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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형제회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마태 13,47-53
주님께서는 먼저 ‘그물의 비유’를 드십니다. 그물은 온갖 종류의 고기를 함께 모아들이고, 좋고 나쁜 것은 마지막에야 가려집니다. 교회도, 세상도, 우리 마음도 지금은 좋고 나쁜 것이 뒤섞여 있습니다. 그러니 성급히 단정하지 말고, 마지막 ‘가려냄’은 하느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 모든 비유를 매듭짓는 한마디를 주십니다. “하늘 나라의 제자는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집주인’에서 균형 잡힌 지혜를 봅니다. 참된 제자는 ‘옛것(율법과 예언자, 곧 오랜 전통)’도, ‘새것(복음, 곧 그리스도)’도 함께 간직한 넉넉한 곳간을 지닙니다. 새것이 좋다고 옛것을 내버리지 않고, 옛것이 익숙하다고 새것을 막지 않습니다. 그는 때를 따라 알맞은 보물을 꺼내 쓸 줄 압니다. 크리소스토모는 말합니다.
이 ‘새것과 옛것의 조화’가 성숙한 신앙의 표징이라고. 성모님은 이 집주인의 가장 온전한 모범이십니다. 그분은 이스라엘의 ‘옛 약속’을 가슴에 품으셨고, 그 약속의 ‘새로운 성취’이신 그리스도를 모셨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셨습니다.’ 간직하고 되새기는 그 마음이 옛것과 새것을 잇는 곳간이 되었습니다.
영성 주간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의 마음도 그런 곳간이 되어야 합니다. 오랜 기도와 전례, 교부들의 지혜라는 ‘옛 보물’과, 성령께서 오늘 새로 주시는 ‘새 보물’을 함께 품고 분별하여 꺼내 쓰는 곳간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새것이 좋다고 옛것을 함부로 버리지 않는가?
나는 옛것에 갇혀 성령의 새로움을 막지 않는가?
나는 좋고 나쁨의 ‘가려냄’을 하느님께 맡기는가?
나는 성모님처럼 마음에 간직하고 되새기는가?
주님,
새것과 옛것을 함께 간직하는 넉넉한 곳간을 주소서. 성급히 단정하지 않고 마지막 가려냄을 당신께 맡기게 하시며, 성모님처럼 마음에 간직하고 되새기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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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나는 못난 놈일까? 못된 놈일까?>
오늘 예레미야서 하느님은 옹기장이이시고, 우리는 그 옹기장이의 작품 곧 옹기입니다. “이스라엘 집안아, 옹기장이 손에 있는 진흙처럼 너희도 내 손에 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까불지 말라고 하시는 것처럼 들립니다. 우리말로 바꾸면 너는 내 손 안에 있다는 말일 것입니다. 서유기에서 손오공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부처님 손바닥 안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진정 하느님 손에서 벗어날 수 없는 유한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작과 끝이 하느님 손에서 시작되고 끝이 난다는 말이고, 우리의 창조와 구원이 하느님께 달려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존재의 시작은 옹기장이이신 하느님 손에 들린 진흙이었습니다.
이것은 창세기 2장을 연상케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가 사는 땅에 내려오시어 손수 우리를 빚으시는데 그때 하느님께서는 옹기장이처럼 흙으로 우리를 빚으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사순절 재의 예식 때 너희는 흙 또는 먼지이니 흙으로 돌아가고 먼지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라고 할 때의 그 흙입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창조가 보잘것없는 또는 하찮은 것이란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목숨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코에 불어넣어주신 당신 숨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얼이 우리 안에 들어있다는 말이고, 우리의 얼굴은 이 얼에서부터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옹기에 흠이 났다는 말입니다.
“옹기장이는 옹기그릇을 만드는데 옹기그릇에 흠집이 생기면 자기 눈에 드는 다른 그릇이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그 일을 되풀이하였다.”
우리라는 옹기에 흠집이 생겼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이 흠집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 겁니까?
나에게 있는 겁니까? 창작자이신 하느님께 있는 겁니까?
우리는 못난 놈입니까? 못된 놈입니까?
우리말에서 못난 놈이라고 할 때는 부모 욕이 되고, 못된 놈은 부모는 잘 낳았지만 자기가 잘못된 겁니다. 그리고 정말 못된 놈은 자기가 잘 못 되고서는 부모가 자기를 잘못 낳았다고 부모를 탓합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 부모는 우리를 잘못 낳을 수 있어도 하느님은 그러실 분이 아니라는 것이 우리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옹기장이가 계속 옹기를 다시 빚는다는 말은 어떤 뜻입니까?
우리 인간이 장애가 의심되면 뱃속에 지워버리듯 그러신다는 말입니까?
실패한 창작품은 버리고 새로운 작품을 만드신다는 뜻입니까?
그런 뜻이 아니라 당신의 작품에 흠집이 생겨도 다시 빚어주신다는, 곧 재창조해 주신다는 뜻이고 구원 행위를 반복하신다는 뜻일 겁니다.
이제 곧 행진을 출발해야 하기에 오늘 여기까지 나누겠습니다. 다듬지 못하고 올렸음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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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형제회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우리는 비록 죄인이지만 악인으로 남지 않고 의인으로 변화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오래된 것들을 곳간에서 꺼낸다는 것이 무언지를 알 것 같기는 한데.… 곳간에서 새것을 꺼낸다니…
곳간에 보관되어 있으면 무엇이든 시간이 지나면서 저절로 오래된 것, 즉 옛것이 되고 말지 않습니까?! 말하자면 새로운 것들도 곳간 혹은 창고에 들어가는 순간 그것은 곧 낡아지기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새로운 것을 곳간에서 꺼낼 수 있다는 말인가요?
예수님의 말씀은 오래된 것이 다시 꺼내어지는 순간 새로워진다는 뜻입니다만,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우리 상식의 눈으로는 가능한 것이 아니니까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물질 세계에서의 일반 상식으로가 아니라 곳간에서 꺼낸 것에 새로운 빛을 비추어 주는 방식으로는 가능한 것일 겁니다. 달리 말해 곳간에서 꺼낸 물건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볼 때마다 그것은 끊임없이 새롭게 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는 어떤 물질 세계의 물건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늘 나라의 진리, 그리고 사랑과 자비와 용서와 같은 형이상학적, 혹은 물질 세계를 초월하는 것과 같은 것에 관한 비유입니다. 그래서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진리를 곳간에서 꺼낸다는 것은 어떤 물질 덩어리를 창고에서 끄집어내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것은 현재 안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발견입니다.
이런 새로움은 계속해서 새로운 빛을 비추어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마음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사실 모든 것은 전에 있던 것에서 비롯됩니다. 누군가가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다른 누군가의 새로움에 새로운 무언가를 다시 보태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전의 새로움은 옛것이 되는 것이고요.…
하지만 그 옛것마저도 여전히 새것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거기에 새로운 빛을 비추고 새로운 눈으로 보고자 한다면 말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어두운 방에 빛이 들어올 때, 우리는 빛이 어둠에서 비롯되었다거나 어둠이 빛을 일으켰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문이 열리고 빛이 들어온 것입니다. 그리고 과거를 되새김한다는 것은 단순히 옛것을 옮겨 놓는 일이 아니라, 그 안에 새로운 빛이 스며들도록 길을 여는 것입니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과거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과거에 새로운 빛, 사랑의 빛이 스며들도록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될 때 이제 그 과거는 더 이상 옛것이 아니라 새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통해 이루어지는 용서의 신비인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에 관한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하늘 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 던져 버릴 것이다.…"
하늘 나라가 악인들을 걸러내어 의인들을 모아들이는 곳(?)이라는 말씀은 이해가 가지만, 예수님께서는 왜 굳이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요?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시려는 것일까요?
아마 그렇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의인을 모아들이는 하늘 나라에 의인으로서 들어가기 위해서라면, 성경, 특히 신약성경과 복음서의 의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우리는 깊이 성찰해 볼 필요가 있을 겁니다!
그들은 대개 우리가 죄인들, 병자들, 사회의 중심에서 밀려난 이들이었지만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 사랑(진리)을 새롭게 발견한 이들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비록 죄인들이고 또 죄인으로 낙인 찍힌 이들이지만 그들은 새로운 눈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의식하고 발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독서인 예레미야서에서 하느님께서 예레미야를 옹기장이에게 데리고 가서 하신 말씀을 떠올려 봅시다. 하느님은 죄인이 당신의 사랑을 새롭게 발견하여 당신께 돌아오기를 끊임없이 기다리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옹기장이가 자기가 생각하는 완벽한 옹기가 나올 때까지 흠집이 있거나 잘못된 옹기를 깨 버리면서 계속해서 새 옹기를 만드는 모습을 보여 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내가 이 옹기장이처럼 너희에게 이렇게 할 수 없을 것 같으냐? 이스라엘 집안아, 옹기장이 손에 있는 진흙처럼 너희도 내 손에 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의 부족함을 크든 작든 계속해서 품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그런 하해 같은 하느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말입니다.
우리는 비록 죄인이지만 악인으로 남지 않고 의인으로 변화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니 어찌 이 희망을 버리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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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형제회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희생 제물이 아닌 자비를 선택합시다!>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경을 사랑의 책으로 읽는 길을 보여주십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사랑의 렌즈를 통해 성경을 읽기
희생 제물이 아닌 자비를 선택합시다!
2026년 7월 29일 수요일
리처드 벡 박사(Dr. Richard Beck)는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지나치게 단순화하려는 유혹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성경이 던지는 긴장과 신비 안에 머물러 있으라고 권고합니다:
성경을 읽는 우리는 서로 다른 가치와 비전 사이에 서 있으며, 이는 말씀을 해석하는 데 새로운 도전을 줍니다. 단순히 "책, 장, 절"만을 따지는 방식은 부족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즐겨 인용하는 구절들 곁에는, 그와 긴장 속에 있는 다른 말씀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단편적으로 인용하는 것은 불가피하게도 결국 말씀의 균형을 잃고 왜곡된 이해를 낳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 안에서 발견되는 긴장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성경을 읽으신 방식을 본받읍시다. 구약의 긴장들을 예수님께서 어떻게 풀어내셨는지를 따라 배웁시다.
예를 들어, 예수님과 바리사이들 사이의 논쟁은 율법(토라)과 예언서 사이의 긴장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안식일 준수와 죄인들을 받아들이시는 예수님의 태도에서 그 모습이 두드러집니다. 바리사이들은 반복해서 레위기를 선택하여 의식적 정결을 인간적 자비보다 앞세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예언자들의 목소리를2026.07.29. 16:013ㅡ 존중하셨습니다. 예수님께는 인간의 고통을 덜어주는 일이 레위기의 금령보다 우선이었고, 사회적 소외를 극복하는 것이 종교적 정결보다 더 귀한 일이었습니다.
마르코 복음 2장 23–28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 먹었다는 바리사이들의 비난에 맞서 제자들을 옹호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여기서 보여주신 해석학은 놀랍습니다. 율법 준수는 인간의 참된 번영을 위한 것이며,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관점에 따르면, 율법 준수가 인간의 번영을 방해하거나 억누를 때는 그것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는 굶주린 제자들이 먹을 수 있도록 동정심을 펼치시며 십계명 가운데 하나를 잠시 제쳐두셨습니다. 복음서 전체에서 반복되는 주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인간의 고통을 덜어주려는 예언자적 관심을, 레위기의 의식적 요구보다 앞세우셨습니다….
호세아 6장 6절의 말씀 —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신의)다" — 은 예수님께서 율법을 읽으신 방식, 곧 율법과 예언서 사이의 긴장을 풀어내신 해석의 열쇠를 간결하게 요약합니다. 바리사이들은 레위기의 정결 규정을 지키기 위해 사회적 거리두기와 도덕적 격리를 강조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예언자 전통을 근거로 하여 모든 이를 품는 식탁 친교를 실천하셨습니다. 율법과 예언서가 충돌할 때,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제물보다 자비를 앞세우셨습니다. 인간의 번영과 존엄, 율법의 더 무거운 정신과 사랑의 실천은 세밀한 의식적 준수보다 우선합니다. 결국 자비가 승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을 "사랑의 책"으로 읽는 길을 보여주십니다. 성경 안에는 낯설고 혼란스러운 계명들이 많지만, 성경 자체가 해석의 원칙을 제시합니다. 곧, 어떤 금령—심지어 십계명 가운데ㅡ 하나일지라도—이 인간의 번영과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자비로운 응답을 방해할 때, 그 금령은 내려놓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갈림길에 설 때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희생 제물보다 자비를 선택합시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교회 생활 안에서 우리는 작은 ‘공동체’, ‘때의 충만함’, 그리고 ‘하느님 나라’를 경험합니다. 저의 기도는,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이 경험이 온 세상의 모든 민족에게 확장되어,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보라, 저들이 서로 얼마나 사랑하는가!"
— Robert C.
References
Richard Beck, The Book of Love: A Better Way to Read the Bible (Broadleaf Books, 2026), 131–134.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Jenna Keiper, untitled (detail), 2020, photo, New Mexico.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마치 시력을 교정하기 위해 쓰는 안경처럼, 사랑은 성경 말씀을 더 깊이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게 해 주는 렌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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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형제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마태오 13,48)
오늘의 복음 말씀은 그물의 비유입니다. 갈릴래아 호수에는 20여 종이 넘는 물고기가 서식합니다. 그 가운데는 먹어도 되는 붕어나 잉어와 같은 것들도 있지만, 율법으로 금지되어 먹어서는 안 되는 메기나 뱀장어와 같은 것들도 있습니다.(레위기 10,10-12) 어부들이 그물을 던지면 온갖 고기들이 함께 잡힙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현존하시는 집이요, 성령의 궁전입니다. 그런데 우리 내면을 들여다보면 늘 좋은 생각과 나쁜 생각, 긍정적인 사고와 부정적인 사고, 하느님을 섬기는 기쁨과 현세의 달콤한 맛에 애착을 둠으로써 맛보는 쓴맛, 희망과 근심걱정 등이 가득합니다. 선악의 갈림길에서 신앙인다운 선택과 결단을 하지 못하고 주저할 때도 많습니다. 나 자신은 물론 인간 세상이 곧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가 사는 호수속 같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이 바로 죄악의 한복판에 있음을 잊은 채 고통이 없는 행복한 세상을 바라며 다음과 같이 묻곤 합니다. 왜 하느님께서는 악을 척결하지 않고 참고만 계실까? 왜 예수님께서는 마음에 드는 선하고 순수한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를 선택하지 않으실까?
오늘의 비유가 답을 줍니다. 그물이 가득 차면 어부들은 물가로 그물을 끌어올려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립니다.”(마태오 13,48) 선과 악이 공존하지만 세상 끝날에는 가려져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악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서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고(마태오 13,50),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입니다.(마태오 23,46)
호수 물속에는 온갖 고기들이 자유롭게 먹이활동을 하며 성장합니다. 그러나 언제 그물에 걸려들어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로 가려질지 알 수 없지요. 그렇게 하느님께서는 악 앞에서 침묵을 지키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려내기 위한 그물을 필연코 던지실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에게만은 그런 날이 당장 오지는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양다리를 걸치며 무사안일하게 무의식이 조정하는대로 움직이고 말하며 살아갈 때가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최후의 순간이 먼 훗날이 아니라 지금 당장 닥칠 수도 있지요. 따라서 매순간 깨어 어떤 선택과 결단을 해야 할지 잘 분별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이 바로 서둘러 회개하고 정의와 선을 행해야 할 때입니다. 그물이 던져지기 전에 하느님의 뜻에 어울리지 않는 원의와 행동을 완전히 가려내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해야 합니다. 나아가 하느님의 선 안에 머물며 다른 이들에게 선을 행하는데 삶의 초점을 모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런 태도가 개인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도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의인과 악인, 사회적 불의와 정의가 공존하는 세상을 그저 감정적으로 비난할 것이 아니라 연대하여 공동선을 이루기 위해 위대한 주님의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악을 폭로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오늘도 내 마음과 한국사회, 교회라는 그물 속을 주님의 눈으로 살펴 적극적으로 사랑과 정의를 실현하는 '좋은 고기'가 되도록 힘썼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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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형제회 이기남 마르첼리노 마리아 수사님]
<기도와 영적 여정 9. 사다리를 오르는 사람들>
귀고의 『수도승의 사다리』와 영적 상승, 인간은 오래전부터 하늘을 향하여 사다리를 놓고 싶어 했습니다. 야곱이 베텔에서 꿈꾸었던 사다리처럼, 땅과 하늘을 이어 주는 길을 찾고 싶었습니다. 그 사다리는 단순한 환상이 아니라 인간 영혼 깊은 곳에 새겨진 갈망의 상징이었습니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신 하느님을 향하여 나아가고 싶은 그리움, 흙으로 빚어진 존재가 영원한 생명을 향하여 손을 뻗는 갈망이 바로 그 사다리였습니다.
중세 수도승들은 이 갈망을 영적 여정으로 정리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도 영향력 있는 작품이 카르투시오회의 귀고 2세가 남긴 『수도승의 사다리입니다. 귀고는 기도를 하나의 사다리로 설명합니다. 그 사다리는 네 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독서, 묵상, 기도, 관상, 이 네 단계는 단순한 기도 방법이 아니라 인간 존재 전체가 하느님께로 올라가는 길이었습니다.
첫 번째 계단은 독서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독서는 정보를 얻기 위한 독서가 아닙니다. 말씀 앞에 오래 머무는 독서입니다.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나를 읽도록 자신을 내어놓는 독서입니다. 말씀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내 삶을 이해하도록 허락하는 시간입니다. 수도승들은 한 구절을 수없이 되새기며 마음 깊은 곳까지 스며들게 하였습니다. 그들에게 말씀은 책 속에 있는 문장이 아니라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현존이었습니다.
두 번째 계단은 묵상입니다. 묵상은 말씀을 머리로 분석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말씀을 가슴으로 품는 일입니다. 읽은 말씀이 내 삶과 만나고, 내 상처와 만나고, 내 기쁨과 만나고, 내 죄와 만나도록 오래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묵상은 성급하지 않습니다. 씨앗이 흙 속에서 천천히 싹을 틔우듯, 말씀이 존재 안에서 생명을 품도록 기다립니다.
세 번째 계단은 기도입니다. 이제 사람은 말씀 앞에서 침묵할 수 없습니다. 말씀을 통하여 자신을 본 사람은 자연스럽게 하느님께 말을 걸기 시작합니다. 감사와 눈물이, 회개와 기쁨이, 찬미와 탄식이, 한 사람의 마음속에서 하나의 노래가 되어 하느님께 올라갑니다. 기도는 더 이상 의무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이를 만난 사람의 자연스러운 응답입니다.
마지막 계단은 관상입니다. 귀고는 관상을 인간이 만들어 내는 행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관상은 선물입니다. 인간이 마지막 계단까지 올라간다고 하여 하느님을 붙잡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실 때, 인간은 잠시 그 사랑 안에 머무르게 됩니다. 관상은 하느님을 소유하는 시간이 아니라 하느님께 사로잡히는 시간입니다. 이처럼 귀고의 사다리는 매우 아름답습니다. 독서가 묵상을 낳고, 묵상이 기도를 낳으며, 기도가 관상을 낳습니다. 인간의 모든 능력은 하느님을 향하여 하나의 방향으로 모여 갑니다. 이 길은 수많은 수도자들의 삶을 변화시켰고, 교회의 영성을 풍성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프란치스칸 영성은 이 아름다운 사다리 앞에서 새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정말 인간이 하느님께 올라가는 것이 먼저일까? 프란치스코는 먼저 하늘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십자가를 바라보았습니다. 그 십자가에는 이미 인간에게 내려오신 하느님이 계셨습니다. 사다리는 인간의 갈망을 말하지만, 십자가는 하느님의 갈망을 말합니다. 사다리는 인간이 하느님께 가려는 이야기라면, 육화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오시는 이야기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프란치스칸 영성은 수도승 전통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 중심을 새롭게 비춥니다. 사다리는 여전히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사다리는 인간이 홀로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하느님께서 먼저 내려오셔서 우리 곁에 세워 놓으신 사랑의 다리 위를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의 기도는 "어떻게 올라갈 것인가?"를 먼저 묻지 않습니다. "이미 내 곁에 오신 그리스도를 어떻게 알아볼 것인가?"를 먼저 묻습니다. 이 질문 하나가 영적 여정 전체를 바꾸어 놓습니다.
독서는 이제 단순히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육화하신 말씀을 바라보는 일이 됩니다. 묵상은 말씀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일이 됩니다. 기도는 하늘을 향한 외침이 아니라, 이미 함께 계시는 하느님과 나누는 사랑의 대화가 됩니다. 관상은 멀리 계신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내 안과 형제 안과 피조물 안에 살아 계시는 그리스도를 알아보는 눈이 됩니다. 그리고 이 길은 성녀 클라라에게 와서 더욱 아름답게 피어납니다.
귀고가 독서-묵상-기도-관상이라는 사다리를 제시하였다면, 클라라는 바라보기-깊이 생각하기-관상하기-닮아가기라는 사랑의 여정을 제시합니다. 사다리는 위를 향해 오르지만, 사랑은 안으로 스며들고 밖으로 흘러갑니다. 이제 기도는 올라가는 기술이 아니라, 사랑을 닮아가는 생명의 변화가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프란치스칸 기도의 독창성이 가장 찬란하게 빛나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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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마태13,51ㄱ)
<'마지막 때에 기뻐 즐거워 하자!!'>
오늘 복음(마태13,47-53)은 '그물의 비유와 비유를 끝맺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 구원을 위한 활동인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던지신 첫 말씀은 이렇습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1,15)
하느님의 나라는 이렇게 예수님에 의해 선포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의 모습, 하느님 나라에 이르는 길을 여러 비유를 통해 설명해 주셨습니다. 마태오 복음이 전하는 그 비유는 '일곱 개'입니다. 곧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가라지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 '보물의 비유', '진주 상인의 비유', '그물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일곱 개의 비유를 다 말씀하시고 나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 그러자 제자들이 "예!" 하고 대답합니다.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도 지난 농민주일(7.19)부터 오늘까지 이 비유를 다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 우리도 제자들처럼 "예, 주님!" 하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물의 비유'는 '종말의 비유'입니다.
곧 죽음 저 너머에서 맞이하게 될 완성된 하느님의 나라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한 부류의 사람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자매인 죽음이여! 어서 오세요."라고 말하면서 죽음을 기쁘게 받아들인 것처럼, 죽음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부류입니다.
또 한 부류는 죽음을 두려워하면서 죽음을 거부하는 부류입니다.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죽음을 기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부류입니다.
"옹기장이 손에 있는 진흙처럼 너희도 내 손 안에 있다."(예레18,6ㄷ)
하느님의 손 안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의인으로 살거나 악인의 모습으로 살거나 우리는 하느님의 손 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우리에게 시작과 마침, 생명과 죽음을 주신 것도 하느님이십니다.
내 뜻대로 살지 말고,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의 뜻을 찾고, 이 뜻에 순종하려고 애쓰면서 살아가는 하느님의 사랑스런 자녀들이 됩시다! 그래서 마지막 때에 기뻐 즐거워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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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 보시기에 흐뭇하고 대견스러운 우리!>
제자들 가운데 어부들이 있어 그런지 예수님께서 종종 물고기와 관련된 비유 말씀을 건네십니다. 말씀을 선포하실 때, 어떻게 하면 좀 더 실감나게, 좀 더 쉽고 이해가 잘 가게 말씀하실까, 고민하신 예수님의 노력이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를 배경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고기잡이 비유는 훨씬 현실감 있게 와 닿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가르침은 구체적이고 또 명료해서 제대로 배우지 못한 사람들도 알아듣기 쉬웠습니다.
오늘 비유 말씀을 천천히 묵상하면서 낚시 갔을 때의 일이 생생하게 떠올랐습니다. 전문 낚시꾼들은 낚시를 갈 때는 우선 ‘대상어’를 선택하고, 거기에 맞는 채비를 준비합니다. 낚싯대며 미끼며 물때며 노리는 고기를 잡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춥니다.
낚시꾼들이 주로 노리는 고기는 민물 같으면 붕어이죠. 또 루어낚시로는 베스입니다. 바다로 나가면 대상어는 돔이나 농어, 광어나 우럭입니다. 그리고 다들 노리는 것이 잔챙이가 아니라 팔뚝만한 월척입니다.
운이 좋아 큰 녀석들이 올라오면 그렇게 기분이 좋습니다.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습니다. 콧노래가 끊이지 않습니다. 환한 얼굴로 잡은 묵직한 고기를 어망에 넣어둡니다.
저도 언젠가 먼 바다 낚싯배들 탔을 때, 동출했던 주변 사람들까지 환호성을 올릴 정도의 대어를 낚은 적이 있습니다. 끌어올리기까지 5분 정도 걸리더군요. 조심스럽게 끌어올리는 동안 툭툭 치고 나가는데, 혹시 바늘털이하며 도망갈까봐 긴장감이 하늘을 찔렀습니다.
사투 끝에 끌어올린 친구의 길이가 거의 미터급이었습니다. 얼마나 기분이 좋던지, 사진을 찍고, 동영상까지 찍었습니다. 폰 사진첩에 간직해두었다가, 기분이 울적해질 때면 수시로 꺼내 보며 기분을 전환합니다.
그러나 주로 올라오는 녀석들은 원하지도 않는 녀석들일 경우가 많습니다. 손가락 만한 복어 새끼며 미끼만 신나게 따먹는 놀래미 새끼들, 피라미 녀석들입니다.
그런 녀석들이 올라오면 낚시꾼들은 다들 재수 없어 합니다. 바늘에서 빼자마자 멀리 던져버립니다.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다신 올라오지 마라, 좀 더 커서 와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 종말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부들이 그물에 잡힌 고기들을 크기에 따라 이쪽저쪽으로 분류하는 것처럼 세상 종말에 우리도 그렇게 분류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물이 가득 차자 사람들이 그것을 물가로 끌어 올려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버렸다.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던져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우리 모두 하느님의 낚싯대에 걸린 대어가 되어야겠습니다. 낚시 바늘에 걸려 올라온 우리를 보시고 하느님께서 흐뭇해하실 큰 물고기로 성장해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 바라보시며 반겨주실 큰 물고기로 산다는 것이 어떤 삶인지 묵상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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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하늘나라가 그물인 이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늘 나라는 밭에 묻힌 보물이고 밀과 가라지와 같고 밀가루 서 말 속에 누룩을 넣는 것과 같고 겨자씨가 나무로 자라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런 하늘나라의 여러 비유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다른 비유 말씀들의 결론과 같은 것으로서 하늘나라가 ‘물고기를 잡는 그물’과 같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물고기를 그 종류별로 가려서 어떤 것들은 하늘나라로 어떤 것들은 지옥으로 던져버린다는 뜻을 넘어서는 의미를 지닙니다.
자세히 보면 하늘나라가 그물로 잡은 좋은 물고기들이 가는 종착지가 아니라 하늘나라를 ‘그물 자체’라고 말합니다.
“하늘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의 하늘나라에는 좋은 물고기도, 나쁜 물고기도 들어와 있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부터 우리는 하늘나라에 들어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악한 이들은 밀과 가라지처럼 마지막 때에 쫓겨날 수는 있습니다.
하늘나라에 악한 물고기까지 들어와 있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늘나라가 그물로 잡은 물고기가 마지막으로 가는 행선지가 아니라 그물 자체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스프링 벅’(Spring Bog)은 아프리카 남서부 지역에 서식하는 영양 가젤의 일종입니다. 아프리카의 건조한 초원에서 풀을 뜯으며 집단으로 생활하는 스프링 벅은 한 번에 3m이상 높이 뛸 수 있고 시속 88km까지 달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민첩한 그들이 집단으로 절벽에서 떨어져 죽거나 강물에 휩쓸려 죽는 경우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어찌 된 일일까요?
학자들이 연구해보니 그들의 지나친 욕심 때문이라고 합니다. 건조한 풀을 무리가 함께 뜯어먹다 보니 뒤처져 뜯어먹는 스프링 벅들은 이미 앞서간 스프링 벅들이 먹은 잔풀만을 먹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동할 때는 먼저 앞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재빨리 달려야만 합니다. 만약 몇 마리가 뛰기 시작하면 뒤에 있는 것들은 이번엔 앞자리를 차지하려고 더 빨리 달립니다. 그러다 절벽이 나타나거나 강물이 나타나서 멈추려 해도 뒤에서 달려오는 것들 때문에 멈출 수가 없어 밀려버리는 것입니다.
스프링 벅의 이야기와 ‘그물’로 비유되는 하늘나라의 비유를 비교해 봅시다. 만약 스프링 벅을 그물로 잡을 수 있다면 그것들이 잃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더 먹기 위해 달리고 싶은 욕구를 잃습니다. 여기저기로 가고 싶은 방향에 대한 선택의 자유를 잃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욕구를 더는 펼칠 수 없게 됩니다. 하늘나라를 ‘그물’로 비유하신 이유는 하늘나라가 바로 힘이나 속력이 아닌 ‘방향’을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삶에서 무엇이 방향이냐면 ‘욕구’가 방향입니다. 우리는 각자가 선택한 욕구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그런데 그물에 잡힌 물고기들은 더는 자신이 가고 싶은 방향으로 갈 수 없게 됩니다. 그래도 끊임없이 다른 방향으로 가려고 하면 하느님은 그런 물고기는 놓아주십니다. 그 좋은 예가 ‘가리옷 유다’입니다. 예수님은 좋은 물고기, 나쁜 물고기 가리지 않고 당신 안에 모으십니다. 그러나 끝까지 돈과 명예를 좋아하는 욕구를 버리지 못하면 예수님은 놓아버리십니다. 사람이 두 방향으로 동시에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방향에 우리 몸을 맡기는 것. 이것이 하늘나라입니다. 하늘 나라는 하느님의 뜻이고 그 방향에 나를 맡겨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속-육신-마귀의 이전 욕구를 끊어야 합니다.
두 상반된 욕구를 동시에 따를 수는 없습니다. 내 이전 욕구를 버리고 하느님 욕구를 따름으로써 내가 변화하게 됩니다.
한 중학교에서 도덕 선생님이 사춘기가 된 아이들에게 부모님을 30일 동안 칭찬하고 일기를 써 오라고 숙제를 냈습니다. 처음엔 아이들도 쑥스럽고 부모도 쑥스러워했습니다. 30일 동안의 부모를 칭찬하기 위해 아이들은 비로소 부모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한 달 동안의 감사를 위한 노력이 끝나고 아이들은 “그냥 밥만 먹고 잠만 자는 곳이었는데, 요즘 집이 좋아요.”, “칭찬을 마친 내가 참 대견스러워요. 나도 참 괜찮은 사람 같아요.”, “부모님을 칭찬하면서 나도 조금씩 변하는 것 같아요.” 와 같은 반응을 보였습니다.[참조: ‘엄마가 울었다’, 지식채널 e, 유튜브]
나의 변화는 하느님 뜻인 그분의 방향성에 나를 맡김으로써 가능합니다. 이전에 내가 추구하던 삶의 방향에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나를 돌려세워야 합니다. 이 욕구의 변화가 곧 방향의 변화이고, 그 방향의 변화에 순응하는 것이 하늘나라에 머무는 길입니다.
천국과 지옥의 이분법적 이야기를 하면 극단적 이원론자라고 비판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하느님은 선인과 악인에게 똑같이 비를 내려주시는 분이신데, 그 자비하심을 말하지 않고 오히려 사이비처럼 신자들에게 두려움을 조장한다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옥만이 아니라 불과 사람을 파먹는 벌레, 심지어 불소금에 절여진다고까지 하십니다. 이원론이 아니라면 우리 종교는 그저 마음의 평화를 주기 위한 상담이나 심리학을 말하는 집단이 되어버립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나라를 ‘그물’로 표현하신 이유는 내가 튀어 나가려는 이전의 방향성을 제한하고 당신의 방향성에 우리를 묶어두기 위함입니다. 바다에서 자유롭게 살다가 지옥에서 끝날 것인가, 아니면 그 자유로움을 주님께 봉헌하여 하늘나라에서 끝날 것인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교회는 내가 추구하는 방향에 대한 위로를 받기 위해 나오는 곳이 아니라 그 방향성을 꺾고 주님의 방향에 나를 맡길 힘을 얻으러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욕구도 좋고, 저 욕구도 좋다는 식의 흐리멍덩한 가르침에 주의해야 합니다. 하늘나라가 ‘그물’이기에 우리는 오직 주님의 뜻이라는 한 방향에 나를 맡길 수 있는 사람만 머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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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전주교구 백재욱 스테파노 신부님]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마태 13,51)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치 수업을 마친 스승이 학생에게 하듯이 당신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비유의 내용을 모두 이해하였는지 물으십니다.
제자들은 그물을 던져 사람을 낚는 어부인 동시에 하늘 나라의 신비를 가르치는 새로운 ‘율법 학자’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스승에게 배운 가르침을 바탕으로 구약 성경의 말씀을 연구하고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 세우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자신들이 먼저 그 진리를 깊이 배우고 익혀야 합니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 없기(루카 6,39 참조) 때문입니다. 사실 하늘 나라의 신비는 구약의 밭에 이미 숨겨져 있었습니다. 유다인들은 그 땅을 밟고 서 있었지만 그 안에 숨겨진 보물은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소중한 신앙의 유산을 발견하고 새롭고 참된 의미를 밝혀내는 사명을 이제 예수님의 제자들이 받았습니다. 그들은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마태 13,52)처럼 전통 안에서 복음의 참뜻을 길어 올려야 합니다.
이 사명은 오늘 우리에게도 고스란히 이어집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평생 그분의 제자로 살겠다는 다짐입니다. 제자는 스승의 뒤를 따르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끊임없이 배우는 사람입니다. 성경을 읽고 공부하며, 복음을 시대의 정신에 맞게 풀이하고 적용하려는 노력은 여전히 중요합니다. 배우지 않으면 식별할 수 없고, 식별하지 않으면 방향을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셨던 그 물음을 우리에게도 하십니다. 우리 또한 이 물음에 “예.”라고 기쁘게 응답할 수 있도록 오늘도 그분의 발치에서 배우는 일을 멈추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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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3,47-53: 바다에 그물을 쳐서 온갖 것을 끌어올리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바다에 던진 그물에 비유하신다. “하늘 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47절) 그물은 교회, 즉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공동체를 의미한다. 그물 안에는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가 섞여 있다. 이는 교회 안에 완전한 성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장하고 회개하며 신앙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함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교회 안에서는 모두가 하느님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며, 완전함에 도달하지 못했더라도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성장할 수 있다.”(Enarrationes in Psalmos 44 요약)라고 가르친다.
세상이라는 바다는 혼란과 유혹, 세속적 가치가 뒤섞인 현실 세계를 상징한다. 그물은 복음과 사도들의 말씀으로 만들어져, 하느님께서 세상 속 사람들을 끌어들이시고 참 빛 속으로 인도하시는 은총의 도구이다. 종말의 날, 하느님께서 천사들을 보내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시듯이, 현재의 삶에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 마음과 삶을 점검하며,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에 깨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52절) 여기서 옛것은 구약 성경의 지혜와 전통을 의미하고, 새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된 하늘 나라의 진리를 뜻한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참된 제자는 과거의 가르침과 현재의 은총을 연결하여, 자신과 다른 이들의 삶 속에서 하느님 말씀을 살아 있게 해야 한다.”(Homiliae in Matthaeum 제자직 요약)라고 강조한다. 교회의 가르침 역시 전통과 계시를 함께 이해하고, 복음을 실천 속에서 드러내는 삶을 통해 신앙의 깊이를 더할 것을 요청한다
우리 각자는 교회의 한 부분이며, 완벽하지 않더라도 성장하고 회개하는 과정을 거친다. 타인을 쉽게 판단하거나 배척하기보다는 나 자신이 그물 속에서 좋은 고기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세상의 유혹과 혼란 속에서도 하느님의 말씀에 민감하며, 은총을 통해 스스로 변화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는 개인적 성화뿐만 아니라, 교회와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이 된다. 우리의 신앙은 과거의 성경적 가르침과 현재의 복음 체험을 연결하여 실천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교리서나 성인들의 가르침을 배우고, 그 내용을 현대 삶 속에서 적용하며, 다른 이들에게 나누는 것이 바로 “곳간에서 새것과 옛것을 꺼내는” 삶이다.
하늘 나라의 그물 안에는 온갖 고기가 있듯이, 우리 삶에도 완벽함과 부족함, 성실함과 연약함이 함께 존재한다. 우리가 할 일은 그물 속에서 의인으로 성장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며, 삶 속에서 새로운 은총과 전통의 지혜를 꺼내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하늘 나라의 기쁨을 맛보고, 교회와 세상을 빛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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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의 품>
마태오 13,47-53 (그물의 비유, 비유를 끝맺는 말씀)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 그물이 가득 차자 사람들이 그것을 물가로 끌어 올려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 제자들이 “예!”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들을 다 말씀하시고 나서 그곳을 떠나셨다.
<당신의 품>
“하늘 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 그물이 가득 차자 사람들이 그것을 물가로 끌어 올려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마태 13,47-48)
지금여기
당신의 품에
영원히
깃들 수 있기를
내치지 않고
내쳐지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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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헤어질 결심’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헤어지는 결심도 어렵지만, 때로는 물건과 헤어지는 결심도 쉽지 않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사용하던 스마트폰이 5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액정이 세 번이나 꺼졌습니다. 한 번은 한 달 넘게 기다려서 고쳤고, 한 번은 삼성에 다니는 형제님이 고쳐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또 액정이 꺼졌습니다. 오래된 모델이라 부품을 구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하필이면 액정이 꺼진 날이 주말이었고, 콜롬비아로 사제 모임을 가야 하는 날이었습니다. 순간 걱정이 되었습니다. 비행기 표도, 연락처도, 일정도 모두 스마트폰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전에 수녀님께서 쓰시던 스마트폰이 있어서 급한 대로 심카드를 바꾸어 콜롬비아에 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5년 동안 함께했던 스마트폰과 이제는 헤어질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스마트폰을 바꾸려고 정리하다 보니, 생각보다 많은 것이 그 안에 있었습니다. 필요한 것도 있었지만, 사실은 필요 없는 것도 많았습니다. 오래된 사진, 쓰지 않는 앱, 무심코 저장해 둔 파일, 괜히 마음을 빼앗던 알림들이 있었습니다. 스마트폰을 정리하면서 제 삶도 함께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집 청소를 하면 오래된 것을 버리게 됩니다. 옷장을 정리하면 입지 않는 옷을 내놓게 됩니다. 스마트폰을 정리하면서도 제 마음 안에 있는 오래된 습관, 불필요한 걱정, 쓸데없는 집착을 보게 되었습니다. 며칠 동안 스마트폰이 제대로 되지 않으니, 처음에는 불편했지만, 오히려 마음은 조금 편했습니다. 산책할 때 기도 시간이 늘었고, 묵주기도에 더 집중할 수 있었고, 쓸데없이 화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줄었습니다. 예전 핸드폰 광고에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소중한 사람과 함께 있을 때는 꺼 놓으셔도 좋습니다.” 어쩌면 하느님과 함께 있을 때도, 우리의 마음 안에 켜져 있는 불필요한 화면들을 잠시 꺼 놓아야 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옛것은 단순히 오래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붙잡고 있는 낡은 마음입니다. 세례를 받았지만, 여전히 세상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마음이 옛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여전히 두려움과 걱정에 매여 사는 모습이 옛것입니다. 주님께서 희망을 보여 주시는데도 시련과 고통만 바라보며 절망하는 마음이 옛것입니다. 집을 새로 지었지만, 낡은 담장을 그대로 두고 사는 것과 같습니다. 겉모습은 바뀌었지만, 마음의 담장은 여전히 오래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새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새것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다시 시작하는 마음입니다. 집을 새로 지었으면 낡은 담장을 허물고 새로운 담장을 세우는 것이 새것입니다. 세례를 받았으면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것이 새것입니다. 시련이 있어도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희망을 바라보는 것이 새것입니다. 넘어졌지만 다시 일어서는 것이 새것입니다. 상처가 있지만 용서하려는 마음이 새것입니다. 실패했지만 하느님의 손길 안에서 다시 빚어지려는 마음이 새것입니다. 신앙인은 과거를 모두 부정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옛것 가운데서도 은총을 발견하고, 새것 가운데서도 하느님의 뜻을 찾는 사람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옹기장이의 집으로 갑니다. 옹기장이는 진흙을 손으로 빚어 그릇을 만듭니다. 그런데 그릇에 흠이 생기면 옹기장이는 그것을 버리지 않습니다. 자기 눈에 드는 다른 그릇이 나올 때까지 다시 빚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흠이 생긴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실패했다고, 상처가 있다고, 부족하다고 우리를 내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다시 빚으십니다. 우리의 교만을 낮추시고, 우리의 분노를 다듬으시고, 우리의 두려움을 녹이시고, 우리의 욕심을 비워 내십니다. 그렇게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당신 마음에 드는 그릇으로 새롭게 만들어 가십니다. 스마트폰은 오래 쓰면 부품이 낡고, 액정이 꺼지고, 결국 정리해야 할 때가 옵니다. 우리의 삶에도 그런 때가 있습니다. 오래 붙잡고 있던 생각을 내려놓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익숙했던 습관과 헤어져야 할 때가 있습니다. 나를 지켜 주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나를 묶고 있던 것들과 결별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의 ‘헤어질 결심’입니다. 미움과 헤어질 결심, 걱정과 헤어질 결심, 교만과 헤어질 결심, 세상의 기준과 헤어질 결심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감사와 기도, 겸손과 사랑, 하느님의 뜻을 새롭게 모셔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옛것도 꺼내고 새것도 꺼내는 지혜를 말씀하십니다. 옛것 가운데서 감사할 것은 간직해야 합니다. 지난 시간의 은총, 함께한 사람들의 사랑, 실패를 통해 배운 지혜는 소중한 옛것입니다. 그러나 낡은 집착, 오래된 미움, 반복되는 두려움, 하느님보다 세상을 더 의지하려는 마음은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새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느님께 다시 빚어지는 마음, 주님께 내 삶을 맡기는 마음, 오늘 다시 사랑하기로 결심하는 마음이 바로 새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다 쓰고 나서 정리되는 스마트폰처럼 언젠가는 하느님 앞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그때 중요한 것은 얼마나 최신 기종처럼 살았느냐가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것을 저장하고 있었느냐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얼마나 비워지고, 얼마나 새롭게 빚어졌느냐가 중요합니다. 오늘 하루, 우리도 옹기장이이신 하느님의 손에 우리 자신을 맡기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안의 옛것을 정리해 주시고, 새 마음으로 빚어 주시기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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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빈 콩깍지>
저는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냈습니다. 그리고 성모동산이 있는 아름다운 성당을 기억합니다. 지금은 아주 작게 느껴져도 그 멋스러움은 여전합니다.
지금은 주차장이 되어 있지만 텃밭에는 콩이 자라고 있었고, 들깨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밭모퉁이에는 가로등이 밤새 켜있었습니다. 가로등 가까이에 있는 콩과 들깨는 다른 것보다 훨씬 더 키가 크고 잎도 넓었습니다.
그러나 가을 추수 때에 보면 열매가 없었습니다. 겉은 화려했지만 정작 속은 빈 껍데기였습니다. 낮에는 햇빛을 견디고 밤에는 어둠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탓입니다. 결국 곳간에 채워진 것들은 겉보기에는 초라했던 콩이고 들깨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마태16,27)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겉모양으로 갚아주시는 것이 아니라 행한 대로 갚아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인생 여정 안에서 겪을 것을 다 겪으면서 견디고 받아들인 삶의 모양을 헤아려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삶 속에 감춰져 있는 악이 나타나지 않고 그 사람이 존경받는다 하더라도 혹은 외적으로는 아무런 흠이 없고 유능한 사람으로 드러날지라도 그 사람의 참된 모습은 ‘마지막 날’ 추수 때, 개인적으로는 죽음 앞에 밝히 드러나므로 지금 누리는 것들이 헛된 기쁨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 처한 어려움들이 풍성한 열매를 맺는 과정이라고 받아들이기를 희망합니다. 시편저자는 노래합니다. “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이, 곡식 단 들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시편 126,5-6)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해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을 끌어올려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마태13,48) 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결국 마지막 날에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 행실대로 갚아주실 것입니다.”(로마2,6) 사실 하늘의 그물은 빠져나갈 수가 없는 법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삶의 여정이 이미 좋은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는데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과거에 매이지 말고 ‘지금, 이 순간’을 주님께 맡기십시오. 이 세상의 삶은 실패도 없고 성공도 없습니다. 실패가 없다는 것은 지금 정신을 차려 알곡의 삶을 살면 된다는 의미요, 성공이 없다는 것은 마지막 순간까지 하느님 마음에 들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우리 마음이 하느님 안에 평안히 쉴 때까지는 그 어디에서도 평안치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추수라는 심판의 두려움에 주눅 들지 말고, 새것도 꺼내고 낡은 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이 과거를 발판 삼아 오늘을 새롭게 하고 그리하여 복된 내일을 희망해야 하겠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가까운 사이라 해도 그 마음을 다 헤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얼굴을 맞대고 서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마음은 천 개의 산이 있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뱃속까지 환희 들여다 보십니다(예레17,9). 사람이 하는 일이 제 눈에는 옳게 보일지라도 하느님께서는 그 마음을 헤아리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늘 마음속을 보시는 하느님 앞에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분 마음에 드는 열매를 맺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맺는 모든 열매가 주님 그릇에 담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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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톨스토이는 인간 삶의 목표를 ‘성장’이라고 말했습니다. 단순히 키가 크는 것이 아니라 좋은 방향으로 변화하는 성장 말입니다. 그러면서 이 성장에 필요한 것으로 소통, 몰입, 죽음을 기억하는 삶이라고 지적합니다.
소통이라는 것은 혼자 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와 함께하는 것으로 이를 위해 사랑은 필수적입니다. 그냥 받고 싶어만 한다면, 또 미워한다면, 또 늘 거리를 둔다면 과연 소통할 수 있겠습니까? 남이 원하는 대로 남에게 해줄 수 있는 사랑으로 소통하고, 이로써 우리는 성장합니다.
다음은 몰입입니다. 성장과 연관되는 것으로 사랑에 몰입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스토커가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물질적, 세속적인 것이 사랑보다 윗자리에 올라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은 죽음을 기억하는 삶입니다. 지금 이 세상의 삶은 끝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죽음을 기억하면 겸손해지게 됩니다. 치고받고 싸웠던 그 모든 것이 별것 아님을 알게 됩니다. 소중한 가치를 따를 수 있게 됩니다. 즉,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나의 가치를 찾게 될 것입니다.
이 소통, 몰입, 죽음을 기억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도 꼭 필요한 것입니다. 특히 주님께서도 이에 대해 강조해서 많이 말씀하셨고, 직접 그 모범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도 이 소통, 몰입, 죽음을 통해 성장하며 하늘 나라로 향하는 우리의 모습을 묵상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그물의 비유 말씀을 하십니다. 이 그물은 바다 밑바닥까지 훑으며 끌어당기는 큰 그물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선인과 악인, 의인과 죄인을 가리지 않고 모두 끌어모읍니다. 지금 교회와 세상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선인과 의인만 있을까요? 당연히 악인과 죄인도 함께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니, 어떻게 교회 다니는 사람이 저래?’라면서 섣부른 판단을 합니다. 하느님의 구원 초대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으며, 이 세상 안에서는 필연적으로 다양한 상태의 사람들이 공존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과도 소통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소통을 위해 사랑에 몰입하라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이 하느님의 사랑에 그냥 악하게 지내고, 죄를 마구 지어도 상관없을까요?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그물에 잡힌 고기를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가려내는 것처럼,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라고 하십니다. 즉, 죽음 이후의 심판을 늘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늘 소통, 몰입, 죽음을 기억하면서, 나는 과연 하느님께서 기뻐하며 그릇에 담으실 ‘좋은 것’(의인)의 삶을 살고 있는지를 묵상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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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그물의 비유>
“또 하늘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 그물이 가득 차자 사람들이 그것을 물가로 끌어 올려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 제자들이 “예!”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러므로 하늘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들을 다 말씀하시고 나서 그곳을 떠나셨다.(마태 13,47-53)
1) ‘그물의 비유’에서,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다.” 라는 말씀은, ‘혼인 잔치의 비유’에 있는, “종들은 거리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마태 22,10).” 라는 말씀과 같고,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라는 말씀은, ‘가라지의 비유’에 있는,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마태 13,30).” 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49절-50절의 말씀은, 가라지의 비유를 설명하실 때 하셨던 말씀을(마태 13,41-42) 다시 반복하신 것입니다.
2)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르 16,15) 그래서 ‘복음 선포’는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일이고, 우리 교회는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은 모습이 됩니다. 선한 사람도 있고, 선하지 않은 사람도 있는데, 사실 그것이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도 아니고, 구분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또 구분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일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 나라, 구원, 영원한 생명이라는 ‘같은 목표’로 함께 모인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금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살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어떤 사람으로 심판을 받게 되느냐가 가장 중요합니다.
선한 사람이었는데 타락해서 악한 사람으로 끝날 수도 있고, 악한 사람이었다가 회개해서 선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구원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 판단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서로 도와주고 격려하고 권고하면서 끝까지 함께 가려고 노력하는 일입니다.
복음서에 있는, ‘심판과 멸망에 관한 말씀들’은, 회개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을 향한 경고 말씀들이고, 그런 일을 당하지 않도록 늦기 전에 회개하라고 촉구하시는 말씀들입니다. 구원과 멸망은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지금의 ‘나의 삶’이 그것을 선택합니다.
3)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도 다 한때 그들 가운데에서 우리 육의 욕망에 이끌려 살면서, 육과 감각이 원하는 것을 따랐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도 본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진노를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비가 풍성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잘못을 저질러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 여러분은 이렇게 은총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일으키시고 그분과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호의로, 당신의 은총이 얼마나 엄청나게 풍성한지를 앞으로 올 모든 시대에 보여 주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여러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에페 2,3-8)
하느님은 인간들이 어떻게 살든지 말든지 내버려두고 지켜보기만 하다가 나중에 심판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냥 내버려두면 멸망할 사람들을 모두 구원하려고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모든 사람을 하나도 빠짐없이 구원하려고 애를 쓰십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에서 ‘죽었던’이라는 말은 ‘영적으로 죽었던’이라는 뜻입니다.
‘살리셨습니다.’ 라는 말과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라는 말은 틀림없이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는 ‘강한 확신’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신앙생활은 ‘구원’과 ‘생명’을 얻으려고 하는 생활이면서, 이미 시작된 ‘구원’과 ‘생명’을 누리는 생활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시작 단계이고, 하느님 나라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다.” 라는 말은, 우리가 구원과 생명을 받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것과 그 은총에 믿음으로 응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 강조하는 말입니다. 여기서 ‘믿음’은 ‘실천하는 믿음’을 뜻합니다.
4) 49절의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라는 말씀은, 악한 자들이 ‘의인’인 척 하면서 의인들 속에 섞여 있는 경우가 있을 수 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자주 꾸짖으신 위선자들이 그런 경우입니다. 혼인 잔치의 비유에서, 잔치에 참석했지만 혼인 예복을 입지 않아서 쫓겨난 사람도 그런 경우입니다.(마태 22,11-14) 혼인 예복은,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은 사람이 신앙인답게 사는 것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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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노우재 미카엘 신부님]
“하늘 나라는… 그물과 같다.”(마태오 복음 13장 47-53절)
예수님께서 모든 이에게 하늘나라를 선포하십니다. 하늘나라는 하느님의 사랑이요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 마음 안에 성령을 부어주시고, 그분 성령께서 우리들 마음을 어루만지시면,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알아보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세상살이에 급급해,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하느님을 밀쳐 버리고 살면 우리들 마음은 굳어집니다. 오랜동안 마음이 굳어지면 하느님을 바라보는 눈도 어두워지고 말씀을 듣는 귀도 어두워지고 사랑을 받아들이는 힘도 사라집니다.
“하늘나라는… 그물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당신의 사랑을 전하십니다. 아무런 차별 없이 우리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가 지금 이렇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 사랑에 응답하도록 합시다. 주님께, 저도 주님을 사랑합니다, 하고 사랑의 응답을 드립시다.
주님께서 우리의 사랑을 간절히 바라십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단 하나, 당신과 우리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령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어 하느님 사랑을 받아들이고 응답하게 해주시기를 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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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하늘 나라의 교육을 받은 제자들>
오늘 독서는 ‘주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내리신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집안아, 옹기장이 손에 있는 진흙처럼 너희도 내 손에 있다.”(예레 18,1)
이는 ‘옹기’가 ‘옹기장이의 손’에 달렸듯이, 우리가 주님의 전권에 달려 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도 같은 맥락 안에서 알아들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마태오복음> 13장에 나오는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의 마지막 일곱 번째인 '그물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지금까지의 하늘나라의 비유들에 대한 결론에 해당한다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심판'에 대한 비유입니다.
“하늘 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마태 13,47) 사실 그물 속에는 온갖 것이 한데 섞여 있습니다. 마치 ‘밀밭’에는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듯이, 의인과 악인이 뒤섞여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물이 가득 차차 사람들이 그것을 물가로 끌어올려 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마태 13,48)
결국 이 '그물의 비유'는 의인과 악인의 종국적인 결말이 준엄함을 말해줍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바다에 생명의 물을 부으시어 살게 하시고, 그 물속에서 생명을 모아들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이미 ‘당신의 그물’ 속에 들게 하셨습니다. 이 ‘그물’은 욥을 찾아와 충고했던 친구(빌닷)의 말을 떠올려줍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학대하시고 나에게 당신의 그물을 덮어씌우셨음을!”(욥 19,6)
시편 작가도 이렇게 노래합니다.
“저희를 그물에 걸려들게 하시고 무거운 짐을 저희 허리에 지우셨습니다.”(시 66,11)
이처럼 우리는 ‘그분의 그물에 든 물고기’인 동시에, '바다에 처져 있는 그물', 곧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쳐놓은 그물’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의 바다에 처져서 온갖 것을 끌어올리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의 비유를 마치면서, 그 사명을 상기시키십니다.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 ~ 하늘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마태 13,51-52)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늘 나라의 교육을 받은 제자들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하늘 나라의 의미를 깨닫고, 또한 가르치라는 사명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먼저’ 우리의 ‘곳간’에 ‘하늘 나라의 복음’이 채워져야 할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곳간’에는 무엇이 채워져 있을까요? 텅 비어 있나요? 아니면, 온갖 쓰레기로 채워져 있나요?
신약과 구약의 하느님의 말씀인가요?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한 말들인가요? 혹 ‘말씀’으로 채우기 위해, 다른 것들을 비워내야 하지는 않을까요? 진정한 것을 채우기 위해 비울 수 있다면, 그 비움은 참으로 축복이겠지요!!
하오니, 주님!
당신께서 제 뼈 속에 심어 놓은 말씀이 제 심장에서 불타오르게 하소서.
제 마음이 당신 말씀으로 벅차올라 제 입술을 타고 터져 나오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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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하늘 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마태 13,47)
주님!
당신께서는 하늘나라의 그물에 저를 몰아넣으셨습니다.
당신 말씀의 그물로 덮어씌워 당신 뜻 안에 가두셨습니다.
세상의 바다에 저를 던지시어, 당신의 그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오니, 제가 온갖 고기를 모아들일 뿐, 제 입맛에 맞게 고르지 않게 하소서.
제가 그물일 뿐, 주인이 아니듯 고기의 주인도 아님을 잊지 않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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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신부님]
+ 찬미 예수님
우리는 살아가다보면 점점 많은 짐을 갖게 됩니다. 사실 우리가 쓰는 물건 혹은 입는 옷들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필요한 것들을 많이 쌓아두고 사는 것이 우리의 평범한 삶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쓰지 않는 물건들을 정리해야 하는 상황이 생깁니다. 제가 유학을 마치고 돌아올 때가 딱 그런 상황이었는데, 타지에서 짐을 한국으로 보낼 때가 되니 운송료를 고려해 정말 필요한 것만 챙겨야만 했습니다.
그리하여 입지 않는 옷들과 쓰지 않는 물건들을 처리하고 나니 정작 남는 것은 책을 제외하고는 얼마 되지 않아 당황했던 기억이 납니다. 어쨌든 그런 기회를 통해 정말로 소중하고 유용한 물건 말고는, 아주 쉽고 과감하게 필요 없는 물건들을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짐들을 후배들에게 물려주거나 가난한 이들에게 주자 속이 아주 후련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버리는 가득찬 그물의 비유를 통해 종말 때의 심판에 대해서 이야기 하십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는 저는, 만약 내가 사물이라면, 이사할 때의 주인의 마음에 정말로 드는 존재일까, 혹은 유용한 존재일까 생각해 봅니다. 즉, 하느님의 시선으로 정말로 마음에 드는 사람일까, 정말로 필요한 사람일까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삿짐을 꾸릴 때의 상황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다 그물의 비유와도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바다 그물은 그 성질상 좋은 고기만을 골라잡을 수 없습니다. 바다에서 어부들이 그물을 끌어올리는 동안 물은 빠지지만 그 안에는 좋은 물고기, 가치 없는 물고기 또는 각종 쓰레기도 함께 휩쓸려 그물에 걸려 있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이 모든 것은 분류되어 결국 좋은 물고기만 남게 됩니다. 이처럼 세상에는 선하건 악하건, 무용하건 유용하건 여러 모습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선한 물고기와 같다면 심판 때에 하느님에 의해 구원받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밖으로 던져질 것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선한 사람이 될 것인가 악한 사람이 될 것인가의 선택은 바로 우리에게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선택을 하게 해주는 중요한 근거는 바로 사랑의 실천입니다. 이 기준을 갖는다면, 심판은 이제 더 이상 두려운 것이 아닌 희망적인 것이 됩니다.
언젠가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며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라는 것,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슬픔과 아픔이 극복될 것이라는 희망, 결국에는 악인들이 심판 받고 의인들이 구원받는다는 사실이 “심판”이라는 단어에 전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나는 예수님의 그물 안에서 어떠한 물고기인지 성찰해 봄과 동시에, 구원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그물이 가득차자 사람들이 그것을 물가로 끌어 올려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버렸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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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하늘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마태오. 13,47-48)
하늘나라는 믿음의 나라입니다. 주님을 향한 믿음은 유한한 우리 생명을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줍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으로 살 때, 우리는 희망을 품게 됩니다. 희망을 품을 때 우리 삶은 변화됩니다.
영원한 생명을 믿지 못하면 우리 삶은 불완전한 삶으로 끝이 납니다. 죽음이 모든 것의 끝으로 여기게 됩니다. 믿음을 통하여 우리의 불완전한 죽음은 완전한 부활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주님께 잡힌 좋은 물고기처럼 됩니다.
믿음은 우리가 주님께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영적 그물에 사로잡혀야 주님을 향한 믿음을 얻게 됩니다. 당신이 던지시는 말씀의 그물에 우리의 마음을 열어 사로잡혀야 우리는 말씀을 따라 살게 됩니다.
주님의 그물에 사로잡힌 좋은 물고기는 갈망하는 물고기입니다. 온 마음을 다하여 주님의 현존과 말씀을 따라 살기를 갈망합니다. 굳센 믿음으로 희망을 품고 사랑을 갈망합니다. 갈망하지 않는 사랑은 식어버리고, 실천하지 않는 사랑은 무관심으로 전락합니다.
나쁜 물고기는 갈망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현존과 말씀이 의미가 없기에 열정도 식어 오염된 바다에서 미지근하게 삽니다. 갈망하지 않기에 미지근하게 됩니다. 갈망하지 않는 미지근한 물고기는 쉽게 오염되어 결국 썩어 멸망합니다.
하늘나라는 하느님의 선물이지만, 좋은 물고기나 나쁜 물고기가 되는 것은 운명이 아니라, 우리의 선택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좋은 물고기가 되려고 마음을 열고 말씀을 믿어 영원한 생명의 희망을 품으며 식지 않는 열정으로 주님을 갈망하며,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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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마태 13,48)
버려야 할 것을
버릴 줄 아는 사람이,
담아야 할 것을
담을 수 있습니다.
버려야 할 것은
내 안의 탐욕이며,
담아야 할 것은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빛으로
우리 마음을 비추라는
초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를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물고기를 모으는 그물에
비유하십니다.
그물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을
함께 끌어올립니다.
이는 하느님의 구원이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분별이 이루어집니다.
무엇이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고 무엇이 죄에서
오는 것인지를 분별하도록
가르치십니다.
복음의 열매와 죄의 습관을
분별하라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죄의 습관을
하느님의 빛 앞에 정직하게
드러내어 사랑으로 변화시키는
이 여정이 바로 치유입니다.
우리 마음이라는
그물 안에는
상처와 실패,
눈물과 갈등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통합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렇듯이
자기 자신과 화해한 사람만이
다른 사람과도 진정으로
화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참된 우리로
살지 못하게 하는
두려움과 거짓된 자아를
내려놓는 은총의 날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진정한 분별은
사랑을 담고 집착을 비우는
정화의 참된 삶입니다.
그곳에서 시작되는
하늘 나라의
충만한 기쁨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