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10일 [2024년 나해 설]
창조자를 믿으면 삶의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은 홍익인간일 수밖에 없다
오늘은 설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런데 새해부터 마지막 심판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이유는 시작부터 어떤 목적으로 살지 않으면 행복한 결말을 맞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잘 준비된 경기만 이길 수 있습니다.
경기가 있는데 준비하지 않고 있다면 과정에서도
몸은 편할지라도 마음은 불안하고 그리고 원하지 않는 결말을 맞게 됩니다.
그러니 깨어 있는 삶이란 내가 창조된 목적대로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차가 차로 살아가야 깨어 있는 것이고, 사람은 사람으로, 사제는 사제로 살아야 깨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창조자는 그 목적을 ‘홍익인간’(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으로 창조합니다.
자동차도 그렇게 사람도 그렇습니다. 사람을 낳을 때 그 아이의 행복을 위해 가족에도 행복이 되고 세상에도 행복이 되기를 바랍니다.
창조자는 항상 홍익인간의 정신으로 모든 것을 창조합니다.
그러니 올 한 해 우리 가정과 나라, 세상을 위해 어떤 유익과 행복을 줄 수 있는지를 생각하며
단 1분이라도 그것에 투자하는 시간을 갖는다면 그것이 깨어 있는 삶이 될 것입니다.
깨어 있는 삶이란 무엇일까요? 저는 사명이 있는 삶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주인은 일을 시키는 사람이고 종은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창조는 분명 목적을 전제합니다.
목적 없이 만들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피조물은 그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깨어 있음입니다.
차르 니콜라스 2세의 아들인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는 심각한 유전 질환인 혈우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알렉세이의 질병은 왕실과 결과적으로 러시아 역사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아들을 위한 치료법이나 구제책을 찾고자 하는 황후의 절박함으로 인해 그녀는 신비롭고 자칭 성자라고 불리는 라스푸틴에게 크게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라스푸틴이 왕실, 특히 황후에 대한 영향력과 국가 문제에 대한 그의 개입은 러시아 국민 사이의 불만이 커지는 데 크게 작용했으며 결국 러시아 혁명으로 나라가 무너지게 하였습니다.
니콜라스 2세는 자녀와 가족밖에 몰랐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참다운 사명이 나라의 행복임을 잊고 자기 가족만을 챙겼습니다.
이 때문에 수백, 수천, 수만 명이 죽어 나가는데도 눈 깜짝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신앙이 있어도 이런 자세는 올바른 신앙인의 자세가 아닙니다.
창조자가 무엇 때문에 마음 아파하는지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창조자는 홍익인간의 창조이념이 무너질 때 마음 아파합니다.
그렇게 온 가족이 한 순간에 한방에서 몰살당하게 됩니다.
이와 대조되는 크로울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두 자녀는 4만 명당 한 명꼴로 발생하는
폼페병으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크로울리는 자녀를 치유하기 위해 직장을 그만둡니다.
그런데 신약 하나를 개발하는 최소비용은 약 1억 달러, 1,300억 원 정도가 필요합니다.
크로울리는 자신의 노력이 자기 자녀뿐 아니라 자신의 자녀들처럼 고통받는 수많은 사람과
그 가족에게 유익할 것이라 여겨 도전합니다.
이 과정에서 스톤 박사를 만나 함께 신약 개발에 나서게 되고 크로울리는 사업 수완으로 1억 달러를 모으게 됩니다.
그리고 몸이 나빠지는 시간을 늦춰 아직도 자녀들이 생존하게 하였습니다.
크로울리는 하느님을 믿지 않더라도 마음 안에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해야 한다는 사명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깨어있는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 설날이고 한 해의 시작입니다.
하루에는 아침에, 일 년에는 정초에, 그리고 평생에는 아이 때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시간은 충분하지 않고 그 허비되는 시간만큼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목적을 가지고 사는 삶 자체가 창조자가 존재한다는 믿음을 지닌 삶입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언제나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라는 사명이어야 합니다.
모든 창조자는 그런 목적으로 창조하기 때문입니다.
한 해 단 1분이라도 매일 온 세상의 유익을 위해 투자한다면 이미 깨어 있는 참 행복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고 참으로 복 받는 삶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2월10일 [설 날]
복음: 루카 12,35-40:
묘지 앞에서
한 형제와 작별하러 공원묘지에 갔을 때입니다.
하관 작업과 추모를 마치고 시간이 좀 있길래 묘원 사이를 거닐었습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거기 누워계시는 한분 한분을 위해 기도해드렸습니다.
돌아가신 분들의 이름과 세례명, 생몰연대를 쭉 읽어나가는데, 100년도 훨씬 전인 1900년대 초반에 돌아가신 분이 있는가 하면, 불과 사흘 전에 묻힌 분도 계셨습니다.
백수를 누리고 돌아가신 분이 있는가 하면 꽃다운 20대 초반 나이에 돌아가신 분도 있었습니다.
한 시간 남짓 짧은 시간이었지만, 제 개인적으로 은혜로운 순간이었습니다.
마치 짧은 하루 피정 같았습니다.
공동묘지는 우리에게 죽음이 무엇인지?
생명은 또 무엇인지?
그리고 인간 존재가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묵상하도록 초대합니다.
설날을 맞아 교회 전례 독서는 우리를 죽음에 대한 묵상으로 초대합니다.
먼저 떠난 이들의 죽음을 헤아려보며, 우리의 근원, 우리의 처지, 우리의 목숨이 대체 무엇인지도 성찰케 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우리가 지니고 있는 생명과 목숨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합니다.
그 목숨을 조금이라도 연장시키기 위해 발버둥을 칩니다.
이런 우리에게 야고보서는 얄짤 없습니다. 아주 단호하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우리는 우리 각자의 기대수명을 너무 길게 잡는 경향이 있습니다.
저만해도 기대수명이 84세인데, 처음에는 한국인 평균은 되는구나 했었는데, 하룻밤 자고 나니 왜 94가 아니고 84인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우리의 큰 착각은 우리가 아주 길게, 영원히, 적어도 백 살은 살겠지 하는 생각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루카 복음 사가 역시 칼같이 짜릅니다.
“너희는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2월10일 [설 날]
복음: 루카 12,35-40: “준비하고 있어라!”
오늘은 우리 민족의 고유 명절인 설이다. 우리가 설을 맞이하여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생명을 전해주시고 이 땅에 살게 하신 우리 선조들에게 감사하며 이 미사를 봉헌하는 이 날, 복음은 종말론적인 가르치심이면서 또한 순간순간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시고, 한 해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주님은 매 순간 우리에게 오시고 계시다. 그러기에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죽음도 마찬가지이다.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항상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값진 보물을 차지하는 것은 이미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예수께서 여기서 사용하는 비유는 옛날 일반적이다. 여행을 떠날 때는 기다란 옷을 무릎까지 올려 전대를 묶는 튼튼한 가죽 띠로 묶고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여기에서 여행은 캄캄한 밤에 하는 것이고, 그러기에 밝은 등불을 밝힐 필요가 있다(35절). 다음 말씀은 전혀 반대이다. 여행이 아니고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만나기 위하여 나가는 것이다. 주인이 와서 문을 두드리고 그에게 즉시 문을 열어 주기를 원한다(36절). 오시는 주님은 행복하다고 한 깨어있는 종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들을 위해서 즉시 잔칫상을 차리고 거기서 그들에게 시중을 들어줄 것이다(37절). 종들이 깨어있다면, 주께서는 밤중의 어느 때에라도 오실 수 있다. 깨어있는 중에 말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한밤중이나 새벽녘에 오실 수도 있다. 어떻든 깨어있는 종들을 만나면 영원한 행복의 종말론적인 명칭인 “행복한” 자들이라고 해 주실 것이다(38절).
예수께서는 일상생활에서 확실히 깨어있을 것을 함께 말씀하신다. 가정의 훌륭한 아버지는 확실히 깨어 강도의 침입으로부터 집을 지키기 위하여 강도가 오는 때를 알고 싶을 수 있다(39절). 제자들에게 있어서도 오시는 사람의 아들이 언제까지 늦어지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다. 어떻든 오실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알지 못하는 시각에, “강도처럼” 오실 것이다(40절). 우리의 삶 속에서 주님은 언제나 오신다. 그분은 나의 아내를 통해서, 나의 남편을 통해서, 나의 자녀들을 통해서, 부모님을 통하여, 내가 만나는 이웃을 통해서 등 여러 가지 형태로 오신다. 쉽게 말하면, 이웃을 통하여 우리는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의 이웃을 통하여 우리를 만나고, 우리와 친교를 나누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이웃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 때문에도 그 이웃과 더 깊은 사랑을 나눌 수 있다. 이 사랑이 바로 주님께 대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웃은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이정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웃이라는 이정표를 잘못 읽을 때, 우리는 엉뚱한 길로 갈 수 있다.
주님이 오시는 순간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우리에게 항상 오시고 계시지만 우리가 깨어있지 못하면 그분을 만날 수 없다. 깨어있을 때만이 우리는 그분을 뵙고 함께 살 수 있다. 설날을 맞이하여 우리 자신이 모두 항상 깨어있는 삶을 통하여 언제나 주님을 만나 그분과 함께 살며 그분을 닮는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