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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주님의 시선 원문보기 글쓴이: 카페지기
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깊은 교제생활이 이루어 지기를 소망합니다 |
미국의 남북전쟁이 거의 다 끝나갈 무렵, 남군은 최후의 힘을 다하여 기병대의 공격으로 워싱톤 시를 공격해 왔다. 링컨 대통령(북군)은 이 전투를 직접 관찰하기 위하여 현재의 육군병원 근처까지 나아갔다. 전쟁터 가까이에 서서 관찰하는 링컨 대통령의 그 큰 키(6피이트 4인치)는 적에게 아주 좋은 표적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래서 대통령의 이 모습을 본 한 육군 중위가 링컨을 향해서 날카로운 소리를 질렀다. “바보 같으니라구! 어서 엎드려요!” 그 이튿날 링컨 대통령은 자기에게 바보라고 소리를 친 그 중위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그 중위는 나중에 미국 대법원의 대법관이 된 유명한 홈즈였던 것이다. 육군 중위가 대통령을 향하여 “바보”라고 소리를 친 것은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시킨 실수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링컨의 관대함은 자기의 생명을 위기에서 보호한 일에 오히려 감사를 했던 것이다. 역시 큰 인물다운 데가 있다. 우리는 신앙 안에서 우리의 형제자매들이 우리에게 혹시 실수를 했다 할지라도, 이러한 관대함을 베풀 수 있는 천국의 백성들이 되어야 하겠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치고 실수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도량을 우리도 가져야 하리라. 실수를 관대하게 보아줄 수 있는 아량이 바로 사랑의 시작이라고 믿는다.
잠 19:11
제목 / 사람의 모양이 되라 본문 / 빌 2:3-8
1. 교회가 사랑도 있고 열심도 있는데 전도의 열매가 없고 성숙되지 못하며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 있는가? 그것은 예수를 믿고 구원함을 받기는 받았는데 구원을 이루어가는 생활, 다시말해 성화(聖化)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화의 주체는 성령인데 그 성령운동이 자신과 가정, 그리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운동이 되지 못하는데 원인이 있습니다. 성화는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생활을 말합니다. 예수를 닮는 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겸손'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겸손은 거룩한 삶의 모습입니다. 교회가 사랑도 있고 열심도 많은데 성숙되지 못하고 봉사와 전도의 열매가 없으며 가정과 사회를 변화시키지 못하는 것은 바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서로 돕는 겸손의 생활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사랑도 있고 열심도 있으나 교회가 겸손하지 못하면 하나되지 못하여 성장하거나 발전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 하나가 되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이 겸손,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생활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를 본받아 겸손하여 하나가 되지못하면 지역 사회를 결코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성령의 하나되게 하시는 역사를 힘입지 않고서는 기독교의 바른 정신을 상실하여 세상으로부터 비난과 버림을 받게 될 것입니다. 교회가 성령의 하나되게 하시는 것을 힘써 지켜 겸손한 모습으로 세상을 섬겨야만 세상은 변화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 간행물 <라이프>지가 선정한 지난 1000년의 역사를 뒤흔든 100대 사건가운데 하나가 영국에서 태동한 <노동운동>이었습니다. 노동 조합은 공장만큼이나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노동 조합의 시초는 17세기 영국에서 비롯되었는데 처음부터 자본가나 정부의 엄한 탄압 아래 놓였으므로, 스스로를 방위하고 서로 돕는 것을 목적으로 협동 조합이나 비밀 결사의 형태를 취하였습니다. 영국에서 노동 조합의 시초 형태가 나타나게 된 것은 산업혁명과 연관이 깊습니다. 18세기에 방적, 석탄 산업 등을 중심으로 기계 공장들이 급속한 성장을 보이면서 상대적으로 수많은 농민과 수공업자들이 몰락하였습니다. 따라서 농토와 공장을 버리고 떠나온 농민, 수공업자들은 물론이고 여성과 아직 일을 하기엔 터무니없이 어린 아이들까지도 임금 노동자로서 공장에서 고된 노동에 시달려야만했습니다.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으로 가혹한 착취를 당했던 것입니다. 이런 배경하에서 기능공들을 중심으로 한 노동 조합 결성의 움직임이 광범위하게 나타났습니다. 결국 영국 정부는 1799~1800년에 '단결 금지법'이라는 법안을 제정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탄압법 아래서도 조합의 조직화, 노동자의 격렬한 저항은 그치지 않았고 1824년과 그 이듬 해, 단결 금지법의 철폐를 이끌어 냈습니다. 이즈음해서 영국은 산업자본주의 시대로 접어들었고, 노동 조합의 움직임도 더욱 활기를 띠었습니다. 노동조합의 태동이 영국에서 있었듯이 노동자 계급에 의한 최초의 대규모 정치적 운동도 역시 영국에서 일어났습니다. 1838년 8월, 기능공들에 의해 조직된 노동 조합인 '런던 노동자 협회'가 인민 헌장을 선포한 후 6개항의 의회 개혁 요구안을 내걸면서 전국적인 운동 형태로 결집을 한 것입니다. 10시간 노동법 운동, 새로운 빈민 구제법에 대한 반대, 신문 인지세 반대 등이 포함된 요구안은 단순히 노동 시간의 단축 문제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의 권리를 증진하기 위해 새로운 정치적 질서를 목표로하는 운동이었습니다. 이때의 노동 운동을 일명 '차티스트 운동(Chartist Movement)' 이라고 부르고 참가자들을 차티스트라하였는데, 그 명칭은 '인민 헌장(People'Charter)'에서 따온 것입니다. 의회에 제출한 청원서가 부결되어 패배로 끝나긴 했지만, 북부 공업 도시에서의 총파업은 소요사태로까지 이어져서 군대가 출동해서야 겨우 진압할 수 있었으리만큼 단결된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러한 단결의 결과로 1848년, 당시의 요구안 중 일부가 법제화되었고, 이 일은 파리, 로마, 비엔나와 베를린 정부에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또 노동 운동의 조류도 정치 개혁 운동으로부터 일상적인 노동개선 운동으로 전환되었으며, 노동 조합이 당당히 그 중심에 서게 되었습니다. 하루 8시간 노동, 직장 내 안전 개선, 최소 임금 보장, 어린이를 보호하기 위한 어린이 노동법 등등은 모두 노동 조합이 안겨다 준 변화였습니다. 그러나 차티스트 운동이 보여 주듯이 그 변화는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라 고통과 폭력, 의견 대립의 긴 터널을 통과한 이후에 이룩된 것입니다. 1세기도 더 이전에 최초로 터져 나온 '노동자 단결'이라는 구호는 아직까지도 세계 곳곳에서 울려퍼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나라도 노동자의 단결이 정치사회에까지 큰 변화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권익보호를 위해 단결해야 하는 것이며, 그것이 정치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다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단결하여 하나가 되라 하는 것은 교회의 권익보호를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섬기기 위해서, 자신보다는 남의 유익을 위해서 하나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가 되는 방법이 노동운동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게 겸손하라는 것입니다. 노동자는 자신의 권익보호를 위해서 하나가 되어 힘을 뭉쳐 싸워야 하지만 기독교는 힘을 뭉쳐 싸우는 것이 아니라 희생하고 사랑하며 섬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십자군식으로 봉사하거나 복음을 전도해서는 결코 그 열매를 거둘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십자군 전쟁처럼 성스러운 이름에 가장 세속적인 욕망이 결합된 전쟁은 없으며, 신의 이름을 빌어 약탈과 살인․만행이 판을 친 전쟁이 없을 것입니다. 전쟁의 발단은 예루살렘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유대인․기독교인․이슬람인 공통의 성지였습니다. 유대인에게는 다윗의 우물이 있는 어머니 도시요, 기독교도에겐 예수가 죽어 부활한 곳, 이슬람 교도에겐 마호메트가 머무른 곳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예루살렘을 지배하고 있던 이슬람인들은 기독교인의 성지 순례를 방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셀주크 투르크 족이 이 지역을 장악하면서부터 기독교인의 성지순례는 금지되었습니다. 셀주크 투르크 족은 중앙 아시아에서 일어난 민족으로서 열렬한 이슬람 교도가 되어 세력을 팽창시키고 있었습니다.
위협을 느낀 동로마 제국 황제 알렉시우스 1세는 교황 우르반 2세에게 원조를 요청했습니다. 우르반 2세는 이것이 비잔틴 교회를 로마 교회에 복속시킬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1095년 11월 우르반 2세는 클레르몽에서 회의를 개최, 성지 탈환을 위한 십자군 파병을 제창했습니다. 웅변술이 뛰어났던 그는 성지 예루 살렘을 잃은 기독교도들의 비참한 생활과 투르크 족의 위협을 설명하고, 이슬람의 승리는 기독교 세계의 불명예라고 열변을 토했습니다. 이 전쟁은 성전이며, 전사자는 모두 천국에 가서 그 보상을 받을거라고 역설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동방엔 금은보화가 깔려 있고 아리따운 이슬람 여인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며 제후들의 욕심을 부채질 했습니다. 교황의 웅변에 감격한 참석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외쳤습니다. "하나님이 이를 원하신다!" 1096년 재1회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향해 떠났습니다. 여기에 참가자들 모두가 의복에 십자가 표지를 붙였다고 해서 '십자군'이라고 불리우게 되었습니다. 십자군은 안티오크를 점령하고 예루살렘을 눈앞에 두었습니다. 이 무렵 (마라의 학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프랑스 출신의 기사 보에몽이 이끄는 십자군 부대는 마라 성에 도착하여 목숨이 아까운 자는 궁전 안으로 피난하라고 최후통첩을 보냈습니다. 그런 다음 성안으로 진격, 닥치는 대로 약탈과 살륙을 자행했습니다. 사라센 인이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죽였으므로 성안은 시체로 뒤덮여 산을 이를 지경이었습니다. 게다가 궁전에 피난하고 있던 사람들까지 공격해서 소유물을 빼앗고 살아남은 자는 노예로 팔아버리고 말았습니다. 마라에 머문 지 1개월, 식량이 떨어지자 사라센인을 죽여 톱으로 배를 갈라보기도 했습니다. 사라센 인들이 금은보화를 삼켜 뱃속에 간직한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그들은 또한 죽은 사라센 인의 고기를 요리해 먹기도 했습니다. 십자군의 약탈과 만행은 비단 마라에서만이 아니었습니다. 어쨌든 이들은 남하를 계속, 1099년 6월 드디어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예루살렘 전투는 6주일간 계속되었습니다. 여기서도 십자군은 적군은 물론 주민들까지 무차별로 죽이는 잔학성을 보였습니다. 십자군에 종군했던 남프랑스 출신 성직자의 기록을 보자. <거기엔 너무도 처참한 광경이 벌어져 있었다. 큰 거리와 광장엔 사람의 머리며 팔다리가 산더띠처럼 쌓여 있었다. 십자군은 시체를 아랑곳하지 않고 전진했다. 신전과 벽들은 물론 기사가 잡은 말고 삐까지 피로 붉게 물들었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성지순례를 방해했던 자들로 더럽혀졌던 이곳이 그들의 피로 씻겨져야 한다는 신의 심판은 정당할 뿐 아니라 찬양되어야 한다.> 그들에게 십자군의 대량학살은 신의 심판이요 영광으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이렇게 신의 이름으로 수많은 피를 흘리게 한 십자군은 기독교신자가 아닌 사람들에게 그들의 옷에 붙은 십자가 표식은 무시무시한 공포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성지탈환에 성공한 십자군은 예루살렘에 왕국을 세우고 개선했습니다. 그러나 곧 다시 이슬람에게 예루살렘을 빼앗겼고, 교황은 연달아 십자군을 파견했습니다. 십자군 원정은 총 8차에 걸쳐 일어났는데 그중 성지탈환이라는 본래의 목적을 달성한 것은 제1차 원정 때뿐이었습니다. 나머지는 어처구니없는 탈선행위로 일관했고, 심지어는 엉뚱하게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공격, 라틴 제국을 세운 일도 있었습니다.
1212년의 제5차 십자군, 이른바 소년 십자군은 상인들과 결탁한 선주의 농간으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로 끌려가 사라센 인에게 노예로 팔렸습니다. 사라센 인들은 700명에 달하는 이 소년들을 다치지 않고 모두 해방시켜주었습니다. 200년에 걸친 십자군 전쟁은 실패로 끝이 났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더 이상 교회와 교황을 절대적인 존재로 믿지 않게 되었습니다. 전쟁에 참가했던 영주와 기사들은 영지를 돌보지 않은 탓에 수입이 줄고, 참가비용을 조달하느라 가산을 탕진하여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반면 눈에 띄게 세력이 커진 것은 국왕과 상인들이었습니다. 상인들은 전쟁으로 많은 돈을 벌어들였으며, 국왕은 교황과 제후들을 누르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이들 신흥 상인층과 손을 잡았습니다.
기독교가 예수 그리스도처럼 십자가를 지고 자신이 피를 흘리며 골고자 언덕을 향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약탈과 살인을 서슴지 않고 자행하여 십자가 표식이 공포의 대상이 되게 한 것은 중세 기독교의 암흑기를 예고한 것이었습니다. 교회는 십자군식으로가 아니라 십자가를 지는 마음으로 봉사하고 전도하며 이웃을 섬기는 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입니다. 십자군식으로 행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겸손함이 아니라 교만한 것입니다. 겸손한 방법은 그리스도처럼 십자가를 지는 마음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2. 그러므로 겸손함이 없는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와는 거리가 먼 교회입니다. 각종 은사를 받아서 은혜가 충만하고 성령이 충만한 것 같아도 겸손함이 없이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서로 돕지 아니하면 은혜스러운 교회, 은혜스러운 성도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한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강한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한 성도가 되시고 하나님의 은혜로 사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은사에 의존하여 살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여 살게 될 때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은사로 사는 사람보다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이 강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으며 세상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은사에 집착하거나 은사 의존적인 사람들과 사귀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들과 사귀어 보시기 바랍니다. 위로와 용기,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교회에 보면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기도회를 가지거나 자기들끼리 기도원에 가거나, 그러한 집회에 심심찮게 찾아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계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그런 사람끼리 모여 계를 조직합니다. 특히 울산에 보면 각종 계중 모임이 많습니다. 같은 성향을 가진 사람들끼리만 모이는 것입니다. 교회가 만약 이런 모습처럼 끼리끼리만 모인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평강교회는 어떤 계중 모임이 아닙니다. 사업가들만 모이는 곳도, 장사하는 사람들만 모이는 곳도, 회사원이나 노동자들만 모이는 곳도, 학자나 지체 높은 사람들만 모이는 곳도, 장교들만 모이는 곳도, 아니 사병들만 모이는 곳도 결코 아닙니다. 미국 남부에 이혼한 사람들만 모이는 교회가 있습니다. 그 교회에는 이혼한 남자나 여자가 아니면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 교회에 들어갈려면 이혼해야만 합니다. 교회는 어느 한 계층만의 유익을 위한 곳이 결코 아닙니다. 교회는 인간적인 일을 도모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 세워진 영적인 모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택하셔서 교회,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신 것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다시말해 예수를 본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를 본받기 위해서는 예수의 마음을 가져야 하고 예수의 마음은 그가 본래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셨으나 동등됨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종의 형체, 사람의 모양을 취하신 것입니다. 그래야만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으며 세상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는 비결이 사람의 모양, 종의 형체를 취하신 것임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처럼 행세해서는 안됩니다. 교회가 예수님처럼 행세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처럼 사람의 모양을 지녀야 합니다. 종의 형체로 사람들을 섬겨야 합니다. 예수믿는 사람들 가운데 때로 하나님처럼 행세하거나 예수님처럼, 자신이 성령님처럼 행세하는 사람이 없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여러 종류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때로는 유대인도 되시고, 때로는 약한 사람의 모양도 되시고, 때로는 강한 사람의 모양도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의 사람이 되어야 할 이유는 그래야만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전9:19)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고전9:20)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고전9: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고전9:22)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의 사람이 되는 것은 겸손하지 아니하면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남을 섬기고 남의 종이 된다고 영원히 그 사람의 종이 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잠간 있다가 가는 이 세상에서만 사람의 모양으로 사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다스리기위해 이 세상에 사람의 모양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람을 섬기기 위해 사람의 모양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가 원했던 것은 대접을 받고자 함이 아니라 그가 원했던 것은 남을 돕고 봉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의 길을 가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십자가의 길을 가시기 위해 세상에 사람의 모양으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군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기 위해 사람의 모양으로 오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높임 받기를 원하시않고 자신의 모든 영광을 인간을 위해 버리시고 사람의 모양으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3. 예수께서 이처럼 겸손하게 사람의 모양으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여 사람을 섬기고, 사람을 사랑하시고, 사람을 위해 희생하시므로 모든 만물이 예수님을 경배하게 되는 기적을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아 경배함을 받게 된 것은 그의 대단한 권력과 권세를 휘둘러서가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않을 수 없는 사랑과 자기 희생, 그리고 하나님이 사람의 모양으로 오셔서 사람을 섬기는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양이 되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람을 사랑하시고 사람을 섬기시는 그 사랑과 겸손 앞에 사람들의 마음이 녹아지고 강팍했던 반항심들이 수그러지고 부서지고 깨어진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예수님을 예배하게 된 것은 그의 놀라운 은사앞에, 그의 놀라운 권력앞에 기가 죽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의 모양이 되신 사랑과 희생, 그리고 그의 겸손함에서 울어나오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게 하는 것은 사람이 모양이 되신 그의 사랑과 겸손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의 기초는 사람의 모양이 되신 그 분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가정이나 교회가 변화되기를 원하시면 먼저 무릎를 꿇으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여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겸손히 섬기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사회가 변화되기를 원하신다면 서로 섬기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며 구원하기를 원하신다면 서로 겸손히 섬기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을 예수의 무릎앞에 꿇게 하여 구원하기를 원하십니까? 먼저 여러분이 예수처럼 종의 형체를 지닌 사람의 모양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