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12일 [연중 제6주간 월요일]
마르코 8,11-13
사랑은 믿으려는 의지만큼 자기를 드러낸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표징을 보여달라고 합니다.
이 말은 하느님은 사랑이 아니시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증거를 보여달라는 말은 상처요 모욕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그 본성상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눈빛부터 표징입니다.
문제는 사랑해보지 않으면 사랑을 알아볼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나의 사랑이 증가할수록 하느님 사랑을 볼 줄 알게 됩니다.
사랑에는 표징이 있는 게 아니라 수준만 있을 뿐입니다.
그 하는 사람의 수준과 받는 사람의 수준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완전하십니다.
사랑하려는 마음이 있으면 목동들처럼 천사를 보게 되고 동방박사들처럼 별을 보게 됩니다.
완전한 표징은 그다음에 인식 수준이 높아지면 볼 수 있게 됩니다.
바리사이들이 착한 뜻만 가졌다면 그리스도를 알아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착한 뜻이란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자신도 사랑으로 나아가려는 마음입니다.
다른 길을 가는 사람은 믿지 못하는 핑계를 증거가 없기 때문이라고 둘러댑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을 인식할 사랑이 그 안에 없기 때문입니다.
‘건축학 개론’(2012)에서 남자 주인공 승민은 자격지심이 있습니다.
자신과 호감을 느끼는 서연이 돈 많고 잘생긴 자기 과 선배를 좋아하고 그 선배에 비하면 자기는 개구리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이 자격지심의 상징은 그가 입고 있는 가짜 “GEUSS”(진짜: GUESS) 티셔츠입니다.
과 선배와 서연은 승민의 티셔츠를 보며 농담하고 웃습니다.
여기서부터 승민이는 여자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를 찾기 바쁩니다.
사실은 사랑하는 표징을 보여달라고 청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괜찮았다가 자기가 자격이 안 됨을 알고는 사랑한다면서 헤어질 준비에 착수합니다.
결국 서연과 과 선배와의 작은 신체접촉을 보고 오해하여 먼저 헤어지자고 말합니다.
그렇게 서연은 이유도 모르게 이별 통보를 받습니다.
15년 뒤 이혼녀가 된 서연은 결혼 준비 중인 승민의 건축사 사무실로 찾아옵니다.
자기 집을 지어주겠다던 승민의 약속이 떠올라서였습니다.
승민은 이미 결혼할 상대에게 서연이 “썅년”이었다고 말해놓은 터였습니다.
그런데 누가 더 나쁜 사람일까요? 사랑해 본 사람은 압니다.
사랑은 눈빛까지 믿겠다는 의지적 결단입니다. 사랑이 부족할수록 그 두려움에 믿지 못할 거리를 찾습니다.
스스로 자격이 없다고 여기며 믿지 못할 표징들을 찾는 마음을 가진 승민처럼 말입니다.
사랑할 자격은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요? 사랑해보면 그저 믿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을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만이 표징을 알아보게 됩니다.
사랑의 표징을 알아보지 못할 수 없습니다.
동방박사처럼 믿는 만큼 하느님은 더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사랑의 본성이 그렇습니다.
믿지 못하는 사람에게 자기 자신을 다 내어주는 사랑은 없습니다.
자신이 가진 사랑의 수준에 따라 순차적으로 내어줍니다.
그러니 사랑이신 하느님을 믿지 못하는 것은 표징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자격 없는 존재로
머물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에서 느껴지는 사랑의 표징보다 의심 거리를 먼저 찾습니다.
사랑할 자격은 사랑하려는 마음으로 얻어집니다. 그래서 구약에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준 것입니다.
사랑하겠다는 결단이 내려졌다면 이제 믿는 것밖에 남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점점 더 보여주십니다.
사랑은 믿기로 결단한 그 사람의 의지만큼 자신을 드러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2월12일 [연중 제6주간 월요일]
복음: 마르 8,11-13
낄끼빠빠, 낄 데 끼고 빠질 때 잘 빠집시다!
우르르 몰려다니던 젊은 시절, 다들 없이 살던 때였습니다.
식사나 술을 한잔 하고 나면, 서로의 얇은 지갑 상황을 고려해서, 십시일반 거두어 함께 내곤 했습니다.
그런데 가장 결정적으로 중요한 계산하는 순간, 귀신처럼 사라지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어디 아픈가? 무슨 사고라도 났나? 하고 걱정들이 많았는데, 상습범이 되고 나니 공공의 적이 되었습니다.
낄 때 껴야 하는데, 꼭 빠지는 전문이었기 때문입니다.
또다시 새해를 맞이했습니다.
살아온 나날을 뒤돌아보니 끔찍할 정도로 햇수가 차곡차곡 쌓였습니다.
병원이나 면사무소나 우체국에 가면, 아버님이라는 소리가 이제 낯설지 않습니다.
저희 가문 안에서도 부모님 떠나시고, 형이 떠나고 나니, 이제 저는 가계도 최상위 자리에 위치해 있습니다.
새해를 맞이하며 몇 가지 결심을 세우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이른바 낄끼빠빠입니다.
나이와 위치에 걸맞게 낄 데 끼고 빠질 때 빠지자는 것입니다.
반드시 끼어야 하는 순간은 어떤 때이며, 반드시 빠져야 할 순간은 어떤 때인지 늘 헤아려 가며 처신을 잘하자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게 될 때 노년의 삶은 추하고 비루해지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요즘 얼마나 자주 그런 모습을 목격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른바 낄빠빠낄입니다.
끼어야 할 때는 빠집니다.
그러나 빠져야 할 때 반드시 끼어서 손가락질 받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면, 대자연의 순환 논리를 자주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노년기는 육적인 삶에서 영적인 삶으로 건너가는 시기입니다.
시들고 쇠락하고 소멸되는 것을 자연스럽게 수용해야 하는 시기입니다.
결국 내려놓는 시기요, 사라지고 죽어가는 시기, 그러나 반대로 불멸의 희망을 지니는 시기입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처신이 참으로 각별하게 다가옵니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시비를 걸었습니다.
논쟁을 벌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시험해보려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자신의 전지전능하심과 능력의 손길을 절대 허투루 사용하는 분이 절대 아니십니다.
내가 이런 사람이야 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려고 기적을 행하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바리사이들의 미성숙하고 유치한 태도에 마음 깊이 탄식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 말씀을 뒤로 하고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을 버리두신 채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른바 빠져야 할 때 잘 빠지신 것입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엉뚱하고 몰상식한 바리사이들의 언행 앞에 크게 분노하며,
단 한발자국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논쟁을 거듭했을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언성이 높아지고, 소리 소리 지르게 되고, 나중에는 서로 멱살을 잡고 주먹다짐까지 하게 될 것입니다.
논쟁할 가치조차 없는 바리사이들과의 대화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확신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뒤로 한 채 신속히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떠나신 것입니다.
이른바 생활 속 거리두기, 관계 안에 완충 지대를 만드신 것입니다.
참으로 지혜로우신 예수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 삶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낄끼빠빠를 잘 하고 있습니까?
아무것도 아닌 일, 아닌 주제로 목숨걸고, 피 튀기며 싸우고 있지 않습니까?
그로 인해 그 좋던 관계 다 산산조각나고 있지는 않습니까?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2월12일 [연중 제6주간 월요일]
복음: 마르 8,11-13: 기적을 요구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
빵의 기적이 있고 난 뒤에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의 속을 떠보려고 한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12절). 예수님의 이 거절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마음의 회개와 더불어 사람들이 하느님께로 이르는 영적이고 내적인 변화의 기적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현세적인 물리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행위로 이스라엘을 억압하고 있는 로마를 정복하여 자신들이 타민족을 지배할 수 있는 현세적인 지상 왕국을 만들어내는 징표를 보이라는 것이다. 파라오 시대에는 원수에게서 해방되어야 했기에 그런 표징들이 일어나야 했지만(탈출 3-15장 참조), 하느님이신 그분께 다른 표징을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뜻은 그것과는 다른 것으로 인간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방법으로 세상의 구원을 향하여 가시고 계시는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것은 어리석음의 상징으로 보이는 십자가를 통해서였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과연 어떠한 기적을 하느님께 청하며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처럼 현세적인 부귀영화를 위하여 기도하면서 사는가? 아니면 나 자신의 내적인 회개와 쇄신을 통해 하느님께서 부르시고 열어놓으신 구원의 길을 찾고자 하는지? 즉 나 자신의 변화를 위해서 기도하고 살아가고 있는지 반성해 보자. 가장 큰 기적이란 바로 나 자신의 변화라는 것이다. 내가 변할 때 세상도 바뀔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어디서나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고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분에게 항상 감사와 찬미를 드릴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다. 삶이 없으면, 실천이 따르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일상생활을 통해 그분을 발견할 수 있는 나 자신이 되며, 하느님의 말씀을 살아가며, 하느님의 뜻을 행하고, 언제나 하느님 안에 살아가는 자 되도록, 그렇게 변화되는 기적을 늘 청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