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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부
1
2주일 후에 대심원의 심리가 시작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네플류도프는 그때까지 페데르부
르크로 가서, 만일 대심원에서 잘 안 될 경우에는 상소장을 작성해 준 변호사와 권고대로
황제한테 청원해 보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변호사가 말한 바와 같이 상소의 이유가 매우 허
술해서 기각되는 경우 그만한 각오도 미리 해두지 않으면 안 되었다.
6월 초순 마슬로바를 포함한 징역수의 이송단이 출발하게 될는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네플류도프는 이미 굳게 결심한 대로 마슬로바의 뒤를 쫓아 시베리아까지 따라갈
채비를 서두르기 위해서는, 먼저 영지의 여러 마을을 두루 살펴 정리를 해두어야 했다.
제일 먼저 네플류도프는 쿠즈민스코예 마을로 출발했다. 그 곳은 제일 가까운 데 있었을
뿐더러, 흑토질의 광대한 영지로서 그의 집의 가장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그는 이 곳에서 소
년 시절과 청년 시절을 보냈으며, 이미 성인이 된 후에도 두 번이나 이 곳을 다녀온 적이
있었다.
한 번은 그의 어머니의 부탁으로 독일 사람인 관리인을 데리고 가서 전체 재정 상
태를 조사한 일이 있었으므로 벌써부터 이 영지의 사정과, 농민과 관리 사무소와의 관계, 즉
지주와의 관계를 소상히 알고 있었다. 농민과 지주와의 관계는 좋게 말해서 농민은 관리 사
무소에 완전히 사활 문제를 맡기고 있었으며, 솔직히 말하면 농민들은 관리 사무소에 노예
처럼 예속되어 있었다.
그것도 1861년에 폐지된 농노제와 같은 사실상의 예속, 즉 일정한 주인에 대한 예속이 아니라,
토지를 갖지 않은 농부나 토지가 적은 농부들 전체의 일반적인
최초의 대지주에 대한 예속이었다. 때로는 그들 농민이 생활하고 있는 부근의 대지주들에게
만 단독으로 예속되는 일도 있었다.
네플류도프는 그것을 알고 있었는데, 사실 모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수입은 그 노
예 제도 위에 존재하고 있고, 그 자신도 그러한 제도에 협력하고 있었음을 잘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공정하지 못하고 잔혹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것
은, 대학 시절에 헨리 조지의 학설을 신봉하고 선전했으며, 그 학설을 근거로 하여 토지 사
유가 50년전의 농노 소유와도 같은 현대의 큰 죄악이라고 생각하여 아버지한테서 물려받은
토지를 농민들에게 분배해 준 때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후 그가 군인 생활을 하면서 1년에 2만 루블이나 되는 큰 돈을 낭비하는 습관이
생기면서부터 이러한 인식은 그의 생활을 위해 아무 필요도 없는 것이 되어 버렸을 뿐만 아니라
완전히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는 어머니에게서 받은 돈이 어디서 나오는가를 물어 보지도 않았고, 또 그런 일
은 되도록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어머니의 죽음과 유산 상속, 그에 따르는 자기
의 재산, 즉 토지를 관리할 필요성에 부딪치게 되자 다시금 토지 사유에 대한 자기의 태도
를 결정해야 된다는 생각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한 달 전만 하더라도 네플류도프에게는
현존하는 질서를 변혁할 만한 힘도 없었고, 영지를 관리하는 것은 자기가 아니라고 하면서,
영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살며, 거기서 돈을 받으면서 어느 정도 평안한 마음으로 생활하
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시베리아로 떠날 일이 눈앞에 박두하고 감옥 세계를 상대
로 하는 복잡하고 곤란한 관계를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에, 또 이러한 문제를 해
결하기 위해서는 돈과 사회적인 지위가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토지 문제를 그전대로
그냥 방치해 둘 수는 없는 일이었으므로 손해를 각오하고 그것을 개혁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그는 토지를 스스로 경작하지는 않고, 싼값으로 농민들에게 빌려 주어서 농민들이
지주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가능성을 그들에게 주기로 결심했다. 네플류도프는 여러 번 지
주와 농노 소유자와의 입장을 비교해서 소작인에게 경작시키는 대신 토지를 농민들에게 빌
려 주는 것은, 농노 소유자가 각자의 농노를 부역에서 연공제로 바꾸는 거나 다름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서 물론 근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해결을 위한
일보 진전임에는 틀림없었다. 그것은 폭력이라는 거친 형식에서 비교적 온건한 형식으로 전
환시키고자 하는 기도였다. 그래서 그도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네플류도프는 정오가 다 되어서 쿠즈민스코예 마을에 도착했다. 그는 자기 생활의 모든
면을 간소화하려는 생각에서 전보도 치지 않고 역에 내려 마차를 불렀다. 마부는 허리의 아
래쪽 주름이 잡힌 곳에 낮게 띠를 맨 몸집이 작은 젊은 사내로서 소매가 없는 남경 무명 겉
옷을 입고 있었다.
그는 마부석에 비스듬히 걸터앉아서 신사 손님과 열심히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동안, 기진 맥진하게 혹사당한 절름발이 헌 수레말
과, 수척하고 숨을 헐떡이는 곁다리 말은 그들이 즐길 수 있는 보조로 늘쩡늘쩡 달릴 수 있
었다. 마부는 자기 마차에 탄 손님이 이 고장의 '지주'인 줄도 모르고 쿠즈민스코예의 관리
인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네플류도프는 짐짓 모르는 체했다.
"그 독일인은 꽤나 멋을 부리지요." 하고 도시에서도 살아 보았고, 소설깨나 읽었다는 마
부는 말했다. 그는 손님 쪽으로 몸을 비스듬히 반쯤 돌리고 마부석에 앉아서는, 기다란 채찍
을 위아래로 연방 바꾸어 쥐면서 자기가 밤색 말을 사서, 마누라와 함께 마구 쏘다니고 있
습죠. 대단합니다!" 하고 그는 말을 이었다.
"크리스마스 같은 때에는 으리으리한 집에 크리
스마스트리까지 장식하고, 나는 그럴 때 자주 손님을 태워다 드렸습니다만, 전깃불도 환하게
밝혀져 있어요. 어디 이런 시골 구석에서 그런 것을 볼 수 있습니까? 얼마나 돈을 해먹었는
지....... 물론 댁에선 믿지 않으실 테지만, 어쨌든 만사가 자기 멋대로라니까요. 또 이번엔 좋
은 땅을 샀다고 소문이 자자해요."
네플류도프는 독일인 관리인이 자기 영지를 어떻게 관리하든지, 또 어떻게 그것을 이용하
든지 자기는 전혀 그것에 관심을 두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허리가 긴 마부의 이야기는 불
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아름다운 날씨며,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검은 구름이 가끔 태양
을 가리는 모양이며, 여기저기서 농부들이 귀리밭을 갈며 보습을 따라 다니는 들 풍경이며,
종달새가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 있는 파릇파릇한 채소밭이며, 철늦은 참나무를 빼 놓고는
벌써 신록에 덮인 숲이며, 소와 말이 점점이 얼룩져 보이는 목장이며, 밭갈이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어른거리는 경작지를 즐거운 기분으로 바라보고 있었으나, 이따금 불쾌한 느낌이
스쳐가곤 했다. 그래서 그는 무엇이 자기를 불쾌하게 하는가를 자문해 보았다.
그 때마다 그 독일인 관리인이 자기의 쿠즈민스코예의 토지를 자기 토지나 되는 것처럼
마음대로 관리 취급하고 있다는 마부의 말이 떠오르곤 했다.
그러나 한번 쿠즈민스코예에 도착하여 일에 착수하게 되자, 네플류도프는 곧 그러한 불쾌
한 감정을 말씀히 잊어버리고 말았다.
사무소의 장부를 점검하고, 농부들의 얼마 되지 않는 땅이 지주의 땅으로 둘러싸여 있어
서 매우 유리하다고 숨김없이 떠들어 대는 관리인의 설명을 듣자, 네플류도프는 마침내 자
기가 직접 토지를 경작하지 않고 전부 농부들에게 빌려 주겠다는 결심을 더욱 굳혔다.
사무소의 장부를 검사하고 관리인의 말을 듣고 난 그는 기름진 땅의 3분의 2는 종전과 같이
완비된 농구를 사용해서 일꾼들의 손으로 경작되고, 나머지 3분의 1은 한 정보당 5루블씩의
임금을 주고 농민들에게 경작시키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결국 5루블의 임금 때문에 농민들
은 한 정보의 토지를 세 번씩 갈고 다듬고 하여 씨를 뿌리고 거둬들여서 다발을 지어 창고
로 운반해야 했다.
요약해서, 자유 계약의 머슴일지라도 적어도 한 정보당 10루블에 해당될
만한 노동을 해야만 했다. 농부들은 또 사무소에서 지급되는 모든 필수품에 대해서도 엄청
나게 비싼 값을 노동으로 갚아야만 했다. 그들은 목초나 숲속의 장작, 감자나 일을 얻는 데
도 노동을 해서 그 값을 치러야 하기 때문에 모두가 사무소에 빚을 지고 있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예를 들어서 농민들에게 일정한 임대료로 대여하는 경지 이외의 토지를, 보통 한
정보당 5푼 이자 정도의 이익으로 계산한다면, 약 4배의 수입을 짜내고 있는 셈이 되는 것
이다.
네플류도프는 전부터 이 모든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나, 이번에 새삼스럽게 다시 듣고 보
니, 자기를 비롯해서 자기와 같은 위치에 놓여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러한 불합리한 사실
에 대해서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는가 하는데 대해서 그저 놀랄 뿐이었다.
농민들에게 토지
를 양도해 주면 농기구는 소용 없게 될 것이고, 그걸 팔려 해도 원가의 4분의 1도 받지 못
할 것이며, 또한 살 사람도 없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농민들은 땅을 못 쓰게 만들것이니 큰
손해를 보게 될 것이라는 관리인의 말은, 다만 농민들에게 토지를 빌려 줌으로써 자기 수입
의 대부분을 잃을망정 자기 행위가 올바른 것이라는 네플류도프의 신념을 더욱 굳게 해줄
따름이었다.
그는 이 문제를 이번 여행중에 완전히 처리해 버리리라 마음먹었다. 이미 파종
을 끝낸 곡식의 수확과 매각될 농기구며 불필요한 건물의 매각은 모두 그가 떠난 후에 관리
인에게 그 처리를 맡기기로 했다.
그래서 그는, 이튿날 자기의 계획을 농민들에게 발표하고,
임대 토지에 대한 대부 조건을 비롯한 그 밖의 것을 조정하기 위해서 쿠즈민스코예의 영지
를 둘러싸고 있는 세 마을의 농부들을 한 곳에 모이게 해달라고 관리인에게 부탁했다.
관리인의 주장에 끝까지 굴하지 않고 농민들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할 확고 부동한 각오가
되어 있다는 의식에 만족감을 느끼며 네플류도프는 사무소를 나섰다. 그리고 당면 문제를
심사 숙고하면서 집 둘레를 한 바퀴 돌았다.
손질도 하지 못하고 내버려 둔 꽃밭(올해는 꽃
밭이 관리인의 집 앞에만 가꾸어져 있었다.), 민들레가 무성하게 자란 테니스 코트, 보리수
가 서 있는 가로수길, 이 길은 그가 항상 시가를 피우며 거닐던 곳이었으며, 3년전에는 한동
안 어머니 집에 손님으로 와 있던 아름다운 키리모바가 그에게 매혹적인 눈길을 던지던 곳
이기도 했다.
네플류도프는 내일 농민들 앞에서 연설한 이야기의 요점을 대충 생각하고 나서 관리인이
있는 데로 갔다. 차를 마시면서 네플류도프는 다시금 자기의 토지 경작을 완전히 폐지해 버
릴 방법을 상의한 후, 안정된 마음으로 이제부터 자기가 농민들에게 베풀려는 행동에 만족
하면서 자기를 위해 마련된 안채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 객실은 항상 손님을 맞기 위해 준
비되어 있는 큰 저택에 있는 방이었다.
그리 크지 않은 이 방에는 베니스의 풍경화와, 두 창문 사이에 거울이 걸려 있었다. 그리
고 깨끗한 침대와 유리병, 성냥, 소등기 등이 놓여 있는 조그만 테이블이 있었다. 거울 앞의
큰 테이블 위에는 그의 트렁크가 열린채 놓여 있었고, 트렁크 속에는 여행용 화장 케이스와
책들이 삐죽삐죽 나와 있었다.
그 책들은 러시아어로 된 <형법 연구 시론>과, 같은 제목의
독일어와 영어로 된 책들이었다. 그는 이 책들을 이번 여행중에 틈틈이 읽으려고 생각했는
데, 지금은 도무지 그럴 겨를이 없었다. 내일은 되도록 일찍부터 농부들과 상담하기 위해서
잠잘 채비를 했다.
방 한구석에는 자개가 박힌 낡은 마호가니 안락 의자가 놓여 있었다. 전에 어머니 침실에
놓여 있던 그 안락 의자를 보자, 그의 마음속에는 예기치 못했던 감정이 복받쳐올랐다. 그는
머지않아 헐리게 될 이 집과 황폐해질 정원, 벌목되고 말 삼림, 그리고 자기 스스로가 마련
한 것은 아니지만, 굉장한 공을 들여서 유지해 온 가축 우리와 마구간과 농구를 넣어 두던
헛간, 그리고 기계와 소와 말 등 모든 것들이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이제까지 이런 것들을
내동댕이쳐 버리는 것은 손쉬운 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지금은 그런 것들만 아니라
토지며 앞으로 필요하게 될 수입의 반감이 아까워졌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를 뒷받
침이나 해주는듯이 토지를 농민들에게 대여하여 자기의 재산을 없애 버릴 필요가 어디 있는
가, 그것은 좀 경솔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나는 토지를 소요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토지를 가지지 않고서는 이만한 집과 농장을
꾸려 나갈 수가 없다. 나는 곧 시베리아 가야 하니까, 집도 토지도 필요 없다.'하고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우선, 너는 시베리아에서 한평생을 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결혼을 하면 아이도 생
길 것이다. 그렇다면 너는 자신이 영지를 물려받은 것처럼 네 아이들에게도 물려주어야 한
다. 그것이 토지에 대한 의무라는 것이다. 모든 것을 남에게 양도하든지 때려부수든지 하는
것은 매우 간단하지만, 모든 것을 새로 만들어 낸다는 것은 여간 힘드는 일이 아니다. 무엇
보다 먼저 너는 자신의 생활을 충분히 생각해 보고, 자기 자신을 처리하지 않으면 안된다.
너는 마음속에 이것을 굳게 결심하고 있는가? 그리고 또한 네가 하고 있는 행위는 정말로
자기 양심의 소리에 따른 것인가? 아니면 단순히 남을 위해서 하는 것인가? 다시 말해 남
들에게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서 하는 것은 아닌가?' 네플류도프는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물
어보았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의 이목이 자기 결심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더 많은 의문이 생겨서 해결하기가 더욱 난처해졌다.
그는 이 같은 생각에서 벗어나 보려고 깨끗한 잠자리에 드러누워 지금 혼란에 빠져 있는 모
든 문제가 내일 아침에는 산뜻한 머리로 해결될 것을 기대하며 잠을 청했다. 그러나 잠자리
에 든 그는 오랫동안 뒤척거렸다. 활짝 열어놓은 창문으로부터 신선한 공기와 달빛과 함께
개구리 울음소리가 정원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들리고, 창문 바로 밑의 활짝 핀 라일락꽃
가지 속에서는 드높이 울러 대는 밤꾀꼬리의 울음소리도 뒤섞여 들려왔다.
개구리와 꾀꼬리의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네플류도프는 문득 소장 딸의 피아노 소리를 생
각했다. 소장을 생각하자 마슬로바를 생각하게 되고, '이제 그런 것 그만두세요.' 하고 그녀
가 말했을 때, 마치 개구리의 울음소리와도 같이 입술이 바르르 떨리던 것이 떠올랐다. 그러
자 독일인 관리인이 개구리가 우는 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를 불러 세우려 했으나 그
는 이미 아래로 내려가 버렸을 뿐만 아니라, 어느 새 그는 마슬로바로 변해서 '나는 징역
수고 당신은 공작님이신걸요.' 하고 네플류도프를 힐책하기 시작했다.
'아냐, 이런 일에 굽히지 않는다.' 하고 생각하며 그는 눈을 떴다. 그리고 자문해 보았
다. '어떻게 된 일인가?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잘한 일이냐, 아니면 그릇된 일이냐? 아무것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상관없다. 어서 잠을 자야지!' 그러는 사이에 그도 곧 관리인과 마슬로
바가 내려간 곳으로 서서히 미끄러져 내려가기 시작했는데 그는 어느새 깊은 잠 속으로 빠
져 들어갔다.
2
이튿날 아침 네플류도프는 9시에 잠을 깼다. 주인의 시중을 들고 있는 젊은 사무원은 그
가 일어난 기척을 알아채고, 이제껏 그렇게 해본 적이 없을만큼 번쩍번쩍하게 닦아 놓은 구
두와 차고 깨끗한 샘물을 떠가지고 들어와서 농부들이 벌써 모이기 시작했다고 보고했다.
네플류도프는 정신을 차리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토지를 농부들에게 분배하여 자기 재
산을 없애는 것을 아깝게 생각하던 어제의 마음은 씻은 듯 사라져 버렸다. 그는 간밤에 후
회하던 일을 되새겨 보니 퍽 놀라웠다. 지금 눈앞에 닥쳐오고 있는 일에 기쁨을 느끼고, 무
심결에 자랑스러운 마음이 생겼다. 창 밖으로는 민들레가 무성한 테스트 코트가 보였는데,
그 곳에는 관리인의 지시대로 농부들이 모여 있었다.
어젯밤 개구리가 요란하게 울어 대더니 날씨는 잔뜩 흐려 있었다. 아침부터 바람 한 점
없고 가랑비가 소리 없이 내려 나뭇가지와 잎사귀와 풀잎에 빗방울이 대롱대롱 맺혀 있었
다. 창으로부터 신록의 향기와 더불어 비를 재촉하는 듯한 향긋한 흙냄새가 풍겨오고 있었
다.
네플류도프는 옷을 갈아입으면서, 테니스 코트에 모여드는 농부들을 여러 번 창 밖으로
내다보았다. 농부들은 삼삼오오 모여들어서는 둥글게 서서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면서 서로
모자를 벗어 인사를 주고받았다. 큰 단추가 달리고 짧고 푸른 깃을 세운 신사복을 입은 육
중하고 체격이 좋은 관리인이 네플류도프에게 와서, 농부들이 모두 모이기는 했으나 조금
더 기다리게 해도 상관없으니 미리 마련해 놓은 커리를 드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했다.
"아니, 그리로 먼저 가서 곧 그들을 만납시다."하고 네플류도프는 말했다. 그러나 막상 농
부들 앞에 나가서 이야기할 생각을 하니 두려움과 부끄러움이 느껴졌다.
그는 농부들이 꿈에도 그려보지 못한 그들의 희망을 실현시켜 주려고 했다. 싼값으로 그
들에게 땅을 빌려 주려고 하는 것은 결국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기 위한 것이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그는 왠지 자꾸 부끄러웠다. 네플류도프는 농부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까
이 갔을 때, 모자를 벗은 연한 황갈색의 머리, 곱슬머리, 대머리, 백발의 머리들을 보고, 어
리둥절해져서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가랑비가 계속해서 내려 빗방울이 농부들
의 머리카락이며, 턱수염이며, 긴 외투의 보풀 위에 방울방울 맺혔다. 농부들은 주인을 바라
보고 그의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네플류도프는 몹시 당황했기 때문에 얼른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이 같은 불안한 침묵을 깨뜨린 것은 침착하고 자신만만한 독일인 관리인이었
다. 그는 러시아 농민을 잘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어를 정확하고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기름기가 흐르고 단단한 체력을 하고 있는 관리인과 네플류도프의 모습은 농부
들의 파리하고 주름 투성이의 얼굴과, 그들의 외투 밖으로 삐죽 나온 말라빠진 어깨뼈와 좋
은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이번에 공작님께서는 당신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토지를 나누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당신네들은 그럴 만한 가치조차 없지만."하고 관리인이 말했다.
"왜 우리에게 그럴 만한 가치가 없다는 거요. 바실리 카롤로비치? 우리가 당신을 위해서
일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우린 돌아가신 마님한테 큰 은혜를 입었습죠. 마님의 명복을
빌고 있습니다! 젊은 공작님께서도 우리를 버리시지 않으니 고맙습니다." 수다스러운 붉은
머리의 농부가 말했다.
"그래서 오늘 당신들을 모이게 한 것입니다. 당신들이 원한다면, 토지를 전부 당신들에게
나누어 주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네플류도프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농부들은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는지, 아니면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한동안 침묵
을 지킬 뿐이었다.
"어떻게 토지를 나누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까?"하고 소매 없는 긴 조끼를 걸친 중년의
농부가 네플류도프에게 물었다.
"싼값으로 토지를 쓸 수 있도록 빌려 주려는 겁니다."
"정말 고마운 일입니다."하고 노인 한 사람이 말했다.
"빌려 주신다는데 뭘 그래."
"당연한 일이지. 우린 땅 없이는 살 수가 없으니까!"
"지주님에게는 그 편이 안심일 겁니다."
여러 사람들이 왁자지껄 떠들어 댔다. "단지 땅값만 거둬들이면 되니까요. 그렇지 않으면
귀찮은 일이 많습지요."
"귀찮은 일은 언제나 당신들 때문에 일어나."하고 독일인이 말했다. "당신들이 일을 잘해
주고 질서 있게 규칙을 지켜 주기만 한다면야......"
"말이야 쉽지요. 바실리 카롤로비치." 하고 날카로운 코에 말라빠진 작은 노인이 말했다.
"왜 밀밭에다 말을 들여 놓았느냐고 야단이지만, 누가 그런 짓을 일부러 하겠습니까? 아침
부터 저녁까지 1년을 하루같이 낫자루나 무슨 연장을 휘두르며 일하고 나면 밤에 말을 감시
할 땐 그만 곯아떨어지고 맙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말이 당신네 밀밭에 들어갔다고 해서
마구 들볶으니 말이에요."
"그러니까 규칙을 지키란 말이요."
"규칙! 규칙! 말로는 쉽지만, 우리 힘엔 겨운 일입니다." 하고 털북숭이의, 머리카락이 검
고 별로 나이가 많지 않은 키가 큰 농부가 반박했다.
"그러니까 울타리를 하라고 하지 않았어!"
"그렇다면 재목을 주십시오." 하고 몸집이 조그마한 초라한 모습의 사내가 끼여들었다.
"나는 여름에 울타리를 하려고 했어요. 그랬더니 당신은 3개월 동안이나 나를 감옥에 가두
어서 이의 밥으로 만들지 않았어요? 울타리를 만들려면 이런 꼴이 된다니까, 글세!"
"저 사람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요?" 네플류도프가 관리인에게 물었다.
"저자는 마을에서 제일가는 도둑놈입니다." 하고 관리인이 독일어로 대답했다. "매년 숲속
에서 잡혀오는 녀석입니다. 너는 남의 재산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것부터 배워야 해." 관
리인이 말했다.
"그래, 우리가 당신을 소홀히 대했다는 말이오?" 하고 한 노인이 말했다. "우리는 당신 손
에 꽉 쥐여 있으니 당신을 소중히 모시지 않을 수 없지 않습니까? 당신이라면 우리들을 엮
어서 밧줄이라도 만들 수 있는 신분이 아니냐고요."
"무슨 소리야! 당신들이 나쁜 짓을 하지 않는다면 누가 당신들을 괴롭힌단 말이야. 제발
당신들이나 나를 괴롭히지 말아 달라고."
"뭐라고요? 괴롭히지 않았다고요? 작년 여름, 나를 때리지 않았소? 그래도 나는 아무 대
꾸도 하지 못했어요. 돈을 가진 사람하고는 겨룰 자격이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규칙대로 하란 말이야."
이렇게 말다툼이 벌어지고 있었으나 다투고 있는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다투고 있는지,
또 무슨 말을 지껄이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다만 뚜렷이 말할 수 있는 것은,
한편에는 공포에 억눌린 원한이 있고, 또 한편에는 우월감과 권력이라는 의식이 있다는 것
뿐이었다.
네플류도프는 그 같은 입씨름을 듣고 있는 것이 괴로워서, 본론으로 말머리를 돌
려 보려고 했다. 그래서 땅값과 지불 기한을 결정하려고 했다.
"대체 토지 이야기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여러분들은 내가 말한 대로 하시겠습니까? 그
리고 토지를 전부 빌려 드린다면 땅값은 얼마로 하면 좋겠습니까?"
"지주님의 땅이니 가격도 정하시지요."
네플류도프는 가격을 말했다. 그러자 네플류도프가 부른 가격은 이 고장에서 부르는 가격
보다 훨씬 싼값이었지만, 농부들은 늘 하는 식으로 비싸다고 값을 깎기 시작했다. 네플류도
프는 자기의 제안을 반갑게 받아들일 것으로 기대했었지만, 농부들에게서는 조금도 그런 기
색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다만 네플류도프는 다음의 이유에서 그의 제안이 그들에게 유리
하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누가 토지를 빌리느냐, 다시 말하면 전체의 농부의 이
름으로 빌리느냐, 그렇잖으면 조합을 만들어서 빌리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지불
능력이 없는 사람은 제외하자는 농부들과 제외당하는 농부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진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마침내 관리인의 중재로 땅값과 지불 기간이 결정되었다. 농부들은
시끄럽게 떠들면서 언덕길을 내려가 마을로 돌아갔다. 네플류도프는 관리인과 같이 계약서
의 문안을 만들기 위해 사무소로 갔다.
모든 것이 네플류도프가 원하고 기대했던 대로 되었다. 농부들은 그 지방일대의 땅값보다
3할이나 싼 값으로 토지를 빌려 쓰게 되었다. 영지로부터 나올 수입은 반감되었으나, 그래도
네플류도프에게는 충분했다. 특히 산림을 판 대금과 농기구를 팔아 들어올 금액을 가산하면
오히려 남아돌아갈 정도였다.
이렇게 모든 것이 다 잘되어 가는데도 왠지 네플류도프는 그
무언가가 양심에 걸리는 것을 느꼈다. 농부들 중에는 고맙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
분은 불만스러운 기색이었으며, 뭔가 좀더 큰 기대를 걸고 있는 듯한 눈치였다. 결국 그는
많은 재산상의 손해를 보면서도 농부들이 기대했던 것을 채워 주지 못한 셈이 되었다.
이튿날, 가계약서에 서명한 네플류도프는 마을의 대표로 뽑혀 온 노인들의 전송을 받으며
무엇인가 불쾌한 마을으로, 전날 정거장에서 타고 올 때 마부한테서 들은 관리인의 잔뜩 뽐
낸 삼두 마차에 올라탔다. 그는 뭔가 미완성으로 떠나는 불유쾌한 감정으로 정거장으로 마
차를 몰았다.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선 채 불만족스러워 머리를 흔드는 농부들에게 작별 인
사를 하고 출발했다. 네플류도프 자신도 불만스러웠다. 그러나 어떤 점이 만족스럽지 못한지
꼬집어서 말할 수는 없었으나, 그는 시종 뭔가 서글프고 수치스러운 느낌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3
네플류도프는 쿠즈민스코예를 떠나 고모한테서 유산으로 물려받은 영지로 향했다. 그 곳
은 카추샤를 처음으로 만났던 곳이었다. 그는 이 영지에서도 쿠즈민스코예에서 한 것처럼
토지 문제를 처리하려고 생각했다. 그밖에 카추샤의 일과, 카추샤와 자기와의 사이에서 태어
난 갓난애의 일, 그 갓난애가 죽었다는 것은 사실인지, 그것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죽었는지,
가능한한 확실히 알고 싶었다.
그는 아침 일찍이 파노보 마을에 도착했는데, 집안에 마차를
들여놓았을 때 무엇보다도 먼저 그를 놀라게 한 것은 모든 건물, 특히 안채의 황폐하고 퇴
락한 모습이었다. 전에는 파랗게 빛이 나던 지붕이 오랫동안 칠을 하지 않아서인지 뻘겋게
녹이 슬고, 아마 폭풍 때문인지 여러 장이 뒤집혀져 있었다.
안채를 둘러싼 얄팍한 판자는
군데군데 누군가의 손으로 뜯겨져 있었고, 녹슨 못이 구부러져 있었다. 입구의 계단은 두 고
다-앞문과, 그리고 그에게 특별한 추억을 남겨 준 뒷문도-모두 허물어져 나무 뼈대만 남아
있었다. 몇 개의 창문은 유리 대신 얄팍한 판자로 가려져 있었고, 관리인이 살고 있던 별채
와 부엌과 마구간도 모두 낡아빠져서 잿빛으로 변해 있었다.
다만 정원의 풀만은 무성하게
자라 때마침 꽃이 만발하였고, 울타리 저쪽 활짝 핀 벚꽃과 사과, 살구 등이 마치 흰구름처
럼 보였다. 라일락 산울타리에는 12년 전 네플류도프가 열여섯 살이 된 카추샤와 그 그늘
밑에서 술래잡기를 하다가 구덩이에 빠져 라일락 나무숲뒤의 쐐기풀에 찔렸을 때와 똑같이
라일락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소피야이바노브나 고모가 안채 옆에 심은 낙엽송은 그 당시
말뚝만하던 것이 지금은 대들보만하게 자라 있었으며, 황록색의 부드러운 솜털 같은 잎으로
덮여있었다. 냇가에는 물이 잔잔히 흐르고 있었고, 물방앗간이 있는 둑에 이르러서는 요란스
러운 소리를 내고 있었다.
개울 저쪽 풀밭에서는 마을의 농부들이 키우는 여러 가지 털빛을
한 가축들이 풀을 뜯고 있었다. 신학교를 중퇴한 관리인이 미소 띤 얼굴로 뜰에서 네플류도
프를 맞아들였다. 그는 연방 미소를 지으면서 네플류도프를 사무실로 안내했고, 무슨 특별한
일을 약속이라도 하듯이 싱글벙글하면서 칸막이 뒤로 사라졌다. 칸막이 벽 뒤에서 무엇인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조용해졌다.
네플류도프를 역에서 태워다 준 마부가 찻삯을
받아 가지고 딸랑딸랑 방울 소리를 내면서 밖으로 몰고 사라져 버리자 사방은 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해졌다. 잠시 후 수놓은 속옷을 입고, 술을 너덜너덜하게 늘어뜨린 귀고리를 단 맨
발의 계집애가 창가로 뛰어가자, 뒤이어 농부 한 사람이 두툼한 장화의 징소리를 요란스럽
게 내며 울퉁불퉁한 길을 달려갔다.
네플류도프는 창가에 앉아서 정원을 내다보며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조그만 쌍여닫이 창
문으로 신선한 봄의 향기와 일구어 놓은 땅의 흙냄새가 들어왔고, 산들바람이 땀 맺힌 그의
이마에 늘어진 머리카락과 칼자국투성이의 창턱 위에 놓여 있는 종이를 하늘하늘 날려 주었
다.
냇가에서는 아낙네들의 빨래 방망이 소리가 들려왔다가는 햇빛에 반짝이는 맑은 강물
위로 퍼져나갔다.
방앗간에서는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박자를 맞추며 들려왔다. 파리 한 마리가 놀란 듯 귓
전을 윙하고 스치며 지나갔다.
그러자 불현 듯 자기가 젊고 순수했던 시절인 그 옛날 생각이 밀려왔다. 그 때도 역시 아
낙네들의 방망이 소리가 들려왔었다. 봄바람이 땀에 젖은 그의 이마에 산들산들 불어왔고,
칼자국이 나 있는 창턱 위에 놓여 있는 종이가 팔락이고 있었다. 역시 파리가 귓전을 스쳐
갔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를 그 때와 조금도 다름이 없는 18세의 소년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지만 그 때의 그 젊고 순순하고 한없이 위대한 미래의 가능성에 넘쳐 있었던 시절로 되
돌아간 듯한 느낌이었다. 그는 그와 동시에 자기가 지금 꿈꾸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
각되었으며, 그 옛날의 일들은 모두 실재해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깨닫게 되자, 무섭도록
서글퍼졌다.
"언제 식사를 하기겠습니까?"하고 관리인이 미소 지으면서 물었다.
"언제든지 좋소. 그러나 별로 시장하지 않으니, 마을이나 한 바퀴 돌아보겠소."
"그럼 먼저 안채로 들어가시는게 좋지 않을까요? 깨끗이 정리해 놓았습니다. 밖은 좀 뭣
합니다만...... 쭉 한번 둘러보시는게 어떨지......."
"아니, 그것은 나중에 보기로 하지. 그보다 한가지 물어 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 이 마을
에 마트료나 하리나(카추샤의 이모)라는 여자가 있소?"
"네,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말씀이 아닙니다. 밀주를 만들어 팔고 있습니다. 저는 그
걸 알고 있기 때문에 꼬리를 잡아서 잔소리를 해주곤 합니다만, 고소를 하기에는 불쌍합니
다. 늙은 몸에 손자들을 키우고 있으니까요."하고 관리인은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고 말했
다. 그것은 주인의 호감을 사려는 것과, 네플류도프도 자기와 마찬가지로 모든 문제를 이해
하고 있다는 확신을 나타내는 미소였다.
"그 노파는 어디서 살고 있는지, 가서 잠깐 만나 보았으면 좋겠는데."
"마을 제일 끝에서 세 번째 집입니다. 왼편에 벽돌집이 있고, 그 뒤쪽에 노파가 사는 오두
막집이 있습니다. 그보다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하고 관리인은 기쁜 듯이 벙글거리며
말했다.
"아니, 고맙소. 나 혼자도 갈 수 있고. 그보다 당신은 농부들을 한 곳에 모이도록 연락해
주시오. 난 토지 문제로 그들에게 얘기하지 않으면 안 될일이 있으니까."하고 네플류도프가
일렀다. 그는 이 곳에서도 쿠즈민스코예 마을에서처럼 가능하다면 오늘 밤 안으로 농부들과
의 이야기를 끝맺을 작정이었다.
4
대문을 나서자 네플류도프는 탄탄히 다져진 오솔길에서 알록달록한 무늬의 앞치마를 두르
고 귀에는 장식술 귀고리를 달고, 질경이와 백산다가 우거진 목장 뜰을 가로질러 맨발로 재
빠르게 걸어오는, 다리가 굵은 시골 처녀와 마주쳤다.
집으로 돌아오고 있던 그녀는 오른손
에 빨간 볏이 흔들리는 수탉은 가만히 품에 안겨 있는 듯했으나, 이따금 눈을 두리번거리며
시커먼 한쪽 발을 오므렸다 폈다 하면서 처녀의 앞치마를 발톱으로 박박 긁고 있었다. 시골
처녀는 주인 앞으로 다가오자, 빠른 걸음을 보통 걸음으로 늦추어 가다가 주인과 마주치자
우뚝 멈추어 서서 고개를 뒤로 번쩍 쳐들더니 꾸벅 인사를 하고는, 네플류도프가 옆으로 지
나가자, 수탉을 안은 채 앞으로 달려갔다.
그는 우물 쪽으로 내려가는 도중, 이번에는 더럽
고 다 떨어진 옷을 걸치고 구부정한 등에다 물이 철철 넘치는 물통을 메고 오는 노파와 부
딪쳤다. 노파는 네플류도프를 보자 물통을 가만히 내려놓고 아까 처녀와 똑같이 고개를 바
로 쳐들고는 꾸벅 인사를 했다.
우물을 지나자 바로 마을이 나타났다. 맑게 갠 무더운 날씨였다. 아침 10시인데도 날씨는
후끈후끈 찌기 시작했고,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올라서는 이따금씩 태양을 가리곤 했다. 코를
찌르는 듯한 거름 냄새가 마을에서 풍겨왔다. 그 냄새는 반짝반짝 빛나는 산길을 줄지어 올
라가고 있는 짐마차에서 풍겨오는 것 같았으나, 그보다는 주로 네플류도프가 지나가는 집집
의 안마당에 파헤쳐 놓은 거름 더미에서 열어 놓은 문을 통해 풍겨오는 냄새가 더 지독하고
역했다.
거름이 묻은 바지와 셔츠를 입은 맨발의 농부들은 짐마차 뒤를 따라 산길을 걸어
올라가면서, 키가 크고 뚱뚱한 신사가 햇빛에 번쩍이는 비단 리본이 달린 회색 모자를 쓰고,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반짝이는 은손잡이가 달린 지팡이로 가볍게 땅을 짚으면서 마을 길
쪽으로 걸어 올라가는 모습을 자꾸 뒤돌아보았다.
들에서 돌아오는 농부들은 빈 마차를 달리며 흔들거리는 마부석에서 모자를 벗고는, 깜짝
놀란 얼굴로 자기들이 다니는 길에 나타난 이 낯선 사람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여자들은 현
관에 서거나 문 밖까지 뛰어나와서, 서로 눈짓 손짓해 가며 그를 전송했다.
네플류도프는 네 번째 집을 지나가려고 할 때 요란스럽게 달려오는 짐마차 때문에 걸음을
멈추게 되었다. 그 짐마차 위에는 거름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었고, 그 꼭대기에는 사람들이
앉게 편평하게 멍석이 깔려 있었다. 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 맨발로 마차 뒤를 따라
가고 있었다.
짚신을 신은 젊은 농부가 성큼성큼 발을 내디디며 말을 문 밖으로 몰아내고
있었다. 다리가 길고 털이 푸르스름한 망아지가 문 밖으로 쫓겨나오다가 네플류도프를 보고
는 질겁을 해서 마차 옆으로 비켜서다가 다리가 바퀴에 부딪치자, 깜짝 놀라서는 때마침 문
에서 무거운 짐을 끙끙거리며 끌고 나오는 어미말 앞으로 달려갔다.
어미말은 근심스러운
듯이 히힝 소리를 냈다. 그 뒤를 따라서 줄무늬 바지에 더러운 셔츠를 걸친, 역시 어깨뼈가
불거져 나오고 깡 말라 원기가 왕성해 보이는 노인이 맨발로 말을 몰고 나왔다.
말들이 잿빛을 띤 말똥이 흩어져 있는 길로 나가자, 노인은 문이 있는 데까지 되돌아와서
네플류도프에게 인사를 했다.
"나리께선 우리 여지주님 조카님이신가요?"
"네, 조카올시다."
"잘 오셨습니다. 그러시다면 저희들을 만나러 오셨습니까?"하고 노인은 수다스럽게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렇고. 그런데 어떻게들 지내고 있지요?" 네플류도프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이
렇게 되물었다.
"어떻게들 지내다뇨! 우리들의 생활이란 말씀이 아니죠." 수다스러운 노인은 노래라도 부
르듯 흥겹게 말꼬리를 늘어뜨렸다.
"어째서 그렇게 형편없단 말입니까?" 네플류도프는 문 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이것도 생활이라고 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말씀이 아닙니다." 네플류도프의
뒤를 따라서 거름이 깨끗이 치워져 땅바닥이 드러나 있는 처마 밑으로 발길을 옮기며 노인
이 대답했다.
네플류도프는 노인을 따라 처마 밑으로 들어갔다.
"바로 저기 보시다시피 제 식구는 모두 12명이나 됩니다." 노인은 두 여자를 가리키면서
말을 이었다. 여자들은 수건을 늘어뜨리고, 땀에 젖은 치맛자라을 걷어올리며, 장딴지를 절
반이나 거름에 묻힌 채, 쇠스랑을 손에 들고 거름더미 속에 서 있었다.
"매달 적어도 스물대여섯 관의 보리를 사야 되는데 어디서 그 돈을 구해 오겠습니까?"
"당신네 밭에서 나오는 것으로 모자란단 말이오?"
"우리 밭이라고요?"하고 비웃기나 하듯이 되물었다. "우리 밭에서는 세 사람분밖에 나오
지 않습니다. 작년에는 여덟 단밖에 추수를 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크리스마스까지도 먹지
못했지요."
"그럼, 어떻게 살아가시오?"
"그래서 할 수 없이 자식 한 놈을 머슴으로 보내고, 나리 사무실에서 빚을 냈습지요. 그러
나 그것도 대제일 전에 다 써버렸기 때문에 지대도 물지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지대는 얼마나 되오?"
"저희는 넉 달마다 17루블씩 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살아가야 할는지, 내살림이지
만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집 안으로 들어가 봐도 좋겠소?"
네플류도프는 이렇게 묻고 앞마당을 지나 말끔히 쓸어 넣은 자리에서, 아직 손도 대지 않
은 채로 쇠스랑으로 흐트려 놓은, 지독한 냄새가 풍기는 싯누런 거름더미 쪽으로 걸어갔다.
"이르다뿐인가요! 어서 들어가십시오."하고 노인은 대답하면서, 맨발의 발가락 사이로 거
름이 비죽비죽 새어나오는 발을 재빨리 옮겼다. 그는 네플류도프의 앞장을 서더니 그를 위
해 문을 열어 주었다. 여자들은 머리에 쓰고 있는 수건을 매만지고 옷의 깃을 바로잡으면서
자기네 집으로 들어오는, 소매에 황금빛 커프스를 단 말쑥한 신사를 호기심 어린 두려운 눈
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집 안에서 속옷만 걸친 두 계집아이가 뛰어나왔다. 네플류도프는 모자를 벗어들고 허리를
굽혀 좁고 더러운 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서는 시큼한 음식 냄새가 풍겼으며, 베틀 두 대
가 방 안 가득 놓여 있었다. 난롯가에는 소매를 걷어올린 비쩍 마르고 햇볕에 까맣게 탄 팔
을 드러낸 노파가 서 있었다.
"나리께서 오셨소. 귀하신 손님이오."하고 노인이 말했다.
"아이고, 어서 오세요." 노파는 걷어올렸던 소매를 내리면서 상냥하게 말했다."
"어떻게들 살고 계신지 보고 싶어서 왔소."하고 네플류도프가 말했다.
"보시다시피 이렇게 살고 있지요. 집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해서 언제 누가 깔려 죽을지
모를 지경입니다. 그런데도 저 늙은이는 걱정할 것 없다고 하지요. 임금님처럼 태평하게 살
고 있답니다."하고 성질이 있어 보이는 노파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마침
지금 점심을 차리고 있습니다. 일하는 사람들에게 먹이려고요."
"평소 무엇을 먹습니까?"
"무엇을 먹느냐교요? 먹는 거야 고급이지요. 먼저 빵에다 크바스(라이보리와 엿기름으로
만든 음료수)를, 또 다르게는 크바스에다 빵을 먹습니다." 노파는 반쯤 썩은 이빨을 드러내
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니, 농담이 아닙니다. 당신네들이 먹는 것을 좀 보여 주구려."
"먹는 것을요?" 웃으면서 노인이 말했다. "우리가 먹는 것이란 뻔한걸요. 보여드려요, 할
멈."
노파는 머리를 흔들었다. "우리 농부들이 먹는 것을 보시고 싶다니, 나리도 참 자상하시군
요. 꼭 눈으로 보셔야 되겠다니…… 방금 말씀드린 대로 빵과 크바스, 거기에 수프입니다.
간밤에 한 여편네가 엿기름 찌꺼기를 가져왔기에, 그것으로 수프를 만들었지요. 그리고 감자
도 있고요."
"그게 전부란 말이오?"
"더 없느냐고요? 그저 우유를 넣어서 희멀겋게 만드는 정도랍니다." 노파는 웃으면서 문
쪽을 쳐다보며 말했다.
문은 활짝 열려 있었으며, 사람들이 빽빽이 모여 있었다. 사내아이들, 계집아이들, 그리고
어린애를 안은 여자들이 서로 떼밀며, 농부의 음식을 들여다보고 있는 나리를 바라보고 있
었다. 노파는 자신 있게 나리를 상대할 수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정말 나리, 우리들의 생활이란 말이 아닙죠." 노인은 말했다. "어딜 들어오려고 하는 게
야!"하고 문가에 모여 선 사람들에게 노인이 소리를 꽥 질렀다.
"그럼 잘들 있어요." 네플류도프는 아지 못할 수치심과 어색한 기분을 느끼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희들 같은 사람을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하고 노인은 말했다.
입구 쪽에 서 있던 사람들이 네플류도프에게 길을 비켜 주기 위해 서로 밀치고 당기고 했
다. 네플류도프는 한길로 나와서 언덕길로 올라갔다. 그의 뒤를 따라 맨발릐 두 아이가 뛰어
왔다. 나이가 좀 들어 보이는 아이는 애초에는 하얀 것이었으나 지금은 새까맣게 때가 묻은
셔츠를 입고 있었으며, 다른 한 아이는 색이 바랜 분홍빛 셔츠를 입고 있었다. 네플류도프는
그들을 돌아다보았다.
"이번엔 어디로 가세요?" 흰 셔츠를 입은 애가 물었다.
"마트료나 하리나한테 가겠다. 너희들 그 사람을 아니?"
진홍빛 셔츠를 입은 조그만 사내애가 무엇이 우스운지 킬킬거렸으며, 나이를 먹은 소년은
정색을 하고 물었다.
"어느 마트료나 말이에요? 할머니 말이에요?"
"응 그래, 할머니다."
"아!" 사내아이는 목소리를 길게 뺐다. "그럼, 세묘니하 할머니군요. 그 할머닌 마을 끝에
살아요. 우리들이 모셔다 드릴게요. 얘, 페드카, 우리 같이 모셔다 드리자."
"말은 어떡하고?"
"염려 마, 괜찮대도."
페드카가 동의했으므로 그들은 같이 윗마을 쪽으로 걸어오라갔다.
5
네플류도프는 어른들을 상대하기보다 어린이들을 상대하는 쪽이 한결 마음이 편했다. 그
래서 그는 그들과 같이 걸어가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진홍빛 셔츠를 입은 조그만 놈도 웃음을 멈추고, 큰 놈과 같이 영리하고 또렷또렷하게 이
야기하기 시작했다.
"이 마을에서 제일 가난한 사람이 누구냐?" 네플류도프는 애들에게 물었다.
"누가 제일 가난하냐고요? 마하일네가 가난하고, 시몬 마카로프도 가난하지요. 그렇지만
마르파는 그보다 더 가난해요."
"아니야, 아니샤가 더 가난해. 아니샤는 소도 없는데다 빌어먹고 다니잖아."하고 조그만
페드카가 말했다.
"소는 없지만, 아니샤는 단 세 식구 아냐? 그렇지만 마르파는 다섯 식구나 된단 말야."하
고 큰 놈이 반박했다.
"그렇지만 아니샤는 과부야."하고 진홍빛 셔츠는 아니샤 편을 고집했다.
"넌 아니샤가 과부라고 하지만, 마르파도 과부나 다름없단 말이야."하고 큰 놈이 말을 이
었다. "아저씨가 집에 없으니 마찬가지지 뭐야."
"아저씨는 어디로 갔지?"하고 네플류도프가 물었다.
"감옥에서 이를 기르고 있대요."하고 큰 놈이 어른들이 말하듯이 대답했다.
"작년 여름에 지주네 숲에서 작은 자작나무 두 그루를 베었기 때문에 감옥에 들어갔어
요." 진홍빛 셔츠의 조그만 놈이 재빨리 설명했다. "벌써 6개월이나 됐어요. 그래서 마르파
는 동냥을 다녀요. 집에는 어린애가 셋이나 있고 더구나 몸을 못 쓰는 할머니까지 있어요."
소년은 자세하게 덧붙여 말했다.
"그 여자는 어디 살지?"하고 네플류도프가 물었다.
"바로 저 집이에요."하고 소년은 집 한 채를 가리켰다. 그 오두막집 바로 앞에 있는 , 네
플류도프가 걸어가고 있는 샛길에 머리가 누르스름한 조그만 어린애가 게처럼 굽어진 다리
를 하고 비틀비틀 간신히 서 있었다.
"바시카, 어디로 도망가는 거냐, 이 개구쟁이야?" 그 때 마치 재라도 뒤집어쓴 듯한 칙칙
한 잿빛 속옷을 입은 여자가 집에서 뛰어나와 네플류도프앞으로 달려와서, 어린애를 들쳐안
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네플류도프가 어린애에게 무슨 못할 짓이라도 하지 않을까 염려하
는 듯한 그런 태도였다.
이 여자가 바로 네플류도프의 산에서 자작나무를 도벌한 죄로 감옥에 갇혔다는 사나이의
아내였다.
"그런데, 마트료나도 역시 가난하냐?" 그들 셋이 마트료나 집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네플
류도프가 이렇게 물었다.
"가난한 게 뭐예요, 술을 팔고 있는데." 진홍빛 셔츠를 입은 여윈 소년이 거침없이 말했
다.
마트료나의 오두막집에 닿자, 네플류도프는 두 어린애를 돌려 보내고, 출입구를 거쳐 방
안으로 들어갔다. 마트료나 할머니가 살고 있는 오두막집은 두 칸 반도 채 못 되는 넓이였
으므로, 난로 뒤에 놓여 있는 침대에서는 어른이 제대로 발을 뻗고 잘 수도 없을 정도였다.
'바로 이 침대 위에서'하고 그는 생각했다. '카추샤가 애를 낳고 병이 났겠구나.' 방 안은
베틀이 거의 방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었다. 네플류도프가 나직한 문살에 머리를 부딪치며
들어갔을 때, 노파는 큰손녀와 함께 날실을 가지런히 하고 있던 참이었다. 다른 두 손자들
은 네플류도프의 뒤를 따라 들어와서 문기둥을 붙잡고 서 있었다.
"누굴 찾으시죠?"하고 노파가 화난 얼굴로 물었다. 베틀이 시원치 않아 짜증이 나 있었으
며, 더욱이 밀주를 팔고 있기 때문에 낯선 사람을 경계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지주입니다만, 잠깐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서……."
노파는 찬찬히 상대방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잠시 말이 없더니 갑자기 태도를 바꾸었다.
"아이고 주인 나리셨군요! 바보같이 알아뵙지도 못하고, 그저 지나는 사람인 줄만 알았습
죠." 노파는 짐짓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아무도 없는 데서 조용히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하고 네플류도프는 열린 문 쪽을 바라
보며 말했다. 그 곳에는 많은 어린애들이 모여 있었으며, 그 뒤로 말라빠진 여인네가 넝마조
각으로 만든 모자를 쓰고 병으로 인해 얼굴빛이 좋지 못한, 연방 빙글거리고만 있는 갓난애
를 안고 서 있었다.
"뭘 보는 게야! 혼 좀 나봐야 알겠니? 그 몽둥이 좀 이리 가져와!" 하고 노파는 문에 서
있는 애들에게 고함을 쳤다. "문을 닫지 못해! "
어린애들은 겁을 먹고 달아나 버렸다. 갓난애를 안고 있던 아낙네가 문을 닫았다.
"난 또 누구시라고. 주인 나리이신걸. 정말 귀하신 손님이군요!"하고 노파는 말했다. "아
유, 이렇게 누추한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와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자, 여기 걸터앉으
십시오, 이 의자에."하고 그녀는 앞치마로 나무 의자를 훔치면서 말했다. "난 또 어느 놈팡
이가 왔나 했었지요. 우리 생활의 은인이신 나리가 오셨을 줄이야. 제발 용서하십시오. 늙어
서 벌써 눈이 멀었나 봐요."
네플류도프는 앉았다. 노파는 그의 앞에 서서 오른손으로 뺨을 받치고 왼손으로 오른손의
뾰족한 팔꿈치를 쥐면서 노래를 부르듯이 말했다.
"그런데 나리도 나이가 드셨군요. 물오른 나무처럼 싱싱하시더니, 지금은 그렇지 못하시니
말이에요. 무슨 걱정이 있으신가 보지요?"
"실은 할머니한테 물어 볼 게 있어서 왔는데. 카추샤 마슬로바를 기억하시겠소?"
"예카테리나 말씀입니까? 모를 리 있겠습니까, 내 조카딸인걸……. 그야 잊을 수 없지요.
그 애 때문에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몰라요. 다 알고 있습니다. 하기야 하느님 앞에 죄 없
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임금님 앞에 송구스럽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젊은 탓이지
요. 누구나 차와 커피를 좋아합니다. 다 젊은 기분으로 저지른 짓이지요. 할 수 없는 일입니
다. 나리는 그 애르 버리셨지만, 백 루블을 주셨으니까 그것으로 할 일을 다 하신 셈입니다.
그러나 그 애의 꼬락서니라니. 미친 짓을 했죠. 내 말만 들었던들 버젓하게 살아갈 수 있었
을 텐데. 그 애는 내 조카딸입니다만, 사실은 미친년이었어요. 그 뒤 내가 좋은 자리에 들여
보내 주었는데, 글세 주인의 말을 고분고분 듣지 않고 대들지 않았겠어요? 우리 같은 주제
에 감히 주인에게 욕을 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쫓겨나고 말았답니다. 그리고 또 산림 감독
의 댁에 들어갔는데, 거기서도 싫다고 나와 버렸어요."
"어린아이에 대해서 알고 싶은데, 여기서 낳았다면서요? 그 애는 어디있소? "
"어린 것 말씀입니까? 나리, 그 때 나는 여간 많이 생각하지 않았습죠. 그 애 어미는 산후
가 좋지 않아서 일어나지도 못했지요. 그래서 어린애는 영세를 받게 한 다음 육아원으로 보
냈습니다. 어미가 죽게 되었다고 해도 어디 천사 같은 어린 것을 괴롭힐 수 가 있어야지요.
세상에는 어린애에게 젓을 주지 않아서 굶겨 죽이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어야지요. 힘은 들었지만 육아원으로 보내야 되겠다고 생각하여 그 때 마침 돈도 있
고 해서 데려다 주었지요."
"그럼 등록 번호가 있었을 텐데요?"
"번호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애는 곧 죽어 버렸어요. 그 여자의 말은 도착하자마자 죽
었다더군요."
"그 여자라니?"
"바로 스코르드뇨예에 살고 있던 여자지요. 그 여자는 그게 직업이었어요. 이름은 말라냐
라고 했는데 지금은 죽고 없습니다. 똑똑한 여자였어요. 잘해 나갔지요. 누가 갓난애를 데려
다 주면 그 애를 받아 가지고는 잘 길렀답니다. 갓난애가 육아원으로 보낼 만한 숫자가 찰
때까지 자기 집에서 길렀지요. 그러는 동안에 세 아이나 네 아이가 모이게 되면 곧 육아원
으로 데리고 갔답니다.
그녀는 둘이서 잘 수 있는 큰 요람을 여기저기에 만들었는데, 그 곳
에 손잡이도 달아놓았습니다. 그 속에다 네 아이를 머리가 서로 부딫치지 않도록, 즉 네 아
이의 발이 한 군데 모이게 뉘었답니다. 이엏게 해서 한꺼번에 네 아이를 돌봐 주었어요. 젓
꼭지만 물려 주면 모두 울지 않고 얌전하거든요."
"그래서 어떻게 됐소?"
"그래서 예카테리나의 애도 그렇게 해서 길렀습죠. 그렇게 이럭저럭 2주일 동안 길렀다는
데, 벌써 그 때부터 그 애가 쇠약해져 갔다는군요."
"좋은 애였었나요?"하고 네플류도프는 물었다.
"그야 훌륭한 애기였어요. 어디를 가서 찾아봐도 그런 애는 없을 겁니다. 꼭 나리를 닮았
었지요." 노파는 늙은이답게 한쪽 눈을 깜빡이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먹는 것이야 뻔하지요. 한 가지만을 먹였으니까요. 하긴 제 배를 앓아서 난 애가 아니니
까 당연하지요. 그 여자는 어쨌든 육아원에 도착할 때까지만 살아 있으면 된다고 말하더군
요. 가까스로 모스크바에 데리고 가자마자 숨졌다니…… 그녀는 빈틈없이 증명서까지 받아
왔더군요. 참 영리한 여자였어요."
네플류도프가 자기 자식에 대해서 알 수 있었던 것은 이것뿐이었다.
6
네플류도프는 방문과 현관에 다시 머리를 부딪치며 밖으로 나왔다. 때묻은 흰 셔츠와 진
홍빛 셔츠를 입은 두 아잉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 밖에 새 얼굴이 댓 명 끼여 있었다. 젖먹
이를 안은 아낙네도 몇 명 있었는데, 그 중에는 낡아빠진 헝겊으로 모자를 만들어 씌운 핏
기 없는 갓난애를 안은, 앞서 본 그 여자도 끼여 있었다. 아이는 여전히 시들어 보이는 얼굴
에 줄곧 기묘한 미소를 띠면서 구부러진 손가락을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다.
네플류도프는
그 어린애가 고통스러운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아낙네가 누구냐고 물
어 보았다.
"저 여자가 내가 아까 말한 아니샤예요."하고 나이 먹은 사내아이가 대답했다.
네플류도프는 아니샤에게 몸을 돌려 말을 걸었다.
"어떻게 살고 있소?" 그는 물었다. "무엇으로 연명하는가 말이오?"
"무엇을 먹고 사느냔 말이죠? 빌어먹지요." 아니샤는 이렇게 말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기운이 없어 보이는 어린애는 애처로워 보이는 가느다란 다리를 움츠리면서 온 얼굴에 미
소를 띠었다.
네플류도프는 지갑을 꺼내 10루블을 그녀에게 주었다. 그가 그 곳에서 두 걸음도 옮기기
전에 갓난애를 안은 또 다른 여자가 쫓아왔다. 뒤이어 노파, 그리고 또 다른 여자가 따라왔
다. 모두가 자기들의 가난한 처지를 호소하고 도와 달라고 했다.
네플류도프는 지갑에 있던
잔돈 60루블을 몽땅 털어 주고는 견딜 수 없는 슬픔을 안고 집으로, 즉 관리인이 살고 있는
별관으로 돌아왔다. 관리인은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네플류도프를 맞아들이면서 오늘 밤 농
부들이 모인다고 보고했다.
네플류도프는 고맙다고 말하고 방에 들어가지 않고 뜰로 나와,
무성한 풀 위에 하얀 사과꽃이 만발한 오솔길을 거닐면서 자기가 방금 목격한 모든 일들을
생각해 보았다.
별관 근처는 처음에는 조용했으나, 곧 관리인의 방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다. 두 여
자가 서로 상대방의 말을 가로채며 외치는 사이사이에, 미소를 짓고 있는 성싶은 관리인의
차분한 음성이 들려왔다. 네플류도프는 귀를 기울였다.
"내 힘으로는 더이상 어떻게 할 수 없다는데, 왜 남의 목에 걸고 있는 십자가까지 빼앗고
야단이에요."하고 독살스러운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목장에 뛰어들었을 뿐이잖아요."하고 또 다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려 달
라니까요. 어째서 소는 굶기고 애들 우유도 못 먹이게 괴롭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돈으로 갚든지 일을 해서 갚든지 하란 말이야."하고 관리인의 차분한 목소리가
대답했다.
네플류도프는 정원에서 나와 입구의 층계 쪽으로 다가갔다. 그 곳에는 머리칼이 흐트러진
두 여자가 서 있었는데, 한 사람은 해산이 임박한 만삭의 배를 안고 있었다. 입구의 우층계
에는 관리인이 범포로 만든 외투 포켓에 두 손을 찌른 채 서 있었다. 주인을 보자 여자들은
입을 다물고 흘러내린 머릿수건을 매만지고 있었으며, 관리인은 포켓에서 손을 빼고 싱글벙
글 웃고 있었다.
관리인의 말에 의하면, 농부들이 일부러 자기들의 송아지뿐만 아니라 어미소까지 지주네
목장으로 들여 보낸다는 것이었다. 지금도 이 여자들의 암소 두 마리가 목장에 들어와 있기
에 붙잡아서 외양간에 가둬 버렸다는 것이었다. 관리인은 소 한 마리에 30코페이카씩의 벌
금을 내든지, 아니면 이틀동안의 노동으로 배상하라고 요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여자들
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첫째 자기네 소들은 조금 들어갔을 뿐이고, 둘째 그만한 돈을 갖고
있지도 않으며, 셋째 일을 하기로 약속할 테니까,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뙤약볕에
처량하게 울고 있는 소만은 빨리 돌려 달라는 것이었다.
"내가 몇 번씩이나 당신들에게 똑똑히 일러 두지 않았냔 말이야." 벙글거리는 관리인은
마치 네플류도프에게 증인이나 되어 달라는 듯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점심때에 소를 끌
어 낼 때는 자기 가축을 잘 보라고."
"잠깐 애를 보러 간 사이에 소들이 나가 버린 거예요."
"소를 보는 사람이 그 곁을 떠나는 법이 어디 있어?"
"그럼, 어린 것은 누가 젓을 먹이고요? 당신의 젖꼭지라도 물려 주신다면 몰라도요."
"그것도 목장을 아주 망쳐 놨다면 몰라도 그저 잠깐 들어갔을 뿐이잖아요."하고 다른 여
자가 말했다.
"목장을 망쳐 놓았단 말입니다." 관리인은 네플류도프에게 말했다. "단단히 혼내지 않으면
건초는 만져 보지도 못합니다."
"그런 죄받을 소리 하지 마세요. 우리 집 소는 한번도 붙들린 일이 없지 않았어요?" 배가
부른 여자가 외쳤다.
"그래서 이번에 붙들리지 않았어? 그러니 벌금을 내든지, 일을 하라잖아?"
"좋아요. 일을 하겠어요. 그러니 소를 돌려주세요. 소를 굶길 수는 없잖아요." 여자는 독살
스럽게 외쳤다. "그렇잖아도 낮이나 밤이나 쉴 새라곤 없는데 말이야. 시어머니는 앓아 드러
누워 있지, 남편은 집에 붙어 있지 않지, 만사를 혼자 해가야 하니 정말 지쳐 버렸어. 게다
가 관리인은 일을 해서 갚으라고 들볶아 대니!"
네플류도프는 소를 돌려주라고 관리인에게 말하고 혼자서 다시 생각을 정리해 보려고 뜰
로 나갔으나 새삼스레 생각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 그에게는 모든 것이 너무나 명백
했기 때문에 이렇게 일목 요연한 것을 어째서 세상 사람들은 모르고 있었으며, 자기 자신도
그토록 오랫동안 모르고 있었는지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농민들은 굶주리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의 가난에 익숙해져서 거기에 알맞은 생활 태도
에 젖어 버렸다. 어린것들의 죽음과, 여자들의 과중한 노동, 모든 사람, 특히 노인들의 굶주
림 등. 이렇게 농민들은 죽음에 빠져들어가는데, 그들 자신은 그러한 무서운 상태를 알지도
못하고, 그것을 호소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우리들도 이 같은 상태를 자연스러운 것,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지금 그의 눈에는 모든 것이 대낮처럼 명백했다. 농민들 자신이
이미 깨닫고 있고 그들의 입으로 말하고 있듯이 그들이 가난한 중요한 원인은, 그들의 호구
지책이 되는 유일한 토지를 지주에게 빼앗기고 있다는 사실에 있었다.
더욱이 대부분의 어
린이와 노인이 죽어 가는 것은 우유가 부족하기 때문이며, 우유가 부족한 것은 가축을 기르
고 곡식이나 건초를 만들어 낼 만한 땅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농
민들이 불행하게 된 모든 원인은, 아니 적어도 그들 불행의 중요하고도 직접적인 원인은 그
들을 먹여 살리는 땅이 그들의 수중에 있지 않고, 이 토지에 대한 권리를 이용해서 이들 농
민들의 노동을 착취하고 있는 사람들의 수중에 있다는 데에 있었다.
이것 역시 지극히 명백
한 사실이었다. 농민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없으면 그들이 목숨을 부지
해 갈 수도 없는 그 토지는, 궁핍으로 쪼들리는 이들 농민들의 손으로 경작되고 있으나, 그
들이 거두어들인 곡물은 지주에 의해 외국으로 팔려가서 지주의 모자나 지팡이나 마차나 청
동 제품 같은 것으로 바꾸어진다. 이 모든 것이 명확한 사실이었다.
그것은 마치 울 안에 갇
힌 말이 발밑의 풀을 다 먹었을 때는, 다른 먹이가 있는 땅으로 자유로이 갈 수 있게 해주
지 않으면, 말은 점점 말라서 굶어 죽는 수밖에 없는 것과 똑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무서운 일이었다. 절대로 있을 수 없고, 또한 있어서도 안 될 일이었다. 이런 일이
없어지도록, 적어도 자기 자신은 이러한 일에 참여하지 않도록 적당한 방법을 강구하지 않
으면 안 되었다. 나는 반드시 그것을 찾아내겠다고 그는 가까운 곳에 있는 자작나무 길을
거닐면서 생각했다.
'우리들은 학회나 정부 기관이나 신문 지상에서 농민들의 빈곤의 원인
이나 생활의 진흥책을 논의해 왔지만, 그들의 생활을 올바르게 진흥시키는 유일한 방법, 즉
그들에게 꼭 있어야 하는 토지를 그들에게서 빼앗는 일을 중지하는 것에 대해서는 말이 없
었다.'
그는 헨리 조지의 근본 이념을 생생하게 상기하고 어째서 그런 것을 잊어버리고 있
었는지 스스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토지는 사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물이나 공기나
햇빛과 마찬가지로 매매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모든 사람은 토지에 대해서, 또 토지가 인간
에게 주는 온갖 이익에 대해서 평등한 권리를 갖고 있다.'
그 때 그는 비로소 쿠즈민스코예에서 개혁을 생각했을 때, 왜 자신이 수치심에 사로잡혔
는지, 그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은 토지에 대
한 권리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자기에 대해서는 그 권리를 인정하
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그러한 권리가 없다고 느끼면서도 일부분을 농민들에게 분배해
주었던 것이다.
그런 이제는 그러한 일을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 쿠즈민스코예에서 한 일을
변경하려고 마음먹고 계획을 세웠다. 그것은 농민들에게 일정한 금액을 정해서 토지를 빌려
주지만, 땅값을 그들의 재산으로 인정하여 그 돈을 세금의 지불이나 마을의 공공 사업에 쓰
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그것은 단일세 제도는 아니지만, 현재의 상황으로서는 그 제도에 가
장 가까운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토지의 사유권을 포기했다는 점이었다.
집으로 돌아오자 관리인의 무척 신이 나서 그에게 식사를 권했다. 자기 아내가 고깔 귀고
리를 단 계집애의 시중을 받아서 만든 요리가 너무 끓여졌거나 지나치게 구워지지 않았을까
걱정이라도 되는 듯한 얼굴이었다.
식탁은 값싼 식탁보로 덮여 있었으며 냅킨 대신 수놓은 수건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식탁
위에는 손잡이가 떨어져 나간 낡은 색슨 식의 사기 접시에 감자 수프가 담겨 있었다. 수프
속에는 조금 전까지도 검은 두 다리를 버둥거리던 수탉이 토막토막 잘리고, 또한 잘게 썰려
서 군데군데 털이 붙은 채 들어 있었다.
그 다음에는 역시 닭고기를 털째로 구운 것과, 버터
와 설탕이 듬뿍 든 우유과자가 나왔다. 어는 것이나 맛은 없었지만 네플류도프는 정신없이
후딱 먹어치웠다. 그는 말을에서 돌아올 때의 그 고민을 단숨에 해결해 버린 자기 사상에
완전히 정신이 빠져 있었다.
관리인의 아내는 귀고리를 단 계집애가 접시를 나르고 있는 동안 문에서 목을 쑥 빼고 들
여다보았다. 남편인 관리인은 아내의 솜씨를 은근히 자랑하는 듯 흐뭇한 얼굴이었다.
식사가 끝나자, 네플류도프는 반강제로 관리인을 앉힌 다음, 자기 생각을 확인하고 싶고
동시에 자기가 몰두하고 있는 일을 누구에겐가 말하고 싶은 심정에서 자기가 농민들에게 토
지를 분배해 줄 계획임을 말하고 그의 의견을 물어 보았다.
관리인은 자기도 벌써부터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었으며, 오늘 그런 말을 들으니 유쾌하다면서 웃고 있었지만, 사실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네플류도프의 설명이 애매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계획대
로 한다면 네플류도프가 남의 이익을 위해 자기의 이익을 포기하는 셈이 되겠기 때문이었
다.
사실 이 관리인의 의식 속에는 모든 사람들이 남의 이익을 희생시켜서라도 자기의 이익
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네플류도프가 토지에서 걷히는 전수입을 농
민의 공동 기금으로 하겠다고 말했을 때, 그는 왠지 납득이 가지 않는 점이 있었다.
"알았습니다."하고 그는 만면에 웃음을 띠며 말했다. "그러니까 그 자금에서 이자를 받으
시겠다는 말씀이지요?"
"아니, 그런 게 아니오. 토지라는 것은 개개인의 사유 재산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이해
못하겠소?"
"그러니까, 토지에서 나오는 것은 모두 여러 사람의 소유가 되는 것이오."
"그렇게 되면 나리에겐 수입이라는 것이 없어지지 않습니까?"하고 관리인은 웃음을 멈추
고 이렇게 물었다.
"그렇소. 나는 그것을 포기할 셈이오."
관리인은 한숨을 크게 쉬더니 다시 미소 지었다. 그는 네플류도프가 이성을 잃은 사람으
로 생각되었으며, 이제는 주인의 토지를 포기하려는 계획 속에서 자기의 이익을 도모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해 내려고 했다.
그래서 앞으로 분배될 토지를 자기도 이용할 수 있게
되도록 그 계획을 해석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한 것임을 알게 되자 낙심하여 그 계획에 대하여 흥미를 잃게 되었
다. 그는 주인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미소 짓고 있었다. 네플류도프는 관리인이
자기 계획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알자 그를 물러가게 했다. 그러고는 칼자국투성이이고
잉크 자국이 나 있는 책상 앞에 앉아 자기의 계획을 종이에다 쓰기 시작했다.
이제 막 싹터오르는 보리수나무 뒤로 해는 이미 기울어져 있었으며, 모기가 몰려와 네플
류도프를 쏘기 시작했다. 그가 초안 작성을 끝냈을 때, 마을 쪽으로부터 가축떼들의 울부짖
는 소리와 문을 여닫는 소리, 그리고 오늘밤 모임에 모여드는 농부들의 이야기 소리가 들려
왔다.
네플류도프는 관리인을 불러서 농부들을 사무실까지 불러올 필요가 없으며, 자기가마
을로 나가, 그들이 모이는 곳으로 가겠다고 말했다. 관리인이 권하는 차를 급히 들이마시고
네플류도프는 곧 마을로 향했다.
7
촌장 집 안뜰에 모인 농부들은 와글와글 떠들고 있었으나, 네플류도프가 가까이 가자 곧
조용해졌으며, 농부들은 쿠즈민스코예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차례로 모자를 벗기 시작했다.
이 고장의 농부들은 쿠즈민스코예의 농부들보다도 훨씬 더 비참했다. 계집애들과 아낙네들
은 귀고리를 달고 있었고, 남자들은 거의 짚신을 신고 있었으며, 집에서 짠 셔츠와 카프탄
(소매가 길고 띠가 달린 농민 의복)을 입고 있었다. 개중에는 일터에서 그대로 온 듯한, 셔
츠 바람에 맨발인 사람도 있었다.
네플류도프는 용기를 내어 말하기 시작했다. 먼저 농부들에게 토지를 분배해 줄 계획을
발표했다. 농부들은 말이 없었다. 그들의 얼굴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왜냐하면," 네플류도프는 얼굴을 붉히면서 말을 이었다. "토지라는 것은 거기서 일하는
않는 사람이 소유해서는 안 되며, 누구나 그 토지를 이용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
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사실 그래야 합니다."하고 몇몇 농부들이 말했다.
네플류도프는 이어서 토지에서 나오는 수입은 여러 사람들이 평등히 나누어 갖게 될 것이
며, 따라서 자기 토지를 받아서, 협정되는 지대를 지불하고, 그 지대는 공동 기금으로 납입
하여 그들 자신이 이용하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를 칭찬하며 좋아라고 하는 소리가
연방 들려왔다.
그러나 농부들의 정색한 얼굴은 더욱더 엄숙해져 주인을 보고 있던 눈들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마치 너의 교활한 속셈은 다 알고 있었으므로 너 같은 사람에게 속아넘
어갈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그렇더라도 우리는 너를 망신 주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네플류도프는 아주 명확하게 얘기했으므로 농부들도 알아들었을 텐데, 그들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또한 이해할 수도 없었다. 그 이유는 관리인이 오랫동안 이해하지 못했
던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들은 누구나 인간이란 자기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천성을 지니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주와의 관계는 그들이 몇 대에 걸친 지주에 대한 경
험에 의하여 잘 알고 있었다. 지주라고 하는 것은 항상 농부의 희생으로 하여 자기의 이익
만을 생각하는 존재였다.
그렇기 때문에 지주가 그들을 불러 모아서 무슨 새로운 제안을 하
게 되면 이전보다 더 교활한 방법으로 자기들을 속이려고 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하게 되었
다.
"자, 어떻소. 지대는 얼마로 하면 좋겠소?"하고 네플류도프가 물었다.
"어똫게 우리들이 정합니까? 우리는 그런 것은 할 수 없습니다. 토지는 주인님 것이니까
주인님 마음대로입죠."하고 군중 속에서 대답이 들렸다.
"아니, 그렇지 않소. 그 돈은 공동 기금으로 당신들 자신이 쓸 것이오."
"그럴 수는 없습니다. 공동의 것은 공동의 것이고, 이것은 이것대로 별개의 것입니다."
"자, 잘 들어 봐요." 네플류도프를 따라온 관리인이 사정을 설명할 셈으로 미소 지으며 말
했다. "공작님께서는 땅값을 결정해서 당신들에게 토지를 빌려 주시지만, 그 땅값은 또 당신
들의 공동 기금으로 조합에 넣어 주시겠다는 것이오."
"그것은 알고 있어요."하고 이가 빠진 노인이 눈을 내리깐 채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말하
자면 은행 같은 것이로군요. 기한 내에 지불해야 하는 것이겠지요. 그런 건 질색입니다. 그
렇잖아도 죽을 지경인데 그렇게 되면 우리는 알몸뚱이만 남게 되지요."
"그런 건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우린 예전 그대로가 좋습니다."하는 불안에 가득 찬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
네플류도프가 계약서를 만들어서 쌍방이 서명해야 한다고 하자 그들은 더욱더 기를 쓰며
반대하기 시작했다.
"무엇 때문에 서명을 합니까? 우리는 이제껏 일을 해온 대로 앞으로도 일 하겠습니다. 도
대체 그런 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우리는 무식한 사람들이에요. 그렇게 할 수 없습니
다. 아직까지 그런 말은 들어 본 적도 없습니다. 지금까지 해온 대로 해주세요. 다만 씨앗만
은 별도로 해주시면 좋겠어요."하는 말들이 들려왔다.
씨앗을 별도로 해달라는 것은 현재의 제도로는 소작인의 씨앗이 농민의 부담으로 되어 있
었는데, 이것을 지주가 부담하게 해달라는 것이다.
"그럼 당신네들은 싫단 말이오? 토지가 필요 없다는 말이오?" 네플류도프는 쾌활한 얼굴
에 다 떨어져 너덜거리는 옷을 입은, 맨발의 중년 농부를 향해 물었다. 그 사나이는 마치 상
관의 명령으로 모자를 벗듯이 왼손을 구부리고 자기의 찢어진 모자를 똑바로 들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군대 생활의 최면술에서 덜 깬 듯한 그 농부가 대답했다.
"그럼 당신들은 갖고 싶은 토지를 모두 가지고 있다는 말이오?"
"천만의 말씀입니다." 군인 출신의 이 농부는 다 떨어진 모자를 쓰고 싶은 사람이면 누구
에게나 가져가라는 듯이 모자를 앞으로 불쑥 내밀고는 짐짓 쾌활한 태도로 대답했다.
"그렇다면 내가 말한 것을 잘 생각해 봐요." 네플류도프는 기가 찬 듯한 어조로 말하고
다시 한 번 자기가 제안했던 문제를 되풀이해서 말했다.
"우리는 더 생각해 볼 것도 없습니다. 먼저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하고 침울하고 이가
빠진 노인이 화난 듯 투덜거렸다.
"내일 하루 종일 이 곳에 있을 테니까 생각이 달라지면 내게로 오시오."
농부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네플류도프는 아무 성과도 없이 사무실로 돌아왔다.
"공작님, 제가 참고로 말씀드립니다만,"하고 둘이 같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관리인이 말
을 꺼냈다. "그들과는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고집이 어지간해야죠. 그들은 집회에
나오기만 하면, 고집만 부리고 까딱도 않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모든 것을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농부들, 아까 반대하던 백발 노인이나 검은 얼굴의 사나이는 영리한 축들입
니다. 사무실에 왔을 때 차라도 대접하면......" 빙그레 웃으면서 관리인은 말을 계속했다. "말
도 잘할뿐더러 얼마나 영리한지, 솔로몬 왕쯤은 빰칠 정도입니다. 모든 것에 확고한 의견을
갖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일단 집회에 나오기만 하면, 전혀 사람이 달라져 가지고 똑같은 소
리만 되풀이하지요."
"그러면 이해력이 있는 농부를 서너 명 이리로 불러 줄 수 없겠소?"하고 네플류도프가 말
했다. "그들에게 내 계획을 상세히 밝히겠소."
"그거야 할 수 있지요." 관리인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럼 부탁이니, 내일 불러 주시오."
"어렵지 않습니다." 관리인은 이렇게 말하곤 더 즐겁게 다시 웃으며, "내일 불러오겠습니
다."하고 말했다.
"그놈 참, 굉장한 놈인데!" 생전 빗질 한번 하지 않은 듯 헝클어진 턱수염에다 검은 얼굴
을 한 농부가 배부른 암말을 타고 건들건들하면서 족쇄 소리도 요란스레 자기와 나란히 타
고 가는, 다 떨어진 카프탄을 입은 삐쩍 마른 늙은 농부에게 말했다.
두 농부는 밤이 되어 한길가의 풀을 말에게 뜯기러 가는 길이었는데, 때로는 지주의 영지
에 딸린 숲으로 말을 몰래 데리고 들어가기도 했다.
"땅을 거저 줄 테니 서명을 하라고? 이제껏 우리들을 속여먹고 아직도 모자라서...... 안 될
말이지. 이젠 우리도 모든 것을 판단할 줄 알게 되었단 말이야."하고 덧붙이고 뒤떨어져 따
라 오는 한 살 된 망아지를 불렀다. "코냐쉬! 코냐쉬!" 말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면서 소리쳤
다. 그러나 망아지는 뒤따라 오는 것이 아니라 옆길로 빠져서 목장 쪽으로 가버린 것 같았
다.
"망할 놈의 망아지 같으니! 또 지주네 목장으로 가버렸군." 턱수염이 덥수룩한 검은 머리
의 농부는 뒤떨어진 망아지가 축축이 이슬에 젖은 숲의 향기가 풍기는 풀밭 속에서 승아(여
귀과에 속하는 다년생 풀)를 부러뜨리면서 뛰어나오는 소리를 듣고 이렇게 말했다.
"이봐, 목장의 풀이 꽤 자랐는데. 노는 날 여자들을 데려다가 풀을 뽑아 주어야겠어."하고
다 낡은 카프탄을 입은 삐쩍 마른 농부가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낫을 버리겠는걸."
"서명을 하라고 하지만,"하고 털북숭이 농부는 지주가 말한 것에 대한 자기의 의견을 계
속 말했다. "서명이라도 하는 날엔 산 채로 잡아먹힐 테니까!"
"맞았어!"하고 늙은이 쪽이 대답했다.
그들은 그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딱딱한 길을 걷는 말발굽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8
집으로 돌아온 네플류도프는 자기 침실로 마련된 사무실에 이부자리가 두툼하게 깔려 있
는 것을 보았다. 털요 위에 베개 둘이 포개져 있었고, 정성들여 꽃무늬 수가 놓여졌고 풀이
빳빳한 두꺼운 2인용 새빨간 비단 이불이 놓여 있었다. 이것은 틀림없이 관리인의 아내가
시집올 때 가지고 온 것으로 보였다.
관리인은 점심 때 먹다 남은 음식을 가져다가 네플류
도프에게 권했으나, 그가 사양하자 변변치 않은 음식과 부족한 설비를 사과하면서 네플류도
프를 홀로 남겨 두고 나가 버렸다.
농부들의 거절은 조금도 네플류도프의 마음을 언짢게 하지 않았다. 반대로, 쿠즈민스코예
에서는 그의 제안을 고맙게 받아들였을지라도 이 곳에서는 불신과 적의까지 표시되었는데도
어쩐지 그는 마음이 침착하고 흐뭇하기만 했다. 사무실은 무덥고 더러웠다.
네플류도프는 밖
으로 나가서 정원으로 갈까 하다가 그 날 밤의 일, 하녀방의 그 창문과 뒷문의 계단에 생각
이 미치자, 죄스런 추억으로 더럽혀진 그 장소를 거닐기가 싫어졌다. 그는 다시 현관 계단에
걸터앉아서 새파란 자작나무의 어린 잎사귀의 짙은 향기와 따스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오랫
동안 어두워 가는 정원을 바라보기도 하며, 물방아 소리와 휘파람새의 울음소리, 그리고 계
단 바로 앞 숲속에서 단조롭게 울어 대는 이름 모를 새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관리인 방의 창문에는 불이 꺼졌다. 헛간 뒤의 동쪽에서 달빛이 환하게 비쳐왔다. 멀리서
번갯불이 밝아지더니 정원에 만발한 꽃들과 다 쓰러져 가는 집을 환히 비춰 주었다. 멀리서
천둥 소리가 들려오고 곧 하늘의 3분의 1이 검은 구름으로 뒤덮였다.
휘파람새와 다른 새들
도 울기를 멈추었다. 요란스러운 물방아 소리와 꽥꽥거리는 거위 소리가 들려오는가 하면,
관리인의 뜰과 마을에서 첫닭 우는 소리도 들려왔다. 닭이란 놈은 무덥고 천둥이 치는 날에
는 다른 날보다 일찍 울어 대는 법이지만, 닭이 일찍 우는 밤이면 즐거운 일이 생긴다는 속
담이 있다.
네플류도프에게는 즐겁다기보다 그 이상 가는 밤이었다. 즐겁고 행복한 밤이었
다. 그의 상상은 그에게 있어서 순진한 청년이었을 때 이 곳에서 지낸 행복했던 여름의 추
억을 일깨워 주었다. 그는 지금도 그 때와 똑같이 행복하다고 느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생
애 중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것을 상기했을 분만 아니라, 그가 열네 살
의 어린 소년이었을 때 진리를 계시해 달라고 하느님께 빌던 일과, 그보다 더 어렸을 때 어
머니의 곁을 떠나게 되면 자기는 좋은 사람이 되어서, 결코 어머니를 괴롭히지 않겠다고 어
머니 무릎 위에 엎드려 울던 시절의 자기와 지금의 자기가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느꼈다.
그리고 또한 니콜레니카 이르체테프와 함께 서로 도와서 언제나 선량한 생활을 하고, 모든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자고 맹세했던 시절의 자기로 되돌아간 듯한 생각이 들었다.
이제 그는 쿠즈민스코예에서 유혹에 사로잡혀 집과 삼림과 농장, 그리고 토지 등이 모두
아깝게 생각되었던 것을 상기하고, 지금도 그렇게 아까우냐고 자문해 보았다. 그러나 지금
은, 그 때 어째서 그런 아까운 생각이 들었을까 하고 이상하게 생각될 정도였다.
그는 오늘
모격한 것을 하나하나 되새겨 보았다. 남편이 지주인 네플류도프의 삼림에서 나무를 도벌했
다는 죄로 감옥에 갇혔기 때문에 남편도 없이 여러 아이들을 거느리고 고생하는 여자며, 자
기네와 같은 신분의 비천한 여자들은 주인 나리에게 몸을 파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아니 그런 이야기를 거리낌없이 내뱉고 있는 무서운 마트료나를 생각했다.
또 그는 아
이들에 대한 그 여자의 태도며, 어린애들을 육아원으로 보내는 방법이며, 먹지 못해 영양 실
조로 죽어 가고 있으면서도 차양이 없는 누더기 모자를 쓰고 연방 생글거리고만 있던 늙어
보이는 불쌍한 그 갓난애의 일 등을 상기하고, 또 힘겨운 노동에 지친 나머지 굶주린 자기
네 소를 잘 보지 못한 벌로 네플류도프를 위해 강제 노동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허약한
만삭의 여자를 떠올렸다.
그러자 느닷없이 감옥이며, 머리를 빡빡 깎은 머리며, 감방이며, 구
역질나는 아구치며 쇠사슬 등이 생각났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를 위시해서 도시에서 사는
귀족 계급들 전체의 지나치게 사치스러운 생활이 생각났다. 이 모든 것은 너무나도 분명하
고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다.
거의 보름달에 가까운 밝은 달이 헛간 뒤에서 떠올랐다. 검은 그림자가 뜰을 가리고, 무너
져 가는 집의 함석 지붕은 반짝반짝 빛났다.
그러자, 이 달빛을 그대로 놓쳐 버리기가 아쉬운 듯이 멎었던 휘파람새가 뜰 구석에서 다
시 지저귀기 시작했다.
네플류도프는 쿠즈민스코예에서의 자기 행동을 신중히 생각해 보며 앞으로 어떻게 할 것
인가에 대하여 해결하려 했을 때 무척 망설여졌고, 또 해결하지 못한 일과, 어떠한 문제에
대해서도 고려되어야 할 문제가 많다는 것을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그 문제를 자문 자답해
본 결과 모든 문제가 너무도 간단히 해결되는 데에는 스스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간
단해졌느냐 하면, 지금은 자기 한 몸이 앞으로 어떻게 되어 갈 것이냐 하는 문제를 생각하
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런 일에는 흥미가 없었으며, 다만 자기가 무엇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느냐 하는 문제만을 생각했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무엇이 자기에게 필요한가 하는 의문을 아무리 해결하려 해도 되지 않
았지만, 남을 위해서 무슨 일을 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만은 명확안 답이 나왔다.
이제 그는 토지를 이대로 계속해서 갖는다는 것은 좋지 않으므로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카추샤를 버리지 않음은 물론 그녀를 돕고 그녀에 대
한 자기의 죄를 보상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일이라도 서슴지 않겠다는 것을 똑똑히 알게 되
었다. 또한 다른 사람들과는 의견이 좀 다르다고 생각되는 재판과 형벌에 관한 모든 문제를
연구하고, 분석하고, 천명하고,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사실도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될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 밖의 모든 것을 반드시 해나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것만은 틀림없이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굳은 신념은 그를 기쁨에 넘치게 했다.
먹구름은 어느새 하늘을 뒤덮었고, 번개도 먼 곳에서가 아니라 바로 머리 위에서 번쩍이
며 넓은 뜰과 현관과 함께 낡아빠져 곧 허물어지게 된 집을 환히 비추었다. 천둥 소리가 머
리 위에서 들렸다. 새들이 우는 소리는 멎었으나, 그 대신 나뭇잎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고,
바람은 네플류도프가 앉아 있는 현관 계단까지 몰려와 그의 머리카락을 날렸다.
빗방울이
한 방울 두 방울씩 떨어지는가 싶더니 승아와 함석 지붕을 후두둑 때리기 시작했으며, 온
하늘이 번쩍 타오르자 만물은 숨을 죽였다. 네플류도프가 셋까지 세기도 전에 머리 바로 위
에서 무엇인지 찢어지는 듯한 요란한 소리가 나더니, 쿠르릉 하고 하늘을 굴리며 내달았다.
네플류도프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다, 그렇다.'하고 그는 생각했다. '우리 생활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 그 문제의 의
의를 나는 알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다. 왜 고모들은 살고 있었을까? 왜 니코레니카 이르
체네프는 죽고 나는 살아 있는 것일까? 왜 카추샤라는 여자가 태어났을까? 나는 왜 몹쓸
짓을 했을까? 왜 전쟁이 일어났을까?
그 후의 나의 방종한 생활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이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것, 즉 조물주의 섭리를 이해한다는 것은 나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
능한 일이다. 그러나 나의 양심에 새겨져 있는 조물주의 뜻을 실행하는 것은 내 힘으로 가
능하다. 나는 그것을 충분히 알고 있다. 그것을 하고 있을 때에는 나는 확실히 편안한 마음
임을 의심할 수 없다.)
비는 어느새 좍좍 퍼부어서, 지붕에서 홈통으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요란했다. 뜰과 저택을
비추는 번갯불이 뜸해졌다. 네플류도프는 방으로 돌아와 옷을 벗고 침대에 누웠으나, 더러운
벽지가 너덜거리고 있는 것을 보자 빈대가 있지 않을까 슬그머니 걱정이 되었다.
'그렇다, 나는 주인이 아니라 하인이라고 생각해야 한다.'하고 생각한 그는 자기 생각에
기쁨을 느꼈다. 그의 걱정은 들어맞았다. 촛불을 끄기가 무섭게 빈대가 물어뜯기 시작했다.
토지를 내 주고 시베리아로 간다면, 벼룩이랑 빈대랑 불결한 것이...... 그러나 견뎌야 한다
면 그런 것쯤 견뎌 보는 것이지.'
그러나 제아무리 각오를 했다 해도 빈대만은 견뎌낼 수가 없어서, 활짝 열린 창가에 걸터
앉아 흘러가는 비구름 속에서 또다시 얼굴을 내민 달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
9
네플류도프는 새벽녘에야 간신히 잠이 들었기 때문에 이튿날 늦게 눈을 떴다.
정오 때 관리인이 불러 온 7명의 농부가 사과밭으로 왔다. 관리인은 땅에 박은 말뚝 위에
테이블과 몇 개의 의자를 마련해 놓고 있었다. 농부들에게 모자를 쓰게 하고 걸상에 앉히기
까지 설득하는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군인 출신인 농부는 오늘 유달리 깨끗한 각반에
인피 짚신을 신고 있었는데, 장례식 때의 군대 예식대로 다 찢어진 자기 모자를 꼿꼿이 가
슴 앞에 받쳐들고 서 있었다. 그 중에 미켈란젤로가 그린 모세같이 생긴, 백발의 곱슬곱슬한
수염에 까맣게 그을린 이마 언저리에 백발이 성성한 위엄이 있고 어깨가 떡 벌어진 노인이
큼직한 모자를 쓰고 집에서 갓 지어 입은 소매가 낀 카프탄 자락을 여미면서 걸상에 앉자,
다른 농부들도 그의 뒤를 따라 의자에 앉았다.
다들 자리에 앉자 네플류도프는 그 맞은편에 앉아서 계획안의 요점이 적혀 있는 종이를
책상 위에 펼쳐 놓고, 팔꿈치를 괴고 그 내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농민들의 수가 적은 탓인지, 아니면 네플류도프 자신이 자기를 잊고 설명에만 열중한 탓
인지, 이번에는 조금도 불안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는 무심결에 곱슬곱슬한 흰 수염에 어깨
가 떡 벌어진 노인에게 남달리 주의를 주면서 그 노인의 찬부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 노인
에게 걸었던 네플류도프는 기대는 들어맞지 않았다.
풍채가 좋은 이 노인은 마치 찬성이라
도하는 듯이 이 존경할 만한 장로 풍의 아름다운 머리를 끄덕이기도 하고 또 다른 농부들이
반대하는 것을 듣고 얼굴을 찡그리면서 머리를 흔들기도 했지만, 실은 네플류도프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다만 다른 농부들이 네플류도프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다만 다른 농부들이 네플류도프의 말을 자기들의 말로 쉽게 말했을 때 비로소
알아듣는 것 같았다. 그보다도 이 장로연하는 노인과 나란히 앉아 있는 애꾸눈에 전혀 턱수
염이 없는 작은 노인 편이 훨씬 네플류도프의 이야기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누덕누덕
기운 남경무명 외투를 입고 있었으며, 헐어서 쭈그러진 장화를 신고 있었다. 그는 수염이 없
고 눈이 빛나는 노인이었는데, 네플류도프가 뒤에 안 일이지만 그는 난로 제조공이었다. 이
노인은 눈썹을 찡긋찡긋 쉴 새 없이 움직이면서 열심히 주의를 집중해서 듣고 있다가 네플
류도프가 한 말을 곧 자기들의 말로 옮겨서 설명하는 것이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해가 빨
랐던 또 한 사람은 흰 턱수염을 기로고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키가 크지 않고 통통한 노인
이었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네플류도프의 말을 냉소적인 농담조로 비꼬면서 자신의
영리함을 자랑했다.
그 군인 출신의 농부도 보아하니, 군대 생활로 인하여 우둔해지지만 않
았더라면, 또 무의미한 군대 용어를 남용해서 혼란만 일으키지 않았더라도 진작 이 문제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으리라 느껴졌다. 그 누구 보다도 가장 진지한 태도로 듣고 있던 사람
은 집에서 짠 베옷을 입고 새 짚신을 신은, 턱수염이 짧고, 코가 길고, 아주 낮고 굵직한 목
소리로 느릿느릿 이야기하는 키다리 사나이였다.
이 사나이는 모든 것을 잘 이해했으나 필
요할 때만 입을 열었다. 나머지 두 노인은 한 사람은 어제의 집회에서 네플류도프의 제안을
한사코 반대하던 이가 없는 노인이었고, 또 한 사람은 키가 후리후리하고 살갗이 희고, 가느
다란 다리에 각반을 치고 구두를 신은 호인 타입의 절름발이 노인이었는데 시종 주의 깊게
듣고만 있을 뿐 전혀 말이 없었다.
네플류도프는 먼저 토지 사유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설명했다.
"내 생각엔 토지란, 토지란 팔든지 사든지 해서는 안 되는 것이오. 왜냐하면 가령 토지를
팔아도 괜찮다고 한다면 돈 있는 사람이 쥐다 사 버릴 것이며, 토지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
람한테서 토지 사용권에 대하여 마음대로 돈을 받아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땅 위에 서 있기만 해도 돈을 받으려고 들 것입니다." 그는 스펜서의 이론을 이용해서 이렇
게 덧붙였다.
"그렇게 되면 할 수 없지. 몸에다 날개를 달고 날아다닐 수밖에 !" 흰 턱수염의 농부가 웃
으며 말했다.
"그건 사실이야."하고 코가 긴 노인이 굵직한 소리로 말했다.
"옳습니다." 군인 출신이 말했다.
"아낙네가 송아지에게 주려고 풀을 좀 뜯었다고 잡아가는 형편이니까." 사람이 좋아보이
는 절름발이 노인이 말했다.
"우릴 제멋대로 취급하거든요. 농노 시대보다 더 나쁘다니까요."
"나도 당신들과 같은 생각이오." 네플류도프가 말했다. "토지를 소유한다는 것은 죄악이라
고 생각하고 있소. 그래서 토지를 당신네들에게 내놓으려는 것이오."
"참 고마우신 말씀입니다." 미켈란젤로가 조각한 모세처럼 곱슬곱슬한 턱수염을 기른 장
로풍의 노인이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아마 네플류도프가 높은 이자율로 토지를 빌려주려
는 생각이 아닐까 하고 의심하는 눈치였다.
"그 때문에 내가 여기 온 것이오, 나는 이 이상 토지를 갖고 싶지 않소. 대체 어떻게 토지
를 처리해야 할는지 그 점을 지금 우리가 의논해야 하겠소."
"농민들에게 나누어주면 그뿐 아니겠습니까"하고 이가 빠진 성급한 노인이 말했다.
네플류도프는 그 말들 속에서 자기의 진지한 계획을 의심하고 있는 것을 느끼자 처음에는
다소 당황했다. 그러나 곧 마음을 가다듬어 자기가 말하려고 생각했던 것을 다음과 같이 설
명했다.
"물론 기꺼이 주겠소."하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누구에게 어떻게 줘야한단 말이오? 어떤
농민에게? 그 마을에 있는 당신들에게만 주고 제민스코예마을(빈약한 토지를 가진 이웃 마
을)에 있는 농민들에게는 주지 말란 말이오?"
모두 말이 없었다. 그런데 군인 출신만이 입을 열었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자, 그럼 ," 네플류도프는 말했다. "한 가지 묻겠는데, 만일 황제가 지주한테서 토지를 몰
수하여 농민들에게 나누어준다고 한다면... 당신들은 어떻게 하겠소?"
"그런 경우가 있을까요?" 노인이 물었다.
"그야, 황제가 그런 말을 할 리는 없겠으나 가정해서 말하는 것이오. 지주한테서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나누어준다면, 당신네들은 어떻게 하겠소?"
"어떻게 하겠느냐고? 인원수대로 농부이든 주인이든 똑같이 나누어 갖지요." 눈썹을 분주
히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난로 제조공이 말했다.
"별수 없지요. 머릿수대로 나누는 수밖에는."하고 하얀 각반을 두른 선량해 보이는 절름발
이 노인이 맞장구를 쳤다.
모두 그렇게 하면 불평이 없으리라고 이 의견에 찬성했다.
"인원수 대로라니, 어떻게 한다는 것이오?"하고 네흘류도프가 물었다. "하인한테도 나누어
주겠다는 것인가요?"
"그것은 안됩니다."하고 군인 출신인 사나이가 쾌활하고 용기 있는 체해 보이려고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분별있는 키 큰 농부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나누어준다면, 다 똑같이 주어야지요." 잠깐 생각하더니, 그는 낮고 굵직한 목소리로 이
렇게 말했다.
"그건 안됩니다."하고 미리 반박하려고 준비하고 있던 네플류도프가 말했다. "만약 다 똑
같이 나누어준다면, 자기가 경작하지 않는 사람들, 그러니까 지주라든가 하인이라든가 관
리, 서기, 그 밖의 도시의 모든 인간은 자기 몫으로 받은 것을 곧 부자들에게 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토지는 다시 지주에게 모이게 됩니다. 한편 자기에게 할당된 땅에서만 일하는
사람은 가족이 자꾸 늘어도, 토지가 모두 매점되어 있기 때문에 다시금 부자가 토지를 필요
로 하는 사람들을 손아귀에 넣어버리게 된단 말입니다."
"그렇습니다."하고 군인 출신 사내가 얼른 동의했다.
"토지는 팔지 못하게 하고 자기 손으로 농사를 짓는 사람에게만 나누어주면 되지 않겠습
니까?" 난로 제조공이 화난 듯이 군인 출신 사내의 말을 가로챘다.
이에 대하여 네플류도프는 자기를 위해서 농사짓는 사람과 남을 위해서 농사짓는 사람을
분간할 수 없다고 반대했다.
그 때, 키가 크고 분별 있게 생긴 노인이 조합을 만들어서 경작을 하면 어떻겠느냐고 제
안했다. 즉, 농사를 짓는 사람에게는 나누어주고, 짓지 않는 사람에게는 주지 않는 게 어떠
느냐고 굵은 목소리로 잘라 말했다.
이 공산주의적인 제안에 대해서도 네플류도프는 논증을 마련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모
두가 다같이 가래와 말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또 각자가 짠 사람에게 뒤떨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말과 가래와 탈곡기와 모든 농기구를 공유해야 하며, 또 그렇게 하
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이 합심해야한다고 말했다.
"우리네 농민들은 죽을 때까지 절대로 합심하지 못합니다."하고 빙충맞은 노인이 말했다.
"노상 싸움이 그칠 날이 없었으니까요."하고 흰 턱수염을 기른 노인이 눈웃음 치며 말했
다. "아낙네들은 서로 눈알을 뽑으려고 덤벼들 거예요."
"그리고 토질이 좋으니 나쁘니 다툴 테니, 땅을 어떻게 분배해야 할는지..." 네플류도프가
다시 말했다. "무엇을 기준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옥토를 주고, 어떤 사람에게는 진흙땅과
모래땅을 줄 것이냔 말이오?"
"다 골고루 나누어주면 되지 않습니까?"하고 난로 제조공이 말했다.
이에 대하여 네플류도프는 토지 분배 문제는 한 마을의 한 조합에 한한 것이 아니라, 여
러 현에 걸친 전체적인 것이라는 것과 만약 토지를 무상으로 나누어준다면, 어느 사람은
좋은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며, 어느 사람은 나쁜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인데 농부들은 누구
나 좋은 땅을 원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옳은 말씀입니다."하고 군인 출신이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잠자코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하고 네플류도프가 말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소. 헨리 조지라는 미국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이런 걸 생각해 냈소. 나는 그의 의견에 찬성하고 있소."
"나리가 주인이시니까, 나리께서 알맞게 나눠주면 되는 거죠. 누가 뭐래도 나리 생각대로
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빙충맞은 노인이 말했다.
네플류도프는 이 가로채는 말에 어리둥절했으나, 이 말에 대해 불만스러워하는 사람이 자
기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눈치채자 위로가 되었다.
"잠깐만, 셰묀 아저씨. 나리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어봅시다 그려." 분별있는 농부가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플류도프는 이 말에 용기를 얻어 헨리 조지의 단일세 안을 그들에게 설명해주었다.
"토지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을 시작했다.
"그렇습니다. 그 말씀이 옳아요." 몇 사람의 목소리가 대답했다.
"토지는 공동의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토지에 대해 평등할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
나 좋은 토지와 나쁜 토지가 있으므로 누구나 좋은 땅을 가지려고 합니다. 그러면 이것을
공평하게 나누어 가지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것은 좋은 토지를 사용하는 사람이 토
지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에게 각자의 토지에 해당되는 땅값만큼 지불하는 것입니다." 네플
류도프는 자신에게 설명하듯 말했다. "그러나 이런 경우, 누가누구에게 지불할 것인가 하는
것을 정하는 것이 제일 곤란한 일입니다. 그러나 돈을 모을 필요가 있으므로 토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제각기 토지에 해당하는 땅값을 공동비용으로 지불하도록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모두가 평등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 토지를 갖고 싶으면 좋은 토지에
대해서는 나보다 많이 지불하고, 나쁜 토지에 대해서는 그 만큼 적게 지불하면 되는 셈입니
다. 가지고 싶지 않은 사람은 한 푼도 내지 않아도 됩니다. 공동기금에 대해서는 토지를 사
용하는 사람이 대신 지불할 것이니까요."
"옳은 말씀입니다." 난로 제조공이 눈썹을 움직이며 말했다. "좋은 토지를 가진 사람이 더
내면 되거든."
"그 조지라는 사람은 정말 머리가 좋은데." 풍채가 좋은 곱슬곱슬한 턱수염을 한 노인이
말했다.
"다만 돈을 지불할 수 있다면 말이야."하고 키 큰 사나이가 일의 결말이 드러났다는 듯이
낮고 굵은 음성으로 말했다.
"그러니까 그 금액은 비싸지도 싸지도 않도록 정해야 되겠지요. 너무 비싸면 갚을 길이
없어서 도리어 선해가 날테고, 싸면 서로 사겠다고 할 테니까요. 그래서 내가 당신들에게 이
점을 해결해 드리려고 생각한 것입니다." 네플류도프가 말했다.
"그건 정당한 말씀입니다. 확실히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하고 농부들은 말했다.
"정말 머리가 좋은 사람이군." 어깨가 떡 벌어진 곱슬머리 노인이 되풀이했다. "조지란 사
람말일세.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을까?"
"그런데 저도 토지를 갖고 싶은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하고 관리인이 벙글거리면
서 말했다.
"빈 터가 있으면, 그걸 얻어 농사를 지을 수가 있지."하고 네플류도프가 대답했다.
"왜 당신이 땅이 필요하단 말이지? 그렇잖아도 배가 부를텐데."하고 눈웃음을 치는 노인
이 말했다.
이것으로 집회는 끝났다.
네플류도프는 자기의 제안을 다시 한 번 설명한 뒤 이번에도 직접적인 대답을 요구하지
않고 마을 전체의 사람들과 상의해서 확답을 보내달라고 말했다.
농부들은 마을의 여러 사람들과 상의해서 대답해 드리겠다고 말한 다음 인사를 하고 흥분
해서 돌아갔다. 그들이 돌아가는 한길가에서는 한참 동안 이야기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그
후에도 밤늦게까지 그들의 마을로부터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냇가를 건너 들려왔다.
이튿날 농부들은 일을 쉬고 주인이 제안한 문제를 협의했다. 마을은 두 파로 갈라졌다. 한
파는 주인의 제안이 유리하고 의심할 바 없다고 인정했으며, 다른 한 파는 그 속에 무슨 간
계가 숨겨져 있다고 하여 그것이 어떠한 간계인지 모르기 때문에 더 두렵다고 했다.
그러나 사흘째 되던 날, 주인이 제안한 조건을 모두 승인하는 데 합의를 보고, 농민 전체
의 결의를 보고하기 위하여 네플류도프를 찾아왔다. 이렇게 합의를 보게된 이면에는 어떤
노파의 설명이 많은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그 노파의 설명은 주인의 제안에는 조금도 의심
할 만한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가 영혼을 생각하게 되고, 이 영혼을 구제하기 위하여 이
런 행동을 하는 거라고 설명했던 것이다.
이것이 그들의 의구심을 일소해 주었다. 그리고 이
설명은 그가 파노보에 머물러 있을 때, 많은 돈을 적선했다는 사실로써 입증되었다.
네플류도프가 그 곳에 적선하게 된 것은 그가 여기서 농부들이 가난의 구렁텅이 속에 빠
져 있는 것을 처음으로 목격하자 그 빈곤함에 놀랐고, 처참한 사람들에게 돈을 주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돈을 내놓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지금 그의 수중에
는 작년에 쿠민즈스코예에서 판 산림의 대금과 농기구를 판 계약금까지 받았기 때문에 많은
돈이 들어와 있었다.
지주가 그에게 호소하는 사람들에게 돈을 준다는 소문이 퍼지자 많은 사람들, 특히 아낙
네들이 사방에서 몰려와 도와 달라고 청했다. 그는 이같은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무
엇을 기준으로 누구에게 얼마를 주어야 할 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도움을 청하는 가
난한 사람들에게 자기가 갖고 있는 많은 돈을 주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원하
는 대로 무턱대고 준다는 것은 무의미했다.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이
곳을 떠나는 길밖엔 없었다. 그래서 그는 즉시 이 방법을 실행에 옮기도록 했다.
파노보에서 묵던 마지막 날, 네플류도프는 안채로 들어가서 거기 남아 있는 물건들을 점
검했다. 거기에서 그는 고모가 쓰던, 사자의 머리에 청동 고리가 달린 낡은 마호가니 장롱
아래서랍 속에서 많은 편지를 발견했다. 그 중에서 여럿이 찍은 사진 한 장이 나왔다.
그것
은 소피야 이바노브나, 마리야 이바노브나, 대학생 때의 그 자신, 그리고 순진하고 쾌활하고
아름답고 또 삶의 기쁨이 넘쳐 흐르는 카츄샤가 찍힌 사진이었다. 이 집 안에 있는 모든 물
건 중에서, 네플류도프는 이 편지와 사진만을 가졌다.
그 나머지 물건들은 늘 벙글거리는 관
리인의 주선으로 파노보에 있는 그의 집과 가구 일체를 10분의 1이란 싼값으로 물방앗간 주
인에게 팔았다.
네플류도프는 지금 쿠즈민스코예에서 재산을 잃어버리는 데 대해 애석하게 여겼던 것을
생각하고 어째서 그런 마음을 품게 되었을까 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그는 끝없
는 해방된 듯한 기쁨과 신기할 만큼 쾌활한 기분이었다. 그것은 새로운 땅을 발견한 여행자
가 느끼는 그러한 종류의 감정이었다.
10
시골에서 돌아온 네플류도프는 도시의 거리가 유달리 새롭고 이상스럽게 느껴지는 데 놀
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저녁때 거리의 등불이 켜질 무렵, 정거장에서 집으로 돌아왓다.
방마다 아직도 나프탈렌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아그라페나 페트로브나와 코르네이는 모두
녹초가 되고 시무룩해져서 밖에 내걸거나 말려서 챙겨 둘 수밖에 없어 보이는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놓고 말다툼까지 했다.
네플류도프의 방은 쓰고 있지는 않았지만, 아직 정리도 되
어 있지 않고 트렁크가 흩어져 있어 방 안을 드나들기조차 거북했다.
네플류도프가 돌아왔다는 사실은 어딘지 모르게 묘한 힘이 이 집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
의 방해가 된 것이 분명했다. 농촌의 빈곤한 현실을 보고 온 네플류도프에게 있어서는, 자기
도 한때는 이 속에서 살아오긴 했으나, 이 모든 낭비가 지극히 불쾌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는 아그라페나 페트로브나에게 나중에 누이가 와서 집 안에 있는 모든 물건을 최종적으
로 처분해 줄 때까지 가구나 의류의 정리를 부탁하고는 이튿날 하숙으로 옮기기로 결심했
다.
네플류도프는 아침부터 집을 나와서 감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처음 눈에 띈 지저분
한 가구가 붙어 있는 두 칸짜리 검소한 아파트를 빌린 다음, 자가가 골라 놓은 짐들을 집에
서 우반하도록 일러 놓고 변호사 한테로 갔다.
밖은 제법 쌀쌀했다. 비가 온 뒤의 봄날씨에 흔히 있는 추위가 닥쳐 온 것이다. 살을 에는
듯한 바람이 불어와 얇은 외투를 입은 네플류도프의 몸을 얼게 했기 때문에 그는 걸음을 빨
리함으로써 몸을 녹이려 했다.
그의 기억 속에 시골 사람들의 모습이 되살아났다. 아낙네들, 어린아이들, 노인들, 또 그가
이번에 처음으로 본 빈곤과 고통, 특히 생글거리면서 말라빠진 다리를 흔들어 대던, 애늙은
이와 같이 보이던 갓난애의 모습이 뚜렷이 되살아났다.
그는 무의식중에 그러한 사람들과
도시 사람들을 비교해보았다. 푸줏간과 어물전과 기성복점을 지나가면서, 시골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말쑥한 옷차림에 기름기가 번질번질 흐르는 뚱뚱한 상인들의 모습을 보고 새삼
놀랐다. 분명 이들은 자기들의 상품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을 속이는 것이 절대로 잘못
이 아니며, 지극해 유익한 일이라고 확신하는 것 같았다.
뒷잔등에 단추를 단 옷을 입은 큼
직한 엉덩이의 마부, 모자에 금몰을 수놓은 문지기, 에이프런을 두르고 머리를 지진 하녀들,
특히 사륜마차에 앉아서 사람들 업신여기는 듯한 눈초리로 통행인들을 힐끔힐끔 바라보고
있는, 목덜미를 파랗게 밀어올린 마부도 뚱뚱해 보였다.
네플류도프는 이런 모든 사람들 속
에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토지를 빼앗기고 도회지의 생활 조건을 교묘히 이용하여 주인
행세를 하며 자기의 처지를 기뻐하는 자도 있었지만, 어떤 사람은 도회지에 나왔으나 시골
에 있을 때보다 더 비참한 처지에 빠져 버리기도 했다.
어느 지하실 창가에 구두장이가 일
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그 구두장이가 네플류도프에게는 바로 그러한 비참한 인간으로 여겨
졌다. 비누 냄새가 풍기는 김이 무럭무럭 나오는 열린 창문 앞에 서서, 말라빠진 두 팔을 드
러내고 다리미질을 하고 있는, 파리한 얼굴에 머리가 헝클어진 세탁부들도 그러한 종류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네플류도프가 도중에 만난, 맨발에다 헤어진 구두를 신고 머리에서 발
끝가지 페인트 투성이가 된 앞치마를 두른 두 사람의 페인트공들도 역시 그러했다. 이 두
사람은 팔꿈치가지 소매를 걷어올리고, 볕에 그을고 비쩍 마른 파리한 선으로 페인트 통을
나르면서 쉴 새 없이 서로 욕지거리를 하고 있었다. 모두 지치고 화난 표정들이었다. 먼지투
성이가 되어 짐마차 위에서 흔들리며 지나가는 새까만 얼굴의 마부 역시 그런 표정이었다.
길모퉁이에 서서 동냥을 하는, 남루한 옷을 입고 얼굴이 부석부석한 사내와 아이를 거느린
여자들도 모두 같은 표정이었다.
그런 얼굴은, 네플류도프가 옆을 지나가던 목로집이 열려져 있는 창 안에서도 볼 수 있었
다.
술병과 찻잔을 늘어놓은 지저분하고도 조그마한 탁자사이를 비틀거리면서 흰옷을 입은 급사
가 일을 하고 있었다. 땀이 배고 얼굴이 빨개진 손님들은 흐릿한 눈을 하고 앉아서, 떠들거
나 노래를 부르거나 했다. 창가에 앉아 있던 한 사나이가 눈썹을 치켜올리고 입술을 내밀더
니 마치 무엇을 생각이나 하는 듯이 앞을 멍청히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저자들은 이런 곳에 모여 있는 것일까?' 차가운 바람이 몰아치는 흙먼지와 더불
어
사방에 퍼진 방금 칠한 페인트의 시큼한 냄새며 고약한 기름 냄새를 무심결에 들이마시면서
네플류도프는 이런 생각을 했다.
어느 거리에서 무슨 쇠붙이를 운반하는 짐마차의 한 떼와 나란히 걷게 되자, 울퉁불퉁한
포장길에서 쇠붙이 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려 대는 바람에 그는 귀가 멍멍해지고 머리가 아팠
다.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 때 콧수염 끝을 뾰족하게 세운, 혈색이 좋은 한 군인의 모습
이 눈에 띄었다. 그는 고급마차를 타고 있었으며, 손을 흔들면서 유난히 이를 드러내고 싱글
벙글 웃고 있었다.
"네플류도프가 아닌가?"
네플류도프는 한순간 반가웠다.
"여, 센보크!" 네플류도프는 반가운 소리로 그를 맞았으나, 곧 반가워할 일이라곤 전혀 없
음을 깨달았다.
그는 오래 전 고모네 집에 들렀던 센보크였다. 네플류도프는 그 후 오랫동안 그를 만나지
못했으나 그가 빚을 많이 짊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대를 나와서도 기병으로 행세하고,
여전히 이럭저럭해서 부자들과 교제하고 있다는 소문은 듣고 있었다. 쾌활하고 만족스러운
듯한 그의 표정이 그 소문을 입증해 주고 있었다.
"자넬 만나서 정말 잘 됐네! 이 고장에서는 아는 사람이 없어서 말이야." 마차에서 내려
어깨를 펴면서 그는 말했다. "한데 자네도 꽤 늙었군 그래! 걸음걸이를 보고서 곧 자낸 줄
알았어. 어때 , 함께 식사라도 하지 않겠나? 이 곳에선 어딜 가면 좋은 걸 먹을 수 있나?"
"글세, 난 그럴 시간이 없겠는데..." 네플류도프는 친구의 감정이 상하지 않으면서 이 자리
를 벗어날 궁리를 하며 대답했다. "자네가 어떻게 이 곳까지 다 왔나?"하고 그는 물었다.
"좀 볼일이 생겨서. 후견인의 일일세. 나는 후견인이라네. 사마노프의 재산을 관리하고 있
어. 자네도 알고 있지, 그 부자 말이야. 그 작자는 바보지만, 5만 4천 정보나 가지고 있거
든." 그는 마치 자기가 그만한 토지를 장만해 놓기라도 한 듯 무척이나 으스대며 말했다.
"그런데 그의 재산이 엉망이라 말이야. 토지는 모두 농부들에게 빌려 줬는데, 놈들이 지대를
한푼도 물지 않아서 8만 루블 이상이나 체납되어 있었다네. 그래서 내가 1년 동안 전부 개
혁을 해서 70퍼센트의 수입을 올려 주었다네. 어떤가?" 그는 뽐내며 물었다.
센보크는 자기 재산을 전부 탕진해 버리고 도저히 갚을 수 없게 되자, 공교롭게도 어떤
사람의 특별한 주선으로, 재산을 낭비하고 있는 부자 노인의 후견인을 맡게 되어 , 아마 지
금도 그 후견인으로 있는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 하면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고 이자를 떼어 버릴 수 있을까?' 포마드를 바른 윗수
염에 혈색 좋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좋은 음식을 어디서 먹을 수 있느냐는 말과, 후견
일을 맡아보고 있다는 자랑을 친구에게 서슴없이 지껄여대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네플
류도프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자, 어디서 식사를 할까?"
"아나, 난 그럴 틈이 없네." 시계를 들여다보면서 네플류도프는 말했다.
"그럼, 오늘 저녁에 경마가 있는데... 자네 거기 가지 않겠나?"
"글쎄, 난 못 가겠네."
오게나! 내 말은 없지만, 그리신의 말을 몇마리 맡고 있어. 알지? 그 자의 훌륭한 말 말
이야. 꼭 오게나. 그리고 함께 저녁 식사라도 하세."
"저녁 식사도 어렵겠어."하고 네플류도프는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아니 왜 그러나? 지금 어딜 가는 거야? 뭣하면 태워다 주겠네."
"변호사한테 가는 길일세. 바로 저 모퉁이야."하고 네플류도프는 말했다.
"아 참, 자네, 감옥에서 무얼 한다면서? 죄수들의 후원자라도 된 건가? 코르차긴가의 사람
들에게서 들었네만."하고 센보크는 웃으며 말했다. "그 사람들도 벌써 떠나 버렸네. 대관절
어떻게 된거야? 이야기 좀 해주지 않겠나?"
"응, 그래, 그건 다 사실이야."하고 네플류도프는 대답했다. "하지만 길거리에서 할 순 없잖나."
"그도 그렇군, 자넨 원래 이상한 성격이었으니까. 그럼 경마에는 오겠지?"
"아니, 안 돼. 갈 틈도 없거니와 가고 싶지도 않네. 오해하진 말게."
"왜 오해를 하겠나. 그런데 자넨 어디서 유숙을 하고 있지?" 하고 묻더니, 갑자기 정색을
하며 눈을 한곳에 못박고 눈썹을 치켜 올렸다. 아마 무엇인가 생각을 찾아 더듬는 모양이었
다. 네플류도프는 그 얼굴에서 조금 전 목로집 창가에서 보고 깜짝 놀란, 눈썹을 치켜 뜨고
입술을 불쑥 내밀고 있던 사나이와 똑같은 무딘 표정을 발견했다.
"몹시 추운 날씨로군! 그렇잖나?"
"정말 그렇군."
"산 물건은 가지고 있지?" 센보크가 마부에게 물었다.
"자, 그럼 잘 가게. 자네를 만나서 정말 기쁘네." 센보크는 이렇게 말하면서 네플류도프의
손을 꼭 쥔 다음, 마차에 뛰어올랐다. 새로 산 하얀 양피 장갑을 낀 큼직한 손을 번들거리
는 얼굴 앞으로 흔들면서, 유난히 흰 이빨을 드러내 보이며 싱긋 웃었다.
'나도 전엔 저랬을까?' 변호사 집으로 발길을 옮기면서 네플류도프는 이렇게 생각했다. '
그렇다. 꼭 저렇지는 않았더라도 저렇게 되려고 했었지. 그리고 저렇게 한 평생을 보내려고
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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