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604
5월29일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연중 제8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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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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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BTSRWp80pPI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김성 세례자요한 (전례위원장)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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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천주교는 사교(邪敎)가 아니라 진정한 길입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4위 동료 순교자 기념일에 다블뤼 주교님께서 쓰신 복자(福者) 윤지충 바오로(1759~1797) 대한 약전을 읽었습니다.
윤지충 바오로는 현재 충남 금산군에 위치해 있는 진산에서 태어났습니다. 진산은 대전에서 그리 멀지 않은데, 그곳에 가면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를 기념하는 진산 성지(대전 교구 관할)가 잘 조성되어 있습니다.
윤지충 바오로의 가문은 여러 정관계 인사들을 배출한 명가였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예의 바르고 총명했으며 학문에 조예가 깊었습니다. 25세 되던 1783년 과거에 응시해서 진사(進士)를 취득했습니다. 한 마디로 그는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였습니다. 물론 가문의 어른들과 주변 사람들의 기대도 컸습니다.
그런 윤지충 바오로가 1784년 겨울 경성에 머물렀을 때, 김범우 토마스의 집에 놀러 갔다가 운명 같은 책을 두 권 발견합니다. 그 유명한 ‘천주실의’와 ‘칠극’입니다.
순식간에 두 권의 책을 읽은 윤지충 바오로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눈을 뜨게 됩니다. 두 권의 책을 사본으로 만들어 계속 탐독하였습니다. 그의 내면에서 시작된 하느님과 진리에 대한 갈증은 그를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게 했습니다. 김범우 토마스의 집에 있는 여러 가톨릭 관련 서적들을 읽은 그는 교회에서 요구하는 신자로서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기 시작했습니다.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닌데, 좋은 교리교사로부터 예비자 교리 수업을 받은 것도 아닌데, 가톨릭 관련 서적을 스스로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고 실천하고, 또 주변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선포한 윤지충 바오로의 신앙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하느님과 진리,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그 자발성, 그 적극성 앞에 감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윤지충 바오로의 하느님과 진리, 새로운 세계와의 달콤했던 순간들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조정은 조상제사 문제, 신주 문제를 이유로 가톨릭교회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를 시작했습니다. 체포영장이 발부되자 그는 즉시 관아로 자진 출두했습니다.
진산 군수와 윤지충 바오로 사이에 이루어진 심문 기록이 아직도 정확히 남아있습니다. 둘 사이에 오고간 대화를 통해 그가 얼마나 탁월한 신앙인이었으며, 그의 믿음이 얼마나 확고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군수: “소문이 매우 심각한데, 근거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네가 사교(邪敎)에 빠져 있다는 게 사실이냐?”
윤지충 바오로 “저는 전혀 사교에 빠져 있지 않습니다. 다만 제가 천주의 종교를 따르고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군수: “그것이 사교가 아니냐?”
윤지충 바오로: “아닙니다. 그것은 진정한 길입니다.”
너무나 안타까웠던 진산 군수는 어떻게 해서라도 윤지충 바오로를 잘 설득해서 배교시키려고 안간힘을 다 했습니다. 그러나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깨달은 군수는 탄식을 터트리며 그를 전주 감영으로 이송시켰습니다. 전주 감영의 감사가 또 다시 묻습니다.
감사: “왜 사교에 빠져 방황하느냐?”
윤지충 바오로: “저는 조금도 사교에 빠진 것이 아닙니다.”
감사: “그렇다면 천주의 종교가 사교가 아니더냐?”
윤지충 바오로: “하느님은 하늘과 땅, 천사와 사람, 그리고 모든 피조물의 창조자요 위대한 아버지이신데, 그분을 섬기는 것을 사교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감사: “너는 죽게 되더라도 이 종교를 버리지 못하겠느냐?”
윤지충 바오로: “만약 제가 높으신 아버지를 부인하게 된다면, 살아서든 죽어서든 어디로 제가 갈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에 대한 신앙 고백 때문에, 견고한 가톨릭 신앙 때문에, 임금 앞에는 반역자, 부모 앞에는 불효자, 친구들 앞에서는 ‘미친놈’이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윤지충 바오로는 단 한 발자국도 뒤로 물러서지 않는 당당함과 의연함을 드러냈습니다.
윤지충 바오로에 대한 사형은 신속히 이루어졌습니다. 30대의 곤장을 맞고 난 그에게는 효수형(죄인의 목을 베어 높은 곳에 매달아 놓는 형벌)이 언도되었습니다. 1791년 12월 8일 그는 33세의 나이로 순교의 영예를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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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7aaleYJ-no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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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려는 마음: 우리를 지옥으로 만드는 마음>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요한 12,24-25)
찬미 예수님! 오늘은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신앙의 가장 당혹스러운 역설을 선포하십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면 잃게 되고, 자기 목숨을 '미워'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너 자신을 사랑하라, 힐링하라, 아프지 마라"라고 가르치는데, 주님은 정반대로 우리 자신을 미워하고 땅에 떨어져 죽는 밀알이 되라고 명령하십니다.
우리는 흔히 영원한 생명을 죽어서 천국 가는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은 곧 지금 여기서 누리는 완벽한 '행복'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뼈아픈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도대체 왜 내 목숨을 미워하고 죽이러 가는데 행복해진단 말입니까? 살려고 바둥거리는 것이 행복입니까, 아니면 대의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것이 행복입니까?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인간을 지옥처럼 불행하게 만드는 유일한 원인은 돈이 없는 것도, 병이 드는 것도 아닙니다. 바로 '두려움'입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오직 나를 보호하려는 얄팍한 '자아'에게서만 뿜어져 나옵니다.
어떤 숭고한 목적이나 하느님을 위해 내 목숨(자아)을 기꺼이 내어놓기로 결심하는 순간, 나를 보호하려던 자아는 완전히 힘을 잃게 되고, 자아가 죽었기에 두려움이라는 감정도 아예 발동하지 못하게 됩니다. 두려움이 소멸한 바로 그 빈자리에 쏟아져 들어오는 우주적인 평화, 그것이 바로 순교자들이 형장으로 가면서도 누렸던 충만한 기쁨의 정체입니다.
이 기막힌 심리적, 영적 원리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면을 영화 '명량' (2014)에서 이순신 장군의 모습을 통해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330척의 거대한 왜군 함대가 몰려오고 있었습니다. 조선 수군에게 남은 배는 고작 12척뿐이었습니다. 병사들은 극도의 공포에 질려 도망치기 바빴고, 장수들마저 싸움을 포기하고 배를 돌려 달아나려 했습니다. 압도적인 죽음의 위협 앞에서 모두가 '자기 목숨을 사랑하여'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벌벌 떨었습니다. 그때 대장선에 홀로 선 이순신 장군은 장수들을 불러 모아 이렇게 엄명합니다. "병법에 이르기를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고 하였다!"
그리고 장군은 11척의 배를 뒤에 남겨둔 채, 홀로 적진 한가운데를 향해 배를 몰고 나아갑니다. 수백 척의 적선이 쏘아대는 포화 속으로 자신의 목숨을 던져 완벽한 '한 알의 밀알'이 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여러분, 홀로 죽음의 소용돌이 속으로 배를 몰고 나아가는 장군의 마음은 두려움과 불행으로 가득
찼을까요? 아닙니다. 백성을 살리고 나라를 구하겠다는 거룩한 목적을 위해 내 한 목숨을 온전히 미워하며 내던진 순간, 장군의 영혼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숭고한 평화와 벅찬 자존감으로 타올랐습니다.
반면, 11척의 배에 숨어서 눈치를 보며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해"라고 바둥거리던 장수들과 병사들의 마음은 행복했을까요? 그들의 영혼은 수치심과 극도의 공포에 짓눌린 참혹한 지옥 그 자체였습니다. 자아를 살리려 할수록 두려움은 눈덩이처럼 커져 그들을 질식시켰습니다.
하지만 밀알이 되어 앞장서서 죽어가는 대장선의 그 숭고한 빛을 보았을 때, 숨어있던 장수들의
영혼에도 불이 붙었습니다. 그들 역시 '살고자 하는 얄팍한 자아'를 버리고, 기꺼이 노를 저어 사지의 바다로 뛰어들며 위대한 승리를 만들어냅니다. 나를 버리는 순간 두려움은 사라지고, 기적 같은 구원의 열매가 맺힌 것입니다.(출처: 이순신, 『난중일기』 1597년 9월 15일 자)
우리를 괴롭히는 두려움은 철저히 자아의 생존 본능에서 옵니다. 내가 손해 볼까 봐, 내가 무시당할까 봐, 내가 아플까 봐 전전긍긍합니다. 자아를 우상으로 모시고 사는 인간은 하루 24시간을 방어막을 치느라 에너지를 소진합니다. 살기 위해 도망 다니는 비겁한 삶은 자아를 한없이 비대하게 만들고, 커진 자아만큼 잃을 것이 많아지기에 불안과 초조, 두려움은 더욱 커집니다. 그것이 바로 지옥입니다.
이 위대한 원리를 자기 삶의 궤적으로 뼈저리게 증명하신 분들이 바로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124위 순교 복자들입니다. 그중 최필공 토마스 복자님의 삶을 들여다보십시오.
최필공 토마스 복자님은 본래 궁중의 약을 짓는 내의원 소속의 엘리트 약제사였습니다. 그는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열심을 다했지만, 1791년 신해박해 때 체포되자 죽음의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그만 배교하고 맙니다. 풀려난 그는 따뜻한 집으로 돌아가 벼슬을 유지하며 육신의 생명과 자아를 지켰습니다.
그런데 목숨을 보존한 그가 집에 돌아와서 행복했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훗날 교우들에게 자신의 배교 시절을 눈물로 고백했습니다.
"하느님을 모른다고 배반하고 살아남았던 그 8년의 시간은, 매일매일 내 영혼이 불타는 끔찍한
지옥이었습니다. 숨을 쉬고 밥을 먹어도 나는 살아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그는 자아를 보존하려던 비겁함이 끔찍한 두려움과 죄책감의 감옥임을 깨닫고, 스스로 자기 목숨을 철저히 미워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다시 교우들을 찾아가 회개하고 더욱 열렬히 복음을 전하다가 1801년 신유박해 때 다시 체포됩니다.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살이 찢기는 모진 고문 앞에서도 그는 배교를 거부했습니다. 처형장인 서소문 밖으로 끌려가는 수레 위에서, 최필공 토마스 복자님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패배자가 아니었습니다. 목숨에 대한 집착을 버렸기에 두려움이 완벽히 사라진 그의 얼굴에는 천사 같은 평화와 미소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자아의 소멸이 가져다준 압도적인 구원의 행복을 누리며 그는 장엄하게 순교의 월계관을 썼습니다.(출처: 한국교회사연구소, 『한국 천주교회 창립사』).
오늘날 우리에게는 목에 칼을 들이대며 신앙을 버리라고 협박하는 포졸도, 피 냄새 진동하는 사형장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21세기를 살아가며 어떻게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행복한 밀알'이 될 수 있습니까? 우리 삶의 배교와 순교는 매일 일어나는 아주 작은 '선택의 순간'에 있습니다.
부부 싸움을 크게 했을 때를 떠올려 보십시오. '내가 미안해'라고 먼저 고개를 숙이는 것은 내 알량한 자존심(자아)이 죽어야 하는 끔찍한 일입니다. 이때 속으로 이렇게 속삭이는 악마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네가 먼저 사과하면 넌 지는 거야. 끝까지 기싸움을 해서 네 권리를 찾아! 무시당하면 안 돼!'
이때 내 얄팍한 자존심을 살리려고 며칠이고 입을 닫고 냉전을 벌이는 것, 이것이 바로 현대판 '배교'입니다. 자존심을 지켜내서 이겼으니 행복합니까? 아닙니다. 마음은 터질 듯이 불안하고, 식탁에는 냉기가 흐르며, 방안은 지옥의 감옥처럼 춥고 외롭습니다. 자아의 목숨을 사랑했기에 오히려 평화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반대로, 끓어오르는 억울함을 꾹 누르고 십자가의 예수님처럼 자존심을 십자가에 못 박기로 결심해 보십시오. 그 순간 내 자아는 찢어지는 고통을 느끼지만, 그 즉시 내면을 짓누르던 모든 두려움과 불안의 얼음벽이 산산조각 나며 쏟아지는 하느님의 평화와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내 자존심이라는 밀알이 죽었을 때, 가정을 살리는 거대한 부활의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한 번 이 죽음이 주는 평화(순교)를 맛본 사람은, 더 이상 기싸움을 통해 자아를 살리는 쩨쩨한 지옥의 삶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교부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시편 상해』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서늘한 일침을 날리셨습니다.
"그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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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스페인 몬세라트 수도원에 머물며 이 고요함 속에서 기도하다 보니, 세상의 소란과는 전혀 다른 하느님의 시간 안에 들어와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전쟁과 갈등으로 시끄럽지만, 이곳의 침묵은 오히려 더 분명하게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는 무엇을 믿고, 무엇을 전하며 살고 있는가?” 최근 우리는 전쟁의 소식을 들으며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교황님께서는 평화를 위한 ‘밤샘 기도’를 요청하셨습니다. 그 모습은 사도행전의 베드로를 떠올리게 합니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활을 체험한 제자는 더 이상 두려움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교황 바오로 6세 역시 그러한 증인이었습니다. 교황님은 유엔에서 “전쟁은 더 이상 안 됩니다.”라고 외치며, 평화의 복음을 세상 한가운데 선포하였습니다. 어느 동네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주일 오후, 성당에서 나온 신자들이 거리 한쪽에 작은 탁자를 펼쳐 놓고 거리 선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천주교를 알려드립니다.”라는 책자와 입교 신청서를 정성껏 준비해 두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반응은 생각보다 차가웠습니다. 바쁜 걸음으로 지나가거나, 손사래를 치며 외면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선교하는 분들도 점점 목소리가 작아지고, 표정에는 조심스러움과 망설임이 묻어났습니다.
그런데 길 건너편에서는 전혀 다른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한 약 장수가 큰 소리로 사람들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이 약 하나면 피로가 싹 풀립니다! 관절이 좋아집니다!” 과장된 몸짓과 확신에 찬 목소리로 사람들을 끌어모았습니다. 신기하게도 사람들은 그쪽으로 몰려들었고, 웃고 떠들며 약을 사기까지 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거리 선교를 하던 분들은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전하는데, 왜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을까?’ 결국 몇 사람이 용기를 내어 약 장수에게 다가가 물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참된 생명의 길을 전하는데도 사람들이 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약을 파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때 약 장수가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실 이 약이 그렇게 좋은 약은 아닙니다. 나쁘지도 않지만, 특별히 효과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저는 이 약을 정말 좋은 약이라고 믿고, 그렇게 확신을 가지고 말합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정말 좋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왜 그렇게 자신 없어 보입니까?”
이 짧은 이야기는 우리 마음을 깊이 흔듭니다. 내용의 진실함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전하는 사람의 태도와 확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줍니다. 현대 사회는 ‘정보’보다 ‘신뢰’를 중심으로 움직입니다. 임마누엘 칸트는 인간의 이성이 진리를 향한다고 보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이성만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누가 말하는가?’, ‘어떤 태도로 말하는가?’를 통해 진실을 판단합니다. 그래서 같은 말이라도 확신 있게 전해질 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이것은 단순한 바람이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확신을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바로 그 확신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더 이상 두려움에 흔들리지 않았고, 세상의 위협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인의 태도입니다. 오늘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복음을 전할 때 어떤 모습인가?” 혹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전하면서도, 세상의 시선과 반응을 먼저 생각하며 주저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현대인은 스승보다 증인을 더 믿는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더 많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더 확신 있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몬세라트의 고요함 속에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이 확신이 있을 때, 우리는 어디에서든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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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부산교구 권순호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시장하신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로 다가가십니다. 잎이 무성한 것을 보고 열매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셨지만, 열매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나무를 향하여 이르십니다. “이제부터 영원히 어느 누구도 너에게서 열매를 따 먹는 일이 없을 것이다.”(마르 11,14)
현대는 이른바 ‘폼생 폼사’의 시대입니다. 피부가 좋아진다, 날씬해진다 등 외모에 좋다고 하는 상품이 불티나게 팔립니다. 그러다 보니 겉으로는 풍요로워 보이지만 안은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는 거룩하고 열심히 활동하는 신자인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영혼이 메말라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열심히 미사에 참례하지만 이웃과 다투고, 열심히 성당에 다니지만 가족에게는 차갑고, 열심히 봉사하지만 교만한 마음이 크다면,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와 다를 바 없습니다. 성당도 마찬가지입니다. 화려한 성당 건물에 신자들이 가득하고 헌금이 넘쳐도 영성은 메말라 가는 공동체일 수 있습니다. 신앙의 참된 열매는 사랑입니다. 겸손과 온유와 인내와 용서입니다.
나무가 열매를 잘 맺게 하려고 불필요한 잎과 가지를 쳐 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열매를 기대하십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도록 우리 삶의 불필요한 잎과 가지를 쳐 내는 고통도 참고 이겨 내야 합니다.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보다 내면의 참된 열매를 더 소중히 여기는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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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2,24-26: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1. 한국 교회의 첫 열매,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오늘 교회는 한국 천주교회의 첫 순교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4위를 기린다. 윤지충은 조상 제사와 신주를 불사르라는 교회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유교적 사회의 압박 속에서도 신앙을 선택한 용기 있는 증인이었다. 이 사건은 조선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고, 결국 그는 1791년 참수형을 받아 우리나라의 첫 순교자가 되었다. 그분과 동료 순교자들은 단순히 목숨을 빼앗긴 이들이 아니라, 복음의 말씀처럼 한 알의 밀알로 땅에 떨어져 한국 교회라는 풍성한 신앙의 열매를 맺게 하였다. 테르툴리아노는 이렇게 말했다. “순교자들의 피는 그리스도인들의 씨앗이다.”(Apologeticus, 50,13) 이 말씀은 한국 교회의 역사 안에서 그대로 이루어졌다. 순교자들의 피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 신앙 공동체의 뿌리가 되었다.
2. 밀알의 신비: 죽음을 통한 열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24절) 순교자들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그들의 희생은 파괴가 아니라 풍요로운 결실이 되었고, 그 결실이 바로 오늘 한국 교회의 신앙이다.
성 이레네오는 이렇게 가르친다. “살아 있는 인간이 하느님의 영광이며, 인간의 생명은 하느님을 보는 것이다.”(Adversus Haereses, IV,20,7) 순교자들은 육신은 파괴되었으나, 하느님을 향한 믿음 안에서 영원히 살아 있다. 그들의 삶과 죽음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증언이 되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도 순교를 이렇게 설명한다. “순교자는 죽음에서 패배하지 않고, 죽음을 통해 하늘 나라의 월계관을 얻는다.”(In Epist. ad Hebr. hom. 의역)
3. 자기 목숨을 잃고 얻는 길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25절) 이 말씀은 단순히 육체적 죽음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중심적 욕망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이 참된 생명으로 가는 길임을 가르친다. 윤지충과 동료 순교자들은 세상의 안락과 가족, 심지어 목숨까지 내려놓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선택하였다. 교회 헌장은 이렇게 가르친다. “순교는 가장 큰 사랑의 증거이다. 제자는 스승을 따르며, 스승이 죽기까지 충실하셨던 것처럼, 순교자들도 죽기까지 충실하다.”(42항 의역)
4. 오늘의 순교 정신
오늘 우리에게 순교 정신은 단순히 죽음을 맞이하는 용기가 아니다. 그것은 일상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이다. 가정 안에서 서로 용서하고 인내하며 자신을 버리는 것, 사회 안에서 물질주의와 불의 앞에서 신앙과 정의를 증언하는 것, 교회 공동체 안에서 봉사와 희생으로 형제를 섬기는 것이다.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한국 순교자들을 기리며 이렇게 말했다. “순교자들의 신앙은 한국 교회의 참된 보화이며, 이 신앙의 불씨는 오늘날에도 타오르고 있다.”(1984년 한국 순교 성인 시성 강론 중 요약)
5. 맺음말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은 한국 교회의 “밀알”이 되어, 피 흘림으로 오늘 우리의 신앙 공동체를 열매 맺게 하였다. 오늘 우리는 그분들의 증언 앞에서 자문해 보자. 나는 일상에서 나 자신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에 응답하고 있는가? 나는 작은 희생과 봉헌을 통해 순교 정신을 살아가고 있는가? 이 거룩한 미사 안에서, 우리도 순교자들과 함께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삶을 봉헌하는 참된 제물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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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밀알 하나>
요한 12,24-26 (그리스인들이 예수님을 찾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밀알 하나>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밀알 하나
땅에 떨어져
기꺼이 죽는다
제 품에 안길
열매를
얻기 위함이 아니라
다른 이가 가질
열매를
맺기 위해서
밀알 하나
땅에 떨어져
기꺼이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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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을 믿는 이들의 영광>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로마 8,35) 성 바오로는 이 구절을 통해, 예수님을 믿는 우리 신앙의 영광에 대하여 말한다. 그 신앙의 영광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어 하늘에 오르셨을 뿐 아니라, 우리를 당신과 결합하여 당신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승리하셨고, 그분의 승리는 또한 우리의 승리다.
순교자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었다. 지금 그들은 환희와 영광 속에서 그리스도의 다스림에 함께 참여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그 무엇보다도 위대한 승리를 우리에게 선사하셨음을 순교자들은 성 바오로와 함께 증언한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다."(로마 8,38-39)
순교자들의 승리, 곧 하느님 사랑의 힘에 대한 그들의 증언은 오늘날 한국 땅에서, 교회 안에서 계속 열매를 맺는다. 한국 교회는 순교자들의 희생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복자 바오로와 그 동료들을 기억하는 것은 한국 교회의 여명기, 바로 그 첫 순간들로 돌아가는 기회를 우리에게 준다. 선조들에게서 물려받은 신앙과 애덕의 유산을 보화로 잘 간직하여 지켜나가길 촉구한다.
하느님의 신비로운 섭리 안에서, 한국 땅에 닿게 된 그리스도교 신앙은 오히려 한민족, 그들의 마음과 정신을 통해 이 땅에 그리스도교 신앙이 들어오게 되었다. 고난을 받으시고 돌아가셨으며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해 더욱더 많이 알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에 대한 무언가의 깨달음은 곧 주님과의 만남으로 이어져, 첫 세례자들과 더불어 충만한 성사 생활과 교회적 신앙생활에 대한 열망, 그리고 선교 활동의 시작으로 계속 이어지게 되었다.
더 나아가, 전통적인 사회적 신분의 차별과 상관없이, 믿는 이들이 모두 한마음 한뜻이 되어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던 초대 교회의 삶(사도 4,32 참조)에서 영감(靈感)을 받아, 신자 공동체들 안에서도 많은 열매를 맺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는 우리에게 평신도 소명의 중요성, 그 존엄함과 아름다움에 대하여 많은 것을 말해 준다. 순교자들이 우리에게 가야 할 길을 제시한다.
순교자들과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예수님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세상을 따를 것인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 됨의 대가가 무엇인지를 알았다. 이것은 박해를 의미했고, 또 나중에는 산속으로 들어가 교우촌을 이루게 됨을 의미했다. 그들은 엄청난 희생을 치를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 한 분만이 그들의 진정한 보화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순교자들은 그리스도를 모든 것 위에 최우선으로 모시고, 우리 자신이 과연 무엇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지를 생각하도록 우리에게 도전해 온다. 그들의 모범으로, 신앙생활에서 애덕의 중요성에 관한 가르침을 준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어려움에 처한 형제자매들에게 뻗치는 도움의 손길로써 당신을 사랑하고 섬기라고 계속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
우리가 순교자들의 모범을 따르면서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여 믿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바쳤거나 그분의 이름 때문에 모진 박해 속에서 고통을 받아야만 했던 이름 없는 순교자들을 기리며 기억해야 한다.
순교자들이 남긴 유산, 곧 진리를 찾는 올곧은 마음, 종교의 고귀한 원칙들에 대한 충실성, 그리고 그들이 증언한 애덕과 모든 이를 향한 연대성, 이 모든 것이 한국인들에게 풍요로운 역사의 한 장이 되었다. 순교자들의 유산이 사랑하는 이 나라에서부터 아시아 전역을 거쳐 마침내 땅끝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을 증언하게 되기를 빈다. 아멘. (프란치스코 교황 124위 시복식 미사 강론 요약 (2014,8,16)
“주님, 주님의 종인 저희가 언제나 주님의 이름을 찬미하고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하여 일하게 하소서.” 아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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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7살 된 딸이 아빠에게 “아빠, 나 커서 변호사 될 거야.”라고 말하면, 아빠는 좋아할까요? 아니면 싫어할까요? 아마 우리나라의 아빠들은 대부분 좋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이 아빠는 울먹이면서 딸을 붙들고 제발 변호사가 되지 말라고 애걸합니다. 변호사는 다 거짓말쟁이라면서, 진실을 알면서도 때로는 모르는 척해야 하고, 나쁜 사람 편을 들어야 할지도 모르는데, 그 이유가 하찮은 돈 때문이라면서 절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이제 겨우 일곱 살 된 딸인데 말입니다. 결국 이 딸은 큰 인심 쓰듯이 알았다면서, 대신 축구선수가 되겠다고 말합니다. 이 말에 아빠는 크게 기뻐했습니다.
여러분은 자녀가 변호사와 축구선수 중에서 선택할 수 있다면 어떤 길로 갔으면 싶습니까? 아마 많은 이가 힘든 운동선수보다는 변호사가 더 좋은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위의 아빠는 돈과 같은 물질적인 것보다는, 진정한 삶의 가치를 찾을 수 있는 길로 나아가길 바랐던 것입니다. 사실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에 더 큰 의미를 두면 행복도가 낮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가치 있는 삶을 선택해서 나아가는 사람들이 충분히 만족하며 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요한 12,25)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현세의 안위와 타협하여 신앙을 저버리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살아남을지 모르나 영혼은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주님을 위해 육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고 하십니다.
어디에 더 큰 의미를 두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요한 12,26)라고 말씀하시면서, 주님의 뜻에 커다란 의미를 두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을 맞이합니다. 우리 순교자들은 사실 관가에 끌려가서 선택을 강요받았습니다. “천주를 버린다고 한마디만 하면 살려주겠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순교자들은 천주를 버리고 얻는 세상이 얼마나 헛된지를 깨달으신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복자 윤지충 바오로는 사형 선고를 받고 참수당하기 직전까지도 미소를 잃지 않으며 예수님과 마리아의 이름을 불렀다고 합니다. 비록 세상에서의 목숨은 잃었지만, 참된 목숨인 영원한 생명을 얻은 진정한 승리자가 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세속주의, 이기주의, 물신주의라는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런 것에 더 큰 가치를 두게 된다면, 주님을 모른척하며 살게 됩니다. 당연히 주님께서 주시는 커다란 기쁨도 잃게 됩니다.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에 가치를 두면서, 주님을 세상에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진짜 행복의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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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불사의 희망>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요한 12,24-26)
1) 구약성경 지혜서에 있는 다음 말을 순교자들에게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시험하시고, 그들이 당신께 맞갖은 이들임을 아셨기 때문이다. 그분께서는 용광로 속의 금처럼 그들을 시험하시고, 번제물처럼 그들을 받아들이셨다. 그분께서 그들을 찾아오실 때에 그들은 빛을 내고, 그루터기들만 남은 밭의 불꽃처럼 퍼져 나갈 것이다."(지혜 3,2-7)
순교는 ‘불사의 희망’과 믿음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내세와 영원한 생명을 안 믿는 자들의 눈에는 순교자들이 어리석은 사람들로 보이겠지만, 진짜로 어리석은 자들은 ‘안 믿는 자들’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또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만 욕심내고 집착하면서 하루살이처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로마 8,24-25) 만일에 눈에 보이는 것만 존재하고, 그게 이 세상의 전부라면, 믿음과 희망은 쓸모가 없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큰 세상이 존재하고 있음을 믿고 있고, 그 세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 믿음과 희망이 고난을 참고 견디는 이유이고, 힘입니다.
2) 순교는 육신의 목숨을 바쳐서 영혼의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입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마태 16,25-26)
따라서 순교는 모든 것을 바쳐서 모든 것을 얻는 일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겉으로는 순교자들이 박해자들에게 목숨을 빼앗기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하느님께 목숨을 바치는 것입니다. <또 순교자들이 목숨을 ‘버리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는데, 버리는 것이 아니라 바치는 것입니다.>
순교는 수동적으로 ‘당하는’ 일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실행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위대한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지금 겪는 일시적이고 가벼운 환난이 그지없이 크고 영원한 영광을 우리에게 마련해 줍니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우리가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은 잠시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 우리의 이 지상 천막집이 허물어지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건물 곧 사람 손으로 짓지 않은 영원한 집을 하늘에서 얻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이 천막집에서 우리는 탄식하며, 우리의 하늘 거처를 옷처럼 덧입기를 갈망합니다."(2코린 4,17-5,2)
3) 야고보 사도는 신앙인의 ‘인내’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 여러분, 주님의 재림 때까지 참고 기다리십시오. 땅의 귀한 소출을 기다리는 농부를 보십시오. 그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맞아 곡식이 익을 때까지 참고 기다립니다. 여러분도 참고 기다리며 마음을 굳게 가지십시오. 주님의 재림이 가까웠습니다."(야고 5,7-8)
곡식이 익을 때까지 참고 기다리는 것은, 농부라면 누구나 하는 일이고,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영원한 생명’이라는 열매를 얻을 때까지 참고 기다리는 것은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하는 일이고,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주님은 할 수 없는 일을 하라고 강요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할 수 있으니까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순교만 놓고 생각하면, 모든 신앙인이 다 순교자가 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순교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 일입니다. 순교는 옛날이야기만은 아니고, 오늘의 우리 일입니다. 그리고 순교는 이론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초인적인 모습으로 순교한 분들의 영웅적인 이야기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신앙을 증언하고 복음을 선포한 분들의 작은 이야기들도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자신이 신앙인으로서 실행하고 있는 작은 일들이 쌓여서 위대한 열매가 된다는 것을, 즉 영원한 생명이 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거창한 일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작은 씨를 심는 것과 같은 작은 일로 시작하고, 진행하다가, 끝까지 가서 보면, 사람의 생각을 초월하는 위대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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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김건태 루카 신부님]
오늘 우리는, 지난 달 하느님 품으로 떠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2014년 8월 16일에 서울에서 시복하신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을 기념합니다.
우리나라 시복시성의 역사를 살펴보면, 기해박해(1839년)와 병오박해(1846년) 때 순교하신 분들 가운데 79위가 1925년 7월 5일 로마에서 비오 11세 교황님에 의해 시복되셨고, 병인박해(1866년) 때 순교하신 분들 가운데 24위가 1968년 10월 6일 로마에서 바오로 6세 교황님에 의해 시복되셨으며, 이분들 103위 복자가 1984년 5월 6일에 서울에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에 의해 시성됨으로써 우리 한국천주교회는 103위 성인을 모시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이 땅에 오묘하다 못해 신묘한 방법으로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시점이 1784년 만천 이승훈 선생이 북경에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으신 때이며, 이후 신해박해(1791년)로 시작해서 신유박해(1801년) 등 초기 여러 박해 때 수많은 신앙 선조들이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역사적 사실을 감안하면, 이 신앙의 선조들을 103위 성인 명단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안타까운 현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유박해 200주년이 되던 2001년에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가 구성되어 시복을 위한 조사 절차에 들어갔으며,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2009년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 시복 청원서’ 가 교황청에 접수되어 ‘하느님의 종’으로 불리다가, 프란치스코 교황님에 의해 복자품에 오르시게 된 것입니다. 모두 순교하신 분들이니, 중요하고 까다로운 절차인 기적 심사 없이 곧 성인품에 오르시리라는 기대로 오늘 축일을 맞이합니다.
오늘 축일의 공식 이름 제일 앞자리에 첫 번째 박해인 신해박해(1791년) 때 순교하신,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 바오로가 언급됩니다. 윤지충 바오로(1759-1791)는 전라도 진산의 양반 집안 출신으로, 1783년 진사 시험에 합격합니다. 고종사촌 정약용(요한)을 통해 천주교를 알게 되며, 이듬해부터는 스스로 교회 서적을 구해 읽으며 교리를 공부한 그는 1787년 인척인 이승훈(베드로)으로부터 세례를 받습니다. 이후 바오로는 어머니와 아우 윤지헌, 외종사촌 권상연(야고보)에게도 교리를 가르쳐 천주교 신앙을 전해줍니다.
1790년 북경의 구베아 주교가 조선의 신자들에게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바오로는 권상연과 함께 이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집안에 있던 신주를 모두 불살라 버리며, 이듬해 어머니가 사망하자 유교식 제사 대신 천주교 의식에 따라 장례를 치릅니다. 이는 어머니의 유언이기도 했습니다.
윤지충 바오로가 신주를 불사르고, 전통 예절에 따라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는 소문은 널리 퍼지기 시작했으며, 결국 조정에까지 전해져 진산 군수에게 체포 명령이 하달됩니다.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는 1791년 10월에 진산 관아에 자수하며, 바로 전주 감영으로 이송됩니다. 그곳에서도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면서 제사의 불합리함을 조목조목 지적하자, 이에 화가 난 전주 감사는 그들에게 혹독한 형벌을 가하도록 명합니다. 회유가 더는 불가능하다는 판단에서 전주 감사는 최후 진술을 받아 조정에 보고하며, 조정에서 사형 판결문이 도착하자, 감사는 이 두 분을 전주 남문 밖으로 끌고 가 참수합니다. 1791년 12월 8일이었으며, 당시 바오로의 나이는 32세였습니다.
우리나라 순교자들을 대할 때마다,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심과 함께 죄스러운 마음이 가슴을 파고듭니다. 순교자들의 그 굳건한 신앙에 비해 내 신앙은 한없이 초라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나라 천주교회에 이렇게 위대한 순교 복자들을 보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순교 복자들에게 존경과 찬송을 드리며, 신앙의 후손답게 열심히 살아나갈 것을 다짐하는 하루, 또한 하느님께서 이분들에게 시성의 영광을 안겨주시기를 조심스럽게 청하는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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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요한 신부님]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일본의 지하철역에서 술에 취해 선로에 떨어진 사람을 구하려다 목숨을 잃은 고(故) 이수현 씨를 다들 기억하실 것입니다. 기차가 들어오면 선로에 떨어진 사람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을 다들 알았지만 모두가 자기 목숨이 아까워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한 채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 사람도 아닌 한국인 유학생이 망설임 없이 선로로 뛰어 들었습니다.
그러나 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취객을 역의 플랫폼 위로 끌어올리기에는 시간이 너무나 부족했습니다. 하지만 이수현씨는 열차가 자신의 얼굴 앞까지 다가오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쓰러진 사람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안타깝게도 그들은 고귀한 생명을 잃었습니다.
생면부지의 남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던진 그의 모습을 보고 '어리석다'고 생각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결국은 선로에 떨어진 사람을 구하지도 못하고 다 함께 죽었다는 결과만 보고 아무런 성과도 없는 '개죽음' 당한 것이 아니냐며 회의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이수현씨의 죽음은 절대로 무의미한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부터 일본에서는 전철 선로 위에 사람이 떨어지는 사고가 생기면 그 사람을 구하기 위해 용감하게 선로에 뛰어드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왜 그런 일이 생겼을까요?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까지 내던진 이수현씨의 숭고한 희생이 사람들의 마음 속 깊이 묻혀있던 사랑의 씨앗을 싹트게 한 것입니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사회 분위기 안에서 다른 사람 때문에 손해를 보거나 희생하기를 꺼렸던 일본인들이 이수현씨의 희생을 보고 사랑이 지닌 숭고한 의미와 가치를 깨닫게 되었고, 그 후부터는 사랑을 실천할 기회가 생기면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즉각적으로 행동하게 된 것이지요.
이수현씨의 희생이 밑거름이 되어 사랑이라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의 죽음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과 뜻을 충실히 따르기 위해서 한 '순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수현씨는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과 참된 행복을 누리고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우리가 자신의 이익만 챙기며 타인을 위해 희생하려고 하지 않으면, 내 것을 지키기 위해 사랑을 실천할 기회를 외면하면 내가 지키려고 했던 그 '하나'는 남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 그보다 훨씬 더 가치있고 중요한 많은 것들을 놓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타인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고 봉사한다면, 사랑을 실천할 기회를 마주했을 때 망설이지 않고 내가 가진 재물과 재능, 시간을 기꺼이 내놓는다면 내가 한 봉사가, 내가 내놓은 것들이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깃든 사랑을 일깨워 풍요로운 열매를 맺을 것이고, 그것이 나 자신에게는 큰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줄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그런 나와 함께 하시며 나를 존중해주시고 아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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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김동희 모세 신부님]
오늘은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시복하신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1984년 한국 103위 순교 복자의 시성 과정에서 당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한국 교회가 평신도 중심의 신앙 공동체로 시작하였다고 알고 있는데, 왜 이들 복자에는 초기의 평신도 순교자들이 없냐고 물으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들이 자세하게 순교 기록을 남긴 후대의 순교자 중심으로 먼저 시복을 추진하면서 초기 순교자들이 포함되지 않았다고 대답하자, 교황께서는 초기 순교자들도 조사해서 시복을 추진하도록 당부하셨다고 합니다. 그 결실이 2014년 124위 순교 복자의 탄생입니다.
십 년 전 사제 안식년을 맞아 칠십 일 동안 전국 도보 성지 순례를 하였는데, 그때 특별히 감명 깊게 순례한 곳들이 바로 새로 시복된 복자들의 성지였습니다. 경남 진주시 사봉면 사봉 성지에는 복자 정찬문 안토니오의 무두묘가 있습니다. 효수형을 받은 까닭에 머리는 관아에 남겨 두고 몸만 옮겨 와 모셨다고 합니다. 경남 함안의 대산 성지 성당에는 스물두 살에 혹독한 매질 끝에 장독으로 순교한 복자 구한선 타대오가 잠들어 있습니다.
김해시 진례읍의 산 중턱에는 복자 박대식 빅토리노 순교자의 묘지가 있습니다. 성지로 오르는 산길은 좁고 엉성하였습니다. 본래는 부유한 집안 출신인데 천주교 신앙을 가지고 순교한 뒤 마을 주민들의 반대로 선산에 모시지 못하고 그곳에 간신히 묘를 꾸렸다고 합니다. 오래도록 가슴이 먹먹하였던 기억이 납니다.
시복된 지 십 년이 지났으니 이들 성지도 많이 바뀌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조만간 안식년을 얻는다면 다시 찾아가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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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순교의 본질은
죽음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에 있습니다.
진실하게 살아낸 삶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열매를 맺습니다.
참된 신앙은
말이 아니라
삶 전체로 증언될 때 완성됩니다.
순교자들은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양심과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밀알의 사람이 필요합니다.
죽는 밀알이
생명을 살리는 씨앗이 됩니다.
자신을 내어줄 때
새로운 생명이 피어납니다.
하느님을 위해
자신을 봉헌하는 삶이 중요합니다.
세상을 살리는 길은
우리 또한
한 알의 밀알이 되는 것입니다.
참된 삶은
진실한 사랑을 남기는 삶입니다.
참되게 살아가는 것이
삶의 가장 큰 가치입니다.
십자가를 피하지 않는
사랑과 봉헌의 삶이 필요합니다.
겸손한 밀알의 삶은
하느님을 드러냅니다.
순교자들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순교는
하느님을 끝까지 사랑하는 삶입니다.
목숨보다 더 소중한
가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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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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