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 사회에서 가장 큰 이슈는 세월호 특별법 제정 문제와 군대 내에서의 폭력문제일 것입니다. 침몰하는 세월호를 바라만 보아야 했던 사람들은 세월호와 함께 대한민국호가 침몰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대한민국호가 침몰해 가고 있었는데, 세월호가 그런 사실을 알게 해 준 것입니다.
그렇다면 빨리 대한민국호를 바로잡아야 할 것입니다. 생명보다 물질을 우선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양심과 정의를 눈 앞의 자기 이익 대신 팔아넘기는 죽음의 문화를 던져버리고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공의를 세워가고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생명과 사랑의 문화를 만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진상 규명도 철저히 하고 책임질 사람들에게 책임도 묻고, 잘못된 관행이나 제도도 고쳐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세월호 이전의 우리 사회와 세월호 이후의 우리 사회가 이렇게 변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왠지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세월호도 그대로 묻혀버리고 잊혀져 갈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군대 내의 폭력 문제가 윤일병 사건으로 표면화되면서 감춰져 있던 어두운 실상들이 줄줄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익숙해진 단어가 있습니다. 관심 사병이라는 말입니다. 눈치 채셨겠지만, 제가 예전에 관심사병이었습니다. 예전에는 관심병사란 용어가 없었고,비슷한 뜻으로 ‘고문관’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군대라는 조직과 문화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그래서 사고를 칠 가능성이 다분한 병사. 저도 고문관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지급받은 장비를 잘 잃어버렸습니다. 대검도 잃어버리고, 탄띠도 잃어버리고, 철모도 잃어버렸습니다. 잃어버린 게 아니라, 저는 잘 두었는데 감쪽같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아침이면 코피를 흘리는 날이 더 많았고, 사격이나 군장을 메고 달리는 구보에 낙오하기 일쑤였습니다. 멍하니 앉아서 부대 밖 먼 하늘을 바라보고,기합을 받거나 힘든 훈련을 받을 때도 흥얼흥얼 콧노래를 불러댑니다.그래서 부대 간부들과 선임병들의 관심을 과하게 많이 받았습니다.
군 당국에서는 병사들 가운데 자살을 시도한 경험이 있다든지, 병영 내에서 사고를 일으킬 위험성이 높다고 판단되는 병사들, 개인이나 가정 문제로 인하여 성격이 원만하지 못하거나 가혹행위를 저지를 위험이 있는 병사들, 그 밖에 허약체질이거나, 입대한지 100일 미만으로 아직 군대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병사들을 정도에 따라서 ABC급으로 분류하고 특별한 관심과 상담을 통하여 관리를 하는데, 이런 관심 병사의 수가 전체 병사의 5%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군대 내 자살자의 40%가 이들 5%에 해당하는 관심병사들이라고 합니다.
군대 내 자살과 함께 또 하나의 큰 문제는 폭력과 왕따입니다. 인간적인 여러 가지 점에서 도와주고 배려해 주어야 할 약한 사람을, 오히려 집단으로 소외시키고 폭력을 가하는 이러한 현상은, 오래 전부터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고 있는 학교 폭력 문제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최근에는 유력한 정치인의 아들도 폭력문제로 입건이 되었습니다. 가해 병사들 가운데는 물론 관심사병도 있겠지만, 대부분 평범한 병사들입니다. 가해자들도 피해자들도, 모두가 소중한 우리의 아이들인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그리고 우리 부모들이, 이와 같은 관심병사도 만들고 군대 내 폭력의 피해자와 가해자도 만든 것입니다.
깨어지고 해체된 가정과 가정 내 폭력, 경제적인 어려움과 상대적인 박탈감, 그런 가운데 사랑과 돌봄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자라난 아이들, 우리 아이만 잘 되면 그만이라는 가치관과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고 승리할 수 있도록 아이들을 몰아치는 현실!이런 현실 속에서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의 내면에 분노와 폭력성이 독버섯처럼 자라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현실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데 필요한 배려나 협동심, 인내심과 같은 사회성을 전혀 길러주지 못하고,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아이로 키워낸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입니까? 이러한 현실은 과연 누구 책임입니까? 아이들 책임입니까?부모들 책임입니까?
오늘 본문에 나면서부터 시각장애자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은 이미 장성한 어른이었지만 노동을 할 수가 없으니 길가에 앉아서 구걸하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참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불행은 도대체 누구 책임입니까? 일하지 못하고 구걸하면서 불편하고 답답하게 살아가는 이 현실은 누구 때문입니까? 본인에게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본인 책임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구입니까? 분명한 것은 이 사람은 이러한 현실을 스스로 원하지도 않았고,무슨 잘못을 저지르지도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남의 불행에 관심도 참 많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저 사람이 겪고 있는 불행은 왜 일어난 겁니까? 자기가 잘못한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저 같으면 ‘쓸데없는 소리 말고 너나 잘 사세요’라고 대답했을 것 같습니다. 사실 누구 책임이라고 대답하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질문 속에는 한 가지 전제가 있습니다. 인간의 불행은 죄의 결과라고 하는 생각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질병이나 고통은 인간의 죄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하는 이러한 생각은 유대인 사회에서는 뿌리깊은 전통이요 고정관념이었습니다. 율법에 보면, 죄의 결과는 사망입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죄를 지으면 심판을 받습니다. 순종하고 계명을 잘 지키면 축복을 받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이런 잣대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인과응보, 특별히 율법의 잣대를 가지고 판단하는 사람들입니다. 인간의 고통은 틀림없이 죄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를 범했든지, 아니면 부모가 죄를 범했든지,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잣대로 본다면,불행을 당한 사람은 정죄의 대상일 뿐입니다. 이해하고 배려하거나 동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반대로, 부자가 되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고, 그래서 천국에 들어갈 1순위로 인정받습니다. 어떻게 벌고, 어떻게 그 자리에 이르게 되었는지 그 과정은 따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 귀로 들어가기보다 더 힘들다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제자들이 놀란 것입니다.그 말씀을 듣고 제자들이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하고 물은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율법적인 고정관념에 사람들은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고정 관념을 흔들어 놓으셨습니다. 그것은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만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 즉 섭리라고 하는 차원에서 인간의 고통의 문제를 보신 것입니다. 여러분, 역사가 그렇게 단순하게 율법적인 잣대로 다 이해가 되고 설명이 됩니까? 우리 인생의 문제들이 다 그렇게 율법으로 설명이 되고 해결이 되는 겁니까? 역사 속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담겨있습니다. 우리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사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이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일어나는 수많은 사건들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나의 성공이든 실패든, 나의 행복이든 불행이든, 그 속에는 나를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 뜻을 찾을 때 우리는 불행 중에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실패했더라도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며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아픔이나 불행 조차도 역시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드러내는 기회가 된다고 하는 이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물론, 중요합니다. 누구 때문인지, 무엇 때문인지, 도대체 어디에서 빗나간 것인지, 그 원인을 밝혀내는 것은 우리 모두의 중요한 과제입니다. 그래서 책임도 묻고 똑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제도나 관행도 고쳐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과 함께 우리는 이 일을 통하여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시는 뜻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을 해 봐야 합니다. 그 뜻을 볼 줄 아는 것이 신앙의 눈입니다.
‘본다’는 말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도 아주 중요한 개념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보는 눈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육체의 눈입니다. 이 눈으로 우리는 사물을 보고 공간을 지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눈이 완전히 신뢰할 수 있을 만큼 그렇게 정확하지는 않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박테리아라든가 미세먼지 같은 작은 것들을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눈,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습니다.
둘째는, 이성의 눈입니다. 이 눈으로 우리는 감각을 넘어서서 생각과 논리를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느끼고 판단하게 됩니다. 우리가 교육을 받는다고 할 때 그 본질은 이성의 눈을 계발하는 것입니다. 계몽주의 이래로 우리는 이성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합리성과 효율성을 따집니다. 문제는 우리의 이성이나 논리라고 하는 것이 지극히 주관적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금단의 과실 선악과를 따 먹은 인간입니다. 이것이 원죄가 되어서 우리 인간은 원죄를 지니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이성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왜곡된 이성입니다. 선악을 분별하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자기에게 유리하고 유익을 가져다 주는 것이 선입니다. 자기에게 불리하거나 손해가 된다면 악입니다. 언제나 자기 중심으로, 이기적인 가치관으로 그렇게 판단합니다. 자기 합리화를 일삼고, 다른 사람이나 어떤 문제를 바라볼 때도 자기에게 유리한대로,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보는 것입니다. 영악하고 똑똑해서 절대로 손해 볼 짓 하지 않고, 이웃이나 공동체 일에는 일정한 선을 그어놓고 절대로 그 한계를 넘어가지 않습니다. 이기적이고, 자기 변명에만 익숙한 대부분의 현대인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셋째는, 영의 눈입니다. 이 눈은 현실과 이성을 초월하는 눈입니다. 이 눈이 열리면 비로소 하나님의 세계를 보게 되고,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감지하게 됩니다. 이눈이 열리면 비로소 내가 죄인인 것과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음을 보게 됩니다. 이 눈이 열려야 다른 사람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게 되고, 그래서 더 이상 다른 사람을 내가 딛고 일어서야 할 경쟁자나 나의 이익과 성공을 위해 필요한 수단으로 보지 않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약점이 보일 때도, 그가 나보다 열등한 존재로서 내가 마음대로 대하여도 좋은 대상이 아니라, 돌보고 배려하고 품어주어야 할 대상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 눈이 열려야 율법의 정죄를 넘어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를 보게 되고, 그래서 사람들 모두가 절망하고 포기할 때에도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예수를 영접하기 전에는 율법의 전문가로서 스스로 의롭다고 확신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그에게는 자신의 죄를 대신 대속하고 용서하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예수를 핍박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메섹을 향하여 길을 가는 도중에, 갑자기 하늘로부터 음성을 듣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뉘시오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그 음성을 듣고 바울은 두 눈이 멀어버렸습니다. 지금까지 세상을 보고 판단하던 그 눈, 지금까지 예수와 하나님을 바라보던 그 눈. 스스로 교만하여 의롭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핍박하던 그 눈,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던 그 눈이 감긴 것입니다. 아나니아라고 하는 주의 제자가 찾아와 안수하여 주었을 때, 그의 눈에서는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비로소 그는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이제부터 그의 눈은 스스로 본다고 하던 과거의 교만한 눈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을 스스로 의롭다고 확신하던 교만한 눈이 아니었습니다. 죄로 가득한 자신의 참 모습을 보고, 십자가와 부활의 그리스도를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이 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들 역시도 바울과 같이 영적인 눈이 열려야 합니다.
오늘 본문 속에 등장하는 나면서부터 맹인으로 살아야 했던 이 사람에 대하여, 사람들은 그의 불행이 누구 때문이냐고 수근대었습니다. 아마도 본인 스스로도 수없이 물었던 질문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삶이겠거니 생각하며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고 하루하루 체념 속에 살아가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내 탓이 아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 탓이냐? 그 대상을 생각하며 불평과 원망 가운데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일을 당하면 먼저 책임의 소재를 찾습니다. 누구 탓이냐? 누구 책임이냐? 자신이 아니라 외부에서 책임을 찾고, 책임을 전가하고, 누군가를 정죄하거나 세상을 원망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군가를 원망하고 정죄하거나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눈을 떠서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는 일을 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적으로 눈이 멀어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를 보지 못하고 절망하거나 체념하거나 책임 전가와 불평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눈에 진흙을 발라 주십니다. 그리고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말씀대로 순종하는 사람은 눈이 밝아집니다. 그 눈으로 하나님을 보고, 자기 자신의 허물과 연약함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눈으로, 나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고, 다른 사람들의 얼굴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눈으로 이 땅의 역사 가운데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보고, 이 역사 속에서 보냄 받은 자로서 사명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하여 이 역사 속에서 책임을 다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삶에는 뜻이 있습니다. 역사 속에는 온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세월호 사건 속에서, 군대와 학교, 그리고 이 사회 속에 만연된 폭력과 죽음의 문화를 보면서, 거기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뜻을 볼 줄 아는 것이 신앙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실로암으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서 눈을 씻고 거기에 나타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