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수 없는 스승을 찾아
김흥용
며칠 전에 안산에 갔습니다. 날씨도 춥고 걷기도 불편한 몸이었으나 저는 꼭 만나야만 할 사람이 있어서 그 곳에 간 것입니다.
그 분은 한국의 비뇨기과 분야에서는 명성이 높은 조재흥 박사님이었습니다.
저는 지하철을 타고 안산에 가면서 이 분을 처음 만났던 30년 전의 일들을 떠올렸습니다.
30년 전 그 때 저는 한국은행 직원이었습니다. 또 "책 읽는 국민이 희망이 있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열심히 독서운동을 하던 한국독서중앙회 수장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 때 몸을 너무 무리하게 사용하여 신장염으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은 결과 양쪽 신장 모두를 잘라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수술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사형선고를 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대로 제 생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은행직원들을 통해 당시 신장수술의 권위자이시며 비뇨기과 분야의 일인자라 할 수 있는 고대부속병원의 조박사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당시 고대부속병원은 혜화동에 있었는데, 저는 박사님을 만나자마자 꼭 한 번 수술을 받고 싶다고 졸랐습니다. 그러자 박사님은 제 상태를 자세히 진단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아무래도 위험하니 무리한 수술을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죽어도 좋으니 수술을 꼭 한 번 해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간절히 애원하자 박사님은 결국 수술을 해보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때 저는 우측 신장 한 쪽을 잘라내었고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한 쪽은 다음 해에 수술을 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이듬해의 수술은 참으로 어려운 수술이었습니다. 하나 남은 신장을 3분의 1만 남기고 나머지는 절개를 해야 하는 수술이었기 때문입니다. 조박사님은 지난 해와는 비교할 수 없는 비장한 표정으로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수술 자체가 모험이고 살 확률은 1% 정도밖에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에 서원 기도를 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저를 살려 주시면 남은 인생은 신학공부를 하여 하나님의 종이 되어 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수술은 예상대로 너무 힘들었습니다. 한 쪽 남은 신장마저 병들어 그 중 쓸 만한 부위만 남기는 수술이니 참으로 어려운 수술이었습니다. 그러나 조박사님은 최선을 다하여 수술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수술 후 출혈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출혈을 막는 응급조취를 해 놓으면 다시 출혈이 생기곤 했습니다. 의사 선생님들이나 저의 가족이나 이젠 끝인가 하고 절망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조박사님이 병실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는 말했습니다. "김선생님 이젠 살았습니다. 썩은 부위에 새 살이 돋아나 상처가 아물며 출혈도 멎었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이 말은 듣는 순간 나와 아내는 엉엉 울었습니다.
우리가 이 기적의 사실에 감격하여 우는데 사람들은 내가 죽게 되어 우는 줄로 생각하여 측은한 눈빛을 보냈습니다. 나중에 우리가 살게 되어 너무 기뻐 우는 줄을 안 그들은 함께 기뻐해 주었습니다.
이 놀라운 사건으로 인하여 다른 병원의 비뇨기과 의사들이 견학을 왔습니다. 그리고 저와 비슷한 증상을 가진 전국의 환자들이 조박사님을 찾아왔습니다.
이후 저는 조박사님을 하나님이 보내 주신 생명의 은인으로 알고 어려움이 있을 때엔 종종 찾아뵙고 자문을 구했습니다. 조박사님 역시 명절 때는 제게 꼭 선물을 보내 주셨습니다. 제가 보내야 할 선물을 당신이 늘 보내십니다. 참으로 훌륭한 스승입니다.
이제 조박사님은 대학병원에서 정년퇴임을 하셨습니다. 안산시 고잔동 영풍 플라자 3층에서 비뇨기과를 개업하여 열심히 일하고 계십니다. 위암 수술 7개월 만에 위 전체를 다시 잘라내야 하는 저에게 그 분은 생명에 대한 끈을 끝까지 놓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趙載興 박사의 주요 경력
고려대 의과대 의학과 비뇨기과학교실 교수
고려대학교구로병원 비뇨기과 과장
고려대학교안산병원 병원장
대한비뇨기과학회 이사장
조재흥 박사내외
첫댓글 살다 보니 정말 고맙게 느껴지는 의사가 있습니다. 인술을 펴는 정말 참다운 의사 그들은 마땅히 존경 받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