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U·S·A)의 약사(略史)
2. 미국 원주민(Native American)
북아메리카 대륙(현재 미국 영토)에는 60여 원주민(Native American) 부족들이 흩어져 살고 있었는데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유럽 각지에서 이민자들이 몰려들게 되면서 원주민과 이민자들 간의 알력이 시작된다. 이민자들은 중에는 순수한 탐험가들이 있는가하면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오는 사람, 범죄를 짓고 도망을 오는 사람 등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몰려오게 된다.
1620년, 영국 헨리 8세(HenryⅧ)는 수도 없이 왕비를 바꾸는 만행을 저지르자 로마교황청으로부터 파문을 당하게 되는데 그는 새로운 교단인 성공회(聖公會)를 만들어 스스로 수장(首長)이 되고 영국 국교(國敎)로 선포한 후 당시 가톨릭 국가이던 영국의 가톨릭 신자들도 무참히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당시 개신교 신자(청교도<Protestant/Pilgrim Fathers>)들도 종교 박해를 피해 오월의 꽃(Mayflower)이라는 배를 타고 영국에서 벗어나 미지(未知)의 세계였던 아메리카로 떠나게 된다.
아메리카의 광활한 땅은 유럽에서 이주민들이 들어오기 전에는 원주민(Native American)들의 땅이었다.
당시 이곳에는 아파치(Apache), 체로키(Cherokee) 등 30여 족에 이르는 원주민 부족들이 살고 있었는데 콜럼버스가 처음 이 땅이 인도인 줄 알고 이들을 인도사람(인디언/Indian)이라 부르는 바람에 아메리카의 인도사람들(America Indian)이라는 이상한 이름을 갖게 되었지만 콜럼버스가 오기 훨씬 이전부터 수많은 부족들이 평화스럽게 살아가던 땅이었다. 지금은 원주민인 인디언들은 산간오지로 쫓겨나고 이주민들이 주인행세를 하는 꼴이 되고 말았으니 주객이 바뀐, 미국 원주민(Native American)들의 비극이다.
아메리카 대륙은 처음에는 스페인의 세력권에 있었지만 스페인의 국력이 약해지면서 유럽열강들의 식민지 쟁탈전이 벌어지게 된다. 결국 영국으로 주도권(主導權)이 넘어가게 되었는데 유럽 각 지역에서 몰려온 사람들이 연합하여 새로운 나라를 세우겠다고 나서서 영국과 충돌하게 되는 것이 미국의 독립전쟁이다.
많은 원주민(인디언) 부족들이 처음에는 영국 편을 들었는데 자기들이 대대로 살아온 땅에 유럽에서 건너온 떨거지들이 새 나라를 세우겠다니 기가 막히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을 것이다.
영국은 원주민(인디언)들에게 살 땅을 보장해주겠다고 유혹해 같이 미 독립군을 협공했는데 미 독립군이 이기면서 인디언들의 설 자리가 좁아졌다. 이후, 미국(United States of America)이 정식 국가로 독립하면서 미국은 점점 넘쳐나는 백인 이민자들에게 땅을 주기 위해 동부 인디언들을 애팔래치아 산맥 서쪽으로, 그 다음엔 미시시피 강 서쪽으로 몰아냈고 그 다음엔 보호구역 안으로 몰아넣거나 땅을 송두리째 빼앗아버렸다. 백인들이 퍼뜨린 천연두(天然痘)와 수두(水痘)에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거의 멸종되다시피 한 점은 새삼 언급할 필요도 없다.
매우 문화가 발달했던 종족 중의 하나인 체로키(Cherokee) 부족은 미군 병사들의 감시 하에 인디언 영토(Indian Territory)라고 불리던 13,000km(3만 2천리) 떨어진 오클라호마(Oklahoma)주 탈레쿠아(Tahlequah)로 강제이주 당하는데 머나먼 길을 가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길을 따라 무덤이 줄을 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텔레쿠아가 척박한 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당히 체로키국을 건설했고 1839년 8월, 추장으로 존 로스(John Ross)가 선출됐다. 2년 만인 1841년 무상 교육을 제공하는 남녀 공학 학교를 설립해 또다시 이곳에서도 아칸소나 텍사스 주의 백인들보다 훨씬 낮은 문맹률을 기록했는데 90%가 읽고 쓸 줄 알았다. 1850년 미시시피 강 서쪽에서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세워진 여성 고등 교육기관(Cherokee Female Seminary)의 남은 자취도 체로키의 교육기관이었고, 탈레쿠아에 있는 노스이스턴 주립대(Northeastern State University)도 체로키 부족들의 교육기관이 모태가 되었다고 한다.
미국 사우스다코다(South Dakota)주 러시모어(Rushmore) 산에 있는 미국 역대 대통령 중 위대한 인물로 꼽히는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시어도어 루스벨트, 아브라함 링컨의 두상(頭狀)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들은 과연 잘못이라고는 전연 없는 성인(聖人)들이었을까?
미국 원주민(Native American)들은 여기에 반발하여 역사상 최고의 추장이라 일컬어지는 성난 말(Crazy Horse) 두상(頭狀)을 사우스다코타(South Dakota)주 블랙힐스(Black Hills)에 건립 중인데 세계 최대의 석조물로 미 대통령들 두상 크기의 거의 두 배라고 한다.(얼굴 길이만 27m)
그런데 정부의 보조(補助) 없이 진행하는 작업이라 언제 완성 될지는 알 수가 없다고 한다.
별명 성난 말(Crazy Horse)로 불리는 그는 수족(Sioux)의 일파인 오글라라(Oglalas) 소속인데 미국 기병대와 리틀 빅혼(Little Big Horn) 계곡에서 전투를 벌여 커스터(Custer) 중령이 이끌던 미 제7기병대를 몰살시킨다. 그는 뛰어난 전투력으로 23세에 족장(族長)으로 추대되고 35세로 일생을 마감했지만 미 대륙 원주민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추장으로 꼽힌다고 한다.
러쉬모어산(미국 대통령) / 인디언 추장 성난 말 조각(작업 중) / 완성모습 / 성난 말 추장
3. 식민지(植民地) 쟁탈전
아메리카 대륙도 처음에는 스페인의 세력권에 있었지만 스페인의 국력이 약해지면서 유럽열강들의 식민지 쟁탈전이 벌어지게 된다. 당시 영국은 엘리자베스 여왕(Elizabeth I)이 통치하던 최전성기였는데 1578년 길버트 경(Sir Humphrey Gilbert)과 1584년에는 랄리 경(Sir Walter Raleigh)에게 스페인에 맞서 미국에 식민지를 개발하게하고 정착할 권리를 부여한다.
1585년 랄리 경은 버지니아를 탐험하고 평생 독신으로 보낸 엘리자베스 여왕을 기려서 처녀라는 의미의 버지니아(Virginia)라고 명명 했다.
랄리요새 / 길버트경 / 랄리경 / 엘리자베스 1세
1607년 버지니아를 시작으로 식민지를 넓혀나가기 시작한 영국은 버지니아와 뉴잉글랜드를 차지했고, 프랑스는 캐나다, 네덜란드는 뉴욕 일대, 러시아는 알래스카를 차지했다.
당시 유럽 열강들 중에서 군사력으로 가장 우위를 점했던 영국은 종내는 당시 중남미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스페인 세력까지 몰아내고 미 대륙전체를 영국의 식민지로 만드는데 성공한다. 스페인은 아메리카대륙에서는 밀려나지만 중남미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고 포르투갈은 브라질을 차지한다.
당시 애팔래치아 산맥(Appalachian Mountains) 동쪽 대서양 해안을 따라 식민지가 13개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초기에는 영국의 통치하에 있었다.
북부지역이 뉴햄프셔(New Hampshire), 마세추세츠(Massachusetts), 로드아일랜드(Rhode Island), 코네티컷(Connecticut)이고 중부지역은 뉴욕(New York), 뉴저지(New Jersey), 펜실베이니아(Pennsylvania), 델라웨어(Delaware), 남부지역은 메릴랜드(Maryland), 버지니아(Virginia), 노스캐롤라이나(North Carolina), 사우스캐롤라이나(South Carolina), 조지아(Georgia)가 초기 13개 주이다.
◎ 프렌치 인디언 전쟁(French and Indian War)
1754년부터 6년간 오하이오 강(Ohio River) 주변의 인디언 영토를 두고 영국과 프랑스가 쟁탈전을 벌인 전투가 이 전쟁인데 우여곡절 끝에 협상으로 전쟁은 끝난다.
이 시기 유럽에서는 1757년, 거의 모든 유럽 국가들이참전하여 7년간의 전쟁이 벌어지는데 포메라니아 전쟁(Pomeranian War), 또는 일명 7년 전쟁이라고 부른다.
포메라니아전쟁(7년 전쟁)은 슐레지엔(Schlesien) 지방을 빼앗긴 오스트리아가 그곳을 되찾기 위해 프로이센과 벌인 전쟁을 말하는데 오스트리아-프랑스-작센-스웨덴-러시아가 동맹을 맺어 프로이센-하노버-영국의 연합군에 맞서 벌였던 유럽대륙 전체의 전쟁이었다.
그러다 보니 영국은 미 대륙과 유럽에서 동시에 전쟁을 치르느라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입게 된다.
국가경제가 어려워진 영국은 미국 식민지 주민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게 되고, 또 개척정신이 강한 이주민들이 애팔래치아 산맥을 넘어 서부로 가려고 하자 영국은 이 지역을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설정하고 나가지 못하게 법으로 금지하여 자주 분쟁이 발생하였다.
서부로 가려는 이주민들이 현지의 원주민(인디언)들과 자주 분쟁이 발생하자 인디언 주거지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영국은 군대를 파견하게 되는데 군사비용 일부를 13개 식민지(植民地)에 부과하여 그러잖아 심한 반발에 골머리를 알았는데 여기에 불을 지르는 꼴이 된다.
◎ 보스턴 차(茶) 사건
1770년 보스턴에서 시가행진을 하던 영국군과 시민이 충돌하여 보스턴 시민 5명이 사망한 사건이 일어나 극도로 감정이 악화됐는데 1773년 독립전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보스턴 차 사건이 발생한다.
1773년 12월, 홍차를 비롯한 여러 가지 물자를 실은 영국배가 보스턴 항구에 들어오자 인디언 복장으로 위장한 식민지 사람들이 배에 올라가 홍차를 바다에 던져버린 사건이다.
영국의 압력이 거세어지자 영국의 횡포에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식민지 대표들은 1774년 필라델피아에 모여서 대책을 의논하는데 이것이 제1차 대륙회의(Continental Congress)이다.
보스턴 차(茶) 사건 / 제1차 대륙회의
곧이어 제2차 회의도 열려 논의사항을 영국에 건의하지만 영국의회에서 건의사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영국과의 완전 분리를 결정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