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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켈러 히브리서 1장1~4, 2장1~4 2005년 - 팀 켈러 히브리서 1장1~4, 2장1~4 2005년
우리는 앞으로 몇 주에 걸쳐서 교회들이 지난 수 세기에 걸쳐 해왔던 예수님은 누구신가? 그가 한일은 무엇인가? 에 대해서 살펴볼 것입니다. 우리는 신약성서 중 매우 흥미로운 서신서인 히브리서를 통해서 이를 살펴보겠습니다.
구약에는 우리가 저자를 알 수 없는 책들이 몇 개 있습니다만, 신약에서는 특이한 경우로 히브리서의 저자를 우리는 모릅니다. 다만, 우리가 아는 것은 누구에게 쓰여진 것이냐는 겁니다.
우선 히브리서는 도회지의 크리스챤들에게 쓰여졌습니다. 대다수 성경주석가들은 다른 신약서들에 비해서 도시가 자주 언급되고 있는 사실을 들어 이 점에 동의합니다.
그들은 우리와 같이 다원주의 사회에 살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수 많은 믿음과 종교와 철학 등이 있는 사회이다보니 크리스챤들의 헌신은 적대감을 불러왔고 이 서신의 수신자들은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가지 질문이 생겨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즐거움과 영광에 집중하시고 우리를 그리 사랑하신다면 왜 우리 삶은 이토록 힘든가?'.
이 서신은 위의 질문에 관한 것입니다.
(** 참고: 더 바이블 미니스트리 이지웅목사는 히브리서가 쓰여진 시기 등을 볼 때 네로박해 당시 로마의 크리스찬들에게 쓰여졌다는 의견.)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이 서신서의 내용을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즉 위 질문에 대한 답은 '인생은 피로로부터 안식으로의 여행이며, 소외로부터 하나님의 임재로의 여행이며, 단절로부터 하나님 나라로의 여행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유일한 길은 당신의 시선을 예수님께 고정하는 방법 뿐이다.'입니다.
고정! 이 서신서의 전체적인 주제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급작스럽게도 아니고 전력질주 하듯이도 아니고 장기적으로 지속적으로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해야하며 이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선을 예수님께 고정해 보겠습니다.
도입부에서 예수님께서는 무언가를 우리에게 가져오십니다. 그 무언가는 '마지막 말씀 the final word'입니다. 우리는 마지막 말씀과, 예수님이 어떻게 가져오실 수 있는지와. 이것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바꾸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무엇을 가져오시는가?
이 구절들의 시작 부분을 보시면,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우선 아들을 통하여, 즉 예수님을 통해서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주목해서 그 아래 구절들을 보십시오. 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나요?
"아들은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exact representation of his being" 이라고 합니다. 여기 형상representation에 쓰인 헬라어는 말 그대로 '어떠함 character'를 뜻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일반적인 정보전달을 위해서가 아니고 우리에게 그가 누군지를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직접 소통하고 계시고, 우리와의 관계를 원하십니다. 단지 우리에게 뭔가를 알려주시려는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자신을 갖도록 원하시는 겁니다. 직접 소통하고 계십니다.
경이롭지 않습니까?!
움직임 등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수 있는 구름기둥,불기둥이 아니라 개인적이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여기 계신겁니다. 말씀은 생각과 마음 그리고 당신의 모든 부분과 연결됩니다.
자, 우리는 관계를 원하는 하나님이 계심을 알았고 그 하나님께서 아들이자 본체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직접 말씀하시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그냥 말씀이 아니라 마지막 말씀을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대조(contrast)가 보시시나요?
"옛적에는 선지자들을 통해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at many times in various ways"에서 여러 부분은 조각적인걸 의미합니다.
전에는 조각적으로 말씀하셨으나, 이제는 예수님 한분을 통해서 전체를 말씀하신다는 겁입니다. 또한, 전에는 여러 방식으로 말씀하셨으나 이제는 한가지 방식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말씀하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저자는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라고 했는데, 여기서 마지막은 저자가 글 쓴 시점부터 마지막 때(end of time)까지를 의미합니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지금부터 마지막 때까지 오직 예수님 외에는 하나님의 의사전달은 없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러나, 만일, 등도 없고 완전히 절대적으로 더 이상 없다는 뜻입니다
잠깐, 여기서 선포되는 내용을 정리해보죠.
우선 굉장히 경이롭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소통을 원하십니다. 근데 한편으로는 불편한 부분이 있는데, 이것이 유일한 방법이고 다른 방법도 변화도 없을거라는 겁니다.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비록 이게 모순적으로 보일지라도 모든 인간 관계도 이렇다는겁니다. 알고 계십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든 친밀함에는 변경불가함(finality)이 있습니다. 상대방의 변경불가한 점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친밀한 관계는 형성되지 못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음, 우리는 모두 결혼을 원합니다. 맞죠? 친밀하고 사랑하고 로맨틱한 관계를 원합니다. 그러나 결혼 후에 우리는 상대방이 우리와 상반되다는걸 깨닫습니다. 우리의 뜻을 거스르고, 우리가 듣기 싫은 소리를 합니다. 그리고 이건 원래 이런거야 딴건 없어(this is the way it is) 라고 합니다.
그래서 당신은 맘에 들지 않으므로 어떻게 하나요? 모든건 협의 가능해 라고 생각합니다만, 곧 당신이 진짜 누구와 결혼했는지 깨닫게 됩니다. 사실 많은 문제들은 협의가 가능합니다. 특히 결혼 초에는 서로 원하는거나 싫어하는걸 나열해놓고 서로 양보하면서 지워나가고 그러기도 하죠. 그러나, 어느 부분에 이르면 변경불가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변할 수 없는게 있습니다. 상대방은 원래 그런거고 그건 바뀌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느 부분에 이르면 당신은 당신이 상대방의 변경불가한 점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친밀한 관계는 없다는걸 알게됩니다. 당신은 타인과 친밀한 관계를 원하는 것이고 모든 타인은 각자 의지가 있고 변경불가함을 갖고 있으니까요. 어느 순간, 당신이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그 관계는 끊어지게 됩니다.
부인들의 변경불가한 점들을 받아 들이지 못하는 남편들이 부인들의 뇌에 마이크로칩을 이식하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이식 후에는 마치 로봇같이 되어 더 이상 변경불가함도 없고 협상불가함도 없고 늘 부엌에서 일하고 행복하게 남편이 원하는 걸 다 합니다. 근데, 뭔가가 부족합니다. 인간관계가 사라진겁니다. 가구와 인간관계를 맺을 수는 없으니까요. 부인들은 가구가 되어 버린겁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당신이 무슨말을 하든 매번 "네, 여보." 라고 답하는건 사람이 아닙니다.
상대방의 변경불가한 부분을 맞춰주지 않는다면 친밀한 관계는 없습니다.
뉴욕에서 많은 사람들이 저한테 하는 말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근데 나는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심판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아이디어를 받아들이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다보니 성경에 좋은 부분들도 있지만 많은 부분들을 더이상 받아 들이기 힘듭니다. 이러저러한건 받아들이지 못하겠고, 이러저러한건 싫습니다.'
그럼 저는 언제나 이렇게 답합니다.
'잠깐만요. 당신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성경 전체가 모두 하나님이 당신께 말씀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못한다면 당신에게 질문이 하나 있는데요. 어떻게 당신의 하나님은 당신 뜻을 한번이라도 거스르고, 어떻게 당신이 듣기싫은 소리를 한번이라도 하나요?'
'이러저런건 받아들이기 힘들고, 어쩌구 저쩌구~'
'좋습니다. 근데 제 질문은 이겁니다. 당신은 하나님께 마이크로칩을 이식했나요? 아니면 당신은 당신 뜻도 거스를 수 있는 진짜 하나님을 갖고 계신가요? 그냥 부엌에서 행복한 가구같은 하나님을 갖고 계시다면 당신의 그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어떻게 한번이라도 거스르나요?'
'현대인인 우리들이 받아들이기 힘들고 불쾌한 이러하고 저러한~'
'알겠습니다. 그럼 당신의 하나님은 어떻게 한번이라도 당신을 불쾌하게 하나요? 어떻게 한번이라도 그럴 수 있나요? 그럴 수 없습니다.
당신이 하나님 말씀인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한은요.'
즉, 위의 현대인 뉴요커 분은 가구를 가진겁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변경불가한 부분을 인정하고, 성경에 당신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에도 맞춰갈 수 있어야 하나님과의 개인적이고 친밀한 관계가 가능한겁니다. 묘하지 않나요?
첫번째로 예수님께서 가져오신 마지막 말씀 부분을 살펴봤습니다.
두번째로 예수님께서 마지막 말씀을 어떻게 가져오실 수 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3절부터의 내용에서 우리가 알수있는 것은 코피나는 현신이라고 제가 부르는 것입니다.
코피난다고 표현한 이유는 여기서 예수님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이 너무나도 높고 너무나도 놀라워서 성경의 다른 부분 어디에서도 여기보다 강하게 얘기하는 부분을 찾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몇 년 전에 이 말씀이 제 인생을 바꿨습니다. 설명드리겠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구약에서 모세가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데리고 나올 때, 무언가가 나타납니다. 그 무언가는 불타는 구름으로 기둥 형상이었습니다. 밤에는 확연한 불이었으며, 낮에는 불타는 듯한 구름으로 보였습니다. 이건 너무도 멋지고 파워풀했습니다. 애굽 군사들이 이스라엘인들을 쫒아오는 순간에 나타났을 때는 군사들을 멈추게 했습니다. 군사들이 이것을 지나쳐가지를 못했습니다. 또. 광야로 이스라엘인들을 이끈 후 시내산에 내려왔을 때는 천둥과 번개가 엄청나서 사람들이 죽을까봐 두려워서 산을 만지지도 못했습니다. 나중에 솔로몬이 성전을 완성했을 때는 영광의 구름, 불구름이 기둥 모양으로 성전에 내려오는데 가까이 있던 사람들은 서있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이 불구름이 뭘까요? 이건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이건 하나님께서 우리가 볼 수 있는 형상으로 나타나신 겁니다. 이 형상으로 하나님의 광명, 아름다움, 절대적이고 압도적인 엄청난 탁월함과 중요성을 보이신 겁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나타나심이라고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형상으로 오신 것이며 여전히 하나님이십니다.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the exact representation of his being"에서 exact라는 단어가 보이시죠. 이건 궁극적이고 더 이상이 없는 하나님께서 나타나시는 형상인겁니다. 더 대단한건 없는겁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고린도후서 3장에서 보시면 15절"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16절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17절"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18절"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라". 참으로 놀라운 구절입니다. 이 구절들이 의미하는것은 이렇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여러분보다 훨씬 뛰어난 누군가, 즉 훨씬 더 자상하고 귀하고 현명한 누군가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다면 쳐다보는 것 만으로도 당신은 변화한다는 겁니다. 그가 자신과 대립하는 사람을 대하는걸 보면서 당신은 부끄러움을 느끼고 변화하게 되는겁니다. 그가 자신을 표현하고 행동하는 것을 보면서 당신은 변하고 그의 그러한 것들이 당신에게 전달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은 쳐다볼 수 조차 없습니다.
해 조차도 쳐다보면 눈을 다칩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영광을 쳐다보면 그야말로 눈은 타버리고 망가져버릴겁니다. 불구름 기둥에 사람들이 바닥에 쓰러지고 죽기도 합니다. 불타는 떨기나무도 기억하시죠?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관계 맺을 수 있는 형상의 하나님의 영광이십니다. 그 분은 우리가 개인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고 우리에게 들어와 우리를 자신과 같이 변화시킬 수 있는 하나님의 영광이신 겁니다. 궁극적이고 더 이상이 없는 하나님께서 나타나시는 인간의 형상인겁니다. 이게 바로 예수님이 마지막 말씀을 가져오실 수 있는 이유입니다. 그 자신이 마지막 말씀이신 겁니다.
다른 말로하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궁극적인 진리를 가져오실 수 있는 이유는 그 자신이 진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마지막 이슈로 넘어가기 전에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 있는데요. 놀라운 1장3절의 내용에는 개인적인 적용과 전체적인 적용이 있습니다.
우선 개인적인 적용을 보겠습니다. 맥락이 중요한데요, 초반에 제가 이 편지는 정확하게 뉴욕에 있는 우리같은 사람들에게 쓰여졌다고 언급했습니다. 그들은 다원주의적인 도회지에 살았습니다. 각기 다른 종교, 신, 철학들이 있어서 문화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단일화 된 사회하고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시대에 그 곳에서 예수님의 독특함, 궁극적인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점 등에 대해 말하는 것은 매우 배타적으로 들리고 듣는 이들이 받아들이기가 매우매우 힘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브리서의 저자는 수신자들에게 '절대 물러서지 마라!'라고 하고있는 겁니다.
히브리서 첫번째 문장을 보십시오. 어떻게 이보다 더 분명하게 말하겠습니까. 저자는 예수님을 다른 여타 선지자들이나 종교지도자들과 같은 칸에 둘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칸에 머물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 분이 선포하는 내용 때문에 훨씬 높거나 훨씬 낮은 칸으로 옮기실 겁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님에 대한 복음서를 읽다보면 직접적인 선포 뿐아니라 간접적인 선포가 저를 놀라게 할 때가 많습니다. 누가복음10장에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과 귀신들림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갑자기 이렇게 말하십니다.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뭐라구요what?
제자들과 얘기하시다가 무덤덤하게 "그래, 나는 물질과 세계의 창조 전부터 존재했고, 루시퍼가 타락하는걸 봤지. 대단한 광경이었어." 라고 하신겁니다.
계속되는데요, 마태복음 23장34절에서는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위대한 선지자고 지혜자고 서기관이다 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내가 그들을 보낸 주체다 라고 하십니다. 뭐라구요what?
이사야나 예레미야나 어떤 선지서든 잃어보시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표현이 계속 반복해서 나옵니다. 자신들의 생각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임을 언제나 강조합니다. 근데 예수님은 단 한번도 그리 말하지 않으셨다는걸 아시나요? 예수님은 언제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very truly I tell you"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자신이 창조되지 않은 탄생을 초월한 세상의 하나님이라는 자각은 그분의 모든 말씀과 행동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사랑, 도덕 등에 대한 그분의 모든 가르침을 조금도 감할 수 없는 이유는 그 모든 것은 그분의 위와 같은 자각에 근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 칸에 머무실 수 없는겁니다.
그분은 훨씬 위거나 훨씬 아래에 위치하십니다.
그 의미를 앤티 라이트는 이렇게 훌륭하게 표현했습니다. '폭풍이 인간이 됐으며, 불꽃이 살이 되고, 살아계신 하나님 본인께서 우리 속으로 오셨다는 두려운 생각을 품고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기독교(christianity)는 이것이거나,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겁니다. 기독교는 세상의 깊은 현실에 대한 가장 충격적인 공개이거나, 아니면 완전한 거짓이고 넌센스인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둘 다 받아들이지 못하고 얄팍한 중간 세상에 살게됩니다.'
이는 아주 정확한 표현입니다.
만일 당신이 아주 조금이라도 지능적이거나, 영적이거나, 도덕적이거나, 감정적이거나, 진실하다면 위에 둘 중 하나라는 것을 알게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그분의 말씀, 그분의 행동을 보게 되면 그것들을 결코 가짜라거나 악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게 진실이라면 여러분은 자신 인생의 모든 것을 예수님 발 앞에 내려놓고 '주여, 내게 명하소서'라고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짜거나, 악하거나, 미친게 아니라면 여러분 인생의 모든 부분들을 예수님을 중심으로 둬야합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그분이 진실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그럼에도 대부분 사람들은 앤티 라이트가 말한 얄팍한 중간세상에 살고있습니다.
여러분 중 일부는 아시고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래 전에, 25년 전이네요, 성경을 가르치는 한 여자가 여기 히브리서 1장3절에 대해서 설명한 내용이 제 뇌리에 깊이박혀서, 지금까지도 제 스스로에게 자주 되뇌이고 있습니다. 저를 영원히 바꾼 내용이죠.
'생각해보세요. 지구에서 태양까지의 거리가 1억5천만km입니다. 현재까지 알려진 지구가 속한 은하계의 크기를 지구만하다고 가정하면, 이에 비해서 지구의 크기는 먼지만 합니다. 그리고 전체 우주에 비하면 그 은하계는 먼지보다 작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 모든걸 자신의 말의 능력으로 붙잡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새끼손가락으로 붙잡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당신은 그사람을 당신의 개인비서로 쓰시겠습니까?'
이 구절은 다른 여러가지로 표현될 수도 있을 겁니다. 근데 저는 이 구절이 저한테 미친 영향이 여러분에게도 미쳤으면 좋겠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중간은 없다. 당신은 극단적일 필요가 있다. 예수님은 당신을 극단적이 되도록 강요하신다. 그분이 그랬으므로 극단적으로 사랑하고 극단적으로 겸손하며, 그분에게 극단적으로 헌신하고 헌신하라.
그리고 이 구절에는 전체적인 적용도 있습니다. 평균적인 사람이 보면 이 서신서는 우리와 같은 상황에 있는 수신자들에게 쓰여졌으며 절대 절충하지 않겠다고 하며 시작하면서 바로 요점을 말합니다. 현대의 사람들은 당연히 이런식으로는 절대 전체적인(세계적인global) 평화는 없다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신앙 안에서 모든 종교는 동일하다고 인정하지 않고, 내 종교가 최고이고 내 종교가 우월하다는 식으로 말하는 한 전체적인 평화는 없단겁니다.
모든 사람들이 모든 종교가 동일 가치를 가진다고 인정해야만 전체적인 평화가 온다는 사람들에게 저는 이렇게 답하고 싶습니다.
'그리 말한다면 그런 방법은 어떤식으로든 세계적인 평화를 절대 가져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종교가 동일하고 똑같은 가치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사람들이 아예 신은 없다고 믿거나, 혹은 그 신은 사람들이 뭘 믿든 관심없다는 뜻입니다. 어떠한 종교에도 그런 신은 없습니다. 맞죠?'
당신이 모든 종교는 동일하고 같은 가치를 가진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신을 특정한 시선으로 보고있는 것이며, 당신이 말하고 있는 것이 다른 종교보다 우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모든 종교는 독점적 주장을 멈춰야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극단적인 독점적 주장인 것입니다.
당신은 '내가 백인 서구인으로서 주관적이고 객관적으로 보는 관점이 상대적으로 옳다. 각 종교는 주관적으로는 맞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근본적으로 다 똑같다' 라고 하는겁니다. 당신의 관점이 다른 모두의 관점보다 맞다는 겁니다.
만약 어떠한 다른 종교라도 '내 종교가 최고다. 개종해!'라고 한다면, 거기에는 절개가 있고 솔직함이 있고 자기 이해가 있고 일관성이 있습니다. 근데 만약 당신이 모든 종교는 동일하고 어떤 종교도 자신이 더 우월하다고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면, 당신은 당신의 영적인 관점을 모두보다 우월하다고 하는 것이며 이것은 위선입니다. 이건 듣는 모든 종교를 분노하게 할거고 절대 전체적인 평화를 이루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전체적인 평화를 이룰까요?
그 해답을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이해했습니다. 그가 남부로 들어가서 일부 백인 크리스챤들의 인종차별과 부당함을 마주했을 때, 그는 뭐라고 했나요? 당신들은 틀렸으니 기독교를 때려치우라고 했나요? 아니면 신앙을 줄이라고했나요? 아닙니다! 그는 그들에게 더욱 기독교인이 되고, 신앙을 더 크게 가지라고 말했습니다. 기독교의 핵심에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게하는 자원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자원은 복음의 핵심에 있으니 가서 찾으라고 말했습니다.
복음이 관용, 사랑, 포용을 찾는 길입니다. 그리고 이게 우리의 마지막 세번째 포인트로 안내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우리 삶 속 에서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답은 히브리서 2장1~4절에 있습니다. 간단히 이 구절들을 살펴보고 이 구절들이 우리에게 우리가 현실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라고 가르치는지 보겠습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의 뜻을 따라 성령이 나누어 주신 것으로써 그들과 함께 증언하셨느니라."
많은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만, 요약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있는데 처음에는 예수님을 통해 말씀하셨고 나중에는 들은자들이 확증한 바니. 여기서 들은자는 예수님의 제자들, 사도들입니다. 메시지는 복음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등 신약성경의 내용들 즉 하나님의 메시지인 복음을 예수님이 제자들 사도들에게, 그들이 또 다른 듣는자들에게 전함으로 히브리서 수신자들도 복음을 들었습니다.
1절에 주목하십시오. 여기서 '더욱 유념함으로 must pay the most careful attention'이 갖는 의미는 제가 이번주 설교를 준비하려고 공부하기 전에 알고있던 것보다 훨씬 강한 의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히브리어의 attention이라는 단어는 말 그대로 집착obsession을 의미합니다. 또한 the most careful이라는 단어도 강한 의미를 갖는데 obsession과 결합하여 맹렬한 집착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복음을 듣고 '좋아. 난 이제 크리스챤이야. 난 이걸 믿어'라고 하는 모두는 하나님이 만들어가실 당신이 되는걸 이제 겨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이제부터 당신은 원래의 메시지에 맹렬한 집착을 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냥 계속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난 복음을 들었어. 예수님이 내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다는 복음. 좋은일이네. 난 그냥 계속 살아가고 싶어.'라고 하면 당신은 흘러 떠내려 갑니다.
떠내려가지 않으려면 메시지를 듣고 은혜에 집착하고 복음에 집착하고 당신의 삶 속으로 적용하고, 적용하고, 적용해야합니다.
이게 우리가 배우는 첫번째 입니다.
우리가 배우는 두번째는 하나님의 은혜를 대조적 접근으로 보여주는 2절에 있습니다.
2절에서 천사들을 통해서 전하신 메시지는 뭔가요? 이건 시내산에서 주어진 율법을 의미합니다. 시내산에 천사들이 있었으며 이를 나타내는 다른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이게 의미하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십계명을 (율법)을 주셨습니다. 저자가 율법을 나쁘게 말하지 않음에 주목하십시오. "견고하게 되어" 불순종하면 공정한 보응(just punishment)을 받게됨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말하는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면 처벌이 있는데, 예수님이 가져오신 말씀인 복음을 무시하면 얼마나 더 큰 처벌을 받겠느냐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선지자 중 하나였다면 다른 얘기입니다. 그러나 그분이 또 하나의 선지자가 아니고 선지자들을 보내신 하나님 본체이시기 때문에 당신은 그분을 통해서 완전한 구원에 이르게 된겁니다.
그분은 어떻게 하나님을 찾느냐를 알려주시러 오신게 아니고 그분이 당신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이신겁니다!
그래서 성경에 따르면 당신은 은혜로 구원받은 겁니다. 당신이 착한 일을 해서도 아니고 율법을 잘지켜서도 아니고,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겁니다.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착하게 살고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받고자 한다면, 당신은 변화 할 수 없습니다.
약 200년전 책에서 이 부분을 정확히 표현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편지봉투를 어떻게 봉했는지 아시죠? 먼저 초를 열로 녹여서 촛농을 떨어뜨리고 특정 문장이나 얼굴 그림 등이 새겨진 도장을 촛농 위에 찍어누릅니다. 그러면 부드러운 촛농에 도장의 특징이 각인되고 촛농이 굳으면서 봉투가 봉인됩니다.
그런데, 딱딱한 초에 도장을 찍어누르면 어떻게 될까요? 두가지 결과가 가능한데, 한가지는 표면에만 도장의 특징이 나타나지만 실제 형태는 변하지 않습니다. 또 한가지 가능한 결과는 초가 부서지는 겁니다.
그 오래된 책의 저자에 따르면, 당신이 착한 행실과 율법에 따르는 행위로 하나님의 영광을 당신 삶 속에 가지려 한다면 두 가지 결과가 가능합니다. 한가지 결과는 당신은 성공해서 착하게 살고 자긍심이 가득해집니다. 즉 표면적으로 도덕적인 사람이 됐지만 속으로는 자만심이 가득해서 잔인하고, 우월감에 젖고, 불안정하기도 합니다. 또 다른 한가지 가능한 결과는 당신이 도달할 수 없는 높은 기준 때문에 당신은 산산히 부서져버리게 됩니다.
무언가가 당신을 변화시키고 심장을 녹여야 합니다. 그 무언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일입니다.
제가 조금 전 말씀드린거 기억하시죠? 모든 결혼이나 인간관계에는 변경불가함(finality)이 있다는거 너무 오래되서 기억 못하시나요?
어느 순간에는 상대방의 변경불가한 점들을 받아들이고 맞춰야 친밀한 관계가 가능합니다.
그리고 하나님도 변경불가한 부분이 있으시고 우리는 받아들이고 맞춰야 한다고 했습니다.
근데 관계는 언제나 상호적인거 아닌가요? 나도 변경불가한 부분이 있을거고 하나님께서도 받아들이고 맞춰주셔야 하지않나요?
하나님께서는 이미 받아들이고 맞추셨습니다!!
우리의 변경불가한 점들이 뭔지 아세요? 우리의 협상불가한 점들, 우리가 바뀔수 없는 부분이요?
진정 우리 모두는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관계를 맺기 위해서 하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거기에 맞추시는 것 뿐이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세상에 약한 인간의 헝상으로 오셔서,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하신 일로 진짜 진짜로 맞춰주셨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일들이 실제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게 진짜 아이러니한게 뭔지 아세요?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조용해지셨습니다. 예수님은 평생 동안 아버지와 얘기하시고 늘 기도하셨습니다. 근데 십자가 위에서 조용해지셨습니다.
미국에서 독방감금이 불법인거 아세요? 왜냐하면 아무와도 관계맺지 않고 아무와도 대화하지 않는 극심한 독방감금은 정신분열을 일으킨다고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말씀 자체이신 예수님께서는 우주적으로 혼자되시고, 우주적 침묵에 처하시고, 지옥을 맛보셨습니다. 아버지 와의 관계단절은 그분에게 절대적 고통 이었습니다.
왜냐구요?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받아 마땅한 벌을 대신 받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가지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 맺을 수 있게 됐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맞추신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 내려놓고 그분의 말씀을 따르고 그분의 뜻을 따르라 하시는건,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서 하신 일에 집착하십시오. 그가 우리를 위해 이루신 일에 주목하십시오.
하나님의 은혜에 집착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에 집착하십시오. 이러한 것들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아십니까? 여러분의 내면을 변화시킵니다. 여러분이 착하게 살아서 구원받는게 아님을 보여줍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통해서 여러분이 되어야 만하고 될 수있다고 아는 '그사람'이 될 때까지 하나님의 은혜에 집착하십시오.
기도하겠습니다.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