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향(朴枝香· 69) 서울대 명예교수는 우리나라 역사학계를 대표하는 중진 학자다. 서울대 문리대 서양사학과 졸업 후 미국 뉴욕 주립대에서 영국 노동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한국영국사학회 회장과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다.
박 교수는 ‘좌파’에서 ‘우파’로 전향한 지식인이다. 유신체제 아래에서 대학 시절을 보낸 그는 “한국 현대사처럼 불의에 찬 역사가 없다. 민주주의의 원조인 영국 역사를 공부해 한국을 제대로 비판하겠다”며 미국 유학길에 올랐었다.
지금까지 16권의 저서를 낸 그는 2018년 8월 정년 후에도 공부하며 사회와 소통하고 있다. 퇴임 기념작인 <제국의 품격>과 <평등을 넘어 공정으로>(2021년), <윈스턴 처칠, 운명과 함께 걷다>(2023년) 등 최근 4년 7개월 동안 3권의 책을 잇따라 펴낸 박 교수를 2023년 4월 20일 서울대 관정도서관에서 만나 인터뷰를 했다.
- 미·중 전략 경쟁, 우크라이나 전쟁 같은 최근 세계의 흐름을 진단한다면?
“제2의 냉전기에 들어섰다고 본다. 지금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 자유 진영과 중국·러시아 등 전체주의 진영으로 대립 구도가 확연하다. 이번 냉전은 과거의 냉전과는 몇 가지가 다르다. 예전에는 소련이 주역이었으나 지금은 중국이 더 강력하고, 러시아는 종속 변수이다. 다만 지금은 미국과 중국이 경제적으로 밀접히 연결돼 있어서 미·소가 철저히 분리되었던 1차 냉전 때와는 아무래도 다른 모습을 보이지 않을까 한다.”
- 국제통화기금(IMF)은 "미국과 중국의 1인당 GDP 격차는 오히려 벌어지고 있으며, 향후 50년간 중국이 미국을 넘어설 수 없다"고 최근 전망했다. 한국에게는 어떤가?
“탈냉전 이후 30년 가까이 한국은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으로 발전하는 ‘안미경중(安美經中)’의 혜택을 누렸으나 이제는 그게 불가능해졌다. 특히 시진핑 중국 공산당 총서기의 공언대로, 중국이 대만 통일을 목표로 무력을 쓴다면, 한반도에 심각한 안보 위협이 된다. 북한의 김정은이 이 틈을 타 한국을 침공할 수 있어서다.”
-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조셉 나이 미국 하버드대교수의 지적대로, 중국을 과대평가해도 과소평가해도 안 될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친중국, 친북한 노선을 버린 것은 바람직하다. 다만 미국 역시 전지전능하지 않다는 점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국제사회에선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고 오직 이해관계만 있다’는 파머스톤 경의 금언도 있지 않나. 자국의 이익을 해치면서 다른 나라를 도와주는 나라는 절대 없다. 지도자와 국민들이 이 사실을 분명히 각인해야 한다.”
- K컬쳐, K스포츠 등의 약진으로 ‘한국이 선진국이 됐다’는 분위기다.
“폴 크루그먼과 같은 좌파 학자, 니얼 퍼거슨 같은 우파 학자들이 좌우를 막론하고 한국의 발전을 언급하며 최근 칭찬하는 걸 보면서 우리가 경제적으로는 선진국이 됐음을 실감한다. 그러나 국민들의 정신과 의식 수준, 법·제도 준수 측면에서 우리나라는 아직 선진국에 어림없다. 잘 먹고 잘 살기만 하면 선진국이 되는 게 아니다. 노래 몇 마디 갖고 우리가 세계를 제패한 것처럼 거만을 떨어서는 안 된다.”
박 교수의 이어지는 말이다.
“아테네와 그리스는 세계 최초 민주주의로, 로마는 관용적인 제국 경영과 시민 의식으로, 영국은 자유와 생명의 소중함을 알리고 산업혁명으로 인간의 삶의 질을 높이는 식으로 세계 역사에 이바지했다. 우리 민족도 물질적 풍요를 넘어 무엇인가 세계 역사에 남기도록 해야 한다. 우리의 노력에 따라 그럴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본다.”
- 역사학자 입장에서 봤을 때 그럴려먼 무엇이 절실한가?
“국민들의 수준이 높아야 한다. 세월호, 헬로윈 참사 같은 게 터지기만 하면 정부 탓, 남 탓만 하는 정신 상태로는 영원히 불가능하다. 한국이 일본을 추월했다는 얘기가 나올 때마다 피식 웃는다. 일본인의 자기 업(業)에 대한 치열함, 장인정신이 한국엔 얼마나 있나? 플라톤이 말하는 정의는 각자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며, 이게 세계를 정복한 서양 근대의 프로페셔널리즘과 직결된다. 이 점에서도 한국은 너무 취약하다.”
- 영국 국민과 비교하면 어떤가?
“2023년 한국 국민 수준은 1940년대 영국보다 못하다. 영국은 1940년 5월 독일군의 암호 체계인 이니그마(Enigma)를 일찌감치 해독했다. 2차 세계대전 동안 윈스턴 처칠은 해독한 이니그마 정보를 매일 보고 받았는데, 그의 비서실장 조차 이 사실을 몰랐다. 이 극비 정보는 30년동안 지켜졌다. 국가적 소명을 믿고 명령에 복종한 영국 국민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애국심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의 독일군 비밀암호 해독 작전을 다룬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 참조)
- 국민에게 영감을 준 처칠과 같은 지도자를 한국 현대사에서 찾는다면?
“아마도 박정희 대통령이 가장 근접한 것 같다. 그는 국민들에게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자’는 분명한 비전을 내걸고 영감을 발휘했다. 반대 시위도 있었지만 대다수 국민들은 박 대통령의 비전에 공감하고 호응했다. ‘한강의 기적’은 국민들 스스로를 바꾸도록 이끈 박정희라는 국가 지도자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외부 환경이 좋아서 거저 얻어낸 게 절대 아니다.”
- 1987년 민주화 이후 한국 대통령과 처칠·대처 등을 비교한다면?
“처칠이나 대처 같은 국가 지도자들은 공통적으로 거짓말을 하지 않고 정직했다. 김영삼 이후 김대중, 노무현 등 우리나라 대통령들은 여러 이유에서 거짓말을 밥 먹듯이 했다. 동일한 선상에서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리이다. 윈스턴 처칠 같은 이는 인간의 자유·존엄성 수호라는 역사적 대의(大義)에 입각해 히틀러에 맞서 싸웠고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우리나라 문민 대통령들은 인류 보편적 가치에는 눈감고 좁은 한반도라는 변방적 사고에 머물렀다. 민주화와 산업화를 완성한 우리는 이제 인류 보편 가치에 눈을 돌려야 한다. 국가 지도자가 역사적 사명감을 갖고 움직일 때, 세계 역사에서 한국의 자리가 마련될 것이다.”
- 한국의 보수우파는 영국 보수당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나?
“19세기 후반 침체한 영국 보수당을 중흥시킨 벤저민 디즈레일리는 부자와 빈자라는 ‘두 개의 국민’으로 나눠진 영국을 ‘하나의 국민(one nation)’으로 묶고 ‘강하고 위대한 영국’이란 애국주의를 내세웠다. 한국 우파도 노무현·문재인·이재명 등이 악화시킨 반목과 증오 대신 대한민국의 결속과 통합에 힘써야 한다. 한국 우파는 좌파를 능가하는 대안(代案)과 정책을 내야 한다.”
- 대한민국 현대사의 원동력이 궁금하다. 한국의 미래는 어떻게 보나?
“한국인의 한(恨)이 해방후 적절한 국가 지도자를 만나 성취욕과 성공 열망으로 폭발했다. 그런 한(恨)이 사라진 지금 청년 세대는 성취욕도 높지 않다. 따라서 앞으로는 기대를 낮춰야 한다. 미래의 가장 큰 위협 가운데 하나는 인구 감소이다. 이를 해결하려면 찔끔찔끔 몇 십만원씩 나눠주는 수준이 아니라 ‘아기가 나라의 보물이다’는 생각이 들게 대학교육까지 책임진다는 대담한 접근이 필요하다. 아니면 외국인에게 이민 문호를 과감하게 열어야 한다.”
- 우리나라 지도자들이 본받을 만한 서양 리더를 꼽는다면?
“현존하는 인물 가운데는 마크롱 대통령이다. 그는 우리나라 민노총보다 강력하고 100년 넘는 역사를 지닌 좌파 프랑스 노동총연맹(CGT)의 격렬한 반대를 물리치고 연금 개혁을 관철했다. 그는 마가렛 대처 이후 가장 ‘배짱’[guts] 있는 정치가이다. 한 명 더 꼽는다면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다. 유레카 대학 출신이란 볼품없는 학력으로 시작은 미미했지만 그는 소통력과 경제 회생, 소련과의 냉전 대결 승리로 위대한 대통령이 됐다.”
- 사리사욕을 초월한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말인가?
“그렇다. 그런 점에서 수 년 전 무상급식을 놓고 자기 직(職)을 내건 오세훈 서울시장을 높게 평가한다. 물론 정세를 잘못 판단한 잘못을 범했지만, 오 시장은 최소한 사욕을 초월한 리더의 모습을 보여줬다. 스스로를 보수우파라 여기는 사람들은 자신의 것을 더 많이 양보하고 베풀어야 한다. 이미 가진 것을 조금이라도 더 가지려 악착같이 싸워서는 암담하다.”
- 마지막으로 윤석열 정부와 국민들께 한 마디 하신다면?
“서울대 법대와 검사 출신들은 한국의 최고 엘리트이다. 하지만 자기들끼리만 독주해서는 성공할 수 없다. 똑똑하고 잘 난 사람들이 사회 곳곳에 많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국민들과 함께 같이 가야 한다. 윤 대통령이 연금, 노동, 교육개혁 가운데 하나라도 제대로 성공시키면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처칠처럼 영감을 주어 국민들이 스스로 그 길을 택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무척 어려운 일이지만. 국민들도 정치인 탓, 나라 탓만 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삶에 책임지는 독립적 개인이 많아야 진짜 선진국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