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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사 대성당 피사의 사탑 (이탈리아 피사) 피사의 사탑 여령 여해 이 정혜 깁스도 목발도 의지 하지 아니한 척추측만증 피사의 사탑 생명 있는 건 아무것도 채울 수 없었던 천년 세월 단 한마디 탈구 되지 아니한 건장한 종탑만이 정작 초라한 인생 가난한 인생 자욱한 시름 가득 채워 천상을 주인을 깨우고 있다
중세 시대에 대성당과 종탑, 세례당, 무덤을 지으면서 탄생한 피사의 ‘기적의 광장’은 나중에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물리학상 중요한 발견을 한 장소이다. ‘피사의 사탑’이라는 종탑에서 이루어진 실험에는 중력의 법칙을, 대성당에 매달린 등불의 움직임에서는 진자의 법칙을 발견한 것이다. 일찍이 지중해에 이름을 떨친 해군 도시 피사는 과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라는 영광으로 빛난다
전리품을 바탕으로, 1063년에 달마티아 출신의 건축가 부스케토의 지휘 아래 새로운 대성당을 짓기 시작했다. 평면은 라틴 십자가 모양이며, 교차부에 둥근 천장을 씌우는 것이었다. 라이날도가 그 뒤를 이어 1118년에 롬바르디아풍의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었다. 오랑식 건물의 내부 장식은 아랍의 영향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피사 대성당
피사 대성당과 피사의 사탑 세례당 음향 효과가 뛰어나기로 정평이 나 있다. 1153년부터 설치 운영한 것으로, 바깥벽 전체를 대리석 콜로네이드로 꾸미고 둥근 천장을 얹었다. 그 뒤 1246년에 코모 출신인 비가렛리가 대리석으로 세례반을 만들었다. 또한 니콜라 피사노가 1260년에 완성한 대리석 설교단의 부조 [수태고지, 예수 탄생 및 목동들]은 르네상스의 선구적인 작품이다.
대리석 원주 7개가 떠받치고 있다. 부조는 비잔틴과 로마네스크 양식을 융합시킴으로써 르네상스를 예고하고 있다
둘러싸인 건물로 고딕 양식으로 되어 있는 회랑은 14~15세기 때의 프레스코 화가 그려져 있다. 납골당은 내부의 회랑으로 둘러 싸인 정원이 아름답다. 또 프레스코화 ' 죽음의 개선(Master of the Triumph of Death)'도 많이 알려져 있다
제 2차 대전때 폭격으로 완전하지 못하다 ‘피사의 사탑’에서 작은 실험이 이루어 졌다. 그것은 너무나 하찮은 실험으로 보였고, 사람들의 조롱을 받았다. 그러나 나중에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을 뒤엎은 중력의 법칙을 확립 하는 계기가 되었다. 무게가 다른 돌덩어리 2개를 294단의 계단 위로 끌어올려, 사탑의 꼭대기에서 아래로 떨어뜨리자, 2개가 동시에 땅에 떨어졌다 물체의 낙하 속도는 개개의 질량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지구의 중력에 의해 결정된다는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이론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피사 출신인 갈릴레이는 실험하기에 아주 적당한 건축물이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피사의 사탑은 1173년에 건축가 기욤과 피사 출신 본난노 피사노가 착공했다. 그런데 공사가 3층까지 진척되었을 때, 퇴적층 부분의 지반이 내려앉아 탑이 북쪽방향으로 기울렸다 시모네가 이번에는 남쪽으로 기울어 지도록 경사를 계속 수정하면서 완성했다. 종을 매달아 놓은 맨꼭대기 층은 14세기 중반 무렵에 토마소 데 피사노가 지었다. 원통형 바깥 둘레의 지름이 17m, 전체 무게는 14000t이 넘는다. 세월이 흐르면서 기울기는 점점 심해졌고, 이 기울기를 이용해서 갈릴레이가 실험을 한 것이다. 피사의 사탑은 원래 높이 100m 이상 으로 세울 계획이었지만, 결국 55m에서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세례당, 무덤 (캄포산토)과 더불어 대성당(두오모)에 딸린 아름다운 실루엣을 보여주는 8층 사탑은 옛날 상업 도시 피사에 있는 ‘기적의 광장’을 개성 있게 만들어 준다. 피사는 리구리아 해로 흘러드는 아르노 강변에 들어선 항구 도시로, 로마 시대에는 유리우스오브 제쿠엔스 라고 부른 중요한 해군 기지였다.
안쪽은 지름 7.7m인 빈 구멍으로 되어 있다. 맨 위층에 종을 매달아 놓았으며, 각 층에는 원주로 콜로네이드 회랑을 에워싸고 있다 Mozart / Ave Verum Corpus KV.618 자료를 남기신 수고에 감사합니다 |
첫댓글
언제나 ~~~
사랑하고축복합니다 ❤❤❤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언제나 빛되시고
영광이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