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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에서 이중재는,
"<<李成桂는 고려를 치기위해 위화도 회군한 사실이 없다.>>
고려사절요, 고려사 그리고 고려도경을 찾아봐도 위화도회군을 했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또한 중국 고금지명대사전에도 義州는 있어도 위화도라는 지명은 없다. 뿐만 아니라 李成桂장군이 태어난 곳은 하남성(河南省) 급현(汲縣)인 義州태생이다." 라고 지껄이고 있습니다.
이성개가 '고려를 치려고 회군한 적이 없다.'는 이중재의 글을 퍼와서 자랑스럽게 이조를 두둔하는데, 아래 글을 보면 이중재의 위 글이 얼마나 허무맹랑한지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평생을 재야 사학에서 우리 역사를 연구했다는 소리가 모두 헛수고였음이 드러납니다. . 이중재는 먼저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 한 적이 없고 그런 기록도 '고려사절요' 나 기타 사료를 아무리 보아도 없다고 단정합니다. 더구나 '고려도경' 은 이성개 위화도 반란이 일어나기 전 송나라 사람, 서긍이 서기 1123년에 편찬한 것인데 거기에 위화도 회군이 야기가 나올 턱이 없죠. 위화도 반란은 서기1388년 에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고려사절요'에는 아래와 같이 분명히 이성계는 우칸의 명나라정벌 명령에 불복하여 압록강변에서 고려군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경까지 나와 명나라 정벌을 독려하는 우칸과 최영 8도도통사를 사로 잡고자 군사를 돌려 추격하는 기사가 나옵니다. 이러한 명백한 기록도 깡그리 무시하고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기록을 찾아 볼 수 없다고 잠꼬대 같은 소리를 하는 이중재는 도대체 아래 기사를 발로 읽었었나요? 아니면 그의 한자해독능력이 과연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이중재는 재야사학에서도 이미 내놓은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아래 색칠된 부분만 보아도 이성계의 교활한 반란선동술을 볼 수 있습니다. 아래 고려사절요는 고려사절요 '신우편' 마지막 무진년 기사입니다. 이조놈들이 고려황실을 얼마나 깔아뭉게고 장깨 명나라를 얼마나 어버이로 섬긴 소중화 정권인지 아래 고려사절요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장깨명나라에 대한 아부와 섬김 그리고 사대하는 꼬라지를 보면 차마 눈뜨고 못 볼 지경이입니다. 고려황제를 '신우'라고 일반 천민 이름 부르듯이 지껄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고려 공민제(칸=한) 때 고려개혁을 이끌었던 신돈이 난 자식이라고 매도하며 황제칭호를 떼고 신돈의 자식 '신우'라고 우칸(제)를 모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조가 명나라에 사대하듯이 고려가 마치 명나라에 설설 기었던 것 처럼 형편없는 나라로 기록하고 있군요.
고려말이 되니 온갖 모순과 부정 부패로 고려는 더이상 가망이 없고 새왕조를 여는 것이 낫고 그래서 '역성혁명' 을 할 수 밖에 없었다고 우리는 배워왔습니다. 황제국 고려보다 나은 나라 만들겠다고 멀쩡한 고려제국을 각종 루명을 씌워 멸망시킨 이조놈들, 이들이 고려를 멸망시킨 명분이 뭐였죠? '썩은 고려조' 보다 더 나은 새로운 국가를 만들겠다고 한거죠. 그런데 이성개와 그 일당들이 세운 이조, 과연 고려보다 나았나요? 명나라의 후장이나 빠는 개 그지나라를 만들어 한민족 정체성을 모조리 말살하고, 장깨 소중화 변방의 빈국으로 만들어 놓고 이씨왕족과 지배세력만 호의 호식하고 절대다수 백성들은 핫바지에 유리걸식하는 처참한 생활을 5백년이나 지속시킨 왕조였습니다.
그럼 오늘을 살아가는 대한민국은 어떤가요? 이조왕족과 사새당쟁으로 정적죽이기에 미쳐가던 양반나부랭이 '노론세력' 등 이조지배세력이 일제시대 친일파로 둔갑하였고 일제 패망 후 대한민국의 지배세력으로 지금까지 군림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이제 친일숭미세력으로 탈바꿈하여 우리 사회 모든 분야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이명박 정권 들어서는 미제기독교 목사교세력이 득세를 하고 미제를 어버이로 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목사교에 터를 둔 미제식 기독교 인민공화국건설에 모든 역량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4대강 파괴사업이나, 각종 정부정책이 모두 여기에 촛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여기에 재벌과 조.중.동 등이 누이좋고 매부좋다고 적극 호응하고 있죠. 부자감세하여 90조나 국고 손실을 초래하고 이를 매꾸려고 서민에게 각종 세금과 부담금을 지워 착취하고 있습니다. 전기세, 가스비, 수도세, 그리고 각종 생활물가의 상승으로 부족한 재정을 충당시키고 있습니다. 또한 각종 복지비를 삭감하고 있습니다.
한줌도 안되는 지들만의 공화국을 건설하여 호의호식하고 나머지 절대다수 인민서민들은 80만원세대, 대학등록금도 못내는 계급사회로 추락시키고 있습니다. 이조놈들은 백성들의 불만을 서릿발보다도 무서운 철저한 신분계급구조로 억누르고 이것도 안되면 폭력으로 억압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경찰력을 동원하기도 하지만 신문방송을 장악하여 대국민 우민화 세뇌공작으로 인민들의 불만을 희석시키고 있죠. 요새 보세요, 신문방송에서 무슨 볼 것이 있던가요? 스포츠물이나 딴따라들 시시콜콜한 연예인 이야기, 희희락락 방송물로 도배하고 있습니다. 아니면 명박이 잘하는 내용물이나 정부정책 홍보성 방송물 뿐입니다. 드라마 조차도 친 이박이 작가들을 채용해 문제의식, 비판의식없는 사랑타령이나 순응하며 살아가는 이야기로 엮어가고 있죠. 이렇게 해서 백성들의 대정부, 지배세력에대한 비판의식을 잠재우고 주는 떡고물이나 고분고분 받아먹는 무기력한 그지 노예 '국민'으로 만들어 가고 있죠. 그지노예근성 국민이라는 소리 안들을려면 이번 2010.6.2. 지방선거에 반드시 참여하여 심판해야 합니다.
결국 지금 이조시대와 다를게 하나도 없습니다. 이래서 이조를 냉철하게 분석하고 비판하여 과거의 교훈을 잊지 말고 다시는 이런 저주받은 역사를 반복하지 말자고 이성개조선정권에 칼을 들이 대는 것입니다.
아래 고려사절요는 이조 초기에 소위 '6진개척' 으로 유명한 '김종서장군' 이라는 자가 편찬한 것으로 나옵니다. 위 저런 쓰레기글을 신봉하며 여전히 이조의 망령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이 심심하면 나타나서 까페 힘을 빼고 피곤하게 만드는데 무슨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합니다. http://cafe.daum.net/mook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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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고려사절요 '신우 무진'편 출처:
일러두기:
아래 고려사절요에서 나오는 용어 중에서
- 우 또는 신우: 고려황제 '우왕' 을 말한다.
- 태조: 소중화 정권, 이조를 개국한 '이성개' 를 말한다.
○ 우가 ( 고려황제 우왕을 지금 '우' 라고 깔아뭉게서 부르고 있다. 일국의 정사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이성개를 '성개'라고 부르면 이놈과 관련되거나 이조숭배자들은 똑 같이 개거품을 물고 잡아 먹으려 한다. )동강에 가서 봉천선(奉天船)을 타고 음악을 연주하며, 유숙하고는 연쌍비에게 말 두 필을 주고, 또 기생 15명에게 각각 말 한 필씩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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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북면 도안무사 최원지(崔元沚)가 보고하기를, “요동 도사가 지휘(指揮) 두 사람을 보내어 군사 1천여 명을 거느리고 와서 강계에 이르러 철령위(鐵嶺衛)를 세우려 하여 요동(遼東)에서 철령에 이르기까지 역참(驛站) 70군데를 두었다." 하였다. 우가 동강에서 돌아오다가 말 위에서 울며 이르기를, “군신들이 요동을 치려는 나의 계책을 듣지 않아서 이 지경이 되게 하였다." 하고, 드디어 팔도의 군사를 징집하였다.
○ 최영이 동교(東郊)에서 군사를 사열하였다.
○ 대명(大明) 후군도독부(後軍都督府)에서 요동 백호(百戶) 왕득명(王得明)을 보내와서 철령위 설치를 통고하였다. 우가 병을 칭탁하고 백관에게 명하여 교외에서 맞이하게 하였다. 판삼사사 이색(李穡)이 백관을 거느리고 득명에게 나아가서, 돌아가 황제께 잘 아뢰어 주기를 요청하였다. 득명이 말하기를, “천자의 처분에 달려 있는 것이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요." 하였다. 최영이 노하여 우에게 아뢰고, 요동 군사로서 방문(榜文)을 가지고 양계(兩界)에 이른 자를 죽이니, 죽은 자가 모두 21명이나 되었다. 이사경(李思敬) 등 5명만을 그 지방에 머물러 두고 단속하게 했다.
○ 경자일에 우가 경내의 죄인을 용서하고, 드디어 서해도로 가는데 영비(寧妃)와 최영이 따랐다. 세자와 여러 비를 한양산성에 옮기고, 찬성사 우현보에게 명하여 경성에 머물러 지키게 하고, 서쪽으로 해주 백사정(百沙亭)에서 사냥한다고 일컬었는데, 실상은 요동을 지키려는 것이었다. 이때 전라ㆍ경상도는 왜적의 소굴이 되고, 서북면은 땅이 분할되어 빼앗길 염려가 있으며, 경기ㆍ교주ㆍ양광도는 성을 수축하기에 피곤하고, 서해도와 평양은 사신을 영접하기에 지쳤는데, 게다가 군사를 징발하니, 8도가 소요하고 백성들이 농사를 짓지 못하게 되어 안팎에서 원망하였다.
○ 여름 4월 1일 을사일에 우가 봉주(鳳州)에 머물면서 최영과 우리 태조를 불러 이르기를, “요양(遼陽)을 치려 하니 경 등은 힘을 다하여야 한다." 하였다. 태조가 이뢰기를, “지금 군사를 내는 데에 4가지 불가한 것이 있으니,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거슬리는 것이 첫 번째 불가한 것이요, 여름에 군사를 출동시키는 것이 두 번째 불가한 것이요, 온 나라가 멀리 정벌을 하면 왜적이 빈틈을 타서 침입할 것이니 세 번째 불가한 것이요, 때가 무덥고 비가 오는 시기라서 활에 아교가 녹아 풀어지는 것과 대군이 전염병에 걸릴 것이 네 번째 불가한 것입니다." 하니, 우가 그럴듯하게 여겼다. 태조가 물러나와 최영에게 말하기를, “그리하겠소." 하였다. 밤에 최영이 다시 들어가 아뢰기를, “원컨대 다른 말을 받아들이지 마소서." 하였다.
다음날 우가 태조를 불러 이르기를, “이미 군사를 일으켰으니 중지할 수는 없다." 하자, 태조가 아뢰기를, “반드시 큰 계책을 성취하려거든 대가를 서경(西京)에 머물러두고 가을을 기다려 군사를 내면 곡식이 들에 널려 있어 대군의 양식을 충족할 수 있으니, 북을 울리며 전진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출병할 때가 아니니 비록 요동 한 성을 함락시킨다 하더라도 한창 비가 와서 군사가 전진할 수 없으니 군사가 태만해지고, 양식이 떨어지면 화만 초래할 뿐입니다." 하였다. 우가 이르기를, “경은 이자송을 보지 못하였는가." 하였다. 태조가 아뢰기를, “자송은 비록 죽었으나 아름다운 이름이 후세에 전하지마는, 신등은 비록 살아있으나 이미 실책을 하게 되었으니 무슨 소용입니까." 하였으나, 우는 듣지 않았다. 태조가 물러나와 눈물을 흘리면서 우니, 부하 장사들이 말하기를, “왜 그렇게 슬퍼하십니까." 하였다. 태조가 말하기를, “백성들의 화(禍)가 이제부터 시작이다." 하였다.
○ 정미일에 우가 평양에 머물면서 여러 도의 군사를 독촉하고 징집하여 압록강에 부교(浮橋)를 만드는 데에 대호군 배구(裵矩)에게 감독하게 하고, 임견미ㆍ염흥방 등의 가재를 배로 서경에 운반하여 군사의 상(賞)에 충당하기로 하며, 또 도성 안팎의 중들을 징발하여 군사로 만들었다. 병진일에 최영을 팔도도통사로 임명하고,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 조민수(曹敏修)를 좌군도통사로 삼아 서경 도원수 심덕부와 부원수 이무(李茂), 양광도 도원수 왕안덕, 부원수 이승원(李承源), 경상도 상원수 박위(朴葳), 전라도 부원수 최운해(崔雲海), 계림(雞林) 원수 경의(慶儀), 안동(安東) 원수 최단(崔鄲), 조전원수 최공철(崔公哲), 팔도도통사조전원수 조희고(趙希古)ㆍ안경(安慶)ㆍ왕빈(王賓)을 예속시켰다. 우리 태조를 우군도통사로 삼아서 안주도 도원수 정지(鄭地)와 상원수 지용기(池湧寄), 부원수 황보림(皇甫琳), 동북면 부원수 이빈(李彬), 강원도 부원수 구성노(具成老), 조전원수 윤호(尹虎)ㆍ배극렴(裵克廉)ㆍ박영충ㆍ이화(李和)ㆍ이두란(李豆蘭)ㆍ김상(金賞)ㆍ윤사덕(尹師德)ㆍ경보(慶補)와 팔도도통사 조전원수 이원계(李元桂)ㆍ이을진(李乙珍)ㆍ김천장(金天莊)을 예속시켰다. 좌우군이 모두 3만 8천 8백 30명이고, 심부름꾼이 1만 1천 6백 명이었다.
○ 정사일에 우가 봉천선(奉天船) 도원수 동지밀직 이광보(李光甫)에게 명하여 돌아가 개경(開京)과 서강(西江)에 주둔하여 왜적을 방비하게 했다.
○ 경신일에 우가 대동강에 가서 온갖 놀이를 베풀고, 온종일 호악(胡樂)을 연주하였다. 순군만호부 지인(知印)이 왕명을 위조하여 군사 10명을 놓아주었으므로 목을 베어 조리돌리었다.
○ 신유일에 좌우군도통사가 군사를 출발시키려 하는데, 우가 술에 취하여 날이 늦도록 일어나지 않으므로 하직하지 못하였다. 우는 술이 깨자 석포(石浦)에서 뱃놀이를 하고, 저녁에 돌아와서 여러 원수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옷과 갑주(甲冑)와 궁검(弓劍)과 말을 차등 있게 주고는 새벽까지 호악을 연주하였다.
○ 임술일에 조민수는 좌군을 거느리고, 우리 태조는 우군을 거느리고 평양을 출발하면서 군사를 10만이라 군호(軍號)하였다.
계해일에 영이 우에게 아뢰기를, “지금 대군이 길에서 만일 한 달간이나 지체한다면 큰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니 신이 가서 독려하겠습니다." 하였다. 우가 이르기를, “경이 가면 누구와 함께 정사를 하겠는가." 하였다. 영이 굳이 청하니, 우가 이르기를, “그렇다면 나도 가겠다." 하였다. 어떤 사람이 이성(泥城)으로부터 와서 말하기를, “근자에 내가 요동에 갔었는데 요동 군사가 모두 오랑캐를 치러 가고 성중에는 다만 지휘하는 자 한 명이 있을 뿐이니, 만일 대군이 이르면 싸우지 않고 항복을 받을 것입니다." 하였다. 영이 크게 기뻐하여 물건을 후하게 주었다.
○ 갑자일에 우가 대동강 부벽루에서 호악(胡樂)을 울리고 직접 호적(胡笛)을 불었다. 말 먹이는 사람이 벌벗고 강에서 말을 씻기니, 우가 보고 임금을 업신여긴다 하여 베었다. 이때부터 항상 대동강에 가서 즐기며 돌아오는 것을 잊었다.
○ 을축일에 홍무 연호를 정지하고 백성들에게 다시 호복(胡服)을 입게 하였다.
○ 왜적이 초도(椒島)에 들어왔다. 이때 경성의 장정들이 모두 종군(從軍)하고, 오직 노약자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밤마다 봉화가 여러 번 오르는데 경성이 텅 비었으니, 인심이 위태롭고 두려워하여 조석으로 안심할 수가 없었다.
○ 우가 사냥하려고 나가면서 말 한 필을 끌어내어 베며 이르기를, “이 말이 자주 나를 놀라게 하였다." 하였다. 또 길에서 도망하는 군사 2명을 보고 즉시 명하여 베었다. 우의 음란과 살육이 날로 심해졌다.
○ 무진일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 문달한ㆍ김종연(金宗衍)ㆍ정승가와 환자(宦者) 조순(曹恂)ㆍ김완(金完)을 보내어 좌우도통사와 여러 장수에게 금은으로 만든 술그릇을 주고, 도진무(都鎭撫)에게는 모두 옷을 주도록 하였다.
○ 5월 1일 갑술일에 일식이 있었다.
○ 우가 대동강에서 마음껏 즐기고 밤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우는 나가 놀 때마다 호악을 연주하고, 광대를 시켜서 갖은 놀이를 벌였으며, 최영은 날마다 군사를 거느리고 출입하며 피리를 불었다. 왕과 신하가 음란하니 백성들이 원망하고 탄식하였다.
○ 왜선 80여 척이 와서 진포(鎭浦)에 정박하고 가까운 여러 고을을 침범하였다. 우가 상호군 진여의(陳汝宜)를 전라도ㆍ양광도로 보내어 병을 핑계대고 북쪽 정벌에 나가지 않거나, 자제와 노예로 대행시킨 자는 모두 왜적을 막게 하고, 피하는 자는 군법으로 처단하고 그 재산을 적몰하게 하였다.
○ 우가 영비와 함께 부벽루에 가서 활을 쏘기도 하고, 격구를 하기도 하다가, 말 기르는 사람을 죽이려 하니, 최영이 죽이지 말라고 청하였다. 우가 이르기를, “당신은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면서 왜 나에게는 금하는가." 하였다. 영이 아뢰기를, “신이 사람을 죽이는 것은 부득이하여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우가 좌우에 눈짓하여 마침내 말 기르는 사람을 베었다.
○ 경진일에 좌우군이 압록강을 건너 위화도(威化島)에 둔을 쳤는데, 도망하는 군사가 길에 이어져서 끊어지지 않았다. 우가 곳곳에서 베도록 명령하였으나 그치게 하지는 못하였다.
○ 최영이 우에게 청하기를, “전하는 서울로 돌아가시고, 노신이 여기서 장수들을 지휘하겠습니다." 하였다. 우가 이르기를, “선왕께서 해를 당한 것은 경이 남정(南征)하였기 때문이다. 내가 어찌 감히 하루라도 경과 함께 있지 않을 수 있는가." 하였다.
○ 갑신일에 대동강 물이 붉어졌다.
○ 이성(泥城) 원수 홍인계(洪仁桂)와 강계(江界) 원수 이억(李薿)이 먼저 요동 지경에 들어가서 죽이고 노략하여 돌아오니, 우가 기뻐하여 금정아(金頂兒)와 무늬 있는 비단을 내려 주었다.
○ 병술일에 좌우군 도통사가 아뢰기를, “신등이 뗏목을 타고 압록강을 건너니, 앞에 큰 내가 있는데 비가 내려 물이 넘쳐 첫째 여울에서 휩쓸려서 빠진 자가 수백 명이요, 둘째 여울은 더욱 깊어 섬 가운데에 머물러 둔을 치는 것은 한갓 양식을 허비할 뿐입니다. 여기서 요동성에 이르는 사이에 큰 내가 많아서 무사히 건널 것 같지 않습니다. 근일에 불편한 상황을 조목조목 기록하여 도평의(都評議)의 지인(知印) 박순(朴淳)에게 부쳐 아뢰었는데, 아직 윤허를 받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황송합니다. 그러나 큰 일을 당하여 말해야 할 것을 말하지 않으면 이것은 불충(不忠)입니다. 어찌 감히 부월(鈇鉞)을 피하여 묵묵히 있겠습니까.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나라를 보전하는 도리인데, 우리 나라가 삼한(三韓)을 통일한 이래로 부지런히 대국을 섬겼고, 현릉(玄陵)께서 대명(大明)에 복종하고 섬겨 그 표문에 이르기를, '자손 만대가 되도록 길이 신첩(臣妾)이 되겠다.' 하였으니, 그 정성이 지극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선왕의 뜻을 이어서 해마다 조공 바치는 물건을 한결같이 조서대로 하니, 이에 특별히 고명(誥命)을 내려 현릉의 시호를 주며 전하의 작위를 책봉하였으니 이것은 종사(宗社)의 복이요, 전하의 거룩한 덕입니다. 이제 유지휘(劉指揮)가 군사를 거느리고 위(衛)를 설치한다는 말을 듣고 밀직제학 박의중(朴宜中)을 시켜서 표문을 받들어 진달하였으니 대단히 좋은 계책인데, 지금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갑자기 큰 나라를 범하는 것은 종사와 생민의 복이 아닙니다. 하물며 지금 무덥고 장마가 져서 활이 풀리고 갑옷이 무거워 군사와 말이 함께 지쳤으니, 몰아서 견고한 성 밑에 다다르면 싸워도 반드시 이기지 못 하고 쳐도 반드시 빼앗지 못할 것입니다. 이때를 당하여 군량이 공급되지 못하고 진퇴가 곤란하게 되면 장차 어떻게 대처하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특별히 회군을 명령하여 삼한 백성의 기대에 맞추소서." 하였으나, 우와 최영은 듣지 않고 환자 김완(金完)을 보내어 빨리 진군하라고 독촉하였는데, 군중에서 완을 머물러 두고 보내지 않았다. 최영이 오랑캐 군사와 함께 요동을 협공하려고 배후(裵厚)를 원 나라에 보냈다. 그때 망한 원 나라의 남은 종자는 사막으로 도망가 헛칭호만 일컫고 있었는데, 최영이 그들의 응원을 받으려 하였으니, 그 계책이 허술하기가 이와 같았다.
○ 양광도 안렴사 전리(田理)가 보고하기를, “왜적이 도내 40여 군을 침범하였는데 지키는 군사의 수가 적고 약하여 사람 없는 지역을 밟는 듯합니다." 하였다. 이에 원수 도흥(都興) ∙ 김주(金湊) ∙ 조준(趙浚) ∙ 곽선(郭璇) ∙ 김종연(金宗衍) 등을 보내어 막고, 한양에 있는 여러 비(妃)를 모두 개경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 을미일에 우가 성주(成州) 온천에 갔다. 좌우군 도통사가 최영에게 사람을 보내어 빨리 군사를 돌이키도록 허락하기를 청하였으나, 최영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군중에서 헛소문이 돌기를, “태조가 휘하 군사를 거느리고 동북면으로 향하려고 이미 말에 올랐다." 하였다. 군중이 흉흉하였는데, 민수는 어찌할 줄을 모르고 단기(單騎)로 태조에게 달려가서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공이 떠나면 우리들은 어디로 가란 말인가." 하였다. 태조가 말하기를, “내가 어디로 간단 말인가. 공은 이렇게 하지 말라." 하고, 태조가 여러 장수에게 말하기를, “만일 상국의 지경을 범하여 천자께 죄를 얻으면 종사와 생민에게 화가 곧 이를 것이다. 내가 순(順)과 역(逆)으로써 글을 올려 회군하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살피지 못하고, 영이 또 늙고 어두워 듣지 않으니, 어찌 그대들과 함께 들어가서 왕을 뵙고 친히 화와 복을 진달하고 왕 옆의 악한 사람(최영)을 제거하여 생령을 편안히 하지 않으랴." 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모두 말하기를, “우리 동방 사직의 안위가 공의 한 몸에 달려있으니 감히 명령대로 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군사를 돌이켜 압록강을 건너는데 태조가 백마를 타고 붉은 활과 백우전(白羽箭)을 메고 강 건너에 서서 군사가 다 건너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군중에서 바라보고 서로 말하기를, “예부터 이와 같은 사람이 있지 않았고, 지금 이후로도 어찌 다시 이런 사람이 있을까." 하였다. 이때 장마가 며칠이 되어도 물이 넘치지 않았는데 군사가 건너고 나자, 큰물이 갑자기 닥쳐 온 섬이 잠기므로 사람들이 모두 신기하게 여겼다. 이때 동요(童謠)에, '목자득국(木子得國).'이란 말이 있어 군사와 백성이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모두 노래하였다.
정유일에 조전사(漕轉使) 최유경(崔有慶)이 달려가 우에게 고하였다. 이날 밤에 우리 공정왕(恭靖王)이 그 형 방우(芳雨)와 이두란의 아들 화상(和尙), 상호군 유용생(柳龍生), 최고시첩목아(崔高時帖木兒)와 함께 우(禑)가 있는 성주(成州)에서 태조의 군중으로 달려왔다.
무술일에 우가 대군이 이미 안주에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달려 돌아와 밤에 자주(慈州) 이성(泥城)에 이르러 영을 내리기를, “정벌하러 갔던 여러 장수가 제 마음대로 회군하였으니, 너희 대ㆍ소 군민들은 마음을 다하여 막으면 반드시 크게 상을 주겠다." 하였다. 회군하는 여러 장수들이 급히 추격하기를 청하였다. 태조가 말하기를, “빨리 가면 반드시 싸울 터이니 사람을 많이 죽이게 된다." 하고, 매번 군사를 경계하기를, “너희들이 만일 승여(乘輿)를 범하면 내가 너희를 용서하지 않겠다. 백성의 오이 한 개라도 빼앗으면 역시 죄를 받을 것이다." 하고, 길가에서 사냥을 하며 일부러 행군을 늦추게 하였다.
기해일에 우가 평양에 이르러 재물과 보화를 거두어서 대동강을 건너 밤에 중화군(中和郡)에 닿았다.
신축일에 우가 길에서 모든 군사가 이미 가까이 왔다는 말을 듣고 사잇길을 따라 빨리 달려 기탄(岐灘)에 이르렀다. 이튿날 아침에 서울에 돌아와 화원으로 들어가니, 따르는 자가 겨우 50여 기(騎)였다. 서경에서 경성에 이르는 동안에 우를 따르던 신하와 백성들이 술과 음료를 가지고 대군을 맞이하는 자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최영이 막아 싸우고자 백관에 명하여 병기를 가지고 호위하게 하였다.
○ 6월 초하루 계묘일에 모든 군사가 근교(近郊)에 와서 둔을 치고 왕에게 올리는 글을 김완에게 주었는데, “우리 현릉께서 지성으로 대국을 섬겨, 천자가 일찍이 우리를 공격할 뜻이 없는데, 지금 영이 총재가 되어서 조종(祖宗) 이래로 대국을 섬기는 뜻을 생각하지 않고 먼저 대군을 몰아 상국을 범하려고 하여 무더운 여름에 군사를 움직이니, 삼한이 농기(農期)를 잃고, 왜놈들이 빈틈을 타서 깊이 들어와 침범하여 우리 인민을 죽이고 우리 창고를 불태웠습니다. 게다가 한양에 천도하여 중외가 소요하니, 지금 영을 제거하지 않으면 반드시 종사(宗社)를 전복시킬 것입니다." 하였다. 이튿날 우가 진평중(陳平仲)을 보내어 여러 장수에게 전교(傳敎)하기를, “명을 받아 국경을 나갔다가 이미 절제(節制)를 어기고 군사를 일으켜 대궐로 향하고, 또 강상(綱常)을 범하여 이런 분란의 조짐을 부른 것은 진실로 부덕한 나 때문이다. 그러나 군신의 대의는 실상 고금을 통한 의리이다.
경이 글 읽기를 좋아하니 어찌 이것을 알지 못하리오. 하물며 또 강토는 조종에게서 받았으니 어찌 쉽게 남(명 나라)에게 줄 수 있는가. 군사를 일으켜 막는 것이 낫겠다 하여 여러 사람에게 모의하니, 모두들 가하다 하였는데, 이제 어찌 감히 어기는가. 비록 최영을 지목하여 핑계하였지만 영이 내 몸을 호위하는 것은 경들이 아는 것이요, 우리 왕실을 위하여 수고하는 일 역시 경들이 알고 있는 것이다. 교서(敎書)가 이르는 날에 완미(頑迷)한 것을 고집하지 말 것이며, 잘못을 고치는 데에 인색하지 말고 함께 부귀를 보존하여 시종(始終)을 도모하기를 내가 진실로 바라노니, 경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였다. 또 설장수를 보내어 군사 앞에 나가서 장수들에게 술을 주고 그 뜻을 알아보려 하였다. 모든 장수들이 나와서 도성 문 밖에 둔을 쳤다. 동북면 백성들과 여진(女眞)사람으로 본래 종군하지 않았던 자들이 태조의 회군하는 것을 듣고 앞다투어 떨쳐 일어나 서로 모여 밤낮으로 달려오는 자가 천여 명이나 되었다. 우가 이에 창고의 금과 비단을 내어 군사를 모집하여 수십 명을 얻었는데, 모두 창고에 속한 노예와 시정잡배들이었다. 여러 도에서 군사를 징발하여 들어와 원조하게 하고, 수레를 모아 골목 입구를 막고, 민수 등의 관작을 삭탈하고, 최영을 문하좌시중으로, 우현보를 우시중으로 삼고, 송광미를 찬성사로, 안소를 평리로, 우홍수를 대사헌으로, 정승가를 응양군 상호군으 로, 조규(趙珪)를 밀직부사로, 김약채(金若采)를 지신사로 삼아서 거리에 방을 붙이기를, “민수 등 여러 장수를 잡는 자는 관가나 사가의 노예를 불문하고 크게 벼슬과 상을 주겠다." 했다.
을사일에 우리 태조가 숭인문(崇仁門) 밖 산대암(山臺巖)에 둔을 치고, 유만수(柳曼殊)를 보내어 숭인문으로 들어가게 하고, 좌군은 선의문(宣義門)으로 들어가게 하였는데, 최영이 막아 싸워 모두 물리쳤다.
과거에 태조가 만수를 보내면서 좌우에게 말하기를, “만수는 눈이 크고 광채가 없으니 담이 작은 사람이다. 가면 반드시 패하여 달아날 것이다." 하였는데, 과연 그러하였다. 이때 태조가 말을 들에 풀어놓았다. 만수가 쫓겨 돌아오자 좌우에서 이뢰니, 태조가 대답도 않고 그대로 장막 안에 누워 있었다. 좌우에서 두세 번 아뢴 연후에야 천천히 일어나서 식사를 하고, 말을 몰고 와서 안장을 얹고 군사를 정돈하였다. 출발하려 할 때에 작은 소나무가 백 보쯤 되는 곳에 있었는데, 태조가 소나무를 쏘아 이길 조짐을 점쳐서 군사의 마음을 모으려고 하여 드디어 쏘니, 한 화살에 꺾어졌다. 여러 군사가 모두 하례하고 진무(鎭撫) 이언출(李彦出)이 꿇어앉아 말하기를, “우리 영공(令公)을 모시고 가면 어딘들 못 가겠습니까." 하였다. 태조가 숭인문으로 성에 들어가 좌군과 나란히 양쪽에서 나아가니, 도성의 남녀들이 다투어 술과 음료를 가지고 군사를 맞아 위로하며, 왕이 막아놓은 수레를 끌어내어 길을 열었다.
노약한 자는 성에 올라가서 바라보고 환호성을 올리며 매우 좋아하였다. 민수가 검은 큰 기를 세우고 영의서(永義署) 다리에 이르렀는데, 최영의 군사에게 쫓기었다. 조금 뒤에 태조가 황룡을 그린 큰 기를 세우고 선죽교(善竹橋)를 거쳐 남산(男山)에 오르니, 먼지가 하늘을 덮고 북소리가 땅을 진동하였다. 영의 휘하 안소(安沼)가 정예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남산에 웅거하였다가 기를 바라보고 무너져 달아났다. 최영이 형세가 궁한 것을 알고 화원으로 달려 돌아와서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여 문지기를 창으로 콱 찌르고 들어갔다. 태조가 드디어 암방사(巖房寺) 북쪽 고개에 올라 큰 나팔을 한 차례 부니, 군사가 화원을 수백 겹으로 포위하고 최영을 내놓으라고 크게 외쳤다. 정벌할 때마다 장수들은 나팔을 쓰지 않았는데, 태조만이 말 앞에서 나팔을 불게 하였기 때문에 도성 사람들이 나팔 소리를 듣고 태조의 군사가 이미 이른 것을 모두 기뻐하였다.
우가 영비와 최영과 함께 팔각전(八角殿)에 있었는데, 최영이 나가려 하지 않았다. 나팔장이 송안(宋安)이 담에 올라 나팔을 한 번 불자, 군사들이 일시에 담을 무너뜨리고 뜰로 모여들어 곽충보(郭忠輔) 등 3, 4명이 곧장 대궐 안으로 들어가서 최영을 찾았다. 우가 영의 손을 잡고 울며 이별하니, 영이 두 번 절하고 충보를 따라 나왔다. 태조가 최영에게 말하기를, “이러한 사변이 나의 본심은 아니오. 그러나 국가가 편안하지 못하고 백성들이 피곤하여 원망이 하늘에 사무쳤기 때문에 부득이한 일이니 잘 가시오, 잘 가시오." 하고, 서로 대하여 울고, 드디어 영을 고봉 현(高峰縣)에 귀양보냈다.
처음에 최영이 영을 내리어 정벌에 나간 장수들의 처자를 가두려 하였으나, 뒤에 일이 급박하여 실행하지 못하였다. 이인임(李仁任)이 일찍이 말하기를, “이판삼사(李判三司)가 나라의 주인이 될 것이라." 하였는데, 영이 듣고 매우 노하였으나 감히 말은 못하였다. 이때가 되어 탄식하기를, “인임의 말이 참으로 옳다." 하였다. 광미ㆍ소ㆍ규ㆍ승가 등은 도망가 숨었다. 두 도통사와 36명의원수들이 대궐에 나아가 절하여 사례하고, 군사를 궐문 밖으로 돌리었다. 이에 앞서 잠저(潛邸) 동네에 동요가 있어 이르기를, “서경성 밖의 불빛이요, 안주성 밖의 연기 빛이라. 그 사이에 왕래하는 이원수, 원하건대 백성을 구제하소." 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이런 변이 있었다.
○ 다시 홍무(洪武) 연호를 시행하고, 명 나라 의복을 입고, 호복(胡服)을 금하며, 우현보를 파면하고, 조민수를 좌시중으로, 우리 태조를 우시중으로, 조준을 첨서밀직삼사 겸 대사헌으로 삼고, 여러 장수를 모두 복직시켰다. 이때 명 나라 조정에서 본국에 출병하는 변고를 듣고 황제께 글을 올려 고려를 치기를 청하니, 황제가 종묘에 점을 치려고 재계(齋戒)를 하는 중이었는데, 마침 본국의 사자가 이르니 곧 재계를 그만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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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한솔바람'이 퍼온 이중재의 쓰레기글
<<李成桂는 고려를 치기위해 위화도 회군한 사실이 없다>>
출처 : 李氏의 뿌리歷史
저자 : 율곤 이중재
高麗末 李成桂
고려말 우왕(禑王 AD. 1393~1394年) 때는 참으로 정국이 어수선한 때이다. 그것도 그럴 것이 고려 25대 고종(高宗AD. 1232~1277年)때 몽고(蒙古)의 침략에 의해 강화조약(强和條約)이 아닌 강화조약(講和條約:상호협력조약)을맺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 화친을 전제로 강화조약(講和條約)을 맺었으나 그후 고려왕들은 몽고식 이름을 갖게 되고 내정간섭을 받아왔다.
고려 23대 고종(高宗)때 몽고왕 7대 헌종(憲宗 AD. 1251~1260年)은 사실상 고려의 왕자(王子)인 준(綧)이라는 사실을 고백했다.
고려의 장군 김보정(金寶鼎)과 어사 송언기(宋彦琦)가 고종 25년 겨울인 12월에 몽고에 파견사로 갔을때 몽고왕 헌종(憲宗)인 준(綧)은 스스로 고려왕자임을 밝혔던 것이다. 그러기에 강제조약이 아닌 강화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443쪽에 기록하고 있다.(필자의 저서 새 高麗史 807~623쪽 참고)
고려말기가 되자 고려국은 우왕(禑王)의 패륜적인 행위로 고려는 더욱 패망의 위기를 걸을 때이다.
이때 명(明)나라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 AD. 1368~1398年)은 강소성(江蘇省) 소주(蘇州)땅에서 명(明)나라를 세우게 된다.
사실 따지고 보면 高麗는 16대 예종(睿宗 AD. 1124~1140年)때부터 교육혁명을 통해 17대 인종(仁宗 AD. 1141~1164年)때는 중국대륙 전체를 통일 했던 것이다. 그런고로 명나라 주원장(朱元璋)이 있었던 강소성 소주땅은 고려의 강역이었다.
다시 말해 고려 땅인 소주에서 명나라를 만든 주원장은 고려왕조의 쇠망을 틈타 지금의 북경으로가 십삼사(十三司)를 만들어 점점 세력을 강화하였다.
고려 우왕(禑王)의 실책으로 나라가 기우는 것을 본 명나라 주원장(朱元璋)은 高麗가 도읍하고 있던 지금의 서안(西安) 즉 옛 서경(西京)을 옮기라고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高麗王朝의 신하들은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아져 갔다. 이때 우왕(禑王)은 고민 고민 하다가 이성계(李成桂)장군을 불렀던 것이다.
그 당시 李成桂장군은 하북성(河北省) 일부지방과 산서성(山西省) 그리고 하남성(河南省) 북부지방과 멀리 섬서성(陝西省) 일부지방에서 왜적(倭賊)들을 토벌하는 임무를 띠고 작전에 임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적(倭賊)들이 들끓게 된 동기는 다음과 같다.
진(晋 BC. 895~376年)나라말기 위(魏 BC. 424~225年)나라와 한(韓 BC. 406~ 221年) 그리고 조(趙 BC. 408~222年)의 세 나라가 갈라져 나온 뒤 진(秦 BC. 221~207年)에 의해 위(魏)나라는 완전히 망하게 된다.
이때 위나라의 한 무리는 중국대륙 남방인 호남성(湖南省) 남쪽지방에서 왜국(倭國)을 세우게 된다. 또 한 무리는 일부 新羅로 한무리는 百濟로 흩어져 갔으나 나머지 소수의 무리들은 중국대륙 각지로 흩어져 노략질을 하는 왜적(倭賊)으로 변하게 되었던 것이다.
고려말기 나라가 방대했던 고려는 각처에서 왜적들의 횡포에 시달리게 되자 이성계(李成桂)장군은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왜적을 소탕하기 위해 활동하고 있을 때이다.
이때 명나라 주원장(朱元璋)은 고려의 쇠망해가는 모습을 보고 도읍지인 서경(西京)즉 지금의 서안(西安)에서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을 압박하였다.
본시 서경은 천자(天子)가 도읍하는 중요한 요충지였으며 큰 나라는 당연히 西京에서 도읍하는 것이 상식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明나라 주원장의 압박이 강해지자 우왕(禑王)은 왜적(倭賊)을 토벌하고 있던 李成桂장군을 불렀던 것이다. 이때 우왕(禑王)은 李成桂장군에게 明나라를 칠 것을 명하자 이성계장군은 네 가지 이유를 들어 거절하였다.
그 첫째가 작은 병력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고 자칫 잘못하면 역적으로 되몰릴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었다.
둘째 여름에 병력을 출동할 수 없다고 했다.
셋째 나라를 다시 일으키려면 군비를 충분히 확보해야하고 적은 병력으로는 머나먼 원정을 할 수 없다고 하였다.
넷째 지금은 더운 여름이므로 비가 오게 되면 무기의 기능이 약화되고 군사들의 질병이 염려되므로 안 된다고 하여 거절했던 것이다.
李成桂장군이 물러난 후 문하시중(門下侍中) 즉 상감을 직접 보좌하는 일품(一品)벼슬에 있던 최영(崔瑩)이 우왕에게 말하였다.
내일 李成桂를 다시 불러 한번 더 명을 내려 보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삭탈관직을 시키라고 하였다.
다음날 우왕(禑王)은 이성계장군을 불러 다시 명령했으나 이성계는 똑같은 대답을 되풀이 하자 우왕은 이성계장군을 삭탈관직 시키고 고향으로 돌려보냈던 것이다.
이때 이성계장군은 눈물을 흘리고 高麗國의 앞날을 걱정하면서 하남성(河南省) 의주(義州)의 고향으로 향하였다.
義州는 지금 하남성(河南省)동북에 있는 급현(汲縣)이다. 황하가 흐르는 지류(支流)주변에 오리머리와 같은 푸른 녹색의 강이 흐른다고 하여 고려말에는 그곳을 압록강(鴨綠江)이라 불렀다. 이성계는 백마(白馬)를 타고 압록강변을 거닐고 있을 때 급보가 날아들었다.
최영(崔瑩)은 이때다 싶어 우왕에게 말하였다.
이성계를 삭탈관직 시켰으니 이성계를 따르는 많은 장군들과 군사들이 서경(西京)으로 쳐들어올지 모르니 빨리 왕은 피하라고 하였다.
최영은 우왕(禑王)이 도망가면 군사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고 이성계를 제거한 다음 조민수(趙敏修)장수를 왕으로 옹립하고 실권을 잡기 위함이었다. 이때 겁이 많은 우왕은 도망을 가게 되었을 때 이성계장군은 비록 평민의 신분이었으나 장수들이 급보를 전해 준 것이었다.
이성계는 즉시 백마를 타고 서경(西京)으로 행할 때 서쪽과 북쪽, 남쪽에서 임무활동을 하고 있던 장수들은 이성계가 서경으로 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사방에서 군사가 모여 들었다.
西京에 도착해 보니 우왕은 간곳이 없었다. 급히 군사를 시켜 찾아오게 하였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우왕때 고려 말은 혼란상태였다. 그것은 왕의 패륜적 행위로 말미암아 高麗國은 패망의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던 것이다.
<<李成桂는 고려를 치기위해 위화도 회군한 사실이 없다.>>
고려사절요, 고려사 그리고 고려도경을 찾아봐도 위화도회군을 했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또한 중국 고금지명대사전에도 義州는 있어도 위화도라는 지명은 없다. 뿐만 아니라 李成桂장군이 태어난 곳은 하남성(河南省) 급현(汲縣)인 義州태생이다.
최영의 간계에 의해 우왕(禑王)으로부터 삭탈관직 당한 후 고향인 義州주변에 있는 압록강(鴨綠江)변에서 백마(白馬)를 타고 고려를 생각하면서 걱정하고 있을 때 엄청난 비보가 날아들었다. 급히 말을 몰아 서경(西京)으로 달려간다는 소식을 들은 서북남(西北南)에서 달려온 장수와 장병들은 이성계장군의 진군에 합세하였던 것이다.
어떤 엉터리 역사학자가 이성계를 위화도 회군(回軍)을 하여 고려를 찬탈했다고 기록했는지 모르나 고려사(高麗史)에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이와 같이 조작된 기록으로 인해 충신(忠臣)인 李成桂를 역적으로 몰아 기록한 자가 누구인지를 가려내야 한다.
지금 조선왕조는 고려를 망하게 한 역적의 나라라고 알고 있다. 또 엉터리 역사를 배운 많은 국민들은 이성계를 역적으로 보고 있으며 조선이씨는 역적의 후손이라고 한다.
필자가 어떤 출판세미나에 참석했을 때 재야학자 한사람이 말하기를 李成桂는 역적이라고 공공연하게 축사하는 것을 직접 들었다.
필자는 언젠가는 이 사실을 역사적으로 밝힐 것을 결심하고 1995년 10월 드디어 새 고려사라는 방대한 저술을 출간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학자나 국민이 알지 못하고 있기에 이 기회를 통해 전주이씨의 뿌리 역사를 통해 밝히는 것이다.
이성계가 西京인 지금의 西安에 도착했을 때 우왕과 최영(崔瑩)은 보이지 아니했다. 병사를 시켜 급히 찾게 하였다. 태조(太祖) 李成桂l는 암방사(巖房寺)라는 절 북쪽고개에서 소라고동 소리를 불고 있던 병사를 데리고 와 수백명의 병사와 함께 우왕과 최영을 소리높이 불렀다.
이때 병사들은 우왕과 영비(寧妃)가 최영이와 함께 팔각전(八角殿)에 숨어있다고 하였다.
곽충보(郭忠輔)장수 등 3, 4명은 직접 팔각전(八角殿)이 있는 곳을 찾아가 최영(崔瑩)과 우왕(禑王)을 잡아 가두려 했다.
이때 최영은 눈물을 흘리면서 곽충보에게 절하며 빌었다.
그리고 최영은 이성계장군에게 말하기를 이번 사건은 나의 본심이 아니었다고 했다. 그리고 나라의 장래를 생각하여 백성들을 잘 살리기 위함이었다고 변명하였다.
이번 일이 잘못되어 곤란에 빠지게 되었으니 하늘도 나를 원망할 것이다. 이미 좋은 때가 다 지났으니 이 일을 어쩌랴 하면서 최영(崔瑩)은 눈물을 흘렸다.
반역당을 다스릴 군신회의에서는 최영(崔瑩)이 처음 발령을 받고 부임했던 고봉현(高峯縣), 즉 귀주성(貴州省) 평파현(平?縣)동쪽 20리에 귀향보내기로 했다. 이 일은 삼사(三司: 입법, 사법, 행정)에서 반대하였으나 이임인(李仁任)의 달변에 시행키로 했다.
다시 정미(丁未)일에는 여러 장수들이 성(城)안에서 회의가 있은 후 지장사(地藏寺)에 유배되어 있던 최영(崔瑩)을 합포(合浦), 즉 광동성(廣東省) 합포현 동쪽 75리로 유배시키기로 결정했다.
이때 송광미(宋光美)는 감숙성(甘肅省) 원주(原州), 즉 고원현(固原縣)으로, 안소(安沼)는 감숙성(甘肅省) 환현(環縣) 120리인 안변(安邊)으로, 정승가(鄭承可)는 절강성(浙江省) 영해현(寧海縣) 동북인 영해(寧海)에 각각 귀양 보내기로 했다.
한편 판밀직(判密直: 문서를 보관하는 직책)에 있던 인원보(印元寶)는 하남성(河南省) 통허현(通許縣)에 있는 함창(咸昌) 즉 함주(咸州)에, 동지밀직(同知密直: 판밀직과 비슷한 직책)에 있던 안주(安柱)는 섬서성(陝西省) 봉현(鳳縣) 즉 봉주(鳳州)로, 정희계(鄭熙啓)는 하남성(河南省) 음현(陰縣)인 음죽(陰竹)의 음지(陰地)로 각각 귀양 보내기로 했다고 고려사절요는 기록하고 있다.
이 당시 우왕(禑王)은 호남성(湖南省)에 있는 강화현(江華縣)에 새로운 국모와 함께 모시기로 했다.
한편 우왕(禑王) 14年 7月 합포(合浦)에 귀양 보낸 최영(崔瑩)을 사천성(四川省) 충현(忠縣)인 충주(忠州)로 다시 귀양 보내기로 했으며 이때 귀양 보낸 정승가(鄭承可)는 참수 시켰다고 했다.
그리고 조규(趙珪)는 섬서성(陝西省) 상남현(商南縣) 동북 40리인 각산(角山)으로, 조림(趙琳)은 섬서성(陝西省) 부곡현(府谷縣) 북쪽인 풍주(豊州)로 귀양 보냈다고 했다. 이때 안소(安沼)와 송광미(宋光美) 그리고 인원보(印元寶) 등은 유배지에서 참수 시켰다.
이상과 같이 이성계는 관직을 삭탈 당한 후 최영의 농간에 의해 이성계는 의주(義州)의 고향에서 평민으로 진군했다는 것을 고려사(高麗史) 등에서 잘 기록하고 있다. 고로 이성계는 고려를 치기위해 역적행각을 한 것이 아니고 高麗를 살리기 위해 충성어린 의주(義州)에서 진군(進軍)을 했음을 볼 수 있다.
첫댓글 고려를 살리기 위한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새 왕국을 개창한건 말이 안돼지 자기 욕심땜에 멀쩡한 나라 뭉개놓고 무슨소리하는건지 상식적으로도 말도 안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