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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을 바꾸자.
우리 속담에 “사람 죽은 것은 생각하지 않고 팥죽 들어오는 것만 생각한다.”는 말이 있다.
지금은 그런 풍속이 없어졌지만 옛날에는 이웃이나 친지 중에 누가 죽으면 물동이(옹기그릇으로서 가장 큰 것은 너리기, 중간 것은 버지기, 작은 것은 옹가지라고 한다.)로 가득 쑤어서 초상난 집에 가져갔다.
무슨 연유에선지는 모르지만 1960년대까지만 하여도 안동지방에서는 그렇게 하였다.
아마도 집안에 누가 죽어서 슬픈 마음에 밥을 먹지 못하니 먹기 쉬운 죽을 쑤어서 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또한 팥은 잡귀를 쫓는다는 속설도 있으니 팥죽을 쑤어서 준 것 같다.
어릴 적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때, 하염없이 눈물이 나지만 그래도 배가 고프니 친척집에서 쑤어온 팥죽은 먹은 기억이 난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어떻게 살아가는 게 현명한 방법일까?
집안에 사람이 죽었는데, 사람 죽은 것은 생각지도 안하고 남이 팥죽 쑤어오는 것만 좋아서 싱글벙글한다면 아마도 사람취급을 못 받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바보나 미친 사람이 아니고서는 절대로 그러지는 못 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꼭 그렇게만 생각할 것일까?
물론 이 속담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중요한 손해는 생각하지 않고 조그마한 이익만을 생각하고 좋아하는 부정적인 속담이지만, 사람이 죽었다고 슬퍼만 하면서 팥죽을 모두 버리고 먹지 않으면 죽은 사람이 살아서 돌아오는가?
아니면 다른 무슨 좋은 일이라도 생기는가?
팥죽 들어온다고 싱글벙글 좋아하는 것은 가장 바보스러운 짓이지만, 또한 가장 현명한, 보통사람들은 상상하지도 못할 아주 지혜로운 행동이라고도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해본다.
그래서 천재와 바보는 백지 한 장 차이라는 말도 있는 듯하다.
그래서 아주 지혜로운 사람이 하는 행동과 아주 바보가 하는 행동이 같아 보이기도 하는 이치이다.
옛날이야기에 아들 둘을 둔 사람이 있었는데 큰 아들은 짚신 장수를 하고 작은 아들은 나막신 장수를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의 어머니인 노파는 비가 오면 큰아들의 짚신이 팔리지 않을까봐 근심걱정이고, 비기 오지 않으면 작은 아들의 나막신이 팔리지 않을까봐 근심걱정이고, 그래서 이 노파는 일 년 삼백육십오일 근심 걱정을 안 하는 날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날이면 날마다 눈에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그래서 이웃집에 사는 김 첨지가 보다 못해서 노파에게 말하기를 “비가오지 않는 날에는 큰아들의 짚신이 잘 팔려서 좋고, 비가 오는 날에는 작은 아들의 나막신이 잘 팔려서 좋은데 무엇 때문에 날마다 근심걱정을 하느냐?”고 하니까 노파가 가만히 생각을 하여보니 참말로 옳은 말이라는 생각에 그때서야 무릎을 치면서 얼굴에 수심이 싹 가시고 날마다 싱글벙글 즐겁게 잘 살았다는 이야기이다.
누구나 다 아는 시시한 이 이야기를 구태여 여기에서 새삼 소개하는 것은 이 이야기를 다 알지만 사람이 살아가는데 이런이야기를 착안은 제대로 하지 않는듯해서 재차 소개해 보았다.
이 노파가 첨지의 말을 듣기 전에는 팥죽 들어오는 것은 생각지도 않고 사람 죽은 것만 생각하는 것만 같으며, 첨지의 이야기를 들은 뒤에는 사람 죽은 것은 생각하지 않고 팥죽 들어오는 것만 생각하는 것과 같으니 어느 쪽이 더 현명한 삶이라는 판단이 잘 서지 않는다.
우리 인생이 살아가는데 길은 흉을 대동하고, 복은 화를 대동하고 다닌다는 것은 만고의 진리인데, 사람들이 미처 착안을 못해서 혹은 어리석어서 길과 복만 보는 사람, 혹은 흉과 화만 보는 사람, 그래서 인간 세계 웃고 울고 부질없이 그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그래서 사람이 살아가는데 좋은 것이 있으면 나쁜 것이 있고, 나쁜 것이 있으면 틀림없이 좋은 것도 있으니, 좋다고 너무 좋아 할 것도, 나쁘다고 너무 싫어할 것도 없이, 좋을 때는 나쁜 것이 올 것을 경계해야 하고, 나쁠 때는 좋은 것이 온다는 희망을 가져야 한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은 직업을 가져서 돈벌이를 하는데 자유가 없다고 날마다 불평불만인 사람은 자유는 생각하지 않고 돈만 생각하면 행복할 것이고, 직업이 없이 자유를 마음껏 누리는 사람은 돈은 생각하지 않고 자유만을 생각하면 참으로 행복한 생활일 것이다.
그래서 서로 상반되는 모든 것은 동전의 양면처럼, 혹은 손등과 손바닥처럼 항상 붙어 다닌다는 것을 명심하고, 손등이 필요 없다고 손바닥만 가지려고 해서는 안 되며, 마찬가지로 손등이 필요하다고 손바닥을 버릴 수는 없는 것이 인생의 삶이고 우주의 섭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니 인생사 모든 행, 불행은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철창 속의 사나이 둘, 하나는 하늘을 쳐다보고 하나는 땅을 내려다보는 것처럼 행, 불행은 우리 마음속에 달려있다고 하겠다.
조물주가 인간을 만들 때 절대로 양손에 떡을 쥐어주지 않았다고 한다.
한손에 떡이 쥐어져 있으면 다른 손에는 틀림없이 쓸모없는 돌멩이가 쥐어져 있다는 것을 각오해야 하며, 한손에 돌멩이가 쥐어져 있으면 반드시 다른 손에는 떡이 쥐어져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한손에 돌멩이만 보이고 다른 손에 쥐고 있는 떡은 보지 못하고 일생을 배고프게 살다가 손에 든 떡은 썩은 채로 쥐고서 이 세상을 쓸쓸하게 떠나가게 된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떡도, 돌멩이도 모두 다 쥐고 있는데 떡 쥔 손을 보는 사람은 행복한 삶을 살 것이고, 돌멩이 쥔 손을 보는 사람들은 불행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내가 목사라는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어떤 목사의 말이 “우리나라 사람들은 새가 운다. 고 하고 미국사람들은 새가 노래한다.” 고하는데 가만히 생각하면 새가 슬퍼서 우는 경우가 있을까?
실제로 동물의 세계에서는 슬퍼서 우는 경우는 별로 없을 것이며, 더군다나 새가 슬픔을 느낄 정도의 지능은 가지지 못했을 것이니, 다만 본능적으로 짝을 부르는 소리이거나, 짝에게 과시하기 위한 소리일 것이니, 그러면 그 소리가 노래이지 절대로 울음은 아니다.
새가 울어도 노래한다고 해야 할 것인데, 노래하는 것을 운다고 하다니, 우리 국민성이 그만큼 悲嘆 적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를 가지지 않고 그저 불교사찰에나 가끔씩 가는 정도이고 교회에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지만, 이 목사님의 이 말은 우리 모두 각성해야 할 말이다.
전 국민을 비탄적인 국민성에서 진취적인 국민성으로 바꾸니, 이러한 일을 대통령이 할 수 있나?
장관이 할 수 있나?
국회의원이 할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의 옛날 소설 중에 흥부전에서 흥부는 지극히 착하고 흥부의 형 놀부는 마음이 지극히 고약해서 나쁜 사람의 대명사가 되고 있지만, 인식을 바꾸어 보면 오히려 놀부가 문제는 많은 인간상이지만 그래도 흥부보다 훨씬 더 바람직한 인간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아무리 보아도 흥부는 그 이상 무능한 인간일 수가 없다.
무능뿐만 아니라 인간쓰레기라고 할 수가 있다.
아무런 능력도 없으면서 아이는 무엇 하러 그렇게 많이 낳았으며, 형수로부터 주걱으로 뺨을 얻어맞고 화를 내기는커녕 도리어 뺨에 묻은 밥알을 뜯어먹기 위하여 한 쪽 뺨을 마저 때려달라고 하는 실로 때릴 가치도 없는 쓰레기 같은 인간을, 우리는 국민의 귀감인 듯이 생각하며 가르치며 살아 왔던 한심한 민족이다.
흥부가 인격적으로 모자라는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다.
땀 흘려 일하도록 국민을 계도해야 하는데 일은 열심히 하지 아니하고 요행으로 부자가 되는 것을 강조하며, 돈을 받고 매나 맞으려하는 나약한 인간을 지선인양 하면서 살아왔다.
심청전에서 심봉사 또한 인격적으로 한 푼의 가치도 없는 인간이다.
장님인 불구의 몸으로 지극히 가난한 거지 형편인 주제에, 자기의 눈을 뜨기 위해서 공양미 삼백석이라는 어마어마한 재물을 바치겠다고 하는 한심한 인간상이다.
자기의 몸을 희생해서 딸을 살려야 할 처지에서, 딸을 죽여서 자기의 눈을 뜨게 하다니, 우리는 잘못된 가치관에서 살아오면서 국민들을 교육시켜왔다.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겼을 때 전국 팔도에서 많은 우국지사들이 그렇게 하나뿐인 귀중한 목숨을 버린 것들이 진정으로 잘한 일들일까?
우리들은 그분들의 우국충정을 높이 평가하고, 후세의 귀감이 되도록 교육시켜왔지만 절대로 자결한 일은 잘한 일이라고 할 수가 없는 사안이 아닌가?
그렇게 나라를 위하는 충성심이 많은 사람들이 자결을 하면 할수록 일본은 매우 유리해지게 된다.
그것은 심하게 말하면 이적행위와 다름없는 일이라고도 할 수가 있다.
나라가 외침을 받았을 때, 모든 군인들이 분하고 원통해서 장렬하게 자결을 하게 되면 나라가 어떻게 되겠는가?
그렇게 자결할 수 있는 용기와 의지가 있다면 기어이 살아남아서 독립군의 신발에 묻은 흙이라도 털어준다면, 그것이 진정한 나라를 위하는 길이고 애국자라고 할 수가 있다.
목숨을 버릴 용기와 의지가 있다고 하면 일본 순사 하나쯤은 얼마든지 척살할 수가 있을 것인데, 그 아까운 목숨을 자결을 하다니 참으로 한심하다는 생각이다.
딸을 희생시켜 자기의 눈을 뜨는 심봉사가 잘되게 만들고, 쓰레기만도 못한 흥부를 국민의 귀감으로 만들고, 새가 노래하는 것을 보고 운다고 하는 국민성이 우국지사의 자결을 낳게 하였으며, 그런 것을 미화해서 국민들을 교육시켜서 어제에도 우리국민 한 사람이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유서를 남기고 분신자살을 시도한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우국충정만은 존경스럽지만 그 사람이 분신자살한다고 달라지는 게 무엇인가?
그보다는 어느 목사님의 국민성을 진취적이고 능동적으로 만드는 강의가 훨씬 더 국익에 도움이 되고 국가를 위하는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도 이제 세계 200여개 국가들 가운데 더 이상 약소국가가 아니다.
경제력으로 보나 군사력으로 보나 세계 상위 급에 속할 정도로 장족의 발전을 하였다.
다만 우리나라가 남북분단이 되어서 그것이 취약점이고, 우리 국민성이 진취적이고 긍정적이 아닌 지나치게 비탄적인 게 흠이며, 주변에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등 주위에 4강국이 있는 것이 좋지 않지만 국토의 분단과 민족의 분단은 우리의 노력여하에 따라서 극복할 수 있으며, 주위 4강도 우리가 통일만 이룩하면 우리에게 유리하도록 만들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모든 사안에 대하여 진취적이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외세의존이 아닌 주체성을 가지고 사고하고 행동하여 자주와 평화와 통일을 이 땅에서 이루어야 하겠다.
사람이, 민족이, 국민이 살아가는데 주인의식과 주체성이 매우 중요한데 우리는 예를 들어서, 모든 사람들, 특히 지식인들이 미국에서 나왔다고 하고 미국에 들어갔다고 하는데 이러면 안 된다.
옛날에는 일본에서 나왔다, 일본에 들어간다고 하였는데, 그러지 말고 미국에서 들어왔다, 미국으로 나갔다, 일본에서 들어왔다, 일본으로 나갔다. 이렇게 말을 해야 한다.
행한 것은 똑같지만 전자는 노예근성을 가진 사람들의 말이고, 후자는 주인의식을 그러니까 주체성을 가진 사람들의 말이다.
뭐 그리 하찮은 것을 가지고 트집을 잡는다고 핀잔을 할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절대로 이런 것은 하찮은 일이 아니다.
이것은 확실히 주인과 노예의 생각이니 우리가 노예를 원하느냐? 주인을 원하느냐? 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나라를 기준으로 말을 해야 하지 왜 무엇 때문에 남의 나라를 기준으로 생각을 하고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우리부터 반성하고, 의식의 전환, 인식의 전환이 있어야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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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긴 글 잘읽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국권을 빠았겼을 때
이광수가 민족개조론을 써서 대표적 친일파로 매도당했디요.
그 뒤에 민족개조론이 무슨 친일이냐는 논조도 있었지요.
저는 그게 친일이냐 아니냐를 평하고싶진 않지만
현재도 대체적으로 친일행각으로 분류되고 있지요.
그런데 논점적으로 친일이냐 아니냐를 따지기 전에 그 잭이 당시의 시대상황에 어떻게 먹혀들어갔느냐가 중요한 포인트란 생각도 해봅니다.
왜 이런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의식전환을 공들여서 쓰셨기에 저의생각은 짧지만 관심의 일단을 표하고 싶어서입니다.
한번 더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긴 글 작성하시느랴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저가
70여 년 살아보니
밥값,술값 잘 내는
사람이
가장 순수하고
멋 있고
아름다운 사람이였습니다
저도
이제사 철이 들어
찬조금도 내고
밥값,술값
먼저 계산할려고 항상 노력합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아이고 대장문이군요
눈이 좀 아련해서 반만 읽고
나머지는 나중에 읽어야겠어요
글 잘 보고 갑니다
뭐 나중에 읽을 가치가 있겠습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