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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최초의 사망자는 5월 18일 과잉진압-심한 구타-로 숨진 청각장애인이었습니다..
트럭에 타라는데 청각장애인이라 말을 못 듣자 개기는 줄 알고 두들겨 팼고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다음 날 사망했는데, 결국 죽이려는 의도는 없었고 과실치사죠.
헌데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5월 18일 과잉진압을 지시한 것은 광주지역 사령관 정웅장군이란 겁니다.
시위대를 해산시키라고 명령해야 하는데 실수로 전원체포해 오라고 잘 못 명령을 내려서 과잉진압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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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정웅장군에게 SOS를 요청한 것은 광주파출서장입니다
시위대가 경찰 40명 납치하고 파출소에 화염병 던져서 파출소가 불에 타고하는 급박한 상황에서
정웅장군에게 군투입을 요청하고,
당시 전남대 조선대에 주둔하던 공수부대원의 지휘권은 정웅장군에게 넘어가 있던 상황이었죠. .
정웅장군은 전남대 조선대에 주둔하던 공수부대원에게 광주시내로 진입하여 시위대를 전원체포해 오라고 명령을 내린 것이죠.
광주인들은 5월 18일 과잉진압만 없었다면 광주민주항쟁은 없었을거라고 이구동성으로 말 하고 있습니다
5월 18일 광주시민은 과잉진압에 분노하였고,
5월 19일 저녁 광주유지들이 정웅장군을 방문하여 항의하자
그제서야 뭔가가 잘 못되었다고 느낀 정웅장군은 무혈진압으로 명령을 바꿨지만 이미 물은 엎지러진 상황
여기까지는 군인이 시민을 패는 입장이었지만 5월 20일부터는 상황이 바뀝니다.
공수부대는 총은 있었어도 총알이 없었거든요.
숫자도 시민이 훨씬 많았고,
오히려 시민이 공수부대를 토끼몰이하는 상황이 벌어진거죠
5월 19일은 소강상태, 증원군이 오기 시작함. 증원군은 윤흥정 전남계엄소장이 요청함.
다시 말하자면
윤흥정 전남계엄소장이 이희성 계엄사령관에게 요청하고, 국방장관을 거쳐 최규하의 재가로 이루어졌고,
이 과정에서 전두환그룹의 개입은 전혀 없었음..
전두환은 국보위 시절 광주사건 조사를 지시하고 정웅장군과 윤흥정을 처벌해야 한다는 조사결과를 보고 받았는데 정웅장군이 이희성 계엄사령관과 아주 친해서 못 했다고 하고,
이 것을 천추의 한으로 여기고 있다고 함..
전두환 변호사의 증언 -->http://www.ilbe.com/?mid=politics&document_srl=1310218502
최규하 변호사의 즈언 --> http://www.ilbe.com/1296797076
<<<-- 위 두 개 글 읽어 보시길, 전두환 변호사와 최규하 변호사가 같은 내용의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최규하와 전두환은 일심동체였다고..
5월 18일부터 상황 일지입니다.
전옥주(이요원)의 대활약상은 분홍색 형광펜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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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0일 --> 버스로 군경 7명 죽이자 응사하여 시민 4명 사살한 상황 )
" 21시 경이 지나자 시위대가 앰프를 단 차량으로 도로상을 돌아다니며 최초로 시위대의 선무방송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떤 여자가 애끓는
듯한 소리로 시민들을 자극하는 방송을 했습니다.
목소리와 억양이 마치 이북에서 대남 방송하는 여자들의 억양과 똑같아 계엄군 입장에서 보면 전율을 느낄 정도였습니다. 시민들이 들으
면 분노를 느끼게 하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지금 기억나는 내용은
"지금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들 씨를 말리려고 왔다. 우리가 이대로 있어서야 되겠느냐,
금남로로 전부 모여라"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방송이 있은 다음부터 시위양상이 격해졌습니다."
(사실 아님, 당시 공수부대원 40%가 호남출신, 광주출신 소대장이 시위대에 주민등록증을 꺼내 보여주기도 했음)
(공수부대원 김치년의 수기 중)
이때 조그마한 타이탄 트럭에 확성기를 달고 선무 방송을 하며 돌아다니던 여자가 있었다(나는 훗날 이 여자의 이름이 전옥주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 여자의 선무 방송내용은 내게 종합되어졌다. 그 내용은 이렇다.
-광주 도청에서 시민 두 명이 살해되었다. (거짓말)
-광주 시민이여 봉기하여 무자비한 공수부대원을 몰아내자.
-광주역 부근에서 또 시민이 살해되었다. (거짓말)
-저들은 우리를 향해 절대로 총을 쏘지 못한다. (?? 총을 못 쏜다는데 시민은 죽었다? 나아가 공수부대가 총을 쏘지 않았다는 증거)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궐기하자 광주 시민이여.
이 기록을 정리하는 사이 동료들의 얼굴 표정을 보니 그들은 전옥주란 여자의 선무 방송에 의해 대단히 불안한 심리상태를 보이고 있었다.
그녀의 선무공작은 특수전으로 단련된 우리들을 오히려 겁먹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대원들은「저 여자 때문에 더욱 더 상황이 악화되고
있으니 저 여자를 죽여야 한다」고 이구동성으로 주장했다.
당시 중대장이던 孫대위에게 한 하사관은「팀장이 못 쏘겠다면 총을 내게 달라. 내가 쏘아 죽이겠다」고까지 할 정도였다.
그러나 끝내 그 여자를 향해 사격한 군인들은 없었다.
우리가 속한 부대는 북한의 한 지역을 대상으로 늘상 훈련을 한다. 그곳에 침투해 선무공작을 하고 때로는 시위를 일으키며 선무방송과 삐라를 만들어 뿌리는 임무도 수행한다. 한마디로 비정규전을 하는 부대이다.
그런데 선무방송하는 시민군에게 심리적으로 위축당하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 광주사태는 시민군과 대한민국 육군과의 비정규전이었다. 거기서 비정규전 전문가인 군인들이 아마추어인 시민군들에게 깨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러니였다.
3공수 15대대장 박종규(육사23기)의 회고 : 20일 밤 9시 광주역 상황
'무인 돌진차량'(액셀러레이타와 운전대를 일정 속도와 방향에 묶어 놓고 기어를 1단에 넣은 후 클러치를 떼면서 사람이 뛰어 내리고 돌진하게 하는 차량) 공격이 시작되면서 우리대대를 향해서도 5 대 가량의 무인 돌진 차량이 간헐적 으로 돌진했다..........
이때부터 ‘차 온다’는 고함소리가 우리를 놀라게 했다. 광주사태가 끝나고 귀대하여 몇 달이 지나도록 우리 3공수여단 장병에게 ‘차 온다’ 는 고함소리는 잠을 못 이루게 하는 악몽의 함성으로 자명되었다.
간헐적인 무인차량의 공격과 더불어 각 방향에서 폭도의 몽둥이 공격, 투석공격이 파상적으로 계속되었다.
시위대는 우리를 제압하기 위해 함성을 지르며 돌진했고 우리는 최후의 보루를 지키기 위해 필사의 대항을 지속했다.
밤 10시가 훨씬 지났다. 그런 적막도 잠시였다. 저 멀리 양동교 방향에서 함성과 노래가 들리기 시작하였다.
점점 함성이 가까워 지면서 갑자기 ‘차 온다’ 라는 소리가 들렸다.
12대대 쪽에서 굉장한 속도로 라이트를 켠 화물차가 질주하여 분수대를 들이박고 달아났다. 엄청난 속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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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9시 30분경에는 전남지방노동청과 관광호텔 앞에 70여대의 트럭을 앞세운 시위군중이 몰려와 민간버스 2대에 불을 지른 후 대치 중이던 경찰에 돌진하여 <경찰관 4명이 사망>하고 6명이 중상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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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있다가 16대대 운전병이 돌진차량을 피하지 못해 몸이 갈기갈기 찢힌 채 죽었다는 최초의 피해보고가 구전되어 왔다.
그는 내가 16대대에 있을 때 운전병으로 선발된 병사였는데 제대를 몇일 앞두고 광주에 출동했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서울에 복귀한 후에도 광주에서의 희생자가 많아서 군인의 죽음 정도는 이야깃거리도 되지 않아 지금도 나는 자세한 상황을 모른다.
다만 16대대가 광주역 좌측 방향에서 반대방향으로 포진하고 있을 사이에 돌진차량이 시속 100키로로 달려들어 하늘이 돕지 않았다면 30명 정도 죽었을 사고였으나 대대장 운전병만 피하지 못하고 죽었다고 들었다.
이에 무인 돌진차량이 유인돌진차량으로 바뀌었다. 속도도 엄청났지만 방향이 일정치 않고, 우리 대형을 찾아서 돌진하는 공격이기 때문에 위험성은 훨씬 높았다.
드디어 우리 대대 앞으로 그런 유인돌진 차량이 공격을 감행했다. ‘차 온다’는 고함소리에 눈을 돌리니 화물자동차 한 대가 빠른 속도로 직진하고 있었다. 유인 돌격 차량에 대해서는 가스탄도 곤봉도 무용지물이었다. 소총 앞에 탱크가 출현한 미아리 전투와도 같은 것이었다.
(김치년의 수기 중 )
시위 차량이 갑자기 보급차량을 경비하고 있던 3공수여단 16대대 병사에게 돌진하여 <병사 1명이 압사>하였다. (22:10 전남대 앞에서 시위차량 돌진으로 3공수여단 16대대 병사 1명 압사 상황임)
지금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 사람들의 씨를 말리려고 왔다, 우리가 이대로 있어서 되겠느냐, 금남로에 모두 모여라”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방송이 있은 다음부터 시위양상이 격렬해졌습니다. 선무활동만으로 시위군중을 해산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당시 경찰병력이 시위대 버스에 의해 4명이 압사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지금 저희들을 향해 오고 있는 시위대 차량이 우리를 깔아뭉갤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병력들에게 퍼져 있는 급박한 상황이었습니다.
(5월 20일 투입된 3공수여단 김치년의 수기 중--광주역으로 가는 도중) 너무나도 다급하게 흘러나오는 목소리였다. 이미 최루탄도 떨어진 상황이며 진압봉으로의 대처도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약 20여 분이 지난 후 공포탄 및 실탄을 사용해도 좋다는 여단본부의 명령이 하달되었다. 단 유의할 점 몇 가지 사항이 전달되었다.
(1)실탄은 중대장 급 이상에게만 30발씩 지급할 것.
(2)돌진해 오는 차량의 저지용으로만 사용할 것.
(3)인명을 향하여 절대로 쏘지 말 것.
(4)공포용 이외의 용도에 사용할 시에는 엄중 처단한다.
★22:45 광주역에서 시위차량 돌진으로 3공수여만 12, 15대대 병사 2명 압사
--> 공수부대 자위권차원 응사 ★첫 발포★. 시민 4명 사망
자, 봅시다..
결론적으로 군경 7명이 시위차량 돌진으로 깔려 죽자,
그제서야 자위권 차원으로 응사하여 시민 4명 사살했습니다.
이게 사실이고 저는 사실만을 말하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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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1일
드디어 상황이 완전 역전되었습니다
이미 무기고를 습격해 장갑차와 총기류로 무장한 십수만의 시민이 1150명의 공수부대를 포위하는 상황
시간별로...
05:20분, 역전파출소, KBS가 연소 중에 있었고,
<<3공수 중사 전광철이 차에 깔려 사망>>했고, 군인 9명이 중상을 입었다.
08:00 도청 앞에는 수만명의 시위대가 시체 2구가 실린 손수레를 앞세우고 공수부대의 만행을 규탄했다.
(이 상황 아래 사진 첨부)
09시경 정도 되니 (공수부대원 김치년의 수기 중)
어제 선동방송을 하던 여자가 시위 군중 사이를 헤치면서 앞으로 나왔습니다.
자세히 보니 리어카를 끌고 앞으로 나왔는데, 나오면서
"죽은 사람이 내 동생인데 계엄군이 죽였다. 살인마 계엄군을 쫓아내야한다"는 취지로 선동을 했습니다.
군중들이 "와와" 소리를 지르며 호응한 뒤, 칼과 도끼 등을 든 사람들이 시위대의 전면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우리 병력 바로 앞에까지 와서 도끼로 부동자세로 서있는 병사들의 철모를 툭툭 치면서
"이 새끼를 이걸로 골을 빠개 버려?", 그리고 가위, 칼 등을 눈앞에 대고 "이 걸로 눈을 쑤셔버려?"
등의 위협을 해 우리 병사들은 완전히 겁에 질려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병력들은 꿈쩍도 않고 있었습니다. 방송을 하던 여자가 대화를 하자고 제의하여 62대대장이 앞으로 나가 여자와 대화를 조금 하고 있으니까 갑자기 군중 속에서 62대대장을 향해 돌이 날아와 62대대장이 대화를 하다 말고 들어와 대화가 중단되었습니다.
여자(이요원)가 방송을 통해 "남자가 칼을 뺐으면 무라도 잘라야지"라고 하며 다시 나오라고 했으나 62대대장이 안 나가겠다고 했습니다.
63대대장과 35대대장도 우리 지역 앞으로 나왔습니다.
그래서 63대대장 보고 "당신이 말을 잘 하니까 당신이 나가서 이야기 한 번 해보라"고 하자 "35대대장과 나는 경상도 사투리를 쓰니까 안 된다"
고 해서 할 수 없이 제가 나가서 대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12시경 : 도청앞에는 10만 군중이 몰려왔다. 시위군중이 탑승한 장갑차, 대형트럭 등 수십 대의 차량이 10만 군중 전명으로 나오더니 장갑차 한대가 11여단을 향해 돌진하였다. <<<병사 1명이 즉석에서 깔려죽었다.>>>
(당시 상황 -->
이어서 나머지 장갑차와 대형트럭으로 또 돌진했다. 동료의 무참한 죽음을 지켜본 병사들, 또 다시 그들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돌진해 오는 차량에 위협사격을 가하는 것은 자연적인 현상이다. 누구를 그런 상황에 투입해 놓는다 해도 생명에 위협을 느낄 것이고, 따라서 자위수단으로 총을 쏠 것이다. *그러나 병사들은 미국의 분석가들이 칭찬했듯이 끝까지 시민들에게 직접 총을 쏘지 않고 이 위험한 상황에 직면하면서도 사람을 조준하지 않고 차량에 대해 위협사격을 가했다.
安富雄씨는 영화를 보고 난 뒤 나에게 『그때 전남도청 앞에선 사격지시를 내린 사람도, 받은 사람도 없었다』고 되풀이해서 말했다.
돌진하는 시위대의 장갑차와 버스에 깔려 죽지 않기 위해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총을 쏘기 시작했다는 주장이다.
이는 검찰 조사로써 이미 입증되었다. ―실탄이 지급된 뒤 돌진하는 시위차량을 향해 사격 명령을 내렸는가요.
『사격명령을 내린 적은 절대 없습니다. 순전히 급박한 상황에서 부대원들이 조건반사적인 사격, 그러니까 돌진하는 시위대의 차량에
壓死 (압사)당할지 모른다는 심한 공포감으로 인해 실탄을 삽입하여 발사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 그렇다면 사격명령이 떨어진 시점은????? 바로 이 때문임. ↓
16:00시, 폭도들은 시내에서 무차별 사격을 가하고, 전남대 부속병원 12층 옥상에 KMG 2정을 설치하고 헬기, 도청 및 시가지를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 이 상황이 바로 조비오 신부가 헬기에서 기총사격 했다고 오인, 날조하는 상황임 -> http://www.ilbe.com/1296169985
17:20분, 3공수여단이 광주교도소에 도착하여 광주교도소 및 광주에서 담양으로 빠지는 도로를 차단하기 위한 배치를 시작했다. 3공수 15대대가 31사단 병력과 임무를 교대하고 있을 때, 시위대가 칼빈총을 가지고 고속버스 2대에 분승하여 돌진해오면서 기습시격을 가했다. 이에 공수부대원 1명이 중상을 입었다. 공수단은 시위대로부터 고속버스 2대와 트럭4대를 빼앗았고, 칼빈, M-1 등 4정의 총기를 탈취했다. 광주교도소에는 간첩 및 좌익수가 170명 있었고, 총 복역수가 2,700여명이었다. 시민군은 복면을 쓰고 APC를 앞세워 5차례의 공격을 시도했고, 여기에서 쌍방간에는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다. 여기에서 쌍방 피해가 가장 많이 발생했으며, 시민군 사망자만도 50여명에 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