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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13일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마태오 10,24-33
사랑은 지금 속한 세상을 찢을 용기를 준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이 세상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이들을 두려워한다면 영혼까지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은 그 사람을 부끄럽게 여기실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사람이 죽음을 어떻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느냐고 말하기도 합니다.
저도 죽음이 두렵습니다.
그러나 이전보다는 덜 두렵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주님을 조금 더 알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알아갈수록 당연히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줄어들게 되어있습니다.
주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어머니가 아기를 사랑하면 큰 차에 뛰어들기도 합니다.
사랑이 이렇게 죽음의 두려움도 이기게 만드는 이유는 사랑이 영원한 생명의 보장이기 때문입니다.
아기는 어머니 뱃속에서 어머니 사랑만 받으며 삽니다.
그러나 더 넓은 가정이라는 세상으로 나아오면 가족을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을 갖춰야 합니다.
그것을 넘어서면 이제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준비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할 능력을 갖추지 못하면 지금 있는 세상에 갇히게 되고 제 삶을 살 수 없게 됩니다.
지금 세상을 극복하여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힘은 지금 함께 사는 사람들이 나를 죽이더라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여기 피로와 무기력감, 자살에 대한 유혹을 느끼는 막 40대에 접어든 미혼 여성의 삶을 보고 문제가 무엇인지 알아봅시다.
이 여성은 공무원이라는 안정된 직업을 가지고 있었고 연봉은 많지 않았지만, 그녀가 만족스럽게 살아가기에는 충분했습니다.
1남 1녀 중 첫째로 태어난 그녀는 소위 한국의 전형적인 장녀였습니다.
아버지를 일찍이 사고로 잃은 그녀는 고등학생 때부터 집안의 기둥 역할을 맡아왔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과정도 사춘기도, 질풍노도의 시기도 그녀에게는 사치에 가까웠습니다.
“네가 빨리 자리를 잡아 어린 남동생을 경제적으로 도와줘야 한다.”라는 어머니의 말에 따라 청춘도 연애도 뒤로하고 오직 안정된 직장을 잡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남동생이 재수, 삼수를 하는 동안 학원비는 언제나 그녀의 몫이었습니다.
대학에 합격하자 남동생은 그녀가 평생 엄두도 내보지 못한 해외 어학연수를 다녀오기를 원했고 그다음은 사업을 하기를 원했습니다.
사업비용은 어머니의 대출로 이루어졌고 어머니의 대출금은 당연하게도 그녀가 갚아나갔습니다.
동생의 결혼을 여러 날 앞둔 어느 날 어머니의 다음 말은 그녀를 폭발하게 하였습니다.
“너희 아버지가 남겨준 아파트 있지? 그거 네 동생 신혼집으로 주기로 했다.
그래도 명색이 남잔데 집 한 칸은 해줘야 사돈 보기에도 체면이 서지.”
기가 막힌 그녀가 “그러면 엄마는 어디로 이사할 건데?”라고 묻자 어머니는 당연한 듯 말했습니다.
“너희 집으로 가면 되지. 이제 같이 나이 먹어 가는 모녀끼리 친구처럼 한 번 살아보자!”
그녀도 이번만큼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생애 처음 반대의견을 내본 뒤 돌아오는 것은 어머니의 순식간에 일그러진 얼굴과 폭언,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빨대 꽂아 다 빨아먹은 동생의 적반하장 반응이었습니다.
“불효녀”, “욕심 많은 년”,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누나 왜 그렇게 엄마 힘들게 해!”와 같은 비난이었습니다.
몇 개월이 지났습니다.
그녀의 아버지가 남겨준 아파트는 동생이 신혼집으로 쓰고 있고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의 집에 함께 살고 있습니다.
만나던 남자친구는 어머니의 반대로 헤어졌습니다.
[출처: 『이제 독성관계는 정리합시다』, 권순재, 생각의 길]
위 여성의 문제는 이전 세상을 찢을 용기가 없다는 데 있습니다.
자궁이 좋아서 자궁을 찢을 용기가 없다면 아기는 자궁보다 더 넓은 세상을 맛볼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가정에서도 어머니, 아버지를 버릴 용기가 없다면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자신의 세상에 머무르도록 딸과 아들을 자기가 꼭 필요한 사람으로 만들려는 어머니가 나쁜 사람입니다.
나뿐인 사람인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도록 자신을 버리게 할 의무가 있습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고 하더라도 딸은 어머니와 동생을 버릴 용기를 가졌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평생 살아봐야 자신의 인생은 단 하루도 살 수 없고 그렇게 해도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삶이 될까요? 어리석은 삶이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도 우리를 자신들에게 충성하도록 붙잡아놓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여러 방법으로 위협을 합니다. 돈을 덜 준다던가 빼앗는다던가, 사랑하는 가족을 잃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만약 이 여러 위협을 견뎌낼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 사람은 어쨌건 하느님 나라로 나아갈 준비가 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그 사람이 이 세상에 집착하여 두려움 속에 당신을 증언하지 못하고 당신을 믿는 것을 부끄러워한 것을 이해하실 수 있으실까요?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세상의 많은 회유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안다고 증언하셔서 순교하셨습니다.
이 모습이 천국으로 나아갈 준비가 된 분의 모습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이용하려고 두려움이란 무기로 우리를 잡아두려 합니다.
그러나 사랑엔 두려움이 없습니다.
제가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를 읽고 또 성체조배도 하며 결국엔 사제의 길로 부르심에 응답하기로 했을 때 적지 않은 반대가 있었습니다.
먼저 아버지의 반대가 있었고 여자들의 반대도 있었으며 다니던 학교도 지금까지 공부 잘해놓고 왜 그러느냐고 전화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두려움을 극복할 힘은 더 큰 사랑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세상 사람들을 더 구원하고 싶은 사랑이 생겼던 것입니다.
그 사랑이 이 세상에서 저를 붙잡는 힘을 이겨내게 하였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모든 성소자들이 그러할 것입니다.
위 40대 노처녀는 어머니와 동생이 자신을 미워하고 원망해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웠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유롭게 자신의 인생을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랑은 영원하신 하느님의 본성이기 때문에 영원하지 않은 것들을 끊을 힘도 줍니다.
따라서 사랑을 많이 성장시킨 사람은 이 세상에서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꾸준하게 해나가야 하는 일은 ‘사랑을 성장시켜’ 언제라도 이 세상을 찢고 영원한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지니는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7월13일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복음: 마태 10,24-33
우리의 모든 것이신 주님께서 우리를 귀히 여기시겠답니다!
우리 모두 누구에게나 그런 사람, 그런 체험이 있습니다.
머릿속에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미어지는 사람, 생각만 해도 연민의 정이 북받쳐 오르는 사람.
나를 통해 이 세상에 온 그, 그 오랜 기간 나와 일심동체이던 그, 잠시도 떨어져 있지 않았던 그.
매일 먹이고 씻기고, 달래고 재우던 그, 어찌 보면 나의 분신이요 나와 하나이던 그, 그가 힘들면 나도 힘들고, 그가 아프면 나도 아프고, 그가 웃으면 나도 따라 웃던 그.
아마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그런 존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호세아 예언서는 우리를 향한 애틋한 마음을 지닌 그런 주님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나는 인정의 끈으로, 사랑의 줄로 그들을 끌어당겼으며, 젖먹이처럼 들어 올려 볼을 비비고,
몸을 굽혀 먹여 주었다.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호세아 11,4, 8)
우리가 사랑하는 자녀들이나 연인을 그토록 귀하게 여기고 애지중지하듯이 우리 주님께서도
우리 각자를 그렇게 뜨거운 마음으로 사랑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귀히 여기시는지, 얼마나 총애하시는지에 대해서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럭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마태 10, 29-31)
따라서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나를 무시하고 하찮게 여긴다 할지라도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신 주님께서 우리를 귀히 여기시겠답니다.
우리의 창조주요 우리의 미래를 책임지신 주님께서 우리를 세상 끝날까지 기억하시겠답니다.
더 은혜로운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은 우리 인간들의 사랑과는 격이 다른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은 우리가 주고받는 사랑처럼 작거나 모순되지 않습니다.
자기중심적이거나 편협되지 않습니다.
그 사랑은 한없이 큰 사랑, 한결같이 일관된 사랑, 지극히 이타적이고 영원불멸하는 참사랑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강론>
(2024. 7. 13. 토)(마태 10,24-33)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고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
제자가 스승처럼 되고 종이 주인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사람들이 집주인을 베엘제불이라고 불렀다면, 그 집 식구들에게야 얼마나 더 심하게 하겠느냐? 그러니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마태 10,24-31).”
1)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고, 제자가 스승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라는 말씀은, 제자들은(신앙인들은) 예수님의 뒤만 잘 따라가면 된다는 뜻인데, 제자들이(신앙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보다 더 무거운 십자가를 져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고, 예수님께서 겪으신 고난보다 더 큰 고난을 겪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이 죽음으로 끝난 일이 아니라 부활로 이어졌음을 알고 있고,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은 하나의 사건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것은,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일이기도 하고, 부활에 참여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는 죽으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살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지상에서 잘 먹고 잘 살다가 죽는 것으로 끝나버리는 인생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끝까지’ 예수님의 뒤를 잘 따라가야 합니다.>
2) “박해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라는 말씀은,
그자들을 무서워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고,
육신의 죽음을 무서워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무섭지 않으니까 무서워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죽는 것은 무서운 일이긴 한데,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으로 그 무서움을 극복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여라.” 라는 말씀은, 하느님을
무서워하라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만’ 섬기라는 뜻입니다.
또 영혼이 멸망당하는 것을 무서워하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은 ‘무서움’이 아니라,
즉 공포심이 아니라, ‘경외심’입니다.
우리는 ‘무서움’과 ‘경외심’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만일에 하느님이 무서워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 생활에는 사랑도 없고 기쁨도 없고, 그 생활은
아무 의미 없는 강제노동이 될 뿐입니다.
하느님은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고, 내가 사랑하는 분입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1요한 4,18).”>
3)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까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셔서, 우리를 아주 세심하게 보살피시고 돌보신다는 뜻입니다.
시편 작가는 그 하느님을 이렇게 찬미했습니다.
“제가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가 저에게 위안을 줍니다(시편 23,4).”
<‘어둠의 골짜기’는 ‘죽음의 골짜기’로 번역할 수도
있는 말인데, 우리가 겪는 모든 고난과 시련들을 가리킵니다.
넓은 뜻으로, 지상에서의 인생살이를 뜻하는 말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어둠의 골짜기’ 자체를 없애 주시는 분이라고 찬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시편 작가는 하느님께서 언제든지 어디에서든지,
그곳이 ‘어둠의 골짜기’ 라고 해도, 늘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을 찬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과 보호만 강조하셨고, 박해 자체를 없애 주겠다는 약속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수난과 죽음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부활과 승천으로 직행하면 좋을 것 같은데, 그것은 하느님의 방식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굳이 수난과 죽음을 거치셔야만 했는가?”, 또는 “우리는 왜 이렇게 힘든 인생을 살아야만 하는가?” 라고 물을 수도 있는데,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을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파스카의 신비’ 라고 부릅니다.>
4)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너희를 더 아끼시고 사랑하신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는 “박해자들은 참새들보다 못한 ‘하찮은’ 존재다.” 라는 뜻도 들어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라는 말씀은, “너희는 박해자들보다 더 귀하다.”,
또는 “너희는 로마 황제보다 더 귀하다.” 라는 뜻이 됩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을 안 믿으면서 신앙인들을 박해하는 자들은 먼지처럼 허무하게 사라질 것이기 때문에, 참새보다 더 하찮은, 또는 먼지보다 더 하찮은 존재들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