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패중흥조 박송암스님의 생애와 범패사적 의의
해사스님(동국대 한국음악과 강사)
Ⅰ. 머리말
한국불교의례는 원융사상에 입각하여 종단을 초월하여 통합적으로 발전 전승되어 왔다. 의례의 종류는 그 성격에 따라 다양하게 시설될 수 있고 그중 영산재는 불보살님께 공양 올리는 불공의식 중 가장 큰 재의에 해당한다. 현재 영산재는 국가무형문화재 제50호로 지정되었으며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도 등재되어 있을 만큼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이것은 영산재 의식문이 독특하게 구성되어 있어서라기보다는 의식의 작법절차와 범패가 타 의식에 비해 장엄스럽게 전개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더욱 빛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영산재가 중요무형문화재로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게 한 데에는 박송암스님의 공로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영산재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현재 전승되고 있는 불교의례에 사용되는 경제범패의 경우 대부분 박송암스님을 중심으로 전승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비단 범패에 제한된 것이 아니라 각종 의례의 작법절차와 채비에 대하여 대부분 섭렵하고 후학들에게 전승하였으니 근대 불교의례의 중흥조라고 할 수 있다.
근대 한국불교의례의 중흥조라 할 수 있는 스님이 열반에 드신 지도 벌써 17년이란 세월이 지나가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스님의 수행과 사상에 관한 논문이 한편 없다는 것에 후학으로서 죄송함과 부끄러움을 감출수가 없었던 터에 스님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생긴 것 같다. 본고를 통해 스님의 범패세계와 수행자로서의 염불선을 하셨던 스님의 삶을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한국불교의 범패사적 의의를 고찰하고자 한다. 한국불교의 범패는 신라시대 진감선사로부터 전승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설이다. 이후 고려시대의 범패전승계보의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으며, 1713년에 편찬된 『산보범음집(刪補梵音集)』과 1748년에 편찬된 『범음종보』에서는 조선시대 범패승이 등장하며 범패승의 계보도 확인할 수 있다. 근대에 와서는 지난 2015년 6월 27일 국립무형유산원 얼쑤마루 대공연장에서 탄생 100주년 (故)박송암스님 공연이 있었을 뿐이다.2) 이와 같은 범패전승 과정에서 근대의 송암스님이 범패사적으로 어떠한 역할과 업적을 남겼는지 고찰하고자 한다.
본고를 통해 송암스님의 범패 및 의례에 대한 사상과 후학양성을 위한 노력들이 현재 범패를 공부하는 학인들에게는 어떠한 자세로 배워 익혀 행해야 하는지 살펴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 더불어 염불수행자에게는 송암스님의 정신과 사상을 통해 ‘염불자 삼매현전’ 할 수 있는 염불선의 한 방법인 범패를 재조명 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Ⅱ. 박송암스님의 가계와 범패학습과정
1. 가계(家系)와 행장
스님의 본명은 박희덕(朴喜德; 1915~2000년)이며, 1915년 10월 14일 서울 봉원사에서 출생 하였다. 스님의 가계를 살펴보면 조선말기의 문신이며 급진 개화사상가인 박영효(朴泳孝)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박영효는 김옥균, 서광범, 윤웅렬, 서재필 등과 함께 개화당의 중심인물로서 갑신정변을 일으킨 주인공이기도 하다. 또한 철종의 딸인 영혜옹주(永惠翁主)의 부마로 금릉위에 봉해졌고, 수신사로 일찍이 일본에 다녀오기도 한 박영효는 후일 이 일로 일본에 망명을 하게 된다. 바로 이 개화파의 거두 박영효가 근대 범패의 어장(魚丈)인 박송암스님의 조부가 된다. 갑신정변 이후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다시 귀국한 박영효는 자신의 아들을 남의 집에 맡긴 채 부자의 연을 끊게 된다.
박영효의 아들이며 송암스님의 부친이기도 한 박춘서는 아버지가 물러주신 몇 가지의 물건들만 간직한 채 남의집살이를 전전하며 성장한다. 그리고 열다섯 나던 해 황해도 장단의 심복사에 출가하여 운허(雲虛)라는 법명을 받는다. 이후 선진문물과 갑신정변 정신적 스승 이동인스님이 봉원사에 5년간 주석 하였고 사내 암자 용암사에도 머물렀다고 한다.3) 이러한 인연은 불연이 아닌가 싶다. 운허스님은 용암사 주지와 봉원사 주지를 역임하였고, 또한 봉원사 내의 사찰인 용암사에 1910전후 20년 가까이 주석 하였다. 이는 용암사에 보관된 축원문과 몇몇 탱화의 자료가 있고, 현재 서울시 문화재 자료 제 68호 1925년 제작된 용암사 감로왕도탱화 화기에 ‘化主比丘 雲虛興元’으로 확인된다.4) 아들인 박희덕(송암)스님도 출가하였으며, 손자인 박영대(고산)스님도 현재 선친의 대를 이어 봉원사에서 영산재와 범패의 맥을 전수 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송암스님의 이야기에 앞서 스님의 가계에 대한 이야기를 한 연유는 어쩌면 음산 하기까지 했던 개화기시절의 어두운 역사와 그 역사 속에 격동하던 한 집안의 역사가 알게 모르게 스며들어 스님의 정서와 삶의 방향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송암스님은 부친이 스님이었기에 큰 걱정 없이 성장했을 것이라는 대부분의 추측과는 달리 무척이나 고생을 하며 성장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시대의 사찰경제는 매우 어려운 시기로, 시주에 의지하여 사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어린 박희덕은 돈을 벌지 않으면 안 되는 환경이었고 열세 살 무렵 봉원사 입구에 간이이발소를 차리고 사중 스님들의 머리를 깎아주는 일을 한다. 부친인 운허스님이 봉원사에 적을 두고 있었던 터라 봉원사 스님들은 어린 박희덕에게 이발하기를 희망했고, 그 덕분에 생활도 안정되어 갔다.
이와 같이 절집에서 생활하던 스님은 한자공부를 자연스럽게 하게 되었으며, 그런 과정에 어느 날 문득 학교에 들어가 신학문을 공부하고 싶은 열망이 생겨난다. 그러나 그 시기 대부분의 스님들은 ‘신식공부하면 사람 버린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터라 어른들의 반대에 부딪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문에 강한 의지를 보인 스님은 연희보명학교를 입학하여 졸업하게 되고 이어 경성상업학교까지 진학하게 된다. 그러나 유난이 총명했던 스님은 2년여 만에 학교를 그만두고 만다. 상업부기 같은 회계법은 이미 다 떼어 버렸고 한문 같은 교육과정은 오히려 선생님이 그에게 묻는 실정이었다고 한다.5)
경성상업학교를 그만 둔 이후 같은 해 두 서군데 취직을 하여 보지만 일반인으로서의 삶은 스님과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부친인 운허스님 또한 송암스님이 일반인으로 살아가길 희망하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대물림이나 주변 환경의 강요에 의한 출가가 아니라, 짧은 사회 경험이지만 이를 통해 탐진치 삼독에 물들어 아등바등 살아가는 인생의 괴로움과 번뇌를 체득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알게 모르게 자연스럽게 훈습된 불향(佛香)이 결국 불법에 귀의하여 무명을 벗어버리고 진리를 체득코자 하는 열망으로 바뀌게 되어 1933년 11월 열아홉 되던 해 박운허 스님을 은사로 봉원사에서 출가하게 된다. 출가 후 스님은 승려로서의 자질과 수행을 위해 영진불교전문강원에서 대교과를 수료함으로서 불교사상과 경전을 두루 섭렵하고 본격적으로 수행에 임한다.
더불어 이월하(李月河)스님에게 범패를 전수받게 된다. 범패의 학습과정은 다음 항에서 다룰 예정이므로 이후의 대표적인 활동과 삶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68년 옥천범음회 결성 범패강의.
1973년 11월 5일 중요무형문화재 제50호 범패보유자 지정.
1987년 11월 7일 중요무형문화재 제50호 영산재 보유단체지정 영산재보존회 총재 추대.
1994년 9월 3일 영산재보존회부설 범음대학설립 초대학장 역임.
1994년 10월 10일 옥관문화훈장 수상.
1995년 범패, 영산(안채비소리-14과목) 체계적 강의.
1996년 범패 짓소리 15곡 강의.
2000년 2월 1일 서울 신촌 봉원사 운수각에서 새벽예불 후 세수 86세 법납 67세 입적.
이상과 같이 스님의 유년시절을 비롯한 가계와 행장을 살펴보았다. 본 내용들 중 필요한 부분들은 본고의 다른 장에서 다시 되짚어 보도록 할 것이다.
2. 범패학습과정과 활동의 전개
송암스님이 출가한 시기의 봉원사는 염불도량으로서 많은 스님들이 범패를 익히고 불찬(佛讚)과 동시에 수행의 한 방법으로 염불수행을 하는 도량이었다. 그중 근대의 범패 중흥조로 불리는 이월하스님이 주로 교육을 전담하였는데 송암스님도 월하스님에게 범패를 전수받게 된다.
중요무형문화재 제50호 영산재 보유자 김구해스님의 증언에 따르면 월하스님은 당대의 최고 어장으로 각양각처로 다니면서 소리를 배워 봉원사에서 후학양성에 힘을 쏟으셨다고 한다. 어른스님들의 말씀으론 “송암스님은 전생에도 스님 노릇을 했기 때문에 한 번 배우면 잊어버리지 않는다.”고 하며 남달리 범패에 두각을 나타냈던 송암스님을 칭찬하였다고 한다. 월하스님이 봉원사에서 활동하기 이전에는 봉원사에서 어산이 활발히 이루어졌던 것은 아니다. 그 당시에는 어산과 화원 등은 서진관 동불암이라 하여 진관사와 불암사에서 활발했으며, 개운사는 강(講)을 위주로, 서방정토 백련사, 봉원사는 새절이라 이름하며 각기 다른 수식어가 붙여졌다고 한다. 또한 봉원사 어산(魚山)에는 두 갈래가 있다. 그 중 한 갈래는 교태금성스님이 계셨는데 불화도 잘하시고 금강산 사대 본찰의 하나인 표은사 스님으로 봉원사에 오셔서 운파스님, 금해스님, 만봉스님, 화담스님, 기월스님에게 짓소리를 가르쳤다는 이야기를 만봉스님께 들었다고 한다. 또한 나머지 한 갈래는 월하스님의 맥으로 상주권공과 각배, 영산재, 짓소리 등을 가르쳤으며 송암스님은 바로 월하스님에게 배웠다고 한다.6)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송암스님은 범패를 본격적으로 학습하기 시작한다. 봉원사에서 태어나 봉원사에서 자란 터라 각종 재를 모시는 것을 등 너머로 보고 귀로 익혀진 거나 진배없었던 것이고 보면, 송암스님은 이미 이근(耳根)이 있어 범패가 익숙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범패를 전수받는 과정에서 오히려 스승을 재촉하여 하루에 두여 곡씩을 뗄 정도로 천재성을 보였다고 한다. 또한 송암스님은 월하(月河)스님의 제자7) 벽해스님 등, 여러 스승들을 섭렵하면서 범패를 전수받게 된다.
이런 과정들은 송암스님의 소리구성에 있어 두루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즉, 각양 각처에서 배워서 전수시켜준 월하스님의 소리는 물론하고 봉원사내의 또 다른 갈래의 소리인 금성스님류의 소리도 자연스럽게 듣고 섭렵했을 것으로 보이므로 소리의 다양성과 풍부한 소리구성을 습득했을 것이다.
송암스님이 본격적으로 범패승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계기는 범패를 배운지 2년여 정도 지난 스물한 살 무렵 이였다고 한다. 하루는 봉원사에서 재를 올리는데 스님 한분이 소리를 잘못하여 스승에게 꾸지람을 받게 되어 재에 동참하지 못하게 되었고, 그 자리를 스님이 대신 채우게 된다. 이 과정에서 범패를 완벽하게 소화해낸 스님을 보고 어장스님이 칭찬하며 범패스님으로 인정한 것이다. 이후 송암스님은 봉원사의 재는 물론이고 전국 각지의 사찰로부터 재를 요청받게 되었고, 그로인해 스님의 명성은 전국으로 알려지기 시작한다.
스님의 독특한 이력 중에 알려지지 않는 행적이 하나 있다. 바로 서른 살 무렵에 일 년 정도 관여했던 ‘극단 청춘극장’에서의 활동이다. ‘극단 청춘극장’은 당시의 신파극과 같은 연극을 올리곤 하였는데, 여기에서 송암스님은 주로 스님 배역을 도맡곤 하였다. 청춘극장시절의 송암스님의 인기는 웬만한 배우를 뺨 칠 정도였다고 전한다. 기생들이 인력거나 택시를 보내 다른 절에서 그를 찾는 것처럼 하고 납치를 도모했을 정도였다고 한다.8)
이상과 같이 여러 어장스님들의 소리를 섭렵하고 많은 재의(齋儀)를 통해 소리 또한 그 깊이를 더하여 완성되어 갔다. 더불어 포교의 일환으로 대중과 가까이 하고자 했던 스님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Ⅲ. 인간문화재로서의 활동과 후학양성
1. 문화재지정과 활동
각종 불교의례의 채비 및 작법, 그리고 범패와 작법무 등 체계적인 교육을 위하여 스님은 1969년 옥천범음회를 최초로 설립하여 교육을 전담하였다. 그것으로 인해 불교전통의례에 대한 스님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배우고자 하는 승려들이 종단과 지역을 떠나 스님이 거주하던 봉원사는 물론이며 강습소에 가득 모여들었다.
또한 1969년 5월 서울대 한만영교수가 봉원사를 중심으로 범패에 관해 조사하고 녹음하였다. 그 당시에는 조계종의 대부분의 사찰에서는 전통의식의 맥이 끊어져 거행되고 있지 않았던 시기였고9) 태고종의 사찰에서 그 맥을 이어오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봉원사가 그 중심 도량에 있었던 것이다. 더불어 1969년∼1971년에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실에서 민속자료조사 계획에 따라 홍윤식교수와 김천흥, 황혜성 교수가 조사한 것을 필두로 하여 범패의 존재와 가치가 세간의 관심을 받게 된다.
이를 계기로 송암스님을 비롯한 어장스님들과 봉원사 원로스님, 학계의 노력으로 1973년 11월 5일 김명호(운공스님; 1982년 11월 25일 열반), 박희덕(송암스님; 2000년 2월 1일 열반), 장태남(벽응스님; 2000년 3월 25일 열반) 등이 국가무형문화재 범패부분 보유자로 선정된다. 이와 같이 범패부분 개인종목이었던 것에서 1987년 11월 7일 국가무형문화재 제50호 ‘영산재’ 단체지정으로 변경되었고, 며칠 뒤인 1987년 11월 11일 장엄부분에 정순정(지광스님; 1996년 2월 21일 열반)과 작법부분에 이재호(일응스님; 2003년 5월 11일 열반)가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선정된다.
결과적으로 불교전통의식을 여법하게 거행하기 위해 의식에 필요한 범패와 작법무, 재가 베풀어질 도량의 장엄부분이 각기 지정되면서 법연(法筵)이 설연될 수 있는 구성을 갖추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구성은 비단 영산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며 전통의식이 남아 있는 모든 재의에 필요한 것으로 영산재로 묶어 놓은 것에는 아쉬움이 큰 대목이다.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스님의 활동은 더욱 활발해진다. 특히 1988년부터 매년 현충일에 영산재를 봉행하여 불보살님을 찬탄하고, 범패와 작법을 하나의 수행방법으로서 여러 스님들이 정진할 수 있는 선근을 심어주었으며, 영산재에 동참한 신도들에게는 신심을 증장시키고, 일반관람객에게는 불교의식의 아름다움과 장중함, 그리고 장엄함을 느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특히 다섯 분의 보유자스님 중에서 운공스님은 일찍 열반하였고, 일응스님은 전주에 머물고 있어 함께 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지만 벽응스님과는 열반에 드신 해 까지 모든 큰 재는 함께 호흡을 맞추며 찬탄가영과 수행을 함께하는 도반 이였다고 할 수 있다. 송암스님이 열반에 드시고 장례가 엄수되던 날 벽응스님은 “송암스님이 갔으니 나도 가야지” 하시며 눈물을 흘리던 모습이 논자에게는 아직도 생생하다. 열반하실 때도 두 스님은 같은 해 약 3개월 간격으로 입적하시게 된다.
더불어 각종 재의는 물론이고 국내외의 큰 행사에서 영산재를 봉행하였고 한국을 대표하는 불교문화로서 외국에서도 공연을 하여 세계 속에 한국불교를 홍보하고 포교하는데 일조하였다. 대표적인 활동은 다음과 같다.
1985년 9월 9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영산재 공연
1985년 베를린 음악회 공연(약 한달)
1988년∼1999년 6월 6일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영산재 봉행(신촌 봉원사)
1988년 8월 25일 서울 올림픽대회 성화 봉송기념 법회
(‘88서울올림픽 원만성취 영산재 전 바탕 시현)
1988년 태국 국왕초청 문화교류 영산재 시현
1993년 5월 10일 세계불교도협회 초청 영산재 시현
1994년 러시아 사할린 한인회 초청 영산재 봉행 ‘강제징용희생자 위령제’
1996년 8월 7일 캐나다 토론토 시티TV 방송초청 영산재시연(1주일)
1996년 9월 15일 예술의전당 영산재 공연
1997년 9월 8일 대만 타이페이 세계불교 영산재시연(대만 국립문화관)
1997년 9월 21일 한국문화예술원(독일 함부르크) 장소: 파브릭 무적할레
1999년 8월 7일∼16일 스페인대사관 초청 99스페인민족축제
불교음악 및 무용. 음악출연(스페인 오렌세이)
그 외 유럽, 미주, 동남아 불교음악 및 무용 순회공연
이상과 같이 인간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전통의식의 작법과 범패교육에 더욱 매진하였으며 해외 여러 곳에서 영산재 및 의식을 집전, 시현하면서 한국불교를 알리고 불교홍포에 힘을 다 하였다.
2. 후학양성
송암스님이 생전에 활동 중 가장 빛을 발하는 것은 역시 후학양성에 매진하였다는 것이다. 대부분 스님들은 범패를 배워 의식에 사용하면서 더 장엄스럽고 엄중하게 의식을 봉행하고 더불어 염불삼매에 들어 깨달음을 얻고자 수행의 일환으로 사용한다. 그러나 스님은 거기에 하나 더 붙여 후학들에게 전통의식을 가르쳐 여법하게 의식집전을 할 수 있도록 평생 나눔을 베풀었다. 그 시발점은 1969년 옥천범음회를 최초로 설립하면서이다. 옥천범음회는 이월하 스님의 뜻을 받들어 안덕암, 김운파, 김운공, 조일파, 김화담, 장벽응, 박송암스님 등이 현 불교 의식의 쇠퇴함을 안타깝게 여겨 설립되었다. 대부분의 교육은 송암스님이 주도하였으며 상주권공재와 각배재, 영산재를 주 교육과정으로 하고 그때그때 필요한 의식이나 학인들이 궁금해 하는 의식이 있으면 강의를 통해 일러 주었다. 이런 교육과정은 한해도 거르지 않고 쭉 이어져 왔으며, 1994년 9월 3일 국가무형문화재 제50호 영산재보존회 부설 ‘옥천범음대학’으로 명칭이 변경되어 3년 교육과정으로 교육은 계속되어 왔다.
스님은 옥천범음대학의 초대 학장으로 범패의 보존과 계승을 위해 팔순의 나이를 잊고 직접 교육하였다. 특히 1995년에는 안채비소리 시다림과 다비작법을 체계적 강의하였고, 1996년 범패 짓소리 14곡을 강의하여 사라져가는 짓소리를 전승하는데 힘을 쏟는다. 그 외 신중대례, 전시식, 종사영반, 상용영반, 구명시식, 관음시식, 불상점안의식, 가사점안, 가사이운, 나한점안, 조탑점안, 수륙재, 예수재 등 중요한 의식을 전반적으로 교육하였다. 새로 배운 학인들을 비롯해 세월과 함께 이미 중년이 넘어버린 제자들에게도 호된 질책을 해가면서 교육하였으며 틀린 부분을 하나하나 꼼꼼히 잡아내어 상세히 일러 주었다.
특히 종단과 지역을 떠나 염불공부를 하고자 하는 모든 스님들을 지도하였으며, 속인이라고 할지라도 불교의식과 범패 작법무를 배우고자 한다면 강의를 들을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간혹 의식은 스님들에게만 전수해야 한다고 하는 시각도 있었으나, 스님은 불교의 문화를 알리는 것도 큰 포교라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종단과 종단의 벽을 허물고 부처님 제자라는 큰 틀에서 교육하였으며 승과 속을 하나로 보았던 스님은 원융과 화합을 몸소 실천하셨음을 알 수 있다.
스님에게 수학한 제자는 천여 명이 넘으며 그 중 당대에 대표적인 제자는 김구해, 마일운, 이동주, 한동희, (故)오송강, 이기봉, 박고산, 김능화, 조인각, 김효성, 최원허, 김법현, 조현성 스님 등을 비롯하여 많은 인재를 배출해 냈다. 영산재보존회의 ‘계승과 전승’ 도표10)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으므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상과 같이 스님의 제자들은 많이 배출되었다. 위의 도표는 전수생 이상 등록된 명단이기 때문에 등록되지 않는 학인들도 많을 뿐만 아니라, 이미 고인이 된 여러 스님들도 명단에서 빠진 상태이다. 그러므로 스님에게 수학한 제자는 훨씬 많으며 교육을 통해 후학양성에 매진하였음을 알 수 있다.
Ⅳ. 범패소리미학과 범패사적 의의
본 항에서는 송암스님이 창하던 범패를 음악적 선율분석을 통해 그 가치를 조명하기보다는 스님이 범패를 하실 때의 자세와 마음가짐, 즉 사상적인 면에서 그 특징들을 고찰하고 범패사적 의의를 살펴보고자 한다.
1. 음악적인 특성
모든 의례가 그렇듯이 최상의 절차와 방법을 수행함으로써 종교의 존엄함을 표현하고 신심을 고취시킴은 물론 서원을 발하게 하는 특징을 지닌다. 한국불교의례에 있어 범패의 역할도 이와 같다. 범음은 불보살의 청정하고 미묘한 음성을 일컫는다. 이것은 여래가 증득한 32상의 하나인 범음상(梵音相)을 말하는 것으로, 여래의 범음은 시방세계에 두루 들리고 그 음성을 듣는 모든 이는 도과(道果)를 얻는다고 한다. 범음과 반대되는 중생들의 소리는 45성11)으로, 그 소리는 선근이 없고 선지지(善知識)이 없으므로 마음이 악한 중생들이 사바세계에 충만하고, 그 중생들은 일체지(一切智)인 살바야(薩婆若)를 포기하고 부처님이 계시지 않는 국토에 처하여서 보시ㆍ지계ㆍ선정이 없으며, 선업이 없고 모든 불선법(不善法)을 쌓는다고 한다.12)
중생이 성불을 위해 수행하듯 중생성이 범음을 성취하기 위한 방법에 범패가 있다. 범패는 불보살에게 불찬(佛讚)의 한 방법으로 음성공양을 올리는 것이 주가 되겠으나, 그 형태는 의식의장엄뿐만 아니라 수행의 일환으로도 주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즉 범패를 통해 염불선에 들 수 있기 때문이며, 염불선을 통해 삼매에 들어 반야지혜를 증득하게 된다면 범패 또한 깨달음으로 향해 가는 수행의 길이기 때문이다.
범패는 범토(梵土), 즉 인도 노래[歌唄]라는 뜻으로 일체의 가패를 지칭하며, 범음은 범토의 음악을 말한다. 즉, ‘범’은 범음, 인도 소리이고, ‘패’는 범어 BHASA의 음역으로 패익, 파사라고 한다. ‘패’의 뜻은 찬탄으로 독경찬영(讀經讚詠)하는 방법에 있어 소리를 길게 지어 게송을 읊는 가영(歌詠)을 말한다.
기존 범패기원에 관한 연구를 살펴보면 영산회상설13)과 묘음보살 음악공양설14), 오(吳)나라 지겸설15), 중국의 조식설16), 백제 미마지설17) 등이다. 또한 실제로 범패가 전승된 것은 하동 옥천사(玉泉寺; 지금의 쌍계사)에서 진감선사 혜소(慧昭, 774∼850)에 의해서이다. 진감선사는 804년(애장왕 5년)에 당나라에 가서 당풍의 범패를 도입하여 830년(흥덕왕 5년)에 귀국한 뒤, 하동 옥천사에서 많은 제자들에게 범패를 가르쳤다고 한다.18) 불교가 국교인 고려시대는 범패가 상당히 성행하였으리라고 짐작되지만 범패승에 대한 계보는 찾아볼 수 없다. 조선시대에는 18세기에 간행된 『산보범음집(刪補梵音集)』(1713년)에는 반운(伴雲), 응휘(應輝), 지선(智禪), 진일(眞一) 등의 범패승이 등장하며, 대휘화상이 쓴 『범음종보』(1748년) 『입규(立規)』19)에서 조선초기부터 그 시기까지의 범패승의 계보를 확인할 수 있다. 이외 범해각안(梵海覺岸)이 우리나라 역대 고승들의 전기를 모아 엮은 『동사열전(東師列傳)』 (1894년)에는 당시 범패로 유명했던 자행(慈行)선사가 등장한다. 이후 범패승의 계보는 법현스님이 저술한 『한국의 불교음악』20)에서 근대 송암스님의 제자까지 상세히 정리하고 있다.
이와 같이 전승된 범패가 역사와 맞물러 전승되거나 축소되는 과정을 거치게 되었으며, 특히 1911년 일제가 한국불교를 탄압하기 위해 제정한 법률인 사찰령시행규칙(寺刹令施行規則)에의해 불교 전통의식은 더더욱 계승에 어려움을 겪게 되어 많은 의식이 사장되는 결과를 초래 했다.
이런 상황이 밑바탕이 되는 과정에서 월하스님과 벽해스님 등의 어장스님에게 전통불교의례를 수학하여 꽃피운 분이 송암스님이다. 송암스님이 평소 의례집전 시 범패를 통해 실현하고자 하였던 사상과 음악적 특징을 살펴보면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소리를 지을 때 그 의문(儀文)의 뜻을 염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즉, 범패의 가사가 되는 의식문을 먼저 해석하고21) 그 의미를 실어서 정성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곧 교리를 제대로 공부하고 그것이 바탕이 되어야 제대로 범패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둘째, 소리를 함에 있어 오음 즉, 정직(正直)ㆍ화아(和雅)ㆍ청철(淸徹)ㆍ심만(深滿)ㆍ주변원문(周邊遠聞)을 특히 강조하였다. 이 오음은 화엄경탐현기』에서 “『사나경』에서 설한 것과 같으니, 그 음성에 다섯 가지의 청정함이 있으면 곧 범성이라고 이름 한다. 어떤 것을 다섯 가지라고 하는가 하면 첫째, 그 소리가 바르고 곧음이요[正直] 둘째, 그 소리가 화합하여 아름답고[和雅] 셋째, 그 소리가 맑으며[淸徹] 넷째, 그 소리가 깊고 원만함이요[深滿] 다섯째, 두루 하여 멀리까지 들림[周邊遠聞]이다. 이 다섯 가지 뜻을 갖추어야 곧 범음이라고 이름 한다고 한다. 또한 범(梵)이라는 것은 원결(圓潔)이라는 말이요, 또 범천이 널리 응하는 것과 같은 까닭에 그렇게 이름 하였다. 성(聲)이라는 것은 곧 집수(執受)의 소리이고, 음(音)이라는 것은 저 소리에 전표(詮表)의 운(韻)이 있음을 밝힌 것이다. 이런 까닭에 그렇게 이름 하였다.”22)고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이 경전을 바탕으로 범음의 성격을 파악하고 그 범주에서 염불을 하고자 하였던 스님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셋째, 고성염불을 추구하였다. 고성염불은 아침과 저녁에 하는 송주(誦呪)나 장엄염불(莊嚴念佛)에서 ‘고성염불십종공덕’23)이라 하여 큰 소리로 염불하면 열 가지 얻을 수 있는 공덕을 찬하고 있다. 스님은 강의를 할 때도 누차 고성염불을 강요하였는데, 십종공덕의 의미에다 한 가지 의미를 더 붙였다. 즉, 실제로 목을 트이게끔 하는 방법으로도 고성염불이 좋다는 것이다. 이것은 발성과 관계하여 한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부처님의 음성인 범음성은 그 성격과 특징에 따라 불음(佛音)의 용(用)24)과 체(體)25). 덕(德)26), 통융(通融) 등으로 분류하는데, 송암스님의 범패도 이와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첫째로 살펴보았던 의문(儀文)의 뜻을 염해야 함을 강조한 것은 결국 교의를 말한 것으로 용(用)에 해당되고, 둘째로 살펴본 정직ㆍ화아ㆍ청철ㆍ심만ㆍ주변원문인 오음을 소리의 체(體)로 볼 수 있으며, 셋째로 살펴본 고성염불은 덕(德)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으로 그 특징이 뚜렷하다.
또한 스님의 소리특징을 살펴보면 스님의 소리는 타고난 맑고 청아한 음색에 청이 높았기 때문에 다른 범패승들에 비해 그 소리가 아름답고 자유자재로 구사하여 감동을 주었다. 여기에 적절히 녹아난 아름성은 소리를 더 윤택하게 한다. 특히 스님의 소리는 맑고 깨끗한 청음(淸音)과 부드러운 유연음(柔軟音), 단전으로부터 소리를 발하여 우레가 울리는 것과 같은 심원성(深遠聲), 그 소리는 청아하여 가릉빈가와 같다고 하는 최호성(最好聲), 짓는 소리 가운데도 글자를 명확하게 하여 그 교의를 알게 하는 역료성(易了聲) 등 이 모두를 조화롭게 아우르는 특징을 지닌다. 이와 같은 소리의 특성은 불음의 덕을 기준으로 한 팔음에 해당하는 소리로 스님의 수행이 묻어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송암스님은 염불을 할 때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하는지 소신과 가치관이 뚜렷하였고, 후학들에게도 전하고자 하였던 범음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었으며 신심과 수행력을 엿볼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다.
2. 전통의 개념과 독창성 및 창조적 수용
범패의 종류도 여러 가지이며 소리형태도 지역마다 차별이 있고 창자마다 다른 음색과 다는 성량, 다른 선율 등 지역적 특색과 개인적 성향, 수행정도 등에 따라 다양한 소리가 전승되고 있다. 현재 범패는 크게 경제, 완제, 영제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중 경제 어산의 거목이 송암스님인 것이다.
앞서 설명하였듯이 스님은 봉원사에서 월하스님과 벽해스님을 통해 범패를 배웠기 때문에 초기에는 스승들의 소리와 차이가 없이 그대로 섭렵하였다. 당시만 해도 사찰의 엄한 규율은 스승이 일러 주는 대로 그대로 받아드리고 배우는 것이 통례이기도 하겠으며, 어른스님들의 그늘 밑이기 때문에 조금 다른 소리를 낸다거나 튀는 행동들은 바로 엄한 꾸중을 듣기 때문이기도 하다. 바로 이런 점들이 전통이 계승될 수 있는 환경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오래 학습하고 소리가 어느 정도 무르익게 되면 자신의 음색이나 성향 등이 자연스럽게 묻어나며 본인만의 독특한 음성을 형성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소리가 변했다거나 바뀌게 되었다고 하는가 하면, 본인의 소리를 낸다고들 한다. 스님도 마찬가지였다. 일부 스님들께는 소리를 달리 한다는 평도 받았지만 그것은 스님의 소리를 완성하는데 별다른 장애가 될 수 없었던 것 같다. 스님은 큰 틀에서 소리의 변화를 주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만이 지니고 있는 음악적 재능을 충분히 녹아내려 아름답고 깊이 있는 스님만의 소리로 완성하였던 것이다. 이런 상황을 처음엔 불편한 시선으로 보았던 어른스님들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소리의 깊이를 인정하게 되고, 그 소리를 배우고자 하는 후학들이 생겨나는 것으로 연결된다.
스님은 범패를 배운지 35년 만인 1968년 옥천범음회를 결성하여 범패강의를 시작하게 된다. 이때는 상주권공재와 각배재, 영산재를 중심으로 강의를 하였으며, 1973년 11월 5일 중요무형문화재 제50호 범패 보유자로 지정된 후론 더 더욱 후학지도에 매진하게 되고 입적하신 2000년까지 단 한해, 단 하루도 쉼 없이 정진하고 지도하였다.
논자도 스님에게 배운 마지막 제자로 1998년과 1999년도에 범패전수를 받았는데, 스님은 수업이 없을시 책상에 앉아있을 때나 걸을 때, 언제든 범패를 계속 하고 있었다. 또한 고산스님의 증언에 따르면 “쉬실 때도 늘 의식문을 손에서 내려놓으신 적이 없으시며 소리를 하지 않으신적이 없다”27)고 하니 그야말로 행주좌와 어묵동정 염불선을 몸소 실천수행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스님의 책상에는 의식문과 더불어 옥편이 항상 펴져 있었다. 이것은 한자의 사성점을 확인하기 위한 것으로 늘 배운 바를 확인하고, 범패의 체계적 전승을 위해 공부하며 연구한 학승(學僧)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스님은 그동안 배워 가르쳤던 내용 중 전승이 잘못되었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과감히 잘못됐다고 인정하고 그것을 바로 잡고자 하였다. 그중 하나가 고하자(高下字)에 관한 것이다. 의문(儀文)이 보통 한자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소리를 지을 때도 한자의 사성(四聲)에 따라 그 소리를 달리 내어야 한다. 그동안 범패속의 사성은 거성, 입성, 상성인 높은 자는 ‘높은 자’로 불리하였으며, 낮은 자인 평성은 ‘낮은 자’로 구분하여 사성을 ‘높은 자’와 ‘낮은 자’ 이성으로 분류하여 전승되어 왔고 스님도 그렇게 교육해 왔었다. 그 과정에서 “내가 우리 사장(師匠)님께 배울때는 이 자(字)는 낮은 자로 배웠는데 옥편을 찾아보니 높은 자란 말이야. 그러니 소리를 지을때도 이렇게[범패 시연] 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범패 시연] 해야 해”라고 하면서 소리를 바로 잡고 수정해 주었다. 이런 점은 기존의 전승되어 온 선율과 차이가 있어 보이지만 성음의 종류별로 살펴보면 큰 차이는 나지 않는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초기의 소리는 어장스님들께 배운 데로 구사하였으며, 중기에는 스님의 독창성이 가미가 되어 선율의 아름다움을 극대화 하였다. 그리고 후기에는 체계적인 정립을 위하여 이론에 맞추어 고증하고자 하였다. 즉, 이치에 맞도록 기존의 범패선율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새롭게 재구성하여 가급적 제대로 된 소리를 후학들에게 전하고자 한 스님의 소신과 사상을 그대로 반영하였다고 볼 수 있다.
3. 범패사적 의의
1) 대표적인 불교의례의 작법과 범패전승
불교의례는 그 성격과 구성에 따라 많은 의례문이 존재한다. 현행 많이 사용되고 있는 의례문은 안진호스님이 1931년에 편집한 『석문의범』이다. 본 의식문은 많은 의식문을 엮어놓은 것으로 의식문의 종류는 다양하나, 반면 많은 양을 수록하기 위하여 반복된 진언 등을 생략하거나 약례로 수록된 부분들이 있어 의례를 잘 알지 못하는 승려들에게는 수록된 내용만 가지고 의례를 집전하는 데는 어려움이 따른다. 그러므로 전문적으로 의례를 배워야만 가능한 구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
송암스님은 이와 같이 의식문에 수록된 대부분의 의식을 체계적으로 교육하고 작법절차는 물론 범패와 작법무까지 꼼꼼히 일러 주어 현행 의식집전에 있어 여법하게 실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런 행보는 그나마 남아있는 의식의 절차들을 계승, 발전, 전승하는데 큰 주춧돌 역할을 하였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둘 수 있다.
스님이 교육하여 전승한 의식의 종류를 살펴보면 영산재, 예수재, 수륙재, 상주권공재, 각배재, 불상점안의식, 나한점안, 시왕점안, 천왕점안, 조탑점안, 가사점안, 조전점안, 식당작법, 반야심경, 소심경, 순당의식, 송주의식, 간당의식, 시련의식, 대령의식, 관욕의식, 다비작법, 수계작법, 관음시식, 화엄시식, 구병시식, 전시식, 종사영반, 상용영반, 시다림의식, 삼보통청, 지장청, 관음예문, 신중대례청, 신중작법, 괘불이운, 설주이운, 경함이운, 가사이운, 현왕청 등 등 그 종류가 다양하며, 각종 장엄물과 번 규식 등 의식집전에 필요한 참으로 많은 채비를 교육하여 전승토록 하였다.
더불어 범패종류인 안채비와 바깥채비를 전승하였다. 특히 사라져가는 짓소리를 일부 복원하여 체계적으로 교육하였다는 것이 큰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스님을 통해 현재 전승되고 있는 짓소리는 15곡이며, 반짓소리는 ‘봉청’과 ‘옹호게’ 2곡이 함께 전승되고 있다. 짓소리 종류와 가사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일반적으로 송암스님 하면 국가무형문화재 제50호 ‘영산재’를 계승하고 전승한 스님으로만 알고 있다. 하지만 처음 범패기능 보유자로 지정되었듯이 영산재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불교의례 중에 범패가 쓰이는 모든 의식을 두루 통달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현재 전승되고 있는 경제 범패는 송암스님을 통해 대부분 전승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와 같은 내용은 스님에게 배운 후학들이 현재 각 사암에서 각각의 의식을 거행하고 전승하는데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참고로 현재 무형문화재나 지방문화재에 등록된 불교의례 중 상당수의 보유자가 스님의 제자이기 때문이다. 국가무형문화재 제126호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동희스님이 중심이 되어 설행되고 있으며,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43호 ‘경제어산(京制魚山)’의 동주원명스님, 인천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0호 범패, 바라춤, 나비춤의 보유자인 능화스님과 일초스님, 인천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5호 인천수륙재 ‘수륙재’의 일초스님, 충청남도 지정문화재 제40호 ‘내포영산대제’의 보명스님, 제주도무형문화재 제15호 ‘제주도불교의식’의 성천스님 모두가 송암스님에게 수학한 스님이거나 그의 제자스님들에게 범패를 배운 스님들이다.
그 밖에 요즘 조계종에서 예수재와 수륙재 및 복장의식 등을 문화재로 등록하기 위해 힘을 쏟고 있는데, 이것도 송암스님이 일러주신 것 이상의 것이 없을 정도이다. 그러므로 현재 경산제범패와 작법무는 대부분 송암스님이 교육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곧 스님이 방대한 양의 전통의식이 맥이 끈기지 않도록 교량역할을 했음을 증명한 것이며, 스님덕분으로 의식이 살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2) 범패성음의 종류와 규명
현재 일반적으로 범패의 구분은 크게 안채비와 겉채비로 나누며 겉채비는 다시 홑소리와 짓소리, 반짓소리, 그 외에 화청으로 나눌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송암스님은 이 모든 소리를 짓는데 있어 기본으로 사성과 오음을 바탕에 두어야 함을 늘 강조하였다. 안채비는 보통 법주가 거행하는 소리로 그윽하고 점잖으며 사성(四聲)에 입각하여 그 소리를 짓는다. 사성은 거성(去聲), 상성(上聲), 입성(入聲), 평성(平聲)을 말하며 상성은 청이원(淸而遠: 가장 높이 굽이치는 소리), 입성은 직이촉(直而促: 몹시에 빠르게 빨리 닫는 소리), 상성은 려이거(厲而擧): 처음 낮게 차차 높아져서 가장 높게 그치는 소리), 평성은 애이안(哀而安: 가장 낮은 소리로 편안한 소리)이라 하여 각기 다른 특징을 갖는다.
또한 모두 소리는 정직ㆍ화아ㆍ청철ㆍ심만ㆍ주변원문 등 오음을 바탕으로 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 내용은 범음의 특징과 진여로서의 체에 대한 설명이다. 이 중 정직ㆍ화아ㆍ청철ㆍ심만ㆍ주변원문을 현대 음악적 용어로 바꾸어 보면, 첫째는 음정, 둘째는 화음, 셋째는 음색, 넷째는 심도, 다섯째는 발성[音量]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29)
그리고 소리의 선율과 쓰임에 따라 성음명을 규명하였는데, 먼저 안채비의 성음내용을 살펴보면 유치성(由致聲), 착어성(着語聲), 편게성(片偈聲), 게탁성(偈鐸聲), 소성(疏聲)으로 규명하였다. 첫째, 유치성은 청문성(請文聲)이라고도 하며 각 단에 유치를 창할 때 하는 소리형태를 말하며 홑소리에서도 사용되는 성음이다. 둘째, 착어성은 소리에 무게를 실어 장중함과 엄숙함을 느끼게 하는 성음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착어’라 하여 청해 모신 영가에게 법문을 설할 때의 소리형태를 말하며 그 외 ‘관욕’과 ‘시식’, ‘영반’ 등에서도 사용된다. 셋째, 편게성은 높은 자는 끝을 드는 듯이 처리하고 낮은 자는 낮게 놓는 식의 일정한 법칙에 의해 조직적으로 운용된다. 즉, ‘편게성’에서의 ‘편’은 절편의 ‘편’과 비유하여 절편을 썰어 놓은 듯이 소리를 짓는다고도 표현한다. 대부분 관욕의식에서 많이 사용되며 ‘전시식’ 에서도 사용한다. 넷째, 소성은 각 단에서 행해지는 ‘소’를 읽는 방법의 소리형태이다. 다섯째, 개탁성은 시간이 촉박하여 짧은 소리로 충충 읽어가다가 짓는 부분이나 독특한 형태의 소리만 한 번씩 짓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이 송암스님은 안채비의 소리를 5종으로 설명하였으나 의례연구자들은 여기에 여러가지 ‘성’을 더 분류하였다. 즉 안채비를 4성(유치성, 착어성, 편게성, 게탁성)으로 보는 견해30)와 6성(유치성, 착어성, 편게성, 게탁성, 소성, 청사성)으로 보는 견해31), 7성(유치성, 청사성, 착어성, 편게성, 축원성, 게탁성, 소성)으로 보는 견해32) 등 다양하다.
또한 7성에 이어 점안의식에서만 사용되는 ‘점안성’을 추가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현상은 성음의 연구가 활발할수록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본다. 예를 들어 『식당작법』에서 중수와 당좌의 독특한 소리에 맞추어 타주무가 거행되는데 이때의 소리도 ‘OO성’으로 구분되어야 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다양한 의견들을 수렴하여 소리의 구성과 성격에 알맞게 안채비를 비롯한 홑소리 등의 범패성 구별을 재정립하여야 할 것으로 본다.33)
바깥채비는 크게 홑소리와 짓소리, 반짓소리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나 성음의 구분은 명확하게 구역이 정해진 것이 아니라 같은 선율이 홑소리에도 있으며 짓소리에도 있기 때문에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 다만 의식구성에 있어 게송의 제목에 ‘성’을 붙여 구분하는 경우와 선율에 명명하는 경우, 독특한 소리에 ‘~소리’를 붙이는 경우가 있다. 이것을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게송과 게문의 제목에 ‘성’을 붙이는 경우는 대부분 권공의식에서 많이 사용한다. 대부분의 권공의식은 그 구성이 동일하다. 즉, 삼보통청을 비롯해 관음청, 지장청, 약사청, 미륵청, 나한청, 독성청, 산신청, 용왕청 등등 많다. 이 권공의식의 구성을 큰 틀에서 구분해보면 ‘거불-보소청진언-유치-청사-가영-헌좌게-다게-향수나열-사다라니-보공양진언-탄백’으로 구성되었는데, 이때 거불성, 유치성, 청사성, 가영성, 고아게성, 헌좌게성, 다게성, 회향성, 탄백성 등으로 명칭을 붙이는 방법이다. 이와 같은 방법은 안채비의 ‘착어성’과 ‘소성’도 이 분류법에 적용된다고 할 수 있다. 그 외 송자성(頌子聲) 등이 있다.
둘째, 선율에 따른 성음의 분류법으로 여기에는 ‘OO성’과 ‘OO소리’라는 명칭이 붙는다. 먼저 ‘OO성’에는 오공양성(五供養聲), 사구성(四句聲), 상사구성(上四句聲), 하사구성(下四句聲), 개계성(開啓聲), 원아게성(願我偈聲), 다비성(茶毘聲), 자웅성(雌雄聲), 허덜품, 십자성, 칭량성호 오여래성(五如來聲) 변성, 겹성, 등이 있다. 이중 허덜품은 홑소리 허덜품과 짓소리 허덜품으로 나뉘며 홑소리 허덜품은 지심신례, 보장취, 창혼 등의 서두에 쓰이고, 짓소리 허덜품은 단정례와 보례허덜품 등이 있다. 또한 ‘OO소리’에는 새 쫓는 소리, 굴러내려 잡는 소리, 잦는 소리, 들어주는 소리, 반 들어주는 소리, 짓는 소리, 반짓는 소리, 쓰는 소리(거더치는 소리) 등이 있다.
셋째, 소리를 내는 방법에 따른 분류로 직촉(直觸), 심만(深滿), 평성(平聲), 애원성(哀願聲), 아름성(아롱성) 등이 이에 포함된다. 이중 직촉은 한 글자를 발음하고 다음 자로 넘어갈 때 호흡을 멈추지 않고 빨리 이어나가는 것을 말하며 주로 유치성에서 많이 사용된다. 심만은 대부분 높은 소리를 지을 때 깊이 길게 내는 소리를 말하며, 평성은 짓는 소리가 길지 않게 평이하게 내는 소리를 말한다. 또한 애원성은 간절한 소리로 ‘유치’와 ‘축원’을 거행할 때 주로 쓰이며, 아름성은 바이브레이션에 해당되는 소리를 말한다.
이상과 같이 전승되고 있는 범패성음의 명칭을 나름 명명하였고 이를 토대로 현재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다만 이와 같은 분류법은 의식문 구성의 분류에 따라 제목에 ‘OO성’이라도 붙인 것과, 독특한 선율에 따른 명칭, 또한 ‘성’과 ‘소리’의 명확한 구분 등은 앞으로 체계적으로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할 부분이라 본다. 또한 성음의 명칭을 세분화하여 명명을 해야 한다는 시각과 송암스님이 명명한 것 이외는 새로운 명칭을 난발해서는 안 된다는 시각도 있으므로 어장스님을 비롯한 의식전문 스님들을 포함한 의식연구자들의 심도 있는 논의가 있어 이 부분은 앞으로 해결해 나아가야 할 것으로 보인다.
Ⅴ. 맺음말
출가자의 수행방법은 기본적으로 네 종류가 있다. 계율ㆍ참선ㆍ염불ㆍ경전 등을 말하며 이는 보편적으로 율원(律院), 선원(禪院), 염불원(念佛院), 강원(講院)에서 교육과 수행이 이루어진다. 이 과정을 모두 갖추고 있는 곳을 총림(叢林)이라고 하며 결국 총림은 대중이 여법하게 정진하는 종합수행도량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중 염불 즉, 의례는 나머지 셋을 다 반영하고 있다. 왜냐하면 의식문은 불교교리와 사상이 반영되어 완성된 것이며[경전], 경전의 내용이 의식으로 편입되어 실천에 옮기는 행법이므로 청규로서의 역할이 내재되어 있고[계율], 염불을 통해 삼매에 들 수 있기에 염불선[참선]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수승한 염불의 방법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그 중 범패는 하나의 글자 내지는 단어를 길게 끌어가며 굴곡을 이루고[장인굴곡(長引屈曲)] 깊고 그윽하고 맑고 부드럽게 소리[유현청화(幽玄淸和)]를 냄으로써 일즉다(一卽多)의 차원에서 그 뜻을 깊이 세길 수 있고, 동시에 선율이 주는 안정감과 소리를 길게 내기위해 완성된 호흡법, 염불자체가 갖는 의미 등이 수행의 한 방법으로 삼매에 들 수 있는 큰 특징을 지녔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범패수행을 평생 하신 분이 송암스님 이시다. 또한 혼자만의 재주나 능력으로 삼지 않고 후학들에게 몸소 보이고 교육을 통해 전승하였다. 불제자로서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함이 예경의식이며, 적어도 불공의식은 여법하게 거행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도리라는 것이 스님의 소신이다.
그러나 작금의 현실은 안타깝기만 하다. 물론 스님의 사상을 이어 받아 열심히 수행하는 스님들이 많지만, 일부는 일반 사십구재나 천도재에도 영산재니 수륙재니 현수막을 내걸고, 각종 의식의 차서를 무시하고 견기이작(見機而作)이라는 허울아래 의식을 행한다. 또한 보여주기 식이나 과시형의 의식진행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또한 불교의례를 여법히 수행하고자 했던 전통의식이 어느 순간 문화재 등록을 목적으로 이용된 것은 아닌지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고 본다. 예전에 범패수행을 하였던 분들은 의례를 의례답게 여법하게 거행하고자한 것이 근본이 되었지만 지금은 일부 스님과 사찰에서는 문화재 등록만을 목적으로 하는 형태가 일부 있으며, 의례문 또한 요즘 시대에 맞추어 짧게 편집한 의식문을 새로 만들어 제시하는 경우도 있다. 즉, 불교학자나 의례전문가들이 여러 날 모여 의논하고 논의된 바 없는 의식문이 등장하고, 문화재에 등록된 의례나 앞으로 지정하고자 하는 의례에 관한 평가도 대부분 민속학자들이 주도하고 있는 현실에 안타까움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더불어 영산재가 크니, 수륙재가 크니 하는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논쟁은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 연유는 각기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즉, 영산재는 상단불공의식을 주 목적으로 하는 것이며, 수륙재는 고혼천도를 그 목적으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각기 다른 성격의 의식 등을 가지고 동 선상에서 비교한다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다만 혹자는 영산재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다음 수륙재를 등록할 당시 영산재보존회에서 반대하는 이유를 납득할 수 없다고 했는데 의례문의 차이로 인정한다면 앞으로 모든 불교의식은 문화재로 마땅히 지정되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각배재, 상주권공재, 삼보통청, 예수재, 점안의식, 복장의식, 수계의식, 다비의식, 각종 청문과 시식 등등 수많은 의례문이 이에 속한다. 그러므로 영산재보존회에서 차이점이 없다고 한 것은 기능적인 수행에 있어 작법의 종류를 문제 삼았던 것으로 안다. 즉 영산재에서 사용되는 범패와 작법무 중 몇 종의 것이 수륙재를 비롯한 예수재 등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부분에 오해의 소지가 없기를 바라면서 되짚어 보았다.
그리고 본고에서 살펴보았듯이 불음(佛音)에는 용과 체, 덕, 통융 등이 있듯이 의례를 행할 때 송암스님은 불음에 가까이 가고자 평생 정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의문(儀文)의 뜻을 알고 행하며, 오음인 정직ㆍ화아ㆍ청철ㆍ심만ㆍ주변원문을 체로 삼았다. 더불어 여법한 의례를 위해 정성심과 신심이 바탕이 되어 제대로 거행하고자 했으며, 범패성음의 명칭을 사용하여 소리구성을 나름대로 분류하고자 하였다. 또한 스님은 행주좌와 어묵동정 오직 염불로 일념 정진하였다. 범패와 의례를 거행하고 수행하는 모든 사람은 이와 같이 여법하고 훌륭하게 의례집전을 할 수 있도록 스님의 기본 사상이 반영되기를 바라며, 더불어 범패성음에 관한 분류 등은 앞으로 꾸준히 연구되고 논의되어 체계를 갖추어야 할 과제로 남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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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봉원사’ 사이트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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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영산재보존회’ 사이트 검색
(http://yeongsanjae.or.kr/bbs/content.php?co_id=senu0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