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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계 박세당 사랑채 의정부시 장암동
박세당(朴世堂) : 1629∼1703, 호는 서계(西溪). 조선조 실학파 학자. 농촌생활에 토대를 둔 박물학(博物學)의 학풍을 이룩하였으며 「색경」이라는 농사서적을 저술하였음. 유교경전 중 대학, 중용, 논어, 맹자, 서경에 대한 주해서를 집필한 「사변록」을 저술, 주자의 사상과 대립하여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낙인찍혀 삭직, 유배도중 사망했음. 저서로는 《사변록(思辨)》, 《색경(穡經)》, 《서계집(西溪集)》 등이 있음.
박세당(朴世堂)은 조선후기의 학자이자 문신이다.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계긍(季肯), 호는 잠수(潛수)·서계초수(西溪樵수)·서계(西溪) 등이다. 할아버지는 좌참찬 동선(東善)이며 아버지는 이조참판 정(炡)이다. 어머니는 관찰사 윤안국(尹安國)의 딸인 양주 윤씨(楊州 尹氏)이다. 그는 1629년 8월 19일 아버지의 임지인 전라도 남원부 관아에서 출생하였다. 4살 때 아버지가 병사하였고 7살 때에는 큰 형인 세규(世圭)마저 요절하면서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였다. 뒤이어 병자호란이 발생하면서 조모·모친·두 형과 함께 원주·청풍·안동을 전전하며 피난생활을 하였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청주·천안 등지로 옮겨다니며 곤궁한 생활을 영위하였다. 그리하여 10살이 넘어서야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13살에 고모부인 정사무(鄭思武) 아래에서 본격적으로 학문을 연마하였다. 1660년 증광시(增廣試) 갑과(甲科)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성균관 전적(成均館 典籍)에 제수되어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그 뒤 예조좌랑·병조좌랑·정언·병조정랑·지평·홍문관교리·홍문관교리 겸 경연시독관·함경북도병마평사 등의 내외 관직을 역임하였다. 1668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를 일시 다녀왔지만 당쟁을 혐오하며 관직을 그만두고 양주 석천동으로 물러났다. 한때 통진현감으로 나가 백성들의 구휼에 힘쓰기도 했으나 당쟁의 소용돌이에서 두 아들을 잃자 일체의 출사 권유를 물리치고 석천동에서 농사지으며 학문연구와 제자 양성에만 몰두하였다. 1702년에는 이경석(李景奭)의 신도비명에 송시열(宋時烈)을 낮추었다 하여 노론에 의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지탄받기도 하였다. 송시열에 대한 비판에서도 드러나듯이 그의 학문은 당시 통치이념이었던 주자학을 비판하고 중국 중심의 학문 태도에서도 비껴 서있었다. 그는 당시의 학자들이 꺼려하였던 도가사상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노장서(老莊書)에 심취하는 자유로운 면모를 보이기도 하다.
홍문관 수찬(弘文館 修撰) 재임시에는 시무책을 올려 양반 지배세력의 당쟁과 무위도식을 고발하고 정치·사회제도의 개혁과 민생 안정을 위한 요역·병역의 균등화를 주장하였다. 대외정책에 있어서는 중국대륙의 세력변동에 주체적으로 적응할 수 있는 실리주의를 펼칠 것을 내세웠다. 숭명배청(崇明排淸) 의식이 지배했던 당시 사회에서 그는 민족의 현실적 생존과 안위를 위해 명분을 버리고 민족자존의 실리를 추구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 그는 사서(四書) 는 물론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 , 장자(莊子) 의 연구를 통해 주자학적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려 하였다. 또한 후대의 학자들에 의해 훼손된 공맹(孔孟)의 본뜻을 밝힌다는 입장에서 사변록(思辨錄) 을 저술하였다. 이러한 학문 태도로 인해 그는 주자학에 경도된 당시의 지배세력으로부터 여러 차례 비난을 받았다. 그는 소론파의 거두였던 윤증, 같은 반남 박씨인 박세채(朴世采), 처숙부 남이성(南二星), 처남 남구만(南九萬) 등과 교유하였고, 우참찬 이덕수(李德壽), 함경감사 이탄(李坦), 좌의정 조태억(趙泰億) 등의 제자를 키워냈다. 양주 석천동에 기거하며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던 그는 1703년 8월 21일 75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그의 학문과 행적에 대한 논란은 사후에도 계속되어 1722년에 문절(文節)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다음 해 이는 문정(文貞)으로 고쳐졌다. 그의 저서로는 서계선생집(西溪先生集) 과 대학 · 논어 · 중용 · 상서 등의 해설서인 사변록(思辨錄) , 도가에 대한 연구서인 신주도덕경(新註道德經) · 남화경주해산보(南華經註解刪補) 가 있으며, 편저로는 농서인 색경(穡經) 이 전한다
(조선왕조실록)
현종1(1660) 즉위 증광과(卽位增廣科)를 설행하여 박세당(朴世堂) 등 34인을뽑았다. 壯元 1인은 전시(殿試)에 직부한 자이다
3 2/8 박세당(朴世堂)을 정언으로,
7/22 박세당(朴世堂)을 헌납으로 삼았다.
4 3/3 박세당(朴世堂)을 지평으로 삼았다.
현종5 2/12 박세당(朴世堂)을 부수찬으로,
2/21 박세당(朴世堂)을 정언으로,
4/1 박세당(朴世堂)을 교리로,
9/3 박세당(朴世堂)을 부교리로,
현종5/10/4 평안도·황해도·경기도 등에 민유중·오시수 등을 어사로 파견하다 》
어사(御史) 박세당(朴世堂)을 황해도에,
10/15 박세당(朴世堂)을 지평으로,
12/3 박세당(朴世堂)을 정언으로,
12/16 박세당(朴世堂)을 수찬으로,
6 1/28 박세당을 부교리로 삼았다.
11/6 박세당(朴世堂)을 부수찬으로,
8 3/5 박세당(朴世堂)을 수찬으로 삼았다.
8/18 박세당(朴世堂)을 부교리로,
12/6 박세당(朴世堂)을 지평으로,
9 4/27 박세당(朴世堂)을 수찬으로, 박세당은 구차하게 벼슬길에 나아갈 뜻이 없었으며,
9/19 박세당(朴世堂)을 교리로 삼았다.
11 5/19 박세당(朴世堂)?김만중(金萬重)을 이조 좌랑으로,
현종 11/25 박세당(朴世堂)을 사간으로 삼았다.
숙종 1 3/22 박세당(朴世堂)을 응교(應敎)
숙종 1 4/30 박세당(朴世堂)을 집의(執義)로,
숙종 1 5/7 집의(執義) 박세당(朴世堂)이 상소(上疏)하여 <자신의 직위를> 갈아 주기를 빌어 말하기를,
????고집과 막힘이 심하여 본래 남과의 결합이 적었습니다만, 한 번 <벼슬길에> 나간 뒤에도 도무지 꺼리고 피할 줄을 몰라서 몸이 큰 잘못에 빠져 명철하신 성상을 저버렸으니, 끝내 스스로 헤아려서 죽을 때까지 분수를 지키는 것만 같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박세당(朴世堂)은 박정(朴炡)의 아들이다. 젊어서 질탕(跌宕)하여 <속(俗)된> 무리 속에 들지 아니하였는데, 일찍이 척리(戚里)의 연회(宴會)에 참여하였다 하여 사론(士論)의 비난을 받았었다. 그러나 그는 벼슬하기를 좋아하지 않아서 젊은 나이에 <벼슬길에서> 물러나 자못 사람들의 칭송을 받기도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당시 의 무리들이 옛사람들과는 취지가 다르다고 여겨 끌어다 쓰려 하였다. 박세당이 이를 부끄럽게 여겨 소(疏)의 말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숙종 2 11/30 박세당(朴世堂)을 사간(司諫)으로
숙종 2 12/11 하교(下敎)하기를, ????전(前) 사간(司諫) 박세당(朴世堂)은 여러번 제수(除授)를 명했는 데도, 매양 병을 핑계하 고 한 번도 부명(赴命)하지 아니하니, 인신(人臣)으로서 임금을 섬기는 도리가 이와 같은 것을 어찌 용납(容納)하겠는가? 우선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도록 하라.????하였다.
숙종 2 1/9 박세당(朴世堂)을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숙종 3 2/4 박세당(朴世堂)을 응교(應敎)로
숙종 3 2/20 박세당(朴世堂)을 집의(執義)로
숙종 3 3/22 박세당(朴世堂)을 교리(校理)로,
숙종 6 10/15 박세당(朴世堂)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숙종 7 2/14 박세당(朴世堂)을 공청도 관찰사(公淸道觀察使)로 삼았다. 박태손(朴泰遜)을 부교리(副校理)
숙종 7 4/17 박세당(朴世堂)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숙종 7 9/21 박세당(朴世堂)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숙종 9 2/11 박세당(朴世堂)을 부제학(副提學)으로, 박태손(朴泰遜)을 사간(司諫)으로,
숙종12 9/14 박세당(朴世堂)?성호징(成虎徵)을 승지로,
숙종20 6/19 박세당(朴世堂)을 호조 참판으로, 박세준(朴世?)을 발탁하여 승지로,
숙종20 7/11 박세당(朴世堂)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숙종21 3/17 박세당(朴世堂)을 공조 판서로 특별 승진시키고,
숙종22 10/2 이정겸(李廷謙)이 박태보의 아버지 박세당(朴世堂)은 더욱 먼저 곤궁을 돌보아 주어야 한다고 이어서 아뢰니, 임금이 본도(本道)에 명하여 곤궁을 돌보아 주게 하였다.
숙종22 11/22 박세당(朴世堂)을 홍문 제학(弘文提學)으로,
숙종23 1/6 박세당(朴世堂)을 우참찬(右參贊)으로,
숙종23 3/18 박세당(朴世堂)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숙종23 4/12 박세당(朴世堂)을 판윤(判尹)으로 삼았다.
숙조23 5/2 박세당(朴世堂)을 우참찬(右參贊)으로,
숙종23 6/13 좌의정 (尹趾善)이 윤증(尹拯)?박세당(朴世堂)을 주급(周急)하도록 청하니, 그대로 허락하였다.
숙종25 5/21 박세당(朴世堂)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삼았다.
숙종26 8/27 박세당(朴世堂)을 이조 판서로
숙종29 4/28 박세당(朴世堂)을 옥과(玉果)로 귀양보내게 하였는데 행사직(行司直) 이인엽(李燁)이 상소하여 구(救)하기를,
????《사변록(思辨錄)》은, 신이 그 논설이 어떠한 것인지 알지 못하지만 판부(判付)로써 살펴보건대, 또한 참람하고 망녕된 잘못 은 면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박세당은 나이가 지금 75세로 거듭 이상한 병을 얻어서 조석 사이에 관(棺)에 들어갈 것인 데, 이제 만약 먼 변경에 귀양보내어 길떠날 차비(差備)를 재촉해 가게 한다면 반드시 길에서 죽을 것입니다. 그 실낱 같은 목숨을 특별히 용서해 주어 들창 밑에서 목숨을 마치게 한다면 인후(仁厚)하신 덕에 빛남이 있지 않겠습니까? 박세당은 산 림(山林) 밑에 물러가서 휴식한 지 40년에 고상한 풍도(風度)와 우뚝한 절개는 진세(塵世)를 멀리하고 뭇사람을 떠났으니 족 히 쇠퇴한 세속을 떨쳐 가다듬게 할 만한데, 한갓 상자 솟의 사사로운 기록으로 갑자기 영행(嶺海)로 멀리 귀양을 당하였으 니, 진실로 평일에 성조(聖朝)에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하물며 박세당은 두 아들을 모두 잃고 외로운 그림자가 쓸쓸한데 그 아들 박태보(朴泰輔)가 뜻을 세운 바가 저처럼 우뚝합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자문(子文)의 후손(後孫)은 오히려 장차 10 세(世)까지 죄를 용서한다.????고 하였으며, 옛적에 백성에게 공로가 있으면 자손(子孫)이 비록 죄가 있더라도 오히려 너그럽 게 용서하였는데, 지금 박태보의 절의(節義)로써 능히 그 아버지를 보전하지 못한다면 딱하고 슬프고 가엾음이 더욱 어떠하 겠습니까? 청컨대, 성명(成命)을 정지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박세당이 성인을 업신여기고 정인(正人)을 미워하는 죄는 당연히 멀리 귀양보내는 법을 시행해야 하지만 상소의 글을 살펴 보건대, 이상한 병이 거듭 들어서 장차 길에서 죽을 것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마땅히 생각할 만하다. 우선 찬배(竄配)의 명 을 정지하도록 하되, 박세당이 사문(斯文)에 죄를 얻어서 다시 볼 만한 것이 없는데 경(卿)의 추허(推許)한 것이 이 지경에 이르니, 참으로 이상하다.???? 하였다.
박세당(朴世堂)이 곧 졸(卒)하였는데, 나이가 75세이다. 박세당은 젊었을 때 일찍이 국구(國舅) 김우명(金佑明)의 집 잔치 에 참석하여 일어나 춤을 추기까지 하였으므로 사론(士論)이 이를 더럽게 여겨 전랑(銓郞) 추천에 저지되었으며, 뒤에 비록 임명되었으나 공론이 끝내 불쾌하게 여겼다. 박세당은 전랑 추천을 저지한 의논이 송시열(宋時烈)에게서 나온 것으로 의심 하여 원한이 매우 깊어서 드디어 벼슬을 버리고 시골로 내려가서 그대로 조정에 나오지 아니하였다. 사람됨이 치우치고 어 긋나며 집요(執拗)한 병통이 있으며 일찍이 장주(莊周)의 글을 주해(註解)하였다. 민정중(閔鼎重)이 이를 배척해 말하기를, ????어찌 이단(異端)을 배우는 자로 하여금 경악(經幄)에 있게 할 수 있겠는가????? 하여 드디어 부제학(副提學) 의망(擬望)을 저 지당하였다. 서울 사대부의 자제(子弟)로 과거(科擧) 보는 글을 배우려고 하는 자가 가서 수업(受業)을 청하면 박세당은 망 령되게 사도(師道)로 자처하여 경훈(經訓)을 마음대로 고쳐서 사사로이 전해 주었는데, 여러 해가 되어 일이 비로소 발각되 었다. 박세당이 죽음에 임하여 또 그 아들에게 유계(遺戒)하여 조석(朝夕)의 상식(上食)을 베풀지 말게 하였다. 논하는 자가 말하기를, ????박세당이 성인을 업신여기고 경(經)을 헐뜯으며 떳떳한 도리를 문란시키고 예(禮)를 허물어뜨렸으니, 벼슬을 버 리고 물러간 한 가지 일로 그 죄를 속(贖)할 수 없다.???? 하였다. 뒤에 그의 당(黨)이 국정을 잡자 시호(諡號)를 문정(文貞)이 라고 하였다.
경종2 7/30 《 증 영의정 남구만?영의정 초석정 등의 시호를 내리다 》
증(贈) 영의정(領議政) 남구만(南九萬)은 시호(諡號)를 문충(文忠)으로, 영의정 초석정(崔錫鼎)은 문정(文貞)으로, 우의정(右議政) 윤지완(尹趾完)은 충정(忠正)으로, 판중추(判中樞) 박세당(朴世堂)은 문절(文節)로 내려 주었다.
4살 때 아버지가 죽고 편모 밑에서 원주 안동 청주 천앙 등지를 전전하다가 13세
에 비로소 고모부인 정사무에게 수학하게 되었다
현종1(1660) 증광문과에 장원 성균관전적에 제수 예조좌랑 병조좌랑지평 홍문관교리 겸
경연시 함경북도병마평사 등 내외직을 역임
현종3(1668) 서장관으로 청나라를 다녀왔지만 당쟁에혐오를 느낀 나머지 관료생활을 포기하고, 양주 석천동으로 물러났다 그 뒤한때 통진현감이 되어 흉년으로 고통 받는 백성 들을 구휼하는데 힘쓰기는 하였으나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맛아들 태유 와 태보를 잃게되자 여러차례 에 걸친 권유에도 불구 하고 석천동에서 농사지으며 학문연구와 제자 양성에 힘썼다 그 뒤 죽을 때까지 집의 사간 홍문관 부제학 이조참의 호조참판 공조판서 우참찬 대사헌 한성부판윤 예조판서 이조판서 등의 관직이 주어졋지만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수종28(1702) 이경석의 신도비명에서 송시열을 낮게 평가하였다 하여 노론 에 의하여 사문난적으로 지탄되기도 하였다 그 의 학문과 사상은 성장기의 고난과 청장년기의 관리생활을 통한 개혁의 그리고 당쟁의 와중에서 겪은 가족의 수난과 어 려운 농촌에서 지낸 그의 생애 등을 통해서 형성된 사희현실관의 반영이라 하겠다 그가살았던 시기는 보기드문 민족적 시련과 정치적 불안정 밎 민생의 곤궁이 매우 심하였던 시기이었다 즉 병자호란의 국치와 당쟁의 격화로 말미암아 국력 은 약화되고 민생이 도탄에 허덕이고있던 시기였던 것이다 그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국내의 현실을 직시하며 국가를 보 위하고 사회개혁을 통한 민생의 구제를 목표 로 하는 사상적 자주의식을 토대로 해서 그의 학문과 경륜을 펼첬던 것이다. 그의근본사상에 대하여는 유학의 근본정신을 추구하는되 있었다는 견해가있고 주자학은 물론유학 자체에 회의하여 노장 학 으로 흐른 경향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그의 학문의 근본 입장이 당시통치 이념이었던 주자학을 비판하고 중국 중심적 학문 태도에 회의적이었던 것으로보는데 이론이 없다. 그만아 아니라 17세기 우리나라 사상계는 국내외적 사련에 대한 극복을 위하여 사상적 자주의식이 제기되어 이의 수정과 사회적 개혁을 유구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의 입장도 주 자학에 비판적 이었던 것이다 -------
고대 삼국 가운데 국력이 가장 미약했던 신라가 당나라에 망하지 않은 원인이 외교정책의 현실주이적 실리추구에 있 었음을 지적하면서 고려말 정몽주와 자기의 선조 박상충에 관한 평가에 있어서도 고려에 대한 충절로서 보다는 원나라. 명나라 교체의 국제적 변동에 대처 하려는 대외정책으로 신흥 명나라를 섬기고 원을 배척할 것을 주장한 실리주의자였던 데서 높이 평가되어여 한다고 하였다 그는 숭명배청이 풍미하던 당시 였음 에도 불구하고 민족의 현실적 생존과 국가의 보위를 위하여 국제사회에서 주체적 적응이란 입장에서 존명사대의 명분을 버리고 민족자존의 실리를 위한 친청정책을 주 장 하였던 것이다.
그는 소론 거두인 윤증을 비롯하여 같은 반남박씨로 곤궁할 때 도움을준 박세채. 처숙부 남이성 처남 남구만 최석정등 과 교유하였고 우참찬 이덕수 함경감사 이탄 좌의정 조태억 등을 비롯한 수십인의 제자를 키우기도 하였다
耆社에 들어가 치사하여 졸하니 , 향년 75세다
그의 학문과 행적에 대한 변론은 계속되어 그가죽은지 약20년이 지난
경종2 7/30 (1722) 판중추(判中樞) 박세당(朴世堂)은 문절(文節)로 내려 주었다.
효종 3년 8월27일(병인) 제124책/제7책 (4/5)1652년
먹이 더럽혀져 글자를 알아볼 수 없다고 朴世堂의 試卷에 관해 내린 전교
以朴世堂試卷事, 傳曰, 此字, 點墨?汚, 不得解見, 未知何字耶? 察啓
효종 3년 8월28일(정묘) 제124책/제7책 (5/15)
韓翊周을 直赴會試하고 安獻奇 등에게 二分을 주라는 비망기
○ 備忘記, 生員韓翊周, 直赴會試, 判官安獻奇, 副率金佑明, 通德郞呂顔齊, 進士金益炅, 幼學朴世堂, 直長李惟亨, 幼
현종 원년 11월13일(갑자) 제165책/제9책 (24/28)鄭重徽 등에게 관직을 제수함
○ 朴世堂爲典籍 文科第一人
저서 <서계선생집>, <사변록>(대학 중용 논어 상서 시경 등의 해설서. 논어 와 맹자
등의 경전을 주조한 것으로 정주설과는 다른점이 매우많다)
<신주도덕경>(도가에 대한 연구서), <색경>
15세 휘 박세채(朴世采)(1631--1695) 인조9~숙종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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