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우리말로 “피눈물”이라 하든지, 아니면 한자어로 “혈루(血淚)”라 하면 될 일을 왜 굳이 일본식 제목으로 “血의 淚”로 했을까 좀 수상했었는데 작가 이인직이 “의지의 친일파”였다면 대충 그 이유가 설명되는 것 같군요.
옛날 학창시절에 배웠던 1906년 작품 “혈의 누”는 여성교육, 자유연애, 계몽사상이 잘 표현된 최초의 신소설이라고 하는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제목이 왜 끔찍하게도 “혈의 누, 즉 피눈물”이 되었을까 갑자기 궁금해져서 작품을 찾아 보았더니, 아... 어째 이런 일이...
“일청전쟁 때에 평양 근처에서 청나라 군인들의 횡포로 이산가족이 되어 피눈물을 흘리며 엄마 아빠 찾아 헤매던 옥년이라는 여자 아이가 일본군 군의관 정상(井上/이노우에)을 만나 구조되고 양녀가 되어 일본으로 건너가서 공부하다가 구완서라는 조선 유학생을 만나 같이 미국 유학 가서 자유 연애를 하고...”
청일전쟁이 아니라 일청전쟁이라 표현해서 좀 이상한 느낌을 주더니, 청나라 즉 중국 군인은 주인공을 울리는 아주 나쁜 역할로 나오고... 일본 군인은 주인공에게 새 삶을 주는 아주 좋은 역할로 나오는 색다른 유형의 이야기 구성이 우리나라 최초가 확실하긴 한데, 기분이 썩 유쾌하지는 않더군요.
결정적으로 저를 놀라게 한 내용은 애인 구완서라는 조선 청년의 꿈이 “조선, 일본, 만주를 합하여 대연방을 건설해야겠다”고 하는 것인데, 이 내용이 알고 보니 놀랍게도 일본 이토 히로부미의 “대동아 공영권” 이론과 똑같다는 점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이 구완서의 말이 작가 이인직 자신의 정치 철학이었다고 하는군요... 쩝쩝...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하고 이인직이라는 사람에 대하여 좀더 알고 싶어졌습니다.
경기도 이천 출신의 이인직은 39세의 나이에 관비로 일본유학을 가서 1900년 9월부터 동경정치학교에서 고마쓰[小松]로부터 정치제도와 국제법 강의를 듣고 1년 후 졸업하여 미야코[都] 신문사의 견습생이 되어 일본어로 “과부의 꿈”이라는 서양식 신소설을 써서 신문에도 연재하는 등 글 쓰는 일에 유달리 많은 관심을 보였다고 합니다.
1903년 대한제국에서 관비 유학생 총소환령을 내린 적이 있는데, 자유연애 신봉자였던 이인직은 조국의 부인을 버리고 일본 여인과 자유로이(?) 결혼을 하면서 합법적으로 일본에 남게 됩니다. 여세를 타고 창씨개명까지 자진해서 할 작정이었지만 김옥균과 박영효의 창씨개명 이후 일본 정부에서 조선인의 “무작정 일본식 창씨개명”을 법적으로 금지하는 바람에 이인직의 창씨개명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말지요.
다음 해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 정부는 일본인의 남편 이인직을 일본군 육군 제1군 소속 조선어 통역관으로 위촉하여 2월 중순에 이인직은 일본군과 함께 당당히 인천항으로 금의환향하게 됩니다.
러시아와의 전쟁이 거의 승리로 굳어지자 1905년 10월 대한제국 고종 황제도 전쟁 뒷바라지에 고생했다면서 이토 히로부미가 왕실 위문 특사의 자격으로 들어 와서는 11월 중순에 을사보호조약, 12월 하순에 한국통감부 설치, 이토 자신의 제1대 통감 부임이 일사천리로 착착 진행되었지요.
그런데 몇 년 전 일본정치학교에서 이인직을 가르쳤던 고마쓰 교수가 대한제국 중추원 서기국장으로 들어 왔다가 통감부 외사국장 자리로 가게 되는데요. 고마쓰는 자기가 가르쳤던 조중응을 일본에서 불러들여 법부대신을 시켰고, 일본군 통역이었던 이인직은 소원대로 신문사 근무를 하게 해 주었습니다.
1906년 2월 이인직은 일진회 송병준이 운영하는 국민신보 주필이 되었다가 6월에는 천주교 3대 교주이며 러일 전쟁 때에 일본군을 적극적으로 도와 주었던 손병희의 “만세보” 주필로 옮겨 갔지요. 그리고는 7월 22일부터 10월 10일까지 “血의 淚”라는 이 일본식 신소설 작품을 연재하게 됩니다. 손병희가 재정난으로 어려움을 토로하자 1907년에 “만세보”를 이완용이 인수하여 이름을 “대한신문”으로 바꾸고 이인직을 신문사 사장 겸 일본어 통역 담당 개인 비서로 임명하게 합니다. 일본어를 몰라 영어로 이토 히로부미와 대화하던 이완용에게 이인직을 붙여 준 것은 통감부에서 이완용 총리대신을 직접 감독하고 지도하려는 뜻도 숨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1907년 7월에 네덜란드 헤이그에 밀사로 갔던 이준이 기차 멀미로 지병이 도져서 객사하고 몇 개 국어에 능통한 이위종이 유창한 외국어 솜씨로 만국평화회의보 주필과 단독 인터뷰한 내용이 대서특필되는 등 일본이 국제적으로 큰 망신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인직은 이완용을 대신하여 이토 히로부미 통감에게 사죄문을 보내면서 우리 의병들을 “철부지의 불장난”으로 매도하기도 하였지요.
이토 히로부미 암살 사건 이후 강경파 데라우치 통감이 부임하자 1910년 8월 초 이인직이 통감부 외사국장이자 은사인 고마쓰를 만나 “이완용 수상에게 2천만 조선인과 함께 쓰러질 것인가 아니면 6천만 일본인과 함께 전진할 것인가 빨리 양자택일하시라”고 재촉하고 왔다면서, 양국 합병을 성사시키면 대한제국의 왕실과 귀족들에게 후한 보답을 주는 것으로 합의하고 이완용을 책임지고 한일 합방 추진을 설득하기로 하고서는 맥주를 기분좋게 마시고 나왔다는군요... 아무리 쓰러지는 나라라 할지라도 이인직이 이런 일까지 할 줄이야 정말 몰랐습니다.
1898년 한성신보에 토소자(吐笑子)라는 작가가 일본을 교묘하게 풍자한 “엿장사”라는 신소설을 연재했다는 사실이 최근에 발굴되는 바람에... 최초의 신소설이 이인직의 “혈의 누”였다는 말도 한때의 해프닝으로 조만간 끝나버리고 말겠지만, 그 동안에 인간 이인직에 속았던 걸 생각하면... 아휴... 이걸 그냥...!
========================================
글쓴이 : 황재순. 문학박사. 인천에서 장학사와 교장을 지냈음.
첫댓글 한 때 우리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과도 뜻을
같이했다는 이인직의 친일내력에 애지즉 읽은
"혈의 누"를 잊고 싶을지경.............
알고도 속을진대... 몰랐기에 속은 일이고
스트레스는 건강에 害로우니 금물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