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사람은 누구인가?
2사무 24,2.9-17; 마르 6,1-6
연중 제4주간 수요일(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2024.1.31.
오늘 독서의 말씀은 다윗이 인구와 병력을 조사하고나서 양심의 가책을 느껴 참회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인구와 병력을 조사하는 일을 하고 나서 왜 그의 양심이 찔렸을까요? 본시 인구 조사는 하느님께서 레위 지파에 속한 모세에게 몸소 명하신 바였습니다. “네가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를 세어 인구 조사를 실시할 때, … 인구 조사를 받는 스무 살 이상의 남자는 누구나 주님에게 예물을 올려야 한다. …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서 속전을 받아, 만남의 천막 예식 비용으로 쓰도록 내주어라. 이것이 주님 앞에서 너희 목숨에 대한 속죄의 기념이 될 것이다”(탈출 30,12.14.16).
그런데 다윗은 하느님의 말씀에 따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칼을 다룰 수 있는 장정’(2사무 24,9)의 수를 헤아리기 위해서 인구 조사를 실시하고자 했고, 그것도 하느님의 장막에서 예식을 지내는 데 필요한 속전(贖錢)을 거둘 소임을 맡은 레위 지파도 아닌 수하 장수 요압에게 명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명령을 들은 요압도 다윗을 만류하였습니다. “주 임금님의 하느님께서 백성을 지금보다 백 배나 불어나게 하시어, 저의 주군이신 임금님께서 친히 그것을 보시게 되기를 바랍니다만, 저의 주군이신 임금님께서는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려고 하십니까?”(2사무 24,3). 그러나 다윗은 막무가내로 요압과 군대의 장수들을 위압하였습니다(2사무 24,4).
이에 대한 병행 기록에서도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아도 다윗의 인구조사령이 하느님의 뜻을 거슬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탄이 이스라엘을 거슬러 일어나, 이스라엘의 인구를 조사하도록 다윗을 부추겼다”(1역대 21,1). 그러니까 인구나 병력을 조사하는 일 자체가 죄가 되기 때문이 아니라 직접적으로는 하느님과 당신 백성이 장막에서 만나는 예식을 위한 종교적 취지를, 승리에 도취되어 군사적인 의도로 격하시킨 것이고 근본적으로는 이스라엘과 다윗 왕조를 보호해 주시겠다는 하느님의 약속을 믿지 못한 까닭에 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사실은 이스라엘의 첫 임금으로 뽑혔던 사울 역시 같은 이유로 하느님의 눈에서 벗어났었습니다. 이를 뒤늦게 깨달았기에 다윗도 인구 조사를 한 다음, 양심에 가책을 느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제가 이런 짓으로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주님, 이제 당신 종의 죄악을 없애 주십시오. 제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을 저질렀습니다”(2사무 24,10). 결국 하느님께서 흑사병을 퍼지게 하시어, 단에서 브에르 세바까지 백성 가운데에서 칠만 명을 죽게 하는 심판을 내리셨습니다(2사무 24,15).
그런가 하면 오늘 복음에서는 고향에 가신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셨는데, 그분의 가르침을 들은 고향 사람들이 그 가르침에 놀라기도 하고 그분이 일으키셨다고 전해 들은 기적 소문에 대해 감탄하면서도 자신들이 어려서부터 예수님을 잘 알고 있었다는 이유로 예수님에 대해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마르 1,24). 이렇게 생전 처음 맞닥뜨린 마귀도 알아본 예수님의 정체를 정작 그분을 오랫동안 보아온 마을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마도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나서 정식 부부로 같이 살기 전에 아기를 잉태했다던 소문만 전해 듣고는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가 불분명한 사생아로 보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목수였던 아버지 요셉에게서 배운 기술로 목수 일을 하던 그분에게 목수라고 부르면서도, ‘요셉의 아들’로 부르지 않고 ‘마리아의 아들’(마르 6,3)로 부르는, 대단히 모욕적인 상황이 오랜 만에 고향에 돌아온 예수님의 눈 앞에서 벌어졌습니다. 그네들에게는 도무지 예수님의 신성을 알아볼 눈이 없었습니다.
그러길래 마을 사람들이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저 사람은 목수로서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은가?”(마르 6,2-3) 하는 못마땅한 반응은 어쩌면 어쩔 수 없었던 결과일지도 모릅니다.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 등은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러 출가하신 후 당시 관습에 따라 성모님을 모시고 살던 대가족의 사촌 형제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어머니 마리아를 제자 요한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친동기간이 있었다면 도리상으로나 관습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마을 사람들이 당신을 환영해 주기는커녕 ‘저 사람’이라고 부르며 냉랭한 반응을 보여준 탓에 서운하셨던 예수님께서는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르 6,4)고 한탄하시며, 그네들에게 믿음이 없는 것에 놀라셨습니다.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이 모두 그분의 신적 능력에 대해 부인할 수 없이 감탄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으로 그분을 알고 있었다는 이유로 그분에 대한 믿음이 생기지 않았다는 현실은 참으로 얄궂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오늘은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입니다. 19세기 이탈리아에서 활약한 요한 보스코는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양을 치며 가난하게 살았지만, 어머니의 엄격한 신앙 교육을 받으며 자란 덕분에 사제가 되었습니다. 그 당시 이탈리아 토리노에는 가난한 청소년들이 많았는데, 그는 세상이 손가락질하고 낙인 찍은 가난한 청소년들을 그만큼 더 따듯하게 돌보아야 한다고 여겼고 또 그리하면 그들은 어느 누구 못지않게 훌륭한 인재로 자라날 수 있으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범죄에 물들어 소년원에 갇혀 있다가 형기를 마치고 나온 불우 청소년들을 받아들여, ‘오라토리오’(기도의 집)라는 기숙사를 만들어서는 그 청소년들과 함께 어울리며 노래도 하고 운동도 하며 기술 교육도 시키고 학교에도 보내는 청소년 운동에 헌신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가 73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전에 오라토리오 출신 사제가 천 명을 넘어설 정도로 그의 청소년 교육은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가 평소에 존경하던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이름을 따서 ‘살레시오 수도회’를 설립하게 된 배경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대목입니다.
교우 여러분!
다윗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만나시려던 거룩한 뜻을 속되게 전락시켰고, 나자렛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 곁에 오신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고 “저 사람은 누구인가?” 하며 냉대하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이에 비해 요한 보스코는 가난한 청소년들에게 복음을 전함으로써 하느님의 영광을 드높이고 예수님의 선교 명령을 충실히 따랐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가 청소년들에 대하여 살레시오 수도회 동료들에게 쓴 편지 일부(성무일도 독서의 기도 중 제2독서)를 소개합니다.
우리가 무엇보다 생도들의 참된 행복을 찾고 그들이 생활에서 자신의 본분을 다하도록 인도해 주고 싶다면, 우리는 이 사랑하는 젊은이들의 부모를 대리한다는 것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언제나 그들을 위해 사랑하는 마음으로 일하고 노력하고 또 사제 직분을 이행해 왔습니다. 비단 나만이 아니고 살레시오회의 회원 전체가 그렇게 했습니다.
자녀들이여, 나는 나의 긴 생활을 통해서 이 위대한 진리에 대해 얼마나 자주 확신하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참는 것보다 화를 내는 것은 더 쉽고 젊은이들을 위협하는 것은 설득시키는 것보다 더 쉽습니다. 이런 이야기까지 하겠습니다. 즉, 참아 내지 못하고 오만한 성격을 지닌 우리에게 있어서, 반항하는 생도들을 참아 주면서 엄중하게 그리고 온유하게 그들의 잘못을 고쳐 주는 것보다 벌을 주는 것이 더 용이한 일이라는 점입니다.
성 바오로가 초심자들에 대해 지녔던 그 사랑을 나는 여러분에게 천거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들이 잘 순종하지 않고 자신이 베푸는 사랑에 대해 무관심한 것을 보았을 때 그 사랑은 바오로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하고 그들에게 권고하게끔 해주었습니다.
여러분이 주체 못하는 분노에 따라 행동한다고 생각할 근거를 어느 누구에게도 주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벌을 줄때 우리가 권위를 주장하거나 또는 분노를 폭발시키려고 행동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필요하게 되는 그 마음의 평안을 유지하기란 힘든 일입니다.
우리 권하에 있는 이들을 우리 자녀로써 바라보도록 합시다. 명령하러 오시지 않고 순종하러 오신 예수님처럼 그들을 섬기는 자가 되도록 합시다. 지배한다는 그런 인상마저 부끄럽게 생각하고 그들에게 더 잘 봉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그들에게 지배권을 행사하지 맙시다.
예수님이 사도들을 대하신 방법도 바로 이것입니다. 사도들은 무지하고 예의를 모르고 불충실한 사람들이었지만 주님은 그들을 참아 주셨습니다. 주님은 죄인들도 자비와 애정 어린 지극한 친밀성으로 대하셨습니다. 그것을 본 어떤 이들에겐 놀라움이 되었고 또 어떤 이들에겐 걸림돌이 되었지만 한편 다른 이들은 그분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게 되리라는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보고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자가 되라고 권고해 주셨습니다.
생도들이 진정 우리의 자녀라면 그들의 잘못을 고쳐 줄 때, 우리는 온갖 분노를 제거해 버리거나 분노를 완전히 제어한 것으로 보일 정도로 가라앉혀야 합니다. 우리는 분노로 마음의 평화를 잃거나 멸시의 눈초리를 보여 주거나 또는 마음 상하는 말을 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고, 오히려 잘못을 고쳐 주고 다 잘되게 해주는 참된 부모들처럼 지금은 자비를 베풀고 미래에는 희망을 내주어야 합니다.
특별히 중대한 문제들이 있는 경우에는 절조 없이 말을 뇌까리는 것보다는 겸손과 항구심으로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이 더 유익합니다. 절조 없이 말을 뇌까릴 때 그 말을 듣는 사람에게 마음을 상하게 만들고 잘못을 저지른 이들에겐 유익한 것을 하나도 주지 못합니다.(“나는 언제나 사랑하는 마음으로 일했습니다”, 성 요한 보스코 사제의 편지에서, Epistolario, Torino, 1959, 4,201-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