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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형제회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마태 14,1-12
오늘 복음은 마음 아픈 이야기입니다.
진실을 말한 세례자 요한이 그 진실 때문에 목숨을 잃습니다. 그는 권력 앞에서도 굽히지 않고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번 말하였습니다. 진실을 ‘여러 번’ 말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정작 비극의 중심에는 ‘헤로데의 나약함’이 있습니다. 그는 요한을 의로운 사람으로 여겨 두려워하면서도, 경솔한 맹세와 ‘손님들 앞이라서’라는 체면 때문에 양심을 거슬러 요한을 죽입니다. ‘마음이 괴로웠지만’ 그렇게 한 것입니다. 사람의 눈치가 양심을 이긴 순간입니다.
성 암브로시오는 바로 이 ‘권력 앞의 진실’을 몸소 살아 낸 주교입니다. 그는 황제 테오도시우스가 큰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 앞에서 굽히지 않고 참회를 요구하였습니다. 암브로시오에게 주교는 권력의 눈치를 보는 자리가 아니라, 하느님의 진실을 지키는 자리였습니다. 그는 일깨웁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진실을 잃고, 하느님을 두려워하면 진실 안에 굳게 선다고.
오늘 기리는 성 알폰소 리구오리는
‘양심’을 깊이 가르친 윤리 신학의 대가입니다. 그는 사람들이 지나친 엄격함에도, 안일한 느슨함에도 빠지지 않고 ‘바르게 형성된 양심’을 따르도록 자상하게 이끌었습니다. 헤로데가 양심을 저버린 자리에서, 알폰소는 양심을 바로 세우는 길을 보여 줍니다.
영성 주간을 마무리하며 보면 오늘 복음은 묻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뭐라 할까’와 ‘하느님의 뜻’ 사이에서 무엇을 더 두려워하는가?
곧은 양심은 때로 손해와 외로움을 부르지만, 그 곧음만이 영혼을 자유롭게 합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진실을 ‘여러 번’ 말할 용기가 있는가?
나는 ‘손님들 앞이라서’ 양심을 굽히지 않는가?
나는 사람보다 하느님을 더 두려워하는가?
나는 내 양심을 바르게 형성하고 있는가?
주님,
사람의 눈치보다 당신의 뜻을 더 두려워하게 하소서. 요한처럼 진실을 곧게 말하게 하시고, 바르게 형성된 양심으로 자유롭게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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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포르치운쿨라의 성 마리아 축일>
제 생각에 프란치스코 성인의 3대 축일 하면 프란치스코 대축일, 프란치스코 오상 축일 그리고 오늘 우리가 지내는 포르치운쿨라 축일입니다.
이렇게 큰 축일이니 우리가 성대하게 지내야 마땅한데 올해는 그럴 이유가 더 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올해는 프란치스코 파스카 800주년이고, 프란치스칸들 뿐 아니라 교회가 올해를 프란치스코 희년으로 정하고 성대하게 기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작년에 대희년을 지낸 우리 교회가 올해 프란치스코 희년을 연속으로 그리고 전 교회적으로 지내기로 정한 것에 대단히 놀랐습니다.
이렇게까지 교회가 프란치스코를 대단하게 생각한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정작 우리가 성대하게 기념치 않는다면 그건 거의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축일을 성대하게 지내는 것은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포르치운쿨라의 원초적인 삶을 재조명하고 배우고 따라서 살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포르치운쿨라의 원초적인 공동체는 어떤 공동체입니까? 이에 대해 프란치스코의 전기 작가 토마스 첼라노의 묘사는 이렇습니다.
“사실 그들은 모든 이에게 속해 있는 낮은 자들이었고 항상 낮은 자리를 좋아하고, 조금이라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일에 종사하기를 원하였다.
이렇게 참된 겸손을 튼튼한 기초로 하였기에 잘 정리된 모든 덕행의 영적 건물이 그들 안에 솟게 되었다.” 그러므로 초기 공동체는 겸손과 작음의 공동체였습니다.
그러나 초기 공동체는 무엇보다도 사랑의 공동체였습니다.
“얼마나 큰 사랑이 이 경건한 단체 안에서 피어올랐던가! 어디에 가든지 혹은 우연히 길에서 마주치면 사랑이 솟구쳐 올랐고, 다른 어떤 사랑과도 비교할 수 없는 진실한 애정의 씨앗인 사랑을 서로 뿌렸다.”
다음으로 초기 공동체는 순종의 공동체였습니다.
“순종을 잘하는 이 기사들은 거룩한 순종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순종의 명령이 떨어지기도 전에 그들은 명령을 수행할 채비를 차렸다.”
마지막으로 초기 공동체는 가난의 공동체였습니다.
“지극히 거룩한 가난의 추종자들은 가진 것도 애착할 것도 없었기에 결과적으로 무엇을 잃을까 두려워할 것도 없었고 이러한 삶에 머물도록 경건한 걸식을 하였고, 여행 중에 불편함을 겪는 처지였서도 어디에서건 밤의 거처를 걱정할 줄을 몰랐다.”
그래서 저희 포르치운쿨라 행진단도 행진하는 내내 이런 삶을 흉내 내려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희는 그저 흉내만 내려 애쓰는 정도였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제주의 첫 재속프란치스칸이자 프란치스칸 삶을 성인의 경지에서 사신 최정숙 선생님의 발자취도 따라 걸었습니다.
사실 저는 최정숙 선생님을 우리가 단순히 본받아야 할 모범으로 삼을 뿐 아니라 성인품에 올리기 위한 전 단계로서 가경자가 되셨으면 하는 욕심이 있습니다.
이런 욕심은 비단 최정숙 선생님뿐 아니기에 작년에는 광주 김익진 선생님의 길을 걸었고 올해는 최정숙 선생님의 발자취를 따라 걸으려 한 것이었는데 마침 최정숙 선생님을 기리는 모임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우리 제주 지구의 도움뿐 아니라 그들의 도움도 받아 이 길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이분들이 최정숙 선생님의 뜻을 이어받아 브룬디에 선생님의 이름을 딴 학교를 세우고 그곳의 학생들을 장학생으로 키우고 있음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해도 되나?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이들을 우리 축제에 초대해 공유하는 것도 좋으리라는 마음으로 초대했는데 최정숙 선생님을 기리는 것이 이들뿐 아니라 교회 내적으로는 우리가 그 역할을 하면 좋겠다는 욕심 때문에 그들을 초대하였습니다.
저의 이 초대가 주제넘은 짓이 아니길 빌며 우리의 위대한 선배이며 모범인 최정숙 선생님에 대해서 클라라 수녀님을 포함하여 우리 프란치스칸들이 좀 더 알게 되길 바라는 그런 간절한 마음에서 욕심부렸음을 이해해 주시기를 비는 마음입니다.
오늘 나눔은 제주 지구와 함께하는 포르치운쿨라 미사 강론입니다. 이점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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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형제회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있는 것", "주어진 것", "작은 몫"으로도 만족하는 법을 배워가는 삶을 향해~~~>
2026년 8월 1일 토요일 - 포르치운콜라의 천사들의 동정 마리아 축일 (8월 2일에서 이동)
오늘은 본래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기념일(8월 1일)이지만, 8월 2일에 지내는 포르치운쿨라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축일이 올해는 주일이어서 오늘로 축일을 이동하여 기념하고자 합니다. 특별히 프란치스코 성인 선종 800주년에 맞이하는 축일이고, 또 프란치스코 성인이 이곳 포르치운콜라 성당 바로 옆에서 귀천하였기에 이렇게 축일 이동으로 기념하게 되었습니다.
포르치운콜라라는 이름은 이탈리아어 포르치오네(porzione, 작은 몫)와 아그리콜라(agricola, 농사 또는 농부)에서 유래한 말이라고 합니다. 즉 "작은 몫의 땅"이요 "매우 작은 장소"를 의미합니다. 6세기경부터 존재했던 이 자그만 성당은 이탈리아 중부의 움브리아 지역(아시시가 속해 있는 곳) 수바시오 산에 위치한 성 베네딕도회 수도원 소유였습니다. 이곳은 수도원 농장에서 일하던 수사들과 사람들이 기도 시간에 사용하던 장소였습니다.
이 성당은 한동안 폐허가 되어 있었지만 프란치스코가 성 다미아노 성당 십자가의 예수님으로부터 "쓰러져 가는 나의 집을 고쳐다오"라는 부탁을 받고 수리한 세 개의 성당 중 하나입니다.
프란치스코와 그의 형제들이 이곳에서 수도 생활을 시작하려 하자, 성 베네딕도회 수도원은 이를 무상으로 내어주려고 했지만 프란치스코 성인은 이 작은 경당마저 소유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해마다 한 번 물고기 한 바구니를 바치며 이곳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작은 몫"을 선택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자그만 것으로 만족하는 법을 배워가기 위한 하나의 지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전에 한 번 언급해 드린 대로, 강원도 산골의 폐가를 손수 고쳐서 살고 있었던 법정 스님의 이야기가 기억납니다. "사람들이 가끔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합니다. '왜 이런 곳에서 사십니까?'라고요. 그러면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있는 것으로 만족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입니다.'라고요."
'있는 것'으로 만족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지금 주어진 자그만 것의 소중함을 배워가는 것이고, 그 소중함에 대해 감사하는 법을 배워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대개 더 많은 것을 무의식적으로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그렇게 하면 더 행복해질 것처럼 착각하면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착각일 뿐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착각과 환상에서 벗어나 "있는 것", "주어진 것", "작은 몫"으로도 그 소중함을 알고 그 소중함을 감사의 정으로 마음에 품고 살아갈 수 있다면 우리는 참된 사랑과 행복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참으로 사랑하며 행복해질 수 있는 이런 배움의 길에 역행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곰곰이 성찰해 볼 일입니다.
이미 오래 전에 에른스트 슈마허(Ernst Friedrich. Schumacher)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경제 성장이라는 게 경제학, 물리학, 화학, 기술 따위의 관점에서 보면 뚜렷한 한계가 없지만 환경과학의 관점에서 보면 필연적으로 결정적인 장애 요인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이다. 오로지 부를 추구하는 데서만 삶의 충만함을 찾는 생활 태도 간단히 말해서 물질주의는 이 세계에 적합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 세계는 주변 환경이 엄격히 유한한 상황에서 스스로를 제한하는 원리를 내부에 담고 있기 때문이다."
슈마허에 의하면 우리가 추구하는 "성장"이나 "부유함"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부자연스러운 것이기도 하다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연스럽다 함'이나 '부자연스럽다 함'은 우리 에고가 추구하는 것의 관점에서 그러한 것이겠지요?!
그러니 우리가 정말로 자연스럽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 정신에게 익숙해 있는 "더 많이"의 무의식적 정신구조를 의식하고 이를 내려놓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수양)이 꼭 필요할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추구했던 "작음"(minoritas)의 영성이 의미하는 바는 바로 이것입니다.
여기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의식함"입니다. 우리가 잘못되어 가고 있는 상황을 의식하지 못한다면 그 방향을 우리는 계속 고수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삶을 살아가면서 "주어진 것", "자그마한 것"으로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경험보다 우리 에고의 무의식적 추구가 훨씬 더 강하게 우리의 정신 세계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 진정한 삶의 지혜를 살아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 프란치스코 선종 800주년에 "포르치운콜라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을 지내며 다시 한번 우리의 자그만 경험들을 되짚어 보고 새겨 보면 좋겠습니다.
아마도 우리가 오늘의 기념일을 지내는 가장 주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합니다.
물론 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 삶을 충만하게 살다가 언젠가는 맞이해야 할 이 세상 삶의 마침표를 찍고 참된 삶, 영원한 삶으로 옮겨 가기 위해서는 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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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형제회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우리는 성경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성경은 평범한 사람들이 신앙의 길 위에서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을 살아가는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사랑의 렌즈를 통해 성경을 읽기
우리는 성경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2026년 7월 31일 금요일
CAC의 교수진인 브라이언 맥라렌(Brian McLaren)은 성경을 사랑의 눈으로 읽을 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안에서 선행과 자비의 삶으로 나아가도록 영감을 받았음을 강조합니다:
성경에 충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따르며 하느님의 선하신 창조 세계 안에서 선행을 실천하는 착한 사람이 되고자 성경을 사용했을 때 풍요롭게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다른 이들을 위협하거나 위압하고 잘못을 증명하는 무기로 삼았을 때는 쇠퇴하고 방황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성경을 가장 사랑한다고 말하는 이들조차 때로는 그 본래 목적을 잊고 성경을 다른 용도로 사용해 온 경우가 있었습니다.
다시금 생각해 봅시다. 성경의 참된 목적을 깨달은 그리스도인들(개신교, 가톨릭, 정교회, 진보와 보수, 은사주의 등 어떤 전통이든)은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병든 이들을 치유하고 마음을 키우기 위해 병원과 학교를 세웠습니다…. 그들은 세계 곳곳의 가난한 이들에게 기꺼이 재물을 나누었고, 인종과 민족, 계급의 장벽을 넘어 모든 이를 형제자매로 받아들였습니다. 또한 신앙을 배반하거나 타인에게 고통을 주기보다 스스로 고난을 선택했습니다…. 교사, 농부, 벽돌공, 간호사, 학자, 기술자, 상인, 공직자, 과학자, 가정주부, 택시기사, 요리사로서 각자의 자리에서 특별한 소명과 사랑, 기쁨을 가지고 일했습니다. 그들의 "선행"은 곧 매일의 "좋은 일"을 성실히 수행하는 것이었으며, 이는 하느님의 창조 안에서 거룩한 성소명으로 살아가는 삶이었습니다.
왜일까요? 그들은 성경의 참된 목적을 깨달았기에, 성경 말씀을 따라 세상에 필요한 선행을 실천할 힘을 얻었습니다. 그들의 말과 행실은 복음을 전하는 일꾼으로서 합당하게 해주었습니다. 물론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삶은 자주 놀라울 만큼 아름다웠습니다.
맥라렌은 사랑의 렌즈를 통해 성경을 읽으라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선택이 있습니다:
우리의 성경 읽기가 그리스도의 길을 배반할 것인가, 아니면 하느님의 꿈을 향해 나아가도록 인도할 것인가? 우리는 그 이야기가 우리 안에서, 또 우리를 통해 계속 이어지도록 맡길 것인가? 그 이야기가 본래의 방향을 따라, 하느님의 꺼지지 않는 사랑의 꿈, 곧 하느님 나라로 나아가도록 허락할 것인가?
이러한 접근은… 예수님께서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가르치신 눈으로 가나안 정복 이야기를 읽을 때 느끼는 고통을 덜어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려 줍니다. 성경은 시대를 초월한 도덕 규범을 찾아보는 백과사전이 아니라, 폭력과 죄로 가득한… 세상 안에서 하느님께서 새로운 삶으로 사람들을 부르시는 살아 있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평범한 이들이 믿음과 희망, 사랑의 여정을 걸어가는 투쟁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도전합니다. 참으로 성경에 충실한 삶이란 고대의 황금기에 집착하거나 그 시대 사람들에게 주어진 말씀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배우며 하느님의 이야기와 뜻, 꿈이 오늘 우리와 우리의 자녀들 안에서 계속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바라신 것은 무조건적인 사랑임을 저는 깨닫습니다. 그것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지만, 인류의 모든 상처와 병을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 Reino P.
References
Brian D. McLaren, A Generous Orthodoxy (Zondervan, 2004), 165–166, 171.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Jenna Keiper, untitled (detail), 2020, photo, New Mexico.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마치 시력을 교정하기 위해 쓰는 안경처럼, 사랑은 성경 말씀을 더 깊이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게 해 주는 렌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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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형제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결코 묶어둘 수 없는 진리>
예레 26,11-16.24; 마태 14,1-12
예언자 예레미야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다는 이유로 죽음의 선고를 받을 위기에 놓입니다. 그러나 그는 놀라운 자유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이 집과 이 도성에 대하여 여러분이 들으신 이것을 예언하게 하셨습니다”(26,12). 예레미야는 자신을 변호하지 않고 자신에게 맡겨진 진리를 증언합니다. 예언자의 충실함은 성공과 실패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대한 순명에 달려 있습니다.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 역시 죽음으로써 침묵을 강요당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헤로데는 그의 머리를 베었지만 그가 선포한 진리까지 없앨 수는 없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거부될 수는 있어도 결코 묶어둘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박해받는 예언자들은 존재합니다. 반드시 법정에 서거나 죽음을 당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인간의 존엄과 정의, 복음의 진리를 말한다는 이유로 조롱받고 외면당하며 배척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또한 더욱 조용한 형태의 박해도 있습니다. 말해야 할 때 침묵하는 두려움,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마음, 세상의 가치에 자신을 맞추려는 유혹입니다. 우리는 때로 복음을 분명히 전해야 할 순간에도 침묵을 선택합니다. 진리가 거부되는 이유는 그것이 거짓이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회개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예레미야와 세례자 요한은 오늘 우리에게 묻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충실하기 위해 무엇을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복음의 헤로데는 내적으로 분열된 사람입니다. 그는 “군중이 두려웠고”(14,5), 또한 “괴로워하였지만”(14,9) 결국 옳은 일을 하기보다 자기 체면과 권력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바꾸고 싶지 않은 선택 때문에 괴로움을 자초합니다. 헤로데는 무엇이 옳은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선택할 용기가 없었습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뜻을 몰라서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보다, 알면서도 더 편한 길을 선택하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문제는 하느님의 뜻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살아갈 용기가 부족한 데 있습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참된 자유가 복음에 대한 충실함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삶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그는 사회적 명예와 재물, 인간적인 안전을 내려놓고 가난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만을 따랐습니다. 멸시와 오해를 받으면서도 평화와 회개의 복음을 선포하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순명은 단순히 명령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주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삶이었습니다. 예레미야와 세례자 요한 그리고 성 프란치스코 모두 사람들의 찬사를 구하지 않고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에 충실했습니다. 겸손하게 선포된 진리는 인간의 연약함을 넘어서는 힘을 지닙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돌아보라고 초대하십니다. 우리 모두가 세례자 요한처럼 목숨을 바치도록 부름받은 것은 아닐지라도, 매일 교만과 두려움, 인정받고 싶은 욕심을 죽이는 삶으로 부름받고 있습니다.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는 용기와 오해를 받아들이는 겸손, 그리고 자신의 편안함보다 복음을 먼저 선택하는 내적 자유를 실천합시다. 세상의 수많은 목소리보다 먼저 주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우리 삶 전체가 하느님께서 맡겨 주신 진리를 겸손하고도 끈기 있게 증언하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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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형제회 이기남 마르첼리노 마리아 수사님]
<기도와 영적 여정 11 오름에서 내어줌으로>
프란치스칸 기도가 완성하는 수도승 전통
수도승들의 영적 여정은 인간이 하느님을 향하여 한 걸음씩 올라가는 길이었습니다. 그 길은 결코 잘못된 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비우고, 마음을 정화하며, 하느님을 향한 갈망을 잃지 않도록 이끌어 준 교회의 소중한 유산이었습니다. 광야의 침묵과 수도원의 기도는 수많은 성인들을 길러 냈고, 교회는 그들의 눈물과 기도 위에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역사는 언제나 더 깊은 사랑으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인간이 하느님께 올라가려는 갈망보다 먼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내려오시는 사랑이 있었다는 사실을 프란치스코는 다시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영적 여정의 방향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그 출발점을 새롭게 하였습니다. 인간의 갈망보다 앞서는 것은 하느님의 갈망이며, 인간의 사랑보다 먼저인 것은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복음의 진실을 삶으로 증언하였습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칸 기도의 중심에는 언제나 육화가 있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사건은 단순히 신앙의 한 교리가 아니라, 모든 영성의 방향을 결정하는 기준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낮추어 인간의 삶 안으로 들어오셨다면, 우리 역시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세상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간다는 것은 사람에게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더욱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름에서 내어줌으로의 전환입니다. 수도승 전통이 자신의 마음을 정화하여 하느님께 올라가는 길을 강조하였다면, 프란치스칸 영성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 세상으로 흘려보내는 길을 강조합니다. 하나는 하느님을 향한 인간의 순례를 보여 주고, 다른 하나는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순례를 보여 줍니다. 이 두 길은 서로 대립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서로를 완성합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수록 더욱 자신을 내어줄 수 있고, 자신을 내어줄수록 더욱 깊이 하느님 안에 머물게 됩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끊임없는 자기 비움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을 낮추는 것을 덕행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먼저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그 길을 걸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영광을 붙잡지 않으시고 종의 모습을 취하셨듯이, 프란치스코도 자신을 소유하려 하지 않고 자신을 선물로 내어주었습니다. 그는 가난을 선택하였고, 형제들을 선택하였으며, 가장 작은 이들의 삶을 선택하였습니다. 그것은 희생을 위한 희생이 아니라, 사랑의 본질이 내어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참된 기도는 언제나 자신을 선물로 바치게 합니다. 기도가 깊어질수록 사람은 더 많이 가지려 하지 않고 더 많이 나누려 합니다. 더 높아지려 하지 않고 더 낮아지려 합니다. 더 인정받으려 하지 않고 더 사랑하려 합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생명은 서로를 붙잡는 생명이 아니라 서로를 끝없이 내어주는 생명입니다. 성부는 자신을 온전히 성자에게 내어주시고, 성자는 자신을 온전히 성부께 돌려드리며, 성령은 그 사랑의 흐름 자체이십니다. 프란치스칸 기도는 바로 이 삼위일체의 사랑 안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성숙은 얼마나 높은 신비를 체험했는가로 판단되지 않습니다. 얼마나 많이 사랑하게 되었는가, 얼마나 오래 기다려 줄 수 있는가, 얼마나 기쁘게 용서할 수 있는가, 얼마나 자유롭게 자신을 내어줄 수 있는가가 기도의 깊이를 말해 줍니다. 하느님께 가까워질수록 사람은 더욱 따뜻해지고, 더욱 온유해지며, 더욱 단순해집니다. 이것이 프란치스코의 성덕이었고, 클라라의 아름다움이었습니다.
결국 기도의 마지막 계단은 더 이상 오르는 계단이 아닙니다. 마지막 계단은 자신을 내어주는 자리입니다. 그곳에서 인간은 비로소 그리스도의 삶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 높은 곳으로 올라가신 분이기 이전에, 인간의 가장 낮은 자리까지 내려오신 분이셨습니다. 그 길을 따르는 사람도 높은 곳을 향해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낮은 곳을 향해 자신을 내어줍니다. 바로 그곳에서 하느님의 영광은 가장 찬란하게 빛납니다.
프란치스코는 산 다미아노 십자가 앞에서 이 진실을 평생 잊지 않았습니다. 십자가는 하늘을 향한 사다리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이 인간에게 내려온 다리였습니다. 그는 그 다리 위를 걸으며 하느님께 다가갔고, 동시에 형제들에게 다가갔으며, 피조물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래서 그의 기도는 언제나 관계를 낳았고, 관계는 사랑을 낳았으며, 사랑은 다시 그리스도를 세상 안에 살아 계시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프란치스칸 기도가 수도승 전통을 완성하는 이유입니다. 기도는 더 이상 나 혼자 하느님께 오르는 길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를 통하여 세상으로 흘러가시는 길이 됩니다. 오름은 내어줌으로 완성되고, 관상은 사랑으로 완성되며, 침묵은 형제애로 완성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여정은 결국 하나의 복음으로 모아집니다. 사랑은 언제나 자신을 내어주는 쪽으로 흐릅니다. 기도는 바로 그 사랑의 흐름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며, 그 흐름을 막지 않고 세상 끝까지 흘려보내는 삶입니다. 그 삶이 프란치스코가 걸었던 길이며, 오늘 우리 모두가 다시 걸어야 할 복음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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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마태14,4)
<'예언자의 소명!'>
오늘 복음(마태14,1-2)의 제목은 '헤로데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다'와 '세례자 요한의 죽음'입니다.
예수님 당시 강한 권력의 상징이었던 헤로데가 예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한 소문을 듣고, 시종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다. 그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마태14,2) 헤로데는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보다도 못한 분으로 인식합니다.
예수님에 앞서 파견된 선구자요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인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의 칼에 의해 순교했습니다.
"그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마태14,4) 자기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를 아내로 차지한 헤로데의 불의를 지적하다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예언자의 소명'에 대해 묵상해 봅니다.
성경에는 많은 예언자들이 등장합니다.
'예언자(prophet)'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들'입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심부름꾼들'입니다. 예언자는 '세상에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하느님의 정의를 외치는 사람들'입니다. 예언자는 '끊임없이 예수님을 닮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그래서 세상에 예수님을 드러내는 사람들'입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간절한 외침인 회개를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요즘 독서에 등장하는 예레미야 예언자처럼.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세례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모든 이'는 '하느님의 예언자들'입니다. 그중에서도 보다 더 특별한 예언자들이 있는데, 그들이 바로 '사제들(성직자들)'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을 올바로 이끄는 사명이 그들에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2013년 11월 24일에 반포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첫 번째 권고문인 '복음의 기쁨(Evangelli Gaudium)'에서 말씀하시는 교황님의 권고가 저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아마 모든 성직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을 것이고, 어떤 분들에게는 꽤나 불편하게도 들려 왔을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가(사제가) 마음을 열어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시간을 내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말씀이 자신의 삶에 와 닿지 못하게 한다면, 그 말씀이 자신을 반성하도록 이끌지 못한다면, 그 말씀이 자신에게 권고가 되지 않는다면, 그 말씀이 자신을 흔들어 놓지 않는다면, 그 말씀과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내지 않는다면, 그는 분명히 거짓 예언자, 사기꾼, 협잡꾼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복음의 기쁨, 151항)
우리 모두 참 예언자들이 되려고 노력합시다! 이 땅에 참 예언자의 모습을 지닌 사제들이 많아지게 해 달라고 기도합시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제 의지의 손에 내맡기셨다. 네가 원하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니 충실하게 사는 것은 네 뜻에 달려 있다. 사람 앞에는 생명과 죽음이 있으니 어느 것이나 바라는 대로 받으리라."(집회15,14ㄴ-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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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 시대 또 다른 순교자, 노인들!>
구약과 신약을 잇는 대 예언자 세례자 요한의 죽음, 인간적으로 바라보면 너무나 안타깝고 허탈하고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메시아의 선구자답게 장엄하게 혹은 황홀하게 마지막을 장식해야 하는데, 깊은 지하 감옥에 갇혀 있다가, 악인들의 간계와 실수로 참수당하니,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살아생전 우리에게 보여준, 그 찬란하고 강직한 삶과는 너무나 비교되는 비참하고 초라한 죽음 앞에, 하느님의 뜻이 대체 어디 있는가 고민하게 됩니다. 위대한 마지막 대 예언자가 교활하기가 하늘을 찌르는 악한 남녀 헤로데와 헤로디아, 그녀 딸의 노리갯감이 되어 참수당하다니, 어이가 없기도 합니다.
모든 순교자들의 삶과 죽음이 그러한 것 같습니다.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면 어처구니가 없고 이해가 안되는 순교자들의 죽음입니다.
그러나 우리 순교자들의 시선은 이미 이 지상을 넘어 또 다른 세상 하느님 나라를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지상의 삶도 의미가 있었지만, 그들의 마음은 이미 천상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 살아남는 것도 좋지만, 주님 나라로 건너가는 것은 더 큰 기쁨이었습니다. 따라서 억울한 죽음조차도 주님 때문이라면 그러려니 하고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땅 위에 흩뿌려진 순교자들의 땀과 피는 결코 헛된 것이 아닐 것입니다. 공평하신 주님께서 그들의 희생과 죽음을 나몰라라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백 배 천 배의 상급과 영예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더 이상 피를 흘리는 박해가 없는 이 시대, 교회는 백색 순교, 녹색 순교, 땀의 순교를 강조합니다. 어떠한 방식으로 살아가던 각자가 처한 위치에서 자신의 삶과 땀과 수고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증언하는 행위를 이 시대 순교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축일을 기념하는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님의 생애가 참으로 돋보입니다. 그는 당시로서는 깜짝 놀랄 정도로 장수하였습니다. 1696년에 출생하셔서 1787년 돌아가셨으니 만 91년을 사셨습니다.
건강하게 장수하셨으면 좋으련만 만년에 이런저런 병고로 큰 고생을 하셨습니다. 알폰소의 자취가 남아있는 성화들을 보면 성인의 고개가 똑바로 서있지 않고 약간 삐딱합니다. 대체 왜 그런가 알아봤더니 그분의 한평생은 참으로 혹독했더군요.
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71세 되던 해 당시로서는 불치병인 류머티즘에 걸려 목이 심하게 굽어버렸습니다. 후에 각도가 조금 완화가 되기는 했지만, 그 불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굽은 목 때문에 턱이 가슴을 눌러 항상 상처가 남아있었습니다.
그렇게 그의 한평생은 다양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끊이지 않았던 힘겨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수도회 설립자로서 이런저런 고민거리가 많았던 그는 만성 두통에 시달렸는데, 그럼에도 집필을 계속했습니다. 얼마나 두통이 심했으면 왼손으로는 차가운 대리석 조각으로 두통 부위를 마사지하며 오른손으로 글을 쓸 정도였습니다.
대성인이자 교회 박사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알폰소도 우리가 겪는 이상의 고통과 시련을 겪으셨다는 것, 수시로 와 닿는 깊은 상처에 속수무책이었다는 것 그 자체로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고통이 너무 클 때는 만사 제쳐놓고 간절히 기도하면서 하느님의 때만을 기다렸습니다. 시련이 크면 클수록 더욱 성모님께 매달리면서 그분의 도움을 청했습니다. 탁월한 성모 신심의 소유자였던 그에게 성모님께서도 많은 중재와 도움을 베푸셨습니다.
성모님의 전구로 그는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며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장수했습니다. 그는 자주 성모님과 깊이 통교하는 은총을 입었습니다. 성모님의 각별한 보살핌에 감동을 주체하지 못한 그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습니다.
“지금까지 제게 일어난 모든 좋은 일들, 저의 회개와 성소 여정, 그리고 또 다른 수많은 은총들은 모두 당신이 하신 일입니다. 당신은 제가 모든 것 위에 어머니 당신을 사랑하기를 바라시고 또 원하십니다. 제가 항상 언제 어디서나 당신에 대해 가르치며 당신의 아름답고 은혜로운 신심을 모든 영혼 안에 심고자 하는 것은 모두 이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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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두 종류의 행복이라는 마약>
우리를 살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요? 인간은 무엇으로 살까요? 왜 어떤 사람들은 무기력증에 시달리거나 심지어 자살까지 하게 될까요? 그 비밀은 ‘행복’에 있습니다. 행복에 취해야 삶의 의욕도 생깁니다.
한 사향노루가 있었습니다. 그는 바람이 불 때마다 어디선가 오는 사향의 냄새를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그 냄새가 나는 근원지를 찾아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도 그 사향의 근원지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찾아도 더는 그 근원지를 찾을 수 없다는 생각에 자살을 선택합니다. 절벽에서 뛰어내린 것입니다. 그리고 죽어가면서 깨진 자신의 몸 안에서 사향의 향기가 솟구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쫓는 행복이 없다면 삶을 살아갈 힘을 잃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행복을 추구하게 되어있습니다. 문제는 위 사향노루처럼 그 행복을 외부에서 찾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원히 배고플 수밖에 없고 결국 그 배고픔을 더는 채울 길이 없게 되면 죽음까지 생각하게 됩니다.
행복은 삶의 목적이 아닙니다. 삶이 행복이라는 미끼로 자신을 연명시키는 것입니다.
영화에 보면 마약을 팔 때 우선 몇 번은 거저 줍니다. 그리고 그 맛에 길들었을 때 비싼 값에 마약을 판매합니다. 행복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중독됩니다. 우리는 그런 중독된 상태로 태어납니다. 사실 모든 동물은 이 행복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그래야 생존할 수 있습니다.
동물들은 먹이를 먹을 때 가장 행복해합니다. 그리고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 행복이 오래간다면 더는 먹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그러면 죽게 됩니다. 다시 배가 고파야 그 행복을 느끼고 싶어서 먹이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이런 행복에 중독되면 동물처럼 살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 많이 나오는 영화의 ‘좀비’와 같이 됩니다. 나의 행복을 위해 타인을 해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오늘 복음에 등장합니다. 바로 헤로데입니다.
오늘 복음은 헤로데가 요한 세례자를 죽이는 내용입니다. 요한은 그나마 헤로데에게 충언해주는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헤로데도 군중이 무서워 요한을 죽이지 못하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헤로데가 요한을 죽일 용기를 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자신이 중독된 행복을 빼앗길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이 세상 행복에 대한 집착이 자신을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 목소리를 끊어버린 것입니다. 우리도 이 세상의 행복을 추구하면 누구나 우리 안에서 들려오는 세례자 요한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려 목을 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 법원은 최근 데보라 짐머만이라는 여성에게 ‘태아 살인미수죄’를 적용해 자녀 양육권을 박탈했습니다.
알코올중독자였던 짐머만은 임신 9개월인 상태에서 한 파티에 참석해 많은 양의 술을 마셨습니다. 그녀는 만취한 상태에서 산욕을 느껴 딸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신생아의 혈중알코올농도가 무려 0.2%에 육박했습니다. 산모의 상습적인 음주로 인해 신생아는 심각한 알코올 중독 증세를 보였습니다.
법원은 함량 미달의 모정에 대해 ‘양육권 박탈’을 선언하고 ‘살인미수죄’를 적용했습니다. 그리고 술의 유혹을 극복하지 못한 어머니의 무책임이 한 어린이에게 ‘저능아’라는 비극적인 이름을 남겨주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세상 행복에 중독된 만큼 우리 안에 있는 사랑의 행복은 죽어갑니다. 사랑에서 오는 행복도 하나의 미끼입니다. 살게 하는 힘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의 행복은 영혼을 살게 합니다.
올해 백 세가 되시고 ‘백 년을 살아보니’라는 책을 쓴 김형석옹은 장수의 비결을 물었더니 ‘절제’라고 대답했습니다. 육체의 만족을 절제하는 삶이 장수의 비결이라 말합니다.
그리고 언제 가장 행복했느냐고 물으니 ‘사랑 때문에 힘들었던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영혼의 행복과 육체의 행복,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를 잡으려면 다른 하나는 포기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행복에 무관심해도 안 됩니다. 삶의 의욕을 잃게 됩니다. 어차피 행복은 생존을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사랑으로 육체가 죽는 행복을 선택할 것인지, 육체의 행복을 찾아 사랑으로 오는 행복의 목을 칠 것인지는 우리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점점 세상의 행복을 끊어가고 있다면 참 잘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끊어가는 세상의 행복이 이웃을 더 사랑하기 위해서라면 참으로 잘 사는 것입니다. 어차피 행복에 취할 거면 영원히 살게 만드는 행복에 취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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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마산교구 유청 안셀모 신부님]
어릴 때는 “잘못하였습니다.”라는 말을 쉽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어른이 되면 이 말이 잘 나오지 않을까요? 어릴 때는 체면을 차릴 필요가 없었기 때문, 체면이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서 이유와 핑계가 점점 늘어나고, 자기 합리화를 하는 경우가 많아집니다. 어른이 되고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면서 이미지가 깎이는 것이 두렵고, 잘못을 인정하기에 앞서 이것저것 신경 써야 할 것이 많아지기 때문이겠지요.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는 “손님들 앞이어서”(마태 14,9), 곧 자신의 사회적 지위 때문에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달라는 요청에 괴로워하면서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헤로디아의 딸 또한 그저 어머니가 부추기는 대로만 합니다. 곧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베어 달라고 하고 베어 온 머리를 헤로디아에게 가져갑니다. 초대받은 손님들 가운데서도 “그것은 잘못된 일입니다.”라고 말하는 이가 없습니다. 이렇게 잘못을 인정할 줄 모르고, 잘못을 숨기고만 싶은 인간들을 주님께서는 가엾이 여기시고 배불리 먹이시며 병을 고쳐 주실 것입니다.(마태 14,13-21 참조)
알폰소 성인은 고해소에서 늘 부드러운 태도로 사람들을 대하였다고 합니다. 고해성사 사제들과 윤리 신학자들의 수호성인으로 불리는 성인은 선종할 때까지 사죄경 바치기를 한 번도 거부한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여 잘못을 뉘우치고 하느님과 이웃과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는 신자들이 하느님의 자비를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이를 용서하시고자 오십니다. “잘못하였습니다.”라는 고백이 하느님의 자비를 느끼는 통로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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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4,1-12: 헤로데가 요한의 목을 베어 오게 하였다.
오늘 복음은 요한 세례자의 순교를 전하고 있다. 요한은 하느님 율법에 충실한 예언자답게 헤로데의 불법적 결혼을 꾸짖었고, 그 결과 감옥에 갇히고 마침내 목숨을 잃었다. 예언자의 길은 언제나 위험과 맞닿아 있다. 그러나 요한은 권력 앞에서 침묵하지 않았고, 진리의 대가를 자신의 생명으로 치렀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요한의 순교를 이렇게 설명한다. “요한은 진리 때문에 갇히고 진리 때문에 죽었다. 그는 자유인이었고, 감옥 안에서도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자였다. 그의 머리는 쟁반 위에 있었지만, 그의 영혼은 하늘에 있었다.”(In Matthaeum hom. 48 재해석) 성 암브로시오 역시 요한의 담대함을 찬양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는 임금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았다. 임금에게 아첨하지 않았고, 세속의 권세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하느님께만 굴복했다.”(De Officiis 요한 세례자 요약) 이처럼 교부들은 요한을 “마지막 예언자이자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한 첫 순교자”로 보고 있다.
교회는 순교를 그리스도인의 삶의 완성으로 이해한다. 교리서는 이렇게 말한다. “순교는 진리에 대한 증언으로, 그리스도께 대한 가장 높은 사랑의 표현이다.”(2473항) 사목 헌장은 이렇게 강조한다. “교회는 언제나 인간 존엄과 양심의 자유를 위해 목소리를 내야 하며, 그 목소리가 세상 권력의 반대를 불러일으킬지라도 침묵하지 않는다.”(26-27, 42, 76항 참조) 요한은 이 교회의 사명을 몸소 예시한 첫 인물이었다. 요한 세례자는 우리에게 묻는다. 나는 진리를 말해야 할 순간에 침묵하고 있지 않은가? 편안함과 안전을 위해 양심의 목소리를 억누르지 않았는가?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권고한다. “진리는 때로 쓰라리다. 그러나 진리를 말하지 않는 입은 하느님 앞에서 더 큰 죄를 짓는다.”
오늘날 우리 사회도 “헤로데의 잔치”와 같은 장면을 자주 마주한다. 권력의 탐욕, 사회적 불의, 성(性)과 쾌락의 왜곡, 그리고 약자의 희생이 여전히 벌어지고 있다. 교회의 사명은 요한 세례자처럼 불의와 죄를 분명히 지적하고, 인간 존엄을 지키는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우리는 두 가지 태도를 배워야 한다. 담대함으로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진리를 증언하는 용기와 겸손한 봉사로 권력이나 명예가 아니라, 사랑과 봉사에서 참된 권위가 나온다는 사실을 삶으로 보여 주는 태도가 중요하다.
요한 세례자는 자신의 피로 진리를 증언했다. 그의 죽음은 비극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승리이다. 오늘 우리는 요한과 같은 예언자의 정신을 이어받아야 한다. 가정과 일터, 교회 공동체 안에서 작은 불의에 침묵하지 않고, 참된 사랑과 봉사로 주님의 진리를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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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이 죽어갑니다>
마태오 14,1-12 (헤로데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
그때에 헤로데 영주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시종들에게, “그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다. 그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 하고 말하였다.
헤로데는 자기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붙잡아 묶어 감옥에 가둔 일이 있었다. 요한이 헤로데에게 “그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기 때문이다. 헤로데는 요한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 그들이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침 헤로데가 생일을 맞이하자, 헤로디아의 딸이 손님들 앞에서 춤을 추어 그를 즐겁게 해 주었다. 그래서 헤로데는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하며 약속하였다. 그러자 소녀는 자기 어머니가 부추기는 대로,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이리 가져다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임금은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어서 그렇게 해 주라고 명령하고, 사람을 보내어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그리고 그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게 하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가져갔다. 요한의 제자들은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장사 지내고, 예수님께 가서 알렸다.
<사람이 죽어갑니다>
죽이는 사람이 있기에
죽이는 사람을
부추기는 사람이 있기에
죽이는 사람과
벗하는 사람이 있기에
죽이는 사람을
막지 않는 사람이 있기에
죽이는 사람에게
침묵하는 사람이 있기에
죽이는 사람에게
무관심한 사람이 있기에
사람이 죽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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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북미주 서울대교구 사제 모임이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있었습니다. 콜롬비아에서 선교사로 지내는 신부님이 정성껏 준비해 주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모든 일정을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모임 장소는 ‘셀람(CELAM)’이었습니다. 남미 주교회의 건물입니다. 숙소와 성당, 식당과 회의실까지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주교회의 사무총장 주교님께서 서울대교구 사제들이 편안히 지낼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달라스 성당 교우들의 도움도 있었습니다. 다섯 명의 봉사자가 콜롬비아까지 와서 식사를 준비해 주었습니다. 주교회의 식당을 사용하며 신부님들의 입맛에 맞게 한식을 정성껏 차려 주었습니다. 육개장, 삼겹살, 김치찌개, 부대찌개가 식탁에 올랐습니다. 보고타의 교우분들도 함께해 주었습니다. 김치도 담가 주었고, 차량 봉사도 해 주었습니다. 낯선 땅이었지만 낯설지 않았습니다. 서로 다른 곳에서 왔지만, 한 가족처럼 느껴졌습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것은 우리가 같은 신앙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며, 성령 안에서 한 형제자매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신부님들은 영적인 에너지를 충전하고 각자의 소임지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인류의 역사에는 두 가지 큰 흐름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거울에 비친 그림자와 같다는 생각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이 전부가 아니며, 우리는 보이지 않는 진리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플라톤이 말한 동굴의 비유처럼, 동굴 속에서 보는 희미한 빛은 진리의 여명일 뿐입니다. 동굴 밖에는 더 넓고 놀라운 세상이 펼쳐져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삶은 진리를 향한 여정이 됩니다. 시련과 아픔, 좌절과 고통도 그 여정 안에서는 의미가 있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신화와 종교와 철학이 시작되었습니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 너머의 세계를 바라보며 하느님의 뜻을 찾았습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분명한 법칙과 질서에 따라 움직인다고 보는 생각입니다.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보다는 눈에 보이고 측정할 수 있는 세계에 더 큰 관심을 둡니다. 수학, 과학, 경제는 이런 사고의 틀에서 발전했습니다. 세상은 원자로 구성되어 있고, 원자들은 일정한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법칙과 질서를 알면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여겼습니다. 인간이 세상의 중심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중심이 된 세상은 때로 위험합니다. 자본주의와 디지털 문명이 세상을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시대에는 인격과 도덕, 사랑과 우정이 설 자리가 좁아집니다. 이윤의 창출 앞에서 환경 파괴도, 전쟁도, 폭력도 쉽게 용인됩니다. 숫자는 커지지만, 마음은 작아지고, 기술은 발전하지만, 양심은 무뎌질 수 있습니다.
공자께서는 성숙한 인간의 나이테를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지학, 이립, 불혹, 지천명, 이순, 종심입니다. 학문을 배우고, 뜻을 세우고, 의혹이 없으며, 하늘의 뜻을 알고,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마침내 마음이 가는 대로 해도 그르침이 없는 삶입니다. 제 나이가 예순이 넘었지만, 아직도 세상의 이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유혹이라는 바람 앞에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하느님의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말씀은 우리의 흔들리는 마음을 붙잡아 주는 지팡이입니다. 말씀은 우리의 흐려진 양심을 비추어 주는 등불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헤로데는 권력을 가졌습니다. 많은 것을 소유했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세례자 요한이 의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두려워하면서도 그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체면과 욕망과 권력의 눈치를 보다가 결국 세례자 요한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습니다. 헤로데는 왕이었지만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권력을 가졌지만, 진리를 선택하지 못했습니다. 많은 것을 소유했지만 양심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반면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였습니다. 그는 권력도 없었고, 재물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뜻을 알았습니다. 그는 회개하라고 외쳤습니다. 세례를 통해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라고 외쳤습니다. 그는 자신이 빛이 아니라 빛을 증언하는 사람임을 알았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길을 준비한 여명의 눈동자였습니다.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지만, 그의 삶은 인류의 역사에 깊은 나이테를 남겼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예레미야도 죽음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그는 백성의 귀에 듣기 좋은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전했기 때문에 미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사판의 아들 아히캄의 도움으로 죽임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는 예언자를 죽이려 했고, 누군가는 예언자를 살렸습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선택입니다. 우리는 헤로데처럼 체면과 욕망 때문에 진리를 외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히캄처럼 하느님의 사람을 살리는 편에 설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세례자 요한처럼 진리를 위해 손해를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그 길이 참된 자유의 길입니다.
신앙인은 눈에 보이는 현실만을 따라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숫자와 이익만으로 세상을 판단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뜻을 찾는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양심의 소리를 듣는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진리를 위해 손해를 감수하는 사람입니다. 보고타에서 만난 사제들과 교우들의 아름다운 봉사는 이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신앙은 우리를 낯선 사람으로 두지 않습니다. 신앙은 우리를 가족으로 묶어 줍니다. 신앙은 우리를 이익의 계산이 아니라 사랑의 계산으로 살게 합니다. 우리의 삶이 헤로데의 길이 아니라 세례자 요한의 길을 따르기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우리도 아히캄처럼 하느님의 뜻을 살리는 사람이 되기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이번 북미주 서울 대교구 사제 모임이 은총 가운데 잘 마무리될 수 있도록 함께해 주신 분들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콜롬비아까지 와서 정성껏 음식을 준비해 주신 달라스 성당 봉사자들, 김치를 담가 주고 차량 봉사와 여러 도움을 아끼지 않은 보고타 교우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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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회개한 죄인이 아름답다>
한 사기꾼이 사회적으로 내로라하는 사람들을 무작위로 선택하여 전화하였다. “내가 당신의 잘못을 알고 있으니 이 계좌로 돈을 송금하시오. 그렇지 않으면 가족과 사회에 공개하겠다.” 그랬더니 거액의 돈을 보낸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단다. 그래서 그는 여러 차례 같은 방법의 속임수로 돈을 챙겼다. 그러나 돈을 보낸 사람들은 드러내 놓고 억울함을 호소할 수 없었다. 과거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잘못을 범하면,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마음이 자유로울 수 없다. 그것은 우리 마음 안에 하느님의 마음, 양심이 있기 때문이다. 헤로데는 모든 권력을 쥐고 있었지만, 불안과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두고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 난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았기 때문이다.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을 감옥에 가둔 일이 있었다. 그리고 자기 생일잔치에 흥을 돋우어 준 헤로디아의 딸에게 “무엇이든 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하며” 헛된 약속을 하였고, 소녀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올 것”을 청했다. 헤로데는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이 보는 앞이라 그 부당한 요구를 들어주었다. 왕으로서의 위신과 체면을 유지하려고 잘못을 저질러 놓고는 평생 마음의 자유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닦은 분이다. 자기보다 더 훌륭한 분이 오시는 데 자기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다(마르1,7).고 했다. 그리고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자기는 작아져야 한다’(요한3,30). 고 고백했다. 그는 철저히 주님을 앞세웠고 진리 안에서 자유를 지녔다. 그래서 왕인 헤로데에게도 할 말은 다 했다. 사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진리를 뜯어고칠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진리를 추구하고 발견하며 진리에 봉사하는 일이다.”(막시 밀리안 콜베). 그러므로 참으로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시길 바란다. “불의하게 고난을 겪으면서도, 하느님을 생각하는 양심 대문에 그 괴로움을 참아 내면 그것이 바로 은총이다.”(1베드2,19).
자기를 포장하는 허세를 부려 위신, 체면을 지키려 한다면 마음의 자유를 잃게 되고 근심, 걱정, 불안의 나날을 보내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가야 한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우리의 죄를 깨끗이 씻어 주시고 우리는 주님께서 마련하신 위로의 때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회개한 죄인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
“주님, 저희 마음을 성령의 불로 타오르게 하시고, 천상 잔치에 자주 참여하여 끝없이 하느님을 찬양하게 하소서.” 아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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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책을 읽다가 인상적인 문장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자존감은 ‘세상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가 아니라, ‘내가 나를 어떻게 보느냐?’에서 시작된다.”(이하영)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남들에게 강한 존재처럼 보이려고 노력합니다. 외로움을 느끼면서 약한 존재라고 스스로 느끼면서도 남들에게는 그렇지 않은 척합니다. 그래서 화를 내고, 상대에게 반대 의견을 내는 등 강한 모습을 보이려 합니다. 그러나 이 모습은 오히려 자기가 단단한 존재가 아님을, 상처받기 쉬운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저 단단한 껍질만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결국 자존감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누가 나를 칭찬해야 자존감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또 누가 나를 비난한다고 해서 자존감이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칭찬해도 그것이 나의 전부가 아니며, 비난해도 그것이 나의 진심이 아님을 아는 힘이 자존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를 스스로 인정하고 사랑하는 사람만이 자기 자존감을 바르게 또 굳건하게 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남들의 시선에 신경 쓰는 마음이 아니라, 나에게 떳떳할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에는 헤로데 영주가 등장합니다. 복음은 그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헤로데는 요한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마태 14,5)
“임금은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어서 그렇게 해 주라고 명령하고.”(마태 14,9)
헤로데는 겉으로는 절대 권력을 쥔 영주였지만, 그의 내면으로는 끝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나약한 인간이었습니다. 요한이 뿜어내는 진리의 말씀이 두려웠고, 요한을 지지하는 군중이 두려웠으며, 연회장에서는 자신의 체면이 깎일까 봐 손님들의 시선이 두려웠습니다.
반면 감옥에 갇힌 세례자 요한은 비록 쇠사슬에 묶여 있었지만 자유로운 영혼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떳떳했기에, 최고 권력자의 불륜을 향해 “옳지 않다”라고 직언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눈치를 보며 스스로 양심의 감옥에 갇힌 헤로데와, 진리 안에서 완전히 자유로웠던 요한의 모습이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체면과 두려움에 끌려다니는 헤로데의 모습이 혹시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요? 그보다 자기를 제대로 바라보면서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의 뜻을 따르는 모습을 갖추어야 합니다. 주님의 권위와 자유에 더욱 충만하게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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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세례자 요한의 죽음>
그때에 헤로데 영주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시종들에게, “그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다. 그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 하고 말하였다. 헤로데는 자기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붙잡아 묶어 감옥에 가둔 일이 있었다. 요한이 헤로데에게 “그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기 때문이다. 헤로데는 요한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 그들이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침 헤로데가 생일을 맞이하자, 헤로디아의 딸이 손님들 앞에서 춤을 추어 그를 즐겁게 해 주었다. 그래서 헤로데는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하며 약속하였다. 그러자 소녀는 자기 어머니가 부추기는 대로,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이리 가져다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임금은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어서 그렇게 해 주라고 명령하고, 사람을 보내어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그리고 그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게 하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가져갔다. 요한의 제자들은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장사 지내고, 예수님께 가서 알렸다.(마태 14,1-12)
1) 예레미야 예언서에 이런 고백이 있습니다.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 내지 못하겠습니다."(예레 20,9)
이 말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박해를 받는 것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는 것이 더 힘든 일이라는 고백입니다. 세례자 요한도 그런 심정으로 회개를 선포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는 박해를 피하기 위한 ‘세속적인 융통성’이나 ‘처세술’은 걸림돌이 될 뿐이고, 그런 요령을 부리는 것은 죄짓는 일이 될 뿐입니다.>
세례자 요한과 헤로데가 직접 만난 일이 있었는지, 헤로데와 헤로디아의 결혼을 그들의 면전에서 꾸짖었는지, 확실한 상황은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헤로데의 결혼을 공개적으로 여러 번 비판했을 가능성이 크고, 그것을 헤로데의 신하들이 듣고서 헤로데에게 전했을 것입니다. 물론 직접 만날 기회가 있었다면, 면전에서 비판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어떻든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 때문에 자기가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했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요한의 비난을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2) 복음서에 묘사되어 있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은, 박해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참 예언자’의 모습입니다. 세례를 받으려고 온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마태 3,7-8)라고 말하면서 그들을 엄하게 꾸짖은 일은, 세례자 요한이 어떤 예언자인지를 잘 나타내는 좋은 예가 됩니다.
그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은 세례자 요한을 박해하려고 온 사람들이 아니라, 요한의 선포를 듣고 세례를 받으려고 온 사람들입니다. 그런 상황이라면, 누구든지 어서 오라고 환영하는 말을 할 것이라고 예상하거나 기대할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은 환영하는 말을 하기는커녕 ‘독사의 자식들아’ 라고 꾸짖었습니다. 그런 모습에 대해서, 그 자신이 박해를 자초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참 예언자’는 ‘빈말’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3) 당시에 율법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헤로데와 헤로디아의 결혼에 대해서 “그러면 안 된다.”라고 생각했을 텐데, 권력이 무서워서 아무 말도 못했을 것입니다. 헤로데 자신은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을까? 그 자신도 당연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율법을 모른다고 해도, 상식적으로, 그것이 죄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죄인 줄 알면서도 죄를 짓는 사람을 꾸짖으면, 죄인 줄 몰라서 죄를 지은 사람보다 더 크게 반발하고 꾸짖는 사람을 미워하는 것을 흔하게 봅니다. 더욱이 헤로데는 “나는 왕이니까, 죄가 되는 일이라 해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4) 오늘날에도 세례자 요한과 같은 예언자들이 있고, 요한이 박해를 받은 것과 같이 박해를 받는 일도 많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오늘날에도 하느님의 참 예언자들을 박해하는 헤로데 같은 자들이 있고, 권력에 아부하면서 그런 자를 추종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회개하라는 말은 듣기 싫어하고, 복을 빌어 주는 말만 듣고 싶어 하는 것은 그런 자들의 공통점입니다.
어느 시대에나 회개하라고 말하는 예언자는 환영받지 못하고, 현세적인 복을 많이 받는 방법만 말하는 거짓 예언자는 환영받고 명강사로 대우받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 교회 안에서 흔히 있었던 일이고, 지금도 자주 볼 수 있는 일입니다. 오늘날에도 우리가 세례자 요한이 했던 말들을 읽고, 또 그의 순교를 기억하는 것은, 그의 회개 선포가 아직도 유효하기 때문이고, 우리의 회개가 아직도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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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차룡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일찍이 여자 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이보다 더 위대한 사람은 없다고 극찬한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로 예수님이 오실 길을 미리 닦아놓은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요, 신약의 시대를 열어 놓은 선구자인 세례자 요한은 진리를 위해 몸을 바친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세례자 요한을 죽인 헤로데 안티파스가 예수님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 사이에 예수님을 두고 요한이 되살아난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았는데 헤로데도 그 소문을 믿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존재가 종교계의 지도자뿐만 아니라 정치 집권자에게도 두려움을 안겨주었던 것입니다. 당시 왕의 불의에 대하여 많은 종교지도자들이 입을 다물고 있었을 때 요한 홀로 그것을 거듭 거듭 충고하였기 때문에 왕의 미움을 사서 결국 죽임을 당하였던 것입니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하지요.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 왕에게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를 데리고 사 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라고 거듭거듭 간하였기에 헤로디아는 호시탐탐 눈에 가시 같은 요한을 죽일 기회를 엿보며 가슴에 비수를 품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들에게 내린 옳은 충고를 비판과 저주로 받아들여 하느님의 사람인 요한을 죽일 기회만 엿보고 있었던 중에 참으로 좋은 기회가 왔고, 그녀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요한을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소녀는 제 어미가 시키는 대 로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서 이리 가져다주십시오.’하고 청하였다.”(마태 14, 8) 결국 헤로데 왕은 마음이 괴로웠지만 이미 맹세한 바도 있고 또 손님들이 보는 앞이어서 백성들이 예언자로 여기고 있는 요한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것이 불의를 자행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행하였던 것입니다.
아무리 옳은 충고라 할지라도 그 순간에는 나를 비판하는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 는 않습니다. 하지만 나의 태도를 고치기보다 그 사람에 대한 증오와 저주를 마음에 담아둔다면 그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어 옳은 충고를 받아들였다면 진리를 전하는 예언자 와 하느님을 박해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요한은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하느님의 법을 용기있게 외 쳤기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그의 이름은 2천년이 지난 지금도 세상 모든 사람에게 알려지고 있습니다. 영원한 삶을 선택하였기에 현세의 부귀영화와 세상이 가져다주는 모든 것을 거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평신도의 대부로 서 영국의 대법관이며 수상으로 살았던 토마스 모어 성인은 헨리 8세 왕의 이혼 문제로 교회법의 혼인의 불가해소성을 주장하여 왕과 의견이 엇갈리자 왕의 미움을 사게 되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 부인이 면회를 왔습니다. 아내는 남편의 마음을 돌리려고 애를 썼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여보, 내 가 왕의 말을 들어 혼인의 불가해소성을 무시하고 그 결혼을 인정하여 내가 살 수 있다면 이 지상에서 얼마나 더 오래 살 수 있을 것 같소 ? 한 20년, 30년 ? 일시적인 생명을 얻기 위해 영원한 생명을 포기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오, 나는 하늘의 영원한 생명 을 얻기 위해 내 신앙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오.”
예수님께서는“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 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으며 터무니없는 말로 갖은 비난을 다 받게 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받을 큰 상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다. 옛 예언자들도 너희에 앞서 같은 박해를 받았다.”(마태 5,10 - 12)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의 한국 교회의 밑거름은 순교자들이 흘린 피의 신앙입니다. 순교자들의 피의 대가로 값진 신앙과 교회의 유산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들의 박해와 순교의 원인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고 세상의 권력에 손잡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 인간의 뜻에 순종하기보다 하느님의 뜻에 먼저 순종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은 이 세상의 편안한 삶을 위해 진리를 버리지 않았고 오히려 진리를 위해 몸을 바침으로써 영원한 진리이신 예수님 을 만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도 불의에 항거하며 진리와 정의를 위하여 생명을 바치는 세례자 요한과 토마스 모어와 같은 진리의 증인이 많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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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악인의 혀, 의인의 혀>
사제들과 예언자들이 도성을 거슬러 예언한 예레미야를 사형시키려 하나 대신들과 온 백성이 반대하여 “이 사람은 사형당할 만한 죄목이 없습니다.”(예레 26,16)라는 말은 훗날 빌라도가 예수님의을 첫 번째 심문에서 한 말인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 죄목도 찾지 못하겠소.”(루카 23,4)라는 말을 떠올려줍니다.
이는 주님께서 마련하신 ‘때’가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화답송>에서는 “주님, 주님의 은총의 때이옵니다.”(시 19,14 참조)라고 노래합니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도 새로운 '신약의 때'가 다가왔음을 알려줌과 동시에, 악인에게 죽음을 당하게 될 예수님의 죽음을 예표해줍니다. 오늘 복음은 의인과 악인의 극한 대조를 보여줍니다. 한편에는 음모를 꾸미며 악의에 찬 헤로데와 헤로디아가 있고, 다른 편에는 진실하고 강직하며, 어떤 거짓에도 굴하지 않는 세례자 요한이 있습니다.
한편에는 폭군이지만 나약한 헤로데가 있고, 다른 편에는 참수당하지만 힘 있는 세례자 요한이 있습니다.
한편에는 혀를 다스리지 못한 헤로데가 있으며, 그의 혀는 잔치에서 맹세하나 결국 타인의 죽음을 부르고 불의를 가져오지만, 다른 편에는 혀가 곧은 요한이 있으며, 그의 혀는 감옥에 갇히지만 자기 죽음을 허용하고 의로움을 이룹니다. 악인의 혀는 거짓을 꾸미며 속임수를 쓰지만 의인의 혀는 진실을 말하고, 악인의 혀는 불의를 증언하지만 의인의 혀는 의로움을 증언합니다.
악인의 혀는 자신을 위해 타인의 목숨을 침해하지만, 의인의 혀는 타인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줍니다. 결국 폭군의 혀는 의인의 피를 부르고. 의인의 혀는 의로움을 외칩니다. 헤로데가 받은 것은 요한의 머리지만 두려움이 되고, 세례자 요한이 받은 것은 ‘쟁반’이지만 ‘왕관’이 됩니다. 그러나 올가미에 걸려 넘어진 이는 의인이 아니라, 폭군이었습니다.
거짓을 꾸미는 ‘악인의 혀’는 자신이 쳐놓은 덫에 걸려 넘어지고, 진실한 ‘의인의 혀’는 영광의 관이 씌워졌습니다. 어찌 보면, 한 푼 춤 값으로 팔려버린 요한의 목숨은 은전 30냥에 팔려버린 예수님의 목숨처럼, 참으로 억울한 죽음처럼 보입니다.
헤로디아의 조정을 받은 소녀가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주기를” 요청하듯, 사제들과 유대 원로들의 조정을 받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의 머리가 ‘쟁반’에 올려지듯, 예수님의 온몸이 ‘십자가 위’에 올려질 것입니다. 이처럼 의인 요한의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보여줍니다.
그러나 헤로데가 요한의 머리는 베었어도 그의 소리는 벨 수가 없었고, 혀는 잠잠하게 만들었지만 그 소리는 가라앉힐 수가 없었습니다. 세월이 흐를지라도 폭군의 죄악을 고발하는 의인의 외치는 소리는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니 남을 위해 우는 법을 빼앗아 가버린 이 시대에,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표현한 것처럼 ‘무관심의 세계화’가 팽배한 이 시대에, ‘남을 위해 우는 법’을 배워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진리와 정의를 위해 우는 법을 배워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제 혀가 의로움으로 울게 하소서!
진리를 밝히는 성령의 불혀가 되게 하시고, 진정으로 사랑하여 울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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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이리 가져다주십시오.”(마태 14,8)
주님!
제 혀가 거짓을 꾸미지 않고, 진실되게 하소서.
타인을 뭉개지 않고, 자신을 뭉개어 내어주게 하소서.
헛된 맹세로 덫에 걸려들지 않고, 묶어 두어도 의로움을 외치게 하소서.
오늘, 어둠을 가르는 불혀가 되게 하소서.
진리를 밝히는 말씀의 쌍날칼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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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의 말씀(2026.8.1. 연중 제17주. 토.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
“소녀는 자기 어머니가 부추기는 대로,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이리 가져다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마태오. 14,8)
순수함은 때가 묻지 않아 모든 것을 비추어주는 거울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여 줍니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 보여주기에 순수함은 모든 것을 정직하게 드러냅니다.
정직한 순수의 거울에 비친 오염된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기를 우리는 부끄러워합니다. 부끄러워할 줄 모르면 하늘을 무서워할 줄 모르게 됩니다. 하늘 무서운 줄 모르면 우리는 잔인하게 됩니다.
순수한 소녀를 부추긴 어머니는 부끄러운 자신을 거부하여 순수함을 짓밟고 잔인하게 되었습니다. 소녀의 순수함 앞에서 어머니는 부끄러운 자신을 투사하여 의로운 요한의 목을 베었습니다.
순수함을 잊고 오염된 자신을 외면하며 부끄러워할 줄 모르기에 우리도 잔인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는 소녀의 어머니처럼 순수함을 짓밟고 이용까지 합니다.
순수한 주님의 마음을 이용해서는 안됩니다. 순수한 주님의 뜻보다 오염된 우리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순수한 주님의 뜻마저 때로는 이용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입혀 드리는 그대로, 우리가 하자는 그대로 때로는 말없이 따라 응해주시는 소녀처럼 순수하십니다.
요한의 목을 베도록 부추기는 어머니가 소녀의 순수함을 유린하듯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우리도 그리스도의 순수함을 자주 훼손합니다. 오염된 자신을 보지 않고,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만큼 우리는 순수한 주님의 뜻을 거스르게 됩니다.
순수함을 잃어버린 슬픈 우리 자신을 보라고 쟁반 위에 놓인 세례자 요한의 머리가 피를 흘리며 우리에게 외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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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올바른 삶은 우리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가져다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 견디고 지켜나가는 이들의 삶이 가장 아름다운 삶의 열매가 된다. 어중간한 삶을 아프게 반성한다.
문제의식은 너무 무디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너무 너그럽다. 명백한 과오를 통해 삶을 교정하고 과거의 악순환을 멈추는 것이 신앙인의 참된 도리이다. 진리는 아무래도 숨겨지지 않는다.
요한 세례자가 등장한다. 그는 진리로 삶을 이야기한다. 양심을 깨우고 정의의 목마름을 외치고 이기(利己)와 무지를꾸 짖는다.
우리 시대를 바로 보는 것이 예수님을 바로 보는 신앙인의 사명이다. 새로운 삶은 이와같이 어디서 한순간 불어오는 바람이 아니고 각오와 결심실천을 통하여 일으켜지는 것이다.
일으켜지는 정신이 우리 모두를 건강한 삶으로 다시 태어나게 한다. 올바른 삶은 작은 길도 선명한 모습으로 드러나게 만든다. 진정한 회개를 다시 품게 하는 요즈음이다.
진리이신 주님과 가까워지는 삶인지를 자문하여 본다. 환상적인 만남이 아니라 진실한 만남이 중요하다. 시대가 변하고 사람이 달라도 결코 변할 수 없는 가치는 우리 자신의 진실한 회개이다.
진실한 회개가 우리 시대의 참된 좌우명이 됨을 믿는다.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순간이 회개의 순간이며 회개의 관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