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원에 서다 / 나의 사랑이야기

[난석]

초원에 서다

빛을 분광기에 통과시키면

파장의 길이에 따라 순차적으로 일곱 색깔로 나뉜다.

그중 초록은 짧지도 길지도 않은 파장이기에

일곱 색깔 중 한가운데에 위치한다.

그래서 초록은 균형과 조화의 이미지를 풍기는지도 모른다.

초록은 희망과 화평 외에 회복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게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면 퇴락이나 격정에 빠져들게 될 테니

심신을 영원히 뉘고 싶은 색이 있다면

그건 초록일 수밖에 없다.

누구나 삶이 초원 위에 영원하기를 바라지만

시간은 근원을 알 수 없는 곳에서 끝 간 데를 모를 곳으로 치달으며

심신은 시간의 벨트 위에서 한시도 쉼 없이 마모해간다.

삶의 현재성은 순간에 머물고 말 뿐이니

영원한 삶을 누리기 위해선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함께 살아가야 한다.

그래서 부단히 초원을 꿈꿔야 하는 것이다.

삶은 아무런 의도나 뜻 없이 현실에 내팽개쳐졌다지만

(어느 실존주의자의 푸념)

실존을 위해서는, 그것이 비록 시지프의 신화가 될지언정

쉼 없이 몸부림쳐야 한다.

그 몸부림은 현재에 한정할 게 아니라

과거와 미래로 뻗어야 하느니

현재는 직관의 오늘이지만 과거는 기억의 오늘로,

미래는 기대의 오늘로 현재에 늘 닿아있어야 하는 이치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중에서)

기대상실증에 걸리면 꿈 없는 암흑의 삶이 될 뿐이다.

기억상실증에 걸리면 생각 없는 무뇌(無腦)의 삶이 될 뿐이니

과거를 미래에 얹어주면서 현재를 영원화 하려면

잃어버린 과거도 되살려야 하는 이치이기도 하리라.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중에서)

미래는 기대이며 기다림이지만

적극적 의미와 함께 수동적 의미도 품는다.

불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오늘도 고도를 기다리겠지만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우린 오늘도 고도(Godot)가 누구이든 미래를 꿈꾸고 기다리되

그것은 과거로부터 시작해야 할 터요

과거의 지평 위에서 새로운 초원을 꿈꿔야 하리라.

초원을 보고 싶었다.

지평선에서 해가 뜨고 지는 너른 초원이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가까운 몽골의 시라무런 초원이었다.

지난날 빛바랜 추억에

산뜻한 초원의 사진 한 장 얹어보고 싶기도 했던 것이다.

초원에 당도한 날 한 보시기 정도의 비가 내렸다.

한 3년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았다고 했으니

점점 가물어가는 날씨에

초원은 나날이 황폐되어 갈 수밖에 없어보였다.

가뭄을 견디는 억센 풀들만 자라

목축용으로도 적당치 않은 것이던지

풀 뜯는 짐승도 어쩌다 몇 마리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찌든들 훈훈할 사람 냄새를 맡고 싶어 두리번거려보지만

민가 한 채 없고

객이 쉬어가는 급조된 몽골 전통의 빈 집단가옥뿐이었다.

문을 열고 머리 숙인 채 들어서려니

징기스칸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허나 온기 하나 없는 지난날의 쓸쓸한 영욕만 감지될 뿐이었다.

정복의 역사는 정복자에겐 영광이겠으나

타자에겐 치욕일 수밖에 없으리라.

삶이나 역사의 주체는 오로지 자신들이어야 하지 않는가.

무작정 걸으며 지평선을 바라보노라니

희미하게 돌무덤이 눈에 들어왔다.

원주민들이 신성시했던 산(傲佈山)이라지만

이젠 과거에 오늘을 얹어 안녕을 빌어보는

우리네 성황당의 흔적일 뿐이었다.

그 적 바라볼 땐

하늘이었어

시리디 시린 파아란 하늘

그러다가 바라본 건

무지개였지

하늘 수놓을 일곱 빛 무지개

아, 이제 바라보노라니

깃발뿐이야

황진(黃塵)에 찌든 개선장군 깃발

다가갈수록 꿈은 작아지는 것

그런 줄 알았으면

꿈에나 살걸 그랬어. / 졸 시 ‘성황당’ 전문

일출을 보리라고 하루 더 묵고 일찍 나섰으나

검은 구름 드리운 지평선에선

어느 시인의 노래만이 떠오를 뿐이었다.

‘ 한 때는 그렇게 찬란한 빛이었던

이제는 속절없이 사라져 가는 돌이킬 수 없는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다시는 그 시절이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슬퍼하지 말라

차라리 그 속에 숨겨진 오묘한 진리를 찾으라

초원의 빛이여 ...‘ (윌리암 워즈워스)

초원 위의 말발굽 소리 멀리 사라져버린 지 오래지만

오늘도 초원 위엔 간단없는 시간이 과거로 현재로 흐르고 있었으니

지난날의 퇴색한 내 작은 기억이 떠올라

잠시 초원 위에 펼쳐보았다.

그네는 원치 않는 일로 몸과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고 했다.

그로 인해 병상에 누워 지내기도 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 사연이야 알 것도 없다.

나도 그런 것이니까.

얼마 전 퇴원했다는 것으로 보아 몸은 회복된 모양이었다.

죄를 씻어내기 위해 부처님을 뵙고 왔다는 것으로 보아

마음의 상처는 아직도 남아있는 듯했다.

하지만 무엇이 아픈 것인지는 물을 것도 없다.

나도 그런 것이니까.

이제 몇 번째인가의 생일이라고 했다.

하지만 언제가 생일인지는 기억해낼 것도 없다.

나도 그런 것이며 늘 새로 태어나야 하는 것이니까.

조그만 선물 하나 보낸다, 연두색 손지갑 하나.

“오! 초원의 빛이여

초원의 영광이여

그날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초원을 사랑했던 이처럼

초원의 빛을 잊지 않으리라...“

엘리아 카잔 감독, 나탈리 우드와 워런 비티 주연의 영화

‘초원의 빛’ 마지막 대사가 떠오른 것이었다.

소녀여! 그것은 손지갑이 아니라네.

초원의 빛을 그렇게 담아 보낸 것이라네.

연두색 초원의 빛을 한 손에 꼭 쥐고 다시는 그 시절이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아름다웠던 추억 속에, 자연의 무한한 순환 속에,

그리고 또 새 삶을 상징하는 연두색 단추로 여미며

새로운 오늘을 담아가야 한다는 내 작은 소망이라네.

[복매]

비가 흔치 않은 지역에서 목축이 가능 하다는게 아이러니 하네요
넓은 초원에서 그리시는 사랑 이야기 잘 보고 갑니다

[난석]

그러니까 풀을 찾아 이리저리 옮겨다니지요
겔이라는 천막 싣고요.
그에 비하면 복매님은 해피해피^^

[시인김정래]

난석님~
초원에서 선 모습
정말 보기 좋습니다
윌리엄 워즈워드 의 시 초원의 빛
예전에 저도 영화 본 기억이 있네요
잘 보고 갑니다
더운 하루 시원하게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난석]

그 영화가 참 오래 되었네요.

[청담골]

일곱 색깔 무지개를
보면 꿈이 이루어진다고
믿었던 나
난석님의 "초원에 서다
나의 사랑이야기 속에"
무지개가 등장했다
그분 덕분에 내 사랑도 꿈틀
지평선 바라보며 초원의빛
여기 고스란히 남아있는
흔적들 눈여겨 보고 갑니다
남은 인생도
초원의 빛으로 아름답게
빛나시길 바랍니다

[난석]

나는 그네때문에 초원에 서봤고
청담골님은 나의 초원의 빛때문에 무지개와 꿈을 소환하고~~
이야기가 그렇게 번져가야 하는거지요.

[안단테]

듬성듬성한 초원에서 하얀 샤쓰의 선배님
산뜻한 빛인듯 하옵니다
초원빛 영화 지금도 주인공들의 마지막 장면이
아린듯 합니다

[난석]

네에 그러시군요.
참 오래된 영화지요.

[망중한]

카메라 좋은것 가지셨네요,
니콘 같습니다.
그리고 초원에서 포즈취한 모습도 신선합니다.
올려주신 글과 사진 잘보갑니다.

[난석]

니콘 맞습니다.
고맙습니다.

[신디]

초원에 청년이 서 있어서 깜놀했네요^^

오! 초원의 빛이여
초원의 영광이여

멋진 모습 보기 좋아요♡

[난석]

Wow!
Bless you Cindy.^^

[두용]

영감이 끊어져
정신이 냉소라는 눈에 파묻히고,
비탄이란 얼음에 갇힌 사람은
비록 나이가 이십 세라 할지라도
이미 늙은이와 다름없다.
그러나,
머리를 드높여 희망이란 파도를 탈 수 있는 한
그대는 팔십 세일지라도
영원한 청춘의 소유자일 것이다....

이 글은 난석 님을 위해 씌여진 거 같아요~^^

[난석]

두용 니임~~~^^

[박희정]

윌리암 워즈워스의 초원의 빛이란 시를
여기서 대하닌 참 좋내요 즐겨 읊던 시였기에
많은 배움을 주시는 글 감사한 마음으로 가슴에 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난석]

낭만파 시인이라 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