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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樂民(장달수)
17~18세기 퇴계학파의 율곡학파에 대한 대응의식과 사상사적 지평*
-성호와 대산의 사단칠정론을 중심으로-
전성건**
<차 례>
1. 서론
2. 성호의 가학연원과 퇴계학파로의 지향
3. 대산의 학통연원과 퇴계학파내의 결속
4. 율곡학파에 대응한 퇴계학파의 사단칠정론의 지평
5. 결론
[국문초록]
17~18세기의 퇴계학파는 노론의 학문적이고 정치적인 압박이 본격화됨에 따라, 이에 학
파적인 결속을 강화하고 확장해야 하는 시기로 인식하였다. 노론은 퇴계의 호발설을 중심으
로 퇴계학설에 대한 비판을 본격화했으며, 영남남인을 회유하는 등 정치적인 입장에서 남인
의 노론화 작업에 착수하였다.
이 시대 퇴계학파의 거유인 성호와 대산은 근기남인과 영남남인을 대표하는 인물로 당대
남인의 문제의식을 함께 공유하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문제의식은 퇴계학문을 수호하
고 퇴계학파를 결속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율곡학과 퇴계학의 대결구도에서 가장 중심이
되었던 것이 사단칠정론에 대한 시각차였기 때문에, 성호와 대산은 모두 퇴계학의 입장에서
자신의 사단칠정론에 대한 학설을 수립해나간다.
* 본 논문은 「조선후기 사족 공동체와 예교질서의 심화」(2014. 6. 14)를 주제로 고려대학교 민족문
화연구원에서 발표한 논문을 수정하고 보완한 것이다. 논평을 해주신 김학수 선생님과 박종천
선생님의 조언에 따라 논문을 퇴계학파의 사상사적 지평과 예악형정론의 지평으로 구분하였다.
그리고 본 논문은 전자에 해당하는 부분임을 밝힌다. 후자에 해당하는 부분은 차후 다른 논문으
로 제출하도록 하겠다. 또한 익명의 심사위원들의 요청에 따라 제목과 목차를 일부 수정하였다.
논평자와 심사위원들께 감사드린다.
**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연구교수. haoxue@naver.com
60 泰東古典硏究 第33輯
성호는 처음에 사칠신편에서 리발일도설을 주장하였지만, 이는 사단이 형기의 매개 없
이 발생하는 문제를 갖게 되었기에 다시 숙고의 과정을 거쳐 리발기수일도설로 자신의 학설
을 확정한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인물이 바로 식산과 하빈이다. 식산은 우담과 갈암 등 영남
유학자들의 학문과 인사들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주었으며, 하빈은 성호가 리발기승일도설에
확신을 갖게 해주었다. 성호의 사단칠정론에 대한 해석에서 퇴계학문의 올바른 이해와 함께
퇴계학파의 일원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열망의 단초를 확인할 수 있다.
대산은 밀암에게 친히 「태극도설」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기에 그의 사단칠정론에 대한 기
본적인 이해는 분개설에 입각한 것이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 그러나 대산은 우담의 이론적
영향 아래 혼륜설에 입각한 분개설을 주장한다. 그의 이론도 성호의 확정된 이론과 마찬가지
로 리발기수일도설이라 할 수 있으며, 그에 대한 리기론적 이해는 리주기자였다. 특히 칠포사
를 수용하는 것은 율곡학파의 사단칠정론을 부분적으로나마 인정했음을 의미하는데, 이를 통
해 대산이 사단칠정론을 대결이 아닌 포용의 기재로써 사용하고자 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주제어] 성호, 대산, 우담, 리발기수, 사단칠정론
1. 서론
16세기 영남의 퇴계 이황(1501~1570)은 도학의 학풍을 정립한 대표적 학자로
서 성리학의 리기심성론 등의 이론과 관혼상제 등의 실천에 대한 논의를 본격화한
인물이다. 퇴계는 고봉 기대승(1527~1572)과의 사단칠정론에 대한 문답을 통해
성리학의 이념 축에 해당하는 리기심성론을 심화시켰으며, 한강 정구(1543~1620)
와의 관혼상제에 대한 문답을 통해 성리학의 실천 축에 해당하는 관혼상제론을 현
실화하려고 하였다.
퇴계 사후 퇴계학파는 월천 조목(1524~1606)․학봉 김성일(1538~1593)․서애
유성룡(1542~1607)․한강 정구(1543~1620) 등 4인의 계열로 분립되었고, 인조
반정 이후 서애 류성룡과 우복 정경세(1563~1633) 계열, 한강 정구와 여헌 장현광
(1554~1637) 계열 등이 주도하다가, 다시 갈암 이현일(1627~1704)에 의해 영남
학파의 주도권을 학봉 계열이 차지하게 되었다.1) 이러한 퇴계학파의 분화와 결속
1) 김학수, 「갈암학파의 성격에 대한 검토-제 학파의 수용양상을 중심으로」(퇴계학 20, 2011),
67~68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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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각 계열의 정치적 위상2)과 지역적 특징3) 등으로 설명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그 이면에 보이는 퇴계학에 대한 학문적 위상과도 관련이 있으리라 판단된다.
예컨대 갈암 이현일의 경우 17세기 영남 남인의 대표라는 정치적 입지에 걸맞게
학술적으로도 「율곡이씨논사단칠정서변(栗谷李氏論四端七情書辨)」을 썼을 만큼
율곡 이이(1536~1584)의 리기심성론에 대한 비판에 적극적이었다. 더불어 형 존
재 이휘일(1619~1672)과 함께 홍범구주를 설명하는 홍범연의(洪範衍義)를 지었
는데, 여기에서 그는 왕권의 강화를 강조하는 한편, 토지개혁론을 제시하여 양란
이후 붕괴된 사회를 전면적으로 재정비하려고 하였다. 밀암 이재(1657~1730)는
갈암의 셋째 아들로 가학을 계승하여 퇴계의 주리설을 더욱 정밀하게 발전시키는
한편, 존재와 갈암이 함께 편찬한 홍범연의를 교정하기도 하였다.4)
더 나아가 갈암의 정치적이고 학문적 입장은 영남남인의 결속을 넘어 근기남인
의 수용으로까지 확장된다. 근기남인의 영수 미수 허목(1595~1682)과 그가 가장
신뢰하였던 용주 조경(1586~1669), 백호 윤휴(1617~1680)의 아들 윤하제 및 식
산 이만부(1664~1732) 등이 그들이다. 갈암은 이렇게 자신의 학문적이고 정치적
인 위상을 근거로 서울 및 근기지역 남인 명가들의 자제들을 다수 규합하여 갈암학
파의 범위를 확대하는 한편, 후일 식산 이만부-청대 권상일(1679~1759)-성호 이
익(1681~1763)으로 대표되는 영남남인과 근기남인의 학문적이고 정치적인 제휴
의 초석을 놓을 수 있게 된 것이다.5)
2) 김학수, 「17세기 영남학파의 정치적 분화-유성룡․정경세학맥과 정구․장현광학맥을 중심으로」
(퇴계학 20, 2007). 이 논문에서는 효종~현종 대의 서남당쟁과 영남학파의 서인화 경향, 숙종
대의 환국정치와 서남간의 갈등과 마찰, 그리고 전향 노론계의 기호학맥 확산 운동 등에 대해
자세히 논하고 있다.
3) 김성윤, 「영남의 유교문화권과 지역학파의 전개-안동권․상주권․성주권을 통해 본 영남학파
사유체계의 지역적 특징과 그 전승과정에 나타난 문화 양상을 중심으로」(조선시대사학보 37,
2006a). 이 논문에서는 안동권(중심부)을 학봉․갈암 계열로 분류하면서 곡물중심의 한전농업지
대로서 절약과 검소가 요구되던 문화풍토와 班常의 이원적 편재를 유지하려는 사회적 요구를
반영하는 곳으로 설정하고, 상주권(반주변부)을 서애 계열로 분류하면서 교통의 요지로 회통
적․개방적․현실주의적 사유체계를 갖는 곳으로 설정하고, 성주권(주변부)을 한강․여헌 계열
로 분류하면서 남명학파와의 접경에 위치한 접전지대로 氣學과 실용성․일원론의 학풍상의 특
징이 있는 곳으로 설정한다.
4) 김성윤, 「홍범연의의 토지개혁론과 상업론-갈암 이현일의 경제사상과 그 성격」(퇴계학보
119, 2006b); 김성윤, 「홍범연의의 정치론과 군제개혁론: 갈암 이현일을 중심으로 한 조선후기
영남남인의 실학적 경세론」(대구사학 83, 2006c).
5) 김학수, 앞의 책, 72~76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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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과정을 거쳐 18세기에 들어와서는 영남남인과 근기남인의 교류가 더욱
빈번해진다고 할 수가 있다. 특히 당대를 대표하는 학자로 영남에서는 대산 이상정
을 손꼽을 수 있으며, 근기에서는 성호 이익을 들 수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공히
노론의 정국운영에서 제외되어 벼슬길에 나가 실제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입론을
세우고 정치활동을 할 수 없었다는 데에 있다. 성호은 중형 섬계 이잠(1660~1706)
의 장살사건으로 인해 가문이 몰락하게 된 상황이었고, 대산은 자신이 밝히고 있듯
이, 조정의 행태가 자신의 뜻과 맞지 않는다고 판단한 상황이었다. 때문에 성호는
섬계를 신원하는 동시에 학문적이고 정치적으로 운신의 폭을 넓히기 위해 영남을
필요로 했던 것이고, 반면 대산은 영남남인의 서인화 현상에 따른 학파적 내부결속
을 이루는 한편, 선대에 이루고자 했던 퇴계 학문의 저변확장과 근기남인의 세력까
지 결집하기 위한 상대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그간 성호학과 퇴계학에 관한 논의는 주로 성호의 퇴계 학문에 대한 인식과 그
계승의 측면에서 다루어져왔다. 특히 성호가 퇴계를 조선유학의 적전(嫡傳)으로 평
가하고 사숙하였으며, 사숙한 내용은 크게 퇴계의 심성의 논의와 가례의 논의를 적
극적으로 수용하고 시대적 맥락에 따라 다소 변통해나간 점을 밝힌 연구들을 통해
확인할 수가 있다.6) 또한 성호 이익과 청대 권상일 간의 교류 관계를 구체적으로
다룬 논문도 있다.7)
본 논문에서는 이상의 연구들을 기반으로 하여 논의를 진행하되, 성호와 대산
각각이 갖는 학문의 연원을 통해 그들의 공통지점을 사단칠정론을 중심으로 규명
6) 신항수, 「17세기 후반~18세기 후반 근기남인의 퇴계학 수용과 성호학파의 성립」(International
Journal of Korean History 12, 2008); 금장태, 「성호의 퇴계학 인식과 계승」(국학연구 21,
2012) 등.
7) 김학수, 「성호 이익의 학문연원-가학의 연원과 사우관계를 중심으로」(성호학보 1, 2005); 안
병걸, 「성호 이익의 퇴계와 영남에 대한 관심-권상일과의 편지를 중심으로」(한국실학연구 18,
2009). 본 논문은 이 논문들에서 시사 받은 것이 크다는 점을 밝힌다. 전자는 성호의 퇴계사숙설
을 중심으로 거론하되, 청대 권상일과의 교유 및 퇴계문인록 편찬에 대한 영향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후자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성호가 퇴계집의 闕誤에 대한 지적을 퇴계의
후손 李守淵이 받아들여 퇴계집속집에 반영하였다. 둘째, 성호는 주자서절요와 이학통록
등 퇴계의 편저와 문인록이나 언행록 같은 퇴계 관련 자료들에 대하여 지속적인 관심을 보였고,
영남 이외의 지역에서 살았던 溪門諸子의 사적을 모았는데, 뒷날 도산급문제현록에 수록되었
다. 셋째, 퇴계의 인품과 학문에 대한 성호의 존경은 그 유훈을 지켜온 영남지방에 대한 기대로
이어졌다.
17~18세기 퇴계학파의 율곡학파에 대한 대응의식과 사상사적 지평 63
해 보려고 한다. 사단칠정론에 대한 논의의 과정상에 보이는 그들의 문제의식을 살
핌으로써 그들 각각이 갖는 시대적 역할이 무엇이었는지를 추론해 볼 수 있을 것이
다. 영남남인의 대표적 유학자의 상징인 대산의 학문은 퇴계학파의 결속을 다지는
데에 초점이 있었으며, 근기남인의 대표적 유학자의 상징인 성호의 학문은 퇴계학
파의 일원으로 진입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는 점을 밝히고자 한다.
본 논문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2장에서는 성호 이익의 문제의식과 그의 가문에서 보이는 학문적 전환을 다루었
다. 성호는 근기남인의 종장으로서 18세기 박학풍의 학문을 선도하였고, 경학을 실
증적으로 파악하여 경세에 적용하려고 했던 인물이다. 비록 그의 가문이 섬계 이잠
의 장살사건(1706)으로 몰락하게 되는 불운을 겪기도 하지만, 이는 오히려 그에게
학문에 매진할 수 있게 한 계기가 되었다. 성호학파의 퇴계학에 대한 몰입과 퇴계
학파와의 교류는 학문적인 동질성을 확보하는 한편, 정치적 유대관계를 맺으려는
성호학파의 입장이 고려된 것이다.
3장에서는 대산 이상정의 문제의식과 그의 학문에서 보이는 퇴계학파의 학문적
결속을 위한 그의 고심을 다루었다. 대산은 영남남인의 퇴계학파의 구심점으로서
18세기 퇴계 도학의 집결을 위해 노력했던 인물이다. 그는 갈암 이현일과 밀암 이
재의 학문을 계승하여 퇴계학파의 정맥을 계승하였는데, 당대 영남남인의 퇴계학
설에 대한 다양한 이해와 해석을 일원화하여 퇴계학파를 학문적으로 결속하려고
하였다.8) 또한 갈암의 시대에서부터 시작된 퇴계학파의 확장에 관여하여 기타 지
역과의 정치적 유대관계를 유지내지 확장하려고 하였다.
4장에서는 성호와 대산의 사단칠정론이 성립되어 가는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그
들의 학문적 연원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규명하였다. 성호는 30대 중반에 사칠
8) 퇴계의 분개설은 퇴계 당대는 물론 사후에도 퇴계학파 내외로 문제가 되었던 학술담론이 되었
다. 이는 사단과 칠정을 리와 기로 구분하여 해명하는 설명방식이지만, 리와 기의 불상리 원칙을
위배할 소지가 있는 것이었다. 갈암과 밀암은 분개설을 중심으로 퇴계설을 고수하였던 반면, 대
산은 불상리 원칙을 위배하지 않는 선에서 퇴계의 사단칠정론을 설명해내려고 하였다. 이는 당
대 다양한 관점으로 나타나는 퇴계의 사단칠정론의 변용내지 변주가 퇴계학파의 학문적 결속뿐
만 아니라, 정치적 연대까지도 무너뜨리는 것으로 인식한 대산의 사유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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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편을 저술하였지만, 이 저서는 사단을 형기의 매개가 없는 리발(理發)로 규정함
으로써 당시 영남 남인의 일반적 견해인 리발기수(理發氣隨)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러나 이후 식산 이만부와 하빈 신후담(1702~1761) 등과의 교류를 통해 자신의
이론을 일신하여 그 논의에 부합하는 결론을 이룬다. 반면 대산은 갈암과 밀암으로
부터 계승되어 오던 분개설(分開說)에 입각한 사단칠정에 대한 논의를 혼륜설에 입
각한 논의로 전환하는데, 이는 퇴계의 상수설(相須說)을 바탕으로 호발설(互發說)
을 재해석하는 방식이었다.9) 율곡학파의 퇴계학에 대한 비판을 무마시키고 퇴계학
파의 학문적이고 정치적인 결속을 위한 논리라고 생각된다.
2. 성호의 가학연원과 퇴계학파로의 지향
성호 가문은 경헌공 이계손(1423~1484)대에 서울 소정동(小貞洞)에 세거하며
문한(文翰)하는 집안으로서 이름을 얻게 된다. 경헌공은 1447년(세종29)에 생원시
와 문과에 합격하는 것을 시작으로 정계의 주요 요직을 역임하였고, 1470년(성종1)
에는 영안도 관찰사 겸 영흥부사로서 향안(鄕案)을 만들고 향교교육을 일으켜 영안
도의 유교 교육을 부흥시킨 공로로 경헌공이라는 시호를 받게 되고, 안변․영흥․
함흥의 서원에 배향되기도 하였다.10)
그러다가 성호 가문을 사림계로 전환시키면서 본격적인 문한 가문으로서의 입지
를 다지고 성호의 학문 성립의 토대를 닦은 인물은 성호에게 증조부 되는 익헌공
이상의(1560~1624)였다. 익헌공은 벼슬이 좌찬성에까지 올랐지만 선조연간 동인
과 서인의 분당시 동인 측으로, 다시 북인을 거쳐 인조 이후에는 남인으로 활동하
9) 성호의 사칠신편은 퇴계의 호발설에 입각하여 율곡의 퇴계학 비판에 대해 재비판의 성격을
갖는 저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칠신편의 리발일도는 리발이 형기의 매개이 없이 진행
되는 것으로 인식하였다는 점에서 현실에서의 감정의 운용에 문제가 되는 것이었다. 이후 영남
남인 및 식산과 하빈 등과의 교류를 통해 현실에서의 감정의 운용에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또
율곡의 비판의식을 어느 정도 수용한 형태의 리발기수의 명제가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큰
틀에서 볼 때 퇴계의 사단칠정론에 대한 이해가 영남 남인과 근기 남인 모두에게 공유될 수 있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10) 李瀷, 星湖集 권58, 「大司憲李公神道碑銘竝序」 참조.
17~18세기 퇴계학파의 율곡학파에 대한 대응의식과 사상사적 지평 65
게 되는데, 정치적 활동보다는 혼인을 통한 인맥 구축에 힘을 써 가문의 지위를
높이려고 하였다.11) 이상의 과정을 거쳐 조선후기 성호 가문은 당대의 명성과 인
망이 있는 가문으로 가문의 위상이 올라간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변화상에 따른 성호 가문의 형성과정에서
드러난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는 시문(詩文)과 서법(書法)을 갖춘 사조지가(詞
藻之家)에서 경학(經學)과 경세학(經世學)을 두루 갖춘 시례지가(詩禮之家)로 가문
이 변모되었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등장하는 중요한 인물이 바로 옥동 이서
(1662~1723)와 성호 이익이다.
성호는 옥동의 학문이 충신(忠信)을 위주로 하였고, 선진유학의 태두인 주공과
공자를 필두로 하여 성리학의 거두인 정자와 주자를 사숙하였는데, 특히 육경사서
에 대한 연구에 몰두하고 인의(仁義)를 안택정로(安宅正路)로 삼았다고 하였다.12)
또 정산 이병휴(1710~1776)는 자신의 가문을 시문과 서법 등의 문학에서 유학의
도덕과 학문 등의 도학으로 전환시킨 인물이 옥동 이서였으며, 그를 계승하여 사문
(斯文)을 천명한 사람이 성호 이익이었다고 진술하였다.13)
우리 집안의 성리학은 실은 옥동 이서 선생께서 창시하였다. 성호 선생은 친히 그
문하에서 공부하여 유학을 크게 천명하였고, 정산 이병휴․만경 이맹휴․목재 이삼
환․가산 이구환은 또 모두 성호 선생에게 공부하여 덕을 이루었다. 예헌 이철환․금대
이가환․시헌 이재위는 모두 가학을 사숙하여 도를 이루었는데, 사조(詞藻)에 치중하던
습속을 일변시켜 성대하게 시례(詩禮)의 집안이 되었다.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옥동 선생께서 그 실마리를 만들어 터전을 잡아놓은 공이 있다.14)
11) 성호 가문의 당대 혼인관계와 관련한 자세한 사항에 대해서는 이성무, 「성호 이익(1681~1763)의
생애와 사상」(조선시대사학보 3, 1997) 참조.
12) 李漵, 弘道先生遺稿附錄, 「家傳[星湖公所著]」: “其學忠信爲主, 步步趍趍, 維周孔程朱, 寧守師說
而未達, 不顧小道之可觀. 業著書, 卷秩溢篋. 自心身以外, 至治家治民, 汎及於律曆之書, 甘石岐黃
之. 大小相銜, 本末兼該, 無不參互著明. 敀宿於六經四字, 爲安宅正路.”
13) 李漵, 弘道先生遺稿附錄, 「祭淸谿公文畧[貞山公所著]」: “昔我仲父玉洞先生, 生于仕䆠之家, 而
絶意名利, 篤志爲學, 德成名立, 屹爲鉅儒. 至季父星湖先生繼起, 而斯文大闡, 斡詞翰之習, 而爲道
學之宗. 若原其刱始之功, 則實仲父先生也, 先生筆法亦名世.”
14) 李漵, 弘道先生遺稿附錄 「行狀草[李是鉷]」: “吾家性理之學, 實自先生刱始之. 星湖先生親炙其
門, 而大闡斯文, 貞山公․萬頃公․木齋公․可山公, 又皆親炙於星湖而成德. 例軒公․錦帶公․柿
軒公, 皆私淑於家學而成道. 一變詞藻之習, 蔚爲詩禮之家, 溯其淵源, 則先生實有造端肇基之功云.”
66 泰東古典硏究 第33輯
이처럼 성호의 후손들은 가학의 분위기를 문학[詞藻]에서 학문[詩禮]으로 전환
시킨 인물을 옥동 이서로 생각하고 있으며, 옥동의 학문을 계승한 인물로 성호 이
익을 지목하고 있다. 성호는 옥동에게 친히 공부하여 유학, 즉 성리학을 크게 천명
하게 되었고, 그로부터 다시 정산․만경․목재․가산 등은 성호에게 친히 공부하
여 도덕을 이루게 되었으며, 예헌․금대․시헌 등도 이후 친자(親炙)를 하지는 못
했으나 가학을 사숙(私淑)하여 도덕과 학문을 이루게 되었다는 것이다.
성호 가문의 학문연마 과정은 주로 가학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15) 정
산은 그의 가학연원에 대한 술회를 통해 성호 가문의 가학적 전통을 매우 자부하였
다. 섬계 이잠이 손수 베낀 효경을 성호가 이어받고, 다시 이를 정산이 이어받아
소장하면서 공부했다고 하는 기록16) 등은 이를 뒷받침 해주는 하나의 사례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가학연원17)의 학문연마에는 심사자득(深思自得)이라는 학문방법이
제시된다.18)
성호 가문이 몰락한 가문이 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사건은 아마 섬계 이잠에
의해 작성된 병술년(1706)의 상소문과 그에 따른 그의 장살(杖殺)사건이었을 것이
다. 섬계 이잠이 장희빈의 소생이었던 세자 경종(景宗)을 옹호하는 상소를 올려 김
춘택과 이이명 등 정치적 반대자들을 숙청할 것을 요구했지만, 숙종의 친국에 의해
섬계가 장살됨에 따라 정치적으로 몰락하는 계기가 되었던 사건을 말한다.
기실 섬계의 상소문과 그로 인한 장살사건이 있기 전까지 성호 가문의 정치적
성향이 적극적으로 당파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숙종실록에는
15) 최석기, 「정산 이병휴의 학문성향과 시경학」(남명학연구 10, 2000, 「생애와 학문성향」) 참조.
16) 李秉休, 貞山雜著 권10, 「書家藏孝經卷後」: “秉休嘗侍於季父先生, 先生以一冊授秉休曰: ‘此卷
余幼時, 仲兄所手寫而敎讀者也. 汝其藏弆敬受而閱之’, 乃孝經 也. 奉玩心畫不覺感愴, 卽背糊改
裝而藏焉. 其後十數年, 先生已損世, 重閱是卷, 尤有感焉. 因竊念當日先人手書是經, 口授先生之
意, 殆非偶然, 則家學淵源, 亦有可得而考者.”
17) 김학수, 「성호 이익의 학문연원-가학의 연원과 사우관계를 중심으로」(성호학보 1, 2005)는 성
호 이익의 학문연원이라는 제목 하에 퇴계사숙설을 비롯한 정언눌과 허목 계승설, 정시한과 이식
그리고 이만부 계승설의 연원을 추적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본 논문에서는 퇴계사숙설을 기본으
로 인식하되, 정시한․이식․이만부 계승설에 주목하여 그들의 학문적 수수관계를 다루었다.
18) 李秉休, 貞山雜著 권10, 「季父星湖先生行狀」: “其於經學, 由 集註以溯六經之旨, 而間多先儒
之未發, 皆出於深思自得也. …… 其曰: ‘疾書者, 取橫渠畵像贊妙契疾書之義也.’ 先生之學, 不喜依
樣, 要以自得. 經文之間, 有依必思, 思而得之則疾書之; 不得則後復思之, 必得乃已. 故疾書中槪多
前儒未發之旨.”
17~18세기 퇴계학파의 율곡학파에 대한 대응의식과 사상사적 지평 67
성호의 형 이침19)이 1703년 사학유생(四學儒生)을 대표하여 기사환국 때 사사당
한 우암 송시열을 신변(申辨)하는 상소를 올려 당대 명망을 얻었다는 기사가 등장
한다.20) 때문에 성호 가문의 정치적 성향의 전환은 섬계의 상소문으로 인한 비극
적인 가문의 몰락과 궤를 같이 한다고 하겠다.
성호는 가문의 몰락으로 출사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절치부심하여
학문적 노력을 지속해나가는 한편, 섬계의 신원운동을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한다.
영남과 별다른 교유가 없었던 성호가 1709년 백운동서원․청량산․도산서원 등을
유람한 것도 섬계의 신원운동과 관련이 깊은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21) 여하튼 이
상소문은 성호 가문의 정치적 행보를 그 출발 지점에서부터 규정해버린 사안이 되
었으며, 상주(上奏) 이후 이 상소문은 노론이 남인을 공격하는 빌미로 지속적으로
거론되면서 노론과 남인 각각의 정체성을 확인시켜 주었고, 남인과 소론 사이의 소
통 가능성이라는 측면을 강화하는 한편, 영남 남인들과 근기 남인들을 이어주는 자
산이 되기도 하였다.22)
어느 정도 가문의 화난이 정리되고 난 이후에는 성호를 위시한 성호학파의 처세
활동은 영남 남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다시금 확대된다. 도산서원의 원장을 지내면서
퇴계언행록의 간행을 주도하는 등 당시 퇴계학파의 중심에 있었던 청대 권상일
등과의 사단칠정논쟁에 대한 각자의 견해를 교환하거나, 장살 당한 성호의 중형 섬
계 이잠의 묘갈명을 부탁하는 등 다종한 사안을 통해 상호간의 교류를 지속한다.23)
근래에 어떤 사람에게 고(故) 진사 남극관의 몽예집을 빌려 보았는데 뛰어난 재사
(才士)더군요. 혹 집사께서도 그 책을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남극관은 재상 남구만의
손자로 요절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문집 가운데 중형의 일에 대해 바르게 논한 말이
19) 이침은 숙부 이명진의 후사가 되었으며, 이용휴의 아버지이고 이가환의 조부이다.
20) 朝鮮王朝實錄 숙종 29년 7월 17일 다음의 기사 참조. “辛酉/四學儒生李沉等, 上疏爲先正臣宋
時烈申辨. 答曰: ‘爲大老辨誣之誠, 溢於言表, 予甚嘉尙焉.’ 後, 時烈門人執義李箕洪․平市令鄭纉
輝․忠淸道儒生蔡之涵等, 俱上疏辨誣, 上嘉納之.”
21) 李瀷, 星湖全集 권6, 「游淸凉山記」, 「謁陶山書院記」 등.
22) 섬계 이잠이 상주한 무술년 상소의 배경 및 내용 분석 등은 송혁기, 「섬계 이잠의 병술년 상소
연구」(민족문화연구 60, 2013) 참조.
23) 성호와 청대의 교류의 흔적은 淸臺先生文集 卷6, 「答李自新[丙寅]」 등의 편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68 泰東古典硏究 第33輯
있습니다. …… 이 사람이 작고한 지가 10년이 되었다고 하니, 당시는 아직 시비가 밝혀
지지 않았고 공론이 정해지지 않았을 때입니다. 그런데도 시끄러운 여러 논의들 가운데
에서 홀로 붓을 떨쳤으니 얼마나 훌륭합니까? 정확하게 본 것이 있어서 서로의 마음을
깊이 알아준 것입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선생께서는 그 충정을 헤아려 주시고, 번거롭
게 해드리는 것에 대해 나무라지 않으시면 다행이겠습니다.24)
위의 글은 섬계 이잠의 신원(伸寃)이 이루어지던 경종 3년에 성호 이익이 식산
이만부에게 중형 이잠의 묘갈명을 부탁하는 편지에서 남극관이 저술한 글25)의 일
부를 소개하는 내용이다. 남극관이 지은 찬(贊)의 존재를 성호 이익도 몰랐다가 뒤
늦게야 보게 되었다고 하면서 묘갈명을 부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섬계유고
(剡溪遺稿)가 간행되자 성호 가문에서는 영남 남인들에게 섬계유고에 대한 문
자 청탁을 하고, 이에 대해 갈암 이현일의 문인인 유승현과 나학천이 각각 「서섬계
선생유집후(書剡溪先生遺集後)」와 「서섬계이공병술소후시서(書剡溪李公丙戌疏後
詩序)」를 지어 보내는 등 교류를 지속한다.26) 이러한 결과 이른바 성호 가문의 문
헌록인 여강세승(驪江世乘)의 마지막 권9에 식산 이만부 등이 써준 묘갈명 등이
기재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27)28)
24) 李瀷, 星湖全集 권67, 「上息山」: “近借人得故進士南克寬 夢囈集者, 奇才也. 未知執事其已得
以遮眼否? 南卽議政九萬之孫, 卒早殀云. 集中有正論仲兄事云. …… 聞此人歾已十年, 當時是非猶
未明也, 公論猶未定也. 此人獨能奮筆於衆咻䕺中, 何其多哉? 適有所覩, 不敢不盡於相知之深, 伏惟
先生諒其衷情, 勿以煩猥爲罪, 則幸矣.”
25) 南克寬, 夢囈集 坤, 「謝施子」: “李潛先生, 亦東方奇偉之士. 請斬凶渠之疏, 剖析名義之實, 披抉
宵小之腹, 正而平, 嚴而能和, 昌言遠猷, 足爲一時之繩準. 夫豈前古草茅激訐之倫所可擬哉? 惜乎!
一擲不中, 使伏而睨眴者, 得以呫呫然議其後, 麟踣大野, 鬼騁中逵, 悲夫! 余嘗爲之贊曰: 雍容鼎鑊, 笑傲椄槢. 朱梅舌撟, 東澈氣懾. 又曰: 烈烈之氣, 終古昭明. 憑陵月星, 噴薄風霆. 宛爲長虹,
燁然天衢. 下燭洿池, 烝豕于于.”
26) 처음에는 이재․김성탁․권구 등에게 섬계유고에 대한 문자 청탁을 하였으나 이들이 사양하
자, 전자는 유승현이 짓고 후자는 나학천이 지었다. 관련 사항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여주이씨
성호가문 전적(2001)의【簡札】(3)~(6) 참조.
27) 驪江世乘 권9는 「墓碣銘[竝序]」(息山文集), 「上息山李先生書」(星湖集), 「持平權斗紀疏」, 「贊」(南
克寬撰), 「贊」(朴泰茂撰), 「儒生李德培疏」, 「儒生李德標疏」, 朝野輯要, 朝野僉載, 「漫錄」(南桐巢
著), 「東平尉聞見錄」(東平尉鄭著), 「家傳」(從子盟休撰), 「副修撰金世欽疏」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28) 성호 가문에서도 당연히 섬계 이잠의 충절을 높이는 글들을 저술하여 가문의 위기에 의연히 대
처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국휴는 “선비가 죽어야 할 자리에서 죽으면 그 죽음은 죽은 것이 아니
다.”라고 하였고, 윤두서는 “필부의 신분으로 나라를 사랑하여 목숨을 버리고 인을 이루었으니,
비분강개하는 마음이 세속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李瀷, 星湖全集 卷
17~18세기 퇴계학파의 율곡학파에 대한 대응의식과 사상사적 지평 69
3. 대산의 학통연원과 퇴계학파내의 결속
대산 이상정은 본래 대산의 선대는 경성 낙선방에서 살았으나, 광해군 때 폐모
론이 일어나자 고조 수은 이홍조(1595~1660)가 외조부 서애 유성룡(1542~1607)
의 권유에 따라 안동으로 내려와 살면서 일직에 터를 잡고 살게 되었다. 수은은
맑은 덕과 기품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고, 벼슬은 회인 현감을 지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대장이 되어 나라를 구하는 일에 앞장섰다.
증조부 이효제는 성품이 고결하여 평생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처사로 지냈다.
조부 이석관은 주위의 추천으로 문학사장이 되었으나 41세에 세상을 떠났다. 부친
이태화는 벼슬하지 않고 처사로 지냈으며, 모친은 재령 이씨로 갈암 이현일의 손녀
이며 밀암 이재의 따님인데, 부녀자의 훈도와 법도를 잘 갖추고 있었다.
대산의 학문적이고 정치적인 기본 틀은 갈암과 밀암을 계승한다고 할 수 있다.
갈암은 퇴계-학봉으로 이어지는 퇴계학맥의 계승자였으며, 그는 당대 퇴계학파의
계파 간 교유를 확대하여 영남사림의 중망을 얻었으며, 기사환국 이후에는 남인산
림으로 징소(徵召)되어 정치적 위상을 크게 강화하기도 하였다. 갈암의 문인 341명
가운데 가학의 연원이 서애․우복 학맥과 한강․여헌 학맥으로 소급되는 인사가
80여 명에 이르고, 남명 학맥의 인사도 45명에 이른다는 것은 갈암이 계파와 학맥,
그리고 지역을 초월하여 영남사림을 재집결시켰음을 의미한다.29)
갈암은 또한 형 존재 이휘일과 함께 홍범구주를 설명하는 홍범연의를 지었으
며, 율곡학파의 거세지는 퇴계학 비판에 대한 반동으로 퇴계학파의 입장을 변호하
였다. 밀암은 갈암의 셋째 아들로 가학을 계승하여 퇴계의 주리설을 더욱 정밀하게
발전시키는 한편, 존재와 갈암이 함께 편찬한 홍범연의를 교정하기도 하였다. 이
들은 공히 학문적으로는 율곡의 기발리승일도설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끝까지 고
수하면서 퇴계의 사상을 변호하는 한편, 정치적으로는 홍범연의에서 제시하였던
53, 「李司成旌閭記」: “昔在丙戌, 我剡溪公之葬鮮也, 親朋操文哭者相繼. 其咸卿之辭曰: ‘士死於當
死, 其死也不死.’ 蓋不以死爲悲而以心爲全也. 旣虞祔, 余西遁海上, 咸送我於山之下, 相顧爲之惻
然.” / 星湖先生全集 卷57, 「祭尹進士[斗緖]文」: “嗚呼! 昔公辱與不佞兄弟遊, 或抗言死國則公曰: ‘匹夫而懷邦, 舍命而成仁, 忼慨拔俗者也.’ 或竆居講學, 則公曰: ‘日孜孜而勉焉, 惟好善其不足, 善
量己不願外者也.’”
29) 김학수, 앞의 책, 96~97쪽 참조.
70 泰東古典硏究 第33輯
하였던 것처럼 각종 개혁안을 제기하여 왕권의 강화를 강조하고 서인의 정국운영
에 대한 태도를 비판하였다.
갈암의 부친은 석계 이시명(1590~1674)으로 학봉 김성일(1538~1593)과 서애
류성룡의 문인인 경당 장흥효(1564~1633)에게 수학하였는데, 경당이 대산의 외조
부인 점을 감안하면, 그의 학통이 퇴계에서 이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갈암
의 아들인 밀암은 부친의 사상을 받아들여 퇴계학을 더욱 정밀하게 다듬는 작업에
자신의 학문적 역량을 모두 기울였다. 또한 밀암은 대산에게 「태극도설」을 문목별
로 해설해 주는 글을 남기는 등 대산의 학문적 연원에 직․간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30) 이상을 종합해보면, 대산 이상정은 퇴계 이황 → 학봉 김성일 → 경당 장흥
효 → 갈암 이현일 → 밀암 이재로 이어지는 퇴계학파의 정맥을 잇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7세기 율곡학의 입장에서 퇴계학의 비판에 힘을 기울인 서인세력의 이념공세
에 대항하여 갈암과 밀암이 율곡학에 대한 반박을 통해 퇴계학을 지키고, 당대 서
인화되고 있었던 영남 남인의 세력을 규합하려고 하였다면, 18세기의 대산은 갈암
과 밀암의 공적을 계승하는 동시에 영남 남인 내부에 존재하였던 퇴계학에 대한
상이한 이해방식을 통일하여 그들을 단속하고 더 나아가 퇴계학파를 근기남인으로
까지 확장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이는 선대에 있었던 갈암 이현일의 성과를 활용한
것이었다.31) 그러나 대산은 당대를 도의(道義)를 실현할 수 없는 시대로 규정하고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퇴계학을 고구하여 영남 남인의 학문적이고 정
신적인 지주가 된다.32)33)
여기에서 잠시 살피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은 대산 가문과 성호 가문의 교류 양상
이다. 기사환국 이후 갈암의 산림징소에 대한 입장이 여럿 있었는데, 성호 가문에서
30) 李象靖, 大山集 권45, 「外訓跋【戊辰】」: “象靖自年十四五, 從外大父密庵先生于錦水之陽而受業
焉. 先生不以象靖爲不肖, 蓋諄諄以古人問學之方, 一日從容請益, 則手書涵養進學之要, 以爲終身之
誦, 象靖謹受而藏之不敢忘.”
31) 김학수, 앞의 책 참조.
32) 李象靖, 大山先生實記 권3, 「敍述」: “先生宏材遠業, 退然處於畎畝之中, 而未嘗無意於世. 每語及
生民勞苦風俗頹廢, 眞切憂歎. 若己痒痾一出僻略見施設, 竟以時與志違, 義有不可遂, 絶意名宦.”
33) 대산은 25세에 향시에 나아가 진사에 합격하였고 25세에 급제하여 출사한 것을 시작으로 관직생
활을 하게 되었으나 출사에 뜻이 없어 지속적으로 사직상소를 제출하거나 還鄕하는 일이 잦았
다. 김시황, 「대산 이상정 선생의 생애와 학문」(대동한문학 10, 1997) 참조.
17~18세기 퇴계학파의 율곡학파에 대한 대응의식과 사상사적 지평 71
는 이 가운데 갈암의 산림징소에 대단히 비판적이었다. 섬계 이잠은 갈암의 지론(持
論)이 공평하지 못하다고 혹평하였으며,34) 그의 아우 옥동 이서는 갈암이 초야에서
기용된 지 1년이 못되어 아경(亞卿)에 이르고 유도(有道)한 인물로 대우받고는 있지
만, 시행하는 것은 전혀 볼만한 것이 없다고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하였다.35)36)
그러나 이러한 비판적인 시각에도 불구하고, 갈암 이현일은 근기남인의 자제들
을 대상으로 정치적이고 학문적인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는데, 그 중 눈에 띄는 사
람이 바로 식산 이만부(1664~1732)이다. 식산은 도동편(道東編)을 저술하면서
율곡의 리기설을 수록하는 과정에서 밀암과 불편한 관계를 가지기도 했지만, 갈암
은 식산의 학문적 자세를 높이 평가하여 그의 저술인 수지록(遂志錄)의 발문을
쓰기도 하였다.37) 식산은 근기남인의 핵심가문인 연안이씨 출신으로 어려서 서울
에 거주할 때 미수 허목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영남으로 이거한 뒤에는 우담 정시
한과 갈암 이현일을 종유하였으며 고산 이유장과 서애 유성룡을 기리며 학문과 교
유의 범위를 확대해간 인물이다.38)
식산은 또한 성호의 형들인 섬계 이잠과 옥동 이서 등과 교유가 깊었다. 이러한
연고로 성호는 식산과 교유가 가능해졌고 방문과 서간을 통해 교유하게 되었다. 특
히 1706년 섬계 이잠이 장살된 뒤 정중하게 비문을 청하기도 하였다. 성호는 식산
의 학문을 배우고자 했을 뿐만 아니라, 영남의 사습(士習)이나 학인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여 고견을 청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성호는 섬계와 옥동에 의해 다져진 인맥
을 바탕으로 식산과 교유하게 되었고, 학문은 물론 영남 인사들의 동향에 이르기까
지 다양한 견해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식산으로부터 대유로 평가받기에 이른다.39)
나아가 정시한의 현손 해좌 정범조(1723~1801)는 식산의 묘갈명을 찬하면서
34) 權斗經, 蒼雪齋集 권8, 「上葛菴先生己巳」 別紙.
35) 李萬敷, 息山集 권12, 「中原講義」.
36) 김학수, 앞의 책, 72~76쪽 참조.
37) 李玄逸, 葛菴集 별집, 권3, 「書息山處士李君仲舒遂志錄後」.
38) 李萬敷, 息山集 권18, 「書四公簡帖」: “余後生鹵莽, 猶及先輩如眉叟南坡諸公之門. 然童騃無所
知識, 惟挹其儀容而敬慕之也. 及長, 又頗從長者後, 得不爲其䟽絶. 葢南嶽李公之博學多識, 愚潭丁
公之特立獨行, 孤山李公之淸高絶俗, 忠孝堂柳公之敦篤謹厚, 皆余所欲學而未能者也. 平日四公往
復書䟽頗富, 而兒輩藏之不謹, 搜諸亂軸, 存若干幅, 天不憗遺. 四公者皆作古人, 而余以小生, 今亦
老矣. 踽踽焉無所適, 遂令收拾其餘, 裝諸一帖, 以寓昔日遊從之好焉.”
39) 김학수, 「성호 이익의 학문연원-가학의 연원과 사우관계를 중심으로」(성호학보 1, 2005),
84~94쪽 참조.
72 泰東古典硏究 第33輯
식산에 대한 성호의 평가를 매우 강조하는데,40) 이는 성호의 학문연원과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성호가 우담에게 친자한 문인은 아니지만 그의 묘갈명을 찬
함으로써 학문적 연관성을 강화하는 가운데 우담의 문인 식산의 행장까지 찬하게
되면서 우담에게서 식산으로, 다시 식산에서 자신에게로 이어지는 학문적 연관성
을 더욱 강화시켜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41)
4. 율곡학파에 대응한 퇴계학파의 사단칠정론의 지평
여기에서는 우담의 학설에 대해 집중해보려고 한다. 왜냐하면 우담은 갈암과 함
께 퇴계의 호발설을 적극적으로 수호하려고 하였고, 본 논문에서 주요 대상으로 다
루고 있는 인물인 성호와 대산의 사단칠정론에 관하여 어느 정도 이론적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주지하고 있는 것처럼, 퇴계와 고봉 사이에 있었던 사단칠정에 대한 논변은 퇴
계가 내린 단안, 즉 “리발기수지(理發氣隨之)”와 “기발리승지(氣發理乘之)”로 정리
되었다. 그리고 이 단안은 호발(互發)과 상수(相須)의 측면을 아울러 가지고 있는
것이다.42) 그런데 고봉과 율곡의 공통된 비판은 “리발기수지”를 “리선기후(理先氣
後)”로, “기발리승지”를 “기선리후(氣先理後)”로 인식하는 방식에서 호발이라는 용
어를 사용하여 이를 비판의 핵심 지점으로 놓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단칠정논쟁에서의 핵심적 문제 지점은, 첫째 리가 운동성을 갖는다
[理有動靜]는 점과, 둘째 원리가 앞서고 현실은 부차적[理先氣後]이라는 점이다. 다
시 말해 퇴계의 심성론에서 “리유동정”과 “리선기후”의 의미를 각자의 입장에서
변증함으로써 퇴계학을 비판하든 변호하든 그것을 그들 자신의 급선무로 삼았던
40) 海左集 권38, 「別提李公墓碣銘」[李萬敷].
41) 김학수, 「성호 이익의 학문연원-가학의 연원과 사우관계를 중심으로」(성호학보 1, 2005), 94쪽
참조.
42) 李滉, 退溪集 권16, 「答奇明彦」: “滉謂就天地人物上看, 亦非理在氣外, 猶可以分別言之, 則於性
於情, 雖曰理在氣中, 性在氣質, 豈不可分別言之? 蓋人之一身, 理與氣合而生, 故二者互有發用, 而
其發又相須也. 互發則各有所主可知; 相須則互在其中可知. 互在其中, 故渾淪言之者, 固有之; 各有
所主, 故分別言之, 而無不可.”
17~18세기 퇴계학파의 율곡학파에 대한 대응의식과 사상사적 지평 73
것이다.
고봉을 비롯한 서인들의 이러한 비판에 대해 남인들은 나름대로 그에 대한 반박
을 통해 퇴계학을 재정립하려고 하였다. 우담 정시한(1625~1707)과 갈암 이현일
(1627~1704)이 대표적인데, 그들은 서인[노론]들의 “리선기후”나 “기선리후”와
같은 논리는 퇴계에게 존재하지 않았고, 이는 퇴계의 학설에 대한 무지의 소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였다.43)
우담과 갈암은 율곡학을 비판하면서 퇴계학의 정체성을 모색하였는데, 그 핵심
에는 사단칠정론에 대한 변호가 자리한다. 그들은 서로를 방문하거나 서간을 통해
사단칠정에 대한 생각을 교유하는데,44) 먼저 갈암이 「율곡이씨논사단칠정서변(栗
谷李氏論四端七情書辨)」을 작성하고, 이를 살펴본 우담이 그 다음으로 「사칠변증
(四七辨證)」을 작성하여 퇴계학 변호에 집중한다.
갈암의 경우 “인심과 도심의 소종래에 각기 근원과 묘맥이 달리 있다.”고 주장함
으로써 율곡이 퇴계설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한 것을 퇴계설의 특징으로 삼는 잘못
을 저지르게 되고, 이는 당장 우담의 비판을 받게 된다.45) 여기서는 먼저 우담의
사단칠정에 대한 생각을 살펴보고, 이후 성호와 대산에게 어떻게 학술적으로 영향
을 미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여기에서는 먼저 천지의 조화로 논해본다. 태극의 동정의 리(理)는 사계절을 관통하
고, 사계절이 이루어지는 것은 모두 태극의 동정에 근원하니, 천지의 조화는 태극유행의
묘 아닌 것이 없다. 비록 만물이 자라나서 크고 작게 질을 이루고 형형색색을 볼 수
있는 것이 기(氣)이지만, 역시 그것들은 생생지리에 근본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어찌
43) 丁時翰, 愚潭集 권7, 「四七辨證」: “氣發之時, 不可謂無理, 故謂之理乘, 豈氣先發而理在後之謂
乎? 一則主理而言, 故先言理, 而亦未嘗不言氣; 一則主氣而言, 故先言氣, 而亦未嘗不言理。以此觀
之, 亦可見分言理氣之中, 自有混淪不相離之妙矣. 今栗谷乃以退溪爲全不知, 理氣之無先後無離合,
而創爲互發之說者然, 亦可謂不知退溪者矣.”; 葛菴集 권18, 「栗谷李氏論四端七情書辨」: “愚謂李
氏謂退溪不能深見理氣不相離之妙, 而有理氣互有發用之說.”
44) 李玄逸, 葛菴集 권8, 「答丁君翊」: “四七辨, 十年前承辱敎之勤, 率爾論著, 思一仰質而不可得. 今
因俯索, 謹此求敎, 學薄識淺, 言豈一一中理? 切望斤敎, 破此懵滯爲幸. 此等說話, 似不可示人”.; 葛
菴集 附錄 권1, 「年譜」: “十四年戊辰【先生六十二歲】三月, 愚潭丁公來訪.【愚潭名時翰, 字君翊,
以簪纓家世, 賁趾林泉, 學問行義, 爲世師表. 至是千里命駕, 留連數日, 傾倒古今. 秋, 又自南州來訪,
信宿而歸. 先生送至眞城鳳覽書院.】”
45) 김낙진, 「갈암 이현일의 성리설과 경세론의 특색」(퇴계학 20, 2011), 40~44쪽 참조.
74 泰東古典硏究 第33輯
기발리승일도만을 말해서야 되겠는가? 무릇 리기(理氣)는 본래 선후도 없고 이합도 없
다. 기가 리에 앞서는 것이 아니지만 기가 작용하는 곳을 보면 오히려 기발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리가 기에 앞서는 것은 아니지만, 리가 주재하고 유행하는 곳을 가리
켜 유독 리발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인가? 또 리는 무위하여 저절로 그러한 것으
로 유위의 자취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비록 무위라고 말하더라도 천지와 사계절의 운행
과 일월성신의 순환이 옛날부터 지금까지 조금도 어긋남이 없는 것은 이 리의 묘용이
아닌 것이 없다. 어찌 리는 무위하고 기는 유위하다는 말만을 가지고 부득불 기를 먼저
말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46)
우담은 율곡이 비판의 주요 근거로 삼고 있는 주희의 “리무위기유위(理無爲氣有
爲)”와 “기발리승일도(氣發理乘一途)”의 명제를 천지의 조화를 근거로 반박하는 것
이다. 태극동정의 리가 천지와 사시를 통관하고 있는데, 이는 태극유행의 묘용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표면적인 것을 가지고 이면적인 것을 가려서는 안 된
다는 취지이다. 다시 말해 기발에 가려져 있는 리발의 측면을 볼 수 있었다면 율곡
과 같은 비판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우담은 이를 퇴계의 설과 연관 지어 사단칠정에 대한 해석에 직접
적으로 적용한다. 퇴계가 “사단은 인의예지의 성에서 발출한다.”고 한 말은 사단은
형기에 섞이지 않은 채 순수하게 발현한다는 의미이고, “칠정은 외물이 형기에 감
촉되어 마음에서 움직인다.”고 한 말은 칠정은 형기에 섞이어 발현한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특히 칠정의 경우도 마음속에 리가 없다고 말한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 이
둘 간의 상대적인 관점을 지양하고자 한다.47)
그러므로 우담은 “도심은 인심 상에서 발현하고 사단은 칠정 안에 포함되어 있
46) 丁時翰, 愚潭集 권8, 「四七辨證」: “今且以天地之化論之. 太極動靜之理, 通貫四時, 四時之成功,
皆原於太極之動靜, 則天地之化, 無非太極流行之妙也. 雖其萬物芸芸, 大小成質, 形形色色可見者
氣, 而亦莫不本於生生之理, 安可以氣發理乘一途專言之耶? 夫理氣本無先後離合, 氣非先理, 而見其
氣之作用處, 猶可謂之氣發, 則理非先氣, 而指其理之主宰流行處, 獨不可謂之理發乎? 且理之無爲,
自然而然, 不見其有爲之迹, 故雖曰無爲. 而天地四時之運行, 日月星辰之躔度, 亘古亘今, 無少差忒
者, 莫非此理之妙用, 豈可以理無爲氣有爲爲辭而不得不先言氣也耶?”
47) 丁時翰, 愚潭集 권7, 「四七辨證」: “第退溪之以四端爲發於仁義禮智之性者所指而言者; 以其出於
性之粹然在中, 不雜乎形氣者而爲言, 初不言無感而自發也. 以七情爲外物之觸其形而動於中者所指
而言者, 以其出於性在氣質, 易感形氣者而爲言, 亦非謂中無是理也.”
17~18세기 퇴계학파의 율곡학파에 대한 대응의식과 사상사적 지평 75
어서 비록 상대시켜 설명하더라도 원래 상대하여 각자 나오는 일이란 없다.”라고
단정한다. 우담은 퇴계의 분개설이 “혼륜한 마음”에 나아가서 사단과 칠정을 리와
기로 나누어 이원적이고 대립적인 것으로 설명한 것일 뿐이고, 혼륜한 마음에서는
실제로 사단은 칠정 안에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우담은 사단과 칠정
의 설명방식을 칠정이 사단을 포함하는 “혼륜설”을 인정하면서도, 그 안에서 사단
과 칠정이 의미하는 바를 구분해낼 수 있다는 “분개설”을 퇴계의 사단칠정에 대한
정론으로 생각한다.
요컨대 우담의 사단칠정에 대한 입장은 다음과 같다. 사단과 칠정이 모두 외감
(外感)-내응(內應)의 구조를 벗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사단은 순수한 본성에서 발
출하는 것이고, 칠정은 형기의 매개로 인해 발출하는 것으로 파악해야 한다. 그리
고 이는 리가 주재하는 현상을 포착하는 데에 사단의 의미가 있는 것이며, 이를
리기론의 명제로 환언하면, “리주기보(理主氣輔)”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48)
외감-내응의 구조를 리발기수(理發氣隨)라고 이해하고, 그것의 기초논리를 “리주
기보”라고 이해하면, 이 명제는 각각 성호와 대산의 사단칠정에 대한 생각에 수용
되는 한편, 각자의 시각에 따라 다시 변용되어 설명된다고 할 수 있다.
성호는 30대 중반에 사칠신편을 저술하여 퇴계학에 입문한다. 사칠신편의
대의는 사단과 칠정을 각각 형기를 매개하지 않는 리발과 형기를 매개로 한 리발로
상대하여 설명하는 것이다. 성호의 이러한 설명 방식은 사단과 칠정을 각각 기발과
리발로 상대화하여 설명하는 일반적 방식에서 벗어나 사단과 칠정 모두 리발일도
(理發一途)로 설명하는 방식으로 나아간 것이다.
사단과 칠정 가운데 어느 것이 리발이 아니겠는가? 나누어지는 연유를 말하면 다음
과 같다. 외부 사물을 감할 때 이 리가 곧 응하여 처음부터 형기의 매개가 없는 것을
사단이라고 한다. 외부 사물이 형기를 촉발시킬 때 형기가 매개되고 여기에 리가 응하는
것을 칠정이라고 한다.49)
48) 丁時翰, 愚潭集 권9, 「壬午錄」: “朱子雖在氣中, 理自理氣自氣, 不相夾雜之謂性云者, 以其理氣妙
合之中, 理常爲主, 氣常爲輔. 雖在氣中, 不囿於氣, 命氣而不命於氣之云爾, 非以爲理氣各在一處而
不相妙合也.; 愚潭集 권4, 「答李翼升別紙甲申」: 鄙說亦謂妙合之中, 理常爲主, 氣常爲輔. 雖在氣
中, 不囿於氣云爾, 則非敢認爲一物而無所分別也.”
76 泰東古典硏究 第33輯
사단과 칠정이 발현하는 방식은 기본적으로 외감-내응하는 구조를 벗어나는 것
은 아니지만,50) 형기의 매개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사단과 칠정이 구분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특징적인 것은 역시 칠정을 리발로 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성이 발현하여 정이 된다.”[性發爲情]는 성리학의 핵심 명제를 벗어나지 않으면서
사단과 칠정을 설명해내는 방식이다.
모든 감정은 본성의 발현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사단과 칠정을 리발
로 설명해낼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묘맥에 구별이 있기 때문에 사단과
칠정을 구별하여 설명할 수도 있게 된다. 본성의 단서가 칠정을 관통한다는 말과
칠정도 선하다는 이름이 생긴 것은 리가 위주가 되는 상태로 설명한 것이다. 그리
고 여기에서 “리주기지(理主氣地)”라는 성호의 리기론에 대한 기본태도를 확인할
수 있다.51)
그러나 성호의 사칠신편은 리기불상리(理氣不相離)의 원칙을 벗어날 소지가
다분히 존재하는 위험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외감-내응의 구조를 인정한다고 하
더라도 사단을 형기의 매개가 없이 이루어지는 리발로 정의할 경우, 이는 리기불상
리의 원칙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후 성호는 하빈 신후담과의 논의를 거쳐
「중발(重跋)」을 완성시키고 외감-내응의 전체과정을 “리발(理發)”이 아닌 “리발기
수(理發氣隨)”로 설정하고 이를 만년까지 고수하게 되었던 것이다.52)
49) 李瀷, 四七新編, 「讀李栗谷書記疑」: “四端七情, 孰非理發? 以其緣由之分言, 則外物感而此理便
應, 初無形氣之媒者謂之四端; 外物觸於形氣, 形氣爲媒而理於是應者謂之七情.”
50) 李瀷, 四七新編, 「七情便是人心」: “夫感物而動, 四七皆然. 感者, 物來感我也.【程子說】動字與中庸發字無異.【朱子說】物, 外物也; 性, 吾性也; 形氣, 吾形氣也. 自外來感者謂之感也; 自吾動
者謂之發也.”
51) 李瀷, 四七新編 「七情橫貫四端第六」: “七情亦理發, 無理做出來不得. 但爲苗脈有別, 故氣發之名
始起. 然性之端, 常貫於七者之中, 故理乘之名始起. 理雖在中, 氣爲田地, 而易流於惡, 故有善有不
善之名始起. 然理乘之爲主, 則便是四端之流行, 故七情亦善之名始起.”
52) 李瀷, 星湖集 권17, 「答李汝謙」: “心之感應, 只有理發氣隨一路而已.; 星湖集 권17, 「答愼耳老
」: 來諭云四端發處所乘之氣, 是知覺之氣; 七情氣發, 是形氣之氣, 兩氣字所主本異. 而自退溪理氣
相須之說, 未免混淪, 此段見得卓然, 深所欽歎. 又以鄙說爲同歸, 抑其未察矣. 瀷所主張分界, 專在
乎此, 其曰理發氣隨, 四七同然. 若七情之氣發, 則於理發氣隨上更有一層苗脈者是也. 這氣也, 是形
氣也. 與理發氣隨之氣不同, 謂理發氣隨之知覺, 因形氣而發也. 近有答人書云氣有大小, 形氣之氣
屬之身, 氣隨之氣屬之心, 形大而心小也, 比前加密. 願更入思議焉. 退溪理發氣隨氣發理乘二句, 本
合活看.” 「答李汝謙」은 「중발」이 성립되기 1년 전에 성립된 것이지만, 자신하지 못하다가 하빈
신후담의 조언으로 자신의 설로 완전하게 확정짓는다. “近有答人書云”은 「答李汝謙」의 내용을
가리킨다. 안영상, 「퇴계학파 내 호발설의 이해에 대한 일고찰-성호․청대․대산의 논쟁 비교
17~18세기 퇴계학파의 율곡학파에 대한 대응의식과 사상사적 지평 77
성호에 의해 마련된 “리발기수”라는 명제는 하빈의 조언으로 확신을 갖게 되어
자신의 학설로 삼은 것으로, 외감-내응의 구조적 맥락을 벗어나지 않는 한편 리기
불상리의 원칙을 어기지도 않으면서 자신이 줄곧 견지해왔던 리발을 설명하는 데
에 적합한 것이었다. 즉 “리발기수(理發氣隨)”의 “기(氣)”가 사단인 경우 “심기(心
氣)”가 되고 칠정은 “신기(身氣)”가 된다는 설명으로, 리발기수는 사단과 칠정이
모두 같지만 칠정이 발현할 때에는 “심기” 위에 하나의 묘맥이 더 있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신기”라는 것이다.
성호의 사유가 발전하는 데에는 영남남인인 청대 권상일과의 사단칠정에 대한
논의가 한몫을 하였다. 그러나 청대의 경우 사단과 칠정이 리선기후나 기선리후와
같은 실질적 호발설이 성립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반면, 성호는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러한 성호의 견해와 유사한 이가 바로 대산 이상정이다.
대산 역시 당대 청대의 견해가 주자학의 본지에 어긋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53)
근래 리기론을 말하는 사람들은 불상리의 측면을 위주로 생각함으로 리를 말라비틀
어진 고목처럼 죽은 것으로 인식하고, “동정과 개벽 모두는 기의 기틀이 저절로 그러한
것이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보는 것이 잘못이라
고 하여 또 다시 리와 기를 상대적인 것으로 보고 각각 스스로 발용한다고 하면, 이것은
오류를 바로 잡으려다 더 심한 오류에 빠지는 꼴이니, 이 역시 잘못된 것입니다.54)
대산은 화담 서경덕이 주장하고 율곡이 계승했던 “기가 스스로 그 자신의 원인
성을 갖는다.[氣機之自爾]”는 학설을 비판하며 자신의 논의를 전개해 나간다. 즉 기
가 그 자체로 운동의 원인을 갖게 되면, 더 이상 리는 원인이 될 수 없기 때문에
리는 고목처럼 말라죽어버린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러
를 통하여」(퇴계학보 115, 2004), 137~138쪽 참조. 사칠신편의 理發一途說과 「중발」의 理發
氣隨一途說을 병치하여 설명하고 있는 논문들이 상당수 있는데, 이는 재고되어야 한다.
53) 청대 권상일의 시간적 호발설에 대해서는 안영상, 위의 책, 141~149쪽 참조.
54) 李象靖, 大山集 권6, 「答權淸臺」: “近世爲理氣之說者, 其主於不相離, 則殆認理爲枯槁死物, 凡動
靜闔闢, 皆氣機之自爾, 固失之遠矣. 而病其爲此, 則又若以理爲與氣相對, 而各自發用, 恐是矯枉過
直, 是亦枉而已矣.”
78 泰東古典硏究 第33輯
한 오류를 바로잡고자 하여 리와 기를 완전히 분리하고 서로 상대적인 것으로 생각
한다면, 이 역시 오류를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고 대산은 생각하였다. 예컨대 청대
권상일과 같이 리와 기가 시간적 간격을 다르게 하고 서로 발출한다는 호발설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내가 퇴계 선생의 학설을 살펴보니, 혼륜으로 말한 것은 리와 기가 서로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미발 상태에서는 성이 되고 이발 상태에서는 정이 된다는 것이었다. 칠정을
말하면 사단은 그 가운데 있다. 분개로 말하는 것은 성에 본연과 기질의 차이가 있어서
그 발출하는 것을 보면 소주(所主)와 소종(所從)의 구분이 드러난다는 것이다.55)
대산에게 혼륜이란 것은 미발 상태에 있는 성이 이발 상태의 정으로 드러나는 “성
발위정(性發爲情)”의 명제를 말하는 것이다. 즉 혼륜은 감정발현의 전체 구조를 설명
하는 것인데, 이 때는 칠정이 비록 본연지성에서 발현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성발(性
發)”이나 “리발(理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56) 결국 대산이 언급하는
호발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리발기수지는 리가 기 없이 먼저 발하고 난 뒤에 기가
그 뒤를 따른다는 의미가 아니라, 리와 기가 함께 하면서 리가 위주가 되는 것이 사단
이 된다는 것이고, 기발리승지는 기가 먼저 발하고 난 뒤에 그 뒤에 리가 탄다는 의미
가 아니라, 리와 기가 함께 하면서 기가 위주가 되는 것이 칠정이 된다는 것이다.
사단과 칠정의 분개와 혼륜에 대한 입장은 대산이 주장하는 “리주기자(理主氣
資)”라는 명제에 의해 뒷받침 된다. 즉 리란 동정의 묘로써 위주[主]가 되고, 기란
동정의 기틀로써 재료[資]가 되는 것이다.57) 다시 말하면, 리는 기의 주인으로서의
55) 李象靖, 大山集, 권20, 「答李希道甲子」: “竊觀李先生說渾淪處, 就理氣相成之中, 以未發爲性, 已
發爲情. 言七而四在其中; 說分開處, 就性有本然氣質之異, 見其所發, 有所主所從之分.”
56) 李象靖, 大山集, 권20, 「答李希道甲子」: “蓋不分理氣渾淪而言, 則七情之中四端包攝在裏. 此時
何嘗言七情屬於氣哉? 惟與四端對擧, 然後有主理主氣之分. 今以七情爲屬於氣則已, 與四端屬理者
對待, 而以中節者爲不異於四端, 則恐於分析處有未精也.”
57) 李象靖, 大山集, 권7, 「重答李仲久別紙」: “蓋聞理者所主以動靜之妙也; 氣者所資以動靜之機也.
故主理而言, 則曰理涵動靜【以本體言.】; 曰理有動靜.【以流行言.】 主氣而言, 則曰動靜者氣也; 曰
動靜者所乘之機. 如此平說, 方可並行而不悖.”; 李象靖, 大山集 권6, 「答權淸臺【相一○甲子】」: “蓋理之與氣, 本相須以爲動, 相待以爲靜, 動靜交資, 體用相循. 然理者所主以動靜之妙也; 氣者所資
以動靜之具也. 故據理而統言, 則動靜者固此理之流行也. 就其合而析言之, 則其或動或靜者, 卽陰陽
氣機之往來, 而乘載其上. 主張發揮之妙, 則太極之爲也, 故朱子於此, 分而言之, 以明理氣道器之別.”
17~18세기 퇴계학파의 율곡학파에 대한 대응의식과 사상사적 지평 79
역할을 담당하고 기는 리의 재료로서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리와 기에 대한 정확
한 이해가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성호와 대산은 공히 우담의 사단칠정론에 대한 이론을 근거로 자신들의
정론을 세우게 된다. 리기론의 기본 구조를 나타내는 리주기보(理主氣補: 우담설),
리주기자(理主氣資: 대산설), 리주기지(理主氣地: 성호설)는 공히 성발위정의 명제
를 확보하기 위한 이론적 토대이고, 이를 기초로 하여 리발기수(理發氣隨)의 일원적
토대를 공통적으로 마련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갈암을 비롯한 영남학파 내의
분개설을 강조하여 율곡학파와의 대결구도에서 벗어나 퇴계학파[영남과 근기]를 결
속하고, 율곡학파의 학문적 비판을 무마시키려는 의도에서 생겨난 것이 아닌가 한다.
5. 결론
성호 가문은 섬계와 옥동 이전까지는 영남의 퇴계학파와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
로 깊은 유대관계를 이루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섬계의 장살사건과 옥동의 퇴계학
으로의 학문적 전환을 기점으로 퇴계학파와 유대관계를 개척하기 시작하였고, 성
호의 퇴계 학문에의 침잠과 퇴계학파와의 교류를 통해 근기남인의 퇴계학파 일원
으로서의 자격을 갖게 된다. 번암에 의해 마련된 퇴계→한강→미수→성호의 학문
적이고 정치적인 계보는 이와 같은 성호의 노력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대산 가문은 갈암과 밀암에 의해 주도된 퇴계학의 수호와 퇴계학파의 결속과 확
장을 계승하였다. 갈암과 밀암 당대부터 율곡학파는 순수하게 학문적으로 전개된
퇴계와 고봉의 사단칠정논쟁에서 싹튼 퇴계의 호발논의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학
문적 순수성을 율곡에게 돌리는 한편, 정치적으로 남인 세력을 와해시키려고 하였
다. 이에 갈암을 비롯한 퇴계학파에서는 율곡학파의 비판에 대한 반박을 통해 퇴계
학을 수호하는 한편, 서인화되고 있는 영남남인을 결속시키고, 더 나아가 근기남인
과 제휴하여 퇴계학파의 확장을 꾀한다.
17~18세기 퇴계학파의 거유인 성호와 대산은 근기남인과 영남남인을 대표하는
인물로 당대 남인의 시대의식을 함께 공유하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퇴계학문의 수
80 泰東古典硏究 第33輯
호와 퇴계학파의 결속이 바로 그것이다. 율곡학과 퇴계학의 대결구도에서 가장 중
심이 되었던 것이 사단칠정론에 대한 시각차였기 때문에, 성호와 대산은 모두 퇴계
학의 입장에서 자신의 사단칠정론에 대한 학설을 수립해나간 것이다.
성호는 처음에 사칠신편에서 “리발일도설”을 주장하였지만, 이는 사단이 형기
의 매개 없이 발생하는 문제를 갖게 되었기에 다시 숙고의 과정을 거쳐 “리발기수
일도설”로 자신의 학설을 확정한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인물이 바로 식산과 하빈
이다. 식산은 우담과 갈암 등 영남유학자들의 학문과 인사들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
주었으며, 하빈은 성호가 리발기승일도설에 확신을 갖게 해주었다. 성호의 사단칠
정론에 대한 해석에서 퇴계학문의 올바른 이해와 함께 퇴계학파의 일원으로 들어
가고자 하는 열망의 단초를 확인할 수 있다.
대산은 밀암에게 친히 「태극도설」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기에 그의 사단칠정론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는 분개설에 입각한 것이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 그러나 대산은
우담의 이론적 영향[七包四와 理主氣補] 아래 혼륜설에 입각한 분개설을 주장한다.
그의 이론도 성호의 확정된 이론과 마찬가지로 리발기수일도설이라 할 수 있으며,
그에 대한 리기론적 이해는 리주기자(理主氣資)였다. 특히 칠포사를 수용하는 것은
율곡학파의 사단칠정론을 부분적으로나마 인정하는 것을 뜻하는데, 이를 통해 대산
이 사단칠정론을 대결이 아닌 포용의 기재로써 사용하고자 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요컨대, 성호학파는 물적 토대와 정치 기반이 약하였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학문적이고 정치적인 연대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대상은 동국(東國)의 추로지향
(鄒魯之鄕)의 상징인 영남이었던 것이다. 반면 대산학파는 재지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지만 당대 영남남인의 학문적이고 정치적인 분화, 예컨대 영남남인의 서인화
경향 등으로 인해 느슨해진 퇴계학파의 결속을 확고히 하는 한편, 다양한 세력을
규합하여 노론 정권에 대응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에 근기남인과의 학문적이고
정치적인 교류가 필요했던 것이다.
논문제출 : 2014년 12월 18일∥심사마감 : 2014년 12월 26일∥게재결정 : 2014년 12월 26일
17~18세기 퇴계학파의 율곡학파에 대한 대응의식과 사상사적 지평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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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泰東古典硏究 第33輯
The Horizon of the Four-Seven Theories of
Teogye School in 17th and 18th Centuries
Jeon, Sungkun
During the 17th and 18th centuries the teogye school have been confronted by
yulgok school’s academic and political pressure. The former is to criticize the hobal
theory(互發說) which teogye purport and the latter is to cajole teogye school into
agreeing to sympathize with noron’s opinion. Therefore teogye school thinking of
its responsibilities which prepare to counterattack strengthen and extend its union.
In this paper we will keep on eye on two leaders which one is daesan who is
a leader of yeongnam groups and the other is sungho who is a leader of sungho
groops. Although they have never met each other, they was sharing the awareness
of historical consciousness and sense of responsibilities of academics and politics.
Sungho synthesize to unify the variety of opinions on the four-seven theories into
liju-kiji(理主氣地), while daesan put together to unify the variety of opinions on the
four-seven theories into liju-kija.(理主氣資) By the way, their assertions like these
goes up stream to the woodam’s liju-kibo.(理主氣補) Finally, the horizon of the
four-seven theories of teogye school in 17th and 18th Centuries proceeds toward
the same spot.
Key Words : Sungho, Daesan, Woodam, Libalkisu, Four-Seven The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