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지 [列國誌] 811
■ 3부 일통 천하 (134)
제12권 사라지는 영웅들
제 15장 두 사나이 (9)
전단(田單)의 심리 전술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그는 즉각 두 번째 심리전술을 펼쳤다.
다시 성안 군사와 백성들을 불러놓고 말했다."나는 기겁(騎劫)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다만, 그가 포로가 된 제(齊)나라 병졸의 코를 베고, 그들을 앞세워 쳐들어올까 걱정일 뿐이다.
만일 그렇게 되면 우리가 어찌 즉묵(卽墨)을 지켜낼 수 있겠는가?"
이 말은 성밖으로까지 퍼져 마침내는 연나라 대장 기겁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기겁(騎劫)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무릎을 치며 기뻐했다.
'그렇구나. 즉묵성을 단시일 내에 함몰시키려면 저들을 가혹하게 다뤄야 한다. 지금까지
악의(樂毅)가 성공하지 못했던 것도 저들을 너무 부드럽게 다뤘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포로로 잡은 제(齊)나라 병졸들의 코를 모조리 베어 즉묵성 앞에 나열해 보였다.
이 광경을 본 즉묵성(卽墨城) 사람들은 이를 갈며 분개했다.
잡히면 코가 베어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죽기를 각오하고 성을 지켰다. 이 때문에
즉묵성 군사의 전투력은 더욱 강해졌다.전단(田單)은 세 번째 작전을 전개했다.
역시 첩자를 이용한 심리 전술이었다.- 나는 연(燕)나라 군사가 즉묵성 밖의 우리 무덤을 파헤쳐
조상을 욕보이는 것이 가장 겁난다. 그런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섬뜩하다.
이 말이 퍼져 연나라의 진영까지 알려졌다.기겁(騎劫)은 또 무릎을 쳤다."그렇다.
내가 어째서 진작에 그 생각을 못했을까? 지금 당장 모든 군사는 성밖에 있는 무덤을 파헤쳐라!"
연(燕)나라 군사들은 창 대신 삽을 들고 인근을 돌아다니며 무덤이란 무덤은 모두 파헤쳤다.
썩지 않은 시체에는 불을 지르고, 썩은 시체는 해골을 꺼내어 길가에 늘어놓았다.
성벽 위에 올라 이 광경을 내려다보던 즉묵성(卽墨城) 사람들은 눈물을 쏟으며 통곡하다가
급기야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도저히 이대로는 견딜 수 없다.
반드시 연나라 놈들의 살을 씹어먹고야 말겠다.""지금 당장 성문을 열고 나가 연(燕)나라 놈들과
사생결단을 내자.""그러자. 나가 싸우자."사람들은 이렇게 떠들다가 우르르 전단에게로 몰려갔다.
"이런 치욕은 없습니다. 우리는 조상의 원수를 갚고자 합니다. 나가서 싸울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바로 전단(田單)이 노리던 바였다.'이제야 때가 왔도다!'전단은 장대(將臺)위에 올라가 외쳤다.
"내가 여러분의 원수를 갚아주겠소. 모두들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시오. 그러면 능히
연(燕)나라 군대를 이 나라 땅에서 쫓아낼 수 있소."그의 연설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잡아 끌었다. 군사와 백성들은 주먹을 쥐고 하늘을 향해 찔렀다.
그날부터 즉묵성(卽墨城) 안은 분주히 움직였다. 모든 군사와 백성들이 삽을 들고
땅을 파기 시작했다.굴 좌우로 흙이 무너져 내리지 않도록 두터운 판자를 대었다.
성밖으로 연결하는 비밀 통로를만드는 공사였다.
전단(田單)도 친히 삽을 들었다.무엇 때문에 비밀 통로를 만드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공사는 몇 날 며칠 계속되었다.이윽고 비밀 통로가 완성되었다.
전단(田單)은 다시 씩씩하고 용맹한 5천 군사를 뽑아 민가에 숨겨두었다.
성벽 위로는 노인과 연약한 부녀자들을 올려보내 성을 지키는 시늉을 했다.
이를 본 연(燕)나라 군사들 사이에 환성이 올랐다.- 저들도 이제 지쳐가는구나!
모든 연나라 장수와 병졸들은 머지않아 즉묵성을 깨뜨릴 수 있음을 확신했다.
아니다다를까.즉묵성 쪽에서 먼저 소식을 보내왔다.성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즉묵성을 나왔다.
그 사람은 곧장 수레를 몰아 연나라 군영을 향해 달렸다.전단(田單)이 연나라 대장 기겁에게 보내는
사자였다.사자는 기겁에게 와서 말했다."전단(田單) 장군께서는 더 이상 백성들을 괴롭힐 수 없다며
사흘 후에 항복하겠다고 하십니다. 군사를 물리시고 그때까지 기다려 주십시오."
기겁(騎劫)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자랑스레 좌우 장수를 돌아보며 말했다.
"들었는가? 내가 마침내 제(齊)나라를 평정하게 되었도다. 그대들은 말해보라.
나와 악의 중 누가 더 훌륭한가?"모든 장수가 일제히 대답했다.
"장군이 악의(樂毅)보다 백 배는 훌륭하십니다."
연나라 군사는 사흘 후에 즉묵성(卽墨城)이 항복한다는 말을 듣고 투구를 벗으며 기뻐 날뛰었다.
전단(田單)은 백성들에게 지시했다.- 성안의 황금을 모조리 거두어라.
백성들은 많건 적건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내놓았다.
한 곳에 모으니 1천 일(鎰)이나 되었다.전단(田單)은 부자 한 사람을 불러내어 그 황금을 내주며
귓속말로 무엇인가를 속삭였다.그 날 밤이었다.
전단의 지시를 받은 부자는 몰래 연(燕)나라 군영으로 가 기겁에게 황금을 바치며 말했다.
"저는 즉묵(卽墨)에 사는 부자입니다. 우리는 사흘 후면 항복할 작정입니다. 장군께서는 성안으로
들어오실 터인데, 그때 특별히 저희 집에 피해가 없도록 잘 봐주십시오. 이 황금은 그 사례입니다."
기겁(騎劫)은 흡족했다.조그만 기(旗)를 여러 개 내주며 대답했다.
"그대는 기특하구나. 우리 군사가 입성하면 이 기를 집 주변에 꽂아두어라. 결코 그대의 집에는
침범하지 않으리라."
812편에 계속
열국지 [列國誌] 812
■ 3부 일통 천하 (135)
제12권 사라지는 영웅들
제 15장 두 사나이 (10)
다음날, 전단(田單)은 다시 백성들에게 명했다.- 성안의 소를 모조리 거두어들여라!
즉묵은 옛날 내(萊)나라 땅이었다.내나라는 소의 산지로 유명하다.
백성들의 대부분이 소를 길러 생계를 유지할 정도였다.즉묵(卽墨)에도 소가 많았다.
성안 사람들은 전단(田單)이 시키는 대로 소를 끌고 군영으로 몰려들었다.
모두 합해 1천여 마리나 되었다.- 붉은 비단에 오색 용 무늬를 그려 소에게 입혀라.
그 날 성안 사람들은 하루 종일 소에게 입힐 옷을 만들었다.
어디에 쓰일 것인지는 묻지 않았다. 그저 전단(田單)이 시키는 대로만 할 뿐이었다.
소들에게 붉은 옷을 입히자 다시 명이 떨어졌다.- 날카로운 칼을 쇠뿔에 비틀어매고,
꼬리에는 기름을 묻힌 갈대를 묶어라.최종적으로 전단(田單)이 모든 상황을 점검했다.
"이로써 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연(燕)나라 군대를 깨뜨리는 일뿐이다."
항복하기로 약속한 전날 밤이었다.전단(田單)은 민가에 숨겨두었던 정예병 5천 명을
소집했다.밥을 배불리 먹인 후 제각기 얼굴에 오색 칠을 하게 했다.
"이제부터 너희들은 소를 몰고 비밀 통로를 통해 성밖으로 나가라."
어둠에 싸인 즉묵성(卽墨城)은 고요했다. 그러나 그것은 성밖에서 본 풍경일뿐이다.
성벽 밑으로 나 있는 비밀 통로는 1천여 마리의 소와 5천 명의 정예병들로 인해
몹시 북적거렸다.그들은 차례차례 땅 밑 통로를 통해 성밖으로 빠져나왔다.
소의 입에는 소리를 내지 못하도록 매(枚)가 물려져 있었다.
5천 정예병은 함매(銜枚)한 소들을 몰고 연나라 진영을 향해 조금씩 진군해 나갔다.
시야에 연군(燕軍) 진영의 불빛이 들어왔다.맨 앞에서 행군하던 장수의 입에서 명령이
떨어졌다."함매(銜枚)를 풀고 소 꼬리에 불을 붙여라!"이때부터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꼬리에 매단 갈대에 불이 붙자 1천여 마리 소들은 크게 놀랐다.
포효 같은 소리를 내지르며 일제히 무서운 속도로 내닫기 시작했다.
5천 정예병이 그 뒤를 따라 연(燕)나라 진영을 향해 돌진했다.한밤중이었다.
연(燕)나라 군사들은 내일이면 즉묵성이 항복할 것이므로 마음놓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별안간 지축이 흔들리는 듯한 진동을 느꼈다. 처음에는 지진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폭풍이 몰아쳐오는 듯한 무시무시한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들 놀라 밖으로 뛰쳐나왔다."앗!"연(燕)나라 군사들은 비명 외에는 내지를 말이 없었다.
보라!눈앞으로 1천여 개의 불덩어리가 자신들을 향해 덮쳐오고 있지 않은가.
불빛에 비쳐 드러난 형체는 그들을 더욱 놀라게 했다.
사자도 아니요, 호랑이도 아니었다. 얼핏 보기에는 용 같았으나 용도 아니었다.
- 괴물이다!그랬다.그것은 시뻘건 불덩이에 휩싸인 괴물이었다. 적어도 연(燕)나라
군사들 눈에는 그렇게 비쳤다.어찌나 놀랐는지 도망갈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갈대가 다 타고 꼬리에 불이 옮겨붙자 소들은 미친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그러자 또 한차례 아비규환(阿鼻叫喚) 같은 풍경이 벌어졌다.
연(燕)나라 군사들은 피를 뿌리며 쓰러져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뒤따라온 5천 정예병이 가세하여 닥치는 대로 연군을 쳐죽였다.
연군 대장 기겁(騎劫)은 젊은 여자를 품에 안고 자고 있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한 소리에 놀라서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날뛰어대는 소의 뿔에 받혀 기겁(騎劫)은 내장이 터져 쓰러졌다.
그 위를 수없이 많은 소 발굽이 밟고 지나갔다.
기겁의 시체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이겨졌다.
즉묵성 위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전단(田單)의 입에서 또 다른 명령이 떨어졌다.
"성문을 열고 나가 싸우라!"그동안 굳게 닫혀 있던 즉묵(卽墨) 성문이 활짝 열렸다.
성에 남아 있던 군사와 노인과 아녀자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달려나왔다.
소 떼는 지나갔지만 연(燕)나라 군사들은 완전히 혼을 빼앗긴 뒤였다. 도저히 싸울 마음이
일지 않아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그 뒤를 즉묵의 군사들이 추격했다.
그것은 이미 싸움이라고 할 수 없었다. 날이 밝아서야 전단(田單)은 추격을 중지하고
즉묵성으로 돌아왔다.- 전단, 연나라 군에 대승을 거두다.
이 소문은 삽시간에 제(齊)나라 전역으로 퍼져나갔다.이때부터 연(燕)나라에 항복했던
각 성읍 영주들은 일제히 반기를 들고 연나라 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상장군 기겁(騎劫)을 잃은 연나라 군사들은 무력했다.감히 싸울 생각을 못하고 다투어
북쪽으로 달아났다.임치성에 있던 총사령부도 국경 밖으로 퇴각했다.
이리하여 연군에 함락당했던 제(齊)나라 70여 개의 성은 모두 해방되었다.
전단(田單)의 이름은 제나라뿐만 아니라 천하에까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 나라를 구한 사나이.각 성읍 장수들은 즉묵(卽墨)으로 달려와 전단의 위업을 칭송했다.
어떤 장수가 말했다."장군은 왕족이십니다. 지금 우리 나라에는 왕이 죽고 없으니
장군께서 왕위에 올라 백성들을 이끌어 주십시오."전단(田單)이 손을 저으며 대답했다.
"그런 소리 하지 마오. 듣자하니 세자께서 초군에게 쫓겨 거현(莒縣) 땅 어딘가에 숨어 계시는
모양이오.""내 아무리 왕족이라고는 하지만 세자가 계시는데 어찌 딴 마음을 품을 수 있겠소?
우리 모두 거현으로 가 초군(楚軍)을 몰아내고 세자를 임치성으로 모시어
왕위에 올리도록 합시다."전단(田單)은 모든 장수와 함께 거현을 향해 진군해 나갔다.
813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