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복음을 선포할 것인가?
욥 7,1-7; 1코린 9,16-23; 마르 1,29-39
연중 제5주일; 2024.2.4.
1. 오늘 미사에서 들려오는 말씀의 초점은 복음 선포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시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느님의 자비에 의탁하며 사탄의 시험을 묵묵히 참아 받는 욥 그리고 예수님을 본받아 약한 이들에게 자유로이 복음을 선포하는 바오로가 오늘 말씀의 주인공입니다. 구약시대를 대표하는 욥과 신약시대를 대표하는 바오로가 예수님의 복음선포 활동을 떠받치고 있는 구도입니다.
먼저 살펴볼 오늘 제1독서는 욥기입니다. 욥기에 등장하는 여러 소재들이 노아 시대에서부터 바빌론 시대에 이르기까지 한 인간이 겪기에는 불가능한 여러 시대에 걸친 것들이어서, 욥은 특정한 시대에 살았던 실존 인물이 아님을 알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 상상력으로 꾸며낸 가공 인물은 더욱 아닙니다. 욥기는 구약성경의 가르침에 정통한 현자들이 후대의 유다인들을 위해 교훈을 전해 주고자, 자신들이 기대하고 있는 의인의 표상을 종합하여 내세운 일대기입니다. 따라서 욥은 실제로 나타났어야 했다고 보는 이상적 인간형인 동시에 시련이 그칠 날 없었던 이스라엘 민족의 의인화된 역사입니다.
욥은 악을 멀리하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올곧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욥의 믿음을 시험해 보려는 사탄의 계략으로 욥은 처음에는 재산을 빼앗기고 자식들을 잃어버리는가 하면 끝내는 몹쓸 병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욥은 자신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다시 거두어가신다고 해서 그분께 대한 믿음을 저버릴 수는 없다는 것이 욥의 신념이었습니다. 결국 욥의 이러한 올곧은 믿음은 하느님께 인정을 받았고 잃어버렸던 재산과 자식들과 건강을 되찾게 했습니다. 이처럼 욥기는 고난으로 점철된 이스라엘 역사에서 실제로는 이루지 못한 바를 아쉬워하면서 후대의 역사에서라도 실현되기를 바라는 희망을 강력하게 표명한 뼈아픈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가장 큰 특징은 하느님의 크신 권능을 의식하고 의로운 응답을 해야 한다는 메시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산들을 옮기시고, 분노하시어 그것들을 뒤엎으시는 분, 땅을 바닥 째 뒤흔드시어, 그 기둥들을 요동치게 하시는 분”(욥 9,5-6)이시라는 것입니다. - 노아의 대홍수 당시에는 이러한 조산작용과 지진현상들이 실제로 일어났었음을 현대의 과학자들이 입증해 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산들을 덮을 정도로 물이 쏟아졌으나, 바닷속 땅들이 융기하게 하시어 새로운 땅을 만드셨는가 하면 그 바람에 깊어진 바다 속으로 땅을 덮었던 그 많은 물들이 흘러 들어가 고인 것이 지금의 바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전으로만 전해져 내려오던 전승을 소재로, 욥기에서는 아브라함 이전 아주 오랜 옛적에 노아 시절 이래로 전해져 내려온 하느님의 심판을 기억하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오늘의 복음은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에서 병든 이들을 고쳐주고 마귀 들린 이들을 해방시킴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신 내용입니다. 회당에서 마귀를 쫓아내시고 열병으로 누워있던 시몬의 장모도 치유하셨다는 소문이 퍼지자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오는 바람에 온 고을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치유와 구마의 기적들이 일어났고, 이 소문이 갈릴래아 지방을 거쳐서 점점 다른 지방에까지 알려지게 되면서부터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하지만 대낮에는 물론 해질녘에도 치유와 구마로 사람들을 도와주시던 예수님께서 새벽녘에는 외딴 곳으로 나가시어 하느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사람들이 그 이른 시간부터 찾아들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마을에 더 머물기보다 다른 고을들로 가서 복음을 선포하고자 하셨습니다. 결국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습니다.
이같은 보도는 예수님의 공생활 전체 활동을 간추려 전해주는 일종의 집성문(集成文)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치유와 구마 행위로써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으며, 선포 활동을 마치신 후에는 하느님께 홀로 기도를 바치셨고, 한 고을만이 아니라 여러 고을들을 두루 다니시며 바쁘게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복음 선포의 전형적인 방식은 치유와 구마 행위라는 것, 활동과 기도는 한 묶음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삶의 리듬이라는 것, 그리고 복음선포자들은 이미 다가온 하느님 나라를 절박한 심정으로 서둘러 알려야 한다는 긴박성도 알 수 있습니다.
3. 이렇게 절박한 심정으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신 예수님을 본받고자, 사도 바오로는 박해자였던 자신을 부르신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깨달은 후에는 복음선포를 숙명적인 소명으로 받아들였고 더군다나 보수를 받지 않고 노동으로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해 가면서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직을 자신의 명예로 삼았습니다. 오늘 제2독서는 사도 바오로가 그리스도 신자라고는 거의 없고 우상숭배가 만연해 있던, 당시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그나마 유럽 땅에서는 제일 앞선 문명의 세례를 받았던 코린토에서 어떻게 복음을 전하고 선교에 임했는지를 알려줍니다. 아마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그는 유럽 선교를 개척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열두 제자 출신의 기성 사도들이 할례 받은 유다인들에게 선교하려는 관성으로 움직였지만, 사도 바오로는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복음이 더욱 널리 퍼져야 한다고 생각해서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에게 선교하려는 전망 하에서 과감한 도전을 시도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양적으로는 유럽을 포함한 만방에 복음을 전하려는 선교의 보편적 전망이 열렸다고 하겠고, 질적으로는 예수님의 케리그마를 계승하는 본격적인 복음 선포가 역사적으로 전개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기록에 보면, 베드로의 선교 노선은 사회적 차별이나 불평등을 초래하는 신자들 사이의 현실 문제에 개입하기보다는 기도하고 전도하는 일에 전념하겠다는 다소 소극적인 방향이었던 것으로 나타납니다(사도 6,4). 본시 복음서에 나타난 베드로의 성정은 앞뒤를 가리지 않을 정도로 불 같이 성급한 편이었는데, 실제 사도단의 수장으로 책임을 맡고나서부터는 스테파노의 치명에도 불구하고 신중하고 보수적인 노선을 견지한 것으로 드러납니다. 물론 요한과 함께 복음 선포와 예수님의 명예에 관한 한 비타협적인 입장을 고수했던 것은 사도로서 기본적인 자세라고 인정할 수 있고(사도 4,19), 또 이방인 예비자들에게 할례를 강요하지 말자는 바오로와 바르나바의 파격적인 제안에 대해 지지함으로써 분열 위기에까지 놓였던 신생 교단의 전망을 밝게 한 것을 보면 신중할 뿐만 아니라 사려 깊은 모습으로 지도력을 보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사도 15,7-11).
그런데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께서 시키신 선교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서 특단의 자세와 대책을 세웠습니다. 복음을 거저 전하기로 한 것이 그 자세이고, 이를 사도로서의 명예로 여기면서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기로 한 것이 그 대책입니다.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겠다는 말이 왜 선교 대책으로까지 불릴 수 있는가 하면, 선교하려는 사회현실과 역사적 상황에 육화하려는 지향이요 영성이기 때문입니다.
4. 이상과 같이 복음과 독서로 들려오는 오늘 미사의 하느님 말씀은 하느님을 닮고 예수님을 본받는 길에 있어서 기본적인 바탕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목표를 확립하는 것, 병들고 마귀 들린 이들을 돕는 치유와 구마의 사도직 활동을 비롯해서 이들처럼 관심과 도움이 필요한 모든 약자들에 대한 봉사활동을 실천하는 것, 욥의 경우에서 보듯이 뜻하지 않은 시련에도 불구하고 이를 가능케 해 주시는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흔들림 없이 순명하는 것, 게다가 바오로의 경우에서처럼 복음을 선포하되 경제적 대가를 받지 말고 봉사함을 명예로 삼는 것 등입니다.
우리 교회와 신앙인들의 신앙 쇄신의 과제 역시 이상과 같이 살펴본 복음 선포의 원칙과 영성 그리고 열성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 선포의 대상과 장은 민족 복음화 그리고 아시아 복음화임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요한 바오로 2세와 아시아 주교들은 지구상 인구의 2/3를 차지하는 아시아 대륙에서 가톨릭 그리스도인들이 불과 3%에 불과하고 그나마 인구의 대다수가 가톨릭 그리스도인인 필리핀 교회를 제외하면 전체적으로는 1% 미만인 나라들이 태반인 아시아의 빈약한 선교 현실에 대하여, 긴박하게 복음을 선포하러 움직이셨던 예수님의 열성을 아시아 그리스도인들에게 촉구하고 있습니다.
가톨릭 신자 비율이 이토록 초라한 것 이상으로 복음 선포의 긴박성을 알려주는 지표는 대다수 아시아인들이 처해 있는 빈곤과 억압의 상황입니다. 산업화를 이룬 일부 나라에서도 우상숭배 풍조는 심각하며, 민주화까지 이룬 나라들에서도 세속화 현상은 서구 못지 않습니다. 이런 심각한 상황에서 요한 바오로 2세와 아시아 주교들은, “모든 이에게 모든 것”(1코린 9,22)이 되려 했던 사도 바오로의 영성을 본받아, 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이 아시아 영성의 전통을 살리는 토착화 노력을 통하여 아시아의 종교와 문화 그리고 가난한 이들과 대화를 모색하여야 한다는 삼중의 대화를 새로운 교회의 존재양식으로 제시한 바 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하면, 가톨릭 교회가 복음화 제3천년기를 준비하기 위하여 발전시켜온 사회교리 실천을 본격화함으로써 아시아 교회가 ‘예수의 선교’를 본격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호기를 맞이하고 있다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시아 대륙 전체에서 사회 공동선을 증진시키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치유와 구마 기적으로 본받는 이러한 아시아 복음화 노력을 통해 아시아 교회가 거두는 풍성한 사랑의 수확은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 역시 그 결실을 나누어 받게 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보편교회가 생동하는 복음적 활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마르 1,38)
“나는 복음을 위하여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나도 복음에 동참하려는 것입니다”1코린 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