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불교(禪佛敎)의 선문답에 대해서
여러분은 그 선(禪)에 대해서 상당히 애정을 가지고 있고,
우리나라에 거의 토착화된 우리나라의 종교이다시피 생각을 해가지고
그저 많이 지지를 하고 따르고 그러는데,
우리는 정말 객관적 입장에서 이성의 자리에서 냉철하게 봐야 되요.
한번 빠지면 나오기가 어렵기 때문에 우리가 선택을 잘해야 되는 거예요.
나는 불자들이 선불교(禪佛敎)를 따르는 것을 못마땅해 합니다.
우리 부처님께 선불교에 대해 평가한 점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 여기에서 그런 말을 못합니다.
선불교에서는 이런 말을 합니다.
지금 여담이지만 ‘이 서방이 술을 마시면 박 서방이 취한다.’ 이건 말도 안 되지.
이걸 격외(格外)라고 그래요 여러분.
선문답, 선문답이 하도 이상하니까 ‘이거 정말 도인 종교다’고 지금 그러거든.
알고 보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어요.
앞에서 스님이 말했듯이 본성의 자리를 보면, 천지미분 전, 의식 이전,
상대를(이원을) 초월해 있는, 그러면 그건 뭡니까?
절대이지요. 양극이 없어요. 절대예요.
일체가 하나여. 한 몸이어.
그렇기 때문에 이 서방이 술을 마시면 박 서방이 취한 거예요.
그래도 못 알아들어? 이걸 가지고 ‘햐~! 희한한 종교다.
이건 최고의 무슨 진리가 있구나’ 하는데, 별것 아니라니까.
여러분! 이걸 다시 더 쉽게 해석해 줄까?
나하고 어떤 상대하고 탁구를 치잖아.
나하고 A라는 사람하고 탁구를 치는데 여러분은 배꼽이 빠지도록 웃는다고.
왜 그런 줄 알아? 그 소식을 알아야 돼. 모든 것은 한 몸뚱이어.
진리로 보면 모든 게 한 몸뚱이어. 그렇게 보면 이건 아무것도 아닌 말이어.
이런 것을 알았다고 뭐 부처된다고? 부처라고?
내가 조금 뒤에 말하겠지만 이 세상에 제출하는 불가사의가 있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제불의 스승은 누구냐? 묻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 여러 부처님의 스승은 누구입니까’ 하고 큰스님한테 물으니까
‘판전의 송공이니라.’ 이런 말을 해.
판전(版殿)의 송공(松公)이니라.
판전(版殿)이라는 말은 나무 판자대기로 지은 집을 말해.
부처님을 모신 전각. 판전이라고 해. 판전의 송공이니라. 송은 소나무 송(松)자예요.
주인 공(公)자여. 판전의 송공이니라.
그러니 여러분, 동(東)을 물었는데 서(西)로 대답했잖아.
어젯밤 목마(木馬)는 울고,
목마(木馬)-나무 말(馬),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조각한 말(馬).
그 목마가 울더라 그거요. 석인(石人)은 춤을 추더라 그거요.
석인(石人)은 돌로 만든 사람이어요.
석인(石人)이 춤을 춥니까? 나무로 만든 말이 울겠습니까?
이게 이제 절대계의 소식이어요. 절대계의 이야기예요. 절대계의 입장에서...
절대계는 크고 작은 것이 없어요. 착하고 악한 것이 없어요.
길고 짧은 것이 없어요. 위아래가 없어요.
전부 한 덩어리예요. 그 입장에서 해석하는 거예요.
본성이 드러나게 되면 그건 일체 이원성(二元性)을 초월해 있기 때문에
감옥소에서 나온 기분은 맞아요. 있어요. 그 자유는 맛봐요. 만끽해요.
햐!~ 그래. 궁둥이 춤을 추는 거예요.
그러나 그것 가지고 거기가 부처자리는 아니어요. 절대 아니어요.
그런데 지금 그렇게 알고 있거든요. 이게 문제입니다. 심각한 문제예요.
‘보라! 큰 바다로부터 먼지구름이 일어나고’ 말이 되요?
‘대지로부터 파랑의 소리가 높다’ 이건 선승들이 하는 말이어.
그런다고 해서 이게 무슨 뭐 대단한 것이냐?
뭐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이런 동문서답의 말,
여러분! 이 격외의 문구가 너무너무도 이상하고...기가 막혀서 이거 도인인가 보다.
이거 부처다 하는 거예요 지금.
우리 영산불교에서 주장합니다.
무엇을, 어디를 성불로 보느냐? 이때까지 잘 몰랐어요.
무엇을, 어디를 성불로 보느냐?
선가(禪家)에서 마음을 깨친 것을 성불로 봐버렸어.
이건 아니어.
마음, 깨치고 보면 투~욱 터졌어. 주객(主客)이 없어.
허공과 같이 비어버렸어. 청정무구해. 이게 마음이야. 이걸 깨달은 거예요.
그런데 이걸 깨달은 후에 보림을 잘 해가지고,
정말로 깨달을 때까지의 노력보다도 더더욱 그 보다 더욱 더 쏟아가지고
용맹정진 해가지고 이 육신에 대한 착을 끊고,
그래야 이제 거기가 아라한이어.
무아행(無我行)으로 들어가서 육신의 이 탐진치를,
집착을 끊어버려야 이제 거기가 아라한이어.
자력으로 갈 때 말입니다. 이제 여기는 시작이어.
출처:2011년 자재 만현 큰스님 법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