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느낌,
그리고 싫은 느낌,
그런 느낌들의 연속이 우리의 삶입니다.
그 어떤 느낌이 온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순간이 찾아오고 있다는 징조입니다.
느낌으로부터 좋다 싫다는 분별도 일어나고
그 분별은 우리 내면에
온갖 업식을 쌓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느낌을 추구하고자 함에서
싫은 느낌에서 벗어나고자 함에서
우린 붙잡거나 버리려고 애쓰는 의도를 짓습니다.
애쓰는 대로 되어지지 않을 때 마음은 자유롭지 못합니다.
온갖 괴로움이 시작됩니다.
느낌이란 사실
좋다, 싫다는 분별이 없는 법입니다.
본래부터 좋은느낌, 싫은느낌 하고 딱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느낌은 그저 느낌 그 자체인 것입니다.
더 이상 분별이 붙지 않는
‘그냥 그냥 바로 그 느낌’ 말입니다.
느낌의 일어남이란
매우 중요한 순간이라 했습니다.
그 어떤 형식으로든 느낌의 일어남은
내면의 업식이 뛰쳐나오려고 한다는 징조이기 때문입니다.
이 느낌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업식을 더 보태느냐
아니면 녹이느냐가 달려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느낌이 일어날 때에는
느낌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느낌이 북받쳐 올라옵니다.
우린 그 느낌이 일어날 때
'슬픔' '우울' '고독' 하고 이름짓습니다.
지금 이 순간 슬프다, 우울하다 하고 말입니다.
미리부터 그 느낌에 대해 어떤 상을 짓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느낌을 ‘슬픔’이라 이름짓는다는 것은
이미 그 느낌을 그 어떤
나쁜 느낌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 이미 슬픔이란
그리 좋지 않은 느낌으로 자리하고 있는 까닭입니다.
그렇게 되면 진정 슬픔을 느낄 수 없습니다.
느낌에 슬픔이란 이름을 붙이게 되는 순간
우린 그 느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눈을 잃게 됩니다.
느낌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해석하고 이름 붙이지 않을 수 있다면,
그 느낌을 느끼는 그 순간
우리 가슴 속의
슬픔이라 이름 지워진 업식들이 소멸될 것입니다.
흐르는 눈물과 흐느낌은
슬픔이란 짐들이 덜어지고 있다는 징조입니다.
답답함, 우울, 조급함, 비참함, 부끄러움, 질투...
이 모든 느낌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느낌이 오는 순간
‘답답함’ ‘조급함’ 등등으로 이름 붙이지 말고
좋다, 싫다는 분별을 다 놓아버린 채
그 느낌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느껴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느낌들은 ‘싫은 느낌’이 아닌
‘싫은 느낌의 소멸’을 위한 아름다운 수행이 될 것입니다.
느낌 그대로를 닦아낼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됩니다.
좋은 느낌이 올 때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올라오는 순간 분별짓고 이름붙일 일이 아닙니다.
본래 자리에는 그 어떤 분별도 구분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참성품 주인공 자리로 가는 길입니다.
기쁨, 설렘, 흥분, 열광, 자만, 행복감...
이 모든 느낌들 또한 우리가 이렇게 이름 붙이는 순간
그 순간의 본질적인 느낌을 잃게 됩니다.
같은 기쁨이라도 매 순간 우리가 느끼는 기쁨은
결코 같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모두를 우린 동일하게‘기쁨’이라고 이름짓기에
세상이 메말라지고 재미없어지며
우리의 어설픈 고정관념만 늘게 되는 것입니다.
그저 그 느낌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느끼면 됩니다.
느낌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느끼면서
그 속으로 파고 들어가 그것과 하나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좋다 싫다도 필요없는 것입니다.
그저 분별 이전의 순수한 느낌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좋고 싫음이 없으니 잡거나 버릴 것도 없어집니다.
좋은 것 잡지 못해 괴롭고
싫은 것 버리지 못해 괴로운 것이 우리네 중생의 일상이니
그 두 가지 분별이 놓여지게 되면 그대로 밝아집니다.
좋은 느낌이든 싫은 느낌이든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느낄 수 있다면
그 순간 우리의 마음은 맑게 정화되어질 것입니다.
그 순간 업식이 닦여질 것이며,
마음의 온갖 짐이 덜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수행자의 삶은 여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좋고 싫고의 양 극단을 놓아버리고
전부를 크게 받아들이며
전부를 크게 놓고가는 삶이기에
허허로운 대장부는 참으로 자유롭고 당당합니다.
매 순간의 느낌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전에 만들어 놓은 상을 느낌에 부여함으로써
느낌이란 수행의 대상을
되려 업장 짓는 대상으로 만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분별없이 그대로 느끼게 되면
그대로 느끼는 가운데 어느 한 순간
느낌의 실체를 바로 깨쳐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대로 느끼다보면 그 느낌이 올라오고 올라오다가
시원해지고 뻥 뚫리는 그 어떤 순간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 때가 바로
그 느낌에 대한 방하착의 순간이 될 것입니다.
온전히 받아들여 온전히 놓고 나면, 적어도
그 느낌에 대해 부자유스럽게 얽매이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다시한번 말씀드리지만
느낌을 온전히 느낀다는 것은
그 느낌을 온전히 닦아낸다는 말과 같습니다.
느낀다는 경험을 통해 그 느낌의 업식을 닦아낼 수 있습니다.
어떤 물건을 두고
열어보지 말라고 하면 더욱 열어보고 싶지만
막상 열어보고 나면
열어보고 싶은 마음이 쉬어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느껴보고 경험해 보아야 합니다.
무언가 먹음직스런 것이 있을 때
먹지 못하도록 한다면 먹고싶은 마음이 너무나 클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먹어보고 그 맛을 느껴보고 나면
그것도 먹을 것이
풍부히 있어서 무한히 맛을 느껴볼 수 있다면
그 먹고 싶다는
한 생각이 떨어져 나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좋던 싫던 느낌을 거부하려 하기 보다는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충분히 느껴보는 것입니다.
충분히 느껴볼 수 있어야
그 느낌에 대한 착심을 놓을 수 있습니다.
그 느낌에 대한 기억된 업식을 녹일 수 있습니다.
우울할 때, 외로울 때
애써 외롭다는 마음을 숨길 필요는 없습니다.
한도 끝도 없이 외로워 보는 것입니다.
괴로울 때도 한 없이 괴로운 마음을 느껴보는 것입니다.
한 없이 엉엉 울기도 해 보고 소리도 질러보고
느껴볼 수 있는 만큼 까짓 느껴보는 것입니다.
외로움을 숨기려고하면
더욱 외로움의 크기는 내면에서 더해 갈 것입니다.
느낌!
그대로를 느껴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