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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형제회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마태오 13,54-58
예수님께서 고향으로 돌아오셨습니다.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그분의 말씀에 고향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저런 지혜와 저런 힘이 어디서 왔느냐는 것입니다.
놀라움은 좋은 시작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놀라움은 믿음으로 자라지 못했습니다. 곧바로 다른 말이 뒤따랐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 어머니와 형제들의 이름까지 하나하나 꺼내며 그들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 우리가 이미 아는 사람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예수님을 몰라서가 아니라 ‘너무 잘 안다고 여겨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지식이 지혜를 가렸고, 익숙함이 신비를 덮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자리가 가장 먼 자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주님께서는 조용히 말씀하십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이것은 원망이 아니라 슬픔입니다. 사랑하는 이들에게 가장 깊이 오해받는 하느님의 슬픔입니다.
복음은 이렇게 끝납니다.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고. 주님의 능력이 줄어든 것이 아닙니다. 그 능력을 받을 자리가 닫혀 있었습니다.
은총은 문을 부수고 들어오지 않습니다. 두드리시고 기다리십니다. 믿음은 그 문을 안에서 여는 손입니다.
오늘 기리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나자렛 사람들이 던진 물음을 끝까지 밀고 나간 사람입니다. 그도 물었습니다. 이 지혜는 어디서 오는가. 그러나 그는 물음을 멈추지 않고 그 물음을 무릎 꿇는 자리까지 데려갔습니다. 그에게 이성은 신앙의 적이 아니었고, 신앙은 이성의 포기가 아니었습니다. 묻는 사람은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가고, 단정하는 사람은 멀어집니다. 나자렛 사람들의 잘못은 물음이 아니라 물음을 너무 빨리 닫아 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평생 묻고 쓴 그가 마지막에 “모두 지푸라기 같다” 하고 침묵한 것은 지식의 포기가 아니라 지식의 완성이었습니다. 아는 만큼 말하고, 아는 것보다 크신 분 앞에서 잠잠해지는 것 ―
이것이 성숙한 신앙의 자리입니다.
영성 주간의 시선으로 보면 오늘 복음은 ‘단순한 마음’을 가르칩니다. 단순한 마음은 아무것도 모르는 마음이 아니라, 알면서도 놀랄 수 있는 마음입니다. 어제 본 얼굴을 오늘 처음처럼 보는 마음, 내 가족과 내 공동체 안에서 아직 하느님이 하실 일이 남아 있음을 믿는 마음입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누구를 ‘이미 다 안다’며 닫아 두고 있는가?
내 익숙함이 가로막은 은총의 문은 어디인가?
나는 여전히 주님께 묻고 있는가, 아니면 단정하고 있는가?
가장 가까운 사람 안에서 나는 무엇을 다시 보아야 하는가?
주님,
가장 익숙한 자리에서 당신을 알아보게 하소서. ‘이미 안다’는 마음을 거두시고,
묻는 겸손과 믿는 단순함을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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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내 예언자>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고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데 아무리 주님 말씀이라도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제 생각에 예언자는 고향뿐 아니라 어디서도 존경과 환영을 받지 못합니다.
예언자를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예언자를 좋아하는 사람은 이미 성인들 경지에 오른 분들뿐, 보통의 사람들은 비록 신앙인일지라도 싫어하기 마련입니다.
예언자란 하느님의 파견을 받은 사람이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파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느님 뜻에 따라 사람들이 잘살고 있으면 예언자가 파견될까요? 굳이 파견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네게 파견된 예언자는 존경할지 몰라도 내게 파견된 예언자를 환영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고, 환영까지는 하지 못하고 억지로라도 받아들이는 사람은 혹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사실 신앙인들입니다. 인간적으로는 받아들이기 싫지만 하느님 때문에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이런 뜻에서 다윗을 성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밧 세바와 간통한 것이 나탄 예언자를 통해 드러났을 때 그는 괴로워하면서도 즉시 나탄의 말을 주님의 말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밧 세바의 남편 우리야, 자기가 죽인 우리야에게 죄를 지었다고 하지 않고 하느님께 죄를 지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
우리야가 이 말을 들으면 화를 낼지도 모릅니다. 나에게 죄를 지은 것이지 왜 하느님께 죄를 지은 것이냐고. 그러므로 우리가 성인은 못 되고 그래도 신앙인이라고 생각한다면 나의 예언자 곧 내게 파견된 예언자를 예언자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고, 내가 듣기 싫어하는 말을 하는 사람을 예언자, 곧 하느님께서 내게 보낸 내 예언자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마 집안의 남편에게 아내가, 아내에게 남편이 내 예언자일 것입니다.
아내와 남편을 그저 아내와 남편이 아니라 내 예언자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는 첫날이 오늘이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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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형제회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십자가는 실망과 좌절의 사형틀이 아니라 생명과 구원을 가져다주는 모태입니다!>
한 젊은 외판원이 여러 고객을 찾아다니면서 제품을 팔려고 했지만 번번이 거절만 당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으로 크게 낙심한 그는 경험 많은 선배 외판원에게 물었습니다.
"왜 저는 매번 거절만 당하는 걸까요?"
그때 나이 든 외판원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머리를 맞기도 하고, 욕을 먹기도 하고, 문밖으로 쫓겨나기도 했지만, 결코 '거절당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네! 기억하게, 젊은이… 거절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우리에게 일어난 사건을 우리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을 말이야!"
우리는 우리 삶에서 실망과 좌절을 어떻게 해석하며 살아가고 있는가요? 낙심하고 절망합니까? 아니면 희망을 저버리지 않고 "모든 거절은 참된 성공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과정"임을 믿으려고 합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신앙을 굳건히 지키고 타협하지 않을 때, 거절과 낙심은 반드시 찾아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충실한 제자가 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우리 주님께서도 거절과 낙심을 겪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끝까지 하느님의 뜻을 붙들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반대의 표징"이 되십니다.
평화의 임금이 분열과 멸시의 대상이 되시고, 영혼의 치유자가 불화와 갈등의 원인으로 여겨지시고, 마음의 위로자가 불편과 불안의 원인으로 보이십니다.
그러나 이런 외적인 상황이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선포하시고 행하시는 데 걸림돌이 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뜻이란 요한 복음에서 전하듯이 "하느님께서 세상(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시는"(요한 3,16) 그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을 따르는 모든 이는 이 '반대의 표징'을 함께 살아가도록 부르심받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와 진솔함을 붙들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이는, 세상으로부터 거절당할 수 있습니다. 사회와 공동체로부터 낙심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주님께 매달려야 합니다.
삶은 우리에게 '거절이라는 돌'을 던지기도 합니다. 그 돌에 맞아 상처 입을 수도 있지만, 또 우리는 그 돌을 디딤돌 삼아 시련을 넘어서서 끊임없이 사랑을 살아가기 위해 더 큰 용기를 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실망을 원망할 수도 있고, 그 순간을 더 큰 축복의 기회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거절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예수회 창설자 성 이냐시오 로욜라의 기념일입니다.
그는 한때 세속적 야망과 헛된 영광을 좇던 군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전쟁 중 다리 부상으로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 있으면서, 성인들의 삶을 읽게 되었고, 깊은 회심을 체험했습니다.
그는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왜 나는 내 삶을 나 자신만을 위해 쓰고 있는가? 성인들은 이 땅에서 그렇게 많은 선을 행했는데, 나도 그렇게 할 수 있지 않은가?"
실망과 낙심의 순간이었지만, 주님께서는 그 상황을 통해 그의 삶을 변화시키셨습니다.
그의 좌우명은 Ad maiorem Dei gloriam —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였습니다. 이는 오늘 우리에게도 큰 도전과 영감을 줍니다.
예전에 이냐시오 성인의 고향인 로욜라에 간 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아주 특별한 십자고상 사진을 보았습니다. 웃으시는 예수님 고상 사진입니다. 본래 이 목각 십자고상의 원본은 로욜라의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당에 있는 것이랍니다.
처음에 저는 이 고상 사진을 보고 적잖이 놀랐습니다만, 점차로 이 십자고상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고통스럽게 죽임을 당하셨습니다만, 이 십자고상은 예수님 내면의 깊은 확신과 희망을 드러내 줍니다.
십자가는 실망과 좌절의 사형틀이 아니라 생명과 구원을 가져다주는 모태라는 진리를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 이냐시오의 다음 기도를 마음 깊이 바쳐보도록 합시다.
"오, 저의 하느님, 제가 너그러울 수 있도록 가르쳐 주시고, 당신을 마땅히 섬기게 하시며…,
대가를 헤아리지 않고 내어주게 하시고, 상처 입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우게 하시며, 쉼을 바라지 않고 일하게 하시고, 보상을 기대하지 않고 봉사하게 하소서. 다만, 당신의 거룩한 뜻을 행하고 있다는 지식만을 제게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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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형제회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정의와 자비, 사랑 안에서 말씀을 읽읍시다!>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성서와 거룩한 문헌은 단순한 수용이 아니라, 깊은 묵상과 성찰 속에서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사랑의 렌즈를 통해 성경을 읽기
정의와 자비, 사랑 안에서 말씀을 읽읍시다!
2026년 7월 30일 목요일
아메리카 원주민 신학자 랜디 우들리 박사(Rev. Dr. Randy Woodely)는 예수님께서 당시 일부 종교 지도자들이 성서를 해석하던 방식과 그들에 대한 비판을 어떻게 바라보셨는지를 성찰합니다:
우리 모두는 창조주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에 대해 저마다의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거룩한 책을 근거로 하느님의 유일한 뜻을 인류 전체에 대하여 단정하고, 특히 우리와 뜻을 같이하지 않는 이들을 배척하고 배제할 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꾸짖으셨던 바리사이들의 무리에 가까워집니다. 이러한 배타성으로 인해 우리는 성서와 거룩한 문헌들이 전하려는 참된 핵심을 놓치게 됩니다.
마태오 복음 23장 23–24절에 기록된, 예수님께서 특정한 바리사이들에게 하신 말씀을 깊이 묵상해 봅시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은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했다.
눈먼 인도자들아! 너희는 작은 벌레들은 걸러 내면서 낙타는 그냥 삼키는 자들이다.
제가 이해하기로는, 예수님께서는 성서 자체를 거부하신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배제하는 특정한 해석과 적용 방식을 거부하신 것입니다. 어느 때라도 우리가 거룩한 문헌을 배타와 거절, 지배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한다면, 정의와 자비, 사랑을 외면하게 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성서를 선용하기보다 오히려 해를 끼치게 되며, 결국 예수님께서 꾸짖으셨던 그 위선에 빠지게 됩니다….
저도 그 딜레마를 잘 이해합니다. 복음주의 전통 교회 안에서 자라며, 성서의 모든 단어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교육받았기에, 때로는 불편하거나 모순처럼 보이는… 부분조차 그대로 수용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텍스트들의 많은 부분을 기록한 조상들의 후손인 유다인 공동체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고수하는 이런 경직된 근본주의를 따르지 않습니다. 유다교 전통에서는 "미드라쉬"(성서해석 전통)를 통해 다양한 해석을 질문하고 씨름하는 것이 단순히 허용되는 차원을 넘어 필수적입니다. 그들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놓치는 진리를 알고 있습니다. 곧, 거룩한 문헌은 단순한 수용이 아니라 깊은 성찰과 묵상을 요구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들리는 성서의 이야기들을 강력한 가르침의 도구하고 확신하여 말합니다:
"낙타를 삼킨다"는 말처럼, 우리는 성서와 거룩한 책들 안에 담긴 전체 이야기의 아름다움과 시적 울림을 놓치곤 합니다. 우리는 종종 이야기가 우리 안에서 머물며 마음을 두드리고, 상상력을 일깨우도록 허용하기보다, 손쉬운 길을 찾으려 합니다. 그리하여 사랑이 이야기 속에서 우리를 관통하도록 내어 맡기기보다, 본능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충동에 자신을 내맡기고 맙니다….
이야기는 우리에게 가장 강력한 치유의 약 중 하나로 남아, 인간적 연결을 위한 생명의 줄이 됩니다. 이야기는 우리의 고립을 치유하고, 냉정한 현실을 넘어 온전한 인간성을 일깨우며, 우리가 누구인지 기억하게 하고 우리가 될 수 있는 존재로 나아가도록 공동체 안에서 엮어 줍니다. 그것은 소설이나 영화, 연극, 구전, 그리고 성서와 같은 거룩한 문헌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우리는 이야기가 전해 주는 진리 때문에 그것을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이야기가 본래 의도된 대로 우리를 가르치고, 영감을 주며, 하나로 묶고, 즐겁게 하도록 내어 맡기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바라신 것은 무조건적인 사랑임을 저는 깨닫습니다. 그것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지만, 인류의 모든 상처와 병을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 Reino P.
References
Randy Woodley, How Western Christianity Got It Wrong: Replacing the God of Fear with a Spirituality of Healing (Broadleaf Books, 2026), 66–68, 70.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Jenna Keiper, untitled (detail), 2020, photo, New Mexico.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마치 시력을 교정하기 위해 쓰는 안경처럼, 사랑은 성경 말씀을 더 깊이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게 해 주는 렌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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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형제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충실함과 기쁨으로 내어맡기는 삶>
예레 26,1-9; 마태 13,54-58
오늘 제1독서는 유다 임금 여호야킴 통치 초기를 배경으로 합니다. 예레미야는 성전 뜰에 서서 백성에게 회개의 말씀을 선포하라는 어려운 사명을 받습니다. 주님께서는 “한 마디도 빼놓지 말고 전하여라”(26,2)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의 사명은 사람의 삶을 변화시키는 살아 있는 말씀을 선포하는 것입니다(דָּבַר). 하느님께서는 백성이 당신 말씀을 듣고 방향을 바꿔 당신께 “돌아서기”를 기다리십니다. 백성의 비극은 하느님의 말씀을 한 번도 듣지 못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더 이상 그 말씀에 자신을 맡기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신앙이 습관으로만 남게 될 때, 우리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 능력을 조금씩 잃어버리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비슷한 비극이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나자렛 회당에서 가르치시자 사람들은 그분의 지혜에 놀랍니다. 그러나 곧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13,55) 하고 말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했던 이유는 그분이 너무 위대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 가까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 안에 그분을 가두어 버렸고, 그 안에 계신 하느님의 신비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복음을 너무 잘 안다고 생각하고, 성체성사가 더 이상 경이로움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며, 기도가 습관으로만 남게 될 때 같은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믿음은 하느님을 노골적으로 거부할 때만이 아니라, 그분의 현존 앞에서 더 이상 놀라워하지 않을 때에도 조금씩 식어 갑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복음이 언제나 삶을 새롭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 준 성인입니다. 그는 제자 파견의 복음을 들었을 때 그것을 과거의 아름다운 이야기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 말씀을 자신에게 건네시는 주님의 부르심으로 들었습니다. 그의 회개는 바로 말씀을 습관의 귀가 아니라 제자의 마음으로 듣기 시작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복음을 "토를 달지 않고"(sine glossa), 곧 인간적인 해석과 타협으로 약화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살아가고자 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삶 가운데 무엇을 남겨 둘 것인지를 먼저 묻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얼마나 더 온전히 주님께 내어 맡길 수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어쩌면 오늘날 우리의 가장 큰 영적 가난은 하느님에 대한 말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그 말씀으로 변화되기를 원하지 않는 데 있는지도 모릅니다.
오늘의 두 독서는 우리에게 깊은 물음을 던집니다. 예레미야는 진리를 선포했기에 거부당했고, 예수님께서는 너무나 겸손하게 우리 가운데 오셨기에 거부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의 삶 안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홀로 살아가는 이들의 외로움 속에서, 병고를 겪는 이들의 고통 속에서, 지쳐 있는 가정과 공동체 안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침묵 어린 부르짖음 안에서 우리를 만나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나자렛 사람들처럼 “이미 알고 있다.”고 말하며 마음의 문을 닫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무지가 아니라 영적인 자기충족일 때가 많습니다. 더 이상 회개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기적을 기다리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복음은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13,58)고 전합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겸손한 마음을 되찾으라고 초대합니다. 복음을 듣기 전에 먼저 “주님께서 오늘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시는가?”를 물어야 하겠습니다. 다른 사람의 변화를 바라기에 앞서 내가 어디에서 주님께 돌아서야 하는지를 먼저 성찰해야 하겠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처럼 날마다 처음 복음을 듣는 사람의 마음으로 말씀 앞에 서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의 평범한 일상을 지나가고 계십니다. 그분의 현존에 익숙해져 무뎌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끊임없이 복음으로 돌아가고, 작은 것 안에 계시는 주님을 발견하며, 그분의 말씀이 우리의 삶을 빚어 가시도록 충실함과 단순함과 기쁨으로 자신을 내어 맡기는 하루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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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형제회 이기남 마르첼리노 마리아 수사님]
<기도와 영적 여정 10. 거울에서 얼굴로, 프란치스칸 기도의 길>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얼굴이 됩니다. 성프란치스코와 성녀 글라라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거울을 십자가에서 찾았습니다. 육화의 겸손과 수난의 사랑이라는 거울을 통해 하느님을 보았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거울 앞에 오래 서 있는 사람은 자신의 얼굴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영혼의 거울 앞에 오래 머무는 사람은 자기 얼굴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얼굴을 닮아가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성녀 클라라가 말하는 관상의 가장 깊은 신비입니다. 기도는 단순히 하느님을 바라보는 시간이 아니라, 하느님의 시선 안에서 나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는 시간이며, 그 발견이 마침내 존재 전체를 변화시키는 은총의 여정입니다. 관점 바꾸기는 나의 눈을 바꿉니다. 내가 하느님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하느님이 우리를 바라보시는 관점으로 바꾸는 시선은 우리 삶을 통째로 변화시키는 영적 여정의 기초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 신비를 한 문장으로 표현합니다.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거울처럼 바라보며, 주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어 갑니다."(2코린 3,18) 이 말씀은 관상의 목적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거울을 바라보는 목적은 거울을 소유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거울을 통하여 자신의 얼굴이 변화되는 데 있습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의 목적은 특별한 체험을 소유하는 데 있지 않고, 그리스도의 얼굴이 우리의 얼굴 안에서 드러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칸 기도는 언제나 변화를 향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서도 여전히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라면 아직 십자가를 깊이 바라본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읽으면서도 형제를 사랑하지 못한다면 아직 복음이 마음속까지 내려오지 못한 것입니다. 성체를 모시면서도 세상의 가장 작은 이들을 외면한다면 아직 성체의 신비가 삶으로 육화되지 않은 것입니다. 참된 관상은 반드시 삶의 변화를 낳습니다.
프란치스코가 평생 바라본 것은 십자가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바라본 십자가는 단순히 고통의 상징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끝까지 내어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는 그 사랑을 오래 바라보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사랑을 닮아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의 눈은 연민의 눈이 되었고, 그의 손은 나누는 손이 되었으며, 그의 발은 가장 작은 이들을 향하여 걸어가는 발이 되었습니다. 마침내 그의 존재 전체가 복음의 얼굴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기도의 가장 놀라운 열매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새로운 얼굴을 얻게 됩니다. 육신의 얼굴은 세월을 따라 늙어 가지만, 영혼의 얼굴은 사랑을 따라 아름다워집니다. 오랫동안 용서한 사람에게는 용서의 얼굴이 생기고, 오래 기다린 사람에게는 인내의 얼굴이 생기며, 오래 사랑한 사람에게는 그리스도의 온유함이 스며듭니다. 사람들은 그 얼굴에서 설명할 수 없는 평화를 만나게 됩니다.
그 얼굴은 결코 화려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래 사용한 성경책처럼 소박하고, 오래 기도한 수도원의 돌계단처럼 깊은 흔적을 지니고 있습니다. 세상의 성공이 새겨 놓은 얼굴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가 오랜 세월 빚어 놓은 얼굴입니다. 그래서 성인들의 얼굴은 아름다워 보입니다. 그 아름다움은 외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이 오래 머물다 간 흔적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신자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에서 놀라운 말씀을 남깁니다. "우리가 사랑과 깨끗하고 진실한 양심으로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과 몸 안에 모시고 다니며, 거룩한 활동으로 그분을 낳을 때 우리는 그분의 어머니가 됩니다." 이 말은 프란치스칸 기도의 절정을 보여 줍니다. 기도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다시 세상에 태어나시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클라라가 말하는 거울의 완성이며, 프란치스코가 말하는 육화의 완성입니다. 거울은 얼굴이 되고, 얼굴은 다시 복음이 됩니다. 기도는 침묵 속에서 시작되지만, 사랑의 행동으로 완성됩니다. 바라봄은 닮아감이 되고, 닮아감은 살아감이 되며, 살아감은 다시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얼굴을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
그러므로 참된 기도는 사람을 세상에서 떠나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얼굴을 닮은 사람은 고통받는 이들 앞에서 외면할 수 없고, 상처 입은 이들 앞에서 무관심할 수 없으며, 가난한 이들 앞에서 침묵할 수 없습니다. 그 얼굴은 이미 하느님의 자비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깊어진다는 것은 결국 얼굴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마음이 달라지고, 시선이 달라지고, 관계가 달라지고, 삶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변화는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매일 십자가를 바라보고, 매일 복음을 마음에 새기며, 매일 형제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나려는 작은 충실함이 오랜 세월 쌓일 때, 우리는 어느새 그리스도의 얼굴을 닮아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거울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을 향하여 하느님의 얼굴을 비추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의 말보다 우리의 삶이 복음을 전하고, 우리의 설교보다 우리의 존재가 하느님의 사랑을 증언하며, 우리의 얼굴에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온유함과 평화를 만나게 됩니다.
이것이 프란치스코와 클라라가 평생 걸어간 길이며, 프란치스칸 기도가 우리를 초대하는 마지막 여정입니다. 거울 앞에 머무는 사람에서 그치지 말고,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삶은 하나의 살아 있는 복음이 되고, 우리의 존재는 오늘도 계속되는 육화의 신비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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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들은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마태13,57)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오늘 복음(마태13,54-58)은 '예수님께서 나자렛에서 무시를 당하시는 말씀'입니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나자렛에서 고향 사람들로부터 무시를 당하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마태13,54ㄷ.55ㄱ.56ㄴ)
그러면서 그들은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이르십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태13,57ㄷ)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고향 나자렛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십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무시당함'을 전하고 있고, 오늘 독서(예레26,1-9)는 '예레미야 예언자의 무시당함'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가 타락한 유다 백성들에게 회개하지 않으면 망하게 될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전하자, 유다의 사제들과 예언자들과 온 백성이 예레미야 예언자를 붙잡아 놓고 이렇게 무시합니다.
"너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어찌하여 네가 주님의 이름으로 이 집이 실로처럼 되고, 이 도성이 아무도 살 수 없는 폐허가 되리라고 예언하느냐?"(예레26,8ㄴ-9ㄱㄴ)
오늘은 예수회를 창설하신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예수회는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온 세상에 복음을 널리 전하고 있는 수도회입니다. 오늘 주보축일을 맞이한 예수회 수도회 가족과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한 분들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의 결정적 무시당함인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그리고 그것의 이겨냄인 '부활을 통해서' 드러났습니다.
우리네 삶의 자리는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드러내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는 늘 크고 작은 무시들이 함께 합니다. 그 무시(십자가) 앞에서 쉽게 흥분하거나 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나에게 무시(못마땅해함)가 찾아올 때마다, 나보다 먼저 무시 당하신 예수님을 기억하면서 그 십자가를 이겨냈으면 좋겠습니다.
7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폭염중대경보가 내려질 만큼 폭염이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초강력한 태풍 돌핀이 어디로 향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다가오고 있습니다.
마음을 다잡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복음으로 돌아가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오늘도 '겸손과 온유와 인내의 옷'을 입고 화이팅 합시다!
"좋은 일과 궂은 일, 삶과 죽음, 가난과 부, 이 모두가 주님에게서 온다."(집회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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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언젠가 짧게나마 맛봤던 영신수련의 추억이 아련하게 떠오릅니다.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1491~1556)가 우리 신앙의 후예들을 위해 선물로 남겨주신 소중한 유산입니다.
지도 신부님의 안내에 따른 집중 관상기도를 통해 제 자신의 적나라한 내면 상태를 뚜렷이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제 영혼 안에 웅크리고 있는 짙은 어둠과 무질서를 확인하며 ‘내가 이것밖에 안 되는구나!’하는 실망감도 컸습니다. 그러나 계속된 성찰작업은 저를 한 가지 특별한 깨달음에로 안내했습니다.
‘내안에 약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강점도 있구나. 추함만 있는 것도 아니고 아름다움도 남아있구나. 결핍만 있는 것이 아니고 넘치는 부분도 있구나.’ 하는 깨달음 말입니다.
‘이토록 큰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항상 나를 지속적으로 사랑해주셨구나!’ 하는 깨달음, ‘이토록 부족하고 불충실함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나를 당신 눈동자처럼 소중히 여기시는구나!’ 하는 깨달음 말입니다.
스페인 로욜라에 있는 이냐시오 성인의 생가를 들렀을 때였습니다.
고풍스런 성채 안에는 그분께서 탐독했던 책들부터 시작해서 그의 가족들이 쓰던 식기, 가구, 입던 옷들이 잘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성 이냐시오 대성당 중앙 제대 뒤편에는 그분의 청동상이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인의 손은 어떤 글귀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 글귀는 예수회 회원들의 살아가는 이유이자 모토였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하여!(Ad Majorem Dei Gloriam)’
예수회 회원들은 창립자 이냐시오 성인의 영성과 정신에 따라 오직 하느님에게 영광을 돌릴 뿐 자신을 드러내지 않겠다고 서원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하여!’
창립자나 카리스마는 다르지만 ‘동종 업계 종사자’인 동료 수도자로서 생각할수록 멋진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는 오늘 과연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혹시라도 나는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이 아니라 내 영광을 위해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심각한 성찰을 하게 만듭니다.
이냐시오 성인의 생애는 풍파 많고 우여곡절 투성이인 우리네 삶에 큰 위안과 위로를 건네주고 계십니다.
하느님을 향해 걸어갔던 그의 여정은 참으로 파란만장했습니다.
젊은 시절 그는 기사(騎士)로서의 큰 성공을 꿈꾸었습니다.
투철한 군인정신으로 무장한 그는 왕에 대한 대단한 충성심을 드러내며 목숨까지 걸고 싸웠습니다.
그러나 그를 위한 하느님의 뜻은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1521년 침략해온 프랑스군과 맞서 싸우던 그는 큰 부상을 입게 됩니다.
날아온 포탄에 맞아 한쪽 다리는 부러졌고, 다른 쪽 다리마저 큰 부상을 입었습니다.
얼마나 상황이 심각했던지 의사는 고개를 가로 저었고 병자성사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은혜롭게도 이냐시오는 그 시점에서 자신의 인생 여정 안에 중요한 터닝 포인트 하나를 마련합니다.
주님의 자비에 힘입어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지게 된 그는 회복과정에서 ‘그리스도의 생애’와 ‘성인열전’이란 영성서적을 손에 듭니다.
처음에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읽기 시작했던 그 책들이 그를 천천히 주님께로 안내했습니다.
그는 조금씩 세상의 덧없음과 허무함을 알아갔습니다.
그리고 보다 가치 있는 일, 보다 의미 있는 일, 보다 영양가 있는 인생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세속적인 성공하기 위해 아낌없이 쏟아 부었던 에너지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왕의 충직한 기사를 꿈꾸었던 그는 이제 하느님의 충성스런 군사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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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언제부터 아버지는 자녀에게 망령이 되는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는데, 그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내용입니다. 그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예수님을 여전히 요셉의 아들로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르십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지금 시대에도 나자렛 사람들과 같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이 왜 이런 오류에 빠지는지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의 하나인 ‘햄릿’의 이야기를 통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tvn의 ‘책 읽어드립니다’에서 참조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인물 중 누가 나자렛 사람들과 비슷한지 맞추어보시는 것도 재미있을 것입니다.
12세기 덴마크 왕국 엘시노어 성에 자정이면 나타나는 죽은 왕의 혼령에 대한 소문이 퍼졌습니다. 유령을 본 햄릿의 친구 호레이쇼는 왕자에게 이 사실을 알립니다. 독일 유학중이었던 햄릿은 아버지의 그 소식을 듣고 곧바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자정까지 기다렸다가 아버지를 만납니다.
유령이 된 아버지는 자신이 뱀에 물려 사고사로 죽은 것이 아니라 독살당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죄 중에 죽어서 회개할 기회가 없었기에 천국에 가지 못하고 구천을 떠도는 신세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햄릿이 왕이 되어야 하지만 현재는 아버지의 동생인 삼촌 클로디어스가 자신 어머니와 결혼하여 왕이 되어 있었습니다. 범인은 삼촌일 것임이 틀림없었습니다.
햄릿은 일단 시간을 벌기 위해 미친 척을 하기 시작합니다. 햄릿은 나라의 광대들을 모으고 ‘쥐덫’이라는 연극을 기획합니다. 왕이 어떻게 살해되는가를 현재의 왕 앞에서 보여주며 현 왕의 표정을 살피려 한 것입니다. 왕은 연극을 끝까지 보지 못하고 밖으로 뛰어나갑니다. 그리고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기도를 합니다.
햄릿은 그때 삼촌을 죽이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수 있었으나, 아버지는 지옥에 갔는데 삼촌이 회개하여 천국 가면 안 된다고 여겨 잠시 복수를 미룹니다.
햄릿은 자신도 좋아하고 자신을 좋아하는 오필리아라는 여인에게 “우리는 모두 저주받은 사람들이오. 수녀원으로 들어가시오!”라고 모질게 말합니다. 화가 난 오필리아의 아버지 폴로니어스는 이를 따지기 위해 왔다가 햄릿이 어머니와 하는 이야기를 커튼 속에 숨어 듣게 되었습니다.
햄릿은 어떻게 아버지를 죽인 숙부와 결혼할 수 있느냐고 따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커튼에서 부스럭하는 소리를 듣고는 칼로 찔러버립니다. 오필리아의 아버지는 그렇게 죽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오필리아는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플로니어스의 아들이자 오필리아의 오빠인 레어티스는 왕 클로디어스와 짜고 햄릿을 죽여 복수하려 합니다. 검술 시합에서 칼에 독을 발라 죽이려 한 것입니다. 그러나 검술 시합에서 햄릿이 레어티스를 압도합니다. 이에 불안을 느낀 왕은 포도주에 독을 타서 햄릿에게 마시라고 건넵니다. 그러나 햄릿의 땀을 닦아주는 왕비가 마시고 쓰러집니다.
술에 독을 탄 사실을 안 햄릿은 왕을 찔러 죽입니다.
레어티스도 상처가 심해 죽습니다. 햄릿도 독이 든 칼에 상처를 입은 터라 서서히 죽어갑니다. 처음에 선왕의 유령을 보았다고 알려준 햄릿의 친구 호레이쇼도 자책하며 죽으려 합니다. 햄릿은 죽어가며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죽네, 호레이쇼. 아, 내가 진실을 말해줄 수 있으련만, 그럴 수 없는 상황이오. 이 모진 세상에서 고통의 숨결을 지속하며 내 이야기를 전해주게.”
자, 찾으셨나요? 나자렛 사람들은 이 등장인물 중 누구와 가장 가깝습니까? 바로 햄릿입니다. 햄릿은 성인이 되었음에도 아버지의 망령에 여전히 휘둘리는 인물입니다. 사람은 아버지만큼 자랍니다. 물고기가 어항의 크기에 자기 몸의 크기를 정하는 코이라는 물고기와 같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여기고 계셨습니다. 그렇다고 육신의 아버지를 배척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하셨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여기지 못하는 현시대의 모든 이들을 대변합니다. 여전히 하느님을 아버지라 여겨야 하는 연령대에도 불구하고 육체의 아버지에게 지배당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아버지로 받아들인 그리스도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아버지, 혹은 어머니가 아이가 성인이 되어서도 그의 삶에 간섭하고 영향을 주려고 한다면 자녀를 나자렛 사람들과 같이 만들어버립니다.
유다인들처럼 빨리 하느님을 아버지로 믿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녀들에게 망령으로 남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어쩌면 부모에게 효도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반으로 기분이 나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반 고흐는 엄격한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에 참으로 엄청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나라 속담에서는 자녀에게 아버지가 해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은 사라져 주는 것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아이가 이제 하느님을 아버지로 여겨 그 그릇에서 자신을 성장시켜야 하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의 부모가 되기를 멈추지 않고 강요하게 된다면 그 부모는 자녀들에게 망령이 됩니다. 그리고 결과는 비극으로 끝납니다.
나자렛 사람들처럼 인간적인 아버지라는 틀에 머물며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이끄시려는 하느님 아버지의 길을 막아서서는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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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전주교구 백재욱 스테파노 신부님]
임철규 교수는 『눈의 역사 눈의 미학』에서 눈의 중요성만큼이나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요소로 ‘눈의 위험성’을 지적합니다. 우리가 눈으로 사물을 인식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안다’고 할 때, 그것은 항상 이 ‘안다’는 부분에 속하지 않는 ‘알지 못하는’ 부분에 대한 배제를 수반”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이 보고 알게 된 것을 전부로 여기며 편견과 선입견에 사로잡힐 때가 적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들은 역설적으로 그분을 가장 잘 안다고 자부하던 고향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족 관계나 과거를 속속들이 기억하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 놀라면서도 이내 ‘내가 아는 그 사람이 그럴 리 없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자신들이 눈으로 본 것만을 진실로 받아들일 뿐 도저히 알 수 없는 예수님의 신비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르십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태 13,57). 그 결과 그들은 기적을 누리지 못합니다. ‘앎’이라는 견고한 벽이 마음의 문을 닫아 버려 은총의 통로를 막아 버리고 만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때때로 눈을 감아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눈을 감아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이성적 판단과 경험적 지식이 주님의 은총을 가로막지 않도록 겸손히 눈을 감고 영혼의 눈을 떠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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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3,54-58: 저 사람이 저런 지혜와 능력을 어디서 받았을까?
예수님께서는 고향 나자렛 회당에서 가르치신다. 사람들은 그분의 지혜와 능력에 놀랐지만, 그 놀람은 찬미가 아니라, 시기와 불신으로 변했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55절)라는 말은, 그분의 인성과 집안의 배경에만 매달려 하느님의 현존을 알아보지 못한 불신앙의 상징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는 존경받지 못한다.”(57절)라고 말씀하시며, 당신의 운명이 이미 구약의 예언자들과 같음을 드러내신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장면을 이렇게 해석한다. “예수님이 고향에서 거부당하신 것은 그분의 비천한 출신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이 비천했기 때문이다. 교만한 마음은 진리를 보지 못하고, 익숙함은 경외를 마비시킨다.”(In Matthaeum homilia 47 요약) 성 아우구스티노 역시 익숙함의 위험을 지적한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너무 가까이서 보았기 때문에, 그분 안에서 하느님을 보지 못했다. 익숙함은 때로 신비를 가린다.”(Sermo 69,3) 즉, 문제는 예수님의 출신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이 시기와 편견으로 굳어 있었다는 것이다.
교리서는 예수님의 기적과 가르침이 믿음을 요구한다고 강조한다. “예수님의 기적은 하느님 나라가 이미 당신 안에서 다가왔음을 증언한다. 그러나 그 기적은 또한 믿음을 요구한다. 믿음 없이는 기적이 드러나지 않는다.”(547-548항 참조) 계시 헌장에서, 하느님의 계시는 평범한 인간 언어와 역사적 사건을 통해 드러난다고 가르친다(11항 참조). 나자렛 사람들은 인간의 겉모습 뒤에 숨겨진 하느님의 신비를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성 베르나르도는 이렇게 충고한다. “은총은 종종 작은 그릇에 담겨 우리 곁에 다가온다. 그러나 눈먼 이는 그 그릇을 무시하다가, 그 안의 보물을 잃는다.”(Sermo, Adventus Domini 전체 요약) 오늘날 교회 공동체에서도 우리는 비슷한 유혹을 겪는다. 사제나 수도자가 완벽하지 않다는 이유로, 그를 통해 주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지는 않는지? 가족이나 친구의 권고를 “네가 뭘 아느냐?”라고 무시하며, 그 안에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가능성을 닫아버리지는 않는지? 일상 속 평범한 사건들을 통해 주시는 하느님의 초대에 귀를 막고 있지는 않는지?
예수님께서는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11)라고 요한 복음은 증언한다. 그러나 바로 이 거부를 통해 십자가의 길이 열렸고, 구원이 이루어졌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묻는다. 나는 주님을 내 일상에서 알아보고 있는가? 아니면 익숙함과 편견 속에서 그분을 거부하고 있는가? 우리의 눈을 가린 시기와 편견을 버리고, 가장 가까운 이웃과 평범한 사건 속에서 말씀하시고 일하시는 주님을 알아뵙는 믿음을 청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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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은 신비입니다>
마태오 13,54-58 (나자렛에서 무시를 당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
<당신은 신비입니다>
삶의 길에서 만난
당신에 대해서
알아갈수록
당신이 지닌
헤아릴 수 없는
그 무엇보다도
바로
당신을
알고 싶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무엇을
알아갈 뿐
바로
당신을
오롯이 알 수 없는
까닭은
당신은
늘 그렇게
조금씩 열리는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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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영화 ‘반지의 제왕’은 세 가지 큰 흐름으로 전개됩니다. ‘절대 반지’, ‘두 개의 탑’, ‘왕의 귀환’입니다. 절대 반지는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욕망과 집착을 보여 줍니다. 두 개의 탑은 세상 안에 서로 다른 두 길, 두 깃발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왕의 귀환은 참된 왕이신 분께서 돌아오시고, 무너진 질서가 회복되는 희망을 보여 줍니다. 이 작품을 반드시 이냐시오 성인의 ‘영신수련’ 직접 연결할 수는 없겠지만,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면 놀랍도록 깊은 울림이 있습니다. ‘영신수련’의 중심에는 ‘원리와 기초’, ‘두 개의 깃발’, ‘세 가지 유형의 사람’, ‘겸손의 세 단계’가 있습니다. 오늘 이냐시오 성인의 축일을 지내며, 영화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 마음 안에서 벌어지는 영적 싸움을 묵상하려고 합니다.
먼저 ‘절대 반지’는 ‘영신수련’의 ‘원리와 기초’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은 하느님을 찬미하고 공경하고 섬기며, 그로써 자기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그 목적을 이루도록 도와주는 한에서 사용해야 하고, 방해가 된다면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냐시오 성인은 건강보다 병을, 부유함보다 가난함을, 명예보다 모욕을, 장수보다 단명을 무조건 피하거나 바라지 말라고 합니다. 오직 하느님의 뜻과 영광을 위해 더 도움이 되는 것을 선택하라고 가르칩니다. 절대 반지는 힘과 권력과 성공을 약속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붙잡는 순간 사람은 자유를 잃고, 마음은 어두워집니다. 우리 삶에도 절대 반지가 있습니다. 돈, 명예, 권력, 인정, 자존심, 원망, 분노, 집착이 그것입니다. 그것이 하느님께 나아가게 한다면 도구가 될 수 있지만, 그것이 나를 지배한다면 우상이 됩니다.
둘째, ‘두 개의 탑’은 이냐시오 성인이 말한 ‘두 개의 깃발’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깃발이고, 다른 하나는 악의 깃발입니다. 악의 깃발은 먼저 재물에 대한 욕심으로 사람을 유혹합니다. 그다음에는 헛된 명예로 이끌고, 마침내 교만에 빠지게 합니다. 반대로 그리스도의 깃발은 가난과 모욕과 겸손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이것은 비참하게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세상의 평가에 묶이지 않는 자유, 하느님만으로 충분하다는 믿음, 낮은 자리에서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영화 속 인물들도 이 두 깃발 앞에 섭니다. 어떤 이는 반지를 통해 권력을 얻으려 하고, 어떤 이는 반지를 없애기 위해 자기 길을 걷습니다. 우리도 매일 두 깃발 앞에 섭니다. 편한 길과 옳은 길, 이익의 길과 사랑의 길, 나를 높이는 길과 하느님을 드러내는 길 앞에서 선택합니다.
셋째, ‘영신수련’에는 ‘세 가지 유형의 사람’이 나옵니다. 첫째 사람은 하느님께 가고 싶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내려놓지 않습니다. 둘째 사람은 하느님께 가고 싶어 하면서도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만 가려고 합니다. 셋째 사람은 모든 것을 하느님 손에 맡기고, 하느님께 더 큰 영광이 되는 길을 선택합니다. 영화 속에서도 반지를 버려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망설이는 사람이 있고, 반지를 이용해서 선을 이루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길은 반지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반지를 버리는 것입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때로 하느님을 위해서라고 말하면서도 나의 뜻, 나의 방식, 나의 자존심을 붙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냐시오 성인은 묻습니다. “나는 정말 하느님의 뜻을 원하는가, 아니면 하느님께서 내 뜻을 들어주시기를 원하는가?”
넷째, ‘왕의 귀환’은 겸손의 세 단계를 생각하게 합니다. 첫째 겸손은 큰 죄를 짓지 않기 위해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둘째 겸손은 부유함과 가난함, 건강과 병, 명예와 모욕 사이에서 마음의 자유를 가지는 것입니다. 셋째 겸손은 그리스도를 더 닮기 위해, 그리스도와 함께 가난하고 낮아지고 모욕받는 길까지도 선택하는 것입니다. 왕의 귀환은 힘으로 군림하는 왕의 귀환이 아니라, 고난을 지나 생명을 회복하는 왕의 귀환입니다. 우리 신앙에서 참된 왕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방식으로 왕이 되지 않으셨습니다. 낮아지셨고, 섬기셨고, 당신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분의 왕권은 지배가 아니라 사랑이고, 그분의 승리는 폭력이 아니라 십자가이며, 그분의 영광은 부활입니다.
오늘 이냐시오 성인의 축일을 지내며, 우리 마음 안의 절대 반지를 바라보면 좋겠습니다. 내가 내려놓지 못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하느님보다 더 붙잡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있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세상의 깃발을 따라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이냐시오 성인은 우리에게 거창한 신비를 말하기 전에 아주 분명한 식별을 가르칩니다. 하느님께 더 큰 영광이 되는가? 나를 더 자유롭게 하는가? 나를 더 겸손하게 하는가? 나를 더 사랑하게 하는가? 이 질문 앞에 정직하게 서면, 우리는 우리 안의 절대 반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은총으로 그것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프로도 혼자서는 반지를 없앨 수 없었습니다. 샘이 함께했고, 공동체가 함께했으며, 보이지 않는 섭리의 손길이 함께했습니다. 우리도 혼자서는 욕망과 집착을 이길 수 없습니다. 기도가 필요하고, 말씀의 빛이 필요하고, 공동체의 동행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십자가의 주님께서 함께하셔야 합니다.
오늘 이냐시오 성인의 전구를 청하며, 우리도 이렇게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주님, 제가 붙잡고 있는 절대 반지를 보게 하소서. 주님, 세상의 깃발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서게 하소서. 주님, 모든 선택에서 오직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찾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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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확실히 알아야 힘이 된다>
미움이 가득한 사람에게는 상대방에게서 꼬투리 잡을 허물만이 보이지만, 사랑이 가득한 사람에게는 선한 것이 보이게 마련이다. 사물이 구부러져 있으면 그 그림자도 구부러지게 마련이듯이 마음이 비딱하면 나오는 것도 비딱하다. 그러니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통하여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굽은 마음을 바르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놀라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마태13,54)하고 말하였다. 지혜의 출처를 알고자 하는 질문이었다. 지혜는 하느님에게서 온다. 너무나 풍요롭고 깊어서 사람으로서는 알 수 없다(로마11,3).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그 신비한 비밀을 믿는 이들에게 드러내셨다(1코린1,24.2,7).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나시어 하느님의 은총을 받으며 날로 지혜가 성장하였으며 당신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루카2,40.콜로2,3).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나아가야 한다. 나아간다는 말은 하느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고 실천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혜의 근원은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지혜는 인생의 종합적인 사리 판단력이다. 선한 것과 악한 것, 바른 것과 그른 것, 먼저 해야 할 일과 나중에 해야 할 일을 아는 것, 어떤 상황 안에서 그때그때 무슨 말과 행동을 할지를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능력이다.
지혜는 인생의 올바른 방향감각이다. 인생의 목적지인 하느님 나라에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도록 그 방향을 잃지 않는 것이다.
지혜는 균형감각, 조화 감각이다. 하느님과 세상,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의 조화,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이뤄야 한다. 사실 하느님 말씀 안에서 균형과 조화의 올바르고 절대적인 가르침을 얻을 수 있다. 세상은 지식의 소유자보다는, 지혜로운 사람을 필요로 한다. 지혜로운 삶 안에서 행복하길 바란다.
예수님의 동네 사람들은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잘 난 척하지 마라! 생각했다. 예수님에 관해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그들의 선입견이 예수님의 진면목을 볼 수 없게 만들었고, 믿음이 없는 그들에게 기적을 일으킬 수도 없었다.
섣부른 앎이 병이다. 차라리 모르는 게 약이다. 사실 별것 아닌 것 같아도 부정적인 생각과 판단을 바꾸면 변화가 온다. 문제만 바라보고 부정적인 생각에 골몰하면 모두가 피곤하지만 그 생각을 바꾸면 자신도 바뀌고 세상도 바뀐다. 겉모양만 보고 판단하고 평가하는 어리석음을 내려놓자!
“주님, 저희가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헌신하고 승리의 월계관을 받게 하소서.” 아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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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미국의 조지 W.부시 전 대통령이 이라크를 공격하기 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천만 명의 이라크인과 한 명의 자전거 수리공을 처단할 예정입니다.”
이 말에 기자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앞다투어 손을 들어 질문하려고 했습니다. 어떤 질문이었을까요? 하나같이 자전거 수리공을 왜 처단해야 하는지를 물었습니다. 이런 질문 세례에 부시 대통령은 옆에 있던 콜린 파월 장관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습니다.
“내 말이 맞지 않은가? 이제는 내 말을 믿겠지? 아무도 천만 명의 이라크인에게는 신경 쓰지 않는다고.”
유머러스한 시사 일화입니다. 물론 부시 대통령이 실제로 했던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보다 사람들은 늘 특이한 일에만 관심을 둔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평범한 일상에 대해서는 당연하듯, 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예수님에 대해서도 그러했습니다. 분명히 놀라운 기적이었지만, 마치 서커스나 마술 보듯이 했습니다. 일상 삶에서 이루어지는 기적을 별것 아닌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느님 뜻보다 자기 뜻이 더 앞서 있었고, 마음이 닫혀 있어서 하느님의 일을 알아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마태 13,54)라며 놀랍니다. 긍정적인 경외심이 아니라, 당혹감과 의구심이 섞인 반응입니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마태 13,55)라며 철저히 인간적인 배경으로만 판단합니다. 그들은 진리를 눈앞에 두고도 자신들이 이미 알고 있다는 교만과 익숙함이라는 편견에 갇혀버린 것입니다.
그러면서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이 그리스어 단어는 ‘걸려 넘어지게 한다.’, ‘걸림돌이 되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평범한 출신이 그들에게 구원의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되고 만 것입니다. 실제로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마태 13,58)라고 복음은 전해줍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고향 사람들의 불신 때문에 약해졌다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기적은 단순히 마술쇼가 아니라, 구원을 향한 ‘믿음’에 응답하는 표징입니다. 따라서 믿음의 마음을 닫아버린 사람들에게 억지로 기적을 베푸는 것은 무의미하며, 기적이 일어날 은총의 통로를 고향 사람들이 스스로 차단해 버렸음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과연 열려 있을까요? 자기를 깜짝 놀라게 할 일, 자기가 원하는 대로만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여기에 자기의 얕은 지식과 편견으로 하느님의 활동을 제한하고 있다면, 하느님의 기적을 평범한 일상에서 볼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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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나자렛에서 무시를 당하시다.>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마태 13,54-58)
1) 이 이야기에서 나자렛 사람들이 한 말은, “저 사람은 메시아가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잘 알고 있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자기들 마음대로 판단해서 부정하는 말이고, 그래서 대단히 오만한 말이고,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입니다. 그들이 그런 말을 한 것은, 자기들이 예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 입장에서 생각하면, 평생 목수 일만 하던 사람이 잠깐 고향을 떠나 있다가 돌아와서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을 했기 때문에, 거부감을 느꼈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자렛 사람들의 말은, “목수는 목수 일이나 할 것이지 어찌 감히 예언자 흉내를 내면서 사람들을 가르치려고 하는가?”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맨 처음부터, 또 세례자 요한처럼 예수님을 증언하는 예언자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나자렛에서부터 활동을 시작하셨다면, 나자렛 사람들을 비판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 상황이라면 나자렛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생각도 일방적인 편견과 고정관념이 될 수 있습니다. 본 것이 없어서, 또 보이지 않아서 못 보는 것은 잘못이 아니고, 들은 것이 없거나 들리지 않아서 못 듣는 것은 잘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여 주어도 안 보려고 하고, 말씀을 전해 주어도 안 들으려고 하는 것은 잘못이고, 죄입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너희는 틀림없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 하는 속담을 들며, ‘네가 카파르나움에서 하였다고 우리가 들은 그 일들을 여기 네 고향에서도 해 보아라.’ 할 것이다."(루카 4,23)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에서 일으키신 기적들을 이미 잘 알고 있었습니다. 58절,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라는 말도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 말을 반대로 생각하면, 이 말은 나자렛 사람들 가운데에도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치유의 은총을 받았음을 나타냅니다.
하느님의 기적이 눈앞에서 일어나도, 안 믿으려고 ‘작정한’ 사람들은 자기들이 직접 본 일까지 부정하면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기를 거부합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라는 말씀은, “하느님을 모르고 살던 이방인들은 나의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데, 하느님을 믿고 있고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너희는 왜 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느냐?”라고 꾸짖으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사실상 유대인들 전체를 꾸짖으신 말씀입니다.>
2) 그러나 유대인이라고 해서 다 같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성모님도, 사도들도, 초대교회 신자들도 모두 유대인이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도행전에 있는 다음 이야기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형제들은 바로 그 밤에 바오로와 실라스를 베로이아로 떠나보냈다. 그들은 그곳에 이르러 유다인들의 회당으로 갔다. 그곳 유다인들은 테살로니카의 유다인들보다 점잖아서 말씀을 아주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것이 사실인지 알아보려고 날마다 성경을 연구하였다. 그리하여 그들 가운데에서 많은 이가 믿게 되었다."(사도 17,10-12ㄱ)
똑같은 상황에서 누구는 믿고, 누구는 안 믿고......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실 때 하신 말씀에 있는,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마태 10,13)라는 말씀이 연상됩니다. 마땅한 사람과 마땅하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런 상황에서 흔히 “믿음도 은총이다.”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똑같은 은총이 내려도 받아들이는 사람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동시에 존재합니다. 그것은 “구원에 대한 갈망이 있는가, 없는가?”의 차이입니다.
현세적인 복이나 바라면서, 하느님 나라와 구원에 대해서는 관심 갖지 않고 사는 사람들은, ‘복음’을 ‘기쁜 소식’이 아니라 ‘귀찮은 소음’으로 대합니다. ‘복음’은 하느님 나라, 구원,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게만 ‘기쁜 소식’이 됩니다.
3) 나자렛 사람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예수는 메시아가 아니다.”라고 판단했던 것처럼, 신앙인들도 하느님의 뜻과 계획을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어떤 소원을 비는 경우에, 간절하게 기도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일의 결과가 원하는 것과 정반대가 되면 “이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다.” 라고 부정하고, 자신의 뜻대로 되어야만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졌다고 믿고 좋아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과연 올바른 신앙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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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오로회 故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놀래면서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이 모든 것을 얻었지?"라고 감탄하며 말하였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나의 말과 행동을 보고 일반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나타내고 있는가? 사람들이 나를 보고 "저 사람은 어디서 저런 지혜를 얻었지?" "저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도 온화할까?" "저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 지혜로울까?" "저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 묵상을 잘 할까?" "저 신부님은, 저 수녀님은, 저 형제는, 저 자매는 어떻게 저렇게도 덕스러울까?"라는 소리를 들어 본적이 있는가? 또 그런 것에 관심을 가져 본적이라도 있는가?
아니면 "저 사람은 어떻게 해서 저렇게 돈을 많이 벌었지?" "저 자매는 어떻게 다이어트를 해서 저렇게 살을 뺐지?" "저 자매는 어떻게 해서 저렇게 예뻐졌지?" "
저 사람이 입은 옷이 참 멋있다. 어디에서 샀지?" 아니면 "저 사람은 성질이 대개 나쁘군. 아니 저런 나쁜 사람이 있나?" "저 사람 형편없는 사람이군. 신부가, 수녀가, 신자가 뭐 저래?" "저 사람은 부정축재 자야, 저 사람은 강도야, 저 사람은 자기만 아는 사람이야, 저 사람은 정말 무식한 사람이야. 아니,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어." 등 등.
우리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고 또 우리도 다른 사람에 대해 말한다. 과연 나는 어떤 소리를 주로 많이 듣고 또 어떤 소리를 듣기를 바라는가?
오늘날 우리 교회의 취약점은 신자생활을 하는 사람이나 신자가 아닌 사람이나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한 사람이나 이제 갓 영세 받은 사람이나, 성직자나 수도자나 평신도나, 사목 회장이나 구역반장, 단장이나 모두가 대개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것이 아닐까? 그 사람이 그 사람이요, 그 생각이 그 생각이지 상대방을 크게 놀래킬만한 사람이 별로 없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했다. 빛이라면 어둠을 밝혀주는 지혜로운 말을 들려 주고 그런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일반 사람들이 우리 신자들의 말과 행동을 듣고, 보고도 아무런 차이점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그것은 성직자나 수도자나 평신도나 말할 것 없이 우리 모두 그들과 별 다른 차이가 없이 그냥 그냥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주위의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지?"라는 놀라운 눈으로 우리를 바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느낌을 전해 줄 수 있어야 정말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혜란 무엇인가? 지혜를 희랍어로 Sofia(소피아)라고 하며, 그 뜻은 "인생의 종합적인 사리판단력"이다. 즉 세상의 모든 일에는 크고 작은 것, 가볍고 무거운 것이 있고, 선한 것과 악한 것, 바르고 그른 것이 있다. 그리고 먼저 해야 할 일이 있고, 나중에 해야 할 일이 있는 법이다. 지혜로운 사람이란 바로 인생을 살아가면서 만나는 모든 상황을 잘 판단하여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을 먼저하고 나중에 해야 하는지, 등을 올바르게 판단하는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어리석은 사람이란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지를 판단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중요하지 않은 것을 중요하다고 하고, 나중에 해야할 일을 먼저하고 지금 해야 할 일을 나중에 하는 愚를 범하고 있다. 무엇이 우선 순위인지,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지혜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 이 지혜는 어디에서 얻는가? 집회서에 보면 지혜에 대한 말씀이 있다. " 모든 지혜는 주님께로부터 오며 언제나 주님과 함께 있다. 지혜의 근원은 하늘에 계신 하느님의 말씀이며 지혜의 길은 영원한 법칙이다. 지혜로우신 분은 오직 한 분, 두려우신 분이시며, 당신의 옥좌에 앉아 계신 분이시다. 그분은 지혜를 만드시고 지켜보시고 헤아리시는 주님으로서 당신이 만드신 모든 것과 모든 인간에게 지혜를 너그러이 내리시고 특히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지혜를 풍부히 나누어 주신다."(집회 1, 1- 10 참조)
우리가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하느님께 나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지혜의 근원은 하늘에 계신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싶은가? 그러면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야 한다. 하느님을 믿지 않으면 또 설상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더라도 하느님의 말씀을 모르면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없다.
지혜는 우리가 하는 직업에서, 사도직에서, 학교 공부에서, 활동에서, 자기가 앉아 있는 자리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지혜를 얻고 싶으면 매일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깊이 깊이 묵상해야 한다. 얼마나 말씀을 깊이 묵상하느냐에 따라서 지혜의 폭은 달라질 수 있다. 말씀을 읽기는 읽되 그냥 읽는 것으로 그치면 지혜를 얻을 수 없다. 지혜는 깊은 샘물을 파듯이 깊이 깊이 말씀을 묵상할 때 얻을 수 있다. 인간의 세계와 사고의 범위를 넘어 하느님의 세계, 신비의 세계에로 깊이 내려갈수록 더 깊고 맑은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이 나를 보고 "참 예뻐졌다. 건강해졌네."라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런데 그런 말보다도 "참 성숙해졌네, 굉장히 지혜로워졌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지?"라는 말을 듣는다면 더욱 기분이 좋을 것이다. 사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더욱 지혜로워져야 한다.
그런데 몇 년동안 신앙생활을 했으면서도 더군다나 성직자의 삶, 수도자의 삶을 살았는데도 옛날이나 지금이나 별다른 진보가 없다면 그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일반사람들이나 커다란 차이가 없다면 그거야말로 불행한 삶이요 크게 잘못된 삶이다.
묵상을 많이 하는 사람일수록 자기 안에서 샘물이 솟아나오듯이 맑은 지혜가 나오는 것이다.
저 사람의 저런 용기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어떻게 해서 저 가정은 늘 화목하게 지낼까? 저 사람의 평화스런 모습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저 사람의 기쁨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우리들에게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이런 삶은 신앙인들 특히 복음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사람들에게서만이 가능하다.
신앙은 지식을 뛰어넘는 것이다. 신앙은 자기가 갖고 있는 한계를 넘어가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가난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면서 점차적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길들여 질 때 비로서 가능하게 된다. 신앙은 자기에게서 나와 하느님께로 가는 것이다. 신앙은 자기의 좁은 세계에서 나와 넓고 깊은 하느님의 세계에로 들어가는 것이다. 신앙은 인간적인 생각과 능력에 머물지 않고 그 이상의 세계 즉 하느님의 세계, 하느님의 능력을 끌어 오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보다 휠씬 지혜롭고, 능력이 있고, 그리고 멀리 내다본다.
예수님은 "그들이 믿지 않았으므로 그 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고 오늘 복음은 끝을 맺는다. 지혜는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며 지혜인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깊이 묵상하는 사람만이 지혜로워질 수 있다는 말을 믿지 않으면 우리에게서 아무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을 믿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30, 60, 100배의 결실을 맺을 것이다.
믿음을 갖고 하느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생활에 충실한다면 분명히 몇 년 후에 사람들은 나를 보고 놀랠 것이다. "아니, 저 사람이 어디에서 저런 지혜를 얻었을까? 저 사람이 옛날의 그가 아니네! 저런 여유가, 저런 평화가, 저런 희생이, 저런 온유함이, 저런 사랑이, 저런 기쁨이, 저런 용기가 어디서 왔을까? 참으로 신기하기도 하네."하고 감탄하게 될 것이다. 이런 소리를 듣고 싶은가?
아니면 "저 사람은 저 형편없이 되어버렸네, 저 사람은 옛날 그대로잖아, 아니 저 사람은 더 못되었네, 성질은 더 나빠졌고, 자기 욕심만 차리고, 무척 추해졌구만. 불쌍도 하지!!!"라는 말을 들을 것인가?
인생은 빠스카이다. 시간이 흐른 만큼 나는 변해간다는 말이다. 어느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는가? 자문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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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이정석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의 사람과 판단>
한국 사회의 특징 중 하나는 연고와 서열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지역, 어느 집안, 어느 학교, 그리고 요즘엔 어느 교회에 다니고 있는지에 따라서 잘나가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구분합니다. 그렇게 공공연히 인정되는 줄을 잡는 것이 출세의 비결이라는 확신을 갖고 지금도 열심히 그런 사돈에 팔촌, 아니면 이웃사촌이라도 없는지 찾아보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좋은 학교의 기준은 어떤 교육을 시키느냐가 아니라 상급학교의 진학률과 취직이 전부인 사회. 그래서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며’ 탄탄한 출세 가도를 만드는 것이 모든 학교의 졸업생들에게 주어지는 지상 과업이 된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습니다.
공관복음은 예수님께서 공생활 초기에 고향 마을인 나자렛에 가셨다가 고향 사람들에게 배척당한 사건을 보고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지혜와 기적의 원천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그러면서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은가?”(마태 13,56)라고 물으면서 예수님의 정체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비유 말씀과 그분께서 일으키는 놀라운 기적이 자기들이 알고 있던 ‘그 청년’의 배경으로 볼 때 납득이 되지 않기 때문에 어리둥절한 것입니다.
성경은 예언자를 가리켜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 예언자들 스스로도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라는 상투적인 표현으로 신탁을 전합니다. 예수님께서 “예언자는 고향에서 존경받지 못한다.” 하신 말씀의 이유입니다.
비록 예언자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단순히 자기들이 알고 있는 사람의 말로 알아들을 때 예언자는 배척을 받게 됩니다. 오히려 자기의 말을 하느님의 말씀인 양 겉꾸민 거짓 예언자들의 말에 사람들은 더욱 열광합니다.
예언자는 자기의 말을 하는 사람도, 청중의 호응을 받으려고 진실을 외면하고 야합하는 사람도 아닌 하느님의 말만을 전하는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어느 예언자가 옳고 그르냐는 청중의 마음에 흡족한가, 그렇지 않은가가 아니라 그 말씀이 제대로 효력을 발생하느냐에 따라서 판단됩니다.(신명 18,22; 이사 55,8 이하 참조)
현대사회의 보이지 않는 정보의 바다에는 수많은 말이 떠다닙니다. 국민들은 더 이상 단순한 정보의 소비자가 아니라 주체적인 생산자로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말 가운데 어느 것이 하느님의 뜻을 담고 있는 예언인지는 그가 누구인가가 아니라 어떤 ‘진리’를 담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특히 위정자들과 ‘잘나가는 사람들’은 맑은 눈으로 세상을 보고, 하늘의 마음이라는 민심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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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자신들의 앎’에 대한 확고부동>
오늘 독서에서 예언자 예레미야는 주님의 말씀을 전하지만, 사제들과 예언자들과 온 백성이 그와 그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거부하고 배척하였음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받게 될 배척과 수난을 예고해줍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의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태 13,57)는 말은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배척받아 죽게 될 것을 예고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하늘 나라의 비유를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고향으로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놀라워했습니다..’(마태 13,54 참조) 왜냐하면 그분의 가르침이 다른 율법학자들의 가르침과 다르고 새로웠기 때문입니다.(루카 4,16-30 참조)
그들은 '그분의 지혜와 기적의 힘'에는 놀라워했지만, 그 지혜와 힘이 어디에서 온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완고하여 그분의 신적 신원과 권위는 인정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저 모든 것을 얻었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마태 13,56-57)
여기서 우리는 그들의 ‘완고함의 뿌리’와 무엇인지를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앎’에 대한 확고부동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이 ‘아는 것(선입관, 편견)’을 믿고 섬기고 따른 ‘우상숭배’에 빠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고집부리는 사울을 꾸짖을 때, 사무엘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1사무 15,23)
사실 우리는 이 ‘우상’을 벗어나야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게 됩니다. 그것은 자신이 알고 있는 그러한 예수님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분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믿음’은 자기에게서 빠져나와 하느님께로 가는 것이지, 하느님을 자기의 좁은 지식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곧 ‘믿음’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뛰어넘어 ‘있는 그대로의 그분’을 받아들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엑카르트) 그래서 리지외의 데레사는 말합니다. “하느님 사랑을 위하여 저는 가장 낯선 생각들도 받아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앎에 대한 완고함’ 뒤에는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자신의 무지에 대한 어리석음’이 있습니다. 그러니 겸손으로 타인에게 ‘자신을 개방’하는 일, 개방을 넘어서 ‘타인을 수용’하는 일, 수용을 넘어서 타인으로 하여 ‘자신의 변형’을 이루는 일, 그것이 ‘믿는 이의 모습’일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무지를 깨우쳐 주소서.
모르기에 의탁하게 하소서.
믿고 사랑하기를 가르쳐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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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태 13,57)
주님!
스승을 곁에 두고도 존경하지 않은 저는, 수술을 받아야 살 수 있는 데도 의사를 믿지 않아 수술을 받지 않는 어리석은 환자입니다.
제 앎을 뛰어넘는 당신을 믿지 못하는 저는, 안다는 제 생각을 섬기고 따르는 우상숭배자입니다.
주님,
겸손으로 존경하고, 응답으로 믿음을 드러내며, 따름으로 믿음을 실현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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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마태 13,56)
무더운 날씨 속에서도
하늘은 한없이 아름답습니다.
명예를 꿈꾸던 기사가
세상의 명예를 쫓다가
모든 것을 잃은 후에야
비로소 하느님 안에 머무는
침묵에서 참된 식별을 배웠던
사람이 있습니다.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의
삶을 이끄는 중심은
모든 것을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였습니다.
일상의 모든 순간과
모든 사건 안에서
가장 좋으신 하느님의 현존을
발견하도록 가르쳤습니다.
복잡한 세상일수록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정보가 아니라 더 깊은 분별,
더 큰 성공이 아니라 더 큰 사랑,
더 높은 자리가 아니라
더 깊은 섬김입니다.
인생의 모든 순간을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길을
보여 준 영적 스승입니다.
그는 영신수련을 통해
신앙인의 가장 중요한
질문을 제시합니다.
"무엇이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한 선택인가?"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은
세상에서 얻은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머무는
삶에서 나옵니다.
이냐시오 성인도
세상의 화려함을 떠나,
하느님과의 깊은 만남 안에서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믿음은 눈에 보이는 배경을 넘어,
평범한 인간성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알아보는 은총입니다.
세상은 "무엇을 이루었는가?"를 묻지만
복음은 "어디에서 그 삶의 힘을 얻는가?"를
묻습니다.
매일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성찰하고
하느님 안에 머무름을 선택하는 삶이
바로 참된 힘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먼저 식별하고
세상의 성공보다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선택하며
살아가는 은총의 날 되십시오.
하느님 안에 머무는 충실함이
살아갈 용기가 되고
세상을 밝히는 한 줄기
맑은 빛임을 믿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