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신은 서울(서라벌) 사람이다. 12대 선조 수로왕(首露王)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 그는 후한(後漢) 건무(建武) 18년 임인에 구봉에 올라 가락의 9촌을 바라보고 마침내 그 땅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이름을 가야라 했는데 뒤에 금관국(金官國)이라고 고쳤다. 그 자손이 계승하여 9세손 구해(仇亥) 또는 구차휴(仇次休)에 이르렀다. 구해는 유신에세 증조가 된다. 신라 사람들이 스스로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의 후손이라 했으므로 성(姓)을 김(金)이라 했는데, 유신의 비문에도 또한 헌원(軒轅)의 후예요, 소호(少昊)의 자손이라 했으니 남가야(南加耶; 金官加耶)의 시조 수로왕은 신라와 성이 같다.'
문무대왕릉비의 김성한 언급도 김유신의 비문과 같은 이유인것같은데
고려왕씨도 중국 당나라 황제를 끌여들였고
당나라 황실은 노자의 후손을 끌여들인것 보면
집안미화시키려면 남의 조상을 자기조상으로 바꿔치기 하는건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닌듯 하군요.
첫댓글 글쎄요. 남의 조상을 자랑스럽게 자기 선조로 등록할 사람이 있을까요? 일반인도 결심할 때, '~하지 않으면 내가 성을 간다'고 말하거늘... 다른 시각을도 조명해야 할 문제일 것 같습니다.
남당 유고에는 대가야를 남북으로 나누었다는 기록이 등장하는데, 금관가야가 멸망하기 전입니다. 김유신의 비문에 남가야의 시조 수로왕이라고 하니 얼떨떨 하군요.
(참고기사)
帝會靑巤 于境上 幸之 靑巤願爲權妻 而終身事帝 帝許之 分加耶爲南北 封靑明于北國 封異腦于南國
왕이 청렵(靑巤)을 국경에서 만나 행차하였다. 청렵은 권처(權妻)로 삼아주기를 원하며, 죽을 때까지 왕을 섬기고자 하였다. 왕이 허락하고 가야(加耶)를 남북으로 나누었다. 청명(靑明)을 북국(北國), 이뇌(異腦)를 남국(南國)(왕)으로 삼았다.
근거없는 남당유고로 말하지 말라고 전에 말했습니다만?
삼한일통홍보담당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지요. 일반적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해도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근거로 주장할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오히려 삼국유사 가락국기 보다도 어쩌면 남당유고의 내용이 오히려 사실적인 기년으로 공감된다고 생각됩니다..미주가효님 조언처럼 "일반적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해도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근거로 주장할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지요!"
정성일님 김유신의 비문에 남가야의 시조 수로왕이라고 하니 얼떨떨 하군요.라고 하셨는데 그 내용은 김유신의 비문 내용이 아니라 삼국사기 열전 편찬자가 그렇게 적어놓은 것입니다..삼국사기 열전에서 유신의 비문에도 "헌원의 후예이며, 소호의 종손"이라 하였으니,..에서 따옴표 내의 내용만 비문내용에 속합니다...^^*
소호금천님// 자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남당유고는 형식적으로는 일본 궁내성 서릉고를 확인할 수 없는 현실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남당유고의 여러 서적을 비교 검토하고, 나아가 삼국사기, 삼국유사, 중국정사조선전과의 비교 검토를 해 보면 진위여부는 알수없으나 내용적으로 합당한지 여부는 판단할 수 있습니다. 미추왕릉으로 전하는 대릉은 4세기 후반에 축조되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남당 유고에 미추의 사망시기가 362년 10월입니다. 삼국사기에 미추는 3세기후반 사망이니 대략 100년차이가 납니다. 제가 미추왕릉의 발굴자료를 살펴보지 않음이 있고, 미추왕릉의 명문이 있느냐 물으시면 답하기 곤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