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
벧후 1:16-21
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17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18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
19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20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벧후 1:16-21 / [그리스도의 영광과 예언자의 말] 우리가 여러분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재림에 관해 들려준 이야기는 교묘하게 꾸며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나는 내 눈으로 그리스도의 광채와 그 영광을 직접 보았습니다. 17-18) 거룩한 산위에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주신 영광의 광채로 그리스도께서 눈부시게 빛나셨을 때 나는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나는 그때 영광스럽고 위엄에 찬 다음과 같은 음성을 들었습니다. ㄱ) `이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흐뭇하게 여기는 아들이다.' (ㄱ. 창22:2,시2:7,사42:1) 19) 이렇게 해서 우리는 예언자들이 말한 것이 사실대로 이루어진 것을 목격한 것입니다. 예언자들이 기록한 모든 것을 보다 직접적인 사실로 연관시켜 보아도 좋습니다. 마치 어두운 구석을 환하게 비추는 빛과 같이 예언자들의 말은 우리를 도와 암시적이고 어려운 것을 많이 깨닫게 해줍니다. 그리고 마침내 여러분이 예언자들의 말씀을 깊이 깨달을 때 여러분의 영혼 속에 놀라운 진리가 빛나고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샛별처럼 자리잡으실 것입니다. 20-21) 성경에 있는 예언의 기록들은 예언자가 스스로 생각해 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들 속에 계시는 성령께서 주신 하나님의 참된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직접 경험한 변화산 사건(마 17:1-8; 막 9:2-8; 눅 9:28-36)과 구약에 기록된 예언(메시야에 대한 선지자들의 증언) 이 2가지를 들어 자신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이 진실하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3:4)라고 물으며 재림을 조롱하는 거짓 선생들에 맞서 재림의 확실성에 관한 베드로의 변증이 시작됩니다.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16-18) 헬라 사회에서는 종종 인간의 세계관과 욕망을 담은 종교적 신화들이 만들어지고 숭배되었습니다. 이를 비판하는 사람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 역시 사람이 교묘하게 만들어낸 하나의 종교적 신화에 불과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도 황당한 이야기일 뿐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이런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합니다. 베드로가 전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은 베드로를 포함한 사도들(야고보, 요한)이 직접 보고 들은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위엄을 직접 보았고(마 17:2; 막 9:2-3; 눅 9:29), 하늘로부터 나는 소리(마 17:5; 막 9:7; 눅 9:35)를 직접 들었습니다. 베드로의 이 증언은 예수 그리스도가 신화에 나오는 인물들과 구별되는 존재로서 이 땅에 살았던 역사적 존재인 동시에 초월적인 권능을 지닌 신이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19-21) 베드로는 첫 번째 증거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성경입니다. 성경은 구약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좁게는 구약에 기록된 메시야의 강림에 관한 선지자들의 예언을 말합니다. 베드로는 구약과 복음서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를 당시 헬라 사회에 퍼져있던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비슷한 양식들과 철저하게 구별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와 그의 가르침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한 것이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하나님께 메시야에 대한 메시지를 받아 예언하였고, 사도들은 자신들의 삶에서 이 예언이 실현되는 것을 직접 목격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 자신이 전한 것이 영원한 진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성도들이 자신의 사후에도 이 명백한 진리 위에 굳게 설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성도가 뿌리내리고 서야 할 자리는 성경입니다.
적용: 혹시 당신의 신앙은 내 감정이나 생각, 판단, 경험, 인간의 철학과 이론 위에 서 있지는 않습니까?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들에게 꼭 필요한 마음의 가짐이 있습니다. 복음에 대한 확실한 믿음과 항상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얄팍한 지식과 경험으로 말씀을 해석하려 하고 들으려 한다면 진정한 복음이 전해지지 않게 될 것입니다.
< 설 교 >
베드로후서 1장
베드로후서 1:16-21 / 김호현 목사
우리는 친히 보고 들은 자라(16-18절)
초대교회 성도들은 안과 밖, 두 방향에서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교회 밖에서는 로마로부터 대핍박이 다가오고 있었고 안으로는 거짓 교사들과 그들의 이단 사설의 위협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이 거짓 교사들은 주님의 재림의 교리를 부인하고 성도들이 품고 있던 종말 신앙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이에 사도 베드로는 이러한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으로부터 성도들을 보호하고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도록 하기 위해 자신의 생생한 경험을 바탕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를 변증해야만 했습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부인하는 거짓된 가르침에 대항하여 그리스도의 재림의 확실성을 변증합니다. 이를 위해 베드로는 변화산상에서의 자신의 경험과 구약 예언을 들어 그리스도 재림이 반드시 있을 것을 피력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강조하는데 이는 주님께서 공생애 동안 행하셨던 기적들을 의미한다기보다 부활하신 주로서 그분이 소유하고 계신 신적 권능을 의미합니다. 베드로는 이러한 주님의 능력을 변화산상에서도 목격하였고 또한 마지막 날에 다시 오실 때에 모든 사람이 보게 될 것임도 확신하였습니다.
본절에 등장하는 ‘교묘히 만든’의 헬라어 원어는 ‘소피조’이며 이는 ‘지혜롭게 하다’, ‘교묘하게 고안해 내다’란 뜻을 갖고 있습니다. 이야기에 해당하는 원어 ‘뮈도스’는 종교적 언어로 사용될 때에는 ‘신비적인 이야기’ 또는 ‘꾸며낸 신화’ 쯤으로 인식된 단어였습니다. 즉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종말론적 교훈이 절대로 ‘교묘하게 꾸며낸 거짓 신화들’이 아님을 변증하고 반대로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이야말로 ‘교묘하게 꾸며낸 허탄한 이야기’라는 사실을 부각 시켰습니다. 그가 이렇게 확신에 찬 주장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주님의 변화산 사건을 친히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하였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사용된 ‘친히 본 자’의 원어인 ‘에폽타이’는 신약 성경에서 유일하게 이 본문에서만 쓰인 단어인데 ‘감독자들’, ‘목격자들’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무언가를 목격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사람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즉 베드로는 자신을 포함한 야고보와 요한이 특권을 갖고 주님의 변화산 사건을 목격하였음을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한 자긍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복음이, 거짓 교사들에 의해 교묘하고 허탄한 거짓 이야기로 매도되고 있었으니 얼마나 탄식할 일이었겠습니까.
‘지극히 큰 영광’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임재를 완곡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변화산상에서 예수님에게 ‘내 사랑하는 아들’, ‘내 기뻐하는 자’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가장 기뻐하시는 분은 바로 성부 하나님이셨던 것 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아버지의 말씀에 100% 순종하실 수 있었고 그 순종 때문에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성취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일은 그 어느 누구도 할 수 없고 오직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실 분이신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서 공식적으로 인정하시고 그에게 존귀를 부여하셨음을 반영하는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직접 부여하신 존귀와 영광이기에 그리스도의 영광을 부정하려는 거짓 교사들의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18절).
‘우리가’에 해당하는 원어 ‘헤메이스’는 본절에서 강조적 용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원문의 뉘앙스를 살리자면 ‘우리가 분명하게 들었다! 정말 우리가 들었다!’ 정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강조 할 수 있는 이유는 함께 있었던 야고보와 요한이 분명한 증인이며 이들의 경험과 증언은 객관적인 것임을 드러내기 위함 입니다. 이러한 내용들은 거짓 교사들은 절대로 흉내낼 수 없는 경험들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도 복음을 교묘하게 꾸며낸 허탄한 신화정도로 이해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구약 성경을 유대 민족의 신화로 치부하거나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역사적 진실이 아니라고 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입장에서는 오감으로 경험할 만한 증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문 속 사도 베드로는 자신이 생생하게 보고 들은 예수님을 확신에 차서 “친히 우리가 듣고 우리가 보았다!”라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그 증언은 2021년을 살아가는 저와 교우님들에게도 신약 성경의 말씀으로 동일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허탄한 신화에 빠지기보다 성경을 통해 증거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을 줄 아는 바른 믿음이 저와 교우님들에게 있으시길 소망합니다.
성경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것(19-21절)
19절 전반부에서 베드로는 ‘더 확실한 예언의 말씀’을 갖고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예언의 말씀이란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선지자들의 예언을 뜻합니다. 즉, 다소 희미하고 흐릿하게 느껴졌던 구약 속 하나님의 말씀들이 변화산에서 보고 들었던 예수님의 모습과 하나님의 음성 덕분에 더욱 강력한 신빙성을 얻게 되었다는 것 입니다. 그렇기에 초대교회 성도들은 베드로처럼 변화산에서 함께 하지 못했고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지는 못했지만 성경의 말씀을 통해 베드로와 동일한 증인의 자격을 갖게 되었습니다.
또한 19절 중반부에 등장하는 ‘어두운 데’는 죄로 인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이 없는 세상’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며, ‘비추는 등불’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 합니다. 그리고 19절 후반부에 등장하는 ‘날이 새어 샛별이 떠오르다’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를 나타냅니다. 우리는 새벽의 끝에 샛별이 뜨고 머지않아 해가 떠 밝은 새날이 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그 샛별의 빛은 우리 마음에 떠올라 죄로 가득한 세상의 어두움을 몰아낼 것입니다. 그 때까지 재림에 관한 잘못된 교리들이 난무할 지라도 우리는 분별력을 갖고 바른 진리, 바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은 비록 말씀들이 우리 안에서 희미하게 다가올지라도 주님께서 오시게 될 때에는 거울로 마주보는 것 같이 선명하게 모든 것들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20-21절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바른 진리와 바른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거짓 교사들은 자신들의 사견과 경험을 토대로 그리스도의 재림의 교리를 왜곡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사람의 뜻’과 ‘성령의 감동하심’을 선명하게 대조시키면서 성경 기록 동기 및 성경의 내용에 사람의 뜻이 전혀 개입되지 않고 성령의 영향력만 있었음을 분명하게 밝히며 성경의 임의적 해석을 경계시켰습니다.
성경은 성경 기자들이 성령의 감동하심과 성령의 영향력하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계시를 기록한 기록물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사람을 성경의 기록자로 삼으시면서 그들의 문학적 재능이나 삶의 양식등을 활용하셨지만 그것 역시 철저히 하나님의 뜻만 나타나도록 성령을 통해 역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과 그분이 행하신 일들이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하며 성경의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일부 사람들이 성경을 함부로 해석하려 합니다. 성경 속 하나님의 뜻을 밝혀내려하기보다 자신의 세속적 야망을 이루거나 성도들을 선동할 목적으로 해석하고 설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는 기록된 계시를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만홀히 여기는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오직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며 경외하는 마음으로, 또한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덮어놓고 믿지말고 성경을 펼쳐서 읽고 믿어야 합니다. 부지런히 읽고 건강한 교회와 목회자의 도움을 받아 말씀을 깊이있게 이해하고 진리를 분별하는 힘을 가져야 합니다. 말씀을 가까이 할 때 우리는 그 어떤 가짜 진리, 유사 복음 앞에서도 진리위에 굳건히 서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대로 행함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예비하신 풍성한 복을 다 누리시는 우리 100주년기념교회 모든 교우님들 되시길 축복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베드로가 직접 보고 들었던 주님에 대한 증언을 오늘 이 시대에 기록된 계시로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함께 증인의 자격을 허락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100여년 전 그 옛날, 많은 선교사님들이 바다를 건너 조선으로 들어와 주님의 증인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2021년 우리들이 주님의 증인이 되길 원합니다. 삶의 현장 속에서 “우리가 보았고, 우리가 들었노라!”하며 그리스도의 재림을 증언하는 삶을 살게 하시고 준비하는 우리 모든 교우님들 되게 하옵소서. 주님 오실 그날 까지 가짜 진리를 분별하고 바른 진리를 붙잡으며 말씀 가까이 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 우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위한 질문
1. 나에게 있어서 성경은 어떤 권위를 갖고 있습니까?
2. 베드로는 증인의 삶을 살았습니다. 내 삶 속에서 말씀의 증인답게 살기 위해 했던 노력들은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3. 최근까지 잘못 알았다가 새롭게 알게 된 성경 해석이 있습니까? 그 경험을 통해 얻게 된 깨달음은 무엇입니까?
4. 말씀을 가까이 하기 위해 앞으로 어떤 구체적인 실천들을 결단 하시겠습니까?
구원에 대한 위대한 증거
베드로후서 1:16-21 / 한인 그리스도의 교회
예수님에 대한 쉬운 질문과 답을 드려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디에서 태어나셨지요? 베들레헴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태어나셨지요?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예수님을 낳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왜? 세상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습니까?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돌아가신 후 며칠만에 부활하셨습니까? 삼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며 때가 차면 세상을 심판하시고 그를 믿고 따르는 자들을 천국에 안내하시기 위해 다시 오실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에 대해 질문을 해보았고 또 답을 했습니다. 우리들은 성경을 통해 위의 사실을 알고 믿고 있지만 세상에는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이나 주님의 부활 승천 또 재림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주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오셨던 초림이나 재림을 믿지 않기 때문에 천국과 지옥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천지와 그 가운데 있는 생물들을 창조하셨다고 믿고 있지만 어떤 자들은 세상의 생물들이 창조된 것이 아니라 미생물이 점점 진화되었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사단의 세력이 왕성하여 어떻게든 믿는 자들을 하나님의 품에서 벗어 나오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도록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능력과 권위를 깎아 내리고 그 자리에 자기가 서려고 안간힘을 다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이런 자들을 두고 적 그리스도, 거짓 선지자 등으로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 후서는 이런 거짓 선지자들의 거짓 가르침을 폭로하고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내기 위해 쓰여진 것인데 오늘의 본문에서도 이단 사상에 속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진리를 신뢰하도록 지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소개받는 우리 모두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바로 알고 믿어 그리스도의 구원의 능력과 재림의 약속을 더욱 신뢰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의 본문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주님의 능력과 재림은 공교히 만든 이야기가 아님(16) [2]눈으로 보고 귀로들은 증거(16-18) [3]확실한 예언의 증거(19-21)입니다.
[1]주님의 능력과 재림은 공교히 만든 이야기가 아님 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주님께서 말구유에 태어나실 때에 별을 보고 동방에서 찾아온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있느냐 고 물었던 사실이 있습니다. 그 사실을 헤롯왕이 듣고 박사들을 불러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를 찾거든 자기도 찾아가 경배하려고 하니 태어나신 장소를 알려달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박사들은 예수님을 찾아 예물을 드리고 경배했으나 헤롯에게 예수님의 계신 곳을 알려주지 않고 되돌아갔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때가 아직 차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보호하시고 감추신 것입니다. 그러나 때가 찾을 때 예수님의 제자중 가룟 유다가 은 30을 받고 예수님이 계신 곳을 가르쳐 주었던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잡히셨으며 대 제사장 가야바 앞으로 보내졌고 대 제사장 가야바는 예수님을 심문하기를 네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하였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네가 말한 대로 그렇다고 하시고 계속하여 말씀하시기를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므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참람한 말을 했으므로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었다고 하여 십자가에 못을 박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장사 된지 삼일만에 부활하셨으며 부활하신지 40일만에 승천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본래 하나님이셨으나 인간의 죄를 사하시고 죄인 된 인간들이 하나님과 화목 되도록 하시기 위해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오시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되심과 그가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사실을 믿고 주님께서 자기의 구세주라 입으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믿고 영접하여 세례 받는 자는 죄 사함을 얻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십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런 모든 사실이 누가 공교하게 만든 말이 아니고 사실이며 진리라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주님의 제자로서 3년을 주님을 따라다녔고 그리고 변화산상에서 변화된 주님의 형상을 보았던 자였습니다. 그리고 주님 부활 후에 나타나신 주님을 눈으로 직접 목격했던 증인 중 중인이기 때문에 주님과 관계된 모든 사실은 사실이요 진리이며 꾸며낸 이야기가 아님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이 사실임을 증거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그가 보고들은 간증과 기록된 성경으로 증거를 대고 있습니다.
[2]두 번째로 16절 뒷부분으로부터 18절까지의 눈으로 보고 귀로들은 증거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거짓 교사들이 주님의 구원의 능력과 재림에 대한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어 성도들을 속이고 있는 일로부터 성도들을 보호하기 위해 주님의 신성한 권위에 대해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변화산에 주님과 함께 있는 동안에 주님께서 변형되시어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그 옷이 빛과 같이 희어진 것을 눈으로 직접 목격했음을 간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이는 내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란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를 들었음을 간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 혼자 이 광경을 보고 소리를 들은 것이 아니라 다른 두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되어진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말씀하시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본 것입니다. 이런 체험을 통해 베드로는 하늘 나라의 영광을 조금이나마 맛을 보고는 세상을 잊고 그냥 그대로 그 곳에 머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가 좋사오니 여기에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짓겠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주님께서 영광 가운데 변화되시는 모습을 눈으로 보았고 주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되심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이시라는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를 귀로들은 사실을 성도들에게 간증하므로 주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되심과 주님의 권위를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3]끝으로 19절부터 21절까지의 확실한 예언의 증거 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눈으로 보고 귀로들은 것을 간증했지만 이런 간증보다 더 권위 있고 확실한 성경 말씀이 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세상 간증 집회에서는 성경 말씀에서 뒷받침해주지 못한 혼자만이 체험한 간증을 많이 하게 되는데 성경에 근거 없는 신비스러운 간증은 빗나간 위험한 간증입니다. 이런 간증을 천시하는 바른 믿음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성경에서 증거 해주고 있는 자기의 간증을 소개했지만 그런 간증보다 더 권위 있는 성경 말씀을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많은 예언이 있습니다. 앞부분에서 주님에 관한 것은 사람들이 공교히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고 강조했지만 성경에는 주님에 대한 많은 예언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구약 미가서 5장 2절에는 베들레헴에서 나실 것과, 이사야서 7장 14절에서는 동정녀에게서 탄생하실 것을 미리 예언하고 있습니다. 또 시편 41:9 에는 유다에게 배신당하실 것이 기록되어 있으며, 이사야 53장에는 죄 없는 자가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을 받으실 것이 예언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주님의 부활과 주님의 재림에 이르기까지 성경에는 많은 것들이 예언되어 있으며 그 예언들이 신약 시대에 다 성취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에 대한 이런 성경말씀이 어두움을 비춰주는 등불과 같다고 했습니다. 성경말씀이 어두운 세상에 빛 되신 예수님을 소개해주고 있기 때문이요 소망이 없는 이 세상에 소망을 안겨다 주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한 것이라 생각되어 집니다. 19절에 보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라 했는데 날이 샌다는 말은 주님의 재림의 시기가 되었을 때를 말하는 것이고 샛별이란 어두움을 비추실 주님을 칭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를 기우려 배우고 알고 실천하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세상의 소리나 세상 사람의 말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뜻으로 된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자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말씀을 해석할 때에도 사사로운 체험이나 사사로운 의견에 따라 해석해서는 안되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다른 성경과 조화가 되도록 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았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의 교훈은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철저히 신뢰하고 순종하라는 교훈입니다. 성경 66권은 누구에 초점을 맞추어 기록되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추어 기록되어진 책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누구로 소개하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인간들의 죄를 대신하여 희생양과 같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으나 3일만에 다시 사시어 하늘에 오르시어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분이십니다. 하늘에 오르신 예수님은 성도들을 보호하시고 하늘로 인도하시기 위해 성령을 우리에게 내려보내신 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가 차면 행위대로 심판하시어 벌받아 마땅한 자에게 벌을 주시고 상을 받아 마땅할 자에게 상을 주시기 위해 재림하실 예수님이십니다. 그는 구원의 능력을 가지신 분이시오, 심판의 권위를 가지신 분이시며 하나님의 영광을 누리실 분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믿는 자들로부터 찬양과 영광을 받으실 분이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소개받은 우리 모두는 성경 말씀이라면 어떤 권위 있다고 하는 책이나 어떤 신비스런 간증보다도 항상 높은 자리를 차지하도록 높여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내 경험과 내 지식에 맞지 않는다 해도 성경 말씀이라면 무조건 믿고 따라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믿고 따라야할 성경에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말씀에 순종하므로 구원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믿는 자를 천국으로 안내하여 영원히 주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도록 하기 위해 도적같이 재림하신 다고 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 모두는 이 모든 말씀을 신뢰하여 항상 말씀을 연구하고 말씀을 믿으며 말씀을 실천하여 주님의 재림을 소망한 자 다운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벧후 1:16-21
[우리가 여러분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재림을 알려 드린 것은, 교묘하게 꾸민 신화를 따라서 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의 위엄을 눈으로 본 사람들입니다. 더없이 영광스러운 분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좋아하는 아들이다” 하실 때에, 그는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존귀와 영광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그 거룩한 산에서 그분과 함께 있을 때에 우리는 말소리가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것을 들었습니다.
또 우리에게는 더욱 확실한 예언의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날이 새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여러분은 어둠 속에서 비치는 등불을 대하듯이, 이 예언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습니다. 여러분이 무엇보다도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아무도 성경의 모든 예언을 제멋대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성령에 이끌려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말씀을 받아서 한 것입니다.]
• 산 위에서
주님이 주시는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세속의 절기로는 우수雨水입니다. 여전히 추위가 가시지 않았지만 벌써 고로쇠 수액을 채취하는 이들이 활동을 시작한 것을 보면 봄은 그렇게 우리 곁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가오는 수요일은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입니다. 교회 전통은 바로 그 직전 주일을 주님의 산상변화주일로 지킵니다. 우리는 그 내용을 잘 압니다. 수난의 어두운 골짜기로 들어가시기 전 주님은 높은 산 위에 올라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셨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 산이 머리에 흰 눈을 인 채 서있는 2814미터의 헤르몬 산이라고도 합니다만, 정말 예수님께서 그 산에 오르셨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서가 말하는 높은 산은 비일상적인 삶의 자리, 하나님의 현존 앞입니다.
제자들은 그 비일상적인 자리에서 자기들의 스승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됩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깊은 침묵 속에 머무셨을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그 모습은 익숙하면서도 낯설었을 것입니다.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을 내쫓으시고, 죽지 못해 살아가는 가련한 사람들 마음에 하늘의 생기를 불어넣으시던 예수님, 스스로 ‘거룩하다, 의롭다’ 자부하던 이들로부터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조롱을 받았던 예수님이 그 산 위에서는 전혀 다른 분처럼 보였습니다.
그동안 잘 안다고 여겼던 예수님에게서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이 풍겨 나왔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비로소 예수님의 실체를 보았습니다. 그분은 빛이셨고, 하늘이셨습니다. 주님의 옷은 세상의 어떤 빨래꾼이라도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보였다고 합니다. 안에서 밖으로 새나오는 빛, 예수의 존재로부터 방사되는 빛, 그 빛은 태초의 어둠을 가르던 바로 그 빛이었습니다.
노자의 도덕경 56장에 나오는 말은 그대로 예수님께 적용이 됩니다. 참다운 지혜자는 누구입니까? 그는 “마음의 날카로움을 꺾고, 그 빛을 감추고, 그 빛을 부드럽게 하여, 속세의 먼지와 함께 하는”(挫其銳, 解其紛, 和其光, 同其塵) 사람입니다. 일부러 빛을 감추고 세상과 하나 되는 것을 일러 진리와 신묘하게 하나 되었다(是謂玄同)고 말합니다. 빌립보서 2장에 나오는 그리스도 찬가도 똑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6-8)
• 증언
제자들은 그 산에서 티끌 속에 감추어졌던 빛 곧 절대를 보았습니다. 놀라운 고양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더 놀란 것은 빛이신 그분이, 절대이신 그분이 수난이라는 운명을 향해 나아가신다는 것입니다. 그 산에서의 경험은 제자들의 예수 체험의 변곡점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한용운이 노래했던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이었습니다.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지는 그 추억 말입니다. 그때까지 예수님은 놀라운 이적을 베푸는 스승이었습니다. 어쩌면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야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게 달라졌습니다.
오늘 읽은 베드로후서가 과연 베드로가 쓴 것이냐 아니냐 하는 신학적 논의는 일단 제쳐놓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편의상 이 책의 저자를 베드로라고 하겠습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재림에 대해 자기가 가르친 것은 교묘하게 꾸민 이야기가 아니라 그의 위엄을 목격한 자로서 증언이라고 힘주어 말합니다. 이 말을 하는 동안 그의 눈빛이 마치 추억을 더듬듯 아득해지지 않았을까요?
갈릴리 호숫가에서 그분의 부름을 받던 시간부터,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 척박한 갈릴리 사방을 발로 누비며 사람들의 마음에 불을 붙이던 시절이 주마등처럼 떠올랐을 것입니다. 광야에서 경험했던 오병이어의 기적은 언제 돌아보아도 가슴 벅찬 감동이었을 것입니다. 귀신을 꾸짖어 내쫓으셨던 것처럼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잠잠케 하시던 예수님의 모습은 얼마나 장엄했겠습니까? 아주 잠깐 동안이었지만 물 위를 걸어 주님을 향해 나아가던 순간의 기억도 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변화산에서의 경험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 황홀한 시간에 제자들은 속세를 잊었습니다. 삶과 죽음을 뛰어넘는 초월 체험이었습니다.
회상이 여기쯤 이르렀을 때 베드로는 어쩌면 더 깊은 침묵 속에 잠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겟세마네 동산과 대제사장의 집 안뜰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기억하며 눈시울이 붉어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 처형, 온 세상을 뒤덮던 어둠, 그리고 그들의 가슴에 깃든 태초의 흑암보다도 더 깊은 어둠…모진 게 인생이라 절망에 잠겨 디베랴 호수로 돌아가 그물을 던지던 시간,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났을 때의 감격, 그리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온갖 고초를 마다하지 않았던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을 겁니다.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그는 성도들에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를 앎으로 말미암아 생명과 경건에 이르게 하는 모든 것을, 그의 권능으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셔서 그의 영광과 덕을 누리게 해 주신 분이십니다.”(벧후1:3)
이것은 이론도 아니고 교리도 아닙니다. 이미 그 생명을 누리고, 그 영광과 덕을 누리고 있는 사람의 증언입니다.
• 질그릇 속에 담긴 보물
생선을 싼 종이에서는 비린내가 나고, 향나무를 싼 종이에서는 향내가 나고, 백합화를 품은 흙에서는 백합향이 난다 합니다. 비록 그 삶이 평탄치는 않았지만 예수와 더불어 살아온 시간은 시나브로 빛이 어둠을 몰아내는 과정이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만의 경험은 아닙니다. 바울도 똑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어둠 속에 빛이 비쳐라’ 하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 속을 비추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고후4:6)
그 빛으로 인해 바울은 박해의 어두운 골짜기를 거닐면서도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늘 제멋대로이고 연약하기만 한 우리이지만 그 빛의 비췸을 받고 나면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어 살 수 있습니다. 저는 바울 사도의 고백을 읽을 때마다 가슴에 전율을 느낍니다.
“우리는 사방으로 죄어들어도 움츠러들지 않으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으며, 박해를 당해도 버림받지 않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고후4:8-9)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가 이리도 큽니다. 살아갈 이유를 알고, 가야 할 길을 분명히 알기에 그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물론 고난도 당하고 넘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툭툭 털고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가슴에 이미 빛이 밝혀진 사람은 세상이 어둡다 하여 낙심하지 않습니다. 돈 좀 못 벌면 어떻습니까. 당장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다고 하여 낙심할 까닭이 무엇입니까. 불의와 싸우면서도 스스로 거칠어지지 않습니다. 반대자들조차 우정으로 감싸 안을 수 있는 넉넉함이 있습니다. 모름지기 믿는다면 이 자리에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멉니다. 그 때문일까요? 바울은 자랑할 것이 있다면 자기의 약한 것과 십자가 밖에는 없다고 했습니다. 통나무처럼 투박한 이 고백 속에 바울이라는 거인의 비밀이 있습니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너무 왜소해졌습니다. 저는 이것이 너무 속상합니다. 기독교인이라 하면서도 마음이 좁쌀보다 작은 사람들을 봅니다. 늘 자기 문제에만 골똘할 뿐, 불의한 세상에 저항하고, 고통받는 이들과 연대하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한 마디로 말해 십자가의 은총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당신을 따르려는 이들에게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죽음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한가로운 산보가 아닙니다. 가시밭길을 걷는 것처럼 힘겨운 길일 수 있습니다. 겁 많고, 비겁하고, 욕심 사납고, 냉소적인 우리 마음이 일대 변화를 경험하지 않는다면 갈 수 없는 길입니다. 그런데 일단 그 길을 걷기 시작하면 예기치 못했던 평안과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그것이 신앙의 신비입니다.
• 새로운 소명
여전히 길을 떠나지 못한 채 주저주저하는 이들에게 베드로는 예언의 말씀을 굳게 붙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의 마음 속에서 날이 새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여러분은 어둠 속에서 비치는 등불을 대하듯이, 이 예언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습니다.”(19)
말씀에 붙들려 살기로 작정하고, 그 말씀에서 떠나지 않을 때 밤은 물러가고 새벽이 밝아옵니다. 얼마 전 목사님 한분과 긴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는 5공화국 시절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자기 가족들이 당한 수모의 기억을 아프게 떠올렸습니다. 신체에 가해지는 고통보다 더 힘겨웠던 것은 인격적인 모욕이었습니다. 고문의 후유증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가족도 있었습니다. 그는 목회자로 살아가면서도 가슴에 못처럼 박힌 분노를 가라앉힐 수가 없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이 너무 황폐해지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성경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로서 당연한 일이었지만 정말 작정하고 읽은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열 번을 읽고, 스무 번을 읽자 마음이 고요해졌습니다. 서른 번을 읽자 마음 속에 박혔던 분노가 삭아 내렸습니다. 그러자 비로소 세상에 가득 찬 아픔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사랑으로 감싸 안아야 할 이웃들이었습니다. 어느 순간 말씀이 빛으로 화해 마침내 샛별처럼 떠올라 주변을 환하게 비추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그는 불의에 대항하여 싸우지만 거칠지 않습니다. 그는 주변을 평화롭게 만듭니다.
태초에 “빛이 있으라” 하심으로 세상에 유입된 빛, 호렙산 떨기나무 속에서 나타난 빛, 변화산에서 제자들이 만났던 빛, 부활절 새벽 빈 무덤에서 새어나온 빛, 바울이 다마스커스 가는 길에서 만났던 그 빛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은 다른 곳으로 변합니다. 살면서 경험하는 인생의 쓴맛과 괴로움, 누군가에 대한 미움과 원망조차 하나님께 이르는 징검다리로 삼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꼭 붙들고, 모든 것을 영원한 삶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인식할 때 우리 삶은 비루함을 넘어 깨끗해질 것입니다. 신앙은 훈련입니다. 훈련은 반복입니다. 몸과 마음에 버릇을 들이는 과정입니다. 20세기에 가장 존경받는 분 가운데 하나인 교황 요한23세는 추기경 시절에 이런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내 생애를 만족하게 이끌어주셨다. 그것은 내가 오래 전부터 다른 사람들의 결점을 요모조모 따지거나 과거를 들추어내지 않기로 습관을 들였기 때문이다. 나 또한 결점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침묵을 지키고 즉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용서를 베푼다.”(피에르 파올라 타칼리티 엮음, <<말씀이 나의 두 손에>>, 92쪽)
사순절 순례의 여정을 앞두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우리 삶을 재정립하는 절기입니다. 여러분께 나눠드린 사순절 달력을 잘 활용하십시오. 주님의 빛으로 세상을 보는 습관을 들이십시오. 마침내 우리 마음에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말씀에 유의하십시오. 그 말씀을 삶으로 번역하는 일에 진력하십시오.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강이 우리 신앙 여정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거짓 교훈에 대한 반론: 예수의 변모와 구약의 예언
벧후 1:16-21 / 윤철원(서울신대, 신약학 교수)
1. 서론적 연구
1-1. 베드로후서와 유다서는 어떤 책인가?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 중시해야 할 사항은 무엇인가? 성서가 기록된 시기와 지금은 많은 차이가 있다. 시간, 문화, 지리, 언어의 간격 때문에 기록된 시기에 당도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기에 신약을 읽는 독자들은 항상 장르(Genre) 문제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G.W. Coats). 왜냐하면 신약성서가 기록될 당시의 문학의 관례들이 신약 저자들에 의해서 채용되었을 뿐 아니라, 그 장르를 통해서 저자들은 그들의 할 말을 다 할 수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간단하게나마, 우리는 신약성서의 문학을 몇 가지의 범주로 구분해 보자. 첫째, 복음서에 나오는 유년기 내러티브와 사도행전의 여러 이야기들처럼 유년기 시절부터 우리가 알고 있는 자료들이 있고, 둘째, 로마서, 특히 8장과 요한복음서처럼 잘 알려진 구절들, 셋째, 매우 중요하지만, 난해하여 읽기 힘든 책들로서 계시록과 히브리서가 그 예가 되고, 넷째, 우리가 관심 갖는 책으로서 잘 읽혀지지도 않고 친숙하지도 않은 작품들인 유다서와 베드로후서가 바로 그 범주에 속한다.
확실히 유다서와 베드로후서 두 문서는 신약의 다른 문서들보다는 훨씬 덜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이 문서들은 사실 이해하기도 결코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이 문서들의 언어는 전부는 아니라 하더라도, 이해하기 너무 힘들고, 특히 유다서에는 상징(象徵)과 구약성서의 많은 구절들이 언급되는데, 유대교의 묵시문학을 잘 모르는 독자들에게는 모호하게 들릴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문서들을 특히 주목하는 이유는 단 하나, 이 문서들이 기독교의 정경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약성서의 전체적인 이해를 원한다면, 이 문서들에 대한 관심도 게을리 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이 편지들은 주의 깊은 연구를 요구한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가 베드로후서의 본문을 읽고 분석한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 있다고 본다.
1-2. 베드로후서, 유다서가 함께 취급되어야 하는 이유
우리가 전집으로 된 신약성서의 주석서들을 살펴보면, 대개 베드로후서와 유다서는 함께 취급되는데, 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어떤 이유로 해서 한 문서가 또 다른 문서를 활용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일치된 의견이다. 그 가운데 가장 일반적인 견해로는 베드로후서의 저자가 유다서를 이용했다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베드로후서는 유다서의 최초의 주석이 된다.
두 문서의 조화는 문학 비평적 분석으로 알려지게 되었는데, 우리는 신약성서의 여러 곳에서도 한 문서가 또 다른 어떤 문서를 이용했다는 예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는데, 에베소서의 저자가 바울서신을 인용한 것이 이에 대한 하나의 예가 될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후서가 유다서를 인용했다는 것은 보다 더 본질적인 경우에 해당한다. 베드로후서의 저자는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기 위해서 가끔 변형을 시도하지만, 그 서신에서 유다서의 많은 부분을 통합적으로 활용했다. 즉 베드로후서의 본문에는 유다서의 내용과 일치하는 부분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결론은 베드로후서의 저작권과 연대 문제를 토론하는데 중요한 결과를 초래하고, 베드로가 이 서신을 기록했다는 전통적인 주장에도 불구하고, 그럴 것 같지 않다는 것이 현대 신약학계의 일반적인 합의이다. 즉 베드로후서가 위명적(pseudonymous)이라는 것이다: 위명적인 작품은 누군가 기독교 공동체의 지도자가 가르친 내용에 대하여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서 사도권을 사용하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후기 저자가 기록한 것으로서, 사도에 의해서 기록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하나의 작품을 의미한다. 위명성(pseudonymity)에 대한 제안이 신약의 독자들에게 의심이나 놀라움의 이유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신약성서 개론학에 의하면, 바울 서신에 속하는 것으로 인정된 에베소서는 거의 바울의 친저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으며, 동시에 그와 유사한 의문점들이 골로새서나 데살로니가후서, 그리고 목회서신에서도 제기된다. 위명성은 사실상 신약 문서, 특히 후기 문서들에서 반복되는 현상이라고 보는 것이 정당하다. 베드로후서의 저자는 이렇게 위명을 사용함으로 그의 독자들을 속이려고 한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당시에 그 서신을 읽는 독자들은 거의가 이 서신이 어디서 발송되었는지 누가 기록했는지 알았을 것은 명백하다. 아래에서 언급되는 책은 이러한 우리의 의구심에 하나의 해결책을 제시해 줄 것이다.
최근 보캄(R. Bauckham)이 편집한 책(The Gospels for All Christians, Grand Rapids: Eerdmans, 1998)에서--물론 이 책의 논의는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국한된 것이지만--우리는 1세기의 독자들이 이와 같은 편지의 출처를 분명히 알았을 것이라는 타당성의 근거를 얻게 되는데, 역사비평의 결과에 많은 부분을 의존하고 있는 현대의 신약학계는 보캄이 편집한 본 저서의 도발적 공격에 당혹스러워 할 것은 확실하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 우리가 각 복음서의 공동체에 필요하고 상황적인 메시지가 복음서 저자들의 신학적 열매로 편집되었다고 받아들인 소위 자료설의 가능성들이 전체적으로 붕괴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는 것은 여러 가지 의사소통이 가능하도록 보조하는 기능들이 존재했을 것이라는 전제에 따른 것으로, 비단 마가의 공동체가 가장 먼저 복음서를 창조했다손 치더라도, 마태와 누가의 공동체는 도로망의 확충으로 안전한 여행이 보장되었던 당시의 상황으로 볼 때 서로간의 말씀의 교환이 가능했을 것은 뻔하고, 그 교류에 근거해서 자신들의 복음서를 편집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복음서가 특정한 공동체에 국한되어 편집 혹은 기록되었다는 주장은 의구심을 갖게 한다. 이와 함께, 우리는 1세기의 세계를 편협하거나 소외된 세계로 이해해서는 안될 것이다. 요즘의 인터넷(Internet)이 세계를 거미줄처럼 엮는 것과 같이, 당시에도 교회 공동체들끼리 소위 ‘신앙적인 연대’(Holy Internet)가 구축될 만큼 일치되고 의사소통이 가능한 환경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캠브리지 대학교의 톰슨(M.B. Thomson)은 의사소통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고속 도로망이 건설되어서 로마제국의 교통망이 어느 정도 완벽했다고 주장한다(Ibid. pp. 49-70). 예를 들어, 에베소에서 시리아의 안디옥까지 바다로 여행할 경우에 8-18일 정도면 도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정도라면 서로의 소식을 주고받을 수 있는 여건이 충분히 마련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베드로후서의 저자가 사도 베드로의 인격(persona)을 자신의 교훈의 근거로 내세워 거짓 교훈에 대한 반박의 정당성을 얻기 원했을 것에 대해서 아무런 잘못을 발견하기 어렵다. 유다서 역시 하나의 위명적인 작품일 가능성이 있지만, 이것은 베드로후서의 경우보다는 덜 확실하게 보인다.
1-3. 유다서의 자료
위의 토론에 의하면, 유다서가 베드로후서보다는 먼저 기록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 이유는 베드로후서가 유다서에 많은 부분을 의존하기 때문이다. 유다서는 야고보의 형제(1절) 유다가 기록했다고 말한다. 유다의 형제인 야고보는 의심 없이 우리가 사도행전에서 예루살렘의 원시 기독교회의 지도자였던 예수의 형제인(행12:17, 15:13-21, cf. 갈2:11-14), 의인 야고보(James the Just)이다.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모든 야고보 가운데[예, 요한의 형제 야고보,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마10:3)] 예수의 형제 야고보가 가장 유력한 후보이다. 이 사람의 정체는 다른 유다가 더러 제시되며, 또한 우리가 여전히 위명성의 문제를 숙고한다 하더라도, 예수의 형제인 유다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유다서는 서신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 즉, 서론(1절), 인사(1-2절), 중심부(3-23절) 그리고 결론(24-25절). 개론에서 유다서를 어느 제한된 상황이나 특정한 공동체에 발송된 서신이 아니라는 의미를 갖는 공동 또는 일반 서신(catholic or general letters)으로 제안되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여러 교회에 거짓 교훈들의 다양성을 알리기 위해서 기록됐다는 것은 유다서가 하나의 특수한 상황에 발송되었을 가능성을 갖게 만든다. 단적으로, 이 서신의 간결함이 이러한 이유에 대한 설명이 될 것이다. 우리가 살필 것처럼, 이 상황은 독자들의 거짓 교사들에 대한 경험에 의해서 지배된다: 그들의 가르침에 도덕률 폐기론(antinomian 또는 libertine)의 요소를 가진 거짓 교사들.
여기에 대해서 찰스(J.D. Charles, Literary Strategy in the Epistle of Jude, London and Toronto: Associated University Presses, 1993, ch. 2)는 독자들에게 하나의 특정한 형식을 갖춘 바른 행동을 천거하는 이전의 관례들을 사용했던 유대교와 기독교의 서술 형식(form of writing)인 ‘권고’ 이야기(exhortation discourse)와 본 서신과의 유사성을 탐구한다. 이 이론은 아마 유다서가 일반적인 상황보다는 특수한 상황에 발송된 서신이라는 의견을 옹호해 준다.
1-4. 베드로후서의 자료
베드로후서는 유다서 다음에 기록되었으며, 유다서의 내용을 담고 있다. 유다서처럼, 베드로후서도 역시 저자가 부적절한 가르침이라고 지적하는 것에 지배되는 하나의 상황에 발송되었다. 베드로후서의 저자가 유다서의 부분들을 사용한다는 점은 그 상황의 특수한 측면, 즉 도덕률 폐기론의 입장을 동일하게 제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해서, 두 문서의 상황이 모든 면에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3장은 도덕률 폐기론 뿐 아니라 베드로후서의 저자가 비판했던 한 부분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종말론적인 환멸에 대한 증거를 포함하고 있다(cf. 1:16-18). 유다서와 베드로후서 양자가 발설했던 이 상황들을 혼동했다는 것은 아마도 20 세기에 다뤄진 유다서와 베드로후서의 연구에서 최대의 실수가 될 만하다고 보인다.
그렇다면 어떤 부분에서 무엇이 차이인가? 유다서와의 차이는 베드로후서가 반박했던 거짓 교사들이 명백하게 파루시아(parousia)에 대한 기독교 신앙과 미래의 우주적 파멸을 거부했다는 사실에 존재한다(3:4). 네이리(J.H. Neyrey, 'The Form and Background of the Polemic in 2Peter', JBL 99(1980) pp. 407-31)는 이 세계관, 섭리(providence)와 보응(retribution)에 대한 신념의 타당성을 거절하는 에피큐러스 철학(Epicurean Philosophy) 사상과의 유사성을 지적했다. 에피큐러스의 신념은 서기 1세기의 유대교 학파들에 편만했다(예: 창4:8의 팔레스타인 탈굼). 그리고 이 관점에서 네이리의 베드로후서에 등장하는 거짓 교사들에 대한 제시는 그들의 정체성에 대한 하나의 좋은 사례가 된다. 물론 그 거짓 교사들이 에피큐러스 철학자들은 아니었을 테지만, 그들이 에피큐러스 학파의 영향을 받았을 것은 분명하다. 베드로후서의 첫 독자들은 이 저자가 신중하게 편집한(벧후2:15-16) 유다서 11절에 근거한 성서의 언급들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일반적인 철학 사상에 관한 것들을 이해하고 동시에 예수의 재림과 계속되는 심판에 대한 신념의 상관성을 거부하는 논쟁을 제안할 수 있었던 사람들로서, 아마 이방적 기독교인들(Gentile Christians)이었을 것이다.
베드로후서는 두 가지의 문학적 장르를 통합한다. 본 서신은 분명히 로마 교회가 관심을 가졌던 다른 교회에 보낸 하나의 편지였을 것이다. 이것은 또한 ‘유언’(Testament)이라 불리는 유대교의 문학적 장르에 적합한 자료를 통합한다. 이 유언은 누군가가 윤리적 훈계와 결합된 미래에 대한 지식을 전하며 막 임종할 사람의 마지막 말이다(cf. A. Kolenkow, 'The Genre Testament and Forecasts of the Future in the Hellenistic Jewish Milieu', JSJ 6(1975) pp. 57-71). 유대교의 문학에는 유언에 대한 많은 사례들이 있고, 이 장르는 본질상 위명적이다. 대부분의 사례들은 옛 시대의 영웅들과 결합된다; 아브라함과 모세는 여기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두 인물이다. 베드로후서는 전통적인 위경을 보존하지만 최근에 죽은 한 사람의 유언을 제시하려는 노력의 산물이다. 베드로는 분명히 64년 네로 박해 때 죽었을 것이다(참고: Ignatius, Rom. 4.3; 1Clem. 5.4; Asc. Isa. 4.3). 이런 유언 장르를 다시 형식화했다는 사실은 베드로후서 저자의 관점에서 사도 베드로와 예수의 교제 그리고 당시의 거짓 교사들의 공격에 처한 기독교가 궁극적인 하나님의 계시를 담지한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본 서신의 저자가 베드로의 인격을 선택한 것은 권위를 얻기 위한 최초의 시도이다. 이런 유언 장르의 채용은 베드로후서를 아마 신약성서에서 위경적 작품에 속하는 가장 분명한 사례로 만든다.
일반적 서두와 인사 다음(1:1-2), 1장 3절-11절은 저자의 메시지에 대한 하나의 요약을 제시한다. 이 서신은 모든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는 예시로 시작한다(1:3-4). 저자는 하나님이 생명과 경건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했고 그리고 그가 사람들을 신의 성품을 참여하고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 존재하는 부패에서 피하도록 만든다. 그래서 발송된 공동체는 의심 없이 성적인 욕망을 포함하는 악한 욕망에 의해서 유혹을 받은 공동체였음이 분명하다. 그들은 덕의 목록(a catalogue of virtue, 1:5-8)이 제시한 경건한 생활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저자는 이 덕들을 일상에서 드러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소경이며, 그들이 과거에 죄로부터 깨끗하게 되었음을 잊었다고(1:9) 단언한다. 이것이 저자가 본 서신을 발송하는 상황에서 윤리적인 문제가 두드러지게 드러난다는 강한 암시를 제공한다.
1-5. 유다서와 베드로후서의 관계
우리는 베드로후서가 유다서 이후에 기록되었다고 이해했다. 베드로후서의 저자는 당시의 거짓 교사들에 대하여 반론하기 위해서 유다서를 사용했다. 이 견해를 지지하는 이유는 저작권과 연대 문제를 논의하기 이전에 숙고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 결론이 근거한 증거는 간단히 언급될 수 있다. 베드로후서 2장 1-18절과 3장 1-3절은 유다서 4-13절과 16-18절의 유사성에 대한 분명한 예이다. 두 문서간의 접촉은 정확하지는 않다: 두 텍스트는, 동일한 언어가 베드로후서 2장 1-18절과 유다서 4-13절에서 다른(different) 종류의 거짓 교훈과 투쟁하려고 거칠게 사용된 반면, 다른 텍스트에서 발견되지 않는 언급들을 포함한다(유11과 벧후2:5, 7-8을 보라). 사용된 언어는 일치하나, 그것이 항상 동일하지는 않다. 그리고 베드로후서는 양식(style)과 어휘(vocabulary)가 유다서와 아주 다른 헬라어의 형태를 사용한다.
이 증거에 대해서 세 가지의 설명이 가능하다. 두 서신은 동일한 저자가 기록했던지, 두 서신의 저자들이 동일한 자료를 사용했던지, 또는 두 저자 중 한 저자가 다른 문서를 사용했을 것이던지 이다. 여기서 세 번째 설명은 세 가지의 형태를 가진다: 유다서가 베드로후서를 사용했던지, 또는 그 반대이거나 이고, 또는 어떤 문서가 다른 작품의 저자에 의해서 통합되었던지 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저작권 이론에 대한 논의는 로빈슨(J.A.T. Robinson, Redating the New Testament, London: SCM Press, 1976, pp. 192-95)에게서 하나의 중요한 후원자를 찾았지만, 그것은 이 증거에 대한 가능치 않은 설명이다. 물론 거기에 유사성이 존재함에도, 두 서신 사이의 문학과 양식의 본질적인 차이를 무시한다(R. Bauckham, Jude, 2 Peter, Waco, TX: Word Books, 1983, 6, 135). 이것은 특히 두 서신이 동일한 시대의 것으로 간주될 때만 사실일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하나의 평행을 발견할 수 있는데, 두기고의 구절(골4:7-8=엡6:21-22)이 두 본문에서 특히 유사하지만, 골로새서와 에베소서에서 양식과 신학의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이것은 동일한 저자가 두 서신을 기록했을 것이라는 사실이 있을법하지 않게 만들었다. 만약 베드로후서가 유다서와 동일 저자에 의해서 기록되었다면, 우리는 두 서신이 서로 짧은 시간 내에 기록되었을 것임을 가정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 이론은 텍스트들, 특히 베드로후서에서 파루시아(parousia)와 심판에 대한 내용을 나타내는 사상의 차이를 설명하는데 실패한다.
이러한 숙고는 베드로전서의 저자가 또한 베드로후서의 저자였음이 그럴듯하지 않게 한다. 반면에, 그것은 베드로후서의 저자가 베드로전서를 알았다는 것을 가능성 있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제안할 수 있다: 베드로후서가 베드로의 이전의 서신을 언급하고(오직 베드로전서가 이것에 대한 하나의 후보가 된다), 베드로후서 2장 5절의 노아에 대한 언급은 베드로전서 3장 20절에서 명백한 평행을 찾게된다. 그러나 베드로후서를 베드로의 친서로 보기 어렵게 하는 것은, 우리가 계속 논의한 것처럼, 베드로후서가 유다서를 의존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도인 베드로가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지 않고, 도리어 사도가 쓰지 않은 하나의 문서를 인용했겠는가? 더욱이, 베드로는 64년 네로 박해 때 죽었을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1-6. 베드로후서의 거짓 교사들의 정체성
베드로후서가 반박하는 내용은 파루시아(parousia)에 대한 신앙과 미래의 우주적 파멸을 거부하는 거짓 교사들에 대한 것이다(3:4). 위에서 언급했듯이, 네이리(J.H. Neyrey)는 에피큐러스 학파와 이들을 연결한다. 에피큐러스의 신념은 서기 1세기의 유대교 학파들에 편만했다. 그리고 이 관점에서 네이리의 거짓 교사들에 대한 지적은 그들의 정체성에 대한 하나의 좋은 예가 된다. 거짓 교사들이 에피큐러스 철학자들은 아니었을 것이 분명 하겠지만, 그들이 에피큐러스 학파의 영향을 받았을 것은 상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의 어떤 주장이 베드로후서의 거짓 교사들과 일치하는가? 에피큐러스 학파에 대한 논의는 이 학파의 시조인 에피큐러스(Epicurus, BCE 341-270)에 대해서 알아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게 옳을 것이다. 에피큐러스는 아테네의 식민지였던 사모스(Samos)에서 태어났다. 그는 데모크리투스(Democritus)의 물리학에 의존하여, 우주의 자연은 물질과 공간으로 구성된다고 주장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물질은 분리할 수 있지만 무한하게 나눌 수는 없는데, 이것이 소위 원자(atom)이다. 그러므로 에피큐러스가 이해하는 물리적 세계는 이 원자들로 만들어졌고, 그는 이 신념 위에 서 있는 유물론자였다. 그래서 자연은 아무런 목적도 없고, 고로 세상은 창조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에피큐러스의 물리학은 궁극적으로 종교의 붕괴를 초래한다.
이러한 신념 위에 근거한 에피큐러스 학파는 베드로후서가 기록되던 시대에도 그 명성을 구가했다. 이들의 물리학은 결국 그들이 살아갈 때 필요한 윤리학을 지향한다. 이 학파가 주장하는 목표는 쾌락(ἡδονη)인데, 이 쾌락은 현대인들이 이해하는 것과는 차이가 난다. 이들의 쾌락주의는 ‘인간은 본래적으로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해간다’는 인간의 원초적 경험에 근거한다. 이들이 주장하는 가장 열등한 쾌락은 위장의 쾌락 같은, 소위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다. 예를 들어, 북한의 동포들이 못 먹고 헐벗는 현실에 대해서 에피큐러스 학파의 호통은 단 한가지 일 뿐이다: 북한의 정부 책임자들이여! 국민의 기초적인 문제 해결을 하지 못할 바에야 다 물러가라. 가장 기본이 해결되는 못하는 경우에는 혼돈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리라. 그래서 에피큐러스 학파에게 있어서 고통의 부재가 그들의 이상(ideal)인데, 우리는 이것을 마음의 평정(αταραξια)이라고 알고 있다. 이미 우리는 그들의 물리학의 이해가 종교와는 무관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들이 추구하는 영혼의 평정은 신의 간섭을 제거하고, 죽은 이후에 영혼이 생존하여 무엇인가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죽음에는 고통이 없다는 사실을 인식함으로써만 얻을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베드로후서의 거짓 교사들이 이러한 일반적인 철학 사상에 관한 것들을 이해하고 동시에 예수의 재림과 계속되는 세상의 마지막 심판에 대한 신앙을 거부했던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 본문 연구(벧후 1:16-21)
우리는 위의 서론적 연구에서 유다서와 베드로후서의 기록 목적을 살펴보며, 두 문서가 기록된 목적이 교회 공동체를 교란시키는 거짓 교사들을 반박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지적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선택한 오늘의 본문은 과연 어떤 측면에서 거짓 교사들과 대면하는가? 아래에서 살펴 볼 것이지만, 이 본문은 너무나 존엄해서(?) 이해하기도 힘들 것 같고, 너무나 거룩해서 범인들은 읽어서는 안 될 말씀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들의 성서에 포함된 말씀인 만큼 독자들이 즐겁게 다가가서 읽고 해석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짓 교사들과 관련해서 본 구절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베드로후서의 기록 목적이 거짓 교사들을 비판하고 경계하려는 것이라면 어떤 구절이라도 그 목적에 부합하도록 해석하는 것이 바른 독서법이리라.
16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이 구절은 수사학적으로 탁월한 방식을 통하여 기독교의 복음이 단순히 하나의 가설적 허구가 아님을 논증한다. 저자에 의해서 사용된 ‘무엇이 아니라, 어떤 것이라’(ου... αλλα/not...but)는 구성은 본 서신에서 3회 나오는데(1:16, 21, 3:9) 우리가 살펴보는 장면에서만 2회 사용된다. 저자는 기독교의 복음적인 진리가 인간의 가공물이라는 거짓 교사들의 공격, 즉 사도들이 하나의 신화를 추종하고 있다는 공격에 대하여 방어해야할 상황에 처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렇게 강력하게 도발하지 않았다면 저자가 굳이 강한 어조로 그들을 대항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하여 저자는 아주 분명하게 거짓 교사들의 공격이 하나의 신화를 쫓을 뿐 아니라 예수의 크신 위엄을 직접 목격한 자들인 사도들을 공격한다고 단언한다.
본 구절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야 할 단어는 ‘공교히 만든 이야기’(σεσοφισμενοις μυθοις)로서, 의미는 ‘허구적으로 꾸며낸 신화’ 또는 ‘거짓말’을 뜻하는 용어로 고대 그리스의 신화는 신들에 관한 이야기들이며, 문자적으로는 사실일 수 없으나 종교적으로나 도덕적 혹은 철학적인 진리를 드러내는 단어로, 신약성서에서는 기독교의 복음적 진리와 언제나 대조되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딤전1:4, 4:7, 딛1:14). 즉 사도들이 복음을 전한 것은 인간의 조작에 의한 허구의 선포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거짓 교사들이 사도들이 선포한 내용 가운데 허구의 주된 목표점으로 공격한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δύναμις)과 ‘강림’(παρουσία)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여기서 사용된 ‘파루시아’는--베드로전서에서는 항상 αποκαλυψις(계시)가 사용된다(벧전1:7, 13, 4:13)--일반적으로 영광 중에 오실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종말론적인 의미를 갖는다(마24:3, 27, 37, 39; 고전15:23; 살전3:13; 4:15; 약5:7-8; 요일2:28). 소수의 학자들은 이 파루시아를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라고 주장하지만(C. Spicq, F. Marin), 여기서 ‘파루시아’(παρουσία)는 거짓 교사들을 에피큐러스 학파의 영향권 아래 있는 사람들로 전제한다면, 미래적 사건으로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R. Bauckham). 왜냐하면 저자는 베드로후서를 통해서 거짓 교사들의 그릇된 교훈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기 위하여 종말론적인 가르침 즉, 영광 가운데 오실 그리스도에 대하여 서술하기 때문이다(3:4, 12). 동시에 ‘뒤나미스’는 ‘파루시아’와 한 쌍으로 연결되어 17절의 ‘영광’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다. 그리스도의 능력은 파루시아를 통하여 온 세계에 완전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며, 불법한 자와 적대자들을 심판하고 그 나라를 온전히 완성할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의 의도가 분명히 표현된 곳은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들)’이라는 구절에서이다. 저자는 그 영광스런 위엄을 ‘친히 본 자’(εποπτης)라고 사도들을 지칭한다. 이 호칭은 ‘관찰자’ 혹은 ‘관망자’의 의미로 신약성서에서 단 1회 여기서 사용된다(hapax legomenon). 저자는 변화산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라고 제시되어 파루시아의 기대가 전혀 거짓에 근거한 것이 아님을 강조하려고 한다. 따라서 그의 말은 어떤 이단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신화나 거짓말이 아니라 사실에 근거한 진리라는 말이다. 여기서 ‘그의 크신 위엄’(της εκεινου μεγαλειοτητος)은 1세기에 로마 황제들에게 적용되었던 호칭으로 신적인 능력이나 위대성을 나타내는 단어로서, 본 절에서는 17절에서 예수가 하나님으로부터 존귀와 영광을 부여받는 바로 그 위엄을 말한다.
17절: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여기서 우리는 16절에서 저자가 강조한 하나님의 의지와 연결된 그리스도의 파루시아에 대한 언급에서 본 것처럼, 예수가 하나님 아버지의 존귀와 영광(τιμήν καί δοξαν)을 받았다는 의미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존귀와 영광’은 엄밀하게 구별할 수 없는 이중적 표현으로서 하나님이 예수의 변형된 모습의 영광 가운데서 그의 아들됨을 공적으로 인정하는 존귀를 수여했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따라서 본 구절은 예수가 신적 영광을 입었으며, 하나님의 대리자인 왕으로 종말론적인 심판과 통치를 수행할 임무와 권한을 부여받았음을 암시한다(R. Bauckham). 저자는 자신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것임을 강조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사도들의 말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흔들릴 수 없는 것임을 확실히 한다. 박창환 박사(베드로전, 후서/유다서, 대한기독교서회 창립 100주년 기념 성서주석,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6, 188)는 하나님의 존귀와 영광을 함께 나눈 예수가 친히 그것들을 버리고 스스로 낮추어 인간의 모습을 입고 세상에 온 것으로 구원사적인 측면을 강조하며, 변화산에서의 그의 변화가 예수가 지닌 신적 존귀와 영광을 드러낸다고 보고 있는데, 이것은 이미 독자들은 복음서의 변화산 전승을 알고 있었다는 견해들과 일치하지만, 베드로후서의 저자의 일차적 관심은 예수의 숨겨진 신성의 현현을 말하고자 한 것은 물론 아닐 것이다(R. Bauckham).
이러한 존귀와 영광을 하나님으로부터 ‘지극히 큰 영광 가운데서 이러한 소리가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권위를 예수가 수여 받았는데, ‘지극히 큰 영광’에 해당하는 ‘메갈로프레페스 독사’(μεγαλοπρεπηs δοξα)는 신약성서에서 여기서만 사용된다(hapax legomenon). 이러한 표현은 독특한 것으로 유대교와 신약성서의 묵시문학적 표현으로서 하나님의 소리와 동일시하는 것을 피하려는 의도로 하늘로부터 한 소리라는 식으로 표현된다(단4:31, 1에녹서13:8; 65:4; 계4:4, 8, 11:12, 16:1). 여기서 큰 영광은 하나님의 위대성을 드러내려는 표현일 것이다. 큰 영광으로 하나님을 묘사한 것은 공관복음서의 변화산에서의 구름과 대칭되는 하나님의 현현을 나타내는 히브리식 표현으로, 공관복음서의 이야기들은 시내산에서의 신의 현현을 묘사하는 것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출24:16). 그러나 저자는 그의 독자들에게 시내산에 대한 언급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언을 ‘들어라’는 식의 모세의 유형론같은 것을 제시하는 변화산 전승의 모든 특징을 생략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예수는 단순한 한 사람의 종말론적 예언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종말론적 대리자로 나타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우리는 하나님이 예수를 향하여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부르는 소리에 대한 언급은 베드로후서의 저자가 변화산의 사건을 제자들을 향하여 예수를 계시해 줄뿐만 아니라 종말론적 왕으로서 예수가 하나님에 의해서 실제로 지명되었음을 제시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18절: “이 소리(ταύτην τήν φωνήν)는 우리가 저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서 나옴을 들은 것이라:” 17절에서 예수가 자기의 아들이며 자기와 동등하게 존귀하고 영광된 존재라는 것을 말씀한 소리가 ‘하늘로부터’(εξ ουρανου) 들렸다는 것은 묵시문학적 환상에서 하나의 표준적인 특징이다(단4:31, 1에녹서13:8, 65:4, 계10:4, 8, 11:12, 14:13). 역사적으로 예수가 어느 산에서 변형했다는 증거는 없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이 소리를 우리가 들었다(ἡμεις ηκουσαμεν)는 점이다. 저자는 그 자신이 하늘로부터 나는 소리를 듣고 하나님의 큰 위엄을 목격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서 자신들이 직접 체험한 것을 강조한다.
‘거룩한 산에’(εν τω ἁγιω ορει)는 헐몬산이나 다볼산을 의미하지만(박창환), 흥미 있는 점은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이 시내산에 내려왔으므로 거룩한 산임에 분명하지만, 한 번도 거룩한 산이라고 호칭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구약에서는 오직 시온만이 거룩한 산으로 지칭된다. 그래서 우리는 70인역 시편 2:6에서 “내가 그의 거룩한 산 시온에서 그에게 왕으로 임명받았다”는 구절의 반영으로 보면 될 것이다. 그 산이 어느 산이든지 간에 저자가 그 산을 ‘거룩한 산’이라고 부른 이유는 하나님이 그 산에서 영광 가운데 나타났을 뿐 아니라 예수의 신적 영광이 그 산에서 나타났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베드로후서의 저자가 논증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를 왕으로 임명했을 때 사도들이 예수와 함께 있었다는 것과 그들 자신이 하나님의 신탁을 들었다는 것이다.
19절: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19절부터는 16-18절까지의 논지와는 사뭇 다른 전개를 보이는데, 구약의 예언을 따라서 거짓 교사들에게 논박을 시도하려고 한다. 사도들이 파루시아를 선포하는데, 그들의 선포는 단순히 꾸며낸 신화를 추종하는 것이 아니라 더 확실한 예언을(βεβαιοτερον τον προφητικον λογον) 따라서 이뤄진 것이다. 과연 이 확실한 예언의 말씀이 무엇일까? 이것에 대한 설명은 여러 가지로 제시된다: (1) 구약의 메시아 예언 (2) 구약 전체에 나타난 메시야에 대한 예언 (3) 구약과 신약의 예언들 (4) 파루시아에 대한 하나의 예언으로서 변화산 등을 지칭한다. 그러나 ‘더 확실한’을 의미하는 ‘베바이오테론’(βεβαιότερον)은 형용사의 비교급으로 어떤 것에 비해 더욱 확실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구절은 사도들이 허탄한 신화를 추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한 구약과 그들이 목격한 변화산에서 그들의 메시지를 위한 권위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정당할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이 예언의 말씀은 어두운 데 비취는 등불과 같아서 주의하는 것이 잘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개역 성서에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표준 새번역: 이 예언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καλως ποιειτε(너희가 잘 행한다)는 영어의 제발(please)과 동등한 의미로 알려졌지만(cf. 약2:8), 그것보다는 훨씬 더 강한 어조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 부분은 베드로후서에서 가장 강하게 독자들을 경고하기 때문이다. 즉 어두운 데 비취는 등불을 이 예언의 말씀과 동일시하는데, 등불과 하나님의 말씀을 비교하는 것은 일반적이다(시119:105). 이 세상에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이 없다면 그 곳은 암흑이며 지옥이다. 그러므로 이 예언의 말씀은 어둠에 거하는 희망 없는 자들에게 빛의 광선을 발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예언의 말씀을 주의하여 잘 다루는 게 절실할 것이다.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에서 ‘날’은 파루시아와 함께 시작될 종말론적 시대를 지칭하는 하나의 상징이다. 이 날에 관사가 붙어있지 않기에 ‘주님의 날’을 지칭하지 않는 것으로 볼 이유는 없다. 왜냐하면 여기서 날은 어둠의 시간에 반대되는 빛의 시간으로 언급되기 때문이다. 즉 전체적으로 종말론적 시대를 의미하는 상징임이 드러난다. 여기서 더욱 흥미 있는 점은 샛별이 떠오른다는 표현인데, 이것은 분명히 계시록 22장 16절에서 예수에게 적용된 새벽 별로 지칭된 별에 대한 해석을 제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떠오르는 샛별은 종말론적 시대를 시작하는 그리스도의 파루시아에 대한 하나의 상징이다. 여기서 이 샛별이 너희 마음에(εν ταις καρδιαις ὑμων) 떠오른다고 하는데, 이 표현은 좀 신기하게 보인다. ‘너희 마음에’가 의미하는 바는 당시의 많은 신약의 저자들처럼, 파루시아의 지연(벧후3:8-9)이 임박한 종말에 대한 신앙을 완전히 배제시키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베드로후서의 저자에게도 역시 무한정한 파루시아의 연기는 상상할 수 없는 대단한 위기였던 것 같다.
20절: “먼저 알 것은 경(經)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πασα προφητεια γραφης ιδιας επιλυσεως ου γινεται):” 본 절은 해석의 문제를 가지고 있는데, 크게 두 가지의 번역으로 나뉜다: (1) 성경의 예언은 사사로이 해석할 것이 아니다. (2) 성경의 예언은 예언자 자신의 해석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즉 현재의 상황에서 이 예언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와 예언의 본질에 대한 문제로 요약된다. 논의는 계속되지만, 여기서 우리는 어떤 관점에 관심을 두더라도 예언은 하나님의 영으로 된 것이지 사람으로 된 것도 아니며 사람이 사사롭게 해석할 수 없는 진기한 것임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이 말은 물론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사제들만이 갖는 성서의 해석 권한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다. 저자는 당시 거짓 교사들이 성서의 말씀을 임의로 그릇되게 해석하고 있다는 점을 경고하기 때문이다(2:1; 3:16).
21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원문에는 본 구절 첫 부분에 ‘왜냐하면’(γάρ)이 나오는데, 20절에서 언급한 성경을 사사로이 풀지 말아야 할 이유를 밝혀준다. 저자는 그 이유가 성경이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는 당시의 이단자들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예언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공교한 이야기에 불과하다(16절)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반박하기 위한 것으로 여기서 그는 성경의 신적 기원을 강조한다. ‘감동하심을 입은’으로 번역된 페로메노이(φερόμενοι)는 문자적으로 ‘무엇인가를 지고 있는 수동적인 상태’란 뜻으로 사용된다. 이것은 성경이 사람들의 사상에 의해 기록된 것이 아니라 성령이 지워준 것으로 기록되었다는 말이다. ‘성령에 이끌려서’로 번역된 표준 새번역의 해석은 이 점을 잘 포함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의도에서 이렇게 대단한 언어로 거짓 교사들을 경고하는가? 20절에서부터 저자의 강한 어조는 거짓 교사들을 지목하는 것임을 알려 주는데, 21절에서는 단언하건대 거짓 교사들의 헛된 주장, 즉 예언이 인간의 조작에 의한 것이라는 내용을 부정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3. 설교의 적용
설교자가 한 편의 설교를 생산하려고 할 때, 항상 어려운 문제들이 뒤따른다. 그 가운데서 설교자가 피하기 바라는 것이 오늘의 본문과 관련되지 않나 싶다. 그 이유는 이 본문이 설교자의 흥미를 끌기 쉽지 않기 때문이리라. 이왕이면, 쉽고 설명하기 좋은 본문을 택하지 왜 굳이 힘든 본문을 선택해서 골머리(?)를 앓느냐는 것이다. 사실 일 주일에 최고 10회의 설교를 해야하는 한국교회의 설교자들의 상황에는 이 말이 딱 맞다. 더구나 요즘 시대는 너무 힘들어서 모두가 쉽고 재미난 것을(예. T.V.의 희극물) 선호한다고 하는데, 설교까지 힘들다면 누가 특정한 교회에 찾아오겠는가 하며 본문 선택에서도 희극적 요소를 찾아 나서게 만든다. 그렇다면 어떻게 오늘의 본문을 설교할 것인가? 예나 지금이나 교회 내에는 이단적 요소에 현혹되어 신앙 공동체를 파괴하는 세력들이 존재한다. 더군다나 21세기를 얼마 남겨놓지 않은 상황에서 세기말 현상으로 우리의 앞날이 걱정되는 현실에서는 더욱 기승을 부릴 것이 뻔하다. 이런 시기에 오늘의 본문은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경고로 제시해준다.
동시에 오늘의 본문은 교회력에 의하면 수난절이 시작되기 전 주일에 설교하면 좋을 것이다. 예수의 수난은 곧 그 분의 인류의 영원한 생명을 향한 도전이고,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사의 틀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들을 시작하는 예수의 시작에는 변화산의 체험이 있었다는 말이다.
3-1. 하나님의 말씀은 꾸며낸 허구가 아니다.
신앙인의 생활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인식되는 것은 전도와 영혼에 대한 사랑이다. 그러나 우리가 전도하면서 느끼게 되는 당혹감은 성경의 모든 내용들을 속속들이 읽고 어디서 알았는지 모르지만 그 내용들에 대해서 해석을 곁들여 가며 조목조목 반론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이다. 그런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 오늘의 본문에 등장하는 거짓 교사들의 반론일 것이다. 이들은 성서의 내용쯤은 이미 다 알아차린 상태여서 그런지 교회를 온통 쑥밭을 만들어 버린다. 이리하여 교회는 아수라장이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때 확실한 논증과 변론의 자세를 가져야만 한다. 그래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뱀같이 지혜로워야 한다고 권고했을 법하다. 아무런 준비도 갖추지 않고, 전도의 대열에 들어섰을 때 당황할 수 있음을 본 절은 우리들에게 시사한다. 히브리서의 저자가 유대교에 대한 기독교의 우월성을 논증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논거를 제시하는가? 모든 준비를 충실히 마치고 전도의 대열에 나서라! 아직도 우리의 추수할 곡식들은 많으니까? 왜 그리 바빠서 우왕좌왕하는가?
동시에 오늘의 본문은 거짓 교사들의 현세적인 관심을 통해서 교회도 현실적인 문제에 해답을 제시하도록 무언가를 권고하는 것 같다. 오직 믿음과 오직 은혜만을 외치는 자들의 속을 들여다보면 역겨워서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를 때가 많다. 일전에 종말을 외치는 자들이 있었지 않았나? 모든 사람들에게는 종말의 소식을 외쳐대던 자는 좋은 생활을 위해서 모든 것을 이미 준비해 놓은 상태였으니... 이것이 오늘의 한국 교회와 지도자들의 모습이 아닌지?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파루시아에 대한 약속을 수용해야만 신앙인이다. 그러나 파루시아에 대한 대망만이 신앙의 전부는 물론 아님을 알아야 한다. 네이리의 에피큐러스 학파와 베드로후서의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을 연결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이 본문을 읽어보면, 교회는 현실적인 문제에는 관심이 없다는 하나의 투정 같은 게 느껴진다. 그러니 교회는 다시 한번 겸손하게 현실의 문제에 대하여 마땅한 대안을 제시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언제까지 영적인 내용만을 강변할 것인가? 우리 주변에는 가슴 아파하며 울고 있는 형제, 자매가 많은 데 말이다. 교회는 물론 구제 기관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교리 학교도 아님을 신앙인들은 명심하라. 우리의 신앙과 신념을 저버릴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화석화된 공허한 언어들로 차 있다면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주님의 강림을 대망하는 자는 있는 것을 나누고, 다시 한번 성서의 교훈으로 돌아가야 하리라! 이것이 거짓 교사들의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지적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를 괴롭히는 자들도 어차피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들이기 때문이다.
3-2. 파루시아의 그리스도를 만나면 모든 인간은 빛의 광선을 받아서 영원한 생명의 잔치에 참여하게 된다.
충남 당진군 석문면 교로리 일명 왜목 마을(목이 왜소하고 왜가리 목과 비슷하기에 붙여진 이름임)은 ‘서해에서 해가 떠서 서해로 해가 지는 마을’로 이름나 있다(중앙일보 98. 12. 30). 우리의 상식인 ‘해는 동해에서 떠서 서해로 진다’는 과학적 사실이 여지없이 무너지는 곳이라고 한다. 이처럼 우리의 주변에서 경험하게 되는 일들이 우리를 가끔 흥분시키는데, 하나님이 약속한 파루시아의 약속은 우리를 얼마나 당황스럽고 놀랍게 만들까? 이것이 현재적이든 미래적이든 상관없다.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는 것이기에... 파루시아에 대한 약속은 현실의 신앙인들을 깨우쳐 주기도 한다. 물질과 세상에 대한 탐닉 일변도의 삶은 인간을 병들게 만들고 배만 부른 돼지와 같게 만들어 버린다. 그렇다고 물질이 아무리 많은 들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면 그것 또한 문제 투성이가 된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탕자의 경우가 이와 같은 경우에 해당한다.
또한 미래적 측면에서의 파루시아에 대한 비전은 신앙인들에게 하나의 경고를 제공한다. 왜냐하면 인생이 결코 짧은 시간만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고 길지도 않지만 말이다. 하여간 인생 길에서 우리는 방황하고 실패할 수 있고, 하나님의 길에서도 잠시 이탈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신앙인들이 완전히 이탈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다른 곳에 있지 않고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때, 우리의 삶에는 광명이 솟아온다는 엄연한 사실과 이것이 구약의 예언에 따른 약속이기 때문이다.
3-3. 하나님의 대변자들로서의 신앙인의 특권
거짓 교사들의 이단적 교훈은 구약의 예언들도 신적 기원을 갖지 않았다는 것인데, 그러므로 인간들이 자유롭게 해석하고 분리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런 주장들을 거부하면서, 하나님의 성령이 예언자들의 꿈과 환상뿐만 아니라 그들의 해석에도 간여했다고 논증한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예언들을 언급할 때, 구약의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대변인으로 활동하였듯이, 그들은 하나님 자신의 대변자가 된다. 우리가 오늘의 본문에서 주목해야 할 사항은 우리가 읽고 있는 성서의 말씀이 사람의 뜻에서 나온 사람의 글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점이다. 과학 문명이 발달하고 이성이 극대화된 현대의 문명 사회 속에서 우리는 자칫 하나님의 말씀을 도외시하거나 잊어버리기 쉽다. 그럴 때일수록 성도는 성서의 말씀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진리임을 믿고 그 말씀을 묵상하고 탐구하여 깨달은 바를 삶 속에서 실천해야 할 것이다. 그 때에만 생명을 통한 진정한 구원이 있다.
성경해석의 첫째 키(Key)
벧후 1:20-21
성경은 성령의 영감을 통해 하나님 말씀을 받아 기록한 책입니다. 사사로이 즉, 인간의 철학이나 사상에 견주어 해석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의 감동(inspiration)을 받아 기록된 것이므로 해석할 때도 당연히 성령의 조명(illumination)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신자들이 성령의 간섭이라고 하면 일단 신비한 차원으로만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경을 해석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이 구절을 통해 제게 말씀하시려는 내용을 알 수 있도록 성령님 저를 깨우쳐 주시옵소서”라고 잠시 기도는 해야 합니다. 정작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그런 후에 자기 내면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으면 바로 그것이 성령의 음성이라고 간주해버립니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음성이 들리기를 간구하는 것보다는 올바른 태도이긴 해도 여전히 심각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선 자신의 철학, 지식, 체험 등에서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직감(直感 intuition)일 가능성이 가장 큽니다. 또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인간의) 마음”(렘17:9)인데 믿음을 가진 후라도 그 상태가 크게 나아진 것이 없습니다. 나아가 사단은 기도하는 자를 가장 자주 훼방하려 듭니다.
따라서 기도 중에도 자신의 인간적 정욕에서 떠오른 생각이거나 사단이 심어주는, 꼭 나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표면적으로는 아주 좋은 생각일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성령의 음성으로 간주한 것이 오히려 그 반대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진짜로 성령이 들려주는 음성도 많음을 부인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잠시 묵상하거나 기도했다는 이유만으로 내면에서 들리는 음성을 무조건 다 성령이 주시는 것으로 간주하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성령이 신자를 인도하는 과정과 결과는 그렇게 애매모호하지 않습니다. 구름 잡듯이 희미하거나 일말의 불안 의심 등이 남아 있다면 성령이 하신 일이 아니거나, 아직은 성령의 간섭이라고 확신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입니다. 진리란 복잡하거나 무질서하지 않습니다. 간단명료하며 알기 쉽습니다. 성령의 인도라면 반드시 의심을 제거해서 흔들림 없는 믿음에 이르도록 해주므로 계속 쉬지 말고 기도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무엇보다 성경 해석에서 보다 더 확실한 기준이 따로 있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신자가 성경을 읽을 때마다 그런 기준을 붙들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성령이 하는 역할입니다. 성령의 조명이라고 해서 눈앞에 갑자기 밝은 빛이 비추이고 심오한 깨달음이 생기는 즉, 득도(得道)하는 것처럼 해주지 않습니다.
그 기준은 아주 간단합니다. 전후 문맥에서 성경을 해석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우선 본문만 해도 사도가 정작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부연 설명하는 보조구절에 해당됩니다. 본문 자체가 주된 메시지가 아닙니다. 다른 말로 성경의 성령영감을 증명하려는 목적 외에 본문만 따로 떼서 해석하면 그 주 메시지를 놓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선 15절부터 찬찬히 읽으시면 그리스도의 강림을 강조하려는 것이 주 메시지입니다. 분문 이후와 연결하면 그 강림을 부인하는 거짓교사(3:4)와 비교하여 재림의 확실성을 보장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확실성의 증거로 사도는 두 가지를 제시했습니다.
첫째는 자신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16절)고 합니다. 변화산에서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17절)는 음성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시는 것을 두 눈과 귀로 똑똑히 듣고 보았으며 또 바로 그분이 죽고 부활하셔서 약속하셨기에 재림은 너무나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서 어떻게 말했습니까?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으니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18절) 그 놀랍고도 신비한 체험의 증거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있다고 합니다. 바로 성령의 감동으로 예언한 성경입니다. 주님의 재림을 예언하는데 성경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없으니 절대로 거짓 교사에게 속아 넘어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베드로가 변화산에서 겪은 체험은 너무 분명했습니다. 모든 세대의 모든 신자들을 다 따져도 이보다 더 크고 확실한 체험은 없습니다. 예수님과 직접 동행하면서, 천국에 있어야 할 모세와 엘리야를 보았고, 하늘에서 하나님의 음성도 들었습니다. 아무리 성령의 은사를 다양하게 받은 자라도 결코 이와 같은 체험은 할 수 없습니다.
바울이 하늘의 삼층천까지 올라가 도무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천국의 계시를 받아 왔습니다. 성경 기록에는 없지만 천국에서 예수님을 직접 대면했을 수 있습니다. 요한 사도도 천국을 보았을 뿐 아니라 인류 역사가 장래 어떻게 진행될 지에 대한 유일하도고 절대적인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둘은 엄밀히 말하면 직접적 체험이 아닙니다. 둘 다 자기 몸은 가만히 있는 상태에서 환상 중에 듣고 보았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베드로는 직접 변화산에 올라갔으며 예수님과 대화를 나눴습니다. 무엇보다 지난 3년간 동고동락 했던 주님과 함께 체험했습니다. 예수님마저 산에서 내려간 후에는 절대 비밀로 붙이라고 당부했을 정도로 사람이 겪을 수 있는 체험으로는 역사상 최고였습니다. 주님의 재림을 보장하는데 이보다 더한 증거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지금 그보다 더 확실한 증거, 성경이 있다지 않습니까?
그럼 어떤 결론에 이릅니까? 성경을 사사로이 풀지 말아야 하는 첫째 의미는 바로 성경은 반드시 성경으로 풀라는 것입니다. 앞뒤 문맥을 잘 살펴서 저자가 정작 알리고자하는 주된 메시지를 찾아내어야만 합니다. 한두 구절만 따로 떼어서 그것도 문자적인 해석을 하는 것은 절대 금물입니다. 보조적인 부연설명에 그치는 내용에 집착해서도 안 됩니다.
또 성령의 깨우침을 구한다고 내면의 음성을 듣는 것까지는 좋은데 그 들은 음성을 반드시 성경 진리에 다시 비춰봐야 합니다. 당연히 앞뒤 문맥에 대입하여야 하고 성경이 일관되게 말하는 원리와 부합하는지도 따져 봐야 합니다. 자신의 마음에 의심과 불신과 불안의 찌끼가 남아 있어서도 당연히 안 됩니다.
신령한 체험을 사모하는 것도 좋으며 권장할 만하지만 그 체험을 성경보다 앞세워선 절대 안 됩니다. 베드로의 변화산 사건보다 더 신비하고 확실한 체험은 이젠 결코 일어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강림하지 않는 한에는 말입니다. 베드로의 그 체험보다 더 확실한 예언이 바로 성경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혹시라도 성령의 체험을 하게 되면, 아니 정확히 말해서 성령의 간섭이라고 여겨지는 체험을 했더라도 반드시 성경에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신자는 그보다 주야로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진리를 깨우쳐야만 합니다. 체험보다 말씀이 몸에 더 가까이 붙어 있어야만 합니다. 악인의 꾀를 좇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으려면 성경을 따르는 길뿐입니다. 신자가 망하는 길은 하나뿐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거나 모자라는 것입니다. 자칫 성령 체험이라고 스스로 확신하는 일로 인해서도 얼마든지 망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요컨대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할 수 있을 때까지 성경을 읽으셔야 합니다. 아직 일독도 하지 않은 신자가 태반이겠지만 ....
성령에 이끌려서
벧후 1:16-21 / 백창욱 목사
오늘은 주현절 마지막 주일입니다. 다음 주부터 사순절입니다. 주현절에서 사순절로 넘어가는 이 주일에 예수님의 변모사건을 통해 하나님 말씀을 영접하겠습니다.
어제 페북에서 재미있는 글을 봤습니다.
“근데... 예수가 변화할 때 나타난 사람이 모세이고 엘리야인건 어떻게 알았을꼬... 얼굴을 알 턱이 없을텐데...”
오늘 복음말씀인 마태 17장에 나온 변화산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세 제자와 함께 높은 산(변화산은 그 산에서 예수님이 영광스럽게 변화하셨기 때문에 붙인 이름)에 올라가셨는데, 그곳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사건입니다. 그 때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하기를, “선생님, 초막을 세 개 지어서 하나는 선생님을, 하나는 모세를, 하나는 엘리야를 모시겠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이들이 모세와 엘리야인 것을 어떻게 알아봤을까? 라는 의문을 던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별 의문없이 그러려니 하고 지나갔을 것입니다.
굳이 말하자면, 영의 세계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현상세계 방식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변화산 사건의 의미는 무엇인가? 복음저자는 예수님 변모사건 증언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가요?
지난주에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대해 파격적인 선언을 했다고 한 말 기억하시는지요?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버젓이 있는 상태에서 성전과 전혀 관계없는 이방인 고린도사람들에게 ‘당신들이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선언하심으로써 성전의 개념이 예루살렘에서 교회로 이동했다고 말했습니다. 높은산 변모 사건도 그런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 변모 사건에 대한 존 쉘비 스퐁(성공회 주교, 유명한 기독교변증가)의 해석이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구절구절에서 교훈을 받습니다. 이것도 좋지만, 더불어서 구조적으로 큰 틀에서 전문가의 신학 해석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스퐁주교는 마태복음 전체가 유대력 절기에 맞춰 읽는 회당예배의 목적으로 구성된 책이라고 합니다. 그 중 변화산 사건은 유대절기인 하누카(성전의 회복을 기념하는 절기)와 연결되어 있고, 예수는 ‘성전 없는 시대의 새로운 성전’(성전이 무너진 70년 이후이므로) 이라는 의미였다고 주장합니다. 성경해석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히는 의미에서 스퐁주교의 글을 간추려서 소개합니다.
제목은 ‘하누카와 변화산사건 : 하나님의 빛과 성전에 대한 재해석’ 입니다.
변화산 사건이 하누카와 연결돼 있다고 하니 하누카를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하누카 절기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그리고 복음저자는 이 하누카절기와 예수님의 변화사건을 어떻게 관련지었는지 보겠습니다.
주전 323년 알렉산더 대왕이 사망하고 유대지역은 셀류시드 왕조의 지배하에 들어갑니다. 주전 175년 안티오쿠스가 왕이 되었는데, 그는 극심하게 유대교를 탄압했습니다. 유다인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재앙을 만납니다.
“왕은 예루살렘과 유다의 여러 도시에 다음과 같은 칙령을 내렸다. 유다인들은 이교도들의 관습을 따를 것, 성소 안에서 본제를 드리거나 희생제물을 드리거나, 술을 봉헌하는 따위의 예식을 하지 말 것, 안식일과 기타 축제일을 지키지 말 것, 성소와 성직자들을 모독할 것, 이교의 제단과 성전과 신당을 세울 것, 돼지와 부정한 동물들을 희생제물로 잡아 바칠 것, 사내아이들에게 할례를 주지 말 것, 온갖 종류의 음란과 모독의 행위로 스스로를 더럽힐 것, 이렇게 하여 율법을 저버리고 모든 규칙을 바꿀 것, 이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마카베오상 1:44-50)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안티오쿠스는 번제 제단 위에 가증스러운 파멸의 우상을 세웠습니다.(1:54) 또 자기 아이들에게 할례를 받게 한 여자들은 사형에 처하고 젖먹이들도 목을 매달아 죽였습니다.(1:60) 억압은 갈수록 더 심해졌고, 결국 유대인들은 게릴라전을 펼치며 저항을 시작했습니다. 제사장 가문의 마따디아는 그의 다섯 아들들과 더불어 안티오쿠스 4세에게 항거하는 '마카비 혁명운동'이라 알려진 무력투쟁을 시작했습니다. 율법을 지키려는 경건한 유대인들이 힘을 합쳤습니다. 마따디아는 혁명을 일으킨 직후 죽었고 그의 아들 유다(Judah)가 뒤를 이어 혁명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초기 혁명운동의 진두지휘를 맡았던 유다는 놀라운 게릴라 전법 때문에 '마카비'(의미는 '망치')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유다는 기원전 164년 마침내 예루살렘을 점령하였고, 예루살렘 성전을 청결케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지금까지 이 사건을 '하누카'(요 10:22, 성전봉헌절, 修殿節)라는 명절로 기념하고 있습니다.(값진 승리의 경험 때문에 그 뒤 로마식민지 때도 계속 무력저항하는 계기가 된 듯하다)
하누카라는 절기가 생겨나자 유다 종교지도자들은 구약성서에서 종교적인 뒷받침을 해줄 만한 것들을 찾아냈습니다. 하나님의 빛이 성전에 임한 사례들입니다. 느헤미야와 에스라 시대에 성전을 재건한 때, 솔로몬이 성전을 건설하였을 때, 광야 시절 성막에서 예배할 때,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두 번째로 받고나서 얼굴에 광채가 났을 때, 하나님의 빛이 임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누카와 관련된 구약의 이야기들이고, 마태는 이것을 예수의 변모사건에 연결지었습니다.
(문제는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고 난 이후에 발생합니다.)
주후 70년 이후의 유대 예배에서 하나님의 빛이 어떻게 성전을 회복할 수 있었을까요? 70년은 로마 군대에 의해 성전이 파괴된 해입니다. 유대인들은 이제 성전 없이 예배해야 합니다. 유대 종교는 큰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때 성전 중심의 정통파 유대인들과 아직까지는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기보다는 “그 길을 따르는 사람들”로 불리던 예수의 제자들은 경쟁관계에 있었습니다. 정통파 유대인들은 성전을 파괴하게 된 어리석은 전쟁을 지지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전쟁과 거리를 두었습니다. 70년 이후 두 그룹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었습니다. 정통파 유대인들은 그들의 일상생활을 위해 성전이 없는 것을 받아들였습니다.(여기서 유대권력 중심이 성전체제에서 바리새 율법체제로 넘어감)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예수를 새로운 성전으로 삼았습니다. 변화산 사건은 이런 상황 속에서 만들어졌습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는 빛나는 모습으로 변화했습니다. 마태는 하나님의 빛이 예수에게 임했다고 증언합니다. 예수는 새로운 성전이고, 하나님이 인간의 삶으로 들어오신 것이고, 인간과 신성이 만나는 새로운 장소라는 의미입니다.(페이스북에서 변영권목사 글 인용)
이상이 전문가가 해석한 예수님의 변화산 사건의 의미입니다. 요약하자면 마태는 하누카로 성전을 회복하신 하나님의 빛이 변화산 변모사건을 통하여 예수님이 새로운 성전이 되셨다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저의 해석을 조금 덧붙이겠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영광변모의 장소가 산인가? 하는 점이고, 모세와 엘리야의 등장은 무슨 뜻인가? 하는 점입니다.
산은 하나님영광이 이스라엘에 나타나는 장소입니다. 하나님은 시내산에 내려오시어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고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도 산상수훈을 말씀하셨습니다. 거룩한 산에서 하나님 임재의 상징인 거룩한 말씀이 내려온다는 이스라엘 전통을 이어받았다는 뜻입니다.
모세와 엘리야의 등장은 무슨 뜻인가요? 전에 제가 이 본문 설교할 때 이들의 등장이유는 두 사람 다 죽음을 경험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모세는 무덤이 없고 엘리야는 불병거타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이 해석도 유효하지만, 산의 거룩함에 비추어서 새로운 영감이 떠올랐습니다. 모세가 처음 하나님을 대면한 장소가 하나님의 산 호렙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한 산에 영광으로 임재하시어 미디안 목동인 모세 인생을 결정적으로 전환시켰습니다. 엘리야는 이세벨에게 쫓겨서 도망 다니다가 40일 40야를 걸어서 호렙산에 도착합니다. 완전히 자포자기 심정이었는데 하나님이 호렙산에 영광으로 임재하시어 세미한 음성으로 엘리야를 다시 일으켜 세웁니다. 두 사람 인생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이 거룩한 산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처럼 예수님도 높은 산에서 하나님과 완전 일치를 이루시는 영광스러운 변모가 일어났습니다. 모세처럼, 엘리야처럼, 예수님도 산에서 그의 인생이 결정적으로 전환되었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변모 사건을 베드로가 자기 입으로 직접 증언하는 내용입니다. 16-18절 세 절에 걸쳐서 비교적 상세하게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말합니다. 베드로도 마태복음 저자가 증언하는 목적과 똑같은 맥락으로 변화산 사건을 고백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베드로의 신앙을 지탱한 두 개의 기둥이 있습니다. 하나는 그가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영광을 체험한 사건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위엄을 눈으로 봤습니다.(16절) 또 하나님의 음성도 듣습니다. “우리가 그 거룩한 산에서 그분과 함께 있을 때에 우리는 이 말소리가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것을 들었습니다.”(벧후 1:18) 베드로는 매우 특별한 체험을 했습니다. 이 체험이 교회의 지도자로서 무수한 어려움과 박해를 견디고 남은 생애 교회를 지킨 터전이었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겪은 하나님현존 경험을 여러분도 체험하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후예입니다. 베드로가 겪은 은총을 우리도 똑같이 받을 수 있습니다. 물론 일상생활을 성실하게 사는 자체도 은총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일반은총입니다. 일반은총은 누구나 받는 은총입니다. 일반은총으로는 부족하다.
베드로가 고백하는 것은 특별은총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나를 만나시는 단독체험의 은총을 받아야 합니다. 특별은총이 어느 때 어떤 경로로 어떤 방식으로 올지는 모릅니다.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어쩌면 안 올 수도 있습니다. 제가 은총을 내리는 당사자가 아니므로 뭐라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모해야 합니다. 원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정 필요하면 원하지 않아도 주시겠지만 갈급하면 더 잘 받을 수 있습니다. 앞서 간 사람들의 경우로 말하자면 그 은총은 하나님께 꾸준히 매달릴 때 옵니다. 하나님이 아쉬운 게 없는 사람한테 주시지는 않습니다. 본 회퍼가 십자가의 은총이 수퍼 진열대에서 물건 사듯이 값싼 은총이 됐다고 말했는데, 그 말은 사람들이 값싼 은총을 만들었다는 말이지 하나님의 은총이 값싼 은총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베드로가 겪은 주님현존, 말로 다할 수 없는 은총을 겪으시기를 빕니다. 왜? 그리스도인으로서 온전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 다음 더 중요한 기둥을 말합니다. “또 우리에게는 더욱 확실한 예언의 말씀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특별체험보다 더욱 확실한 게 있다고 합니다. 바로 예언의 말씀입니다. 오늘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말씀의 소중함을 두 가지 은유로 말합니다.
하나는 날이 새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다른 하나는 어둠 속에서 비치는 등불을 대하듯이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라고 했습니다. 샛별은 동트기 전 뜨는 별입니다. 가장 어둠이 짙을 때입니다. 그럴 때, 그런 위기와 고난에 직면했을 때 하나님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라는 뜻입니다. “마음 속에서 날이 새로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어둠 속에서 비치는 등불도 같은 맥락입니다. 어둠은 혼탁하여 앞이 보이지 않는 세상입니다. 그런 어둠 속에 하나님말씀이 등불처럼 비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짙은 밤, 어둠에 대해 상고하겠습니다. 우리는 앞이 보이지 않는 세상, 고난의 현실을 만나면 당장 빠져 나가려고 몸부림칩니다. 아프기 때문에. 그러나 어둠 속의 성찰이 필요합니다. 왜 이런 고통이 닥치는지? 이것은 무슨 뜻이지? 이런 일을 생각할 때는 어둠에 있을 때입니다. 예수님의 영광변모 이전에 변화산은 짙은 어둠이었습니다. 깊은 밤이었습니다. 이렇듯이 어둠은 빛을 만나기 위한 마중자리입니다. 짙은 밤, 어둠의 경험이 있기에 샛별이, 등불이 귀한 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어둠을 긍정하면서 하나님 말씀에 자신을 비추십시오. 고통의 의미를 깊이 새겨야 예언의 말씀이 더 실감납니다.
어둠 속에 머물 때도 성령에 이끌리면 견딜 만 합니다. 예언의 말씀을 쓴 사람들도 성령에 이끌려서 썼습니다. 그래서 경의 말씀에 사람이 썼다는 사사로움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권위가 실렸습니다. 예수님도 광야에서 악마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 성령에 이끌려서 가셨습니다. 그리고 악마의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성령에 이끌리면 내 자아대로 움직이는 것보다 백번 안전합니다. 성령에 이끌려서 주현절을 마무리하고 사순절을 맞이하기를 빕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다같이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