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은(豹隱)
표범의 꿈
김인후(金麟厚, 1510~1560)
요순 세상 왔다지만 나는 아직 홑옷 신세
세상 사람 그 누가 이 내 몸을 알아주랴
이레 굶은 표범이 어찌 털 무늬 이룰 날 없을까
서린 용이 구름 타고 오를 때가 있으리라
生逢堯舜尙單衣(생봉요순상단의)
千萬何人表見知(천만하인표견지)
豹隱豈無成彩日(표은기무성채일)
龍蟠會有起雲時(용반회유기운시)
모든 사람이 요순시대라 입을 모아 칭송할지라도 내가 못살면 그게 무슨 소용
인가? 저 혼자 잘났다고 아무리 뻐겨봐야 남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무슨 소용 있
겠는가? 표범은 원래 성질이 깔끔하여 비가 오거나 안개가 끼면 7일 동안 굶을
지라도 굴에서 나오지 않는다. 털의 윤기를 잃을까 염려해서다. 이를 표은(豹隱)
이라 한다. 선비도 마찬가지다. 세상이 어지러워 티끌이 묻을 것 같으면 선비는 아
무리 못살아도 또한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은둔하여 자신의 몸과 이름을 보
전한다. 그리하여 때가 이르렀을 때 물에 잠겨 있던 용이 승천하듯 자신을 드러
내는 것이다. 김인후는 세상ㅇ르 잘못 만나 젊어서부터 반용(蟠龍)으로 살았지만,
학문과 인품으로 존경을 받았다.
[작가소개]
김인후[ 金麟厚 ]
시대 : 조선 초기 ~ 중기
출생-사망 : 1510. 7. 19. ~ 1560. 1. 16.
분야 : 서예
직업 : 문신, 서예가
조선 초기~중기에 활동한 문신이자 서예가이다. 자는 후지(厚之), 호는 하서(河西) 또는 담재(湛齋)이다. 본관은 울산이다. 시호는 문정(文靖)이었다가 후에 문정(文正)으로 고쳤다. 조부는 금구훈도(金溝訓導)를 지낸 김환(金丸)이고, 부친은 의릉참봉(義陵參奉)을 지낸 김령(金齡)이다. 모친은 옥천조씨(玉川趙氏)로 훈도 조적(趙勣)의 딸이다. 처는 여흥윤씨(驪興尹氏)로 현감 윤임형(尹任衡)의 딸이며, 윤씨와의 사이에 2남 4녀를 두었다.
1510년 전라도 장성현 대맥동(大麥洞)에서 태어났다. 31세 때인 1540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가 된 데 이어 이듬해 사가독서에 뽑혀 호당(湖堂)에 들어갔다. 승문원부정자를 시작으로 홍문관정자 · 홍문관저작 · 홍문관박사 겸 세자시강원설서 · 홍문관 부수찬 겸 경연검토관 등을 역임하였고, 옥과현감으로 있으면서 춘추관직을 겸하였다.
1544년 11월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즉위한 뒤, 이듬해 명나라 사신 장승헌이 국상 조문을 오자 제술관으로 임명되어 상경하였으나, 갑작스런 인종의 승하 소식을 듣고 벼슬을 그만 두어 6년 남짓한 짧은 관직 생활을 마감하였다. 1519년 전라감사로 부임한 김안국에게 『소학』을 배웠는데, 김안국이 김인후를 보고 '나의 작은 벗(吾小友)' 또는 '삼대상 인물(三代上人物)'이라고까지 찬탄하였다고 한다.
18세 때에는 기묘사화로 인해 동복(同福)에 귀양 와 있던 최산두(崔山斗)에게 나아가 학문을 닦았으며, 이어 광주에 돌아와 있던 박상(朴祥)을 찾아가 학문의 폭을 넓혔다. 성균관에 들어가서 이황 · 노수신과 함께 수학하였는데, 서로 지기가 맞아 깊은 친교를 나누었다. 1541년 사가독서에 뽑혀 호당에 올랐을 때 함께 공부한 13인과 더불어 수계를 맺었는데, 이황을 비롯하여 임형수(林亨秀) · 나세찬(羅世纘) 등과 더불어 이후에도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온 이후로는 송순(宋純)의 면앙정(俛仰亭)과 양산보(梁山甫)의 소쇄원(瀟灑園)을 출입하면서 호남의 명사들과 시가를 주고 받으며 폭넓은 교유를 가졌다.
저서로는 문집 『하서전집(河西全集)』(1802)과 한시를 우리말로 옮긴 『백련초해(百聯抄解)』가 있다. 그 외 『주역관상편(周易觀象篇)』과 『서명사천도(西銘事天圖)』를 저술한 것으로 연보에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연고지인 옥과와 순창에 각각 영귀서원(詠歸書院)과 화산사(華山祠)가 향사되었고, 출생지인 장성에는 필암서원(筆巖書院)이 건립되어 현재까지 배향되고 있다.
김구(金絿)의 뒤를 이어 명대(明代)의 초서풍을 수용한 명서가로서 '안진경(顔眞卿)과 유공권(柳公權)의 필법을 터득했다.'거나 '장필(張弼)의 글씨를 따랐다.'는 평가가 기록으로 남아있다. 초서에 있어서는 당시에 큰 파급을 몰고 왔던 장필의 서풍을 따른 것은 사실이나, 기타 해서 · 행서에 있어서는 왕희지 또는 위진고법(魏晉古法)을 추구했던 기묘제현의 서풍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음을 유작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안진경과 유공권의 필법을 터득했다는 평가는 김인후의 목판본 필적에서 제법 비후(肥厚)하게 보이는 필획의 일면을 형용한 것으로 짐작된다.
대표적인 필적으로 목판본으로 간행된 <초서천자문>이 전한다. 말미의 간기를 통해 1537년 4월 18일 석가탄신일에 둘째 아들을 가르치기 위해 초천자문을 직접 썼음을 알 수 있다. 목판본이기 때문에 운필(運筆)의 묘를 충분히 검토하기는 어려우나, 둥근 원세(圓勢)로 유려하게 돌아가는 운필과 과도하게 사선으로 내려 긋는 획법 등에서 회소(懷素)의 초서풍과 함께 명대 장필의 영향을 느낄 수 있다.
필암서원에 소장되어 있는 <하서유묵(河西遺墨)> 역시 명대 초서풍의 영향을 받은 듯 분방한 필획을 보인다. 다만 자형이 세로로 길쭉한 형태인데, 이러한 경향은 해서와 행서에서도 보이는 것으로, 김구 · 김정 · 김인후 등 기묘제현의 글씨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이밖에 해서로 쓴 <기묘제현첩서(己卯諸賢帖序)>는 보물 1198호로 지정된 《기묘제현수필(己卯諸賢手筆)》에 실려 있으며, 주희의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와 당시(唐詩) 등을 쓴 《하서필적(河西筆蹟)》과 《하서선생유묵(河西先生遺墨)》이 각각 규장각과 장서각에 목판본으로 전한다. 김구와 더불어 명대의 초서풍을 선구적으로 수용하여 16세기 조선 서예계에 개성적인 초서풍이 전개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주요 작품>
草書千字文(1537), 己卯諸賢帖序(1549), 河西遺墨, 河西先生遺墨, 河西筆蹟
[네이버 지식백과] 김인후 [金麟厚] (한국 역대 서화가 사전, 2011. 11.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