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 : 제주시 일도1동 1084-6, 1084-31번지 일대
시대 ; 조선/조선 전기
유형 : 관방유적(성문)
제주읍성은 탐라국 때부터 축성된 것으로 추정될 뿐 정확한 연대는 확실치 않다. 제주성은 고려 숙종10년(1105) 탐라군이 설치되면서 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의 읍성은 이미 존재하고 있던 탐라국 시대의 성곽을 활용하여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유사시에 적의 침입으로부터 읍성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에 성곽의 입지적 조건으로 자연적 지형이 매우 중요하게 고려되었다.
제주성이 문헌에 처음 등장한 것은 조선왕조가 들어서고 얼마 되지 않은 태종8년(1408)이다. “큰 비가 내려 제주성에 물이 들어와 관아와 민가가 잠기고 곡식의 절반이 침수됐다”고 기록됐다. 그리고 태종11년(1411)에 제주읍성을 보수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조선시대로 들어오면서 체계적으로 관리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집필 김동전)
제주성에는 남문·서문·동문 등 3문이 있었다. 성의 북쪽은 바다와 맞닿아 있고, 외적이 해안을 통해 곧바로 침략할 수 있어서 북문은 설치하지 않았다.
성문(城門)은 성의 안팎을 연결하는 통로이자 공격과 방어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적을 격퇴하기 위해 출격해야 하므로 요충지에 성문이 설치됐다. 성문 밖으로는 옹성을 구축하여 외적이 문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성문 위에 누각을 설치한 건축물을 문루(門樓)라 하며 유사 시 장수의 지휘소로 이용됐다. 문루는 적을 조기에 발견하기 위한 감시초소 기능을 하였으므로 초루(譙樓)라고도 불렸다.
명종10년(1555)에는 을묘왜변 때에 영암에서 패퇴한 왜선 40여척에서 1000여명의 왜구가 화북포에 정박하여 상륙하고, 제주성을 포위하고 공격했으나 이를 격퇴하여 왜병을 생포하고 적선 5척을 포착(捕捉)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때는 동쪽 성벽이 산지천 서쪽이라 왜구들은 현재의 제주동초등학교나 일도교 정도에 진을 치고 제주읍성을 공격했던 것으로 보인다. 수세에 몰려 있던 김수문 목사는 70명의 별동대를 성밖으로 출전시켰다. 이 별동대를 이끌었던 김성조(金成祖)를 비롯한 4명의 장수는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 내었고 왜구들은 물러났다. 이에 대해 조선왕조실록 명종조 7월 6일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제주목사 김수문이 장계하기를 “6월 27일에 왜적이 무려 천여명이 하륙하여 진을 만들었습니다. 신이 효용군(驍勇軍) 70인을 골라 거느리고 진 앞으로 돌입하여 거리가 30보 정도였는데 왜인은 전(箭)에 맞는 자가 매우 많았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퇴병하지 않으므로 정로위(定虜衛) 김직손과 갑사(甲士) 김성조·이희준, 보인(保人) 문시봉 등 4인이 말을 타고 돌격하니 적군이 궤산(潰散)하였습니다. 한 왜장이 있었는데 홍모(紅毛) 투구를 썼습니다. 자기가 활 잘 쏘는 것을 믿고 혼자 물러가지 않았습니다. 정병(正兵) 김몽근이 그의 등을 쏘아 맞히니 곧 엎드려 쓰러졌습니다. 우리 군사들이 승세를 타서 추격하여 참획한 무리가 심히 많았습니다.” 하였다.]
그 후 10년이 지난 1565년 곽흘 목사는 성 동쪽 벽을 더욱 밖으로 확장하였다. 현재의 동문파출소에서 기상대를 잇는 선이다. 산지천을 성안에 끌어들임으로써 산짓물과 가락쿳물 등의 식수와 생활용수를 보다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선조32년(1599) 성윤문 목사가 부임하여 성 굽을 5척이나 늘리고 높이를 13척으로 높이는 대수축 공사를 단행하였다. 그리고 동·서·남문을 중수(重修)하여 좌우로 군영을 만들고 격대 27개 중 21개는 포루를 만들어 기와로 덮고, 남수구 위에는 제이각(制夷閣)을 지으니 이를 남수각이라 통칭하였다.
이원진의 『탐라지』에 의하면 둘레 5,489척, 높이 11척에 격대 27개, 타첩 404개가 마련되고, 동·서·남문이 갖추어졌으며, 동쪽의 산지천에 남·북으로 수구문을 설치하고 동성 위에서 장수가 지휘하는 곳인 운주당(運籌堂)을 세웠다고 한다. 운주당의 편액은 이산해가 썼다고 한다.
동문의 초루는 1565년 곽흘 목사가 동성(東城)을 확장하면서 창건했다. 동문의 문루명은 처음에 제중루(濟衆樓)라고 했다가 나중에 연상루(延祥樓)로 바뀌었다. 1666년 홍우량 목사가 보수했고, 1808년 한정운 목사가 중수했으며, 1856 채동건 목사가 개축했다. 『증보탐라지』에 의하면 “연상루의 옛 이름은 제중루니 읍성의 동성문이다. 1666년 현종 7년에 목사 홍우량(洪宇亮)이 증수하였고, 1808년 순조8년 목사 한정운(韓鼎運)이 증수하였다. 이형상의 남환박물에는 6칸이라고 기록하였다. 1856년 철종 7년에 목사 채동건(蔡東健)이 다시 증수하였다”라고 적혀 있다.(학교가 펴낸 우리 고장 이야기 제주동초등학교 편)
전국 해안과 내륙 등 요충지에 세워졌던 읍성(邑城)은 일제시대인 1910년 조선총독부의 1호 법률인 ‘조선읍성 훼철령’에 따라 철거돼 대부분 제 모습을 잃었다. 일제는 읍성을 한민족의 단합된 힘과 항전의 상징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제주성도 예외는 아니었다. 1913년 북성문을 시작으로 1914년 연상루·진서루·중인문을 허물어 버렸다. 이어 소민문, 정원루 등이 사라졌고 1923년에는 동성을 철폐하고 측후소를 세웠다. 1926년부터 일제가 동·서부두를 축조하고 산지포를 매립하는 제주항 축항공사를 벌이면서 제주성 3면의 성담 상당 부분을 바다에 매립해 성체가 사라져 버렸다. 그렇지만 1914년 총독부가 토지조사사업으로 제주성의 지적도를 만들었다. 그 지적도를 보면 성안에는 과거에부터 동서를 가로지르는 넓은 도로가 있었고, 성벽 돌출 구조물로 성곽을 견고히 하고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는 21개의 치성이 표시됐다.(제주新보160627)
우석목2로 길의 모양으로 동문 옹성 터를 확인할 수 있다. 일제가 1914년 토지조사사업을 벌이며 촬영한 위 사진에서는 4기의 돌할으방과 함께 미석이 뚜렷하고 미석 위에 길쭉한 반원형의 여장이 남아 있다. 동문에서 남문의 중간 지역에 해당되는 곳 동문파출소 남쪽 동네를 지금도 ‘성굽’이라 부르고 있다. 굽은 맨 밑바닥(바탕)이라는 뜻이다. 동문 앞에 있던 돌하르방 8기는 제주도청(2기), KBS제주방송(2기), 제주대학교(2기), 서울 국립민속박물관(2기) 등지로 흩어졌다.
동문로9길 6-7과 37-2 사이로 들어가는 좁은 이곳이 동문 옹성으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이곳에서 북서 방향으로 내려가면 우석목2로이며 이 길은 휘어진 것으로 보아 옹성을 헐어내고 그 자리를 길로 쓴 것으로 추정된다. 큰 길 맞은편 ‘청은환타지아’ 건물자리 옆에 제주성동문 연상루 터 표석이 있다. 그러나 옛 지적도를 보면 청은환타지아 건물보다 동남쪽에 성문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성벽은 남쪽으로는 동문파출소 방향으로, 북쪽으로는 기상청 쪽으로 연결되었었다. 북성은 기상대에서 내려오는 계단 바깥 벽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동문이 있었던 곳 주변에 형성된 마을을 동문통이라 불렀으며, 동문로, 동문시장, 동문로터리, 동문파출소 등의 명칭은 동문이 있었던 곳과 가깝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작성 160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