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지 [列國誌] 803
■ 3부 일통 천하 (126)
제12권 사라지는 영웅들
제 15장 두 사나이 (1)
위(魏)나라 도읍 대량(大梁) 거리에 한 사내가 거닐고 있었다.
체구가 몹시 컸다. 그럼에도 그 사내는 어딘지 힘이 없어 보였다.
사내는 어깨를 치고 지나가는 행인들에 아랑곳없이 연신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어디로 갈 것인가?"사내의 발걸음은 시장 거리 한복판에 멈춰섰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서 무엇인가를 보고 있었다.사내도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안을 들여다보았다.약장수 차림의 상인 하나가 목이 쉬도록 떠들어대고 있었다.
"여러분은 선자외시(先自隈始) 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초현대(招賢臺) 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아니면 황금대(黃金臺) 라고 들어보셨습니까? 그렇습니다. 망설이지 마십시오.
지금 곧 연나라로 가보시라 이 말씀입니다.""재능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우리 연(燕)나라 왕께서는 그대들을 맞아들여 각자 재능에 맞게 등용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난세를 맞이하여 불세출(不世出)의 영웅이 되고 싶지 않으십니까? 뜻은 품었으되
뜻을 펼칠 곳을 찾지 못하신 분은 지금 당장 연(燕)나라로 가십시오.
연왕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그 약장수는 연나라에서 파견한 세작(細作)이 분명했다.
전국시대로 접어들면서 다른 나라에 세작을 파견하여 인재를 빼내오는 일은 비일비재(非一非再)했다.
시장거리를 거닐던 사내는 흥미를 느끼고 연나라 사람의 연설에 귀를 기울였다.'초현대(招賢臺).....!
연나라의 각오가 여간 아닌 모양이구나.'연설을 듣는 동안 사내의 머릿속은 바쁘게 움직였다.
'한번 가볼까?'
이윽고 날이 저물어 발길을 돌리는 사내의 눈빛은 아까와는 다르게 묘한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사내의 성은 악(樂), 이름은 의(毅)였다. 악의(樂毅)는 원래 위나라 사람이었으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조나라에서 벼슬살이를 했다.여기에는 그만한 까닭이 있었다.그의 선조는 악양(樂羊).
위문후 때 중산국을 공략하여 영수군(靈壽君)에 봉해진 바 있던 바로 그 사람이다.
그후 악씨는 대대로 영수에 정착하여 살았다.그런데 중산환공(中山桓公)이 다시 나라를 일으켜
중산국을 재건했다.영수(靈壽)는 중산국의 영토가 되었고, 악씨는 중산 임금의 신하가 되었다.
이때 악의(樂毅)는 어린 소년이었다.그는 중산국의 중신인 아버지의 도움으로 제나라의 임치로 가서
손빈의 후손에게 손자병법을 공부했다.
그러나 그가 임치에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은 병법의 터득이 아니었다.- 천하는 넓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그의 가슴속에 자라나고 있는 그 무엇인가의 웅지(雄志)였다.
- 그 넓은 천하를 내 손으로 움직이고 싶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중산국(中山國)은 멸망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기마대를 창설한 조무령왕(趙武靈王)이 중산국 정벌의 기치를 내걸고 대대적인 침공을 감행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중산국의 임금은 몽환(夢幻)에 빠져 있었다. 왕호(王號)까지 사용했다.
조정 또한 부패할 대로 부패해 있었다."아아...............!"그는 고국의 무능함에 절망했다.
그러나 고국은 고국이었다.
관직을 얻지 못한 악의(樂毅)는 백의종군하여 조무령왕의 호복기사(胡服騎射)에 맞서 저항하였다.
하지만 조나라의 호복기사는 강했다.결국 악의(樂毅)군대는 대패하고 중산국(中山國)은
역사의 저편으로사라져갔다.
이제 영수(靈壽)는 조나라 영토가 되었다. 악의(樂毅) 또한 조나라의 포로가 되었다.
조무령왕은 호방한 사람이었다.- 나를 따르는 자는 살려준다.
악의는 말 위에 앉아 외쳐대는 조무령왕의 위풍에 반했다.가슴 밑바닥에서 또 다른 욕망이 솟구쳐
올랐다.'저 정도라면 내 운명을 맡길 만하다.'악의(樂毅)는 조무령왕 앞으로 나가 무릎을 꿇었다.
이때부터 그는 조무령왕을 섬기는 호복기사가 되었다.행복한 시절이었다.
말을 타고 평원을 누비는 기마전(騎馬戰)은 병차에만 익숙해 있던 악의에게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요,
쾌감이었다.그러나 그 시절도 오래가지 않았다.
호복기사가 된 지 1년이 막 넘었을 무렵 난데없는 소식을 들었다.- 조무령왕 훙(薨)!
사구로 유람나갔다가 변란을 당해 석 달간 갇혀 있다가 끝내는 굶어 죽었다는 것이었다.
악의(樂毅)는 맥이 빠졌다.별안간 사막 한복판에 홀로 떨어진 듯한 느낌이었다.
그는 조무령왕이 없는 조(趙)나라에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떠나자!'
미련없이 조나라를 떠났다.그의 발길은 자연스럽게 선조의 고향인 위(魏)나라로 향했다.
위나라 도읍인 대량은 번화했다.그러나 객지인이나 다름없는 악의(樂毅)가 그 곳에 마음을 붙이고
머물 곳은 없었다.그는 이 거리 저 거리 떠돌아다녔다.여전히 가슴속에는 천하를 향한 웅지(雄志)를
숨겨둔 채,'어디로 갈 것인가?'그런데 그 날 우연히 시장 거리에서 연나라 사람으로부터
'선자외시(先自隈始)'의 연설을 들었던 것이다.
연소왕(燕昭王)이 제(齊)나라에 복수 하기 위해 널리 인재를 구하고자 신하 곽외(郭隈)에게
추천을 명하자 곽외가 현자를 초빙할 생각이라면 자신인 외(隈)부터 중하게 쓰라고 하며 한 말이다.
- 우선 외(隈) 부터 시작하라.연소왕도 곽외도 퍽 재미난 사람들이로군.
여점(旅店)으로 돌아가는 악의의 발길은 여느 때와 달리 유난히 가벼웠다.
804편에 계속
열국지 [列國誌] 804
■ 3부 일통 천하 (127)
제12권 사라지는 영웅들
제 15장 두 사나이 (2)
제(齊)나라 수도 임치.또 한 사내가 거리를 걷고 있었다.성은 전(田), 이름은 단(單)이었다.
전단(田單).성(姓)에서 알 수 있듯이 제나라 왕족과 관계있는 혈통의 사내였다.
그러나 전씨라고 하여 어찌 다 왕족의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을 것인가.전단의 벼슬은
시연(市掾)이었다.시장(市場)을 감독, 관리하는 직책이다.늘 시장에 나가 살아야 했다.
시장은 한시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언제나 시끄럽고,언제나 일이 생겼다.
왕족으로서 그런 일을 뒤치닥거리 한다는 것은 대단히 귀찮고 치욕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전단(田單)은 그에 아랑곳없이 자신의 벼슬인 시연(市掾)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어느 날이었다.전단(田單)이 시장을 순찰하는데 어디선가 찢어지는 듯한 여인의 비명이 들려왔다.
"아악!"전단은 나는 듯이 비명이 들려온 쪽으로 뛰어갔다.
한 여인이 창백한 얼굴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무슨 일이요?""전대(錢帶)를 도둑 맞았습니다. 우리 식구가 한 달을 지낼 돈입니다. 제발 찾아주세요."
"알겠소."전단(田單)은 즉시 시장 관리들에게 신호를 보내어 모든 출입구를 봉쇄했다.
사람들을 시장 한복판 광장에 모이게 한 후 외쳤다."방금 전 한 부인이 전대(錢帶)를 도둑 맞았소.
그런데 부인이 걱정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바로 그 전대를 훔쳐간 도둑이오."
"...................?""왜냐하면 그 전대(錢帶) 속에는 독이 든 전갈이 들어 있기 때문이오.
그 전갈은 길들여진 것이라 자기 주인만 알아보고 딴 사람의 체취가 나면 가차없이 문다고 하오.
독성이 강한 전갈이라 한 번 물리면 반시각도 못 되어 전신이 굳어버린다고 하오."
"이 부인은 바로 그 점을 염려하고 있는 것이오. 그러니 전대(錢帶)를 훔쳐간 사람은 지금 당장
전대를 땅바닥에 팽개치시오."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군중 속의 한 사내가 품속에서 전대를
팽개치며 달아났다.그러나 그는 얼마 가지 못해 뒤쫓아온 시장 관리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물론 독전갈 얘기는 전단(田單)이 꾸며낸 말이었다.전단의 아내는 남편이 보잘것 없는 직책에
열심인 것이 몹시 못마땅했다.늘 투덜거렸다."당신은 참으로 요령도 없소.
어찌하여 친척들을 통해 좀더 높고 편안한 벼슬을 구하려 하지 않는 것이오?"그러나 전단(田單)은
아내의 불평을 못 들은 척했다.다만 혼자 있을 때마다 하늘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지금 제나라는 혼조(昏朝)다. 언젠가는 저 하늘이 내게 할 일을 내려 주실 거다."과연 기회가 왔다.
- 연나라에서 현사(賢士)를 구하고 있다.곽외(郭隗)를 재상으로 등용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곽외? 누구지?'그러나 전단(田單)은 이내 그 뜻을 알았다.
'그 정도 인물도 재상으로 쓰는데 그 이상의 인물이라면 말할 필요도 없다는 뜻이로군.'
전단(田單)은 여느 때와 달리 깊은 상념에 젖은 채 시장 거리를 거닐고 있었다.'가볼까?'
하지만 그뿐이었다.그는 이내 다른 쪽으로 생각을 돌렸다.'어쩐지 얄팍하다.나는 바람이 되고 싶지 않다.
좀더 기다리다 보면,오히려 바람이 나를 향해 불어오겠지.나는 그 바람을 잠재우는사람이 되리라.'
그는 임치(臨淄)의 시장 거리를 떠나지 않았다.'마침내 왔구나.'악의(樂毅)는 역수를 건너고 있었다.
역수(易水)는 하북성을 흐르는 강으로, 연나라와 중원의 경계이기도 하다.
역수 강변에 세워진 초현대를 바라보고 난 악의(樂毅)는 계속해서 발길을 북쪽으로 향했다.
이윽고 연나라의 도읍인 계성(薊城)에 당도했다.이미 많은 사람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과연 그들은 한결같이 연소왕의 뜨거운 환대를 받았다.
그 중 특히 제나라에서 온 추연(騶衍)에 대한 환대는 세간에 화제가 되기도 했다.
- 연소왕(燕昭王), 친히 빗자루를 들고 길을 쓸며 앞길을 인도하다.추연(騶衍)은 제나라 직하학사로서
음양오행설의 대가다.악의(樂毅)는 추연의 환대를 떠올리며 연소왕 앞에 섰다.
명료하게 자신을 소개했다."악의라고 합니다."굳이 선조 악양의 이름을 거론하지는 않았다.
선조의 명성을 팔아 자신을 내세우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연소왕(燕昭王)은 눈을 어슴프레 뜨고 기억을 더듬었다.'악의...........'들어본 이름이었다.
조무령왕이 중산국을 정벌할 때이던가.한 백의(白衣)의 장수가 끈질기게 조무령왕을 괴롭혔다고 했다.
바로 그 백의 장수의 이름이 악의(樂毅)가 아니었던가.연소왕(燕昭王)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대의 값진 이름을 진작부터 흠모하고 있었소. 빈객의 예로써 모시고 싶으니
그대는 사양치 말기 바라오."- 빈객(賓客)의 예.신하가 아닌 손님으로써 대우해주겠다는 말이었다.
최상의 예우다.그러나 악의(樂毅)는 사양했다.무릎을 꿇고 절을 올리며 말했다.
"저는 연(燕)나라 신하가 되고 싶습니다."제(齊)나라에서의 오랜 유학, 고국으로의 귀국 직후
중산국(中山國) 멸망, 그 뒤를 이은 조ㆍ위나라 등에서의 부평초 같은 떠돌이 생활.
악의로서는 한 나라에 뿌리를 내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는 빈객의 신분으로서가 아닌 신하의 신분으로서 연(燕)나라에 머물 것을 요구했다.
'천하의 모든 인재를 모아 연나라를 일으키리라.'이런 야망을 꿈꾸고 있던 연소왕(燕昭王)이 아니던가.
그는 악의(樂毅)가 자청하여 신하 되기를 바라자 더할 나위 없이 기뻤다.
"오!"
연소왕은 악의에게 아경(亞卿) 벼슬을 내렸다.상경 다음가는 직위다.
악의(樂毅)의 전문 분야는 군사(軍事)였다.
그는 부국강병책을 제안하는 한편 자신이 직접 병사들을 훈련시켰다.
그렇게 1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연(燕)나라는 이제 부유해졌고, 군사는 날쌔고 강해졌다.
오히려 너무 안락하여 전쟁에 관심을 잃을 정도였다.
805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