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옛날엔
- 만화가 강철수 -
- 비극과 희극 -
대충 1987년경 같다. 안산에 예술인아파트가 지어지며 많은 예술인들이 입주했다. 유명 저명한 방송예능계 분들도 상당수였고 문학계분들도 많았는데 일일이 거명하는 것은 누가 될까봐 생략한다. 지금은 대부분 이주했든지 혹은 작고하신 것 같다.
하여간 당시 만화가들도 다수였는데 어시스트 맨까지 치면 상당수였다. 교통등 기반시설이 부족하여 곤란도 있었지만 매일 출퇴근 할 예술인이 많진 않았을 것 같다.
우리 만화인들은 야구팀을 만들어 일요일마다 즐겼는데 서울등에서도 여러분들이 동참하여 한시절 잘 지낸 것 같다. 공단이나 다른 도시팀과 어울려 대회도 하는등...경기에서 지든 이기든 막걸리 파티는 기본이었는바...
서울서 오는 분중 한선배가 바로 강철수화백이었다. 바둑도 잘두어 79년 한국최초로 '바둑스토리'로 이름을 날리고 극화체에서 벗어나 '팔불출'등 소년지에도 활발히 연재하며 88년 '발바리의 추억'이 대히트 하는등....자세한 기억이 안나지만.... ...하여간에
키가 작고 체구도 작은 편인데 늘 웃는 인상이어 모두 좋아했는데...쉬지 않고 조크일지 투덜거렸으며 이런저런 비판과 농담..갈파하는 게 지병일지 버릇 같았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희한하게도 내귀에 쏙쏙 들어왔으며 내가 하고픈 말을 어쩜 그리 툭툭 내뱉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작품도 재미나지만 작중 발바리와 작가가 똑같았다. 그런 희한한 케이스는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못본 것 같다. 대사 그대로 한마디 가감할 것 없는 스토리였달지...사실 스토리도 깊은 고민없이 가벼운 주제였고 비극은 한번도 없었던 것 같다. 그랬어도 당시엔 그에 대해 자세히 몰랐다.
차차 더 알게 되고 검색해보고는 왜 당시에 허술히 넘겼는지 많이 아쉬워졌었다. 60년대 중3의 나이에 데뷔해 서부극이나 전쟁물 혹은 에스에프등 별별 쟝르를 섭렵하여 인기를 끌며 그 와중에도 예대까지 졸업했다니..헐!이다.
74년 '사랑의 낙서'가 대히트하고 방송도 얼마간 했고 별 재미는 못봤다지만 드라마 각본도 많이 썼고..작품중 5,6편이나 영화로 제작되었고...이제 와 돌아보면 강철수님은 그야말로 타고난 불세출의 만화가라고 생각된다.
허영만선배님이 비슷할지 모르지만 허영만님은 화백이나 작가라고 불린다면 모를까, 순전 만화가라고 불리기엔 걸리는 점이 있다. 몇번 뵙기도 했지만 그 자신이 원할 것 같지도 않다.
이현세? 그도 만화가는 아니다. 장인이라고 불려야 적합할지도.. 그의 개성일지도 모르나 해피엔딩이라곤 거의 없었다. 스토리맨 탓이라고 항변할지 모르나 기질에 안맞는 스토리를 선택할 리가 없지 않겠는가..
비극의 감동이 더 강하게 오래 가는 비결이라고 판단했을지도 모르며 성장기의 불우함이 영향을 끼친지도 모르지만 그 역시 만화가라고 불리워지길 원할 것 같진 않다... 교수님..?
사실 만화그리다 동양화나 다른 계통으로 전향한 이도 상당수다. 강*. 이&&. 전%%...헌데 그들은 만화 그렸었다는 것을 내세우지 않는다. 오히려 감추려고 노심초사하는 이도 보이고...모 탤런트는 아버지가 만화가란 사실을 숨겼다던가. 그만큼 만화의 사회적 위상이 낮다는 증거일지도...
기타 천상 만화가랄 수 있는 분은 몇분 있지만...비극은 방송이나 작가들에게 맡기고 만화가는 그저 밝고 희망찬 희극만을 추구해야 된다고 믿는다. 물론 아무 근거없는 개인적인 주장이다.
강철수 선배님을 존경하며 굳이 소개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문하생은 여럿 쓸지언정 소위 만화공장식은 일체 하지 않고 모두 스스로 직접 그렸다는 점이다. 그림이야 쉬워보일지 몰라도 체력과 지력이 불가사의다. 공장장이 예술을 다룰 수는 없다.
많은 저명만화가들 비록 공장체제는 아닐지언정 최소 B팀정도는 운영했었던 것이다. 일시적일지라도...
누가 뭐라해도 3,40년 가량 한국의 대중문화계에 강철수님 만큼 영향을 끼친 인사가 또 있을지...
대중의 동의여부를 떠나 같은 만화인들만큼은 인정해주어야 하지 않을런지...
하여간 강철수 선배님, 읽을 가망은 거의 없겠지만
새카만 바보후배의 장광설... 유명세라 생각하시고 허헐 웃어 넘기십사...
근황은 모르나...다시 한번 불꽃을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