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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창세기 1:1~5 “ 빛이 있으라 ”
하나님께서 천지를 무엇으로 창조 하셨습니까? ‘말씀’ 성경은 누구의 말씀 입니까? ‘하나님의 말씀’ 너무 쉬운 질문을 하였지요? 이제 조금 어려운 질문을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까? ‘말씀의 능력’ 한 가지만 더 질문 합니다. 교회는 어떻게 유지됩니까? ‘말씀의 능력’ 그런데 사람들은 믿음이라든가 교회유지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아니라 사람들의 힘으로 되는 줄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무리 많은 사람이 모이고 거대한 건물이 있더라도 무늬만 교회일 뿐이지 내용은 교회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창조 사건에 어떻게 나타났는지 잘 살펴보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시니 원래 있던 빛이 나타났습니까? 원래 없던 빛이 말씀의 능력으로 만들어 졌습니까? 이것을 무에서 유로의 창조다 그러지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만이 가득한 곳에 빛이 있으라 하시니 그 말씀의 능력으로 빛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은 어떻습니까? 이미 있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의 능력이 있기에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만 말씀으로 창조 하시고 지금은 팔장끼고 구경만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여전히 일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씀하셨듯이 지금도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의 역사를 계속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어떠한 창조를 하고 계십니까? 처음 창조한 것이 인간의 범죄로 뒤틀려 졌기에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재창조의 일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재 창조의 작업으로 인하여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피로 살려내는 것입니다.
‘믿음’을 생각해 봅시다. 사람들은 믿음을 자꾸만 자기가 믿어 준 것을 믿음이라고 우깁니다. 만약 믿음이 사람이 믿어 주었기에 믿음이 생겼다면 그럼 믿음은 인간의 신념의 산물이지 하나님의 선물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기에 믿음도 우리의 것이 아니라 없는 가운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려 내셨지요? 그때 나사로야 나오너라 라고 무덤을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나사로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말씀을 순종해서 살아났습니까? 아니지요. 죽은 자가 무슨 수로 말을 들을 수 있습니까? 주께서 말씀의 능력으로 살려내신 것이지요! 윤형주씨가 작사 작곡한 복음성가 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물이 변하여 포도주 됐네.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바디메오가 눈을 떴다네.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다네. 예수님 예수님 나에게도 말씀 하셔서 새롭게 새롭게 변화 시켜 주세요.
말씀의 능력이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주님을 만나는 것도 말씀을 통하여 만나는 것이고, 우리가 주님의 사람 되는 것도 주님의 말씀으로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생각해 봅시다. 교회 역시 사람들은 사람들이 세우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의 동기 목사들도 개척을 하기도 하고 개척을 준비하는 목사도 있습니다. 개척할 때 제일 어려운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제일 큰 문제가 돈이라는 것입니다. 최소한 한 장은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교회를 세울 수 있다면 모양은 교회 흉내를 낼 수 있어도 내용은 아닙니다. 교회란 주님께서 친히 세우시는 것입니다. 자신의 피 값으로 사서 세운 것이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특정 건물이나 사람의 조직이 아니라 바로 예수 믿는 여러분이 교회요 성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교회를 누가 세울 수 있단 말입니까? 누가 여러분을 위하여 피 흘렸습니까? 목사입니까? 이 교회 개척멤버 입니까? 혹시 사람이 피를 흘리고 땀을 흘렸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교회를 세우시고 유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시자 빛이 생겼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말과 달리 그 말씀이 이루어 내시는 것이기에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도 창조력이 있어서 자동차도 비행기도 만들어 내지 않느냐고 말하지요?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재료를 가지고 만들어 내는 것이니까 무에서 유의 창조는 아닌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사람들이 신념을 가지고 커다란 계획을 가지고 과학을 발달시키면서 인류를 더 행복하게 만들겠다고 발전에 발전을 거듭할수록 인류는 점점 더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발전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그러나 이제는 발전이란 개념이 결코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발전을 멈출 수가 없는 것이 인류의 현실입니다. 끊임없이 더 좋은 차, 가전제품, 생필품들이 홍수처럼 쏟아지고 있으니 마치 브레이크가 고장 난 차가 내리막길로 달리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사태를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이라는 유대인 랍비는 수렁에 빠진 황새에 비유합니다. 수렁에 발이 빠져서 나오지 못하는 황새가 꾀를 내었습니다. 자신의 긴 부리를 땅에 박고서 발을 빼낸 것입니다. 그러나 이걸 어쩝니까? 발은 빠져 나왔지만 부리가 수렁에 박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류의 미래는 이와 같습니다. 모두가 무너질 바벨탑을 열심히 열심히 쌓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관심 있게 보아야 하고 그 약속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온천지는 없어지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어 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끝을 알고 있는 자는 지혜로운 자입니다. 성경의 끝을 잠시 보면서 말씀이 왜 이다지도 중요하며 왜 말씀대로만 되는지를 알고자 합니다. 계시록 18:1-4절입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 지더라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주의 말씀으로 분리시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세상과 분리되는 것입니다. 가치관이 방향성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경건이란 고아와 과부를 환난 가운데 돌아보고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왔습니다만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나오시는 분의 최고의 관심사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기 약속을 이루어 가시는지를 알고 우리도 그의 말씀에 함께 참예하는 것입니다.
이제 빛이 있으라는 그 말씀의 위력이 단지 천지를 창조하신 것만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살아 역사하는 말씀인줄 믿으시겠습니까? 그러나 아직 내가 그래도 뭔가 믿음의 뒷받침을 해야지 하는 분을 위하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하면 기부터 먼저 죽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들어오기는 아브라함의 영웅적인 믿음만을 들어 왔기 때문입니다. 어떤 식입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부르시자 친척 본토 아비 집을 떠나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다. 그리고 100세에 얻은 아들을 하나님께 바쳤다 이런 식의 아브라함만 보아왔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자 그럽니다만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어떻게 이루어 내시는가를 나타내는 하나님의 힘과 능력이 드러나는 것이지 사람의 영웅적인 결단이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아브라함이 믿음이 좋아서 당장 나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누가 안 떠나고 버틸 수 가 있겠습니까?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그 능력이 아브라함을 끌고 가시는 것입니다. 그로부터 25년의 수많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직접 목격하고서야 아들을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조상이라는 것은 믿음이 없는 사람을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내시고야 마는 하나님의 열심과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이루어 낸 것을 보고서 믿음의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잘 안 믿어집니까?
로마서 4:1-3, 17을 봅시다.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이것이 말씀의 능력입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부르시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어떤 하나님을 믿게 하십니까?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더라는 말씀과 같은 의미 아닙니까? 우리는 믿음이 없는데 믿음의 사람으로 불러 주시니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결심과 의지를 믿는 것이 아니지요?
이러한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는 곳 한 곳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아 거의 외우는 말씀인데 사도행전1:8절 말씀입니다.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이 말씀을 가지고 대부분 표어를 삼는데 증인이 되자 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성령이 임하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주님께서 증인이 되게 하시겠다는 주님의 의지입니다.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기에 증인이 되기 싫어도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복음을 유대인들에게만 전하였습니다. 그러니 복음이 사마리아와 이방인에게 넘어가리라는 주의 약속이 지연되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루살렘 교회에 핍박을 가하여 흩어지게 하심으로 사마리아와 이방인 지역까지 복음을 전하도록 주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증거가 사도행전입니다. 베드로가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여 복음을 전하였지만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가도록 환상을 세 번이나 보여주시고 고넬료가 보낸 사람을 따라 가라고 성령께서 말씀하시자 마지못해 나서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도의 역사가 바로 주님께서 사도행전 1:8에 말씀하신 그 말씀을 이루어 내시는 것이 사도행전입니다.
이처럼 주의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을 보면 볼수록 처음에는 내가 말씀을 보는 것 같지만 나중에는 말씀이 말씀을 당깁니다. 그리고는 말씀이 나를 삼켜버리는 것이지요. 마치 술 먹는 사람들 이야기 비슷합니다. 이제 우리가 말씀에 취할 때입니다. 계시록 1:3절에는 때가 가깝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모두가 더욱 주의 말씀의 능력을 맛보아야 할 것입니다.
아모스 8:11-13절입니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오늘 우리의 목마름과 배고픔이 양식과 물이 아니라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살리심을 믿으시고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 하듯이 우리의 심령이 주의 말씀을 갈급해 하는 심령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한곳 더 찾아보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히브리서4:12-13입니다. “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 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의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듯이 드러나느니라.” 말씀이 살아있어 운동한다고 합니다. 어떤 살아있는 운동을 합니까? 우리의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예리한 칼로 표현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말씀의 칼로 수술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속에 숨어 있는 온갖 죄악들이 말씀의 검으로 도려내져야 할 것입니다. 때로는 너무 아프고 때로는 분노가 일어 날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염려는 마십시오.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신 주의 말씀의 능력이 그러한 것도 넉넉히 이기게 하셔서 주님을 찬양케 될 날이 올 줄을 믿습니다.
02. 창세기 1:6-31 “ 보시기에 좋았더라 ”
보시기에 좋았더라 라는 말씀이 오늘 본문 말씀에서 몇 번이나 나왔지요? 여섯 번입니다. 1:4에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까지 합하면 창세기 1장에 7번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나셔서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이 창조세계에 잘 나타났기에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신 것입니다. 사람도 자신이 무엇을 만들어 놓으면 그것이 자기 뜻대로 되었을 때 좋아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무엇을 만들어 놓은 것과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의 차이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무엇을 만들어 내는 것은 불편을 극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즉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만들어 내는 것은 결코 선한 것이 나올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만 선하십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죄인이기에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만들어 내어도 거기에는 반드시 좋지 않는 것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쉬운 예를 든다면,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유기농법으로 농사지은 제품을 찾고 있습니다. 워낙 인위적인 농산물이 많이 나오니까 무엇이 제철에 나오는 것인지 농사짓는 사람도 모를 지경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농부들이 어떻게 하든지 농산물의 희소가치를 높여서 가격을 높게 받으려고 비닐하우스를 하고 인위적으로 농산물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그리고는 야! 좋다 이제 비싸게 물건을 팔 수 있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제품이 모양과 빛과 맛은 낼 수 있어도 제철에 자연 상태에서 나온 것과는 비교할 수가 없지요. 심지어 덜 익은 과일을 먹으면 배탈이 나듯이 겉모양은 익은 것 같더라도 속은 억지로 마지못해 온도와 열을 받아 만들어 졌기에 덜 익은 과일에서 나오는 독소가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사람들이 자연 그대로의 식품이 좋은 것인 줄 알고 유기농으로 농사짓는 사람과 계약을 하여 농약 치지 않고 농사를 짓게 합니다. 그래서 소출이 적고 비싸더라도 자연 그대로의 식품을 좋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농산물뿐만 아니라 사람이 만들어 내는 모든 것이 이러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지어내신 것이 보기에 좋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무언가를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을 보시기에 좋다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이 말씀을 중심으로 증거하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만드실 때에 사람과 의논하셨습니까? 아니지요. 성부 성자 성령께서 의논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신적 작정이라고 말합니다. 천상의 회의를 할 때에 누가 하나님의 창조에 보탬을 주었습니까? 오직 우리는 선하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선한 세상을 선물로 받았을 뿐입니다. 만약 사람이 공기를 돈을 주고 사서 마신다면 얼마를 주어야 할까요? 1분에 얼마를 받으면 적당할까요? 1분에 1억이라도 정말 공기를 사서 마셔야 한다면 1분을 살기위해서 공기를 사야지요? 그러면 저는 0.1초 분량의 공기도 살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100억대의 재산이 있어도 겨우 100분 동안만 살 수 있지요? 그런데도 인생이 얼마나 교만한지 하나님의 창조를 우습게 여기며 감사치 않고 있는 자들이 벌을 받아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선하신 하나님께서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동일하게 햇빛과 비를 주시지요? 출애굽 때처럼 얼마든지 구별하여 재앙을 내리듯이 비도 구별하여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심이 이렇게 크시니까 사람들은 으레히 있는 것처럼 당연히 여기고 있습니다. 공기뿐입니까?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다 그렇게 선하고 좋은 것입니다. 이런 좋은 세상에 사람이 범죄함으로 인하여 좋지 않은 것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하게 만들어 놓으신 것을 사람이 망쳐 버린 것입니다.
이제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것을 보십시오. 도대체 선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것은 선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구를 추구하는 쪽으로 무엇을 만들어 냅니다. 이것을 사람들은 발전이라고 하지만 발전이 좋은 것이 아님을 이미 알고 있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의 좋음과 인간의 편리를 위하여 만들어낸 것의 차이를 아시겠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무엇을 좋아 합니까?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것을 좋아합니까?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을 좋아합니까?
우리의 원망과 불평의 거의 전부가 무엇 없음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시는 선한 것 없어서 안타까워하십니까? 사람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것 없어서 안타까워합니까? 거의 후자일 것입니다. 냉장고 세탁기 없을 때는 그것만 있으면 행복할텐데 하였지만 냉장고 세탁기 사들이는 순간 소니제품이 나오니 어제까지 좋던 것이 오늘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이 만들어 내는 것의 선함이 없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구하는 것이 사실 인간으로는 불가능 합니다. 지금 새벽기도회때 산상설교를 가지고 기도하고 있습니다만 누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기 위하여 마음이 애통하며, 주리고 목말라 합니까? 의에 주리고 목말라서 철야기도, 금식기도 하는 사람을 보셨습니까? 기도원에서 구국 기도회 하는 곳 많지요?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기도회 보았습니까? I.M.F 극복 기도회는 보았는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은 것 보다 사람이 만들어 놓은 것을 좋아 하는지 아십니까?
세상은 그렇다 해도 교회는 하나님께서 피로 값 주고 만들어 놓았으니 교회만은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것만으로 감사하고, 좋아하고, 기뻐해야 하는데 교회마저 하나님의 솜씨를 좋아하기 보다는 사람의 솜씨를 좋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주신 것 창조의 모든 것을 인하여 감사하는 것이 당연 할뿐 아니라, 주의 피로 재창조하심으로 주시는 영생, 죄사함, 하나님의 자녀, 그러므로 하늘 나라를 기업으로 받는 것 이러한 것에 대하여 정말 감사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자꾸만 교회 안에서도 하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엄청난 일보다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을 자꾸만 하나님의 일처럼 속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어떻게 구분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일은 사람이 결코 할 수 없는 일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예배당을 크고 멋있게 짓는 일 누가 할 수 있습니까?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생을 주시는 일은 누가 하실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교회 안에서 조차 이런 구분이 안되어 있기에 사람의 일을 하나님의 일인 것처럼 자꾸만 독려를 합니다. 하나님의 일 하자고 외치는 그 일이 하나님의 선하심이 드러나는 일이 아니라 얼마든지 사람의 힘만으로 가능한 일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이라고 우기면 안되지요.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란 사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어떠한 것에도 하나님의 선이 유지되지 않는 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신 것이 무엇인지 정리가 좀 되십니까? 정리 보다는 혼돈이 더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말씀을 한 곳 찾아봅시다. 출 20:25 “네가 네게 돌로 쌓거든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 네가 정으로 그것을 쪼면 부정하게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곳에서 하나님 앞에 제물을 드릴 때 돌단을 쌓을 경우 그 돌을 정으로 다듬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듬으면 부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돌로 단을 쌓을 때 다듬으면 쌓기도 쉽고 보기도 좋을 텐데 다듬지 말라는 것입니다. 조선 시대의 왕궁에 가보면 얼마나 많은 돌을 잘 다듬어 바닥에도 깔고 층계도 만들어 놓았습니까? 석굴암도 돌로 다듬어 만든 것이지요? 이처럼 돌로 다듬어 세우면 견고하고 멋있고 위엄도 있어 보입니다. 그러므로 왕적인 권위가 드러나고 종교적인 제단에는 사람의 현란한 기술이 동원되어 그들이 섬기는 신적 권위를 높이는 일에 동원됩니다. 물론 성경에도 성막을 만들 때 솜씨 좋은 사람이 주의 신의 능력을 입어 성막도 성전도 짓습니다만 그것은 모두 그리스도의 모형을 보여주는 그림자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인위적인 솜씨를 발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베드로 대성당 같은 거대한 건물을 만들면서 무엇을 팔았습니까? 면죄부를 팔았지요? 헌금 한 것만큼 죄가 용서받는 다는 것 이지요 예수님의 속죄를 돈 주고 사려고 한 것입니다. 요즈음은 건축헌금 하면 복받는다는 말과 꼭 같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선하게 이루어 놓으신 것을 사람이 얼마나 망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화랑에 가면 작품 밑에 무어라고 써놓았습니까? 작품에 손대지 마시오! 손대면 망치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깨끗이 세탁하여 다리고 있는데 아이가 흙 묻은 손으로 거들어 줄려면 뭐라고 하십니까? 가만히 좀 있어라 가만히 있는 것이 돕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은혜가 없는 세상입니다. 그러니 은혜란 너무나 생소한 것입니다.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것을 사람들은 좋아 하지 아니합니다. 도대체 날 뭘로 보고.. 자존심 상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죄된 모습입니다. 우리는 평생토록 주님으로 받고만 사는 사람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한량없이 주시는 것입니다. 자꾸만 다듬어 보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만드신 것만이 참으로 좋은 것입니다. 선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거칩니다. 사형 형틀입니다. 사람들이 꺼려하는 것입니다. 미련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를 무슨 수로 포장을 하겠습니까? 이것도 찾고 저것도 찾을 수는 없습니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의 십자가만 붙들든지, 아니면 적당하게 각색하고 다듬어서 사람의 솜씨와 사람의 영광도 함께 드러내 보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끝으로 예화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이현주 목사라는 글 쓰는 분의 책에 다듬지 말라는 이 말씀을 하면서 충청남도 아산에 있는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이야기를 실어 놓았던 것을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충청남도 아산에 학이 많이 살고 있어서 학촌이라는 곳이 있답니다. 이곳에 박생원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아이들이 알에서 갓 태어난 새끼학을 소나무 둥지에서 꺼내 와서는 놀고 있는 것을 보고 학은 귀한 생물이라고 호통을 치면서 도로 올려놓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울상을 하면서 벌써 죽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보니 정말 죽은 것입니다. 어린 새끼를 주물렀으니 죽을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죽은 새끼라도 올려놓으라고 하였는데 그 다음날 아이들이 왁자해서 내다보니 그 학 새끼가 살아났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직접 둥지에 가보니 살아 있는 것입니다. 죽은 새가 다시 살아나다니 하면서 그 둥지를 살펴보니 그 둥지 바닥에 주먹만한 돌이 있었죠. 죽은 새가 저절로 살아 날리는 없고 아마 이 돌에 신통력이 있을꺼야 하고 돌을 꺼내 와서는 서울에 사는 자신의 친척 박승지에게 건네주었고, 박승지는 중국에 사신으로 가면서 넓은 땅이니 이 돌을 알아 볼 자도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들고 갔죠?
죽은 학을 살린 돌이 조선에서 왔다는 소문을 듣고 어떤 상인 두 사람이 왔는데 돌을 보자는 겁니다. 보고서는 참으로 귀한 물건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돌이오? 천년에 한번 날까 말까하는 돌인데 서해 유사 지경에서 가끔 나오는데 죽은 자도 가슴에 이 돌을 품어두면 살아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환혼석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천금을 주고도 못사는 것이랍니다. 천금이라는 말에 귀가 번쩍 하여 천금을 주시겠소 그러자 부르는 것이 값이라고 하면서 몇 일만 말미를 주면 돈을 장만해 오겠다는 것이죠? 그래서 몇 일 동안 무료하게 있는데 도대체 이 돌이 무엇인데 천금이나 하는가 하여 보자기에 싸 두었던 돌을 구경이나 하려고 꺼내어 보았는데 새똥도 묻어 있고 지저분하였지요. 그래서 이 박승지가 그 더러운 것을 깨끗이 닦아 내기 시작 하였겠죠? 몇 일을 정성끗 곱게 곱게 닦다보니 드디어 깨끗하게 반질반질 빛이 나는 것입니다.
드디어 약속한 날짜에 그 상인이 와서는 그 돌을 달라고 합니다. 천금을 마련하여 왔지요. 그래서 돌을 꺼내는 순간 낯빛이 어두어지면서 소리를 질렀지요. 허어 이거 큰일이로군. 아니 왜 그러시오? 누가 이렇게 반질반질 닦아놓았소? 그야 나지요. 이제 이 돌은 환혼석이 아니오. 참으로 귀한 보물을 못쓰게 만들어 놓았구려 하면서 돌아갔고 이제 자신의 손때로 정기를 잃어버린 환혼석만 물끄러미 내려다 봤을 뿐이라는 이야기가 아직도 아산땅 학마을에 남겨져 떠돌고 있답니다.
전설따라 삼천리 같은 이야기 이지만 오늘 말씀을 이해하는데 조금의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내가 만들어 낸 것보다 주님께서 주신 것이 얼마나 좋은지를 더욱 풍성히 체험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홀로 이루어 내셨기에 사람의 손길이 가지 않은 상태를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보시기에 좋다고 하실 곳은 한 곳 뿐입니다. 주님 홀로 십자가 지고 가시면서 이루어 내신 그 십자가의 사건만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 보시기에 좋다는 평가를 받는 길이 주님의 십자가 아래에 있는 길 외에는 달리 길이 없다는 사실을 아시고 주님의 십자가 그늘에서 쉬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