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미의 어떤 시] [108]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 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시의 가슴에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김영랑(1903~1950)
(현대 표준어에 맞춰 수정함)
/일러스트=양진경
봄이 저만치 와 있다. 우리말로 쓰인 봄 노래 중에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처럼 보드라운 시가 또 있을까. ‘북에는 소월, 남에는 영랑’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김영랑은 순수한 우리말을 살려 시를 짓는 데 뛰어난 시인이었다. ‘살포시’ ‘보드레한’을 음미하노라면 마음이 밝아진다.
두 연의 1행과 2행이 ‘같이’로 끝나고 4행과 8행에 ‘-고 싶다’가 반복된 짜임새. 도드라지는 외래어 ‘에메랄드’를 ‘청록색’으로 바꾸어 읽어보니 시의 맛이 덜하다. ‘에메랄드’ ‘돌’ ‘햇발’ ‘풀’ ‘볼’ 등 유성음 ‘ㄹ’이 들어간 단어가 많아 귀에 익은 음악처럼 친근하게 들리는, 가곡으로도 만들어져 사랑받는 겨레의 노래.
시처럼 고요하고 고운 봄 길이 내 생에 다시 올까? 순수한 춘심(春心)을 잃고 그때를 그리워하노니, 돌담에 속삭이는 햇살을 눈부시게 쳐다보던 어느 날 오후. 아무 걱정 없이 3월을 기다리며 ‘시의 가슴에 살포시 젖는’ 그대는 행복한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