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베이커리 아루 김원선(32) 대표는 요즘 탄핵정국에 떠돌고 있는 이순신 장군의 임진왜란 임전훈(臨戰訓)을 들으면서 새삼 4년 전 창업당시를 떠올리곤 한다.
케이크가 좋아 제과학원을 다닌 김씨는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맛있는 케이크를 맘껏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 2000년 서울의 한복판 명동에 베이커리를 열었다. 사업이라는 전쟁터에서 승전보를 올릴 수 있는 유일한 무기 ‘돈’에 눈길을 주지 않고 마음을 비운 덕인지 그야말로 대박을 떠트렸다.
먹기가 아까울만큼 예쁘고 깜찍한 데다 입 안에 넣으면 달지 않으면서도 살살 녹는 맛이 일품인 김씨의 케이크는 곧 입소문이 나서 없어서 못 팔 지경이었다. 유통업계의 ‘콧대 높은 왕자’ 백화점에서 먼저 찾아와 자리를 내어주겠다고 할 정도였으니 베이커리 아루의 장사가 얼마나 잘됐는지 짐작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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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간 순수입이 1억원이 넘는 것은 확실해요. 그러니 더 이상 묻지 말아주세요. 아직까지 매출은 한번도 밝혀본 적이 없습니다.”
사업가들이 매출을 밝히지 않는 것은 세금 때문이다. 기자는 한껏 인심을 써서 “밝힐 수 있는 만큼의 매출만 말해달라”고 하자 김씨는 웃으면서 “세금은 표창을 받아도 될 만큼 제대로 내고 있다”고 했다. 백화점 매장이 많아 속일래야 속일 수도 없고 그럴 마음도 없다는 것.
“제과업계에선 저를 ‘이단아’라고 한다더군요. 갑자기 나타나 대기업과 당당히 경쟁하면서 손님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어선가 봅니다. 주위의 그런 시선이 거북해 매출을 밝히지 않고 있을 뿐입니다.”
손맛이 중요한 제과업계에는 누구의 제자,또는 △△출신 등 족보라는 게 있다. 일본에서 제과를 배운 뒤 귀국해 신라호텔에서 6개월 근무한 것이 이력의 전부인 김씨에게 족보가 있을리 없다. 족보도 없는 젊은 여성이 제과업계를 휘저었으니 어찌 고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었겠는가.
“대학에선 정치학을 전공했어요. 어머니 권유로 보석디자인을 공부하기 위해 1996년 일본으로 건너가 어학과정을 밟을 때였어요. 가을이 느껴지는 9월 어느날 우연히 집 근처 허름한 가게에서 케이크를 먹었는데 그 맛이 환상적이었습니다.”
김씨는 며칠 뒤 일부러 백화점을 찾아 케이크를 맛봤다. 역시 놀랄만큼 맛있었다. 그 순간 김씨는 보석디자인보다는 케이크 만드는 법을 배워가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한번 결정하면 뒤를 돌아보지 않는 성격의 김씨는 그해 11월 일본 동경제과학교 입학시험을 치르고 그 이듬해인 1997년 4월 입학했다. 까다롭기로 유명한 학교였지만 케이크와 사랑에 빠진 김씨는 데이트 하듯 즐겁게 2년 과정을 끝마쳤다.
사랑을 하면 그 사람의 사소한 생활습관,손동작 하나에도 관심이 가고 가슴에 새기는 법. 공부하는 동안 김씨는 밀가루 고르는 법부터 장식하는 것까지 배우는 대로 빠짐없이 메모했고,만들어서 먹어본 뒤에는 그 맛과 느낌까지 채곡채곡 적어놓았다.
“그 때 필기한 노트가 지금도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다양한 색채와 모양을 담아내는 케이크,정말 사랑스럽지 않나요?”
아루의 케이크를 한번 먹어본 사람이라면 90% 이상이 단골이 된다고 자랑하는 김씨에게 그 비결을 묻자 기계가 아닌 사람의 손으로 만들기 때문이라고 했다. 제품은 본사에서 만들어 새벽에 배달하는데,100% 수작업이어서 케이크가 늘 딸리는 편이다.
“무지하면 용감하다고 하잖아요. 사업이 이렇게 힘든 것인 줄 알았으면 아마 시작하지 않았을 거예요. 아루를 열고 나서 1년반 동안 하루 16시간씩 일하면서 8㎏이나 빠졌어요.”
작지만 깔끔하고 정감있는 케이크 하우스를 하면서 직접 케이크와 과자를 굽고 싶었다는 김씨는 아루를 열고 지점을 확장하는 동안 케이크 만드는 일과는 점점 멀어지고 있어 안타깝다고 했다. 그래도 신제품만은 직접 디자인하고 만들면서 맛과 모양을 다듬는다.
“제가 열심히 일하는 것은 학교다운 학교를 세우기 위해섭니다. 외국에 유학가지 않고도 제대로 제과 제빵을 배울 수 있는 전문학교를 세울 겁니다.”
김씨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한 첫 걸음으로 올 가을 베이커리 학원을 강남에 열 계획이다. 학원에선 케이크 과자 뿐 아니라 빵만드는 법도 가르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