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떠나고, 안녕을 빌고
길을 떠납니다.
스스로가 행하지 못했기에 나아지지 않고 있는 날들
이젠 잊고 길을 떠나렵니다.
언제고 다시 돌아오는 날엔 그 기억도 꿈이라 여기며
나를 찾는 시간을 가지렵니다.
아픈 것도 혼자 감당해야 하는 몫이고
번뇌에 머리 적시는 것도 혼자의 몫인 것을
봇짐 하나 달랑 둘러메고 혼자 묵묵히 걸으렵니다.
그러다보면 다시 환하게 깨어나는 날도 오겠지요.
여름이라 장마가 벗겨진 틈새로 불볕을 쏟아대고 있습니다.
이젠 그 더위만큼이나 강인해져야겠습니다.
예전처럼 누구에게도 아픔을 말하지 않는 바위처럼
이젠 아플 일도 없겠지만
밤을 안은 달처럼 그렇게 말없이 흐르렵니다.
머묾이 표 나지 않게 머문 바 없이 머물러보렵니다.
다시 시작한다는 것이 두렵고 까마득한 길이지만
그렇다고 주저앉아 운다고 길이 내게로 열려지는 것도 아니니
하나하나 시작하고 한 알 한 알 주워 모아
다시 나의 산을 그려보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시었지요?
그 말이 어떤 빛깔로 그려질지 느껴보렵니다.
더러는 깡마른 울음도 삼킬 것이고
더러는 바람이라 웃기도 하겠지요.
당신에게 기쁨을 늘어놓을 수 있는 시간을 위해
아니 나를 위한 시들지 않는 내 정열을 위해
머문다는 것이 현실이지만 상상이기도 한 것인데
유독 어느 하나의 모습에만 빠지지 않는 심장을 갖기 위해
긴 여행을 시작하렵니다.
걷다가 맨들맨들한 돌을 볼 때면 만지작거리던 추억도 떠오르겠지요.
여름이 덥기만 한 것도 아닐 테니
환하게 웃으시며 땀을 씻어 내리소서.
당신의 주위를 이루는 모든 것들이 평온과 안락함이길 빌며
먼데서 안녕의 기도를 올립니다. / 박난서
안녕을 빌며
카뮈가 장 그르니에의 ‘섬(島)’을 읽은 것은
스무 살 때였다고 하지.
그 책을 손에 쥔 날, 정신없이 어디론가 달려가 단숨에 읽었다고 해.
아마도 첫줄을 읽는 순간 글에 빨려 들어갔던 모양이야.
그르니에는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를 하다가
결국 산 넘으면 산이요 강을 건너면 또 강이니
여행을 하면 뭘 하느냐고 자문해본 후
자기만의 섬을 상상해보게 되지.
그러다가 자연과 햇빛과 나무들로 상상의 섬을 만들어
안주하고 싶다는 말로 글을 이어가지.
카뮈가 왜 이 글에 매료되었을까?
아마도 그는 이상향을 꿈꾸고 있었는지도 몰라.
그 해답을 찾고 있는 중이었을지도.
카뮈의 ‘부조리’는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시사하지.
인간이란 관계의 틀 속에 존재하는 것일 텐데
관계의 끈이 끊어진 상태가 부조리라는 거야.
지금도 많은 인류가 신(神)에 의지해 살아가고 있을텐데
중세가 끝나 근대로 들어서면서부터
신으로부터 점점 이탈하는 현상이 생겼지.
그 일부의 사상을 실존주의 철학이라고 할 텐데
카뮈는 그 시대를 산 사람이지.
신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온 인류가 신을 저버렸으니
얼마나 고독할까.
그러니 스스로 이상향을 찾아 나섰겠지.
여행도 해보고
신을 부활시켜보기도 하고
과학을 믿어보기도 하고~
인간은 오늘도 그렇게 몸부림쳐보는 거라네.
나는 늘 우리 인간은 관계 속에 놓여있는 존재라고 말한다네.
나 이외의 객체와 어떤 관계로든 상호작용하면서 살아가는 거지.
그런데 서로간의 코드라고나 할까
이상이라고나 할까
기호라고나 할까
언어라고나 할까...
이런 것들이 잘 소통되지 않을 때
고독과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고 봐.
신과의 관계
부모나 친족과의 관계
벗이나 이성과의 관계
더 나아가서는 자연이나 우주와의 관계까지도.
이럴 때 객체에 무조건 의지한다면
아무런 갈등이 일어나지 않겠지.
그러나 영장류 인간은 각자 자신의 정체성이 있는 법,
그 정체성을 살려 살아나가려는,
그러니까 개성이 있는 삶을 살아나가고자 할 때
갈등이 생기는 법이라네.
이때 적당히 타협하는 방법도 있을 테고
도피하는 방법도 있을 테고
외경(畏敬)이나 조용히 관조하는 방법도 있을 테지.
문학이나 예술을 창조하는 생활도 그런 맥락 중 하나일거야.
떠난다는 건 관계의 단절을 의미함이겠지.
소녀가 무언가 토해내려는 갈등에 휩싸여있는 것 같군.
그것이 성장을 위한 값진 고통이기를 바라는 마음이야.
그냥 삼켜버리는 방법도 있겠지만
포기나 도피는 안 될 일이지.
왜냐하면?
삶을 이야기한다는 건 실존을 전제로 하는 것이니 그렇다네.
웃는 얼굴로 안녕을 말하는 소녀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그대의 하얀 목에
치렁치렁한 녹음을 엮어 걸어주고 싶다네.
영혼이 고픈 소녀여!
곧 사위어버릴 검불일랑 놓아두고 어서 일어나오.
한 손 내게 주고, 또 한 손은 태양을 부르며
여름의 열기 속으로 걸어가야 한다네. / 김 난 석
나는 정월에 길을 떠나 섣달에 돌아오느니
이제 막 정상에 오르기 위해
불볕 아래 시퍼렇게 날이 선 가시덤불을 헤친다
불어오던 바람조차 나뭇가지에 걸려 축 늘어지고
그늘 속에선 독 오른 배암
혓바닥을 날름대는 구나
하얗던 구름
산 넘어 숨어버렸는지
파랗던 하늘 총명을 잃은 채 핏기마저 서리는데
붉은 태양이여
한 치도 비켜설 수없는 정오(正午)에 머물 것이면
차라리 나의 정수리에 꽂혀다오
끓는 용광로에 육신을 처박고 타고 끓고 타고 끓어
하얀 회분조차 모두 날려 보낼지면
한 그릇 쇳물로 남실대려니
칠월의 산이여
그제야 부어져 흘러내릴지라도
저 겨울의 산 아래 단단한 이정표로 멈춰 서리라
칠월의 산에 오른다
나의 한 순간은 아침에 깨어나 저녁에 이우느니
이제 막 정상에 이르기 위해
폭우에 무너져 내린 단애(斷崖)를 기어올라야 한다.
(졸시 '칠월의 산')
첫댓글 난석 님에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찾으려는 소녀..
이런 소녀에게 ...
문학과 철학, 심리학을 망라하여
에둘러 해결 방안을 제시하는 난석 님~
그럴 수 밖에 없는 현실의 장벽도 있었겠지요~~
두 사람의 편지에는
제가 이해하기 어려운
현학적인 표현도 많네요~
알면 아는 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두 사람은 흐르는 강물에 맡기고
저는 그냥
엘비라 마디간의 ost나 들으렵니다~^^
https://youtu.be/lM4ESg0gzI0
글 잘 읽었습니다~~^^
PLAY
고마워요 두용님.
엘비라 마디간으로 더 잘 알려진 모차르트의 그 피아노협주곡도 고맙고요.
엘비라 마디간 영화는 저의 사랑이야기와는 설정이 다르지만
유사점이 있기도하고요
두용님의 미감을 엿볼수도 있겠네요.^^
난석님~
우리는 늘 관계속에서 살아가며 느껴야 하네요.
살아가면서 코드가 맞을 때도 있고 안맞을 때도
있지만 서로가 노력을 해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맞아요.
그런 노력을 해야겠지요.
난석님~
글을 읽으니
문득 여행이 하고 싶어지네요
그냥 정처없이 발길 닿는데로 떠났으면 좋겠는데
이 조차 맘대로 안됩니다
그게 상황이 다 다르니까요.
장 그르니에도 결국 상상의 여행을 하게 되지요.
길을 떠나고 안녕을 빌고
세계명작을 읽는 것처럼 이해가 어려워 보일듯 보이지않는 숨바꼭질을 했네요.
두용님의 댓글에 한표를 보냅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시길
뭐 청을 받고 약속한 것이기에 저의 이야기를 해봤지만
관심 고마워요 별꽃님.^^
대학에서 고양과목을 접하듯 좋은 난석님의 글 앞에서 머무르고 있습니다.
그르니에가 자신의 정체를 찾고자 상상의 섬을 만드는 글귀에서
매혹적인 감정을 느끼고 있습니다.
저도 나름대로 간간이 나만의 상상의 세계에 안주하고픈 생각이 들기에...
늘 건강하세요
그렇습니다.
밖으로도 걷고 안으로도 걷고~
우리는 길을 걷는 에뜨랑제니까요.
상상의 여행
혼자만의길을 오기도 가기도 정착도 하겠지요
무아의 세계 ..눈을뜨면 현실의 또다른 모습을 그리게 된답니다 제경우 이기도 하고요
맞아요.
생각과 현실은 사뭇 다르지요.
그래서 갈등이 이는거지만
그걸 좁히려 발버둥치는 게 삶일겁니다.
모든 관계는
나혼자 만의 노력으로는 불가능
관계속에 살아가는
우리들 인생은
하숙생 노래로 마무리하럽니다. ㅎ
크아아~
이렇게 해서 생각이 또 넓어지네요.
그런데 하숙생은 너그러운 아주머니가 있는데
최희준의 하숙생은 벌거숭이로 왔다가 벌거숭이로 가니
그저 웃고 가기나 해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