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 다섯 번을 죽는다 -
文霞 鄭永仁
어느 글을 읽으니, 농익은 김치가 제 맛을 내려면 배추가 다섯 번을 죽어야 한다고 한다.
첫 번째 죽음은 배추가 배추밭에서 뽑히거나 칼로 도려질 때가 첫 번 째 죽음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 죽음은 통배추를 절이기 위해서 부엌칼로 허옇게 배를 가르는 것이라고 하고,
세 번째 죽음의 순간은 소금에 적당히 절여지는 순간이다.
네 번째 죽음은 매운 고춧가루와 짜디 짠 젓갈과 갖은 양념이 버무려진 속을 범벅으로 넣으면서 배추는 또 죽음을 맞이한다.
마지막 다서 번째 죽음은 김장독에 담겨져 땅에 묻혀야 비로소 긴긴 겨울을 제대로 된 김치 맛을 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 걸 보면 배추도 사람이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가듯이 결국 흙으로 돌아가는 일생의 과정을 겪는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배추는 다섯 번의 거룩한 죽음을 겪어야 김장김치가 되는 것이다.
김치가 여러 젓갈과 양념과 합하여 유산균에 의하여 발효되고 숙성되어야 다섯 번의 거룩한 죽음을 통하여 깊은 맛을 내고 푹 숙성된 김치가 되는 것이다.
어느 교수는 인간의 참된 삶도 풋내가 나는 겉절이가 아니라 농익은 김치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한다. 그러려면 두 가지 길이 있는 것 같다. 발효된 삶을 살 것이냐, 부패된 삶을 살 것이냐. 인간의 밀도 발효된 말이 있고, 부패된 말이 있다.
요즘 정치인들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암컷, 어린 놈, 어린 새끼, 두 알 달린 남자 …”그들의 인생에는 메주나 누룩이나 엿기름 같은 발효 시키는 효소들이 전혀 없어 부패된 정치적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인간은 한 번 죽는데, 배추는 김치가 되기 위해 다섯 번 죽는다고 한다. 그런데 사람은 일생을 살면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겪기도 한다. 나도 죽을 고비를 열 번 넘겼다.
비 오는 날, 한 번 버스에서 내려 횡단보도가 아닌 버스 앞으로 무당횡단을 하는 중이었다. 버스 앞을 바로 지나자 순식간에 차가 달려들었다. 아마 나와 한 5~10cm 남기고 획 지나갔다. 아차 하는 순간이었다. 아마 한 발만 더 내밀었어도 큰 사고가 날 것이 틀림없었다.
또 한 번은 다리 밑 블랙아이스에 미끄러져 뒤에 오는 트럭이 내가 탄 차의 조수석 앞 범퍼를 뜯어내고 지나갔다. 내가 탄 차는 360도 빙그르 돌아 경계석에 쳐 박혔다. 나는 그때 조수석에 타고 있었다. 우리는 병으로 사고로 아차한 죽음의 순간을 맞이하기도 한다.
배추는 1년을 살면서 다섯 번의 죽음을 맞이하는데, 수십 년을 사는 인간은 얼마나 많은 죽음의 순간을 맞이하는지 모른다.
오늘도 나는 다섯 번을 죽은 김치를 먹는다. 나를 위해 배추는 다섯 번을 죽는다. 결국 김치는 사람 몸에 들어가 여섯 번 죽는 것이 아닌가?
사람은 누구를 위해 다섯 번을 죽을 수 있을까? 가끔 자기 신체를 남을 위해 제공하고 죽는 사람을 본다. 살신성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나의 친구 부부는 사후 시신 기증 서명을 했다고 한다. 참으로 아름다운 용기가 아닐 수 없다. 또 절친 중에 한 분은 자식에게 신장 하나를 떼어 주었다.
(옮긴 글)
첫댓글 그래요 성남님
가끔 자기 신체를 남을 위해 제공하고 죽는 사람을
티비에서 보게 됩니다
여러 사람을 살리고
가시는 분들의 명복을 빌곤 했었지요
가족분들도 대단하시고요
사후의 자신을 기증하는 서명을
우리 향기방 나의별님도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성남님 귀한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