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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형제회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마태 14,13-21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들으시고 외딴곳으로 물러가십니다. 슬픔 속에 홀로 계시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군중이 따라오자, 당신의 슬픔보다 그들의 굶주림을 먼저 보시고 ‘가엾은 마음(온유)’으로 그들을 맞으십니다. 참된 온유는 자기 슬픔 속에서도 남을 향해 열려 있는 마음입니다.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군중을 돌려보내십시오” 합니다. 가장 손쉬운 해결책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답은 뜻밖입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책임을 ‘남’이 아니라 ‘너희’에게 지우십니다. 제자들은 가진 것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라 말하지만, 그 작은 것을 ‘성실’히 내어놓습니다. 바로 그 ‘적은 것의 봉헌’ 위에서 기적이 시작됩니다.
성 예로니모는 이 빵의 기적에서 ‘성체성사’를 미리 봅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찬미하고, 떼어, 주시는’ 동작은 미사에서 되풀이되는 성찬의 동작 그대로입니다. 그는 일깨웁니다. 세상의 어떤 음식도 영혼의 굶주림을 채우지 못하지만, 이 ‘생명의 빵’은 사람을 참으로 배부르게 한다고. 그리고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습니다. 그런데 남은 조각을 ‘열두 광주리’에 거둡니다.
여기에 ‘절제’의 지혜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풍성함은 넘치도록 주시지만, 그 풍성함을 ‘함부로 버리지 않고 거두는’ 것 ― 어제 헤로데의 탐욕스러운 잔치와 달리, 오늘 주님의 식탁은 ‘배부름’과 ‘절제’가 함께 있는 생명의 잔치입니다.
영적 열매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은 세 열매를 한자리에 보여 줍니다. 작은 것을 내어놓는 ‘성실’, 슬픔 속에서도 자비로 여는 ‘온유’, 배부르되 함부로 버리지 않는 ‘절제’ ― 이 셋이 만날 때, 작은 빵이 오천 명을 먹입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내 ‘작은 빵 다섯’을 기꺼이 내어놓는가?
나는 내 슬픔 속에서도 남을 향해 열려 있는가?
나는 배부름 속에서도 ‘절제’를 잃지 않는가?
나는 성체를 ‘참된 양식’으로 받아 모시는가?
주님,
제 작은 것을 성실히 내어놓게 하소서.
슬픔 속에서도 온유한 자비를 잃지 않게 하시고, 배부름 속에서도 절제하며, 생명의 빵으로 참되이 배부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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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사랑도 부족하고 믿음도 부족한 나는 아닌지>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네 복음에 모두 나옵니다. 그러나 공관복음은 요한복음과 내용이 조금 다릅니다.
우선 많은 사람이 굶주리고 있음을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먼저 언급하시는 것에 비해 공관복음은 제자들이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먹이기 위해 언급하는데 제자들은 돌려보내기 위해 언급을 합니다.
이렇게 돌려버리려는 제자들에게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제자들에게 줄 것이 없음을 아시면서도 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에 제자들의 입에서는 이런 대답이 나옵니다.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사실이고 이렇게 가진 것이 없는 존재가 나임을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이렇게 가난한 존재인 것을 잘 아는 것이 겸손입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내게 가진 것이 조금밖에 없거나 아예 없을 때 나는 어떻게 하고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가 먹을 것이 없을 때는 먹을 것이 어디에 없나 하며 찾을 것이고, 가진 사람이 있으면 그에게 먹을 것을 좀 달라고 할 것이며, 그가 주지 않으면 이 사람 저 사람 찾다가 마침내 하느님을 찾을 것입니다.
그런데 군중에게 먹을 것이 없고 나도 가진 것이 없을 때 어떻게 합니까? 그때도 내가 먹을 것이 없을 때처럼 줄 사람을 찾고 하느님을 찾습니까? 오늘 제자들처럼 내가 없으니 줄 수 없다고 바로 포기해 버리고 맙니까?
가진 것이 없다고 줄 마음도 없냐는 말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도 없고 마음도 없다면 그것이 문제입니다.
가진 것은 없어도 되고 없는 것이 더 좋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사랑이 없어 줄 마음이 없는 것이고 주실 수 있는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군중을 보시자 즉시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렇습니다. 이 가엾은 마음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 인간은 종종 가엾은 마음이 없는 것이 문제인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다고 핑계를 대며 사랑을 포기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줄 마음만 있으면 하느님이 주신다는 믿음 부족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지녔던 야훼이레의 믿음을 우리도 지녀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사랑도 부족하고 믿음도 부족한 나는 아닌지 돌아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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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형제회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우리의 자그만 노력 한가운데서 하느님 은총이 드러납니다!>
시편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거슬러 말하였다. '하느님이신들 광야에다 상을 차려 내실 수 있으랴?'"(시편 78,19).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을 믿지 않고 그분의 도움심에 의지하지 않겠다고 하며 내뱉은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일, 즉 을 하셨습니다. 광야에서 식탁을 마련하시고, 극심한 빈곤의 자리에서 풍성하고 넘치는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기적을 일으키셨을까요?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349-407)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스승의 지혜를 보십시오. 그분은 '내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겠다.' 하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당신 제자들이 갖고 있던 보잘것없는 것, 즉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받아들이셨고, 그것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사용하여 남자만도 5,000명이 넘는 군중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초대 교회의 다른 저자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분은 다른 음식을 새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가진 것을 받으시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주게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주님께서는 이 풍요로움이 제자들 자신에게서 나온 것처럼 보이게 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선물은 우리의 삶을 밀어내거나 우리의 노력을 무의미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노력 한가운데서 하느님의 은총이 드러납니다.
또 다른 예가 있습니다. 요한 복음에서 예수님은 38년 동안 누워 있던 병자에게 말씀하십니다. "건강해지고(낫고) 싶으냐?" (요한 5,6). 상황을 보면 이상한 질문 같지만, 깊이 성찰해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낫지 않은 상태로 누워 있으면서 그저 다른 사람의 도움에 의지하고만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도 이 병자처럼 종종 우리 자신의 약함에 안주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정말로 낫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 처음에는 이 명령이 불가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는 믿음을 가지고 일어나려는 노력을 했습니다. 그 순간, 오랜 세월 헛되이 보내던 그 사람 내면 깊숙한 곳에 숨어 있던 하느님의 생명력이 은총 안에서 새롭게 이어져 그의 다리를 움직이게 했습니다. 말하자면 하느님의 은총이 끊어진 삶의 흐름을 회복시켜 새로운 시작을 가능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기적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이 그의 노력 안에서 피어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처럼 우리의 노력과 도움을, 아무리 자그맣고 하찮은 것이라 할지라도, 기꺼이 받으시고 그것을 통해, 즉 우리의 것을 통해 당신의 일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렇듯이 하느님은 이런 기적은 물론이고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까지도 우리 피조물을 통해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은 당신 혼자서 모든 일을 이루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통해서 모든 일을 이루시는 분이시라는 말입니다.
중세 도미니코회 신비주의자들도 이 점을 깊이 숙고하고 성찰했습니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은 언제나 완전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가진 것은 하느님께 빌려 받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곧 여러분 자신의 것입니다."라고 썼습니다.
그러니까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하느님 사랑의 힘이 이미 우리 내면에 존재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바깥쪽 어딘가로부터 그 힘을 가져와 그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당신 자신이 이미 우리 삶과 존재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계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동료 요한 타울러도 이와 비슷하게 "그분은 우리의 것입니다. 그분은 온전히 우리의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다른 이는 덧붙였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얻는 것은 여러분 자신에게서 얻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은총의 역할을 줄이거나 무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은총을 더욱 섬세하고 놀랍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존중하시고, 우리의 삶을 무가치하게 만들지 않으십니다.
누군가에게 선물을 주면서 그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어떤 성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언가를 줄 때는, 받는 이가 당신을 용서할 수 있을 만큼 겸손하게 주어야 합니다."라고요...
하느님이 바로 그러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안에서 이루시는 하느님의 일을 잘 눈치채지 못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존재 깊숙한 곳에 이미 현존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은 내가 나 자신에게 가까이 있는 것보다 나에게 더 친밀하게 계십니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하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나 자신보다 더 '나'이신 분입니다."
재속 프란치스칸이었던 제노아의 성녀 카타리나는 어느 날 하느님을 깊이 관상하다 길거리에 나가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나의 가장 깊숙한 나는 하느님입니다!"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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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형제회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본보기들 - 서른 번째 주간 실천>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각자의 삶의 이야기로 증거하며 살아가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사랑의 렌즈를 통해 성경을 읽기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본보기들 - 서른 번째 주간 실천
2026년 8월 1일 토요일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Barbara Brown Taylor)는 자신의 삶을 향한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던 시절을 되돌아봅니다. 애통과 기도의 시간을 지나며, 그녀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제가 받은 응답은 "나는 사랑받고 있다"는 깊은 확신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제게 주신 소명은, 제가 최선을 다해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 방식으로 다시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구체적인 형태나 조건은 하느님께 그리 중요하지 않은 듯했습니다.
그러한 응답은 우리 대부분에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분명한 말씀, 구체적인 지침과 명확한 길잡이를 원합니다. 이 탐구에서 우리가 가장 자주 의지하는 도구는 성경입니다. 저는 많은 이들이 "자기 사랑의 곤경이나 자기 직업의 선택에 대해 성경은 무엇을 말하는지"를 물으러 오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성경을 무작위로 펼치거나 눈을 감고 손가락으로 구절을 가리켜 그 안에서 답을 얻어야 하는지 묻기도 합니다.
이들의 동기는 전적으로 고결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위한 하느님의 뜻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를 놀라게 하는 것은, 그들이 성경에서 발견한 응답을 자기 마음과 양심, 친구들의 조언, 그리고 주위 세계에서 얻은 깨달음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올려놓으려는 태도입니다.
브라운 테일러는 성경이 점을 치는 책이나 "방법 안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이 사람들의 삶 안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들의 모음이라고 강조합니다:
성경은 수많은 율법과 몇몇 족보, 그리고 귀한 권고들을 담고 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많은 인물들의 삶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 호세아와 하바쿡, 세례자 요한, 성모 마리아와 성 요셉, 베드로와 마리아 막달레나…. 성경은 이들이 하느님과 맺은 관계의 이야기와,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들려주신 말씀, 그리고 그들을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 모든 이야기들이 우리에게 전하는 바는, 하느님의 말씀과 그들의 삶을 향한 하느님의 뜻이 인쇄된 지침서 속 특정한 답변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느님의 뜻, 곧 그들을 향한 사랑은 살아 있는 관계의 형태로 다가왔으며, 그들은 그 관계를 받아들이거나 떠날 자유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관계를 읽는 것만으로는 우리의 관계를 찾는 일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삶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살아내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느님과의 친교 안에서 우리 삶이 지니게 될 고유한 형태를 찾아내고,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들려주시는 특별한 말씀을 발견해야 합니다.
References
Barbara Brown Taylor, Mixed Blessings (Cowley Publications, 1998), 107–109.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Jenna Keiper, untitled (detail), 2020, photo, New Mexico.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마치 시력을 교정하기 위해 쓰는 안경처럼, 사랑은 성경 말씀을 더 깊이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게 해 주는 렌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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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형제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의 자비에서 피어나는 풍요>
이사 55,1-3; 로마 8,35.37-39; 마태 14,13-21
오늘 전례는 인간을 굶주리게 내버려 두지 않으시는 하느님을 보여 줍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목마른 이들아, 모두 물가로 오너라”(이사 55,1) 하고 외칩니다. 하느님께서는 내 처지에 관계없이 늘 새로운 관계 안으로 들어오라(לְכוּ)고 초대하십니다. 복음에서 말하는 ‘배고픔’도 단순히 빵이 부족하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 마음 깊은 곳의 공허함을 가리킵니다. 오늘날 우리는 물질적 풍요 속에 살아가지만, 영적으로는 깊은 가난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외로움과 피로, 무관심과 절망이 우리 사회를 짓누르고 있습니다. 몸을 위한 음식은 풍족하지만 삶을 살게 하는 말씀을 듣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늘도 “내 말을 들어라. 너희가 좋은 것을 먹고 기름진 음식을 즐기리라”(55,2) 하고 희망을 일으켜주십니다. 참된 양식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말씀에 다시 귀를 기울이는 데서 시작됩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14,14)고 전합니다. 여기서 ‘가엾은 마음이 들다’(σπλαγχνίζομαι)는 마음 깊은 곳이 뒤흔들릴 만큼 타인의 아픔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자비를 뜻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자비는 타인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는 사랑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효율과 속도를 중시하는 문화 속에서 타인의 아픔에 무감각해지기 쉽습니다. 제자들도 사람들을 돌려보내자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14,16)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 교회를 향한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특별한 기적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가진 시간과 경청하는 마음, 함께 있어 주는 사랑과 나눔의 손길을 내어놓으라고 초대하십니다.
빵의 기적은 자신의 가난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제자들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라고 답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지를 묻지 않으시고, 그것을 내어놓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물으신 것입니다. 우리 손에만 머무는 작은 것은 부족하지만, 주님의 손에 맡겨진 작은 것은 풍요로 변합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이 신비를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의 가난은 단순히 재물을 포기하는 삶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느님 아버지께 받은 선물임을 고백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쁘게 모든 것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문제는 자원이 부족한 데 있지 않고, 나누는 법을 잊어버린 데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풍요는 부족한 것을 계산하는 데서 시작되지 않고, 이미 받은 것을 내어놓는 데서 시작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9)라고 선포합니다. 오늘 우리는 관계와 공동체가 쉽게 단절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은 결코 인간에게서 떨어져 나가지 않습니다. 빵의 기적은 바로 이 사랑이 누구도 버리지 않음을 보여 주는 표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몇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이를 먹이셨습니다. 더욱이 모두가 배불리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나눌수록 오히려 풍성해집니다. 복음의 논리는 계산의 논리가 아니라 신뢰의 논리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를 염려에서 신뢰로, 소유에서 나눔으로 초대하십니다. 무엇이 부족한지를 묻기에 앞서, 무엇을 내어놓을 수 있는지를 먼저 물어보아야 하겠습니다. 누군가는 우리의 조언보다 경청을 필요로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해결책보다 함께 있어 주는 마음을 필요로 할지도 모릅니다. 이번 한 주간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정신으로 살아갔으면 합니다.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속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모든 것은 나누도록 받은 선물임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작은 가난을 주님의 손에 맡길 때, 주님께서는 그것을 많은 이를 위한 양식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자비로운 마음이 깨어나고, 나누려고 손을 펼치며, 도움이 필요한 이를 외면하지 않고 하느님 나라의 식탁으로 초대하는 곳에서 빵의 기적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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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형제회 이기남 마르첼리노 마리아 수사님]
<사랑 안에 머무는 사람>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1요한 4,16)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이 한마디는 하느님께서 사랑을 가지고 계신다는 뜻을 넘어, 사랑 자체가 하느님의 존재 방식임을 드러내는 영원한 선언입니다. 성부께서는 성자에게 자신을 남김없이 내어주시고, 성자께서는 성부께 자신을 온전히 돌려드리시며, 성령께서는 그 사랑을 끝없이 흘려보내시는 생명의 숨결이 되십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생명은 서로를 향한 끝없는 내어줌이며, 그 내어줌 안에서 우주는 태어났고, 생명은 지금도 새롭게 창조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 안에 머문다는 것은 단순히 따뜻한 감정을 간직하거나 선한 행동을 몇 가지 실천하는 데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나를 삶의 중심에 두던 방식에서 벗어나, 관계 안에서 자신을 선물로 내어주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용서하는 순간에도, 기다려 주는 순간에도, 이해받기보다 먼저 이해하려 애쓰는 순간에도, 내 시간과 마음과 생명을 다른 이를 위해 기꺼이 내어주는 순간에도 우리는 이미 삼위일체 하느님의 생명 안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때 사랑은 더 이상 나의 능력이 아니라 내 안에 머무르시는 하느님의 생명이 되어 나를 통하여 흘러갑니다.
사도 요한은 이어서 우리에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1요한 4,11) 이 말씀은 의무를 부과하는 명령이 아니라 은총을 이어 가는 초대입니다. 우리는 사랑해야 하기 때문에 먼저 사랑받는 존재가 된 것이 아니라, 이미 사랑받았기 때문에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언제나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이며,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 안에 심어 놓으신 생명의 씨앗이 자라나는 열매입니다.
프란치스칸의 영성은 바로 이 사랑을 형제성이라고 부릅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모든 이를 형제와 자매라고 불렀던 이유는 모든 존재가 같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태어난 존재임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뿐 아니라 태양과 달과 물과 불과 흙까지도 형제자매로 노래한 까닭은 모든 피조물이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을 담고 있는 살아 있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형제를 사랑하는 일은 나의 선행을 증명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이 내 안을 지나 세상으로 흘러가도록 허락하는 일입니다.
도구적 존재로 산다는 것은 바로 이 사랑의 흐름을 막지 않는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가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응답하였듯이, 성 프란치스코가 자신의 삶을 평화의 도구로 내어드렸듯이, 우리 역시 사랑의 통로가 될 때 비로소 하느님은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우리 또한 하느님 안에 머무르게 됩니다. 사랑은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흘려보낼 때 더욱 충만해지는 생명의 강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신앙의 참된 깊이는 하느님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이 오늘 나를 통하여 얼마나 흘러가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내가 사랑받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사랑받았기에 사랑하는 사람이 될 때, 비교와 경쟁은 형제애로 바뀌고, 두려움은 신뢰로 바뀌며, 소유는 나눔으로 바뀌고, 나의 왕국은 하느님의 나라에 자리를 내어줍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은 더 이상 복음을 설명하는 말이 아니라, 세상 한가운데서 복음을 살아내는 육화된 말씀이 됩니다.
그 사랑 안에 머무는 사람은 이미 하느님의 나라 안에 머무는 사람입니다. 그의 존재는 침묵으로도 사랑을 전하고, 그의 눈빛은 용서를 말하며, 그의 기다림은 희망을 낳고, 그의 삶은 관계마다 그리스도를 다시 태어나게 합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 안에서 머물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다른 이에게 흘러가고, 또 다른 사랑을 낳으며, 마침내 모든 피조물을 하나의 형제성 안으로 끌어안는 영원한 생명의 순환이 됩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비로소 깨닫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하느님 안에 머무는 가장 아름다운 삶의 방식이며, 복음이 오늘도 육화되는 가장 구체적인 기적이라는 사실을 존재론적으로 알아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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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마태14,20ㄱ)
<'영적 양식과 나눔의 기적!'>
오늘 복음(마태14,13-21)은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군중의 배고픔을 채워 주십니다. 제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이 배불리 먹고도 남은 조각이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차는 '빵의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빵의 기적'은 '예수님의 손을 통해 일어난 기적'입니다.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마태14,19ㄴ-20ㄱ)
'영적 양식!'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에게도 필요한 양식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은 육을 위한 양식과 영혼을 위한 양식이 있는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양식은 '영적 양식'입니다. 하느님을 닮은 인간, 영혼을 지니고 있는 인간이기에 지금 우리에게 더 필요한 양식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이 영적 양식의 힘으로, 이 하느님의 사랑으로 우리는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다고 사도 바오로는 오늘 제2독서에서 선포합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8,35.37.39)
'나눔의 기적!'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14,16)
우리는 배불리 먹고도 또 무엇을 먹고 마실까를 고민합니다. 누군가는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사람들도 있는데 말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형제자매들입니다.
작년에 선종하신 프란치스코 교황이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세상의 가장 큰 위험은 온갖 극심한 소비주의와 더불어 개인주의적 불행입니다."(복음의 기쁨, 2항)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 안에 깊숙히 자리잡고 있는 '소비주의와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의 병폐를 지적하신 것입니다.
'나눔의 기적'이 필요한 때입니다.
너무 배불리 먹고 마시는 것을 좀 절제하고, 주변에 있는 가난한 형제자매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나눔의 기적을 만들어가야 할 때입니다.
끊임없이 영적 양식을 찾고, 굶주림에 허덕이는 형제자매들을 기억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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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자신의 부족함을 일상적으로 고백하는 사제들!>
예수님의 공생활이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습니다. 그분의 말씀과 인품, 능력에 매료된 수많은 군중이 식음조차 잊은 채 따라다니고 있습니다. 오늘 그분께서는 놀라운 기적을 행하십니다. 빵을 많게 하신 기적입니다.
그런데 기적의 장소는 예루살렘이나 카파르나움이 아니었습니다. ‘외딴곳’이었습니다. 한적한 장소, 즉 광야를 떠오르게 합니다. 시야가 확 트인 광활한 장소에 모인 사람들은 남자만 5천 명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설교 장소에는 여인들이 곱절은 많습니다. 거기다 따라온 아이들까지, 줄잡아 2만 명 남짓 되는 엄청난 규모의 군중입니다.
그 광경이 마치 출애굽 여정의 모세와 백성들의 모습과 유사해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제2의 모세로 등장하셔서 광야에 모인 군중에게 하느님께서 주신 빵을 나눠주십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아마도 새로운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는 체험을 했을 것입니다.
동시에 백성들은 그 은혜로운 자리에서 하느님 나라를 온몸으로 체험했을 것입니다. 그 누구도 제외되지 않고 배불리 먹었습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 백성들을 가르치시고, 동반하시고, 양육하시니, 이것이야말로 하느님 나라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빵을 많게 하는 기적에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일련의 행위들이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그분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십니다. 이 동작은 그분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계신다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아버지와 내적인 일치를 이루고 있다는 암시입니다.
유다인들은 매 식사 전에 하느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는데, 가장들은 기도를 드릴 때, 시선이 손에 들려 있는 빵으로 향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분은 감사 기도를 마치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신 후,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도록 하셨습니다.
그 한적한 광야에서 예수님께서는 굶주린 군중의 필요성에 적극적으로 부응하십니다. 함께 하고 있던 모든 사람들을 배불리 먹게 하십니다. 제대로 된 식탁도 없고, 서빙도 없는 초라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거룩한 식사, 하느님 백성과 메시아가 함께 하는 놀라운 식사였습니다.
저는 요즘 주방에서 일을 하면서, 밥 한 끼의 소중함을 온 몸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정성과 사랑이 잔뜩 들어간 한 끼 식사는 사람의 마음을 크게 감동시킵니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밥 한 상에 쌓인 피로와 상처, 외로움과 슬픔이 말끔히 치유될 수 있음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군중을 위해 친히 밥상을 차리셨습니다. 그 식탁에서는 그 누구도 제외되는 사람이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풍성하고 풍요롭습니다. 비록 소박한 식사지만, 하느님의 사랑이 듬뿍 담긴 은총의 식사입니다. 오늘 우리의 식사는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사도들이 가장 기본적으로 지니고 있어야 할 마음 자세 하나는 주님을 향한 절대적인 신뢰심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는 바처럼, 주님 앞에 불가능은 없습니다. 주님께 나아가서 그분께 간절히 청할 때, 절대로 빈손으로 돌아오는 법은 없습니다. 사제들은 우리 주님의 전지전능하심에 대한 강한 믿음의 소유자여야 합니다.
자신과 자신의 힘만 믿는 사도들에게는 죽었다 깨어나도 은총과 기적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자신은 언제나 부족한 존재임을 파악한 사제들, 주님의 권능을 굳게 믿는 사목자들, 나는 그저 나약한 한 피조물이요, 중재자라는 사실을 굳게 믿는 겸손한 봉사자의 삶에는 주님께서 베푸시는 놀라운 은총의 기적이 늘 함께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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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기적을 일으키는 힘, 감사와 사랑의 봉헌>
오늘 복음은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 기적을 매일 체험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정도로 대단한 기적은 아니지만 그래도 매일 강론을 쓸 수 있다는 것이 저에게는 기적입니다.
여자 형제가 없고 동네에서도 여자와 대화할 기회가 없었던 저는 대학에 들어가서도 여자와 대화하려면 입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와 만나려면 ‘오늘은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하나?’로 심히 고민하고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5천 명이 넘는 분들이 감사하게도 제 복음 묵상을 매일같이 들어주고 계십니다. 한 사람도 말로 만족시켜주지 못한 제가 수천 명의 신자분에게 양식을 제공할 수 있는 기적을 체험하고 있기에 부끄럽지만, 그 기적의 힘이 어디서 오는지 말씀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힘입니다.
11살에서 12살 정도로 보이는 창백한 소년이 꽃집으로 들어왔습니다. 예쁜 꽃들을 한참 바라보던 소년은 가게 주인에게 자신의 이름이 ‘토비’라고 밝힌 후 “앞으로 60년간 매년 엄마 생일에 선물할 꽃다발을 미리 주문하고 싶어요. 엄마 생일이 9월 22일이에요. 매년 이날 배달을 해 주시면 좋겠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엄마를 생각하는 토비의 마음이 너무 예쁘고 귀여웠던 여주인은 알겠다며 흔쾌히 대답했고 “30달러면 충분해.”라고 말한 뒤 토비를 돌려보냈습니다.
두 달 후 토비와의 약속을 기억한 여성은 토비 엄마의 생일인 9월 22일에 꽃다발을 안고 집 앞에 도착했습니다. 꽃을 든 여성에게 “누구세요?”라고 묻는 소년의 엄마에게 “이 꽃은 토비가 당신을 위해 주문한 꽃이에요. 생일 축하해요.”라며 꽃을 건넸습니다.
그 말을 듣자 화들짝 놀란 토비의 엄마는 “제 아들이 저를 위해 주문을 했다구요? 정말이에요?”라고 되물었습니다. 꽃집 여성은 “토비가 엄마에게 주고 싶다며 60년간 매년 꽃다발을 배달해달라고 부탁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토비의 엄마는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습니다.
”아들은 백혈병으로 투병 중 며칠 전 세상을 떠났어요. 전에 한번 생일날 꽃을 선물 받고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엄마라고 했더니 앞으로 매년 꽃을 선물해주겠다는 약속했었어요.”[참조: ‘(감동 실화)60년 동안 매년 엄마 생일에’, 유튜브 채널 ‘공감픽’]
토비가 가진 것은 ‘30달러와 감사와 사랑의 마음’이었습니다. 여기서 30달러는 빵 5개와 같습니다. 자신이 가진 전부를 의미합니다.
숫자 ‘5’는 인간이 가진 전부를 의미합니다. 주님께 드릴 수 있는 전부입니다. 인간에게 ‘5가지 감각’이 있다는 것에서 ‘인간의 몸’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는 ‘말씀과 성령’, 혹은 ‘감사와 사랑’의 마음이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이 우리에게 끌어내는 것은 ‘감사’이고, 성령의 은총이 우리에게 맺어주시는 열매는 ‘사랑’입니다.
토비가 어머니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꽃집 주인도 자비로운 분이라는 믿음이 생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에 감사할 줄 모른다면 그 작은 것이라고 느끼는 것을 주님께서 그 수천, 수만 배도 주실 수 있는 분임을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봉헌하지 못합니다. 그 작은 것을 지키느라 모든 에너지를 소비하게 됩니다. 그것을 바치며 더 많이 부풀려 달라는 청을 할 수 없게 됩니다.
토비가 60년간 어머니에게 꽃을 보낼 수 있게 된 것은 30달러와 어머니께 대한 감사와 사랑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기적입니다.
가톨릭신자로 유명 유튜버이며 작가인 ‘김새해 잔다르크’씨가 있습니다. 첫아기를 낳자마자 거의 회복될 수 없이 몸이 안 좋아져 병원에서 1년 이상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소변이 한 방울도 나오지 않게 된 것입니다. 신랑이 대소변을 받아내야 할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았고 나아질 기미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기를 생각해서도 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숨 쉴 때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를 속으로 계속 되뇐 것입니다. 감사할 것도, 사랑하기도 힘들지만, 하루에도 수천, 수만 번씩 되뇌다 보니 몸이 회복되는 기적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네 아이를 키우며 왕성한 활동도 병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겠다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자신들이 가진 것만으로는 5천 명이 넘는 사람을 먹일 수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여기에 예수님께서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더해주셨습니다.
기적을 예수님만 하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가진 것만 가지고도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더하면 누구나 기적을 할 수 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기적을 할 재료를 충분히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에 감사하고 그것으로 수많은 사람의 배를 불리겠다는 사랑의 마음만 첨가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예수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시며 기적의 주인공이 되라고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감사와 사랑의 마음으로 가진 것을 봉헌해 드리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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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마산교구 유청 안셀모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모든 사람을 챙기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는]” 까닭은 아직 배불리 먹지 못한, 그 자리에 없는 다른 이들까지 모아들이시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소외되는 사람 없이 모든 이를 당신 안으로 불러 모으시려는 예수님의 마음이 드러납니다.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마태 14,20). 성경에서 ‘열둘’이라는 숫자는 완전함, 전체를 나타내는 수입니다. 곧 인류 전체를 불러 모으시는 목자이신 주님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주님께서는 당신 혼자의 힘으로 기적을 행하시지 않고 제자들의 손을 통하여 하십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14,16). 제자들이 내어놓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초라하고 보잘것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작은 것도 주님의 손을 거치면 많은 이의 풍요로움으로 바뀝니다.
미사 때에도 이 모습은 되풀이됩니다. 우리가 봉헌하는 소소한 것들이 미사에서 한데 모여 빵과 포도주로서 바쳐지고, 주님께서는 성체성사를 통하여 당신 자신이라는 빵을 내주십니다. 이 빵은 나만을 위한 빵이 아닙니다. 모든 이를 위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의 빵입니다.
제자들이 내어놓았듯이 우리도 내어놓는 일을 이어서 해야 합니다. 그것이 누구에게는 봉헌금이 될 수 있고, 누구에게는 재능 기부가 될 수 있으며, 누구에게는 봉사가 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쓰는 시간이 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바치는 간절한 기도가 될 수도 있습니다. 다 같이 풍요로워지는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주님께 드리는 나의 정성이 다른 이들에게도 향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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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4,13-21: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1. 말씀의 잔치: 귀 기울임에서 시작되는 계약
오늘 제1독서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계약을 강조하며, 그 핵심은 “듣고 귀를 기울이는 것”(이사 55,3)이라 말한다. 하느님의 잔치는 단순한 음식의 잔치가 아니라, “말씀을 듣는 잔치”다. 이 말씀의 식탁이 없이는 성찬의 식탁도 있을 수 없다.(교리서 1346항 참조)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말한다. “성찬의 식탁에 오르기 전에 먼저 말씀의 식탁에서 배불리 먹으라. 말씀은 영혼을 밝히고, 성찬은 그 영혼을 하느님과 결합시킨다.”(In Matthaeum Homiliae, 50,3 의역) 말씀은 단지 지식이 아니라, 순종과 충실성의 행위로 응답될 때 계약이 성립한다. 우리가 말씀에 귀를 기울일 때, 이미 하느님과의 친교가 시작된다.
2. “외딴곳”에서 이루어진 기적: 새 모세의 표징
마태오는 기적이 “외딴곳에서” 일어났다고 기록한다. 이는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만나를 받은 사건(탈출 16장)을 상기시킨다. 예수님은 새 모세로서, 단순히 먹을 것을 주신 분이 아니라,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을 모으신 분이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기적을 성체성사의 예표로 해석하며 이렇게 말한다. “예수님께서 빵을 축성하시고 나누어 주신 것은, 그분 자신을 세상에 나누어 주시려는 표징이었다. 빵은 하나이지만, 많은 이들이 그 빵을 먹음으로써 한 몸이 된다.”(Sermo 234,1 의역)
3.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하느님의 동참의 사랑
복음은 예수님 행동의 동기를 한 단어로 표현한다.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이 단어는 단순한 연민이 아니라, 하느님 자신의 내장이 찢어지는 듯한 자비의 깊이를 의미한다. 즉, 하느님께서 인간의 고통 안으로 들어오신 것이다.
오리게네스는 이렇게 해석한다. “주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는 것은, 그분이 인간의 비참함을 당신 안에 받아들이셨다는 뜻이다. 그분은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셨다.”(Commentarium in Matthaeum, XI,1 의역) 하느님 사랑의 행위는 능력의 과시가 아니라, 동참(공감)의 행위이다. 기적은 하느님이 인간의 결핍 안으로 들어오실 때 일어난다.
4.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협력의 신비
기적의 출발점은 제자들의 작은 응답이었다.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17절)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협력을 통하여 당신의 구원을 드러내신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하느님은 인간의 협력을 통하여 당신의 섭리를 완성하신다. 그분은 인간의 손을 통해 당신의 자비를 나누신다.”(Summa Theologiae, I-II, q.113, a.7 ad 1 의역) 나눔의 행위가 곧 기적의 통로가 된다. ‘작은 것’이 ‘충만함’으로 변화되는 순간, 인간의 계산은 사라지고 하느님 은총의 질서가 드러난다.
5. “열두 광주리”: 하느님 나라의 충만함
남은 조각이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는 것은 단순한 수량이 아니라, 열두 제자, 곧 새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기적의 잉여는 교회의 풍요로움, 곧 성사와 말씀으로 세상 끝까지 퍼질 복음을 의미한다. 성 치프리아노는 성체성사의 의미를 이렇게 요약한다. “하나의 빵이 잘게 나뉘어도 그리스도는 나뉘지 않는다. 오히려 그분 안에서 우리는 하나로 결합된다.”(De Oratione Dominica, 23 의역)
6. 성체성사: 나눔의 사랑으로 완성되는 일치
예수님께서는 이제 승천하셨지만,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의 봉사 안에서 여전히 당신 백성과 함께 하신다. 사도적 봉사는 그분의 말씀과 성체를 나누어주는 사명이다. 교회는 “빵을 떼며”(사도 2,42) 형제적 나눔을 통해 그리스도의 현존을 드러낸다.
교회 헌장은 이렇게 가르친다. “성체성사는 교회 생활 전체의 원천이며 정점이다.”(11항 요약) 그리고 일치 교령은 이렇게 덧붙인다. “성찬례에서 신자들은 하느님과 서로 결합되어, 그리스도의 몸을 형성하는 일치를 이룬다.”(2항 요약)
7. 결론: “아무것도 우리를 하느님 사랑에서 떼어놓지 못한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제2독서(로마 8,35–39)에서 선언한다. “아무것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느님의 사랑에서 떼어놓지 못할 것입니다.” 이 사랑은 우리의 노력 이전에 우리를 품으신 하느님의 은총이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주님께 내어놓을 때, 그분의 사랑은 세상을 배불리 먹이는 성체의 기적으로 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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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밥이 밥에게>
마태오 14,13-21 (오천 명을 먹이시다)
그때에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배를 타시고 따로 외딴곳으로 물러가셨다. 그러나 여러 고을에서 그 소문을 듣고 군중이 육로로 그분을 따라나섰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 가운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습니다. 그러니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십시오.”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시니, 제자들이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것들을 이리 가져오너라.” 하시고는, 군중에게 풀밭에 자리를 잡으라고 지시하셨다. 그리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먹은 사람은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이었다.
<밥이 밥에게>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 14,16)
내가
먹이는
나의
벗이여
내가
밥이듯
그대가
밥이니
내가
먹이듯
그대가
먹이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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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서울 대교구 사제 모임이 콜롬비아 보고타에 있었습니다. 보고타 선교센터에서 사목하는 신부님이 지난 3년 동안의 사목 현황을 보고하였습니다. 주일 미사 참례 인원이 평균 4명에서 7명으로 많이 늘었다고 했습니다. 세례도 3년 동안 5명이나 받았다고 했습니다. 숫자로만 보면 큰 공동체는 아닙니다. 그러나 복음의 눈으로 보면 그곳에는 하느님 나라의 씨앗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고, 미사를 봉헌하고, 세례를 받고, 신앙 안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고타 선교센터는 주일 미사만 봉헌하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현지 본당의 미사를 도와주고, 남미에서 사목하는 선교 사제들의 쉼터가 되고, 순례자들을 맞이하는 열린 집이 되고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 서울 대교구의 ‘한마음 한 몸 운동 본부’와 연계해서 남미의 어려운 교구를 돕는 일도 하고 있었습니다. 한 번에 30,000불씩, 벌써 6번이나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주교님께서는 사목 현황 보고를 들으신 후에 앞으로도 선교센터는 계속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선교센터는 남미의 어려운 교구를 돕는 거점이 될 수 있고, 선교 사제들의 쉼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작은 공동체였지만, 그 안에는 복음의 큰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처럼 작아 보였지만, 주님께서 축복하시면 많은 사람을 살리는 은총의 자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예전에 적성 본당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본당 신자 중에서 화재로 집이 전소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 형제님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였고, 본당의 공소회장도 했었고, 가족 모두가 성당의 일에 헌신적으로 봉사했었습니다. 마침, 성당에 비어 있는 숙소가 있었습니다. 본당 교우들은 집을 새로 지을 때까지 그 가족이 성당 숙소에서 지낼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제게 청하였습니다. 저는 신자들의 말을 듣고 기쁜 마음으로 4개월 동안 본당의 빈 숙소에서 지낼 수 있도록 배려하였습니다. 형제님께서는 성당 숙소에 머무는 동안 관리인처럼 성당의 일을 돌보았습니다. 나중에 집을 새로 지어 입주한 후에는 감사헌금도 하였습니다. 돌아보면 그것은 단순히 숙소를 빌려준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려움에 부닥친 이웃에게 공동체가 마음을 열어 준 일이었습니다. 성당의 빈방 하나가 한 가정에는 위로가 되었고, 공동체에는 복음의 실천이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제자들은 당황하며 말합니다. “저희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제자들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습니다. 현실적으로 보면 오천 명을 먹이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많이 가진 뒤에 나누기를 바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없는 가운데서도 먼저 내어놓기를 바라셨습니다. 기적은 예수님께서 행하셨지만, 그 시작은 제자들이 가진 작은 것을 내어놓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기적이 아니라, 작은 나눔이 주님의 손에 들렸을 때 일어난 기적이었습니다. 우리는 때로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가진 것이 별로 없습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능력이 없습니다. 돈이 없습니다.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가 없는 것을 보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가진 작은 것을 보십니다. 작은 시간, 작은 정성, 작은 친절, 작은 기도, 작은 봉헌을 보십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보잘것없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일지 모르지만, 주님께서 축복하시면 그것은 많은 사람을 살리는 은총이 됩니다.
보고타 선교센터의 작은 공동체도 그렇습니다. 성당의 빈 숙소를 내어준 적성 본당의 교우들도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큰 숫자와 큰 능력만을 통해서 일하시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작은 믿음, 작은 나눔, 작은 사랑을 통해서도 하느님 나라를 보여 주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보여 주신 것은 무엇일까요? 믿지 않는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표징과 가르침이 마치 가상현실, 증강현실, 혼합현실처럼 보였을지 모릅니다. 현실의 세상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소경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중풍 병자가 치유되고, 물이 포도주가 되는 일은 인간의 계산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눈으로 보면서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표징과 가르침은 지금 이곳에서 생생하게 체험하는 현실이 됩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가상현실도 아니고, 증강현실도 아니며, 혼합현실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가 믿고 따를 때 우리 삶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 나라의 현실입니다. 누군가를 용서할 때, 하느님 나라는 현실이 됩니다. 어려운 이웃에게 손을 내밀 때, 하느님 나라는 현실이 됩니다. 작은 것을 기꺼이 나눌 때, 하느님 나라는 현실이 됩니다. 절망 속에서도 다시 일어설 때, 하느님 나라는 현실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먼 하늘나라의 이야기를 하신 것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살아야 할 하느님 나라를 보여 주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만남 이후 바오로 사도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세상의 기준으로 살지 않았습니다. 박해와 고난, 감옥과 매질, 배고픔과 위험 속에서도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제2독서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이 고백은 단순한 위로의 말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를 현실로 체험한 사람의 신앙 고백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이 말씀은 부담을 주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를 기적의 동반자로 초대하시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을 모두 바꾸기를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우리가 가진 작은 것을 주님께 내어놓기를 바라십니다. 우리의 작은 기도, 작은 나눔, 작은 친절, 작은 용서, 작은 봉헌이 주님의 손에 들릴 때, 그것은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희망이 되고 생명이 됩니다. 보고타 선교센터의 작은 공동체처럼, 적성 본당 교우들의 따뜻한 배려처럼, 오늘 복음의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처럼, 우리도 주님께 우리의 작은 것을 내어놓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그 작은 것을 축복하시어 많은 사람을 살리는 은총으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주님을 믿고, 주님께 내어놓고, 이웃과 나누는 바로 그 자리에서 하느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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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의 손에 얹어 놓으면>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사랑으로 사랑에 목마른 사람의 허기를 채울 수 있는 은총을 간구합니다.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는데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이었다. 물론 예수님의 손에 들린 빵과 물고기는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것이다.
자기의 것을 아낌없이 내놓고 예수님을 통해 이웃과 나누었을 때 큰 무리의 굶주림은 간단히 해결되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보잘것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해도 그것이 하나의 밀알이 될 수 있다. 따라서 결과에 연연해하지 않고 나누면 그다음은 주님의 몫이다. 주님께서 함께하시면 풍성해지고 부족함이 없다. 우리의 인간적인 생각이 풍성한 축복의 장애물이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 바른길로 나를 끌어 주시니 당신의 이름 때문이어라...”(시편23,1-3). 우리의 주님, 예수님은 푸른 풀밭에 쉬게 하시고 생기를 돋우어 주시는 착한 목자이시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며 의탁하면 육체적으로뿐 아니라 영적으로 배고프지 않게 된다. 우리 눈에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부족한 음식밖에 보이지 않지만, 주님의 능력은 어디에서든 풍성하다. 나의 모두를 주님의 손에 올려놓아야 한다. 먼저 올려놓아야 또 그렇게 할 힘을 얻게 된다.
지금도 사람들이 ‘나눔의 신비’를 깨닫고 그것을 실천하기만 한다면 세상의 기아 문제는 해결된다고 한다. 지금이라도 생각을 바꾸어 가진 것을 나누기만 하면 많은 문제를 하루아침에 해결할 수 있다.
해결책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쓰지 않아서 문제로 남아 있는 것이 많다. 육체적인 굶주림보다 더 큰 목마름은 사랑이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14,16).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아무 조건 없이 베풀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길 희망한다. 교회의 얼굴은 사랑이다. 사랑하면 사랑이 된다. 사랑하면 사랑이신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
“요것밖에” 안 된다고 절망하는 것이 인간의 연약함이며 한계이다. 그러나 “가진 것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이것이라도 쓰십시오.”하고 내놓으면 모두를 내놓았으니 그만큼 풍성해진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듯이 우리의 나눔도 큰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나누면 나눌수록 풍요로워지고 버리면 버릴수록 자유로워진다.”(성 빈첸시오).는 진리를 체험했으면 좋겠다. 예수님은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었고,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오늘도 우리의 손을 통해서 그 빵을 나누어 주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 능력의 손길이 되길 바란다. 생각해 보자! “아무것도 줄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도 없고, 아무 도움도 받을 필요가 없이 넉넉한 사람도 없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고 더군다나 하느님의 은혜가 없이는 존재조차 없다.
쌓아놓으면 쌓아놓을수록 줄 것이 없다. "똥도 쌓아놓으면 냄새가 나지만 뿌려지면 거름이 된다." 무엇이든 내려놓고 예수님의 손에 얹어 놓아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길 기도한다.
“주님, 언제나 주님의 사랑으로 저희를 보호하시어 저희가 영원한 구원을 받게 하소서.” 아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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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신학생 때, 영적 지도 신부님의 권유로 읽게 된 ‘사하라의 불꽃’이라는 책이 생각납니다. 2022년에 성인품에 오르신 샤를 드 푸코 성인의 묵상과 편지가 담겨있는 영적 수기입니다. 이를 읽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성인의 영성은 대단했지만, 그분의 삶은 세상의 눈으로는 분명한 실패가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1901년부터 1916년까지 15년 동안 알제리의 타만라세트 산지에 틀어박혀 원주민들을 개종하려고 했습니다. 과연 몇 명이나 개종시켰을까요? 성인의 영성이라면 거의 모든 원주민이 개종했을 것 같지 않습니까?
성인의 편지에서 “타만라세트에서 미사를 올린 지 10년이 넘었습니다. 그러나 단 한 명도 개종하지 않았습니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성인의 모든 노력과 달리 효과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복음 전파에 완전한 실패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1916년 12월 1일, 15세 소년이 쏜 총을 맞아 58세의 나이로 순교하셨습니다. 허무해 보이는 삶이 아닙니까? 하지만 성인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죽는 순간까지도 똑바로 보셨습니다. 성인의 글을 통해 알려진 그의 정신은 많은 이의 마음을 움직였고, 선교 활동이 더 활발히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현재의 실패도 괜찮습니다. 현재의 실패가 곧 미래의 실패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실패로 하느님을 버리면 안 됩니다. 성인처럼 어떤 순간에도 하느님과 함께하기 위해 하느님만을 바라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더 큰 영광의 삶을 선물로 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유명한 오병이어의 기적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날이 저물고 장소는 외딴곳입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을 보내어 스스로 먹을 것을 사게 하자.”(마태 15,15 참조)고 현실적으로 합리적인 제안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 14,16)라고 명하십니다. 이는 제자들이 가진 한계를 깨트리고, 하느님의 일에 동참하라는 초대입니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굳은 믿음의 마음으로 다가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이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 부족함을 탓하지 않으시고 “그것들을 이리 가져오너라.”(마태 14,18)라고 하시면서, 우리의 보잘것없는 능력이나 자원도 하느님의 손에 봉헌될 때, 기적의 씨앗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제자들이 가져온 것들은 분명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인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는 데 실패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바라보고 가져왔기에 남은 조각도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찰 정도로 풍성함을 가져왔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현재의 실패도 괜찮습니다. 주님만을 바라보고,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은 주님의 은총과 사랑 안에서 진정한 승리를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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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오천 명을 먹이시다.>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거기에서 배를 타시고 따로 외딴곳으로 물러가셨다. 그러나 여러 고을에서 그 소문을 듣고 군중이 육로로 그분을 따라나섰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 가운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습니다. 그러니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십시오.”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시니, 제자들이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것들을 이리 가져오너라.” 하시고는, 군중에게 풀밭에 자리를 잡으라고 지시하셨다. 그리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먹은 사람은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이었다.(마태 14,13-21)
1) 이 이야기의 앞부분만 보면,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가엾게 여기셔서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 또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시면서도(마르 6,34), 사람들의 배고픔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으셨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신 것은 아닐까?” 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의 배고픔을 걱정하는 말을 제자들이 먼저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사정을 모두 알고 계시고, 누가 말씀드리지 않아도 먼저 신경 쓰시고, 당신이 하실 일을 계획하신다고(요한 6,6) 믿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일곱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일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뭍에 내려서 보니, 숯불이 있고 그 위에 물고기가 놓여 있고 빵도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 가운데에는 ‘누구십니까?’ 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다."(요한 21,9.12-13)
일곱 제자는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려고 고생했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요한 21,5) 그들은 몹시 허기지고 지친 상태였을 것입니다. 이야기에 언급되어 있는 숯불, 물고기, 빵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서 직접 준비하신 것입니다.
다른 곳에서 미리 준비해서 가지고 오신 것인지, 작은 기적을 행하신 것인지, 그것은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라고 말씀하시면서, 빵과 고기를 직접 그들에게 주시는 모습은, 스승과 제자들의 모습이 아니라 엄마와 어린 자녀들의 모습처럼 보입니다. <착한 목자와 어린양들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예수님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배고픔을 알고 계셨고,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서 미리 계획하신 것이 있었을 것이라고 믿을 수 있습니다. 빵의 기적 이야기’에서 제자들이 사람들의 배고픔을 걱정한 것은 예수님을 못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계획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사람들을 돌려보내서 먹을거리를 스스로 사게 하자고 건의한 것은, 그들이 생각하기에 그것이 최선의 해결책이었기 때문입니다.
2)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라는 말씀은, “내가 먹을 것을 마련해 줄 테니까 그들을 보내지 않아도 된다.”로 해석되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는, “내가 마련한 것을 받아서 너희가 그들에게 나누어 주어라.”입니다.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는, 사실상 “저희는 가진 것이 없습니다.”입니다. 사람들의 수가 오천 명이 넘기 때문에,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아무것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원래 기적이란,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일’입니다. 그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없었어도,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일으키셨을 것입니다. 어떤 아이가 빵과 물고기를 기꺼이 내놓았고, 그 ‘나눔’이 기적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해석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일은 기적의 출발점이 아니라, 기적에 대한 ‘응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3) 20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라는 말은,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말입니다. 그곳에는 여러 곳에서 온, 아주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는데, 모든 사람이 똑같이 함께 먹었고, 함께 ‘배부름’을 체험했습니다. 배부름’이라는 말에는 ‘영적인 행복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일은 분명히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체험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빵의 기적’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주신 것은 ‘한 끼 식사’만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미리 체험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그 나라를 향해 걸어갈 수 있는 힘과 희망을 준 일입니다. 바로 그것이 ‘빵의 기적’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빵의 기적’은 오늘날에도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를 통해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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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양선규 요셉 신부님]
<“예수님, 배고파 죽겠어요”>
저희 학교 학생들이 저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 중 하나가 ‘신부님, 배고파 죽겠어요’라는 말입니다. ‘죽겠어요’라는 절실함의 표현을 꼭 붙이면서 ‘맛있는 거 사 주세요’라는 표현을 온갖 불쌍한 표정으로 드러냅니다. 학생들과 함께 떡볶이부터 시작해서 치킨에 삼겹살에, 뭘 좀 먹으러 가면 며칠 굶은 사람들처럼 남김없이 아주 깨끗하게 먹어 치웁니다.
음식을 매개체로 하여 한 번 더 웃고 떠드는 그런 만남 속에서 조금씩 참 인간으로 성장해가는 우리 학생들을 만납니다. 사랑이 싹트고 행복이 자라나는 공동체로 성장하면서 하느님 나라를 이루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떡볶이의 기적이요 삼겹살의 기적일 겁니다.
예수님께선 ‘하느님 나라가 당신 안에 현존한다는 것을 드러내시고자’ 기적을 행하십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 547항) 즉 우리가 기적을 체험한다는 것은 우리 안에 하느님 나라가 함께 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끝없는 욕구를 가진 존재이기에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선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행복을 맛볼 수 있도록, 그 갈망을 해결할 수 있도록 기적을 통해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십니다.
오늘 제1독서의 배경이 되는 유배 생활 중 이스라엘 민족은 육체적·정신적 굶주린 삶에 시달립니다. 비록 자신들의 잘못에 대한 결과로 굶주린 생활을 하게 된 이스라엘 민족일지라도, 당신 백성의 고통을 못 보시는 하느님께선 영원한 생명이 자리하고 있는 당신 사랑의 식탁으로 그들을 초대하십니다.
“너희는 나에게 오너라. 너희가 살리라.” 이러한 이사야 예언자의 선포는 성체성사를 통해 완성되어 풍부한 사랑이 우리 인간들에게 전달되어 지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공생활 가운데에서도 가장 핵심에 위치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가 선포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당신 양들의 병도 고쳐주시면서 굶주린 그들에게 먹을 양식도 선사하십니다. 바로 이 연민의 마음이 예수님 기적의 출발점입니다.
예수님께서 아파하는 당신의 양들에게서 느끼는 이 마음은 굶주린 이들이 배불리 먹게 되는, 즉 무언가 부족함에 시달린 이들이 완전함을 맛보게 되는 기적으로 드러내게 됩니다.
예수님께선 하느님께서 구약의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셨듯이 직접 만드신 “풀밭에 우리가 자리하도록” 초대하십니다. 우리는 이런 예수님의 초대에 응하면서 그분의 사랑으로 충만해져 영적 궁핍을 해결해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우린 그분의 사랑 없이는 참된 행복을 맛볼 수 없는 늘 부족함에 시달리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신자들과 함께 봉헌하는 미사가 중단되자, 신자들이 가장 많이 했던 말이 ‘성체를 너무나도 모시고 싶다’는 말이었을 겁니다.
우리는 이미 성체가 내 삶에 없을 때 이 삶이 얼마나 초라해지는지 영적 궁핍에 시달려봤습니다. 그만큼 성체의 소중함이 더욱더 절실하게 다가오는 오늘날이기에 더더욱 예수님께 외쳐봅니다.
“예수님, 배고파 죽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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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안두현 미카엘 신부님]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오 14,16)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라온 이들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 그래서 그들 가운데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십니다. 당신을 따라 육로로 달려온 이들을 가엾이 보시고 그들에게 당신의 것을 아낌없이 나누어 주신 것입니다.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군중을 돌려보내 스스로 먹을것을 사게 해야 한다고 예수님께 말씀드립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지금까지 당신의 것을 아낌없이 나누어 주신 예수님께서는 또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자 하십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당신의 것만이 아니라 당신의 것에 제자들의 것을 더해 나누어 주고자 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아주 적은 음식을 드립니다.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제자들은 그들과 예수님께서 드시기에도 부족한 음식을 예수님께 보여 드리고 내어 드립니다. 제자들이 가진 이 작은 것에 예수님의 권능이 더해져 수많은 이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게 됩니다.
당신을 따라온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는 복음의 이 표현은 단순히 그들을 불쌍하게 보셨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상황에 함께하신다는 것, 그들과 같은 입장에 서 계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라온 이들의 힘듦과 배고픔에 함께 동참하셨고,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의 것을 아낌없이 내어 주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런 나눔에 당신의 제자들을 초대하십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이 초대의 말씀에 따라서 제자들은 자기들이 가진 작은 것을 예수님께 내어 드렸습니다. 이 내어 드림은 예수님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내어 준 것입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의 초대에 응답하여 군중의 상황에 동참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초대와 그 초대에 대한 제자들의 응답으로 수 많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가엾은 마음으로 군중과 함께하신 예수님과 그런 예수님의 초대에 응답한 제자들의 나눔을 통해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또 다시 초대의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우리와 함께하시는 예수님의 초대에 응답하여 우리도 우리가 가진 작은 것을 나누어 줄 수 있는 한 주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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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더위가 한창입니다. 뜨거운 사랑에 우리의 사랑도 익어갔으면 좋겠습니다.
박해석 시인의 <기쁜 마음으로>를 들어봅니다.
"너희 살을 떡처럼
떼어 달라고 하지 않으마
너희 피를 한잔 포도주처럼 찰찰 넘치게
따르어 달라고 하지 않으마
내가 바라는 것은
너희가 앉은 바로 그 자리에서
조그만 틈을 벌려 주는 것
조금씩 움직여
작은 곁을 내어주는 것
기쁜 마음으로"
오늘 우리는 그야말로 ‘감격적인 사랑 이야기’ 세 편을 들었습니다. 제1독서는 하느님의 놀라운 사랑을 이야기 합니다. ‘돈 없이, 값없이 술과 젖을 사라 하십니다. 너희가 살리라 하십니다. 당신의 변치 않는 자애를 드러내십니다.’(이사 55,1-3 참조)
이 얼마나 놀라운 감격인지요! 제2독서는 결코 ‘떼어놓을 수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야기’ 합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란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굶주림입니까? ~ 그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는 없습니다.”(로마 8,35-39)
그 어떤 것도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는 아버지의 놀라운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그 사랑이 어떤 것인지는 제자들과 예수님의 태도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제자들은 모여든 많은 군중을 마치 좀 쉬고자 하는 것을 방해하는 훼방꾼 정도로 여기며, ‘여기는 외딴 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으니 군중을 돌려보내라’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측은한 마음(마태 14,14)에 단장의 아픔을 느끼셨습니다.
그들과 분리되지 않는 마음으로 연민을 지니신 까닭입니다. 제자들은 저녁 때가 되자, 수고하려 하지도 손해 보려 하지도 않으려 “군중을 헤쳐 제각기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라.”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낼 것 없이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 14,16)고 하십니다.
그들의 배고픔이 당신의 배고픔이요, 그들의 아픔이 당신의 아픔인 까닭입니다. 제자들은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라고 있는 것마저도 없는 것으로 여기며 무가치하고 하찮게 여기지만,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그것을 값지고 소중하게 여기시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를 드리십니다.”(마태 14,19)
제자들은 예수님을 신뢰하지 못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신뢰하고 의탁하신 까닭입니다.
그리고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는(마태 14,19)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 하느님의 권능을 실현하십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고 남은 조각은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마태 14,20).
그리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건너오게 되었습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감사와 의탁을 통하여, 아버지의 큰 사랑을 우리에게 드러내셨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몸을 떼어주십니다. 차고 넘치는 이 놀라운 사랑으로, 당신 자신을 건너 주십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이처럼, 그 큰 사랑과 자애, 그 큰 호의를 입고 있으면서도, 이 놀라운 사실에 감격의 노래를 부르지 않습니다.
왜 이처럼 우리는 무감동하고 무감각할까요? 오늘도 여전히 벌어지고 있는 하느님의 사랑에, 왜 놀라워하지도 감격하지도 않을까요?
그렇습니다. 진정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바라볼 줄 아는 눈’이요, 그 ‘사랑을 반겨 맞아드리는 마음’이 할 수 있습니다. 이 ‘눈’이야말로 참으로 ‘지복의 눈’이요, 그야말로, 지금 여기 실재하여 있는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 하느님 사랑과 자비를 보는 ‘관상의 눈’입니다.
진정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살짝 엿보기만 해도 얼컥 울음이 솟을 것입니다. 그 ‘사랑을 반겨 맞아드리는 마음’은 벅차오를 것입니다.
<시편> 작가처럼 “내가 있다는 이 놀라움, 그 하신 일에 놀라움, 이 모든 신비들, 그저 당신께 감사하나이다.”(시 139,14) 하고 탄성을 지를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 사랑을 보게 하소서.
그 놀라운 사랑을 찬미하며, 그 사랑의 충실한 협조자가 되게 하소서.
제 행실이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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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 14,16)
주님!
제 몸과 생명을 제 것인 양, 독차지 하지 말게 하소서.
먹지 않고서는 못 살면서도 자신은 먹히지 않으려는 자애심과 이기심을 내려놓게 하소서.
제 몸이 찢어지고 나누어지고 쪼개지고 부수어져 타인 안에서 사라지게 하소서.
당신께서 그러하시듯, 제 자신을 양식으로 내어주게 하소서.
당신께서 저를 향하여 계시듯, 제가 늘 타인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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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신앙생활을 해오면서 느끼는 점은 예수님의 취향이나 행동은 확실히 당대의 사람에게나 오늘 우리에게도 남다르셨다고 생각됩니다. 달리 말하자면 예수님은 분명히 별난 분이셨으며 그것이 참으로 주님의 매력으로 다가옵니다. 우리 모두에게 위로가 되고 위안이 되는 사실은 그분은 특별히 배고프고 헐벗은 가난한 자들, 소외된 사람들과 장애인들을 좋아하시고 그들과 늘 함께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삶에 지쳐 힘겨워하며 배고픈 사람들을 보실 때마다 그의 약점인 측은지심이 발동하기 시작하셔서 뭔가를 하지 않고서는 참지 못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배를 타시고 따로 외딴곳으로 물러가신”(14, 13) 이유는 휴가를 떠나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사촌 형제이며 동반자였던 세례자 요한의 죽음 소식을 들으셨기에 외딴곳으로 물러가신 것입니다. 휴가를 위한 물러남이 아니라 피신을 위해 그리고 다시금 자신의 사도직 활동을 새롭게 재조명하기 위해 물러났다고 하는 편이 더 맞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주님의 마음은 찹찹하고 무거웠으리라 봅니다. 그런데 이런 예수님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군중들이 당신께 몰려드는 것을 보시고, 당신을 잠시 잊은 채 그들의 어려움을 먼저 헤아리시는 주님의 마음 씀씀이 한편 감사하면서도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저 역시도 그런 군중의 한 사람이 아닌가 싶어서 말입니다. 주님은 온전히 자신을 돌보기보다 측은한 군중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셨지만(=이타심), 군중은 자신들의 필요와 욕구만을 챙기려는(=이기심) 듯 대조적인 모습으로 제겐 다가옵니다. 주님께서 잠시 쉬시도록 배려해 드리지 못하고 늘 우리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이해해 주고 도와달라는 우리의 모습을 보는 듯싶어서 한편 예수님이 안쓰럽기도 합니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저녁때까지 병자들을 치유해 주신 예수님을 향하여 “여기는 외딴 곳이고 시간도 이미 늦었으니, 군중을 빨리 돌려보내시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십시오.”(14,15)라고 말하는 제자의 심정이 딱 저의 마음인 듯싶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14, 16)고 말씀하신 바를 이렇게 이해합니다. ‘가난한 자들아, 너희가 알아서 먹을 곳을 찾아라!’, 가 아니라 ‘나의 제자들아, 너희가 나서서 가난한 자들과 밑바닥 인생들을 찾아 베풀어라,’ 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가난한 자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도록 방치하는 게 교회의 처신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해결할 수 없을 때, 교회가 먼저 그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모색하고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리라 봅니다. 너희가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어라! 사랑은 상대방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목마른 자에게는 마실 물을 주는 것이며, 배고픈 자에게는 먹을 빵을 주는 것이며, 위로가 필요한 자에게는 위로를 베푸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는 것입니다. 더도 말고 빵 한 덩어리, 물 한 잔의 사랑이면 족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하고 권고하자 제자들은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14, 17)하고 대답했습니다. 제자들은 아직도 스승이신 예수님께선 하고자 하시면 불가능이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믿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결코 작은 것이 아니고 충분했습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의 대답에는 지극히 인간적인 계산법 아래 이미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렸다고 느낍니다. 그러기에 군중들을 예수님께서 돌려보내시도록 권고했던 것이겠지요. 늘 제자들은 함께 계신 주님을 망각하거나 자신들의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실수를 범합니다. 이는 근본적으로 주님께 대한 믿음의 부족하거나 없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자신들의 방법을 스승에게 제안하기보다 오히려 ‘주님, 저희가 어떻게 할까요? 그 방법을 가르쳐 주시고 도와주십시오.’라고 겸손되이 청하는 마음이 더 필요했던 상황이 아니었을까 생각하면서, 이는 단지 제자들만의 문제가 아닌 우리에게도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빵의 기적은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요한복음은 어느 아이가 가진 턱없이 부족할 것 같은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를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인간의 계산으로 너무 하찮고 보잘것없이 적은 양이었지만, 그것이 주님의 손에 넘겨지고, 손을 들어 아빠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의 축복을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이젠 더 이상 부족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엄청난 양으로 변화되어 있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14, 19) 여기서 빵을 손에 들고 축복하신 다음에 빵을 떼어 나누어주셨다는 말씀은 성체성사를 연상하게 합니다. 엠마오의 제자들도 빵을 떼어 나누어주실 때 주님을 알아보게 되었듯이 빵을 떼어 나눔은 단순히 나눔이 아니라 삶에 지치고 상처로 찢어진 영혼들의 아픔에 예수님 친히 자기의 몸으로 함께 하심이며, 빵 뗌을 통해서 주님과 상처받은 우리가 모두 하나됨을 의미하는 중요한 신앙과 사랑의 표지이기도 합니다. (=혹시 여러분이 저와 함께 미사를 봉헌한 적이 있다면 되새겨 보십시오. 저는 영성체 전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라는 부분에서 빵을 떼어 분리했다가 다시 합치는 제스처를 하는 까닭이 저의 신앙에 대한 확신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는 단지 성찬의 식탁에서만이 아니라 일상의 삶에서 주님의 표양, 곧 십자가상의 죽음으로 이루어진 구원과 생명을 늘 세상의 찢기고 상처받은 영혼들, 군중들과 함께 나누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기적은 곧 사랑의 나눔과 그 사랑으로 찢기고 상처받아 문드러진 영혼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는 데 있습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는 당부는 곧 너희가 나서서 찢기고 상처받은 영혼들과 가난한 인생들을 찾아서 먹을 것을 주어라!, 는 말씀으로 오늘 제겐 들려옵니다. 나이지리아의 어느 부족장의 말대로 “부자나라에 사는 당신들이 당신들의 부를 나누어 주지 않으면 우리가 당신들에게 우리의 가난을 나누어 줄 것입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교회와 교회, 교구와 교구 간의 나눔에도 적용된다고 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먹고 난 후 제자들에게 남은 조각을 모아들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남은 것일망정 모아서 아직도 거저 얻어먹지 못하고 거저 얻어 마시지 못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기 위함이지 축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고 봅니다.
“아빠 하느님, 사도 바오로의 고백처럼 죽음도, 삶도, 절망도 아픔도, 그 밖의 어떤 것도 피조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우리가 늘 나눔과 일치의 성사인 성찬례를 거행할 때마다 성찬례 안에서만이 아니라 성찬례 밖에서 그 사랑을 나눔으로 세상을 구원하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사랑밖에 없음을 증거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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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것들을 이리 가져오너라."(마태 14,18)
이것뿐이지만 주님께
모두 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부족함을
탓하지 않으시고, 그 부족한 것을
당신께 가져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 가져가는 순간,
부족함은 은총이 되고,
상처는 사랑이 되고,
빵은 생명의 양식이 됩니다.
그분의 손에 맡겨질 때,
우리의 일상은 기적이 됩니다.
우리의 소유는 언젠가는 사라지지만,
주님을 향한 나눔은 생명을 낳습니다.
주님께서는 봉헌하는 마음을
바라십니다.
주님께 맡기는 순간
우리의 평범한 일상은
무한한 생명의 길이 됩니다.
지금 이 순간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지금의 나를 있는 그대로
봉헌하는 길입니다.
내어놓을 수 있는
마음을 보십니다.
우리의 부족함이
하느님의 손에 맡겨질 때,
그것은 더 이상 결핍이 아니라
축복이 됩니다.
주님을 향한 봉헌은
소유의 끝이 아니라,
기적의 진정한 시작입니다.
가장 진실하고 간절하게
내어놓은 사람이
써 내려가는
봉헌의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작은 사랑을
하느님께 내어놓는 순간,
그 사랑은 한 사람을 살리는
하늘의 양식이 됩니다.
사랑이라는 빵으로
다시 배부르게 되는
사랑의 봉헌입니다.
우리 모두를 살리는
성체성사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