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황진이 ᆢ
ㅡ소설 황진이를 중심으로/ 유양희
김탁환의 역사소설 조선왕조실록 11 [나, 황진이]는 여성을 '나'라는 일인칭으로 쓴 첫 장편소설이다. 그가 이 소설을 쓰기 전에 검토한 황진이에 관한 대부분의 소설은 그녀가 기생으로 가장 빛나던 시절만을 다룬 것이었다. 이와 달리 김탁환은 황진이가 세파를 겪고 난 후 화담 서경덕 문하에 들어갔던 시기에 주목해서 썼다.
16세기 중엽부터 서경덕, 김인후, 이황, 조식 등 전국에서 학파가 생겨 났지만, 여성을 동학同學으로 받아들인 곳은 화담花潭 서경덕
(1489~1546) 학파가 유일했다. 화담은 글공부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해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이었다. 평민도 받아들이지 않았던 당시에 기생을 제자로 받아들인 것은 파격적이었다. 한때 황진이가 화담을 유혹했으나 실패한 뒤 그의 학문과 고고한 인품에 매료되어 사제 관계를 맺었다는 일화가 있다.
그에게서 학문을 배우던 중 꽃못의 깊은 밤, 깊은 산, 깊은 골, 외판집 단칸방에 화담과 황진이 단 두 사람이 함께 밤을 보내게 되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화담을 유혹했으나 그는 말없이 황진이의 감겨드는 몸을 풀어냈다. 병신이라면 모를까 제아무리 도통한 성인군자라 할지라도 계집이 제 먼저 달라붙어 껴안고 주무르는데 숨소리 하나 달라지지 않으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황진이는 그가 화산처럼 터져 오르는 정욕과 치열하게 싸워서 이겨 자기의 격을 지키려는 데 탄복했다. 그 후 그녀는 화담과 사별 하기까지 사제지간으로 지냈다.
화담의 사후 어느 날, 황진이와 같은 시기에 화담의 제자였던 허엽 (1517~1580, 허봉, 허균, 허난설헌의 아버지.)은 서경덕의 제자로 훗날 동인의 영수가 된다. 황진이에게 화담에 대한 회고의 글을 부탁했을 때 이렇게 말했다
해어화解語花(기생)란 외운 대로 노래 부르고 익힌 대로 춤추며 바늘을 태산으로 부풀리고 바다를 술 한 잔으로 줄이면서 겉멋만 부릴
따름이라고들 하지요. 참된 것을 얻고 싶다면 어리석은 이 사람의 기억이 아니라 꽃못花澤을 찾았던 사대부를 수소문하는 편이 나을 겁니다.
ㅡ김탁환, '나, 황진이., 민음사, 2017, 10쪽
스스로 기생이 되어 '명월'이라는 기명으로 살았던 황진이, 자신이 위와 같이 어리석은 부류로 불리는 존재임을 상기시키며 허엽의 요청을 완곡히 사양하는 낮은 자세의 그 품격이 오히려 높다.
한편 전경린의 <황진이>는 처음으로 여성 작가가 황진이에 관해 쓴 소설이다. 작가는 자신의 비극적인 운명의 굴레에 저항하고자 했던 황진이의 삶을 조명했다. 소설의 말미에 서경덕이 유랑을 다녀온 황진이에게 "진아, 네게서 몸은 무엇이더냐?" 하고 묻는데 황진이가 답하기를, "제게 몸은 길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길을 밟으면서 길을 버리고 온 것처럼 저는 한 걸음 한 걸음 제 몸을 버리고 여기 이르렀습니다 사내들이 제 몸을 지나 제 길로 갔듯이 저 역시 제 몸을 지나 저의 길로 끊임없이 왔습니다. 길이 그렇듯. 어느 누가 몸을 목적으로 삼고 누가 몸을 소유할 수 있으며 어찌 몸에 담을 치겠습니까? 길이 그렇듯, 몸 역시 우리 것이 아니지요. 단지 우리가 돌아가는 방법이지요."라고 했다.
허균의 성옹식소록惺翁識小錄에서 "지족 노선老禪은 삼십 년이나 면벽 수도를 했는데도 나한테 꺾이었다. 화담 선생만은 나하고 몇 해를 가까이 지냈는데도 끝내 문란한 지경에 이지는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 화담의 인격에 감화받은 서경덕을 황진이는 평생 흠모했다고 하며 스스로 화담과 송도의 박연폭포에 자신을 더해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칭했다.
서경덕의 가슴엔들 어찌 여인에 대한 그리움이 없었겠는가. 다음은 그가 사제지간으로 지낸 황진이를 그리워하며 지은 시조로 알려져 있다.
마음이 어린 후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만중운산萬重雲山 에 어느 님 오리마는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그인가 하노라
당대의 유명한 도학자가 아무 거리낌 없이 황진이에 대해 이토록 진솔한 표현을 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절제된 기품 있는 표현으로 당시 남녀관에 대한 일상적 카테고리를 초월한 면에서도 격조 높은 시조로 여겨진다. 황진이는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내 언제 무신無信 하여 님을 언제 속였관대
월침삼경月沈三更에 올 뜻이 전혀 없네
추풍秋風에 지는 잎 소리야 낸들 어이 하리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