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605
5월30일 [연중 제8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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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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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aJipwzmNnNM
[의정부교구 신기훈 그레고리오(양주 백석성당 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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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hg_GhFXDw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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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청하는 것을 내가 존중하는지 먼저 물어야>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마르 11,33)
찬미 예수님! 연중 제8주간 토요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 원로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논쟁을 벌이는 장면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오?"라며 아주 예리한 질문을 던집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진리를 알고 싶어 하는 진지한 구도자들의 모습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에 답을 주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례자 요한의 권한이 하늘에서 온 것인지 사람에게서 온 것인지 되물으십니다. 그러자 그들은 속으로 얄팍한 계산을 돌리기 시작합니다. '하늘에서 왔다고 하면 왜 믿지 않았느냐고 할 것이고, 사람에게서 왔다고 하면 군중이 두렵고.' 결국 그들은 진실을 외면한 채 "모르겠소"라고 거짓말을 해버립니다. 그러자 예수님도 단호하게 선언하십니다. "나도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주님은 왜 진리를 묻는 이들에게 침묵하셨을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진리에 대한 '존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진리를 알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진리를 이용하려 했을 뿐입니다. 하느님은 스스로 정직하지 않으면서 진리를 훔쳐 가려는 자들에게는 결코 하늘의 신비를 내어주지 않으십니다.
어느 마을에 허풍이 심하고 체면을 중시하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몸이 자꾸 아파서 아주 용하고 신통하다는 명의를 찾아갔습니다. 의사는 남자의 진맥을 짚어보더니 차트를 들고 진지하게 물었습니다. "환자분, 정확한 진단을 위해 묻겠습니다. 평소 식습관은 어떠시며, 술과 담배는 얼마나 하십니까?" 남자는 의사 앞에서 자신이 게으르고 방탕하게 산다는 것을 들키는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태연하게 거짓말을 늘어놓았습니다.
"아, 저는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조깅을 하고요. 술과 담배는 입에도 대지 않습니다. 식사도 철저하게 유기농 채소 위주로 소식하며 완벽하게 관리하고 있지요." 의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처방전을 써주었습니다. 남자는 비싼 돈을 주고 지어온 약을 매일 정성껏 챙겨 먹었습니다. 그런데 한 달 뒤, 병이 낫기는커녕 증세가 악화되어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남자는 화가 잔뜩 나서 의사를 찾아가 멱살을 잡았습니다. "당신 명의라더니 다 사기꾼 아니오! 당신이 준 약을 먹고 내 몸이 더 망가졌소!" 그러자 의사가 남자의 손을 뿌리치며 싸늘하게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제가 지어드린 그 약은 완벽한 명약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 약을 '새벽마다 조깅을 하고 술 담배를 안 하는 건강한 사람'을 위해 지어주었지, 매일 밤 술을 퍼마시고 기름진 고기만 먹는 선생님 같은 분을 위해 지어준 적이 없습니다! 당신이 당신의 진짜 모습을 속였는데, 어떻게 내 처방이 당신 몸에서 진리를 발휘할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진리를 대하는 우리의 영적 태도가 얼마나 완벽한 무결점을 요구하는지, 현대 첨단 공학의 법칙 하나를 통해 명확히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바로 반도체 공장의 클린룸(Clean Room) 법칙입니다.
스마트폰이나 컴퓨터에 들어가는 초정밀 반도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일반 공기가 아닌 완벽하게 통제된 '클린룸'이라는 공간이 필요합니다. 이 방은 먼지 한 톨, 머리카락 한 가닥도 허용되지 않는 우주에서 가장 깨끗한 공간입니다. 작업자들은 온몸을 방진복으로 꽁꽁 싸매고, 에어 샤워를 거쳐야만 그 방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왜 이렇게까지 유난을 떨까요? 반도체 웨이퍼 위에 그려지는 회로는 나노미터(10억 분의 1미터) 단위의 초미세 설계도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작업자가 귀찮다고 방진복을 대충 입고 들어가서, 아주 미세한 각질이나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먼지 한 톨이라도 그 웨이퍼 위에 떨어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나노미터의 정밀한 회로는 즉시 끊어지고 쇼트가 나서, 수백억 원어치의 반도체가 전부 불량품이 되어 폐기 처분되고 맙니다.
하느님의 진리는 이 반도체 회로보다 수억 배 더 정교하고 거룩한 우주의 설계도입니다. 이 거룩한 진리가 우리 영혼의 웨이퍼에 새겨지려면, 우리 마음은 반드시 정직이라는 완벽한 클린룸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겉으로는 기도를 하면서도 속으로는 자기 합리화와 거짓말이라는 미세먼지를 풀풀 풍기고 다닌다면, 하느님의 진리는 우리 영혼 안에서 즉시 쇼트를 일으키고 맙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진리를 쏟아부어 주시기 위해 가장 먼저 요구하시는 조건은 똑똑한 머리가
아닙니다. 내 죄와 한계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잔인할 정도의 '솔직함'입니다. 진리를 청할 때는 솔직해야 하고, 은총을 청할 때는 죄를 짓지 않을 결심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청하는 것을 존중한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얼마나 자주 유다인들처럼 속을 감추고 하느님 앞에 섭니까? 교회의 위대한 학자인 성 아우구스티누스 주교님은 『고백록』에서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진리는 빛과 같아서, 거짓으로 자신의 두 눈을 가린 자에게는 맹인의 흑암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비참함을 솔직하게 고백하지 않는 자는, 영원히 진리의 문고리조차 잡을 수 없을 것입니다."(출처: 성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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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성지순례 중에 바르셀로나에서 성가정 성당을 방문하였습니다. 안토니오 가우디가 설계한 이 성당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하나의 ‘복음서’와 같은 공간이었습니다. 성당에는 탄생의 문, 고통의 문, 영광의 문이 있습니다. 그 문을 따라가다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빛은 마치 하느님의 은총이 눈에 보이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 안에는 한국어로 된 ‘주님의 기도’도 있었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이름도 있었습니다. 한 사람의 신앙과 열정이 도시 전체를 변화시키고, 전 세계 사람들이 찾는 순례지가 되었습니다. 성당의 지하에는 가우디의 무덤이 있습니다. 그 곁에서는 지금도 매일 미사가 봉헌되고 있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성당이라도 미사가 없다면 그저 건물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미사가 봉헌되는 순간, 그곳은 살아 있는 하느님의 집이 됩니다.
바르셀로나에서 차로 한 시간쯤 가면 몬세라트 수도원이 있습니다. 화려한 도시 한가운데 있는 성가정 성당과는 달리, 이 수도원은 깊은 산속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약 천 년 전, 목동들이 신비한 빛과 소리를 체험했고, 그곳에서 ‘검은 성모님’을 발견하였습니다. 이후 그 자리에 수도원이 세워졌고, 지금까지 기도와 미사가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습니다. 깊은 산속까지 사람들이 찾아오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우리 마음 안에 있는 영적인 갈증 때문입니다. 세상은 화려하지만, 우리의 영혼은 침묵과 기도를 필요로 합니다. 성가정 성당이 ‘세상 속의 신앙’을 보여 준다면, 몬세라트 수도원은 ‘하느님 안에 머무는 신앙’을 보여 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께 묻습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입니까?” 그들의 기준은 세상의 기준이었습니다. 능력, 재력, 권력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권위는 전혀 다른 곳에서 나옵니다. 첫째, 예수님은 ‘어린양’이십니다.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자신을 내어주신 분입니다. 힘이 아니라 희생으로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둘째, ‘고난받는 야훼의 종’이십니다. 고통과 십자가를 통해 하느님의 뜻을 이루신 분입니다. 셋째, ‘사람의 아들’이십니다. 마지막 날에 모든 것을 완성하시고, 참된 생명으로 이끄시는 분입니다. 넷째, ‘말씀’이십니다. 태초부터 계셨고, 만물을 창조하시며, 지금도 우리를 비추시는 빛이십니다. 이 네 가지 모습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참된 권위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세상이 주는 권력이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권위입니다. 십자가를 통한 권위, 사랑을 통한 권위입니다.
순례의 길에서 저는 두 가지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나는 화려한 성당이었고, 다른 하나는 깊은 산속의 수도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둘을 하나로 묶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미사’와 ‘기도’였습니다. 사제로서 저는 다시 깨닫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더 크고, 더 화려한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드리는 미사를 충실히 봉헌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교우 여러분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이 아무리 크고, 삶이 아무리 풍요로워도 그 안에 기도와 하느님이 없다면 공허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작은 삶이라도 하느님이 함께하시면 그 삶은 거룩한 성전이 됩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십자가에서 드러났습니다. 우리도 그 길을 따라야 합니다. 겸손과 희생, 그리고 사랑의 길입니다. 그 길이 바로 생명의 길입니다.
주님,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주님의 길을 따르게 하소서. 겸손과 희생으로 사랑을 살아가게 하소서. 우리 삶이 주님께 드려지는 살아 있는 성전이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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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부산교구 권순호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마르 11,28) 그들은 예수님의 권위를 문제 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라는 시골 출신으로 아무 직함도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권위에 약합니다. 2007년 1월, 흥미로운 실험이 있었습니다. 당시 미국인들에게 인기가 높았던 바이올린 연주가 조슈아 벨이 미국 워싱턴 D.C.의 지하철역에서 남루한 차림으로 40분가량 연주하였습니다. 350만 달러짜리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잠시라도 서서 음악을 들은 사람은 일곱 명뿐이었고, 스무 명 남짓만이 동전을 던졌습니다. 며칠 전 그가 보스턴 심포니 홀에서 같은 곡을 연주하였고, 표는 매진되었던 것과는 달랐습니다. 이 실험은 사람들이 음악 자체보다 외부적인 권위에 먼저 이끌림을 보여 줍니다.
왜 하느님께서는 보잘것없는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셨을까요? 바로 진리 자체로 하느님을 알아보기를 바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외적인 권위가 아닌 말씀, 행위, 사랑 그 자체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마구간에서 태어나시고,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사시며,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지만, 온 생애로 진리를 증언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의 말씀에는 무관심하지 않는지 돌아봅시다. 성경을 집에 두기만 하고 읽지는 않고, 미사에서도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바리사이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들으려고 미사에 왔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 자체에 귀 기울입시다. 화려한 포장이 아니라 그 안의 진리를, 외적 권위가 아니라 말씀 자체를 들읍시다. 그 진리의 선율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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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1,27-33: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성전 정화 사건 이후, 유다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28절)라는 질문을 받으신다. 이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예수님의 권위와 정체성을 시험하는 도전이었다. 예수님은 단순히 권위만 주장하지 않고, 지혜로운 질문으로 그들의 허점을 드러내신다.(30절)
그들은 진리를 알면서도 두려움과 교만으로 “모르겠소.”(33절)라고 답하며 스스로 문을 닫는다. 이는 자신 앞에 놓인 진리를 인정하지 않고 교만과 안위에 집착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보여 준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한다. “진리를 아는 자가 그 진리를 거부하는 것은 마음을 스스로 어둡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진리와 계명을 무시하면서 세상의 기준에 따라 삶을 재단할 때, 스스로 영적 소경이 된다.
예수님께서 지혜롭게 대응하신 것은 단순한 언변의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에서 나오는 권위였다. 성령과 함께 사는 삶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판단하고 행동하는 삶이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선한 일과 봉사는, 우리의 권력이나 지식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뜻과 계명에 따른 성령의 역사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다른 사람이 “왜 이런 일을 하느냐?”라고 물었을 때, 우리는 예수님과 하느님을 사랑하고 따르기 때문에 이 일을 한다고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말한다. “성령과 함께하는 사람의 말과 행동은 스스로를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라, 하느님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진리 앞에서 겸손하게 서는 자세와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삶을 요구한다. 유다 지도자들이 진리를 외면하고 자신의 안위와 교만에 집착했던 것과 달리, 우리는 성령과 함께 진리를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 세상이 우리에게 질문할 때, 우리는 예수님과 하느님을 따르기 때문에 행동한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삶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지혜와 권위를 얻으며, 하느님의 뜻을 세상에 드러내는 신앙인이 된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성령 안에서 진리와 사랑으로 살아가는 신앙인의 자세를 다시금 확인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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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럼으로 그럼>
마르코 11,27-33 (예수님의 권한을 문제 삼다)
그 무렵 예수님과 제자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갔다. 예수님께서 성전 뜰을 거닐고 계실 때,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이 와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또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에게 한 가지 물을 터이니 대답해 보아라. 그러면 내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 대답해 보아라.” 그들은 저희끼리 의논하였다. “‘하늘에서 왔다.’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하고 말할 터이니, ‘사람에게서 왔다.’ 할까?” 그러나 군중이 모두 요한을 참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군중을 두려워하여, 예수님께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그럼으로 그럼>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마르 11,33)
그럼으로
말할 수 있는
그럼으로
말하여지는
그럼으로
말하는
그럼
이룸으로
말할 수 있는
이룸으로
말하여지는
이룸으로
말하는
이룸
믿음으로
말할 수 있는
믿음으로
말하여지는
믿음으로
말하는
믿음
희망으로
말할 수 있는
희망으로
말하여지는
희망으로
말하는
희망
사랑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랑으로
말하여지는
사랑으로
말하는
사랑
기쁨으로
말할 수 있는
기쁨으로
말하여지는
기쁨으로
말하는
기쁨
나눔으로
말할 수 있는
나눔으로
말하여지는
나눔으로
말하는
나눔
섬김으로
말할 수 있는
섬김으로
말하여지는
섬김으로
말하는
섬김
살림으로
말할 수 있는
살림으로
말하여지는
살림으로
말하는
살림
그럼으로
말할 수 있는
그럼으로
말하여지는
그럼으로
말하는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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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한다>
바른말을 하는 사람이 반드시 존경받는 것은 아닙니다. 옳은 말이지만 그 소리가 듣기 싫을 때도 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고 자기의 기득권이나 권위를 잃어버릴까 두려워서 그 말을 무시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실은 바른말을 하는 사람은 존경받기보다 미움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당신이 뭔데 쓸데없이 나서서 나의 공든 탑을 무너뜨리느냐?’는 마음을 지닐 때가 있음을 감출 수 없습니다.
예수님시대의 수석 사제들은 ‘하늘로부터 온’ 율법에 의해 ‘이 땅에서’ 합법적으로 성전에 관한 일체의 권한을 독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전세를 받고 그곳에서 성행하는 장사꾼들을 이용하여 경제적 이득을 챙기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예수님께서 성전에 나타나셔서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도 둘러 엎으셨습니다. 그리고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있지 않느냐? 그런데 너희는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마르 11,17).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확고한 권위에 심각한 도전을 한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바르고 옳은 말씀을 하셨지만,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을 없애버릴 방법을 찾았습니다.(마르 11,18)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들을 하는 것이오? 또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마르 11,28)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 “하고 상대방의 허를 찌르는 질문을 하셨습니다.
요한을 참 예언자로 여기고 있는 군중 앞에서 그의 권위를 깡그리 부정할 수도 없고 더군다나 요한이 하느님으로부터 권위를 받아 자신들의 권위에 도전하였다는 것을 인정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에 빠진 그들은 “모르겠소.” 하는 핑계로 얼버무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권한이 하늘로부터 왔다는 것을 암시하면서도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마르 11,33)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명확하게 말씀하시지 않은 것은 마음의 문이 닫힌 사람에게 아무리 얘기해봐야 엉뚱하게 받아들일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듣고자 하는 마음과 그대로 행하려는 실천의 의지가 없으면 하느님의 말씀을 아무리 들어도 소용이 없는 법입니다. 사물이 굽으면 그 그림자도 굽은 대로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마음이 굽으면 큰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때를 기다리시면서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하고 그대로 사시면서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기를 바라십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당신이 무엇을 강요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음의 결단을 내리길 기대하십니다.
하느님의 능력을 받아들이고 주님의 권위를 인정한다는 것은 결국 주님께서 삶의 모범으로 보여주신 길을 걷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짊어지는 깊은 침묵으로, 때로는 인내의 행동으로, 때로는 불이익과 미움을 감당하면서 믿음을 키워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위에 응답하고 그 권위를 증언할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인식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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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떤 물건을 살 때, 우리는 용도를 계획해서 구매합니다. 만약 노트를 산다면 무엇인가를 적기 위해서이고, 가위를 산다면 무엇인가를 자르기 위해서입니다. 화장품을 산다면 화장하기 위해서이고, 옷을 산다면 입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 물건들은 원래의 계획대로 사용되어야 그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떨까요? 처음부터 어떤 용도로 사용되기 위해 만들어졌을까요? 하느님께서 우리를 쓰고자 하는 용도를 미리 정하셨다면, 공부할 필요도 없고 무엇인가를 익힐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셨다는 믿음으로 이제 막 태어난 아기에게 그 어떤 것도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교육 안 시키는 것은 둘째치고라도 먹는 것, 입는 것 등을 알아서 하라고 한다면 아마 인간으로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만들어가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뜻에 맞습니다. 계속 기도하고 사랑을 실천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따르지 않는 순간, 하느님의 뜻도 우리 안에서 펼쳐질 수 없습니다. 나를 만들어갈 수 없게 됩니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이 와서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또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마르 11,28)라고 묻습니다. 오늘 복음의 바로 앞서 일어난 사건이 예수님께서 환전상들의 상을 엎으시며 성전을 정화하신 것입니다. 당시 성전의 관리와 치안은 최고 의회 대표들에게 있었는데, 자신들의 허락 없이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셨기에 항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집인 성전을 관리하면서도, 정작 그 성전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영적 눈멂을 볼 수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 대답해 보아라.”(마르 11,30)라고 오히려 물으십니다. 하늘에서 왔다고 하면, 세례자 요한과 그가 증언한 예수님을 믿지 않느냐고 할 것이고, 사람에게서 왔다고 하면, 요한을 참예언자로 믿고 있는 군중의 분노를 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최고 의회 대표들은 “모르겠소.”(마르 11,33)라고 답합니다. 예수님을 알려고 하지도 않고, 자기의 생각을 바꿔서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사려고 변화하려고 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저 지금의 상황만 벗어나면 그만이라는 생각에 빠져 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 뜻에 맞춰 살지 않으려는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나도 말하지 않겠다.”(마르 11,33)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그 자리에서 멈춰 설 뿐입니다.
우리는 과연 하느님 뜻에 맞춰서 자기를 만들고 있나요? 그냥 지금의 편안함과 안위만을 생각하면서 만들어지는 것을 멈춘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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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그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갔다. 예수님께서 성전 뜰을 거닐고 계실 때,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이 와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또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에게 한 가지 물을 터이니 대답해 보아라. 그러면 내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 대답해 보아라.” 그들은 저희끼리 의논하였다. “‘하늘에서 왔다.’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하고 말할 터이니, ‘사람에게서 왔다.’ 할까?” 그러나 군중이 모두 요한을 참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군중을 두려워하여, 예수님께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마르 11,27-33)
1)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이시고, 예수님의 권한은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다.”라는 간접 증언입니다. 동시에, 왜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지, 왜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구원하는 권한과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권한을 가지고 계신 분이기 때문에,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원한다면 예수님을(예수님만)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기를 거부하면 기다리는 것은 ‘멸망’뿐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또 그가 사람의 아들이므로 심판을 하는 권한도 주셨다. 이 말에 놀라지 마라.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목소리를 듣는 때가 온다.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요한 5,25-29)
무신론자들이나 내세를 안 믿는 자들은 부활, 심판, 구원, 멸망 등에 관한 말씀들을 비웃으면서 그것을 증명해 보라고 요구합니다. 사실 그 일들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증명할 방법은 없고, “그날이 되면 누구나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희망’이 중요합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기를 바라고, 죽음이 ‘끝’이 아니기를 바라는 그 희망에서 믿음이 시작됩니다. 반대로, 그 희망 없이 현세의 삶에만 만족하고,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믿음을 가질 필요를 못 느끼니까 안 믿게 됩니다. <희망 없이 사는 것이 과연 사는 것일까?>
2) 28절의 ‘이런 일’이라는 말은, 넓은 뜻으로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들과 말씀들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좁은 뜻으로는) 예수님의 ‘성전 정화’를 가리킵니다.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은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 일을(마르 11,15-17) 자신들의 권한을 심각하게 침해한 일로 생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성전 정화’ 이야기를 보면,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마르 11,18) 그러나 군중이 ‘성전 정화’를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죽일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가 ‘권한’ 문제로 시비를 걸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의 세례’를 언급하신 것은, 답변을 회피하신 것이 아니라, “나의 권한은 하늘에서 온 것이라고 요한이 이미 증언했다.” 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은 하느님의 어린양이시고,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이라고 증언했습니다.(요한 1,29-34) 세례자 요한을 ‘하느님의 예언자’로 믿는다면, 그의 증언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 와서 시비를 걸고 있는 자들은 요한을 예언자로 안 믿는 자들이었고, 그래서 요한의 증언도 안 믿는 자들이었는데, 그들은 요한을 ‘참예언자’로 여기는(믿는) 군중에게 돌을 맞게 될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여기서 그들이 군중을 두려워했다는 말은,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고, 자신들이 누리는 기득권을 잃게 되는 것만 두려워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하느님을 믿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무신론자들처럼 살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모르겠소.”라는 그들의 말은, 대답하기 싫다는 뜻이기도 하고, 관심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활동지는 요르단 강이었고, 그는 예루살렘 성전에는 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당시 유대교의 제도권 사람들이나 예루살렘의 기득권층 사람들과 충돌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세례자 요한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을 것입니다.
관심 없다는 말은, 요한의 ‘회개 선포’에 대해서 아무 관심도 없다는 뜻이기도 하고, 자신들의 구원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지위, 권력, 재산 등을 잘 지키는 것뿐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구원받기를 거부한 자들과 같고,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신 예수님을 배척한 자들과 같습니다. 그 거부와 배척은 스스로 멸망을 선택하고, 멸망을 향해서 걸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나중에라도 회개하고 믿었다면 구원을 받았겠지만, 끝까지 고집 부렸다면 그냥 그렇게 끝났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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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귀웅 토마스 신부님]
<권한 행사>
권한이라고 하면 먼저 공무원들이 떠오릅니다. 요즘은 많이 좋아졌지만 예전에는 그들이 가진 권한이 무척 무서웠습니다. 하다못해 집을 짓는 건축 허가를 받는 데에도 뒷돈을 집어주어야 했고, 그 허가를 조금 빨리 받게 해달라고 또 돈을 집어주고. 이렇게 권한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그 권한을 개인 주머니를 불리는 데 이용했지요.
무엇인가를 하고, 또 무엇인가를 하지 못하게 하는 권한은 모름지기 그 일에 대한 이해당사자뿐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 즉 공동선을 지키기 위한 것입니다.
권한의 궁극적인 목적은 모든 이들에 대한 봉사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남들이 가지지 못한 내 고유 권한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권한을 어떻게 사용했나 생각해봅니다.
신부로서 가장 큰 권한은 성체성사를 이루는 권한입니다. 빵과 포도주를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화시키는 기적을 이룰 수 있는 이 엄청난 권한을 얼마나 정성스럽게 사용했는지. “이를 행하여라”라고 명하셨기에 당신처럼 몸과 피를 내어놓는 권한을 가졌는데 그 권한을 행사했는가?
고해성사를 통해 하늘나라의 열쇠를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지만 한밤중에 찾아오는 사람에게도 그 권한을 사용했는가?
아픈 마음을 위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지만 피곤하다고, 다른 일이 있다고 상담을 꺼리며 권한을 포기하지는 않았는가?
제2의 그리스도로서 자비로운 예수님을 만나는 듯한 느낌을 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손을 얼마나 따뜻하게 잡아주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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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도희찬 안드레아 신부님]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들은 나름대로 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이 속해 있는 여러 자리와 위치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그런 자리와 위치에서 자신의 권한을 가지게 되고 그 권한을 사용하면서 권위를 얻고 싶어 합니다.
아버지로서, 어머니로서, 직장의 한 책임자로, 어떤 모임이나 단체에서 등등 많은 곳에서 그런 권한을 행사하고 그 속에서 권위를 얻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도 한편으로 자기 위에 있는 어떤 권한의 영향 아래에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뭔가를 바꾸라는 또 변화되라는 요구를 받기도 합니다.
이렇게 혹은 저렇게 하라는 강요를 당하기도 합니다. 쉽게 말해 위로부터 영향을 받는 권한 속에 살아가고 또 아래로 행사하는 권한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환경 속에 사랑가는 삶에서 신앙인과 신앙인이 아닌 사람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 것일가요? 세상 사람들은 자기 위의 권한에 구애를 받을 때 또 자신이 권한을 행사할 때 도덕이나, 윤리, 전통, 관습 등등을 기준으로 삼을지 모릅니다. 아니면 자신의 이익, 편리, 이해관계, 기득권 등등 이기적인 면을 기준으로 삼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신앙인은 먼저 꼭 한 가지를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게 뭔가 하면 바로 아버지의 뜻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오늘 유대인들과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게 됩니다.
성전을 아버지께 기도하는 집답게 만드신 주님의 행동을 유대인 지도자들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기득권, 이익을 두고 왜 그런 권한을 행사하고 어디서 그런 권한을 얻었느냐고 따집니다.
그런 유대인들의 질문에 주님은 직접 답해주시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예로 들며 신앙의 참된 자세에 대해 일깨움을 주고자 하십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권한에 따라 그릇된 것을 바로 잡고 변화되고, 또 공동체를 하느님께로 이끌 권한을 행사해야 하는 이들이 바로 유대인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가져야 하는 신앙인의 자세에 대해 가르침을 주고 게십니다. 무엇을 먼저 생각하고 기준을 삼느냐에 따라 신앙인인가 아닌가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인 우리들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신앙인답게 생활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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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박영봉 마태오 신부님]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와 예수님>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반대를 받는 표적’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특히 죄인들에 대한 당신의 자비로운 태도가 하느님의 태도와 동일한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에 사람들은 분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죄를 용서하심으로써 그들을 궁지에 몰아넣으셨습니다. 그들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마르 2,7) 하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용서하시며, 당신이 행하시는 아버지의 일을 보고 당신을 믿으라고 요구하십니다. 이러한 요구는 예수님을 신성 모독죄로 사형에 처해 마땅하다고 판단하게 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한 것은 ‘무지한 탓’이기도 했고, ‘완고한’ 불신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믿음의 행위는 하느님 은총의 인도로 ‘위로부터 새로 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이 죽는 신비로운 죽음을 거쳐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회개라고 합니다. 진정으로 회개했을 때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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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자비를 받고 자비를 베풀려면>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를 기다리십시오.”
부끄러운 얘기인데 저는 30대 중반까지 몇 가지 말이 잘 나오지 않았습니다. ‘주님’이라는 말과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말과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주님’이라고 부를라치면 닭살이 돋고 몸이 오글거리고, 불쌍히 여기시라는 말과 자비를 베푸시라는 말을 할라치면 속에서 왜 내가 불쌍해? 자비는 다른 사람에게 베푸세요! 라고 중얼거렸지요.
그러나 지금은 사람들이 저를 불쌍히 여겨주기를 바라거나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어주기를 청하는 것은 여전히 싫지만 하느님의 자비는 바라고 청하는 정도는 되었으며, 자비야말로 우리가 신앙인이라면 청해야 할 것이고 베풀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정도가 되었습니다.
사실 자비를 청할 정도가 되어야 진정 겸손하고, 자비를 베풀 정도가 되어야 진정 사랑하는 거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저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30 중반에야 주님께 자비를 청할 수 있게 되었고 이 나이가 되어서야 오늘 유다서의 말씀처럼 주님의 자비를 기다리다가 겨울에 햇볕 쬐듯이 은총의 창가에서 주님께서 내리시는 자비를 쬡니다.
그래도 자비를 받는 것은 이 정도 되었는데 자비 실천은 어떤가요? 제가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 처지는 못 되지만 나누는 것은 잘해야 할 텐데 그러고 있을까요?
솔직히 얘기해서 가련한 이가 자신을 낮추며 도와달라고 하면 기꺼이 그리고 우러나서 하느님의 자비를 나눌 마음이 제게 있지만 나쁜 짓 하면서도 잘났다고 하는 사람에게는 그럴 마음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에 대해서는 제가 겸손하게 청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이웃의 죄에 대해서는 아직도 제가 교만하기에 나눌 수 없습니다.
그런 자는 오히려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그런 것이며 그래도 수도자인 내가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억지로 회개의 자비를 베풀어주십사고 기도하는 정도입니다.
그런데 오늘 유다서는 이런 저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의 살이 닿은 것 때문에 속옷까지 미워하는 사람일지라도 두려운 마음으로 자비를 베풀라고 말입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그들의 살에 닿아 더러워진 속옷까지 미워하더라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자비를 베푸십시오.”
그런데 얼마나 미우면 그의 속옷까지 미워하겠습니까? 그러므로 그토록 미운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려면 그 미움보다 큰 사랑이 있어야겠고 오늘 말씀처럼 두려운 마음도 있어야겠지요.
그러면 자비 실천에 있어서 두려운 마음이란 어떤 것입니까? 더 큰 죄 용서받은 내가 더 작은 죄 지은 남을 용서하지 않으면 벌 받을 거라는, 받은 자비를 자기만 가지고 이웃과 나누지 않으면 벌 받을 거라는 두려움입니다.
주님께서 비유를 드신 바 있습니다. 만 탈렌트를 임금께 빚지고 탕감받은 종이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감옥에 처넣자 임금이 대노하여 그 신하를 다시 감옥에 처넣은 비유 말입니다.
그러니 겸손해야지만 하느님 자비를 청해 받고,
사랑해야지만 그리고 자비에 대한 두려운 마음도 있어야지만 자비를 나눌 수 있음을 깨닫고 실천하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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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마르 11,28ㄱ)
<언제나 예수님과 함께!>
오늘 복음(마르 11,27-33)은 '예수님의 권한을 문제 삼는 말씀'입니다.
유다 백성의 지도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또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마르 11,2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십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 대답해 보아라."(마르11,30) 그들이 대답을 못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십니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마르 11,33ㄷ)
'왜, 유다 백성의 지도자들이 예수님의 권한을 문제 삼고 있는가?'
이는 그들이 예수님을 초라한 사람, 평범한 사람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시골 나자렛 출신이며, 그것도 초라한 마굿간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고 있지 않다는 반증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이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틀 안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내가 만들어 놓은 사고의 틀 안에서 너를 바라보고, 너를 판단합니다. 그런데 종종 이러한 사고의 틀이 장애가 되기도 합니다. 때로는 신부님도, 하느님도 이런 틀 안에 가두려고 합니다. 그래서 틀에 맞지 않으면 신부님도, 하느님도 배척하기도 합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이 만들어 놓은 메시아 틀에 맞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로부터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하루를 살아가면서 우리는 많은 생각을 하고, 많은 말을 하고, 많은 행동을 합니다. 그 중심에 예수님께서 계셔야 합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 안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늘 예수님을 모시고 삽시다! 그리고 우리도 이렇게 고백합시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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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05.30.토.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마르 11,28)
예수님의 권한은
일치에서 나오는
사랑의 권한이고,
생명을 살리는
존재의 진실성에서
나오는 권한입니다.
이와 같이
참된 권위는
생명을 살리고
희망을 일으키는
힘입니다.
가장 낮아지셨기에
가장 좋은 생명의 길을
우리에게
열어 주셨습니다.
소외된 이들을 품으신
예수님의 권한은
인간의 존엄을
회복시키는 은총의
가치였습니다.
예수님의 권한은
끝까지 섬기는
섬김의 가치입니다.
죄와 두려움에서
해방시켜
참된 생명으로
이끄셨습니다.
사람 위에 서는
힘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하느님의 생명을 살려내는
사랑의 가치입니다.
권한이 사랑을 잃으면
억압이 되고,
겸손을 잃으면
폭력이 됩니다.
권한이 하느님 안에서
참되게 사용될 때는
생명을 살리는
은총의 통로가 됩니다.
그래서 사랑의 힘이
참된 권한입니다.
사람은 사랑받을 때
가장 아름다워지고
가장 사람다워집니다.
예수님의 봉사는
사랑의 권한으로 하시는
사랑의 복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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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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