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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플류도프는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골목길에서는 아직도 근처에서 나온 농부가 마차를
끌고 지나가면서 기묘한 목소리로 "우유 사려, 우유, 우유!"라고 외치고 있었다.
간밤에 처음으로 포근한 봄비가 내렸다. 포장되지 않은 곳에서는 파릇파릇한 풀이 돋아나
기 시작했다. 집집마다 뜰에 있는 자작나무에서는 녹색의 솜털이 솟아나고 벗나무와 포플러
는 그 길쭉한 향기로운 싹들을 벌렸으며 저택이나 상점에서는 즐비하게 한 줄로 늘어선 노
점 둘레에 수많은 사람들이 이 법석거리고 있었다. 겨드랑이에 장화를 낀 사람과 반질반질
하게 다림질한 바지와 조끼를 어깨에 걸친 누더기옷 차림의 사람들이 벌써부터 돌아다니고
있었다.
술집 근처에는 휴무일로 풀려나온 사람들로 벌써 붐비고 있었다. 남자들은 말쑥한 반코트
에 번쩍거리는 장화를 신고 있었으며, 여자들은 화려한 비단 스카프로 머리를 묶고 유리구
슬로 장식한 외투를 입고 있었다. 노란 권총 혁대를 찬 순경들은 무엇인가 따분하고 지루함
을 달래 줄 만한 사건이라도 없나 하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면서 각자 자기 담당 구역에 서
있었다.
가로수가 늘어선 좁은 길이나 이제 막 파릇하게 돋아난 잔디밭에서는 아이들과 개가 한데
어울려 장난을 치며 뛰놀고 있었고, 할머니들은 그 근처의 벤치에 앉아서 서로 즐겁게 잡담
을 주고받고 있었다.
햇볕이 비치지 않는 쪽은 아직도 냉랭하고 습기가 차 있었지만 말라 버린 길 한복판에서
는 무거운 짐마차가 삐걱거리며 가고, 철도 마차는 방울을 울리며 지나갔다. 사방에서 들려
오는 여러소리와 지금 감옥에서 행해지고 있는 것과 같은 미사에 사람들을 불러 모으려고
여기저기서 울리는 성당의 종소리 때문에 공기가 진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제각기
나들이옷을 입고 서둘러 성당으로 가고 있었다.
네플류도프를 태운 마차는 감옥 앞까지 가지 않고 감옥으로 가는 길 모퉁이에서 멎었다.
보따리를 옆에 낀 몇 명의 남녀가 감옥으로부터 백 보 가량 떨어진 길 모퉁이에 서 있었
다. 오른쪽에는 별로 크지 않은 목조 건물이 늘어서 있었고, 왼쪽에는 무슨 간판을 내건 2층
집이 한 채 있었다. 그 앞에 석조 건물의 거대한 교도소가 있었지만, 면회자는 그 곳까지 갈
수가 없었다. 총을 멘 보초가 왔다갔다 하면서, 거기로 가려는 사람들에게 호통을 치고 있었
다.
이 보초 맞은편에 있는 오른쪽 목조 건물의 옆문 옆에는 금줄이 쳐진 제복을 입고 장부를
손에 든 간수가 벤치에 앉아 있었다. 면회자가 그리고 가서 면회하려는 사람의 이름을 대면
그것을 장부에 써 넣곤 하였다. 네플류도프도 그리로 가서 예카레티나 마슬로바 이름을 댔
다. 금줄이 쳐진 제복의 간수가 그것을 기입했다.
"왜 아직 들여 보내지 않는 겁니까?"하고 네플류도프가 물어 보았다.
"지금 미사중입니다. 미사가 끝나면 들어가시게 됩니다."
네플류도프는 기다리고 있는 무리 쪽으로 물러섰다. 그 때 갑자기 사람들 속에서 남루한
옷에 찌그러진 모자를 쓰고 맨발에 헌 구두를 신은 사나이가 상기된 얼굴로 허둥지둥 뛰어
나오더니 감옥 쪽으로 가려고 했다.
"이봐, 어디로 가는 거야?"하고 총을 멘 보초가 소리쳤다.
"네깐놈이 웬 잔소리냐?" 남루한 옷의 사나이가 보초의 고함 소리에는 아랑곳없이 이렇게
대꾸하면서 되돌아왔다. "들여 보내지 않겠으면 그만둬. 기다릴 테니. 쳇, 장군이나 된 것처
럼 아니꼽게 굴어."
사람들 속에서 그 말 한번 잘했다는 듯한 폭소가 터져나왔다. 면회자 대부분은 초라한 옷
차림을 하고 있었으며, 어떤 사람은 완전한 누더기옷을 입고 있었다. 그런데 간혹 가다 개중
에 괜찮게 차린 사람들도 있었다. 네플류도프의 바로 옆에는 굉장한 옷차림을 하고 혈색이
좋은 얼굴에 말쑥히 면도질을 한 뚱뚱한 남자가 서 있었다. 손에 들고 있는 보따리는 보기
에 속옷같았다. 네플류도프는 그 사나이에게 여기에 처음으로 왔느냐고 물었다.
보따리를 든 사나이는 일요일마다 온다고 대답했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서로 여러 가지 이야기를 주고받게 되었다. 그는 어느 은행의 수위로 있는데
지폐 위조범으로 체포된 동생을 만나러 왔다고 말했다. 사람좋은 이 사나이는 네플류도프에게
자기의 신상 이야기를 모조리 털어놓은 다음, 그의 사정도 알고 싶어했으나, 때마침 당당한
순종 흑마가 끄는, 고무 바퀴가 달린 마차를 타고 온 대학생과 베일을 쓴 여자의 모습이
두 사람의 눈에 띄었다.
대학생은 커다란 보따리를 안고 있었다. 그는 네플류도프에게 다가오더니 자기는 자선을 위해
빵을 가지고 왔는데 어떻게 하면 이것을 죄수들에게 차입할 수가 있는지를 물었다.
"이것은 저의 약혼녀가 바라는 일입니다. 이 사람이 제 약혼녀입니다. 이사람의 부모님께
서 죄수들에게 차입해 주라고 권하셨어요."
"나도 오늘 처음 왔기 때문에 잘 모르겠습니다만 저 사람에게 물어 보시면 알 수 있을 겁
니다." 네플류도프는 오른편에 장부를 들고 앉아 있는 금줄이 쳐진 제복의 간수를 가르키면
서 말했다.
네플류도프가 대학생과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 한가운데 조그만 창문이 달린 감옥의 커다
란 철문이 열리더니, 그 속에서 군복 차림의 장교가 다른 간수들을 데리고 나왔다. 그러자
장부를 든 간수가 면회자 접수가 시작됐다는 것을 알렸다. 보초가 옆으로 비켜 섰다. 면회자
들은 모두 남에게 뒤처지지 않으려고 빠른 걸음으로 감옥 입구 쪽으로 밀려갔다. 그 중에는
달음질쳐가는 사람도있었다.
철문에는 간수가 한 명 서 있었는데 면회자들이 그 옆을 지나갈 때마다 커다란 소리로 16, 17 하고
숫자를 불렀다. 건물 안에서도 한 사람의 간수가 한 사람 한 사람씩 몸수색을 하면서
역시 다음 문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수를 세고 있었다. 그것은 밖으로 내보낼 때의 사람 수를 확인하여
면회자를 한 사람도 감옥 안에 남겨놓지 않도록, 또 한 명의 죄수라도 밖으로 도망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수를 세고 있던 간수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네플류도프의 등을 한 손으로 툭 쳤다.
이 간수의 손이 닿았을 때 네플류도프는 한순간 모욕감을 느꼈으나 곧 자기가 무엇 하러 여기
에 왔는가를 생각하고 이따위 일에 불만을 가지고 모욕감을 느꼈다는 것이 오히려 부끄러워졌다.
문 안으로 들어서자, 바로 쇠창살이 달린 조그만 창문이 여러 개 있는 둥근 천장의 방이
있었다. 집합소라고 불리는 이 방에서 네플류도프는 뜻밖에도 벽이 움푹 팬 곳에 걸려 있는
삽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상을 보았다.
'이런 것을 무엇 때문에 여기에 걸어 놓아을까? ' 그는 자기의 상상 속에서 무의식중에
그리스도 상을 죄수들과 결부시키지 않고 해방된 사람들과 결부시키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네플류도프는 빠르게 걸어가는 면회자들을 먼저 보내고 그 뒤에서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
고 마음속으로 이 곳에 감금되어 있는 죄수들에 대한 공포심과, 어제의 그 젊은이나 카추샤
와 같이 죄 없이 이 곳에 갇혀 있는 무고한 사람들에 대한 여민과, 눈앞에 닥쳐온 면회를
앞두고 두려움과 감격스러움이 뒤섞인 감정을 느꼈다.
첫째 번 방에서 나올 때, 그 곳 구석에 서 있던 간수가 뭐라고 했으나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네플류도프는 그 말엔 상관치 않고 다만 면회자들이 많이 가는 쪽으로 뒤따라갔는데
그 길은 여죄수 감방 쪽으로 가는 곳이 아니라 남자 죄수 감방으로 가는 쪽이었다.
성미가 급한 사람들을 먼저 보내고 그는 제일 마지막으로 면회실에 들어섰다. 그가 문을
열고 그 방에 들어서자 수백 명에 가까운 사람들의 목소리가 하나로 합쳐져 귀청이 떨어질
것만 같은 굉음으로 들려왔다. 방을 둘로 갈라놓고 철망에 다닥다닥 매달려 있는 사람들 곁
으로 가까이 가 보고서야 네플류도프는 비로소 그 까닭을 알게 되었다.
입구의 반대편 벽에 창이 나있는 이 방은 한 겹이 아니라 두 겹의 철망으로 갈라져 있었다.
그리고 그 철망은 천장에서 마룻바닥까지 막혀 있었으며 그 철망 사이로 간수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철망 저쪽에는 죄수들이 있었으며, 이쪽에는 면회자들이 있었다. 그들 사이에 가로놓인 두 겹으로
된 철망은 2 미터의 간격이 있었으므로 무엇을 건네주기는커녕 얼굴을 똑똑히 보는 것조차
----특히 눈이 나쁜 사람에게는---불가능할 정도였다.
이야기하기도 쉽지 않았으며 알아듣도록 하려면 힘껏 고함을 질러야만 했다. 양쪽에서 서로의 모습을
잘 알아보고, 하고 싶은 말을 잘하려고 기를 쓰고 있는 아내, 남편, 아버지, 어머니, 아이 들이
철망에 얼굴을 바싹 대고 있었으나, 저마다 상대편이 알아듣도록 말하려고 악을 쓰고 있는데다가
옆의 사람까지 역시 그와 같이 소리쳐서 그들의 목소리가 서로 방해를 할 따름이었다.
그러므로 남을 압도하려고 모두들 더 큰소리로 기를 쓰며 외치고 있었다. 그 때마다 귀청이
떨어질 듯한 아우성 소리가 울리고, 거기에다 여자들이 악을 쓰는 소리도 한데 썩여 들렸기 때문에
네플류도프는 방 안에 한 발 들여놓자마자 깜짝 놀랐던 것이다. 실제로 그들의 말을 알아듣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저 그들의 표정을 봄으로써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또 어떤 사이
인지를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네플류도프의 바로 옆에는 머리에 수건을 쓴 노파가 철망에 바싹 매달려 턱을 부들부들 떨며
머리를 절반쯤 깎은 파리한 얼굴의 젊은이에게 무엇인가 떠들어 대고 있었다. 젊은 죄수는
눈썹을 치켜세우고 상을 찌푸리면서 주의 깊게 노파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노파 옆에는
소매 없는 외투를 입은 젊은이가 서 있었다. 그는 불만스러운 듯한 얼굴에 희끗희끗한 턱수염을 기른
자기와 얼굴이 닮은 죄수가 이야기하는 것을 고개를 끄덕끄덕하면서 듣고 있었다.
그 옆에는 고급모직 목도리를 머리에 덮어쓴 여자가 젖먹이를 안은 채 마룻바닥에 앉아서
흐느껴 울고 있었다. 아마도 머리를 깎인데다가 죄수복을 입고 쇠고랑을 찬 백발의 남편 모습을
처음으로 본 모양이었다. 그 여자의 바로 옆에는 조금 전에 네플류도프와 이야기하던 은행 수위가
건너편에 서 있는, 눈에 광채가 나는 대머리 죄수에게 있는 힘을 다해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네플류도프는 자기도 이런 상태에서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이런 규칙을
만들어 낸 사람들, 그리고 이 규칙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반감이 속에서 불같이 끓어오름을
느꼈다. 그러나 이러한 무서운 상태에 놓여 있어도, 또 인간의 감정에 대한 이같은 우롱에 대해서도
시림들이 아무런 모욕감을 느끼지 않는 데 대하여 그는 적지 않이 놀랐다.
호위병도, 간수도, 면회자도, 죄수도 마치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인정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고 있었다.
네플류도프는 자기가 얼마나 무력한가를 자각하고 사회와의 괴리를 의식하면서 무엇인가 이상하고
우울한 기분에 사로잡혀 한 5 분 가량 그 방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자 뱃멀미 같은 정신
적인 구토감이 그의 가슴을 메스껍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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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기에 온 목적만은 수행해야 한다.'고 그는 자기 자신을 격려하면서 중얼거렸
다. '그런데 어떻게 하지?'
그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관리를 찾았다. 그러자 장교 견장을 달고 콧수염을 기른, 작달
막한 키의 야윈 사내가 면회자들의 뒤에서 서성거리고 있음을 보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저, 말씀 좀 묻겠습니다." 네플류도프는 역시 긴장한채 정중한 태도로 대답했다.
"그러시다면 집합소에서 계실 때 말씀하실 걸 그랬습니다. 그런데 누구를 만나시렵니까?"
"예카테리나 마슬로바입니다."
"정치범입니까?"하고 부소장이 물었다.
"아닙니다. 그저 보통......."
"그럼 선고를 받았나요?"
"네, 그저께 선고를 받았습니다." 네플류도프는 자기에게 호의를 보이는 듯한 이 부소장이
기분을 건드려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공손한 태도로 대답했다.
"여죄수라면, 이리로 오십시오." 부소장은 네플류도프의 외모와 보아 정중히 대우해야 할
인물이라고 판단을 내렸는지 이렇게 말했다. "이봐 시도로프!"하고 그는 가슴에 여러 개의
훈장을 단 턱수염이 많은 하사를 불렀다. "이분을 여죄수 면회실로 안내해 드리게."
"네, 알겠습니다."
이 때 철망 옆에서 가슴을 찌르는 듯한 통곡 소리를 내며 누군가가 울어댔다.
네플류도프는에게는 모든 것이 다 이상하게 생각되었지만 그 중에서도 무엇보다 이상하게
느껴진 것은 이 건물 안의 잔인한 모든 행위를 실천자인 부소장이나 간수장에 대해서 은혜
를 느끼고, 또한 감사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간수장은 네플류도프는를 남자 죄수 면회실에서 복도로 나가 맞은편에 있는 문을 열고 여
죄수 면회실로 데리고 갔다.
이 방도 남자 죄수 면회실과 같이 두 겹의 철망으로 둘로 분리되어 있었으나 그 규모와
면회자들이나 죄수들의 수에 있어서 남자 죄수 면회실보다 훨씬 적었다. 그러나 아우성과
떠들어 대는 소리는 남자 죄수 면회실과 다를 바 없었다 여기서도 철망 사이를 간수가 거닐
고 있었다. 이 곳 감독은 소매와 금줄을 두르고 암청색 파이핑을 단 제복을 입고 남자 간수
와 같이 혁대를 찬 여간수였다.
이 곳도 역시 남자 죄수 면회실처럼 사람들이 철망 양쪽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이쪽에는
하얀 죄수복을 입기도 하고 자기 옷을 입기도 한 여죄수들이 있었다. 철망은 사람으로 완전히
가려져 있었다. 어떤 사람은 잘 들리게 하려고 님의 머리 위로 발돋움을 하고 있었고,
어떤 사람은 바닥에 주저앉아서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하였다.
귀청이 떨어질 듯한 소리나 그 차림새가 모든 여죄수들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사람은 머
리칼이 흩어진 말라빠진 집시 여자였다. 그녀는 곱슬곱슬한 머리에서 스카프가 벗겨진 채
철망 저쪽 방 한복판의 기둥 옆에 서서 푸른색 프록코트 아래에 단단하게 허리띠를 졸라맨
집시 남자에게 재빠르게 손짓을 해 대면서 무엇인가 소리지르고 있었다. 집시 남자 옆에는
한 병사가 마룻바닥에 웅크리고 앉아서 여죄수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 다음에는 턱수염을 기르고 짚신을 신은 젊은 농부가 철망에 달라붙어서 울음을 참느라고
얼굴을 붉히고 서 있었다. 예쁘장하게 생긴 금발의 한 여죄수는 파란 눈으로 상대방을 보면서
농부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페도샤와 그녀의 남편이었다. 그들 옆에는 남루한 옷을 입은
남자가 머리를 흐트러뜨린 얼굴이 넓적한 여자와 함께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 다음에는 여자가 둘, 그리고 남자, 그리고 또 여자가 있었고, 그들 앞에는 여죄수가
한 명씩 마주 서 있었다. 그런데 마슬로바는 그 속에 없었다. 그러나 맞은편 여죄수들 뒤에
한 명의 여자가 서 있었는데, 네플류도프는 곧 그 여자가 카추샤임을 알아보았다.
그러자 별안간 가슴이 두근거리고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바야흐로 운명을 결정할 최후의 순간이
닥쳐온 것이다. 철망으로 가까이 다가가 보니 역시 틀림없는 그녀였다. 카추샤는 파란 눈의
페도샤의 뒤에 서서 살며시 미소를 띤 채 그 여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카추샤는 그저께처럼
죄수복이 아닌 잘록하니 허리를 졸라매서 가슴을 도톰하게 한 흰 윗옷을 입고 있었으며,
그 스카프 밑으론 법정에서 보던 것과 같이 까만 곱슬머리가 비어져나와 있었다.
'드디어 모든 것이 결정되는구나.'하고 네플류도프는 생각했다. '뭐라고 불러야 할까? 혹
시 그녀가 먼저 내게 와 주지는 않을까?'
그러나 그녀는 끝내 그에게 와 주지 않았다. 그녀는 친구인 클라라가 온 줄로만 알았고
이 남자가 자기를 면회하러 온 줄은 꿈에도 생각치 못했다.
"누구를 면회하시렵니까?" 철망 사이를 거닐던 여간수가 네플류도프의 곁으로 걸어와서
이렇게 물었다.
"예카테리나 마슬로바입니다." 네플류도프는 큰마음 먹고 간신히 입을 열었다.
"마슬로바, 면회!"하고 여간수가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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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슬로바는 이쪽으로 돌아다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고 가슴을 펴면서 낯익은 침착한 표
정으로 두 여죄수 사이를 뚫고 철망 곁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네플류도프를 알아보지 못하
고 의아한 듯 바라보기만 하였다.
그녀는 그의 옷차림으로 보아 그가 돈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생긋 웃어 보였다.
"저를 만나러 오셨나요?"하고 그녀는 미소 띤 사팔눈의 얼굴을 철망 쪽으로 가까이 대면
서 말했다.
"만나소 싶었소." 네플류도프는 '당신'이라고 해야 할지, '너'라고 해야 할지 잠시 망설였
지만 곧 '당신'이라고 부르기로 결정했다. 그는 여느 때와 같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
당신을 만나고 싶었소....... 나는......."
"우물쭈물하지 마!"그의 곁에서 남루한 옷을 입은 남자가 소리쳤다.
"훔쳤어, 안 훔쳤어?"
"이젠 다 죽게 됐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해?"하고 저쪽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마슬로바는 네플류도프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으나, 그가 말을 건넸을 때 그의 표정
으로 문득 옛날의 그를 생각했다. 그러나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미소는
사라졌고, 이마에는 고뇌의 빛이 깊이 어리기 시작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들리지 않는군요." 카추샤는 눈을 가늘게 뜨고 점점 더 이마에 깊은 주
름을 지으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내가 온 것은......."
'그렇다, 지금 나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 참회를 하고 있는 것이다.'하고 네플
류도프는 생각했다. 이렇게 생각하자 그의 두 눈에는 눈물이 핑 돌고 목이 메어서 철망을
붙잡은 채 복받치는 울음을 가까스로 참느라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
"죄가 없다면 여기 왜 들어왔어?" 누가 한쪽에서 소리쳤다.
"당신도 하느님을 믿으세요. 나는 절대로 모른다니까요."하고 또 다른 쪽에서 여죄수가 소
리쳤다.
네플류도프가 흥분한 것을 보자 마슬로바는 그를 알아보았다.
"어디서 뵌 것 같긴 한데 누구신지 모르겠네요." 그녀는 그를 보지도 않으면서 외쳤다. 갑
자기 붉어진 그녀의 얼굴은 더욱 침울해졌다.
"나는 당신한테 용서를 빌러 왔소." 그는 마지 무슨 과목을 암기라도 하듯 큰 소리로 거
치없이 말했다.
이렇게 큰 소리로 외치고 나자, 불현듯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부끄러운 게 당연하므로 부끄러움을 느끼는 편이 오히려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는 다기 큰 소리로 말했다.
"용서해 주오. 정말 내가 잘못했소."하고 스는 다시 외쳤다.
카추샤는 꼼짝도 않고 서서 그에게서 사팔눈을 떼지 않았다.
네플류도프는 더 이상 말을 계속할 수가 없어서 솟구쳐오르는 눈물을 간신히 참으며 철망
곁을 떠났다.
아까 네플류도프를 여죄수 면회실로 데려다 준 부소장이 그에게 흥미를 느낀 듯이 면회실
로 왔다. 그리고 네플류도프가 철망 곁에 떨어져 서 있는 것을 보고 왜 면회하려는 여자와
말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네플류도프는 코를 풀고 몸을 부르르 떨고 나서 애써 침착한 태도를 가지려고 애쓰며 대
답했다.
"철망 너머로는 도무지 얘기할 수 없습니다. 한 마디도 들리지 않는군요."
부소장은 잠시 생각했다.
"그럼 이렇게 하도록 하지요. 그 여자를 잠시 이리로 데려오겠습니다."
"마리야 카를로브나!"하고 그는 여간수에게 말했다. "마슬로바를 밖으로 데리고 가요."
잠시 후 옆문에서 마슬로바가 걸어나왔다. 그녀는 가벼운 걸을걸이로 네플류도프 바로 옆
에까지 걸어오더니, 걸음을 멈추고 눈썹을 치켜올리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저께와 마찬가지
로 곱실곱실한 까만 머리가 똘똘 말려 있었다. 병색을 느끼게 하는 얼굴은 새하얗고 부어
있었으나 역시 귀엽고 침착해 보였다. 다만 윤기 있는 까만 사팔눈만 부석부석한 눈까풀속
에서 유난히도도 강하게 빛나고 있었다.
"여기서 말씀하십시오."부소장은 이렇게 말하고 자리를 떠났다.
마슬로바는 뭔가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부소장을 흘깃 쳐다보고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네플
류도프를 따라 벤치로 가서 그와 나란히 앉아 스커트를 만지작거렸다.
"나를 쉽게 용서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나도 알고 있소." 네플류도프는 이렇게 말문을 열
기 시작했으나 또다시 눈물이 솟아올라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비록 과거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 하더라도 이제부터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라면 무엇이든지 다 하겠소. 제발 말 좀 해봐요."
"어떻게 저를 찾으셨어요?" 그의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그녀는 그를 보는지 안 보는지
도 모를 사팔눈으로 이렇게 물었다.
'아, 하느님! 저를 도와 주소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가르쳐 주십시오.' 네플류도프는 이렇
게 추하게 변해 버린 카추샤의 얼굴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저께 당신이 재판을 받을 때 나는 배심원으로 법정에 나갔었소."하고 그는 말했다. "그
때 나를 알아보지 못했소?"
"네, 알아보지 못했어요. 그럴 겨를도 없었고 또 보려고도 하지 않았으니까요."하고 그녀
는 말했다.
"아기가 있었다는데?" 네플류도프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면서도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금방 죽어 버렸어요." 카추샤는 그에게서 시전을 돌리며 화난 듯 짤막하게 대답
했다.
"아니, 어째서 죽었소?"
"저까지도 병으로 하마터면 죽을 뻔한 걸요." 그년는 눈을 내리깔고 말을 했다.
"그런데 왜 고모님들은 당신을 내보냈지요?"
"누가 애 밴 하녀 따위를 집에 두겠어요. 탄로난 즉시 쫓겨났지요. 지금 와서 이런 말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난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요. 죄다 잊어버렸어요. 옛날에 다 끝난
일이예요."
"아냐, 아직 끝나지 않았소. 나는 당신을 이대로 내버려 둘 수가 없소. 이제라도 내 죄를
속죄하겠소."
"속죄하실 필요는 없어요. 그건 모두 다 지나 버린 일이니까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더니
뜻밖에도 갑자기 눈을 들어 유혹하듯, 호소하듯, 불쾌한 듯 야릇하게 미소 띤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마슬로바는 이런 곳에서 그를 만나리라고 꿈에도 생각지 못했으므로, 처음 그를 대하는
순간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여태껏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일들을 부득이 회상해야만
했다. 카추샤는 먼저 옛날 서로 사랑을 주고받던 시절에 아름다운 청년이 보여 준 새롭고
오묘한 감정과 사상의 세계를 막연히 회상해야만 했다. 그 다음 그 청년의 이해할 수 없는
무정함과 그 꿈같은 행복에 뒤이어 몰아쳐 온 너무나 많았던 굴욕과 고민을 상기했다.
그러자 가슴이 아팠다. 그렇다고 어떻게 할 수도 없었으므로 그전처럼 이런 아픈 추억을 머릿속
에서 몰아내고 타락한 생활의 독특한 안개 속에 애써 덮어 버리려고 애썼다. 그를 처음 볼
때에는 자기 눈앞에 앉아 있는 사나이를 한때 사랑했던 청년으로 연관시켜 보려고도 해보았
으나 그것은 너무나 괴로웠기에 곧 단념해 버렸다. 이제 이 말쑥하게 차린, 턱수염에서까지
달콤한 향수 냄새가 풍기는 이 신사는 그녀에게 있어서는 한때 자기가 사랑했던 청년 네플
류도프가 아니라 필요할 때면 언제나 자기와 같은 여자를 이용하는 사나이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이런 사나이는 또한 자기로서도 될 수 있는 대로 유리하게 이용하지 않으면 안 되었
다. 그래서 그녀는 유혹하는 듯한 미소를 보냈던 것이다. 카추샤는 이 남자를 어떻게 이용해
야 좋을까 하는 궁리를 하며 잠시 동안 잠자코 있었다.
"옛일은 다 끝장이 났어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이젠 벌써 유죄 판결이 내렸으니까요."
이 무서운 말을 핼 때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나도 당신의 무고함을 알고 있소. 절대로 확신하고 있소."
"그야 물론이지요. 난 도둑도 아니고 강도도 아니에요. 죄다 변호사 탓이라고들 하더군
요."하고 그녀는 말을 이었다. "상소를 해야 한다고들 하지만 돈이 많이 든다니......."
"돈을 아끼지 마시고 좋은 변호사를 좀 대 주세요." 그녀가 말했다.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데까진 하겠소."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녀는 다시 아까와 같이 유혹하는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 부탁이 있는데요...... 괜찮으시다면 제게 돈을 좀 주시겠어요? 조금만...... 한 10루블
가량...... 그 이상은 필요 없어요." 갑자기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아, 그러지."
네플류도프는 당황하여 지갑에 손을 댔다.
카추샤는 면회실 안을 왔다갔다 하는 부소장을 힐끔 쳐다보았다.
"저 사람 앞에선 꺼내지 마세요. 저 사람이 저쪽으로 갔을 때 꺼내세요. 그렇잖으면 빼앗
겨요."
네플류도프는 지갑을 꺼내서 부소장이 돌아섰을 때 10루블짜리 지폐를 건네 주려고 하자
부소장이 다시 이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는 돈을 움켜쥐었다.
'이 여잔 이미 죽은 여자나 다름 없구나.' 과거에는 사랑스러웠지만, 지금은 더럽고 부석
한 그 얼굴, 까만 사팔눈을 흉측맞게 번득거리며 부소장과 지폐를 움켜쥔 그의 손을 번갈아
보고 있는 카추샤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네플류도프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 순간 그는 망설
였다.
간밤에 그에게 속삭이던 그 유혹의 소리가 또다시 네플류도프의 마음속에 떠올랐다. 그것
은 평상시처럼,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서 그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가, 또 어떻게
하는 것이 자기에게 유익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그를 이끌어 가려는 마음의 소리였다.
'너는 지금 이 여자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하고 그 소리는 말했다. '다만 자기 목
에 돌을 매다는 격이다. 너를 물 속에 가라앉게 하고 네가 세상에서 유익한 존재가 되는
것을 방해할 뿐이다. 그러니까 지금 갖고 있는 돈을 몽땅 이 여자에게 주어 버리고 영원히
인연을 끓어 버리는 게 상책일 것이다.'하고 속삭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의 마음속에는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것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동
시에 그이 내적 생활은 지금 이 순간 흔들리는 저울대 위에 놓여 있듯이 조금만 힘을 가해
도 어느 한쪽으로든 기울어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는 마음속에 느꼈던 신의 이름을 부르
면서 새롭게 노력을 해보았다. 그러자 그 신은 곧 그의 마으넹 호응했다. 그는 모든 것을 그
녀에게 고백하기로 결심했다.
"카추샤! 난 용서를 빌러 온 거야. 그런데 넌 한 마디도 용서한다든지 또는 언제 용서하겠
다든지 하는 대답을 안 해 주는구나."하고 그는 갑자기 호칭을 바꾸어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말은 들은 체도 않고 그의 손과 부소장만 번갈아 보고 있었다. 그러다
가 부소장이 저쪽으로 돌아서자, 그녀는 재빨리 네플류도프쪽으로 손을 내밀어 지폐를 빼앗
아 허리띠 밑에다 감추었다.
"참 이상한 말씀을 다 하시네요."하고 방긋 웃으면서(그것이 그에게는 모욕적으로 생각되
었다.) 그녀는 말했다.
네플류도프는 그녀의 마음속에는 무엇인가 그를 미워하는 감정이 있어서, 그것이 현재의
그녀를 우지케 하려 하고 동시에 자기 마음속을 틈입해 들어가려는 그의 노력을 방해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야릇하게도 그 사실은 그에게 혐오감을 불러일으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무엇인가 더 한층 특별하고 새로운 힘으로 그녀에게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그는 자기가 그
녀를 정신적으로 눈뜨게 하지 않으면 한 된다고 느꼈다. 그것은 한없이 어려운 일일 것이지
만 그 어렵다는 것 자체가 오히려 자기에게 힘이 되는 것 같았다.
지금 그는 그녀에 대하여 여태껏 그녀에게는 물론 다른 어떤 사람에게도 느껴 보지 못한 감정을
느꼈다. 그 감정은 이기적인 면이란곤 전혀 없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그녀에게서 바라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현재와 같은 상태를 떨쳐 버리고, 반성하고 예전의
그녀로 되돌아가 주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카추샤,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나는 너를 잘 알고 있어. 파노보 마을에 있던 옛날
의 너를 나는 너무 잘 알고 있단 말이야."
"과거를 되살려 무엇해요?"
그녀는 냉담하게 내뱉었다.
"난 옛날에 지은 내 죄를 속죄하려고 지금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거야, 카추샤."하고 그
는 말했다. 그리고 그녀와 결혼할 생각도 있다고 말하려 했느나 그녀의 시선과 부딪치자 그
속에서 무엇인지 무섭고 난폭하고 반항적인 것을 읽었기 때문에 그는 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 때 면회자들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부소장이 네플류도프 곁으로 다가와서 면회 시간이
끝났다고 일러 주었다. 마슬로바는 그러기를 바라고 있다는 듯 냉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안녕! 아직 더 할 말이 많지만 보다시피 오늘은 안 되겠어." 네플류도프는 이렇게
말하고 손을 내밀었다. "다시 오겠어."
"이젠 더 하실 말씀이 없으실 것 같은데요."
그녀는 손을 내밀었지만 꼭 쥐지는 않았다.
"아니야, 난 충분히 이야기할 수 있는 장소에서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도록 노력해 보겠
어. 그리고 그 땐 꼭 해야 할 매우 중대한 이야기를 하겠어." 하고 네플류도프는 말했다.
"그러시다면 또 오세요." 그녀는 사나이들의 마음에 들고 싶을 때 언제나 짓곤 하던 그런
미소를 띠며 말했다.
"너는 내게 있어서 누이동생 이상으로 가까운 사람이야."하고 네플류도프는 말했다.
"재미있는 말씀이네요!"하고 그녀는 고개를 저으면서 철망 저쪽으로 가버렸다.
43
네플류도프는 이 첫 면회 때부터 카추샤가 자기를 보고 그녀에게 봉사하려는 자기의 결심
과 참회의 말을 듣고 나면 반드시 기뻐하고 감동하여 다시 그 옛날의 카추샤로 되돌아가 주
리라고 기대했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옛날의 카추샤는 존재하지 않고, 지금은 타락한 마슬로
바만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곤 기겁을 했다. 이 사실을 그를 놀라게 했고 무섭게 했
다.
그를 특히 놀라게 한 것은, 마슬로바가 자기의 처지, 이를테며 죄수로서의 처지가 아니라
(그 점에 있어서는 그녀도 부끄러워했다.) 매춘부로서의 처지가 조금도 부끄럽게 여기기는커
녕 오히려 그것에 만족을 느끼고 자랑스러워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하기야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인간이란 누구든지 전심으로 무슨 일을 할 때 그 일이 중요하고 훌륭한
일이라고 믿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가령 인간의 어떤 처지에 있더라도 자기의 일이 중대하고 훌륭한 일인 것처럼 보이도록
일반적으로 인생에 대한 관념을 갖도록 노력해야 하는 법이다. 세상 사람들은 대체로 도둑이나
살인자나, 간첩이나 매춘부와 같은 사람들이 자기의 직업을 좋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와 반대인 것이다. 운명이나 자기의 죄악이나 또는 과실에 의해서 특정한 입장에 처한
모든 사람들은 아무리 그 입장이 부정한 것이라 할지라도 자기의 입장이 훌륭하고 존경할 만한 것으로
보이도록 인생관을 채택하는 법이다. 그리고 그러한 인생관을 유지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자기가 채택한 인생관과 그들 자신의 생의 이념에 있어서의 자기의 위치를 인정해 주는 그러한 사회와 함께
혼합된 것을 옹호하려고 한다.
자기의 교묘한 솜씨를 자랑하는 도둑이나, 음탕함을 자랑하는 매춘부나, 잔인함을 자랑하는
살인자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때, 우리는 이런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를 놀라게 만드는 것은 이런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계나 환경이 좁고 한정되어 있고,
우리 자신은 그 밖에 처해 있기 때문이라는 데 불과하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그것과 조금도
다름없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지 않을까?
자기의 재산, 즉 약탈을 자랑하는 부자, 자기의 승리, 즉 살인 행위를 자랑하는 장군,
자기 권력, 즉 폭압을 자랑하는 위정자 등등. 우리들이 이런 사람들 속에서 자기의 위치를
정당화하기 위한 인생관과 가치관을 왜곡하는 행위를 찾아내지 못한다는 것은, 그런 사람들의
사회가 더 크고, 우리들 자신도 그 사회에 속해 있지 때문인 것이다.
마슬로바의 마음속에서도 자기의 생활과 사회에 있어서의 자기의 위치를 대한 견해가 완
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징역을 선고받은 매춘부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자기 자신
을 정당한 것으로 믿고 있었고 자기의 처지를 남에게 자랑까지 할 수 있는 인생관을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다.
그녀의 철학에 따르면 모든 남성의 가장 중요한 행복이란---늙은이, 젊은이, 중학생, 장
군, 교양이 있는 자, 교양이 없는 자, 그 밖의 누구를 막론하고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매
력 있는 여자와의 성행위에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모든 남성은 모든 일로 바쁜 체
하고 있지만 사실은 오직 그것만을 바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상대자인 그녀는 매력
이 있는 여자이기 때문에 그들의 그러한 욕망을 충족시켜 주느냐 않으냐는 오로지 자기의
재량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필요하고도 중대한 존재라 할 수 있었다. 그녀
의 과거와 현재에 있어서의 생활 전체가 이 견해의 정당성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지금까지 10년이란 세월을 그녀는 어디를 가건 네플류도프와 나이 많은 경찰서장을 비롯
해서 감옥의 간수에 이르기까지 사내란 사내는 모조리 그녀를 탐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자기를 탐내지 않는 사내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런 까닭으로 그녀의 눈으로 볼
때 전세계는 정욕의 폭풍에 휩싸여 사방 팔방에서 그녀를 노리고 기만, 폭력, 간계 등 모든
수단으로 그녀를 손아귀에 넣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인간들의 집단에 지나지 않았다.
마슬로바는 이런 식으로 인생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눈으로 볼 때 그녀의 가치란 인간
의 찌꺼기가 아니라 상당히 중요한 인물로 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마슬로바는 이런 인생
관을 이 세상의 무엇보다도 존중하고 있었다. 또한 존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
인생관을 바꾸게 되면 그것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서 확보되고 있던 그녀의 가지를 상실케
되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인생에 있어서의 자기의 가치를 상실하지 않기 위해서 그녀는
본능적으로 자기와 똑같이 인생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의 세계에서 이탈하지 않으려고 애
쓰고 있었다.
네플류도프가 자기를 딴 세계로 끌어 내려고 하는 것을 눈치채자, 그가 데려가려는 그 세계로
들어가면 지금까지 자기에게 자부심과 자존심을 불러일으켜 주던 인생에 있어서의 지금의 지위를
잃어버리게 될 거이 틀림없다는 것을 재빨리 알아차렸기에 그녀는 네플류도프의 생각에 반항하였던 것이다.
역시 같은 이유로 그녀의 처녀 시절의 추억도, 네플류도프와의 첫사랑의 추억도 몰아 내려고 했다.
그러한 추억은 현재의 인생관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것이었으므로 그녀의 기억으로부터 말살되고 있었다.
아니, 말살되었다기보다는 오히려 기억의 한 구석에 손도안 댄 채 보존되고 밀폐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마치 꿀벌이 자기들의 노동의 대가가 없어질까 봐 유충의 집을 밀봉해 버리고 완전히
격리해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런 까닭으로 지금의 네플류도프는 그녀에게 있어선 한때 그녀가 순진한 처녀의 마음으로 사랑했던
사나이가 아니라, 오직 한 사람의 돈 많은 사나이에 불과했다. 이용할 수도 있고, 당연히 이용해야만
하는 사나이였으며, 또한 모든 사내를 대할 때와 같은 관계밖에는 아무것도 있을 수 없는 그런 사내에
지나지 않았다.
'아니다. 나는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하고 사람들과 함께 출구
로 걸어나오면서 네플류도프는 생각했다. '결혼할 작정이란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비록
말은 하지 않았지만 기어코 그녀와 결혼하겠다.'하고 그는 다짐했다.
출구에 서 있던 간수들은 이번에도 역시 죄수가 밖으로 나가거나 면회자가 감옥 안에 남
아 있지 않도록 하려고 사람들을 내보내면서 두 손으로 세고있었다. 네플류도프는 이번에도
등을 얻어맞았으나 모욕감 같은 것은 느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얻어맞았다는 사실
조차 전혀 느끼지 못하고있었다.
44
네플류도프는 자기의 외적 생활 양식을 바꾸어 보려고 마음먹었다. 커다란 자기의 집을
세주고 하인들을 내보낸 다음, 여관으로 옮겨가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그라페나 페트로브
나는 겨울까지는 생활 양식을 바꾼다는 것이 너무 어려운 일이며, 여름철에는 집을 세들 사
람도 없고, 또 어디서 생활을 하든지 가구와 도구는 있어야 한다고 우겨댔다. 그래서 외적
생활을 변경하려던 네플류도프의 모든 노력은(그의 대학생과 같이 검소한 생활을 하려고 했
던 것이다.) 수포로 돌아가 아무런 결과도 보지 못했다.
모든 것이 그전과 똑같이 유지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집 안에서 모직물이나 모피류의
일광 소독 등 큰 소동이 벌어졌다. 문지기나 그의 조수 코르네이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그 일을
도왔다. 처음에는 아직껏 아무도 사용해 본 일이 없는 예복과 괴상한 모피 의복들을 들어내다
줄에 널고, 그 다음에는 융단과 가구를 내놓고 문지기와 조수가 우람한 팔뚝을 걷어붙이고
장단을 맞추어 가면서 열심히 먼지를 털었다.
모든 방에서는 나플탈렌 냄새가 잔뜩 풍겼다. 뜰을 돌아 보기도 하고 창에서 내다보기도 하던
네플류도프는 물건이 엄청나게 많은 데에 놀랐고, 또 그것들이 아무 쓸모 없는 것임에 더욱 놀랐다.
이런 물건들의 유일한 용도와 목표라는 것은, 아그라페나 페트로브나, 코르네이, 문지기, 그의 조수,
식모에게 운동할 기회를 제공하는 일일뿐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마슬로바의 사건이 해방되기 전엔 생활 양식을 굳이 바꿀 필요는 없다.'하고 네플류도프
는 생각했다. '그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아무튼 그녀가 석방되든지, 유형이 결정되어
내가 그 뒤를 따라가게 되면 모든 것은 저절로 해결될 것이다.'
네플류도프는 변호사 파나린과 약속한 날에 그의 집에 찾아갔다. 커다란 나무들이 늘어서
있고 창문에는 호화로운 커튼이 걸려 있었으며 대체로 벼락부자가 된 집에서 흔히 볼 수 있
는, 이를테면 불로 소득으로 얻은 돈이라도 있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고급 가구로 장식된 웅
장한 저택이었다. 응접실에 들어서자 네플류도프는 마치 병원의 대기실처럼 지루함을 잊게
하려는 잡지가 놓여 있는 테이블 주변에서 침울한 얼굴을 하고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소
송 의뢰인을 보았다.
높은 책상 앞에 앉아 있던 변호사의 조수가 네플류도프를 보자 곁으로 다가와서 인사하고
곧 선생님께 말씀드리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조수가 사무실 문까지 채 가기도 전에 문이 저절로
열리더니 혈색 좋은 얼굴에 짙은 콧수염을 기르고 새 양복을 입은 뚱뚱한 중년 남자와 바로 이 집
주인 파나린의 떠들썩한 큰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 두 사람의 얼굴에는 뭔가 부정한 돈벌이를 하고 난
인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표정이 감돌고 있었다.
"그건 당신이 나빠." 파나린은 빙글빙글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도 천국에는 가고 싶은데, 죄가 많아 안 되겠지?"
"그래, 다 알고 있다네."
두 사람은 어색하게 웃었다.
"아, 공작님, 어서 들어오십시오." 파나린은 네플류도프를 보자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다
시 한 번 나가는 상인에게 인사하고, 네플류도프를 빈틈없이 꾸민 자기 사무실로 안내했다.
"자, 담배피우시지요." 변호사는 네플류도프의 맞은편 자리에 앉으면서 방금 결말을 본 사건
의 성공이 가져다준 자랑스런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실은 마슬로바 사건 때문에 찾아왔습니다."
"네 네, 곧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본 땅딸보는 정말 골치덩이리랍니다."하고 그
는 말했다. "그자를 보셨지요? 그래도 재산을 1200만이나 가지고 있죠. 그런데 그 작자는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만일 당신에게 25루블짜리 지폐 한 장이라도 얻어 낼 수 있
다고 생각되면 입으로 물고 뜯어서라도 뜯어갈 놈입니다."
'그 사내가 말 한마디도 제대로 못한다고 하지만 그러는 너도 25루블 짜리 지폐라는 엉터
리 간은 말을 쓰고 있지 않는가?'하고 네플류도프는 생각했다. 네플류도프와 자기와는 같
은 계급에 속하지만 여기에 모여드는 다른 의뢰인들은 자기와 계급부터가 다르다는 것을
은연중에 암시하려는 이 무례한 사내에게 네플류도프는 참을 수 없는 혐오를 느꼈다.
"정말 그자한테는 질렸습니다. 무서운 악질이죠. 한 마디 따끔하게 쏘아 주려고 했습니다
만." 변호사는 쓸데없는 소리를 한 것에 대해 변명이나 하듯이 말했다. "그런데 당신의 사건
말입니다. 내가 일건 서류를 자세히 조사해 보았습니다만 투르게테프가 표현한 대로 '그
내용에는 찬성할 수 없다.', 즉 변호사가 돼먹지 않아서 상소의 이유를 모조리 놓쳐 버리고
말았더군요."
"그래서 어떻게 결정하셨습니까?"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변호사는 때마침 들어간 조수에게 말했다. "그 사람에게 이렇
게 말하하고. 내가 말한 대로 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그만두라고 말이야."
"싫답니다."
"그럼 그만두게."하고 변호사가 말했다. 그는 지금까지 쾌활한 표정으로 떠들더니만 점차
침울하고 화난 표정으로 변했다.
"모두들 변호사는 그저 돈만 뜯어먹는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만," 그는 다시금 아까와
같은 유쾌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실은 내가 부당하게 파산 선고를 받은 자를 면소시
켜 주었더니, 요즘은 그런 작자들이 밀어닥친답니다. 그러나 이런 사건은 모두 대단한 노력
이 필요합니다. 어떤 작자가 말했듯이 우리들은 가슴의 피로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
신의 사건, 아니 당신이 관심을 갖고 계시는 사건은,"하고 그는 말을 이었다.
"아주 졸렬하게 다루었기 때문에 상소할 만한 좋은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상소할 수는 있어서 이렇게 서류를 작성해 놓았습니다."
변호사는 새까맣게 써넣은 서류를 집어서 흥미도 없고 형식적인 대목은 어물어물 넘기고,
그 밖의 대목은 억양을 붙여 또박또박 발음하면서 읽기 시작했다. "대심원 형사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상소. 모년 모월 모일 모 재판소에서 성립된 판결에 의하여 마슬로바라는 여자
는 상인 스멜리코프를 독살했다는 것이 유죄로 인정되어 형법 제1454조에 의거하여 ......징역
의 선고를 받았음."
그는 여기서 잠시 말을 끊더니 이런 일에는 이골이 나 있어서 자기가 작성한 문장에 대하
여 흐뭇한 듯 자기 도취에 빠져들었다.
"이 판결은 지극히 중대한 사법상의 위반과 착오의 결과이므로,"하고 그는 힘을 주어 가
면서 계속했다. "마땅히 취소되어야 함. 첫째로 본건 심의 중 스멜리코르의 내장 해부에 관
한 보고서 낭독이 재판장에 의해서 중지되었음. ......이것이 그 이유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 낭독은 검사가 요구했습니다." 네플류도프는 놀라서 말했다.
"상관없습니다. 변호사도 같은 요구를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그 낭독은 전혀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어찌 되었던 상소의 이유는 됩니다. 다음은......둘째로 마슬로바의 변호인은,"하고 그는 계
속했다. "변론 도중 마슬로바의 성격을 설명하기 위하여 그녀가 타락한 내적 원인을 언급하
려 하자, 이것이 사건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고 하여 재판장의 제지로 중지되었음. 그러나
형사 사건에 있어서는 전부터 대심원에서 누누이 지적한 바와 같이 피고의 성격과 일반적인
도덕적인 인격에 관한 설명은 형사상 중대한 의의를 갖는 것임. ......이것이 두 번째 이유입
니다."하고 그는 네플류도프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하지만 그 변호사의 변론이 너무 서툴러서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는걸요." 네플류도프는 더욱 놀라면서 말했다.
"그야 물론, 어리석은 풋내기니까 제대로 말도 못했을 겁니다." 파나린은 웃으면서 말했
다. "그러나 이것도 상소의 이유가 됩니다. 그럼 그 다음으로는 ......셋째로, 재판장은 결론에
있어서 형사소송법 제 81조 제 1항의 필연적인 요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죄의 개념을 규
정하는 법률상의 모든 요소를 배심원에게 설명하지도 않았고,
또 마슬로바가 스멜리코프에게 독약을 준 사실을 승인하더라도, 그녀에게 살해의 의사가 전혀
없을 때는 그 행위만으로써 그 여자에게 죄를 돌릴 것이 아니라, 그럴 경우에는 형사상의 범죄가
아니라 다만, 그 여자로서는 뜻밖에 상인의 사망을 초래케 한 과실에 불과한 것이며, 그 행동에
대해서만 죄를 인정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배심원들에게 주의하지 않았음. ......
이것이 제일 중요한 점입니다."
"네, 우리들도 곧 그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과실이었습니다."
"끝으로......넷째로,"하고 변호사는 계속했다. "마슬로바의 유죄에 관한 법정의 자문에 대한
배심원의 답신서는 그 자체에 있어서 명백한 모순을 내포고 있음. 마슬로바는 오로지 탐욕
때문에 고의로 스멜리코프를 독살한 것으로 기소되었으며, 그 살해의 유일한 동기가 금전욕
에 있다고만 인정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배심원들은 그 답신서에서 마슬로바는 절도의 의
사가 있었다는 것과 귀중품을 절취하는 데 참가하였다는 것을 부정하였음.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피고에게는 살해의 의사가 전혀 없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재판장의
불완전한 결론으로 말미암아 생긴 오해의 의해서, 그점을 답신서에 충분히 표현하지 않은 것이
명백함. 따라서 이와 같은 배심원의 답신은 현사소송법 제 816조 및 제808조의 적용을 요함.
즉, 재판장은 배심원에 대하여 그들이 범한 오류를 설명하고 답신서를 반환하여 피고의 죄의
유무의 관해 새로 심의케 하고, 그 질의에 대한 또 다른 답신을 제출토록 해야 한."하고
파나린은 읽어 내려갔다.
"그럼 어째서 재판장은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요?"
나도 역시 그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파나린은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대심원이 이 잘못을 수정하겠군요?"
"그것은 그 때의 담당자들에게 달렸죠."
"담당자들이라니요?"
"범죄자 노역장에 보낸 담당자지요. 그래서 또 이렇게 써두었습니다. 이 같은 판결은,"하
고 그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마슬로바에게 형벌을 가하는 권리를 법정에 부여하지 않고,
또 그년에게 형법 제 771조 제 3항을 적용하는 것은 우리 형법의 근본 원칙에 대한 명백하
고 중대한 위반임. 상술한 이유로써 형사소송법 제 909조, 제910조, 제912조에 의거하여......
원 판결을 파기하고, 또한 본건을 재심하기 위하여 재판소의 다른 부로 이관할 것을 청원하
는 바임. ......
이것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다 한 셈입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씀드려서 성공할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그러나 모든 걸 대심원 담당자에게 맡길 수밖에 없겠지요. 아는 사람
이 있으시면 힘써 보세요."
"좀 아는 사람이 있긴 합니다만."
"그러시다면 한시라도 빨리 서두르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모두들 치질을 치료하러 떠날겁
니다. 그렇게 되면 석 달은 기다려야 하니까요. 그래도 성공하지 못하면 최후 수단으로 황제
에게 청원할 길이 남아 있습니다만, 그때에 또 도와 드리기로 하지요. 배후 운동이 아니라
청원서 적성에 대해서 말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사례금은......."
"그것은 비서가 정서한 상소장을 내드릴 때 말씀드릴 것입니다."
"한가지 더 물어 보겠습니다. 나는 검사에게 서 마슬로바에 대한 면회 허가증을 받고 그
여자를 면회하러 갔습니다만, 감옥에서 듣기에 보통 면회날이 아니 날에 면회실 이외의 곳
에서 면회를 하려면 지사의 허가가 꼭 필요하다는데, 정말 그렇습니까?"
"네, 그럴 겁니다. 그러나 지금은 지가가 없어서 부지사가 직무를 대리하고 있습니다. 그
러나 그자는 형편없는 인간이라서 그자를 상대로 일이 될까 모르겠군요."
"마슬레니코르 말입니까?"
"네."
"그 사람이라면 저도 알고 있습니다."
네플류도프는 돌아가려고 일어섰다.
이 때 아주 못생긴, 들창코에 뼈만 앙상하여 누런 얼굴에 작달만한 여자가 총총걸음으로
방에 들어섰다. 변호사의 아내였다. 그녀는 자기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 듯이 노
란색과 푸른색의 비로드와 비단으로 몸을 휘감은 괴상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숱
이 적은 머리르 f지져 붙이기까지 하고 있었다.
그녀는 의기양양하게 뛰어들어왔다. 그 뒤를 이어 키가 크고 얼굴이 검은 비단깃의 프록
코트를 입고 흰 넥타이를 맨 남자가 미소를 지으면서 들어왔다. 그는 작가였는데 네플류도
프는 안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아나톨리!"하고 그녀는 문을 열면서 말했다. "내 방으로 가십시다. 지금 세묜 이바노비치
가 자작시를 낭독하시겠다니까요. 당신도 가르신(19세기 후반의 러시아 작가)를 낭독해 주셔
야겠어요."
네플류도프가 나가려고 하던 참에, 변호사의 아내는 남편과 소곤거리더니 곧 그에게 말을
걸었다.
"잘 오셧어요, 공작님. 저는 당신을 잘 알고 있으니까 소개는 필요 없겠군요. 저희들의 문
학회에 와 주시겠어요? 정말 유익하답니다. 아나톨리도 낭독을 썩 잘하고요."
"어떻습니까, 나도 여러 가지 면에서 재주가 많지요?" 변호사는 두 팔을 벌리고 미소를
지으면서 이런 매력적인 여자에게는 아무런 반대도 할 수 없다는 듯이 자기 아내를 가리키
면서 말했다.
네플류도프는 슬프고 엄숙한 표정을 하고 지극히 정중한 태도로 변호사 부인에게 초대해
준 데 대한 감사를 한 다음, 시간을 핑계로 거절한 뒤 응접실을 나왔다.
"어쩌면 저렇게 침울한 얼굴을 학 있을까?" 변호사의 아내는 그가 나가자 이렇게 말했다.
대기실에서 조수가 네플류도프에게 미리 마련된 상소장을 내주었다. 사례금에 대해 묻자, 파
나린이 천 루블로 정했다고 말한 다음, 파나린을 다른 때 같으면 이런 사건을 맡지 않으나
이번엔 특별히 네플류도프를 위해 맡았다고 설명했다.
"이 상소장에는 누가 서명을 합니까?"하고 네플류도프가 물었다.
"피고 자신이 하는 겁니다만 그러기가 어려우시다면 본인의 위임장을 받아 파나린이 대신
해도 무방합니다."
"아니, 그렇다면 내가 피고한테 가서 직접 서명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네플류도프는 지정
된 면회일 전에 카추샤를 만나게 될 기회가 마련된 것을 기뻐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45
감옥에서는 여느 때처럼 감수들의 호각 소리가 목도에 요란하게 울려퍼지자, 복도와 감방
문이 철커덩 열리며, 맨발로 걷는 소리와 신발 뒤축을 끄는 소리가 나고, 이어서 변기통 담
당 죄수들이 역겨운 냄새를 피우면서 복도를 지나갔다. 남자 죄수와 여죄수들은 세수를 하
고, 옷을 갈아입고, 점호를 받으려고 복도로 나왔다. 점호가 끝나자 더운 차를 가지러 갔다.
이 날은 두 사람의 죄수가 태형을 받게 되어 있었으므로 차 마시는 동안 어느 감방에서나
그 호제로 야단들이었다. 그 중 한 사람은 바실리예프라는 이름의 어느 정도 공부도 한 젊
은 점원이었는데 질투 끝에 자기의 정부를 죽인 사내였다. 그는 쾌활하고 도량이 넓은 사내
로서 간수들에게 조금도지지 않았기 때문에 감옥 친구들은 그를 좋아했다. 그는 감옥의 규
칙을 잘 알고 있어서 부당한 처우를 항의하고 했기 때문에, 간수들은 그를 미워했다.
한 2주일 전에 간수 한 사람이 변기통 죄수가 그의 새 옷에다 더러운 똥물을 묻혔다고 하여
그를 때린 일이 있었다. 이 때 바실리예프는 죄수를 때리라는 규칙은 없다고 따지면서 변기통
담당 죄수를 두둔했다.
"내가 그 규칙을 가르쳐 주마."하고 간수가 바실리예프에게 욕지거리를 해댔다. 바실리예
프도지지 않고 이를 받아 응수했다. 간수가 그를 때리려고 했으나 그는 간수의 손을 재빨리
붙잡아 한참 동안 꼭 쥐고 있다가 홱 돌려 문 밖으로 떼밀었다. 간수는 이 일을 고소했다.
소장은 바실리예프를 징치감에 가두라고 명령했다.
징치감이란 밖에서 빗장으로 걸어닫게 되어 있는 여러 개의 캄캄만 독방들을 말한다. 어
둡고 싸늘한 징치감에는 침대도 의자도 탁자도 없었기 때문에 여기에 갇히게 되는 사람은
더러운 마룻바닥에 앉거나 드러누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징치감에 들끓고 있는 수많은
쥐들이 몸을 넘어다니기도 하고 몸 위로 기어오르기도 했다.
그리고 쥐들이 얼마나 대담한지 빵도 제대로 둘 수가 없었다. 쥐들은 죄수들의 팔 밑에 놓아둔
빵을 갉아먹는 정도가 아니라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을라치면 사람에게 덤벼들기까지 하였다.
바실리예프는 자기에게 아무 죄도 없으므로 징치감에 갈 이유가 없다고 버텼으나, 강제로 끌려갔다.
그가 저항을 하자 두 사람의 죄수가 그에 합세하여 간수가 그를 데려가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자
간수들이 모여들었는데, 그 중에는 엄청나게 힘이 센 페트로프라는 간수도 있었다. 죄수들은
잔뜩 얻어맞고 징치감에 감금되고 말았다. 그러고는 폭동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곧 지사에게
보고되었다. 그래서 지사로부터 폭동의 두 주모자, 바실리예프와 불량배인 네폼냐시치에게
30대의 태형에 처하라는 지사가 내려져 여죄수 면회실에서 집행하게 되었다.
이런 소식이 어젯밤부터 감방 안의 모든 죄수들에게 펴졌기 때문에 모든 감방에서는 앞으
로 있을 태형에 대한 얘기로 한창 떠들썩했다.
코라블료바, 멋쟁이, 페도샤, 마슬로바 등 넷은 구석에 자리잡고, 최근 마슬로바에게서 항
상 떨어진 적이 없는, 또 동료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 주고 잇는 보드카를 마시고 모두들
얼굴들이 빨개져 흥분했다. 그들은 차를 마시면서 태형을 성토하고 있었다.
"도대체 그가 무슨 짓을 했다고 저 야단들이야?" 코라블료바는 그녀의 튼튼한 이로 조그
만 각설타을 갉아먹으면서 바실리예프의 말을 하고 있었다. "그는 친구들 두둔했을 뿐이야.
사실 요즘 죄수라고 해서 무턱대고 때릴 수 없게 되어 있거든."
"젊고 좋은 사라이라던데." 찻주전자가 놓여 있는 나무 침대 맞은 편 장작위에 앉아 있던,
디다랗게 머리를 땋아내린 맨머리의 페도샤가 이렇게 덧붙였다.
"이런 일은 그분한테 말해 보면 좋을 텐데, 미하일로브나." 건널목지기는 '그분'이라는
말로 네플류도프를 가리키며 마슬로바에게 말했다.
"말해 보겠어요. 그분은 날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다 해주실 테니까요." 마슬로바는 생
글거리면서 머리를 흔들며 이렇게 말했다.
"그렇지만 언제 와 주실지. 저놈들이 곧 끌러갈 텐데."하고 페도샤가 말했다. "아, 끔찍스
러워." 한숨을 내쉬며 그녀는 덧붙였다.
"난 시골에서 어느 농부가 매 맞는걸 본 적이 있어. 시아버님 심부름으로 촌장 집엘 갔었
을 때였는데 가보니......."하고 건널목지기는 긴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건널목지기의
이야기는 2층 복도에서 들리는 말소리와 발소리에 의해 중단되었다.
여죄수들은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끌어내고 있어. 망할놈들 같으니라고." 멋쟁이가 말했다. "틀림없이 무지막지하게 두들겨
팰 거야. 간수놈들, 그가 자기네 말을 고분고분 듣지 않는다고 몹시 미워했거든."
2층이 조용해지자 건널목지기는 하던 말을 계속했다. 그녀는 촌장 집 헛간에서 농부가 얻
어맞는 것을 봤을 때는 뱃속이 온통 뒤집히는 것같이 놀랐다고 말했다. 이번에도 멋쟁이가
시체그로프라는 사람이 채찍으로 무자비하게 얻어맞으면서 전혀 소리를 지르지 않더라고 말
을 했다. 그러자 페도샤는 차를 치우고 코라블료바와 건널목지기는 바느질감을 집어들었다.
마슬로바는 무릎을 끌어안고 침대 위에 웅크리고 앉은 채 몹시 지루해 하고 있었다. 그녀는
잠이나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때 여간수가 와서 사무실에 면회자가 있다고 불렀다.
"우리들 얘기를 곡 해주어요." 수은이 반이나 벗겨진 거울 앞에서 마슬로바가 목도리를
매만지고 있을 때 메니쇼프 할머니가 말했다. "불을 지른 건 우리가 아니라 그 악당이야. 일
꾼이 보았어. 일꾼은 자기의 영혼을 죽이는 일은 절대 할 리 없으니까. 그분에게 미트리를
불러서 불러 보시라고 그래줘요. 그러면 미트리느 모든 것을 샅샅이 말해 줄 거야. 그렇지
않으면 이건 너무해. 우린 정말 아무 죄도 없이 감옥에 쳐박혀 있고, 그놈은 남의 여편네와
붙어 술집에서 재미 보고 있으니."
"세상에 그런일이!"하고 코라블료바가 맞장구를 쳤다.
"말하겠어요. 꼭 말할께요." 마슬로바가 대답했다. "기운을 내기 위해서 한잔 해야지." 그
녀는 한눈을 깜박거리며 이렇게 덧붙였다.
코라블료바가 컵에 반쯤 따라 주었다. 마슬로바는 쭉 들이켜고 나서 입술을 햝고는, 아주
기분이 좋아져서 방금 말한 '기운을 내기 위해서'를 되뇌며 웃는 얼굴로 머릴를 쳐들면서
여간수를 따라 복도로 나갔다.
46
네플류도프는 벌써 오랫동안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감옥에 도착하자마자 입구에 있는 벨을 눌러 당직 간수에게 검사의 허가증을 내보였
다.
"누구를 면회하러 오셨습니까?"
"여죄수를 마슬로바를 만나고 싶습니다."
"지금은 안 됩니다. 소장인이 바쁘시니까요."
"사무실에 계십니까?" 네플류도프는 물었다.
"아니, 여기 면회실에 계십니다."하고 간수는 대답했으나, 네플류도프는 간수의 얼굴에서
당황해 하는 빛을 보았다.
"왜요, 오늘은 면회일이 아니잖습니까?"
"특별한 용무가 있어서요."
"어제 뵐 수 있습니까?"
이제 곧 나오실 겁니다. 그 때 말씀해 보십시오. 조금 기다려 보세요."
이 때 옆문에서 얼굴에 번들번들 윤기가 흐르고 담배 연기가 밴 수염과 금줄이 번쩍이는
군복을 입은 상사가 나오더니 엄숙한 태도로 간수에게 말했다.
"왜 이런 데로 사람을 들이는 거야? 사무실로 모시도록 해!"
"소장이 여기에 계시다고 하기에......." 네플류도프는 이 상사에게도 어딘지 불안한 표정을
보았으므로 수상쩍게 여기며 말했다.
이 때 안쪽에 있는 문이 열리더니 땀투성이가 된 간수 페트로푸가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나왔다.
"이젠 좀 정신을 차렸을 겁니다."하고 그는 상사에게 말했다.
상사가 눈짓으로 네플류도프를 가리키자 페트로프는 입을 다물고 굳어진 얼굴이 되어 뒷
문으로 나갔다.
'누가 정신을 차린다는 것일까? 왜 이렇게 모두들 어색해 하는 것일까? 무엇 때문에 상사
는 그에게 눈짓을 하는 것일까?' 하고 네플류도프는 생각했다.
"여기서 기다릴 수가 없으니, 사무실로 가시죠." 하고 상사는 네플류도프에게 말했다. 네
플류도프가 나가려는 참에 뒷문에서 부하들보다 더 당황한 소장이 나타났다. 그는 연방 가
쁜 숨을내쉬고 있었다. 네플류도프가 와 있는 것을 보자 간수를 향해서 말했다.
"이봐, 페트로프! 5호 여자 감방의 마슬로바를 사무실로 데리고 와1"
"그럼, 가십시다." 그는 네플류도프에게 말했다. 그들은 경사가 급한 층계를 올라가 창문
하나와 테이블 한 개, 그리고 여러 개의 의자가 놓여 있는 조그마한 방으로 들어갔다. 소장
은 자리에 앉았다.
"정말 괴롭고 힘든 직무랍니다." 네플류도프를 바라보며 궐련을 꺼내면서 그는 말했다.
"퍽 피곤하신 것 같습니다."하고 네플류도프는 말했다.
"이 직무는 피로하지요. 정말 괴로운 직업입니다. 짐을 덜겠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도리어
더 무거워질 뿐입니다. 그래서 이곳을 그만둘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정말 괴로운 일입니
다."
네플류도프는 소장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괴로워하는지 알 수 없었으나, 오늘의 소장은
어딘지 유별나게 측은하고 슬프고 절망적인 기분에 잠겨 있는 것같이 보였다.
"그렇겠죠. 괴로운 일이겠지요."하고 그는 말했다. "하지만 왜 이런 일을 맡고 계십니까?"
"재산은 없고 거기다가 딸린 가족이 있으니......."
"하지만 그게 괴로우시다면......."
"이런 말씀을 드리기가 좀 우습지만 그래도 나는 여러분을 위해서 힘껏 일을 하고 있습니
다. 그리고 되도록이면 친절하려고 애쓰지요 가령 딴사람이 내 자리에 앉게 된다면 그렇게
는 못할 겁니다. 뭐, 말로 하기야 쉽지만, 2000명이나 넘는 사람을, 그것도 어디 보통 인간입
니까? 우선 다루는 방법부터 알아야 합니다. 역시 그들도 인간이니까 동정이 안 갈 수는 없
지만 그렇다고 너무 고삐를 늦출 수도 없어요."
소장은 최근 죄수들끼리 싸움이 벌어져 결국 살인 소동으로 번진 사건을 이야기하기 시작
했다.
이 이야기는 간수들 따라 들어온 마슬로바 때문에 중단되었다.
네플류도프는 그녀가 소장이 있는 줄도 모르고 문간으로 들어서는 모습을 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새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녀는 연방 미소를 머금고 머리를 흔들면서 생기 있게
간수의 뒤를 따라 들어왔다. 그러다 그녀는 소장의 모습을 보자, 깜짝 놀란 얼굴로 찬찬히
훑어보다가 곧 태연하고 쾌활하고 씩씩한 태도로 네플류도프에게 말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그녀는 느릿느릿하게 말하고는 생긋이 웃었다. 그리고는 전번고ㅘ는 달리
힘차게 그의 손을 꼭 쥐었다.
"실은 상소장에 서명을 받으러 왔소." 네플류도프는 이렇게 말했으나, 오늘 따라 그를 반
갑게 맞아 주는 데 적이 놀랐다. "변호사가 상소장을 작성해 주어서 서명을 해야겠소. 곡 페
테르부르크로 보낼 거요."
"좋아요. 서명이야 어렵지 않은 일이에요. 무엇이든지 하겠어요." 그녀는 한쪽 눈을 찡긋
하고 생긋 웃으며 말했다.
네플류도프는 호주머니에서 접은 종이를 꺼내 들고 테이블로 다가갔다.
"여기서 그녀가 서명해도 좋습니까?" 네플류도프는 교도관을 돌아보며 물었다. "자, 펜도
있으니, 글을 쓸 줄 아나?"
"이리 와서 앉아요." 교도관이 말했다.
"옛날엔 쓸 줄 알았어요." 그녀는 말하고 생글생글 웃으며 스커트와 윗옷의 소매를 만지
작거리며 테이블 앞에 앉아 조그마한 손에 힘을 주어 어설프게 펜을 잡더니 픽 웃고 네플류
도프를 쳐다보았다.
그는 서명하는 곳을 가르쳐 주었다.
조심스럽게 펜을 잉크에 적셔 잉크를 한 번 턴 다음 그녀는 자기 이름을 썼다.
"더 필요한 건 없나요?" 그녀는 네플류도프와 소장을 번갈아 바라보고 펜을 잉크병 속에
꽂았다가 서너 장 있는 종이 위에 놓기도 하며 물었다.
"당신에게 할 말이 좀 있는데." 그녀의 손에서 펜을 받아들고 네플류도프가 말했다.
"무슨 말인지 말씀하세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는 별안간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아니
면 졸음이라도 온 건지 정색을 했다.
그러자 소장은 일어서서 나갔다. 네플류도프는 그녀와 마주 앉았다.
47
마슬로바를 데리고 온 간수는 테이블에서 물러나와 창턱에 앉았다. 네플류도프에게는 드
디어 결정적인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처음 면회 왔을 때 그녀에게 중요한 일, 즉 그녀와 결
혼할 생각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은 것에 대햇 항상 자기를 책망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말하리라고 굳게 마음먹었다. 그녀는 테이블 한쪽에 앉고, 네플류도프
는 그 반대쪽에 앉아 있었다. 방 안이 밝았기 때문에 네플류도프는 처음으로 가까운 거리에
서 그녀의 얼굴과 눈, 입술 언저리의 잔주름, 그리고 부석부석한 눈을 똑똑히 바라볼 수가
있었다. 전보다 더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창가에 앉은 희끗희끗한 구레나룻을 기른 유대인인 듯한 간수들에게는 들리지 않고 그녀
에게만 들리도록 테이블 너머로 상체를 굽히고 그는 입을 열었다.
"만일 이 상소가 성공하지 못하면 황제에게 청원해 봅시다.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보겠
소."
"이러기 전에 처음부터 버젓한 변호사를 대기만 했더라면......."하고 그녀는 그의 말을 가
로막았다. "요전번 변호사는 정말 바보였어요. 나한테는 듣기 좋은 말만 했거든요." 그녀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만일 그 때 제가 당신과 아는 사이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결코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거예요. 글쎄, 이런 법이 어디 있어요. 모두들 나를 도둑년으로만 알고 있잖
아요."
'오늘은 좀 이상하군.'학 네플류도프는 생각했다. 그가 자기 이야기를 하려고 하자 다시
그녀가 말을 꺼냈다.
"저 좀 할 말이 있어요. 우리들 방에 할머니 한 분이 계시는데 다들 놀라고 있어요. 정말
좋은 할머니인데 역시 아무 죄도 없이 아들하고 둘이 갇혀 있거든요. 불을 질렀다나 봐요.
그 할머니는 내가 당신과 잘 아는 사이라는 걸 알고," 마슬로바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
면서 말했다. "나더러 당신에게 이야기를 해서 아들을 불러 내어 물어 봐 달라는 거 예요.
매니쇼프라고 한 대요. 어떡하시겠어요? 들어 주시겠어요? 정말 좋은 할머니예요. 한 번만
보시면 억울하다는 걸 아실 거례요. 수고 좀 해주세요." 그녀는 그를 바라보고는 눈을 내리
깔고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좋아, 해보자." 네플류도프는 이렇게 말했으나, 그녀의 누그러진 태도에 점점 놀라지 않
을 수 없었다. "그런데 나는 내 일로 당신하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있소. 전번에 내가 얘
기한 것을 기억하고 있소?"하고 그는 말했다.
"여러 말씀을 하셨는데, 그게 무슨 말씀이었더라?" 여전히 생글거리면서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어 대며 그녀가 말했다.
"내가 당신한테 용서를 받으러 왔다고 그랬지." 하고 그는 말했다.
"내가 자신의 죄를 속죄하겠다는 것은,"하고 네플류도프는 말을 이었다. "말로써가 아니
라, 실제 행동으로써 속죄하겠다는 거요. 당신과 결혼하려고 결심했단 말이오."
그녀는 얼굴에서 별안간 놀라는 기색이 보였다. 그 사팔눈은 까닥도 하지 않고, 보는지 안
보는지 알 수 없는 시선을 던졌다.
"지금 와서 그럴 필요가 어디 있어요?"그녀는 화가 난 듯이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나는 하느님 앞에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느꼈소."
"어떤 하느님 말씀이세요? 당치도 않은 말씀만 하시네요. 하느님이라고요? 어떤 하느님이
죠? 벌써 그전에 하느님을 찾으셨어야 했어요."하고 그녀는 입을 벌린 채 말을 끊었다.
네플류도프는 그제야 비로소 그녀의 입엣 풍기는 강한 술냄새를 맡고 그녀가 흥분한 이유
를 알았다.
"진정해요." 그는 말했다.
"왜 진정하라는 거예요? 취한 줄 아세요? 그래요, 난 취했어요. 그렇지만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쯤은 잘 알고 있어요." 그녀는 느닷없이 빨리 말하곤 홍당무처럼 얼굴
이 빨개졌다. "난 징역수고 매춘부예요. 그러나 당신은 귀하신 공작님이시잖아요? 나 같은
것에 몸을 더럽맇 필요는 없으세요. 공작 아가씨한테나 가세요. 나의 몸값은 10루블짜리 지
폐 한 장이면 그만이에요."
"당신이 아무리 지독한 말을 해도 내 마음은 조금도 모를 거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네플류도프는 조용히 말했다. "내가 당신에 대해서 얼마나 가책을 느끼고 있는지 상상도 못
할 거요."
"가책을 느낀다고요!"하고 그녀는 심술굿게 흉내를 냈다. "그 때는 가책을 느끼지 않아서
백 루블짜리 한 장을 틀어넣어 주셨군요. 아, 그렇죠, 그것이 내 몸값이었죠."
"알고 있소, 잘 알고 있소, 그러니 지금에 와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하오?"하고 네플류도프
는말했다. "이제 다시는 당신을 버리지 않으려는 거요." 그는 되풀이했다. "한 말은 꼭 실행
하겠소."
"실행을 해요?"그녀는 이렇게 뇌까리며 깔깔거리고 웃었다.
"카추샤!" 그는 그녀의 손을 쥐면서 말했다.
"돌아가세요! 나는 징역수고 당신은 공작님이세요. 이런 곳에 볼일이 없으실 거예요." 화
가 나서 얼굴빛이 변한 그녀가 그의 손을 뿌리치면서 이렇게 외쳤다. "당신은 나를 미끼로
해서 자신을 구원받으려 하는 거죠." 그녀는 가슴속에 숨겨 왔던 모든 말을 단번에 쏟아놓
으려는 듯이 말을 계속했다. "당신은 이 세상에서 나를 노리갯감으로 만들어 놀고, 저 세상
에서까지 또 나를 미끼로 자신을 구하려는 거죠! 보기도 싫어요. 그 안경도, 기름진 더러운
상판도, 다 보기 싫어요. 어서 가요, 가!" 그녀는 발딱 일어서서 이렇게 외쳤다.
간수가 두 사람 곁으로 다가왔다.
"왜 이렇게 떠드는 거야? 자기 분수를 지켜야지."
"내버려 두십시오." 네플류도프가 말했다.
"혼 좀 나야 알겠어?" 간수가 말했다.
"아니 괜찮습니다. 내버려 두십시오."하고 네플류도프는 말했다.
간수는 다시 창가로 물러섰다.
카추샤는 다시 자리에 앉아 눈을 내리깐 채 조그마한 두 손의 손가락을 꼭 끼어 쥐었다.
네플류도프는 어찌할 바를 몰라 그녀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당신은 나를 믿지 않는군."하고 그는 말했다.
"저와 결혼하시겠다는 말을요? 그런 말씀은 하지도 마세요. 오히려 목을 매어 죽는 편이
낮겠어요. 이것이 저의 대답이에요.!"
"어쨌든 나는 당신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다 하겠소."
"마음대로 하세요. 하지만 분명히 말하는데 이제 나로서는 당신에게 부탁할 것이 아무것
도 없어요." 그녀는 덧붙이고는 구슬프게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네플류도프는 더 이상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녀의 눈물이 그의 마음속으로 스며드는 듯
했다.
그녀는 눈을 들어 놀란 듯이 그를 바라보고는 눈물에 젖은 두 눈을 목도리의 한끝으로 닦
아냈다.
간수가 다시금 다가와서 시간이 다 되었다고 일러주었다. 카추샤는 일어섰다.
"당신은 지금 흥분해 있소. 가능하면 내일 또 올 테니 잘 생각해 봐요."하고 네플류도프는
말했다.
그녀는 아무 대답도 없이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간수의 뒤를 따라나갔다.
"애야, 넌 이제 팔자가 피었어." 감방으로 돌아오자 코라블료바가 마슬로바에게 이렇게 말
했다. "아무래도 너한테 홀딱 반한 보양이야. 그이가 온 동안만은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해.
그이는 반드시 구해 줄거야. 돈 많은 사람이야 무슨 일인들 못하겠어?"
"그야, 그렇지." 건널목지기도 노래라도 부르는 듯한 목소리로 맞장구를 쳤다. "가난뱅이
가 결혼하자면 힘들지만, 부자는 마음만 먹으면 즉석에서도 할 수가 있거든. 우리 마을에도
그런 사람이 있어서......."
"그런데 내 이야기는 해보았어?"하고 할머니가 물었다.
그러나 마슬로바는 그들에겐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침대에 드러누운 채 사팔눈으로 한구
석만은 쏘아보면서 저녁때까지 그대로 있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괴로운 투쟁이 벌어지
고 있었다. 네플류도프의 말은 그녀를 옛날로 돌아가게 했다. 너무나 괴로운 나머지 이해도
못한 채 증오에 사로잡혀 떠나 버린 그 세계로 말이다. 그녀는 이제껏 살아온 세계를 벗어
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지난날의 생생한 기억을 가슴에 안은 채 살아가기란 너무나 괴로운
일이었다. 밤이 되자 그녀는 다시 술을 사서 동료들과 함께 마셨다.
48
'그렇다, 이렇게 되는 것이 당연하지, 당연해.' 감옥을 나오면서 네플류도프는 이렇게 생각
했다. 이제야 비로소 자기 죄를 충분히 깨달을 수 있었다. 만일 그가 자기 죄를 속죄할 생각
을 먹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모든 죄를 깨닫지 못하였으리라. 더구나 그녀도 자기가 받은 모
든 악행을 느끼지 못하고 말았을 것이다. 이제 그 모든 것이 무섭고도 분명하게 표면에 드
러났다. 그는 이제야 이 여자의 영혼에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를 깨닫게 되었으며, 그녀
역시 자기가 당한 일을 스스로 알아차릴 수 있게 되었다.
여태까지 네플류도프는 자기 자신과 자기의 회오의 감정을 음미하고 있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저 두렵기만 했다. 그녀는 버린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했다. 그는 이것을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었다. 그러나 앞으로 그녀와 어떻게 관계를 이어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상상할 수가 없었다.
감옥문을 나서려고 할 때, 가슴에 십자 훈장과 여러 개의 메달을 단 간수가 네플류도프에
게로 걸어와서 아첨하는 듯한 불쾌한 표정을 짓고 몰래 편지를 내주었다.
"어느 부인이 나리께 이 편지를 전해 달라시는데요."
네플류도프에게 봉투를 건네면서 간수가 말했다.
"어떤 부인인데요?"
"읽어 보시면 아실 겁니다. 국사범으로 수감된 분입니다. 저는 그 감방 담당자이죠. 그래
서 부탁 받은 겁니다. 이런 일은 금지되어 있습니다만, 인정상 할 수 없이......." 간수는 어색
하게 말했다.
네플류도프는 정치범 담당 간수라는 자가 감옥 안에서 이토록 공공연히 편지 연락을 하는
데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때까지는 아직 그가 간수인 동시에 첩자라는 사실을 몰
랐다. 그는 감옥을 나오면서 그 편지를 읽었다.
편지에는 경음부(경음부는 고대 러시아에서는 자음으로 끝나는 단어 뒤에 붙여 썼는데 혁
명 후 폐지되었음. 경음부를 생략하고 썼다는 것은 혁명 사상을 가진 자가 썼다는 것을 암
시함.)를 생략하고 활달한 필적으로 다음과 같이 연필로 쓰여 있었다.
당신이 어느 형사범에 관심을 가지고 감옥에 오신다는 것을 알고 꼭 한번 뵙고 싶었습니
다. 만나주세요. 면회는 허락될 것으로 압니다. 당신이 돌봐 주고 계시는 분이나 우리들 정
치범을 위한 중요한 자료를 많이 제공하겠습니다.
항상 감사드리고 있는 베라 보고두호프스카야
베라 보고두후프스카야는 네플류도프가 곰 사냥을 하려고 친구들과 함께 들렀던 노브고르
드 현 벽촌의 여교사였다. 이 여고사는 공부를 하러 가겠다고 네플류도프에게 학자금을 청
한 일이 있었다. 네플류도프는 돈을 주었는데 이미 그것은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부인이 정치범으로 수감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모든 소문을 듣고 이렇듯
자진해서 도와 주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 당시는 모든 것이 간단하고 단순했지만 지금은 만
사가 어렵고 복잡하기만 했다.
네플류도프는 즐거운 마음으로 그 때의 일과 보고두호프스카야와 알게 되었던 경위를 생각해 냈다.
그것은 사육제를 앞둔 어느 날 철도길에서 10킬로미터나 떨어진 벽지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곰을 두 마리씩이나 잡는 좋은 성과를 거두고 사냥이 끝난 후 돌아갈 채비를 하면서 점심을
먹고 있을 때 그들이 머물고 있던 농가의 주인이 와서 부제의 따님이 네플류도프 공작을
만나고 싶어한다는 뜻을 전해 왔다.
"미인인가?"하고 누군가가 물었다.
"농담은 그만두게!" 네플류도프는 이렇게 말하고 정색을 하고는 식탁에서 일어나 입을 닦
고 부제의 딸이 무슨 일로 자기를 만나려고 하는지 이상하게 여기며서 안채로 건너갔다.
방에는 펠트 모자에 털외투를 입은 튼튼한 몸집에 해쓱하고 못생긴 얼굴을 한 천가 앉아
있었다. 다만 눈썹 밑에서 반짝이는 두 눈만은 아름다웠다.
"자, 베라 예프레모브나, 이분에게 얘기해 봐요."하고 늙은 주인 여자가 말했다. "이분이
공작님이셔. 나는 나가 보겠어."
"무슨 일이시죠?"하고 네플류도프는 말했다.
"저......저...... 공작님은 돈이 많으시니까 그런 쓸데도 없는 사냥에 돈을 허비하지만, 저
는......"하고 처녀는 몹시 수줍어하면서 말문을 열었다. "다만 한 가지 소원은 보람 있는 일
을 하고 싶어서입니다만, 아는 것이 없어서 아무 일도 할 수 없어요."
눈이 성실하고 선량해 보이고, 게다가 결의가 굳어 보이면서도 수줍어하는 표정이 몹시
감동적이어서 네플류도프는 전에도 흔히 있었던 일이지만 그녀의 처지를 자기와 바꾸어 생
각하고 동경했다.
"그래서 어떻게 해달라는 말씀이시죠?"
"저는 여교사예요. 대학교에 가고 싶었습니다만, 마음대로 암 되는군요. 그렇다고 집에서
보내 주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만, 돈이 없기 때문이에요. 혹시 돈을 빌려 주실 수는 없으실
까요? 학교를 마치고 나면 반드시 돈을 갚아 드리겠어요. 돈 맣은 사람들이 곰을 잡고 농민
들에게 술을 먹이는 것은 별로 좋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왜 그런 분들은 좋은 일을 하
지 않으실까요. 제게는 단돈 80루블만 있으면 족해요. 그러나 싫으시다면 아무래도 괜찮아
요."하고 그녀는 화난 듯 말했다.
"아닙니다. 이런 기회를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곧 갖다드리죠."하고 네플류도프는 말했다.
그는 현관으로 나왔다. 그 때 그는 거기서 둘의 이야기를 엿듣고 섰던 친구 하나와 마주
쳤다. 그는 친구들이 놀리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갑에서 돈을 꺼내 그녀에게 갖다 주
었다.
"자, 어서 받으시오. 감사는 필요 없습니다. 도리어 내가 감사를 해야 할테니까요."
네플류도프는 이러한 것들을 회상하는 것이 무척이나 유쾌했다. 이 때문에 짓궂은 농담을
하던 장교와 하마터면 싸울 뻔한 일과 또 다른 장교 하나가 자기편을 들어주던 일과, 그 때
사냥의 성과가 퍽 좋아서 즐거웠던 일, 밤에 정거장까지 되돌아왔을 때의 상쾌했던 일들을
생각하는 것은 말할 수 없이 기분 좋은 일이었다.
두 필의 말이 끄는 썰매의 행렬은 마치 기러기떼 처럼 어떤 때는 높고 어떤 때는 낮은 숲속의
좁은 길을 소리 없이 질주했다. 숲속에는 눈 방석에 뒤덮인 전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어둠 속에서 빨간 불빛을 내며 향기 높은 궐련을 피웠다. 몰이꾼인 오시프는 무릎까지 눈에
파묻히면서 이 썰매 저 썰매로 분주하게 뛰어다니며 시중을 들어주었고 깊은 눈 속의 굴속에
틀어박혀 숨구멍으로 훈훈한 입김을 내뿜고 있는 곰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네플류도프는 이 모든 일, 특히 건강과 정력과 평온을 의식하던 저 행복한 감정을 회상하
고 있었다. 폐는 양가죽 외투가 꽉 죄도록 싸늘한 공기를 가슴 깊숙이 들이마시고, 언제나
화살대가 머리 위 나뭇가지를 건드려 신선한 눈이 얼굴에 떨어졌다. 몸은 따듯하고 얼굴은
상쾌하고 마음에는 어떠한 걱정도 가책도 공포도 욕망도 없었다. 참으로 좋았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아, 어째서 모든 것이 이렇게 괴롭고도 어려운 것일까?
분명히 베라 보고두호프스카야는 혁명가로서 지금 혁명운동 때문에 수감되어 있음에 틀림
없을 것이다. 꼭 만나야겠다. 더구나 카추샤와의 문제에 도움을 주겠노라고 약속하지 않았는
가.
49
이튿날 아침 네플류도프는 눈을 뜨자 어제 었던 일을 하나하나 회상해 내고는 몸서리를
쳤다.
그러나 이러한 두려움에도 불고하고 그는 전보다 더 굳은 마음으로 일단 시작한 일을 끝
까지 계속하리라 결심했다.
이러한 자신의 의무감을 의식하면서 그는 집을 나와 마슬레니코프한테로 마차를 몰았다.
그것은 마슬로바의 일 외에도 그녀에게서 청을 받은 메니쇼프 노파 모자에 대한 면허 허가
를 얻기 위해서였다. 그 밖에도 마슬로바에게 무슨 도움이 될지도 모를 보고두호프스카야의
면회에 대해서도 부탁해 볼 참이었다.
네플류도프는 마슬레니코프와 옛날 연대 시절부터 아는 사이였다. 그 당시 마슬레니코프
는 연대의 경리 장교였다. 그는 다시 없는 호인으로서, 연대와 황실 이외에는 아무것도 몰랐
고, 또 알려고도 하지 않는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이제 네플류도프는 연대에서 현청으로 자
리를 바꾼 행정관인 그를 생각해 내고 만나러 간 것이다. 그는 유복하고 활달한 여자와 결
혼했는데 아내의 강요로 군무로부터 문관으로 전직했던 것이다.
그녀는 남편을 깔볼 뿐만 아니라 마치 애완 동물처럼 귀여워해 주는 여자였다. 네플류도
프는 지난 겨울에 한 번 그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들 부부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 후론 다시 찾아가지 않았었다.
마슬레니코프는 네플류도프를 보자 무척 반가워했다. 기름기 도는 붉은 얼굴하며, 뚱뚱하
게 살찐 몸매며, 군대 시절과 다름없는 말쑥한 복장이며, 하나도 변한 것이 없었다. 옛날부
터 그는 언제나 어깨와 가슴이 꼭 끼는 최신식 날씬한 군복이나 평복을 입고 있었는데 지금
도 역시 널찍한 가슴과 뚱뚱한 몸에 꼭 끼는 최신 유행의 문관복을 입고 있었다. 그는 양식
복장을 하고 있었다. 연령의 차이는 많았으나(마슬레니코프는 40세에 가까웠다.) 그들은 서
로 말을 놓고 지내는 사이였다.
"참 잘 왔네. 집사람한테 가세. 회의에 나갈 때까지 꼭 10분 남았어. 지사가 부재중이라서
내가 대신 현쳥 일을 맡아 보고 있지." 그는 기쁨을 참을 수 없는 듯이 말했다.
"오늘은 자네에게 용건이 좀 있어서 온 걸세."
"무슨 용건인데?" 갑자기 경계하듯 다소 놀라는 어조로 마슬레니코프가 물었다.
"실은 내가 대단한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 감옥에 갇혀 있는데(감옥이라는 말을 듣더니
마슬레니코프의 얼굴은 한층 더 굳어졌다.), 그 사람을 일반 면회실이 아닌 사무실에서 만나
고 싶네. 그것도 정해진 날이 아니라도 언제든 만나고 싶은데, 그것이 모두 자네 손에 달려
있다고 해서."
"물론이지. 자네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도와 주겠네." 마슬레니코프는 자기의 위엄을
덜기라도 하려는 듯이 네플류도프의 무릎위에 두 손을 올려 놓으면서 말했다. "그야 가능한
일이지만,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임시 주인일세."
"그래도 그 여자와 만날 수 있는 허가증을 내줄 순 있겠지?"
"여자인가?"
"응."
"무엇 때문에 들어갔지?"
"독살 사건이야. 그러나 억울하게 들어간 걸세."
"그것 보라고, 그것이 정당한 재판이라는 거야. 그 친구들은 그 따위 짓밖에 할 줄 모른다
네." 그는 무엇 때문인지 갑자기 프랑스어로 말했다. "자네는 찬성 안하는 줄 아네만 할 수
없지. 이건 나의 굳은 신념이니까." 그는 1년 동안 보수주의 신문에서 주워 읽은 의견을 늘
어놓으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자네가 자유주의자라는 것도 알고 있어."
"자유주의자인지 아닌지는 나도 모를 일이지만,"하고 네플류도프는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
다. 그는 사람을 재판하는 데 있어서는 우선 피고의 말을 들어 보아야 한다는 것, 재판하기
전까지는 누구나 평등하다는 것, 또 모든 사람, 특히 아직 판결이 나지 않은 사람을 고문해
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했을 뿐인데도, 자기를 어느 당파에 쓸어 넣어서 자유주의자라고 간
주하는 데는 항상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유주의자인지 아닌지는 나도 모를일이지
만, 다만 한 가지 오늘날의 재판이 아무리 나쁘다 해도 옛날의 재판보다는 그래도 역시 낫
다는 것만은 나도 잘 알고 있지."
"그래 변호사는 누구를 골랐나?"
"파나린에게 부탁했네."
"뭐 파나린이라고!" 작년에 마슬레니코프가 증인으로서 법정에 나갔을 때, 파나린이 자기
를 범인 다루듯 심문했을 뿐만 아니라, 반 시간 이상이나 능글능글한 태도로 자기를 조롱하
던 일을 생각하고 얼굴을 찡그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런 놈과는 관계하지 않는 게 좋겠
네. 파나린이란 작자는 평이 좋지 못한 인간이야."
"또 한가지 청이 있는데." 네플류도프는 그의 말에는 대꾸도 않고 이렇게 말했다. "전부터
알고 있는 여교사 한 사람이 있는데 참 불행한 여자야. 지금 그 여자도 역시 감옥에 있네만,
그녀를 만날 수 있는 허가증도 내줄 수 있겠지?"
마슬레니코프는 한쪽으로 약간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겼다.
"정치범인가?"
"응, 그런가봐."
"실은 정치범의 면회는 친적에게만 허용되네만 자네에게만 통용될 수 있는 허가증을 내주
지. 자네는 남용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야. 그런데 그 여자의 이름이 뭐지? 자네가 돌봐 주는
여자 말이야. 보고두호프스카야라고? 미인인가?"
"못생겼어."
마슬레니코프는 못마땅한 듯이 머리를 흔들면서 테이블로 가자 표제만 인쇄되어 있는 종
이 위에다 시원스럽게 다음과 같이 썼다.
'본 증명서 지참자인 드미트리 이바노비치 네플류도프에게 수감중인 평민 마슬로바 및 여
교사 보고두호프스카야와의 감옥 사무실에서의 면회를 허가함.'이라고 쓰고 나서 굵은 필
치로 서명을 했다.
"자, 이제 자네도 거기 질서가 어떤지 알게 될 걸세. 만원인데다가 특히 이송 유형수들이
많아서 질서를 유지하기가 무척 힘들어. 그러나 나는 엄중하게 감독하고 있고, 또 이 일이
내 마음에 들어. 가 보면 알 테지만, 그들은 대단히 우대받고 있고 또 만족하고 있어. 하지
만 그들을 다룰 줄 알아야 하네. 최근에 불유쾌한 일, 즉 사건이 있었다네. 딴사람이면 폭동
으로 인정하고 많은 희생자를 냈을 거야.
그러나 우리들은 잘 수습했지. 한쪽으로는 고삐를 늦추고 다른 한쪽으로는 단단히 나꿔채야 하거든.
" 금 커프스 단추가 달린 희고 빳빳한 와이셔츠 소매에서 내민 터키석을 박은 반지를 낀 토실 토실한
흰 주먹을 불끈 쥐면서 그는 말했다. "친절한 배려와 단호한 위력이지."
"글세, 그건 잘 모르겠네만,"하고 네플류도프는 말했다. "난 그 곳에 두 번 가 봤는데 몹
시 마음이 아프더군."
"아니, 알고 있다고? 그러면 말이야, 파세크 백작 부인과 일단 친해 둘 필요가 있겠네."
마슬레니코프는 흥에 겨워 말을 계속했다. "그 부인은 이 사업에 온몸을 바치고 있네. 자선
사업을 많이 했지. 덕택에 나는 허물없이 말하네만, 감옥을 일신할 수가 있었어. 전과 같은
참혹한 것들을 없앴더니 죄수들이 기뻐하고 있다네. 가보면 알거야. 그런데 그 파나린 말일
세. 나 개인적으로는 알지 못하거니와, 또 나의 사회적인 지위로 봐서라도 서로가 합치될 리
만무하지만 그는 확실히 좋지 못한 인간이야. 게다가 법정에서 덜된 소리를 마구 지껄여 대
고......"
"여러 모로 고마웠네." 네플류도프는 서류를 집으면서 말했다. 그는 이야기를 끝까지 듣지
도 않고 옛 친구에게 작별을 고했다.
"집사사람을 만나지 않겠나?"
"실례하겠네, 시간이 없어서."
"그럼 하는 수 없지. 이따 야단맞겠는걸." 옛 친구를 계단의 중턱까지 배웅하면서 마슬레
니코프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제일 중요한 손님이 아니라 다음으로 중요한 손님을 배웅할
때는 여기서 전송하곤 했으므로 그는 네플류도프를 두 번째 중요한 손님으로 생각한 것이었
다.
"그러지 말고 잠깐만 만나 주게." 그러나 네플류도프는 끝까지 사양하면서 하인과 문지기
가 달려와 외투와 단장을 내주며 밖에 순경이 서 있는 문을 열어 주었을 때, 오늘은 아무래
도 그냥 가야겠다고 말했다.
"그럼 목요일에 꼭 와 주게. 그 날은 아내가 손님을 접대하는 날이니까. 그렇게 말해 두겠
네!" 마슬레니코프는 계단에서 이렇게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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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어찌 시간도 없을건디 일일이 타자를 친겨??????????
참나...누가 그런 짓을...친구가 준 1만권 정도 화일이 있어 괜찮다 싶은 책을 함게 읽어보자고 하는 의미이지^^;; 30년 만에 읽는 부활인데 생각보다 재미가 있네
1904 대한민국 파일로 보내 주심 안되것습니까... 공유 없이 보고 삭제 하겠습니다.. ldp762k@hanmail.net 메일로 보내 주심 감사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