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돌로미티 산군의 최고봉 마르몰라다(해발 고도 3343m)의 빙하가 폭염에 녹아내려 1차 세계대전 전사자 유해 두 구가 사람들 눈에 띄어 수습됐다는 소식을 전한 국내 매체의 제목에 '깜짝'이란 단어가 등장한 일이 있었다. 한 세기가 넘도록 빙하 속에 갇혀 있던 젊은 군인들 유해가 이제야 드러났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긴 하다.
지난 21일(현지시간) 이탈리아 일간 코리에레 델라 세라는 마르몰라다 케이블카 직원이 햇살이나 태양열로부터 2700m 지점의 빙하를 보호하기 위해 덮어둔 방수포를 걷어내려다 유해들을 발견했다고 전했다. 북부 트렌토 경찰은 “군인들의 군번줄 덕분에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다”며 “코모 여단을 상징하는 흰색과 파란색 휘장도 발견됐다”고 밝혔다.
이들은 1915년부터 1918년까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군대와의 산악 전투에 참전했던 이탈 리아 코모 여단 소속 보병으로 확인됐다.
마르몰라다 근처에서의 폭발물 발견 건수도 2021년 340개, 2022년 785개, 지난해에는 1039개로 늘어나고 있다. 최근에는 1차 대전 당시 사용된 포탄 53개가 발견돼 폭탄 처리 전문가들이 출동하는 일도 있었다. 1차 대전의 흔적이 그대로 험준한 산악 지형에 숨겨져 있다가 모습을 드러낸다는 점도 흥미롭다.
미국 야후 검색 창에 'dolomites & ww1 body'를 입력하면 사진들이 좌르르 올라온다. 그 중에 가장 인상적인 사진 두 장만 최근 사진들과 비교해 소개하려 한다.
널리 알려진 대로 1차 세계대전은 이전의 전쟁들과 확연히 달랐다. 군 장비가 대폭 개선됐기 때문이며 대규모 전투 못지 않게 백병전 같은 소규모 교전도 치열했다. 참호전 피해자가 많은 것도 특이했다.
이탈리아 군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연합군이 돌로미티 영유권을 놓고 치열한 쟁탈전을 벌였음을 아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쓴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적십자 부대의 앰뷸런스 운전병으로 이 시기 이곳에서 전쟁을 겪었으며 '사막의 영웅'으로 명성을 떨친 에르윈 롬멜이 소장 장교로 이곳에서 총을 들고 싸웠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도 많지 않다.
원래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독일과 같은 편이었으나 이 무렵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와 한 편이 돼 싸웠다. 이탈리아 전선에서만 이탈리아 60만명, 오스트리아 4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1916년 겨울 눈사태로 이틀 동안 양쪽 병사 1만명이 허망한 죽음을 맞았다.
험준한 산악 지형 때문에 소규모 전투가 잦았고, 도저히 접근하지 못할 것 같은 지형을 넘어 기습 공격해야 성공률이 높아지는 만큼 두 나라 모두 혁신적인 전투 기술과 등반 기술, 용감하고 과감한 행동을 수반해야 했다. 워낙 눈도 많이 내리고 눈사태도 잦은 곳이라 광산 인부들을 안전하게 피신시키도록 축적된 터널 축조 기술을 전쟁에 제대로 써먹었다.
돌로미티 곳곳을 방문하면 당시 군인들이 경이로운 네트워크를 구축했음을 피부로 체감할 수 있다. 바위에 미리 박아놓은 안전 장비에 자일과 로프를 이용해 등반하는 일을 '비아 페라타'(via ferrata)라 하는데 이것들 대부분이 사실상 1차대전 참전 군인들의 덕분이란 사실도 깨닫게 된다.
현지에서는 이런 흔적을 가장 역력하게 확인할 수 있는 곳으로 몬테 피아나(2324m), 콜 디 라나(2462m), 사스 디 스트리아(2477m) 등을 꼽는데 개인적으로 가보지 못했다. 국내 관광객들, 산객들에게 널리 알려진 곳이 아니다.
하지만 실망할 필요는 없다. 한국 산악인이나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트레치메 건너편 동굴, 친퀘토리와 라가주오이 산장 주변, 코르티나 담페초 뒤편 팔로리아 산장 근처에도 1차 대전 때 파놓은 참호나 막사, 터널 등이 널려 있기 때문이다.
이런 곳들을 둘러 보며 느껴야 할 것은 이 푸른별 지구를 먼저 다녀간 이들의 발길에 우리는 생각보다 많이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