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곁 곳곳의 사대주의… 외교, 국민의 자긍심 살려야 / 정우진
2004년 나이지리아 아고아레 마을에 가니 국제기구에서 지원해준 정보센터가 있었다. 그곳 컴퓨터를 켤 때 비밀번호는 나에게 반가움의 미소를 띠게 했다. 바로 ‘대우(Daewoo)’였기 때문이다. 비록 외환 유동성 위기로 좌초했지만 한국 기업이 해외 곳곳으로 스며들었던 자취를 만나는 순간은 외지 생활에 알 수 없는 뿌듯함을 일게 했다. 2016년 인도 파트나의 한 어린이가 두건으로 쓰고 있던 태극기 문양의 손수건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세계 곳곳에서 마주치는, 한국과 관련한 발견은 무조건적 반사 같은 자부심을 줬다.
지금 저자가 사는 미국 뉴저지주에도 파리바게뜨와 뚜레쥬르가 있고, 한국 식료품점인 에이치(H)마트도 있다. 그런 곳을 보면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는 프랑스어나 영어를 쓰는 바람에 한국의 고유성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아쉬움이 든다. 많은 사람이 즐겨 찾으니 우리 말을 알릴 좋은 기회인데 굳이 서양화하거나 국적불명화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많은 이들에게 보편적으로 다가가기 위해서? 하지만 프랑스의 에르메스나 샤넬은 프랑스어 그대로 고급 명품의 대명사가 됐는데 말이다. 세계는 우리를 알고 싶어 하는데 정작 자신을 가꾸는데 인색한 우리의 모순을 여기서 발견한다. 어쩌면 이는 한류가 퍼져 나감에도 사대주의에 물들어있는 우리의 모습을 투영하는 듯하고, 더 나아가 요즘 들어 심화하는 국제 정치적 의존성과 겹친다.
국력과 경제 규모가 차이 나는 국가들을 상대한다고 해도, 국민은 위정자들이 주권 국가의 자긍심을 지키며 국익을 극대화하기를 기대한다. 과거 정부들은 보수든 진보든 대체로 미·중·러·일의 역학관계를 실리에 따라 이용해 왔다. 하지만 최근 정부는 전략적 모호함을 깨고 미·일에 밀착하면서, 독립된 목소리보다는 타국의 입장에 발맞추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가장 크게는 피해자의 존엄성 회복과는 거리가 멀게 일본의 국익에 최적화된 강제동원 배상 협의를 했다는 것이다. 또 최근 미국 정보기관에서 우리 대통령실 내 국가 안보실을 도청한 문제에 대해서도 아무런 문제 제기 없이 넘어갔다. “악의는 없었다”거나 “문서 내용이 허위일 수 있다”며 오히려 미국을 두둔했다. 또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이나 대만에 대한 견해에 있어 미국 입장을 대변하다시피 하는데 그것이 과연 외교·경제·안보 문제 등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우리나라의 지정학적 이해 상 최선인지 싶다. 핵 개발 같은 문제를 쉽게 포기하는 대가로 얻는 것은 ‘경제안보 현안에 대해 앞으로 더욱 긴밀히 협조해 간다’ 등 모호한 약속에 불과하다.
우리 역사에서 강대국에 이렇게 의존적인 태도를 언제 가졌을까. 만주벌판을 누비던 고구려가 아니라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해 삼국통일을 했을 때, 고려가 원나라의 부마국으로 전락했을 때,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했을 때일까. 하지만 이러한 사대주의는 학습된 무기력 탓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에게는 수나라 30만 대군과 당나라의 100만 대군을 물리쳤던 고구려, 나당전쟁에서 승리한 신라, 13척의 배를 가지고 133척 일본을 물리친 조선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사대주의는 지배층이 자신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활용했을지 모른다. 예를 들어 인조반정 때 명나라를 통해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했던 것도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자국민을 위한 최선의 결정을 내리기보다, 기득권 세력의 이해를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국가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한 행동을 은혜로 생각하며 그에 발맞춘다는 비상식적 사상을 정당화할 것이다. 또 피해자가 열등해 주권을 지키지 못했으니 선진 문명으로 개화해야 한다는 종속적 사고로 내면화할 수 있다. 즉 일본이 약탈적 침략자가 아니라 근대화시켜준 은혜국이라는 뉴라이트 사관으로, 미국이 우리나라를 경제·안보적으로 지배하는 현실은 공산정권들로부터 우리를 지켜주고 있다는 순응과 맹신으로 귀결할 수 있다.
뜻 모를 알파벳 축약형으로 우리의 정체성이 사라진 기업과 브랜드들, 번역을 아예 포기한 영화 제목, 촌스럽고 난해한 아파트 이름들, 공공기관이나 언론인들이 앞장서서 외래어 사용을 조장하는 현실은 모습을 달리해서 나타나는 종속적 가치관을 보여준다. 개인이 자존감 없이 잠재력을 극대화할 수 없는 것처럼 국가로서도 자신의 것을 존중하고 아끼지 못한다면 고유한 공동체를 이루는 존립 가치가 흔들릴 것이다. 따라서 국민에게 권력을 위임받은 통치자의 책무는 지구촌 전체를 위한 보편적 가치의 큰 틀 안에서 자국민의 복지를 달성하기 위해 온전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정우진 미국 럿거스대(뉴저지주립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등록 2023-05-10 19:31 수정 2023-05-11 02:35
https://www.hani.co.kr/arti/opinion/because/109129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