸하지 않겠다 라고 하시는겁니다. 새뮤엘 프록터가 이 스토리는 세컨드찬스에 대한 것이라고 한건 맞는 말입니다. 근데 여기서 우리는 세컨드찬스보다 덜하지는 않지만 그보다는 훨씬, 무한대로 더 큰 무언가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왜 그러신걸까요? 나는 활을 내려놓겠다. 나는 땅을 파괴하지 않겠다. 나는 인류를 파멸하지 않겠다. 더는 진멸하지 않겠다. 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번에는, 이제부터는 인간들이 옳은 삶만 살아갈거라고 생각하신 걸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4~6절은 무엇을 말하나요? 세컨드찬스를 받은 사람들이 방주에서 내리는 즉시 하나님은 살인이 있을걸 아시고 대비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렇게까지 순진하지는 않으십니다! 그렇지만 내 은혜의 약속이 얼마나 전면적인지 보여주겠다 하십니다.
나는 활을 내려놓고, 저기에 걸어두겠다. 더이상 심판은 없다. 이건 너희가 나와 맺을 수 있는 관계의 심볼이다. 너희 죄에 대한 더이상의 진멸도 심판도 없다고 하십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이건 전면적인 약속이며, 무지개가 의미하는 뜻입니다. 근데 어떻게 그럴수 있죠? 어떻게 한 쪽이 아직 계속 전쟁 중인데 상대방이 평 화를 선언할 수 있죠? 어떻게 하나님은 저런 전면적인 약속을 주실 수 있죠? 답은 세번째로 무지개가 말해주는 것에 있습니다.
첫번째 무지개는 하나님의 은혜의 배경을 보여주며 두번째 하나님의 은혜의 전면적인 약속을 보여줄 뿐 아니라 세번째 아주 놀라운 하니님의 은혜의 비밀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러실 수 있을까요? 어떻게 그런 선포를 하실까요? 위대한 침례교 목사였던 찰스 스펄젼은 오래 전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십시오. 무지개를 보십시오. 활의 방향이 뒤집어져서 우리를 향한다면 불안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더이상 심판은 없다 진멸도 없다 하셨습니다만 활의 방향이 우리 쪽을 향한다면 늘 언제 핑하고 발사되어 진노, 진멸, 심판이 임할지 늘 무서울겁니다. 스펄젼은 우리는 하나님께서 활을 저렇게 내려놓으신 이유를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활을 저렇게 위를 향하게 두심으로 하나님은 진노의 하나님 심판의 하나님이시기를 포기하신 것이 아니고 진노의 방향을 돌리신 겁니다. 다른 누군가에게로 화살이 향합니다. 어디로 일까요? 무지개에 대한 놀라운 사실 중 하나는 무지개는 언제나 해와 폭풍우의 접촉지점에 생긴다는 점입니다. 해와 폭풍우의 접점, 빛과 어둠의 접점, 자비와 심판의 접점 그 곳이 무지개를 찾을 수 있는 곳입니다.
아까 그 화살이 어디로 향하는지 아십니까? 이사야서 53장에는 우리의 허물 때문에 찔리고 우리의 죄악 때문에 상하는 '그'가 나옵니다. 그에게 화살이 향했습니다. 누굴까요?
에수님의 십자가 위에서 우리는 폭풍우를 봅니다. 왜일까요? 하나님께서는 너무나도 무한히 거룩하시기 때문에 누군가는 죽어야만 했습니다. 또한 우리는 십자가에서 사랑의 하나님을 봅니다. 너무도 무한히 사랑하시기에 그 분의 독생자를 주십니다. 달리 말하면 십자가 위에서 영원한 공의의 폭풍우와 하나님의 사랑의 해가 만남으로서 여러분이 무지개를 갖게되는 겁니다.
여러분이 폭풍우의 중심을 볼 때 마다, 은혜의 무지개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 곳이 예수님께서 가신 곳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진노의 중심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번개를 맞으심으로서 우리는 무지개를 가질수 있었습니다. 그결과는 무엇인가요?
제가 세번째 관계 없이는 첫번째, 두번째 관계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말한거 기억하시죠? 여기 그 이유들이 있습니다. 스펄젼이 설교 중 한말입니다. '당신이 당신과 하나님의 관계가 하나님의 은혜를 바탕으로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배고픈 자를 먹이고, 벗은 자를 입히고, 죄수들을 방문하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제가 만약 여러분께 가서 생태적 관리자의 역할을 하고 가난한 자를 돕고 정의를 행하라고 해서 여러분이 그러한 일들을 한다면, 하나님께서 그러한 일을 하는 여러분을 축복하실거란 생각으로 한다면 그건 전혀 그 들을 위해서 행하는 일이 아닙니다.
제가 특별히 Q&A시간에 자주 얘기하는 스펄젼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당근을 키우는 농부가 있었습니다. 어느날 왕에게 당근을 가져와서는 오 주여 이건 제가 키운것 중 가장 큰 당근입니다 제 사랑의 증표로 당신께 바칩니다 라고 합니다. 이에 왕은 고맙군 내가 근처에 땅이 좀 있는데 너에게 주어 네가 두 배의 토지를 일구는 농부가 되게하겠다 라고 답합니다. 농부는 즐거워하며 집으로 돌아갑니다. 모든걸 지켜본 귀족이 다음날 말을 왕한테 가져와서 이건 제가 키운 말 중 가장 큰 말입니다 제 사랑의 증표로 당신께 바칩니다 라고 합니다. 왕은 상황을 꿰뚫어보곤 고맙네 라고 하고 그냥 가버립니다. 가던 왕이 뒤돌아서 귀족에게 ~들어보게 그 농부는 나한테 당근을 바쳤지만 자네는 자네 자신에게 말을 바친거네~ 라고 말합니다.' 스펄젼은 말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벗은 자를 입히고 배고픈 자를 먹인다지만 실제로는 스스로를 입히고 먹인다는 사실을 이해하시겠습니까? 무슨 얘기냐 하면, 그런 일을 하므로써 사람들은 스스로 뿌듯해하고 남들이 좋은 사람으로 봐주고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시고 천국에 가게하실거라고 생각하는겁니다. 결국 스스로를 위한 것이지 그들을 위해도 아니고 그분을 위해서도 아닌겁니다. 선행 자체의 즐거움 때문도 아니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그들의 아름다움 때문도 아니고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의 영광이 무엇인지 때문도 아닌 단지 스스로를 위해서 인겁니다.
그게 마지막 네번째 무지개의 의미인 것 입니다. 무지개는 아름다운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종교인과 크리스챤의 차이는 종교인은 언제나 하나님을 이용하며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무언가를 하는 반면 크리스챤은 하나님 자체의 아름다움 때문에 섬기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종교인들은 하나님을 유용하다 합니다. 복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름답다 합니다.
그리고 이는 당신의 전체 인생에 원동력이 됩니다. 당신은 사람들이 아름답기 때문에 그들을 구제하고 섬깁니다. 당신은 나무의 아름다움 때문에 함께 합니다. 당신 자신을 위해서도 아니고 스스로를 증명하기 위해서도 아니며 하나님께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당신이 세번째 은헤의 관계가 없다면 첫번째와 두번째 관계는 큰 부담으로 당신은 곧 번아웃되고 무너져 내리게 될겁니다.
혹시 이 중에 내가 진짜 크리스챤인지 궁금하신 분 있나요? 답은 무지개에 전부 있습니다.
1단계, 먼저 당신의 필요를 인정하십시오.
2단계, 비밀을 공부하십시오.
십자가 위의 예수님, 진노와 해의 접점 부분이요.
3단계, 약속 안에 안식하십시오.
전쟁활을 위를 향하게 내려 놓으심 부분이요.
마지막 4단계는 아름다움이 원동력되는 삶, 감사함이 원동력되는 삶을 사십시오.
혹시 이 중에 폭풍우 가운데 계신 분 있나요? 이걸 꼭 기억하십시오. 폭풍우 가운데 은혜가 있습니다. 크리스챤이지만 지금 너무나도 어두운 폭풍우 가운데 있다는 분이 있으시면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진노는 당신을 향하지 않습니다. 모든 진노는 예수님께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은혜가 있었기 때문에 반드시 그 폭풍우 가운데는 자비가 있습니다. 최소한 당신이 그를 붙잡는다면 당신을 그와 같이 만들겁니다. 동정심많고, 현명하고, 부드럽고, 자신감있는 그와 같이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로 들어가심으로 우리가 무지개를 받았다는 사실을, 그 예수님의 은혜를 당신이 붙잡는다면, 이제 당신 인생의 모든 폭풍우 가운데에는 자비와 은혜가 있음을 알게되는 겁니다.
첫댓글 무지개에 대한 또다른 뷰.
깊이있는 설교 꼭 읽어들 보세요^^
너무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제가 사는 곳은 무지개가 정말 자주 뜨는데요, 이 글을 읽으며 무지개에 대해 새롭게 은혜 받았어요.
제가 찍은 무지개 사진 몇 장 올려요 ~
어머나 세상에...너무 멋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