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 레안더
세계 2차 대전 기간동안 당시 유럽 최고의 스타로 군림했었던 여배우.
나치에서 전략적으로 프렌차이즈 스타로 키운 여배우죠.
나치 수뇌부는 물론 히틀러까지도 이 배우의 열렬한 팬이었다고 합니다.
처음에 괴벨스는 차라 레안더가 당시 나치가 우상시하던 미인이 아니어서
실망했지만 그녀의 재능을 알게된 뒤부터 지원을 아끼지 않죠
(원래는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던 독일 배우인 마를렌 디트리히를 프렌차이즈 스타로 키우려고 했지만
그녀가 거부하는 바람에 차라 레안더를 프렌차이즈 스타로 키웠다고 하네요~)
나치의 상징이 됐지만 정작 그녀는 나치 체제에 대해 전혀 알지도 못했고
충성심이라곤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네요
근데.. 놀라운 건.. 이 배우의 외조부가 유대인이었다는 소문이 있어요
유대인을 싫어하는 나치에서 유대계 여배우를 프렌차이즈 스타로..?
어찌됐건 차라 레안더는 눈부신 미모와 아름다운 목소리, 연기력 덕택에
유럽 최고의 스타가 됩니다
신은 역시 공평하신지.. 그녀에게 아름다움을 선사했지만 생각할 '두뇌'를 주시진 않았죠
어쨌든 당시 스웨덴인들은 독일에서 엄청나게 성공한 그녀를 국가의 영웅으로 여겼죠.
p.s 좀 뜬금없는 소리지만, 목소리는 정말 아름답더군요 +_+
확실히 독일인들이 이 여자한테 빠질만하더군요 ㅎㅎ
자세한 내용은 이걸로 대신할게요~
내용은 좀 길지만 재밌어요~
나치 시대 독일에서 가장 인기있던 여성 영화 배우는 공교롭게도 독일인이 아닌 스웨덴인이었다. 사라 스티나 헤드베리는 1907년 스웨덴의 칼스타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쪽 증조모 한 사람은 독일 함부르크 태생이었고 아버지는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공부했다. 이런 가정 환경인데다 그녀를 돌보던 보모와 피아노 선생이 독일인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어릴 적부터 독일어를 듣고 말할 기회가 있었고 독일은 그녀에게 친근한 나라였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배웠지만 정식으로 연기를 공부한 적은 없었다. 그래서 그녀가 연기자가 되겠다고 선언했을 때 아버지를 제외한 집안 식구들은 죄다 쟤가 머리에 바람이 들었다고 믿었고 실제로 그녀는 스웨덴 왕립 연기 학교 입학 시험에서 보기 좋게 떨어졌다.(참고로 잉그리드 버그만 - 스웨덴 식 발음으로는 베리만 -은 이 학교 출신) 하지만 이 즈음 해서 그녀는 닐스 레안더라는 남자 배우를 사귀게 되었고 그와 결혼까지 하게 되었으니 아주 소득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당시만 해도 닐스는 사라보다 훨씬 경력이 앞서 있었고 연줄을 이용해 자기 신부에게 이런 저런 배역들을 물어다 주었던 것이다. 닐스와 결혼함으로서 사라는 레안더로 성이 바뀌어 Zarah Leander라는 이름으로 활약하게 되는데 독일식으로 발음하면 차라 레안더가 된다.
차라는 가만히 서 있으면 뒤에서 후광이 비칠 정도의 미인은 아니었지만 미모보다 더 강렬한 것을 갖고 있었으니 특유의 강렬한 알토 목소리였다. 몇몇 오페레타와 스웨덴 영화에 노래 부르는 역으로 출연하면서 그녀는 명성을 얻어 갔고 이윽고 좁은 스웨덴 땅을 떠나 외국의 영화사로부터 러브콜을 받기에 이르렀다. 미국과 영국, 독일의 영화사들이 각각 차라에게 계약을 제의했는데 오늘날 같으면 너도 나도 헐리우드로 갔겠지만 당시만 해도 독일 영화계가 제법 잘나가던 때였던 데다 안그래도 차라에게 친숙한 나라였기 때문에 차라는 1936년 독일 국영 영화사와 계약을 맺는다. 당시 독일은 이미 나치가 정권을 잡은 후였고 차라의 스웨덴 연극계 친구들은 차라의 이 결정을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원래 신문 정치면같은 것은 거의 안 읽고 사는 타입이었기 때문에 그저 스타가 되겠다는 꿈에 사로잡혀 독일로 간다.
선전 장관이자 독일 영화계의 보스였던 괴벨스는 국영 영화사가 하필 외국 여배우와 주역 계약을 맺었다는 보고를 받고 "독일엔 여자가 없냐!!"고 짜증을 냈으나 - 게다가 차라는 당시 인종적 이상으로 자리잡던 금발도 아니었다 - 차라의 스타로서의 가능성을 알아챈 뒤로는 태도가 180도 바뀌었다고 한다.
차라는 독일어가 유창했지만 외국인 억양 때문에 독일인 역을 맡기에는 무리였는지 주로 외국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 '독일어를 하는 외국인'역으로 출연했다. 예를 들어 그녀가 1937년 찍은 라 하바네라라는 영화에서 그녀가 맡은 역은 푸에르토 리코에 사는 돈 페드로라는 남자의 스웨덴 인 아내인데 이 영화에서 돈 페드로도 스웨덴 인 아내도 그녀의 어릴 적 친구였던 스웨덴 인 남자도 모두 독일어로 대화한다. 푸에르토 리코로 시집온 스웨덴 여자가 고향이 그리워 우울증 걸리는 얘긴데 좀 납득이 안가긴 한다. 햇살 좋고 날씨 좋은 남국에서 음침하고 겨울 긴 스웨덴으로 시집 간 여자가 우울증 걸린다면 그럴만한 일이지만 그 반대라니.
이 독특한 목소리 덕택에 그녀의 경력은 죽죽 뻗어나갔고 스웨덴 인들은 해외에서 이런 성공을 거두는 자국인에 대해 무척 자랑스러워했다. 당시 스위스의 한 영화 잡지에서 독자 투표한 걸 보면 여배우중 차라의 인기가 1위고 3위가 그레타 가르보, 마를레네 디트리히는 18위였다. 유럽에서 한 투표니 유럽이 주무대였던 차라의 인기가 미국에서 영화 찍던 스타들보다 높은 게 당연하겠지만 하여튼 차라는 독일 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 이름을 떨치는 스타가 되었고 독일어와 스웨덴어, 프랑스어로 음반을 내놓았다. 2차 대전이 벌어지고 그녀가 점령된 프랑스를 방문했을 때 독일 장병들 뿐 아니라 프랑스 인 팬들까지 그녀에게 환호했다고 한다.
그녀가 독일에서 찍은 영화들 중 가장 뜬 것은 위대한 사랑 Die große Liebe라는 영화다. 여기서 차라가 맡은 역은 이름으로 보건대 모처럼 독일인 같은데 이 영화를 직접 보지 못해서 과연 이게 선전 영화인지 무해한 오락 영화인지는 판단 불가다. 어쨌든 차라가 나치 독일에서 찍은 영화의 대부분이 별 정치성 없는 오락 영화였던 건 사실이다.
비록 선전 장관 괴벨스가 나치 독일 영화 산업의 총책임자긴 했지만 의외로 당시 생산된 독일 영화들 중 적나라한 선전 영화의 비중은 그리 높지 않다. 어떤 정치 체제 아래서든 대놓고 계몽하려 드는 선전 영화를 좋아하는 국민을 찾기란 아침 조회나 명상의 시간을 좋아하는 학생을 찾는 것과 비슷한 일이다. 내가 처음 베를린에 어학 연수차 왔을 때 당시 베를린 우라니아 극장에서는 매주 나치 시대 영화를 근처 대학 역사나 영화과 교수들의 설명을 덧붙여 한 편씩 상영하고 있었는데 대부분의 영화는 대놓고 메시지를 전달하기보다는 우회적인 방법으로 나치식 세계관을 전했고 상당 부분 예술적 성취(!)마저 이뤄내고 있었다.(물론 잘된 영화로 골라서 틀어준 덕택이겠지만)
예를 들어 Ohm Kruger라는 영화는 나치 시대 독일이 아닌 한 세대 전 남아프리카의 보어 전쟁이 무대인데 네덜란드 후손인 보어 인들과 영국 인들이 치고받는 얘기라 독일이랑은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보어 인들을 강제 수용소(!)에 몰아넣고 핍박하는 잔악한 영국군과 그에 대항하는 보어 인들의 영웅적 항쟁을 보여줌으로써 반영 감정을 고취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 영화가 제작된 1941년 독일은 한참 영국과 전쟁중이었다. 한 가지 아이러니컬한 것은 이 영화는 영국인들을 당시 관객들의 정서가 받아들일만한 한도 내에서 최대한 극악하게 묘사하고 있지만 이 영화가 묘사하고 있는 영국인들의 악행을 몽땅 합쳐도 몇 년 후 드러나는 나치의 악행에 비하면 새발의 피라는 점이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을 맡은 에밀 야닝스의 연기는 꽤 인상적이었고(그는 제 1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자기도 하다) 영화도 볼만했다. 만약 이 영화가 생산된 역사적 배경을 모른다면 그냥 괜찮은 옛날 영화로 즐겁게 볼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보어 인과 영국인이 영화 속에서 모두 독일어로 이야기한다는 점은 유쾌하기까지 하다.
더 복잡한 것은 나는 고발한다 Ich klage an이라는 제목의 영화였다. 나치들은 기형아나 정신 지체같은 ?열등한’ 인간들에 대한 안락사를 추진했는데 이 영화는 바로 안락사를 옹호하는 영화다. 그러나 이 영화는 나치들이 정책적으로 추진하던 안락사를 홍보하는 내용이 아니다. 불치병에 걸려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아내를 보다 못해 안락사시킨 후 법정에 서게 되는 의사의 이야기로 여전히 안락사가 논란 거리인 오늘날에도 충분히 통할 수 있는 줄거리인데다 상당히 잘 만든(!) 좋은(!) 영화였다. 만약 중간에 언뜻 배경으로 보이는 벽에 걸린 히틀러 초상화만 아니었으면 오늘날의 관객들도 아무 괴리감 없이 이 영화의 주인공에게 감정 이입하며 영화 줄거리를 따라갈 수 있을 것이다.(불치병에 걸린 여주인공이 지나치게 곱게 죽어간다는 점이 걸리긴 하지만 그건 요새 영화도 마찬가지 아닌가)
그리고 그 나치 시대 영화 시리즈 중 관객들을 가장 당혹스럽게 한 것은 여신같은 예테 Die gottliche Jette라는 영화였다. 그나마 앞의 두 영화는 우회적으로나마 나치의 세계관이 전달되는 반면 빌헬름 황제 시대 스타가 되고 싶어한 아가씨의 이야기인 이 영화는 나치랑은 아무 상관 없는 굉장히 잘 만든(!!) 코메디 영화였다. 주인공 아가씨의 천연덕스러운 연기는 귀여웠고 대사는 재치 넘쳤으며 분위기는 유쾌하기 짝이 없어서 극장 안의 관객들은 미친 듯이 웃어댔다.(유일하게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이는 농담 중 상당수를 알아들을 수 없어 괴로워하던 어학연수생 본인이었다) 거의 갈채 속에 영화가 끝난 후 토론 시간이 되자 갑자기 관객들은 난처해졌다. 영화를 선전 도구로 이용하던 나치의 전략을 분석하고 나치의 악행을 규탄할 차례였지만 도저히 그 영화와 나치를 연결할 건덕지가 없었던 것이다. 이윽고 한 용기 있는 관객이 ?저건 아주 잘된 오락물이었소. 즐겁게 봤지만 나치와 관련해서 할 말은 없소.“라고 의견을 말했고 여기저기서 동의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관객석 다른 쪽에서 누군가 ?바로 그걸 괴벨스가 원했던 거요! 이런 현실 도피적 오락물로 국민들의 의식을 정치로부터 돌리기를!“하고 외치자 극장 안은 갑자기 싸~~해졌고 잘된 오락 영화를 즐겁게 보고 난 관객들은 갑자기 괴벨스의 수작에 놀아났다는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했으며 곧 ?나는 독일인이 아니지만 이 영화를 함께 봤으니 나도 지금 같이 괴로워해야 하는건가'라는 고민에 빠져들었다.
다시 차라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차라가 출연한 영화 중 내가 전 장면을 본 것은 라 하바네라 뿐이지만(역시 그 나치 시대 영화 시리즈 때) 그녀가 출연한 다른 영화들도 선전 요소가 강하지 않은 오락물이었다. 그리고 선전 영화에 출연하기에는 차라 레안더라는 인간이 지나치게 정치적 의식이 모자랐다. 그녀는 투철한 나치도 투철한 반나치도 아니었다. 나치 정권의 국립 영화사에서 영화를 찍고 괴벨스의 후원을 받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유대인이나 유대인과 결혼한 동료들과도 접촉을 가졌다. 한마디로 아무 생각이 없었다는 얘기다. 그녀가 중립국 스웨덴 출신이었다는 점 역시 그녀가 비정치적으로 남는 데 한 몫 했을 것이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본 결과에 따르면 그녀의 조부모 중에서 유태인이라 강제 수용소에서 죽은 이가 있다는데 하도 바보같은 이야기라 믿진 못하겠다. 그녀에게 정말 유태인 조상이 있었으면 애당초 나치 휘하에서 스타가 되는 게 불가능했을 뿐더러 아무리 정치적 깡통인 그녀라 해도 자기 할아버지나 할머니를 강제 수용소로 보내는 정권이 나쁘다는 것 정도는 분별할 수 있을 터였을테니까.
그러나 차라의 낙천적인 노래와는 상관없이 전황은 점점 독일에 불리하게 되어갔고 베를린 상공에는 연합군의 폭격기가 시도 때도 없이 날아들었다. 중립국 스웨덴 국적이던 차라는 이대로는 목숨이 위험하겠다는 생각이 들자 미련 없이 여권 챙겨들고 짐싸서 스웨덴으로 돌아간다. 아무 생각이 없는 그녀라도 세상이 통채로 망할 일은 없지만 나라 하나 정도는 망할 수 있다는 것쯤은 알고도 남았다. 그녀의 다른 가족들은 전쟁이 나자마자 이미 그 곳으로 옮겨간 뒤였다. 돈은 독일에서 벌고 대저택은 스웨덴에 사놓고 도망간 그녀에 대해 투덜거리는 기사가 독일 신문에 떴지만 애당초 그녀는 정치 체제에 목숨 바쳐 충성하는 타입의 인간이 아니었다.
차라는 대스타였던 자신이 스웨덴에서도 별 탈 없이 인기를 이어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세월은 변해 있었다. 자국인이 외국에서 스타가 된 걸 자랑스러워하던 스웨덴 인들은 나치의 패망이 가까워오자 나치 정권 아래서 인기를 누린 차라를 경원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치가 완전히 망하자 상황은 정말 곤란하게 되었다.
정치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던 그녀는 왜 열심히 노래 부르고 연기한 자기가 나치 부역자로 욕을 먹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혹은 이해하려들지 않았다. 그리고 실제로 차라가 적극적, 의식적으로 나치에 협력했다는 꼬투리는 잡을 수 없었던지라 나치 패망후 그녀에게 내려졌던 연예 활동 금지 조치도 곧 풀렸다.
하지만 이미지가 생명인 연예인이 ?나치 가르보’라는 별명 따위를 붙이고 옛 전성기를 되찾는 것은 무리다. 게다가 그녀는 나이를 먹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주름이 지기 시작했고 그녀가 새로 찍은 영화들은 더 이상 옛날만한 성공을 누릴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요란한 화장과 분장으로 나이를 숨길 수 있는 무대로 옮겨간다. 영화의 홍보 효과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세계적 인기는 무리였지만 그녀의 콘서트들은 그럭저럭 호응을 얻었고 1979년 고별 공연 때까지 꾸준히 활동했다. 2년 후 고향인 스웨덴에서 그녀는 숨을 거둔다. 그녀의 카리스마적인 목소리에는 특히 게이들이 열렬히 환호를 보냈는데 그녀는 게이들을 일컬어 자신의 가장 충성스러운 팬들이라 했으며 오늘날에도 그녀를 닮은 빨간 가발을 쓰고 그녀처럼 화장한 뒤 그녀의 노래를 따라부르는 게이 공연가들을 종종 볼 수 있다고 한다.
출처 : 유로타임즈 강윤영님의 글
사진은 http://www.zarah-leander.de/index.htm에서 퍼왔습니다
참, 이 배우가 소련과 독일의 이중첩자였다는 소문도 있네요 ㅎㅎ
소련 스파이 의심받는 나치의 유명 여배우 차라 레안더
독일 제3제국(일명 나치) 시절 은막의 여왕으로 군림하며 히틀러의 총애를 받았던 스웨덴 출신 글래머걸 차라 레안더(Zarah Leander·사진)가 소련의 스파이였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러시아 언론인 아르카디이 왁스베르크의 폭로기사가 스웨덴 일간지에 게재된 것이 7월 초. 그는 레안더가 2차대전 발발 전부터 로즈마리라는 암호명으로 크렘린의 첩자로 활약했을 뿐만 아니라 소련의 고위급 인사와 직접 핫라인으로 연결되어 있었다는 증거를 최근 KGB 문서보관실에서 발견했다고 주장한다.
“레안더가 우리에게 북구, 미국과 독일의 정치적 관심사에 관련된 정보들을 친절하게 전해주었다”는 내용의 정보부 장교 육성 녹음테이프도 찾아냈다고 한다.
왁스베르크는 1936년부터 독일 영화제작소 우파(Ufa)의 전속배우로 활약했던 차라 레안더가 경제적 이유 때문에 첩자가 되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레안더는 영화계 데뷔 뒤 곧바로 톱스타로 부상, 늘 최고 개런티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안더가 돈 욕심이 많았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녀의 회고록에는 “나는 정치에 전혀 관심없다. 단지 전쟁 중 독일에 있는 내 재산을 모국 스웨덴으로 무사히 빼돌리기 위해 나치 재무장관과 상당히 화끈한 하룻저녁을 보냈던 일이 있을 뿐”이라는 구절도 있다.
4년 전에도 스웨덴 언론인에 의해 레안더의 스파이 의혹이 제기된 바 있었다. 레안더가 1943년 모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1950년대 말까지 소련 정보부를 위해 활약했다는 증거들을 스웨덴 정보부인 ‘재포’에 보관 중이라면서 미국 CIA의 보고서까지 인용했었다. 그러나 당시 기사는 레안더가 나치에 연합군 잠수함의 기항지를 알려주는 대가로 받은 돈으로 스웨덴 뢰노 지방의 농장을 구입했다는 사실도 폭로했다. 레안더는 소련과 독일의 이중첩자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레안더는 스웨덴판 마타하리?
첫댓글 블랙북의 그 여쥔공 생각난다긔~~
삭제된 댓글 입니다.
머리나빠 덕본케이슨가? 읽으면서 비극적으로 끝날까봐 조마조마 했는데..ㅋㅋㅋㅋ
어머 이런 게시물 재밌네요 목소리 진짜 들어보고 싶다~
이런게시물 좋아요 !!
이런 자료 좋아요~
3제국 별짓을 다했네요 하다하다 연예인 관리까지 ㅋㅋㅋ (주)틀러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