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125](월) [동녘이야기]
[허균 얼 톺아보기] 성소부부고 살피기 024#
✦권4 문부1 서(序) / 청계집(淸溪集) 서(序)
https://youtu.be/94z-WFGZlsg
오늘도 지난번에 이어 그 다음 순서인 청계집(淸溪集) 서(序)를 읽으려고 합니다. 허균의 성소부부고 살피기를 이어 가는 것이지요. 허경진 선생님이 풀이해 놓으신 것을 중심으로 삼고 있고 있음을 밝힙니다. 바로 들어가 보겠읍니다.
내가 지난 임오년(1582) 아직 젊을때에 돌아가신 형님 하곡(荷谷, 허봉의 호) 선생을 모시고 앉았는데 마침 손곡(蓀谷, 이달의 호) 이익지(李益之, 익지는 이달의 자)가 《용성창수집(龍城唱酬集)》이란 책 한 질을 소매 속에 넣어 가지고 와서 물었다.
“제가 연전에 남원에 갔을 때 백창경(白彰經, 창경은 옥봉 백광운의 자)·임자순(林子順, 자순은 백호 임제의 자)·양사진(梁士鎭, 사진은 청계도인 양대박의 자)과 함께 노닐었는데, 이 시집은 바로 그때 시나 노래 따위를 한쪽에서 부르고 다른 쪽에서 화답하는 ‘창화한 시들’입니다. 네 사람의 작품 가운데 누가 높고 낮은지요?”라고 묻자 선생이 소리 높여 읊조리시다가 한참 만에 “여러분의 시가 모두 맑고 산뜻하지만 좋게 하기에만 힘을 써 말이 좀 미끄러지니, 아무래도 원만하고 완전히 익은 순숙한 양(梁)의 시만은 못하오”라고 하시니 손곡이 깊이 수긍하였다. 나는 비로소 남국(南國)에 양군(梁君)이 있음을 알았다.
북해(北海) 등계달(滕季達, 1572년에 등극사 한세능을 따라 우리나라에 왔던 명나라 문인으로, 허봉이 2년 뒤인 1574년에 명나라에 성절사의 서장관으로 갔을 때 북경에서 만남)의 《번경칠자시(藩京七子詩)》를 읽어보니 양군도 그 가운데 있어 더욱 더 그 사람이 귀중하다는 것을 알게 됨과 동시에 한번도 만나보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경인년(1590) 가을에 화중(허등을 가리킨 듯)의 처소에서 양군(梁君)을 보게 되었는데 고운 용모는 옥이 맑고 봄이 온화하듯 하였고, 맑은 움직임은 노을이 오르듯 구름이 퍼지듯 하였다. 고금의 성패와 현인 호걸의 출처를 이야기하는 데 있어서는 줄줄 막힘이 없어 마치 구술을 꿴 것 같고 하수(河水)를 쳐서 바다로 쏟는 듯하였다. 아! 역시 기이한 사람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나는 이때부터 그와 사귀면서 자주 찾아다녀 날마다 듣지 못하였던 것을 듣고, 그가 지은 시를 보았는데 필치가 ‘도도하여 가는 것’은 냇물이 흐르듯, ‘그친 것’은 산이 우뚝하듯 하였다. 재료를 선택하는 것은 당(唐)의 법을 받았고, 강서파(江西派)에 넘나들어 천고 시문(詩文)을 짓는 사람인 사인(詞人)의 우아한 운치를 다하였다. 나는 속으로 존경하고 감복하여 마지않았다.
임진년(1592)에 해상에서 난리를 피학다가 남쪽에서 온 사람이 군(君)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개인 재산을 기울여 결사대를 모집하여 태헌공(苔軒公, 고경명의 호)에게 주어 왜에게 항거했는데 충의가 강개하고 분발하여 남방의 사기를 고무시키고, 순국하였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나도 모르게 옷소매를 떨치고 일어서서 그 절개와 의협이 국사(國士)의 풍모가 있어 한낱 구구한 선비가 아님을 더욱 감탄하였다. 나중에 서애(西厓. 류성룡의 호) 상공의 양군전(梁君傳)을 읽고서 그가 이미 세상 떠난 것을 알고는 또 따라서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고 아까워하였다.
정유년(1597) 봄에 나는 굉사과(宏詞科, 문장 3편을 내어 뽑는 과거시험)에 장원하였는데 군의 아들, 자점(子漸) 양경우(梁慶遇)가 비로소 현서(賢書)를 추천하면서 아버지와의 우의(友誼)로 인하여 찾아왔기에 보니 온화하고 우아하며 문장이 풍부하여 그 집안의 명성을 능히 떨칠 사람이었다. 내가 다시 군의 남은 복이 후사에게까지 미침이 이와 같음을 알게 되었으니 하늘이 착한 사람을 도운 것이라 하겠다.
내가 진주(眞珠, 삼척을 이름) 고을을 파하고 돌아오자 자점(子漸)이 우리 집을 찾아와 세상 떠난 부친(양대박)의 원고를 맡기며 말하였다. “아버님의 시는 내세에 보일만하기에 이제, 판각을 계획하여 썩지 않게 하려는데 지금 세상에 재주를 아끼고, 선비를 사랑하는 이가 선생님(교산)같은 사람이 없고, 우리 아버지(사진 양대박)를 알아주고 감탄하고 칭찬하던 이도 선생님(교산)같은 사람이 없으며 풍치가 있고 우아한 데가 있는 풍아(風雅)를 드날려 뒷사람에게 믿음을 전함도 선생(교산)님 같은 사람이 없읍니다. 선생(교산)님께서 한마디 말로써 서(序)하여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내가 말하였다. “그대의 선친께서 포부가 남달랐으니 국법에 구속되어 끝내 그 포부를 펴지 못하고 뜻만 간직한 채 죽고 말았으니 이는 지사(志士)들이 모두 탄식하였오. 그나마 북해(北海)가 해내(海內)의 선비로되 그를 찬(讃)했고, 하곡(荷谷, 허봉)은 한 세상에 안중에 찬 인물이 없었는데 그를 자주 칭찬하였으며 서애(西厓, 류성룡) 상공은 밝고 지혜로운 군자였는데 그 행적을 전하였오. 그러니 나같이 글 못하는 사람이 어찌 감히 문장이 거칠고 졸렬하다 하여 사양하겠오?”
그리하여 보고 들어 마음에 아끼고 정이 갔던 것을 이와 같이 써서 그 청에 보답하는 바이다. 그의 시문은 삶은 밤과 옷감(베와 비단)인 숙률포백(菽栗布帛)과 같으니 보는 사람이 마땅히 스스로 알고 보배로 여길 것이므로 더 이상 덧붙이지 아니한다.
이렇게 하여 겨우 읽기를 마쳤읍니다.
이런 오늘도 고마움으로 교산 허균의 청계집 서를 힘차게 읽습니다. 정말, 고마워요.
첫댓글 오늘도 많이 늦었읍니다.
한 3시간 늦었네요.
읽는 데에도 많은 시간이 들었읍니다.
다 이해하면서 읽느라고 시간이 많이 든 셈입니다.
'교산 허균 얼 톺아보기'입니다.
기회가 되시면 한번, 살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