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우리 속에 갇힌 영혼들 / 박소현
햇볕도 들지 않는 축축한 돼지우리 속, 온몸에 진흙을 뒤집어쓴 전라의 남자가 절규하고 있다. 파리떼와 벌레들이 우글거리는 이 더럽고 악취 나는 곳에서 차라리 돼지로 살겠다며 울부짖는 남자. 그에겐 인간의 존엄성이니 자유니 하는 말들은 한갓 사치에 불과하다.
“지난 30년 동안 난 내가 사람임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해 왔어. 내 존엄성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모든 상황들로부터 내 육체와 영혼을 지켜 내려고 노력해 왔다고. 난 이제 인간성을 버리겠어! 이제부터는 나도 여물통에 먹을 것을 넣어 줘. 저 돼지들하고 똑같이.”
고통에 일그러진 그의 처절한 몸부림에 객석에는 숨이 멎을 듯한 정적이 흐른다. 돼지들의 날카로운 비명과 악취 속에 코를 박고 살 수밖에 없는 파벨의 운명.
연극 〈돼지우리〉는 ‘남아프리카의 양심’으로 불리는 ‘아돌 후가드’의 희곡을 극단 미추 대표인 손진책의 연출로 우리나라에서 초연된 작품이다. 제2차세계대전 당시 소련군을 탈출해 41년간 돼지우리 속에 숨어 살았던 ‘파벨 이바노비치 나브로스키’의 실제 이야기를 모티프로 했다. 아돌 후가드는 인종차별과 부조리한 사회문제를 주제로 한 작품들로 남아공의 엄격한 검열과 탄압에 맞서 싸웠던 세계적인 극작가다.
제2차세계대전 당시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탈영을 한 소련군 병사 ‘파벨’은 총살을 피하기 위해 이 돼지우리에 숨어 살게 된다. 그의 아내 ‘프라스코비아’는 남편을 숨긴 채 전몰군인 미망인으로 위장해 살아가고 있다.
구역질나는 오물 냄새와 시끄러운 돼지울음이 뒤섞인 우리 속에서 바깥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아가는 파벨. 그의 뇌리 속에는 탈영을 하다 잡혀 재판도 없이 총살당한 한 병사의 최후가 깊게 각인되어 있다. 하얀 눈 위를 시뻘겋게 물들였던 그 피의 공포 때문에 파벨은 결코 이 돼지우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파벨이 돼지우리에서 갇혀 산 지 10년이 되던 해, 마을에서는 전몰장병 추모비 제막식이 열린다. 그날 자수를 결심한 파벨은 자신을 용서해 달라고 쓴 연설문 낭독을 끊임없이 연습한다. 하지만 나약하고 겁 많은 그는 분노한 마을 사람들이 탈영한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결국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 남편 대신 기념식에 참석해 파벨의 훈장을 받아 온 아내 프라스코비야는 당신은 죽어서 영웅이 됐다며 호들갑스럽게 훈장을 읽기 시작한다.
“파벨 이바노비치 나브로스키 민중의 영웅!”
전사한 전쟁 영웅으로 추앙받는 파벨과 전쟁미망인으로 살아가는 프라스코비야의 이 비밀스런 동거는 그렇게 41년 동안이나 계속된다.
파벨이 그 비참한 세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건 ‘두려움’ 때문이었다. 삶의 목적을 잃어버린 채 서서히 돼지우리에 적응해 가면서도 가끔씩은 혼란에 빠져 이상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 고립된 생활로 자유에 대한 갈망도 희미해져 간다. 잡히면 총살당할 거라는 극심한 불안과 공포가 이 더러운 돼지우리에 스스로를 가두게 한 것이다.
돼지우리에 갇혀 산 지 30년이 되던 해, 지옥 같은 돼지우리를 탈출하기 위해 파벨은 어릴 때의 아름다운 기억들을 떠올리려고 노력을 한다. 하지만 그의 잠재의식 속에 남아 있는 건 매번 시비를 걸어오던 덩치 큰 친구의 위협과 잔뜩 화가 난 채 허리띠를 손에 들고 자신을 쫓아오던 아버지를 피해 창고 속으로, 찬장 밑으로 숨어 다니던 어릴 적 모습뿐이다.
지난한 은둔생활에 육체와 영혼까지 지칠 대로 지쳐버린 파벨. 관객을 향한 그의 절규는 이 아수라 같은 돼지우리와 당신들이 사는 세상이 뭐가 다르냐고 묻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 인생이란 어쩜 끊임없이 두려움과 싸워야 하는 전쟁터일지도 모른다. 돈과 권력과 명예를 얻기 위해, 또는 조직에서 이탈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품위유지용 미사여구를 남발해야 하는 인간 군상들. 생존을 위협하는 이 모든 불안 때문에 우리는 보이지 않는 돼지우리에 자신을 가둬놓고 발버둥을 치고 있는 건 아닐까. 무탈했던 하루를 감사해 하며 그저 요행처럼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과 파벨의 삶은 장소만 다를 뿐 같은 모습일지도 모른다.
사실 작가인 아돌 후가드 자신도 ‘술’의 울타리에 갇혀 살았던 알콜 중독자였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작품을 못 쓸 것 같은 두려움에 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술에 취해 허리띠로 사정없이 자신을 때렸던 알콜중독자 아버지. 그로부터 당한 끔찍한 고통의 기억은 그 자신도 알콜중독자가 되게 했다고 한다.
돼지우리에서 생활한 지 41년이 되던 해, 파벨은 망상에 빠져 정신까지 혼미해진다.
“넌 비겁한 탈영병이야, 조국을 배신한…. 근데 기억이 나기나 해? 네가 뭐 때문에 조국과 민족을 배반했는지?”
꿈과 현실을 넘나들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미친 듯이 웃는 파벨.
“아니, 마지막 지푸라기 하나가 짐꾼 낙타의 등뼈를 부러뜨린다는 말도 있잖아!”
섬광처럼 스쳐간 이 말에 마지막 힘을 낸 파벨은 마침내 낙타의 등을 부러뜨릴 결단을 하게 된다. 그건 문을 열어 우리 속에 있던 돼지들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미칠 듯한 공포 속에서도 인간다운 삶을 갈구했던 자신도 그 지옥 같은 돼지우리에서 탈출하게 된다. 이렇게 뻔하고 간단한 것을, 41년 동안 자신을 지배했던 공포와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한 건 오로지 자신뿐이었던 것을….
영원처럼 멀게만 느껴졌던 자유 속으로 서서히, 서서히 걸어가는 파벨. 열린 문틈 사이로 새로운 날의 햇살이 희미하게 들어오고 있다*